델라웨어 한인축제

사람 사는 세상은 결국 하나님 나라로 가까이 가고 있음을 믿는다. 그게 내 믿음이다. 델라웨어, 이 곳에 산지도 제법 되었다. 잠깐인 듯 한데 그 세월 의 흐름 속에서 어느새 저물어가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이 동네 한인사회 종 노릇 흉내를 내던 때가 벌써 십 칠팔 년 전 일이다. 그 무렵만 하여도 “Korea”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거의 모든 모임들은 한인들 만의 잔치였다.

오늘, Delaware Art Museum에서 열린 추석맞이 제3회 연례 한인 문화 축제(The 3rd Annual Korean Cultural Festival)는 분명 변해가는 이 땅 한인 이민자들의 새로운 축제였다. 이젠  Korean Festival이 더는 한인들 만의 축제가 아니다. 이 땅을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이웃들과 더불어 한국을 알리는 축제의 장이다. 500명을 웃도는 참석자들 중 2/3는 한국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는 비한국계 였음이 그를 잘 그려준다.

이 행사를 잘 꾸려가는 이들을 통해 한인 이민자들의 새로운 모델을 본다. 교회도 아니고, 한인회도 아니고, 어떤 이익 단체도 아닌 새로운 모델이다.

이 행사를 잘 꾸며낸 이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Jin Twilley, Soojin Suh, Eunhwa Choi, Hyesun Kwak, Jinwoo Tak, Tim Kim, Youngmae Roca, Jinhee Yu – 참 고마운 이름들이다.

이 행사를 통해 뒤늦게 어설프지만 멋진 춤사위를 펼친 내 아내에게도 속 깊은 박수를 보낸다. 아내에게 춤을 가르쳐준 강은주 선생님과 한마디 부탁에 흔쾌히 장구채를 잡아주신 내 좋은 친구의 아내인 조성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이렇게 이 땅에서 먹고 살 수 있게 도와 주는 내 가게 손님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드린다. 우리에 대한 이해를 위해.

capture-20170930-185134남, 북이라는 수식어가 붙건 안 붙건 Korea라는 나라 이름이 미국인들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 왔습니다. 최근 몇 달 사이에 Korea에 대한 뉴스들이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과 나름의 지식이 맞다면, 잊어진 전쟁으로 알려진 한국전쟁(1950-1953) 이후 미국인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 이름이 이처럼 깊게 각인된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저는 미국인입니다.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한국에 대한 뉴스들을 보고 생각하는 제 자신에 대한 신분 규정입니다. 그러므로 똑 같은 한국에 대한 뉴스들을 보면서 남한에서 사는 사람들, 북한에서 사는 사람들과 제 생각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한국계 미국인이 아닌 대다수 미국인들과도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은 상황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 옳다 그르다고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과 느낌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국과 전쟁에 대한 지식입니다. 남북을 합친 한반도 전체 크기는 유타주와 엇비슷합니다. 그 작은 나라에서 역사 이래 기록에 남겨진 전쟁 회수가 천 번이 넘습니다. 한반도에 있었던 작은 나라들 끼리의 전쟁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큰 전쟁들은 이웃 중국, 일본, 몽고 등과의 싸움들이었습니다. 19세기 이후에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 미국과의 전쟁도 있었습니다. 모두 한반도 안에서 일어났던 싸움들입니다.

한국전쟁 때 그 한반도에서 싸우다 피 흘려 죽은 사람들의 국적은 정말 다양하답니다. 미국은 물론이거니와 중국, 캐나다, 콜럼비아,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남아공화국, 에티오피아,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베르그, 네덜란드, 터키 등입니다. 물론 그 전쟁에서 가장 많이 죽은 사람들은 남, 북 이라는 수식어 떼어낸 한국인들입니다.

이 주에 한국인들은 아주 큰 명절을 맞습니다. 추석이라고 부르는 한국인들의 추수감사절입니다. 북한, 남한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여러 나라에 이민자 또는 여행자로 사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아주 큰 명절입니다.

작게는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는 감사에서부터 과거의 조상들에 대한 감사, 현재를 사는 오늘의 모습에 대한 감사, 미래를 이어갈 다음 세대들에 대한 감사를 되새기는 큰 명절입니다. 모든 명절들에 사람들은 첫 뜻은 잊고 형식만 기억하고 살게 마련이지만, 올해 추석만은 너나없이 감사의 조건들을 꼽아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비단 한반도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전쟁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옛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도 감사가 넘쳐나는 시간들이 이어지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첨부 : 어제 Delaware Art Museum에서 한국의 명절 추석을 기리는 행사인 Delaware Korean Festival이 있었답니다. 주 상원의원인 Tom Carper를 비롯한 약 500명이 참석했답니다. 이 행사에서 제 아내인 Chong이 한국 전통 춤의 하나인 진도북춤을 추었답니다. 이 춤은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하루 하루의 기쁨과 감사를 그대로 들어내는 춤이랍니다. 아내가 춘 이 춤을 당신과 함께 합니다.

 

Whether with the prefix of South or North, the country name of Korea has drawn increasing attention by Americans. That’s because news about Korea has flooded the media for the last some months. If my memory and knowledge are correct, it may be the first time since the Korean War (1950-1953), aka the Forgotten War, when the name Korea was inscribed so deeply in Americans minds.

I am an American. Specifically, I am a Korean American. It is a definition of my nationality status, when I watch and think about the news about Korea. So, my thoughts about the news may not be the same as those of the people in South and North Korea. Of course, they may be different from the thoughts which most Americans may have regarding the news.

I’m not trying to judge which thoughts are right or wrong, but to say that people may have the same or different thoughts about the same situation.

It is what I know about Korea and the wars which Korea has experienced in history. The total area of the South and North Korea combined is similar to that of Utah. Though Korea is such a small country, it suffered more than a thousand wars which were recorded in history. There were many wars among the kingdoms within the Korean Peninsula. But most of the major wars were against neighboring countries, such as China, Japan, Mongolia, and so on. In the 19th century, there were wars with Russia, France, Germany and even America, before it fell to Japanese rule and became a colony. All of them happened with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Korean War, people from various countries lost their lives. They were soldiers from China, Canada, Columbia, Australia, New Zealand, the Philippines, Thailand, South Africa, Ethiopia, the United Kingdom, Belgium, France, Greece, Luxemburg, the Netherlands and Turkey, as well as America. Of course, a large majority of the war victims were Korean people of South and North.

I think that Korean people have suffered too much from far more than enough wars historically. I wish that war won’t break out in the Korean Peninsula ever again, no matter what. I wish that war will become an old story which we can hear or see only in museums, anywhere in the world.

Koreans will encounter one of the biggest folk holidays this week. It is Chuseok, which is equivalent to the Thanksgiving Day in America. Not just people in South and North Korea, but also most Koreans who are staying in other countries as immigrants or travelers will celebrate it.

On Chuseok, Koreans celebrate with gratitude for many things from the harvest of the year and their ancestors’ grace, to the present state of their lives and the next generation who will lead the future. So often, we’re likely to keep only the formality, without thinking about the original meaning of the traditional holidays. I hope that this year, every one of us will think about all the things for which we should be grateful.

I wish that you’ll have happy things to celebrate continuously this week and beyond.

From your cleaners.

PS: Yesterday, the Delaware Korean Festival, an event to celebrate Chuseok, was held at the Delaware Art Museum. About 500 people, including Senator Tom Carper, joined in the event. There, my wife Chong performed “Jindo Bukchum (drum dance),” one of the Korean traditional dances. This dance reflects gratitude and joys in everyday life. I would like to share the video with you.

지금, 우리는…

피해자는 너무나 많이 기억하는 반면에, 가해자는 너무나 적게 기억한다. –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오늘 동네에서 저와 같은 업종인 세탁업을 하는 이에게 들은 말입니다. 자기 가게에서 일하는 멕시칸들이 이번 주 목요일에 모두 일을 못하겠다고 했답니다. 7명의 멕시칸 종업원들이 모두 그 날 하루는 쉬겠다고 통보를 했다는 것이지요. 사연인즉 Wilmington시내에 있는 St Paul’s Church에서 이번 목요일에 열리는 트럼프의 이민자들에 대한 행정명령을 규탄하는 모임에 참석해야하기 때문이랍니다.

한인 커뮤니티에도 이런저런 걱정과 우려들이 떠도는 이즈음이지만, 사실 저처럼 촌에 살고 있거나 이 땅의 시민이 된지도 제법 시간이 흐른 사람들에겐 솔직히 무관한 일로 치부할 수도 있는 정황이었답니다. 그런데 트럼프의 광기가 이렇게 우리들의 생업에 가까이 다가온 것이지요. 실제 히스패닉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한인들은 걱정이 많다고들 합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동네 신문인 News Journal은 어제  Newark시에서 있었던 행사 하나를 제법 크게 소개했답니다. Newark시는 제 가게가 있는 곳이고, 행사는 트럼프의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시위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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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시위에 참석한 이들의 목소리를 이렇게 전하고 있답니다.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다양성이다. Diversity is what makes America great.”, “우리는 낯선 이들을 환영한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건, 우리는 그들을 위해 싸울 것이다. We welcome that stranger. We fight for that stranger, no matter where that stranger is from.”,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다. We are going to win this battle.”

트럼프 치하의 미국이 앓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한국계 시민으로서 멕시칸들을 비롯한 이민자들과 이 땅의 건강한 시민들과 손잡고  승리하는 대열에 함께 해야 할 때입니다.

설날, 애국가를 부르며

잊고 살다가 일년에 한 두차례라도 애국가와 미국가를 부를 수 있음은 모두 한인회 덕이다. 목청 높여 온 힘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사를 읊조리며 따라 부를지언정 그런 때이면 한인회에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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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년 저쪽 세월을 돌이켜보니 손에 잡힐 듯 한건만 강 건너 아스라히 저 편에 있다. 그 때만 하여도 한인회는 없었고, 다운타운에서 장사하는 한인들 중심으로 실업인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한인들을 조직해 나가는 때였다. 몇 해 후 각종 직능단체들이 생기고, 그를 터삼아 델라웨어 한인회가 발족하였다.

매해 한인들의 수도 늘어갔거니와 아직 인터넷 등이 출현하기 전이라 이민사회의 각종 정보 유통이 원활하지 않던 때여서 한인회 행사에는 제법 많은 한인들이 모이곤 하였다.

그 중 5월 메모리얼데이 한인 축제와 설날 전후로 열리는 새해맞이 잔치에는 삼 백여명이 넘는 한인들이 모여  함께하곤 했다. 매 행사마다 빠지지 않고 초대하는 단골손님들은 한국전 참전용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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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전 용사들이 점점 나이 들어 사라져 가면서 줄어드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행사에 참석하는 한인들의 수는 줄어갔다. 까닭을 찾자면 여러가지가 있겠다. 미국으로 오는 이민자들의 수가 이젠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는 사실에서부터 스마트폰 안에 차고 넘치는 정보들이 사람들이 마주할 기회를 앗아갔다는데에 이르기까지….

그럼에도 한인회를 붙들고 이어가고자 씨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꿈은 결코 큰 것이 아니다. 다만 ‘나’와 ‘우리’를 잊지 않고자 함이다.

오늘 저녁 그네들이 마련한 설날맞이 잔치에 가서 애국가와 미국가를 부르고 왔다. 아직은 정정한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함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인들의 권익신장과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이웃에게 알리고자 애쓰는 델라웨어 한인회 김광실회장을 비롯한 임원들 모두에게 속깊은 박수를 보낸다.

가을 – 일요일 아침

맨하탄에서 일어난 폭발사고 소식에 가슴이 철컹 내려앉는다. 우선 사고 지역과 딸아이 거주지역과의 거리를 따져보고, 아이에게 연락해 본다. 딸아이는 사고조차 모르고 있었다. 가슴을 쓸어 내리며 찬찬히 뉴스들을 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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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한 마음을 다스릴 겸 이른아침 동네 한바퀴를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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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체육공원 어귀 밤나무엔 밤들이 한가득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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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색으로 변해가는 풀밭에 핀 들꽃이 아침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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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공원 앞에 “Nip”이라고 불렸던 야구선수 James Henry Winters를 기리는 팻말이 서 있다. 오래전엔 야구도 흑인리그와 백인리그가 따로 있었단다. 흑인리그에서 명성을 떨치던 Nip은 은퇴후 결혼한 그의 아내  Sarah Smith 고향인 이 마을에서 정착해 평범한 일꾼이 되어 살다가 갔다고 한다.

사람사는 곳에 여전한 것은 흑백 갈등 뿐만이 아닐게다.

이 좋은 가을날 아침에 누군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것이고, 또 누군가는 아픔으로 가슴을 저미기도 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곳에서 평범한 일꾼으로 살며 계절을 한껏 느끼며 누리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어제, 오늘, 내일…

아내를 도와 델라웨어 한국학교 30주년 기록들을 모으고 있다. 이 곳 델라웨어에서 살아온지 꼭 서른해인지라 그저 내 지나온 기록을 더듬듯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이 기록들을 들추고 있는 까닭은 지난 서른 해를 돌아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제지 모를 내일을 내다보기 위함이다.

그러다 오늘 어느 분께서 참조하라며 보내주신 동영상을 보며, 멍하니 오랜 시간을 그저 앉아있었다.

월드투게더 에티오피아 어린이합창단이 부르는 노래 동영상이었는데, 나에겐 30년이 아니라 70년이 어른거렸던 까닭이다.

아니, 오늘과 내일이 어른거리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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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세계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단풍나무 숲이나 길게 뻗은 소나무 가지 밑으로 비를 피하게 되었을 때도 그 후미진 곳을 세밀하게 관찰한다면 그 잎사귀나 나무껍질 속, 혹은 발 아래의 버섯에서 새로운 놀라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리라.>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남긴 말에 귀를 기울이며 메모리얼데이 연휴 마지막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일년에 한번 애국가와 미국가를 불러보는 날입니다. 올해로 델라웨어 한인축제가 27년 째를 맞습니다. 모처럼 만난 동네 올드 타이머의 얼굴들을 보며 세월이 많이 흐른 것을 실감했습니다.

해마다 이 행사에 초청하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과 가족들 수는 이 행사의 주인들인 한인들 숫자 만큼이나 부쩍 줄었습니다.

때마침 공원 나들이를 나오신 종(種)을 알수없는 견공 연세가 올해 12살, 사람 나이로 치면 여든 넷이랍니다. 모두 세월 탓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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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행사를 위해 현악기를 연주해 주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가족이 끼인 악단도 있었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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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땜방을 마다치 않고 징채를 잡은 제 아내가 끼인 사물놀이도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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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손주사위가 드린 선물에 흐믓해 하시는 제 아버님의 생신이었습니다. 조카사위(아버님의 손주사위) 녀석이 건넨 선물 보따리에는 백세주도 담겨 있었답니다. 아버님의 백세, 채 십년도 안되어 맞을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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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는 델라웨어 한국학교가 봄학기 종강과 함께 개교 30주년 기념을 하는 조촐한 행사를 치루었답니다. 27년 째 이 학교 선생으로 지내온 아내가 교장으로 치룬 행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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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우리 부부도 올드 타이머가 되어 버섯 키우는 이끼 낀 나무가 되어가는 모양입니다. 아니 그냥 이끼가 되어 가는 줄도 모를 일입니다.

놀라운 세계란 딱히 숲속에 있는 것만도 아니거니와 무릇 멀리 있지 않은 듯 합니다.

가을 주일아침

Daylight savings time  해제로 간밤에 시간이 바뀌자 아침시간이 사뭇 길어졌습니다. 주일아침 습관으로 일어나 성서 한쪽 읽고, 뉴스 검색 좀 하다가 집안을 서성거려도 아내를 깨우기는 아직 이른 시간입니다. 밖은 이미 훤하지만 행여 모처럼 되찾은 한시간을 잠속에서 즐기려는 아내가 깰까봐 조심스레 집을 나섭니다. 평소처럼 왼쪽으로 꺽어 동네 한바퀴를 돌까하다가 오른쪽으로 꺽어 동네 밖으로 나서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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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앞에 작은 개천이 있습니다. White Clay Creek입니다. 봄이면 동네 낚시꾼들이 꼬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민물 송어를 낚기위해서지요. 봄 낚시철이면 주정부에서 낚시꾼들을 위해 송어를 방사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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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엔 실개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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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Halloween day였음을 알려주는 장식을 한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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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한 집과 이웃집 뒤뜰을 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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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전후에 이 동네에 새로운 마을들이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옛 집입니다. 지붕에는 파란 이끼가 가득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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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집 앞마당에 놓인 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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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앞에 선 고목에 경고문이 붙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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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개인소유이므로 여기서 사냥, 낚시, 덫 놓는 일 , 무단침입을 금한다는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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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길입니다. 동네 관광용 기차가 다닙니다. 이 동네에서 근 이십년 살면서 실제 기차를 본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아내는 아이들과 몇번 기차를 타본 적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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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시가지를 관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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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 너머 하얀 건물들은 버섯공장입니다. 녹색팻말은 동네 야구장 안내판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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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ckessin 시의 구시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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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교회당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 이 동네에서 제일 작은 교회당일겝니다. 동네에 있는 한인교회와 중국인교회에 비한다하여도 규모가 1/10, 1/20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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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ppey 교회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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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연혁입니다. African – American 교회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흑인교회지요. 미국내African – American 교회형성 과정과 Chippey 교회당의 연혁이 새겨져 있습니다. 현재 이 교회당 건물은 1972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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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당 옆에 쇠락한 건물이 몇 년째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때 동네 마을회관(community center)으로 쓰였던 곳입니다. 한인회에서 몇차례 노인잔치할 때 빌려 쓰기도 했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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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개천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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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독립기념일이면 불꽃놀이 축포를 쏘아 올리는 옛 체육공원입니다. 야구장과 football(미식축구)장이 있는 곳입니다. 보이는 축구꼴대 뒤로 크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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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새로생긴 축구(soccer)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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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규격 축구장 네곳이 붙어있습니다. 최근 미국 기호 스포츠로 급부상한 축구열기를 느낄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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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외길 다리입니다. 이쪽 차 한대 가면 저쪽 차 한대가 지나갈 수 있는 외길 다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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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길다리 아래 개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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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 핀 빨간 열매를 보며 옛날 앵두나 까마중 생각을 해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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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라도 있는 집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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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땐 입술 까맣게 까마중  따먹던 어린애였는데 어느새 손주 생각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주일아침이라고 부르던 시간인데….

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유난히도 푸르른 날이었습니다. 오늘 오후 제 일터에서 바라본 가을하늘이랍니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쳐다보다 떠오른 얼굴 하나있어 예전에 썻던 글하나 찾아 여기 올립니다.

10-23-15


 

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28년 중국 북경에서 세상을 마친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선생. 90여년 전 이 미국 땅에서 젊은 꿈을 펼쳤던 사나이의 자취는 유, 이민사(流,移民史)에 깊고 뚜렷한 자국을 남겨 놓았다. 이 땅에서 살다 갔거나 살고 있는, 앞서나간 겨레를 생각하고 되씹는 일은 오늘을 아둥바둥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힘을 주거니와 다음세대에게 꿈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선생의 삶을 정리해 본다.

박용만구한말 개화파의 일원으로 옥살이를 했던 선생은 그 곳에서 이승만을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옥에서 풀려난 선생은 얼마 후인 1904년 삼촌 박희병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도미후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던 선생은 1909년 네브라스카 커니에 있는 농장을 빌어 ‘한인 소년병 학교’를 세운다. 1912년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선생은 헤이스팅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참령군인이 된다.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안창호의 교육입국론에 비해 선생은 군사력으로 조국광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무장투쟁론을 내세운다. 이 ‘소년병학교’에 100여명의 한인 생도들이 있었을 만큼 선생의 꿈은 야무진 것이었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을 하거나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조국광복의 꿈을 키우며 군사훈련에 열중하던 이 소년병학교 출신들은 후에 조국광복과 광복후 조국건설에 중요한 몫들을 담당한다. 김려식, 백일규, 정한경등의 학자들과 구연성, 김용성, 김일신등의 의사들, 기업인으로 유명한 유한양행의 유일한등이 이 학교 출신들이다.

박용만선생은 무력투쟁을 앞세웠지만 문장력이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하던 ‘합성신문’의 주필,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 ‘신한국보’의 편집장을 지내며 그가 써낸 글들은 당시 한인사회의 정신적 길잡이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펴낸 저서 ‘군인수지(軍人須知)'(1911), ‘국민개병설'((1911), ‘아메리카 혁명'(1914)들은 시대를 앞서갔던 그의 흔적들이다.

선생은 소년병학교시절이나 후에 하와이에서의 ‘무관학교’시절 손수 편집한 한글교본을 가지고 한글교육에도 힘쓰셨던 교육자이었다. 실로 문(文)과 무(武)를 겸비(文武雙全)하셨던 분이셨다.

1912년 하와이로 건너가신 선생은 그곳의 신문편집을 담당하는 동시에 무관학교를 설립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 학교의 학생수가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실제 무장(武裝)까지 하였던 이 학교의 위세는 선생의 꿈을 이룰만한 밑둥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불행은 의형(義兄) 이승만이 하와이로 오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프린스톤에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잠시 한국에 갔다가 마땅히 할일을 찾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미국 본토에서 마땅한 자리가 없자 하와이의 박용만선생에게 자신을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한다. 하와이 국민회의는 이승만의 파벌조장 전력을 문제 삼아 그의 하와이행에 매우 부정적 견해를 표출하였으나 박선생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를 성사시키게 된다. 그러나 하와이로 온 이승만은 박선생과 협력하는 대신 이미 이 곳에서 탄탄한 자리를 잡고있던 의동생에 대한 경쟁심을 키우며 질투하기 시작한다.(kingsley K.가 쓴 책 ‘하와이의 한인과 교회’ 113쪽)

결국 정치력이 뛰어났던 이승만에게 선생은 밀려난다.  당시 상해에서 세워진 상해임시정부 초대 수반 선거에서도 신채호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에게 패하고 만다. 이후 현실의 승자 이승만에 의해 선생의 자취는 서서히 묻히고 만다.

타고나게 낙천적 성격이었던 선생은 하와이의 생활을 털고 중국으로 들어가 신채호, 신숙들과 더불어 ‘북경군사통일회’를 만들어 중국내에 흩어져 있던 전 한인 군사력을 통일하려는 노력을 해 본다. 그 당시 선생이 계획했던 <조국 무장해방 작전도>를 보면 그의 크고 절실했던 꿈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꿈을 키우던 1927년 10월 16일, 선생은 의문의 피살을 당하여 역사속으로 묻히고 만다.

1945년 해방이후 이승만의 집권으로 그에 대한 기록은 물론 그의 후손들까지 이런저런 핍박을 당하기까지 한 것이 우리 현대사의 한 모습이다. 김대중정권이 들어선 후 우성 박용만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그의 발자취를 새롭게 조명하는 기운이 일어난 것은 썩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우기 우리 마을 델라웨어에 그 분의 유일한 혈육인 장조카 박상원선생이 생존해 계셔서 우성선생의 자취를 가깝게 느낄 수 있음은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01. 3 .8.)


 

<후기>

우성의 장조카 박상원선생은 커네티컷으로 이주해 사시다가 몇해전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 이가 커네티컷에서 제게 전화를 주셨던 일은 이명박대통령이 당선되던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박상원선생이 하셨던 말씀이었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쥐XX 같은 놈이…. 참 내가 큰 아버지 생각해서도 차마 눈 못 감겠는데….도대체 어찌되어 가는 것인지…”

푸른 가을 하늘을 쳐다보다가 문득 떠오른 선생을 생각해보니 이즈음 박근혜 세상 소식을 모르고 가신게 더 편한 길이 아니였을까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