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기리며

아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찾아 온 까만 얼굴의 젊은 손님이 내게 물었다. “아내 분은 안계시나요?”. 잠시 자리를 비웠노라는 내 대답에 그녀는 가게 한 쪽에 붙여 있는 한국학교 안내문을 가리키며 함박 웃음을 담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한국학교에 등록했어요. 내일이 개학이거든요.”

며늘아이와 엇비슷한 나이쯤 되어 보이는 손님과 나눈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내가 말하길, “이젠 한국학교 등록 학생 가운데 반 수는 한국애들이 아니고, 어른들이라구! 희거나 까만 얼굴들 뿐만 아니라구. 이젠 정말 많이 달라졌다구. 한국에 대한 관심으로 또는 한국 드라마를 보려고 아님 케이 팝 들으려고 한국어를 배우는 여기 어른들이 등록한다니까!.”

삼십 수년 간 한국학교 선생 소리를 듣고 있는 아내가 자랑스레 늘어 놓는 수다였다.

이런 아내의 수다는 충분히 일리가 있고,들을 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한 세대만에 크게 바뀐 한국의 위상 덕일게다.

(지난 해 이래 내가 부끄러울 소식들만 전해오는 이즈음 한국 뉴스들은 잠시 잊을란다.)

아내가 자랑스러워 하는 델라웨어 한국학교의 큰 지원자였던 사람이자 내가 아는 한 델라웨어 한인 사회를 위해 가장 오랜 시간 넉넉하게 헌신했던 사람 이명식의 부음을 들은 것은 어제였다. 그리고 오늘 저녁 그의 가족 중 하나가 그의 페북을 통해 그의 마지막 소식을 올렸다.

서둘러 떠난 그를 추억하는 밤, 술 한 없이도 넘치던 흥과 늘 넉넉함… 이명식 그를 기리며.

* 몇 안 되는 동네 내 또래 중에 어느새 작별 인사를 건네는 친구들이…

** 헤어짐과 이어짐 모두 사람살이

*** 그가 섬기던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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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에

이제 그만 둘 만도 한데 아내는 지치지도 않는지 그 일을 여전히 즐기며 좋아한다. 만  31년 째 이어가는 델라웨어 한국학교 선생 일이다.

아내는 이즈음 성인반을 맡고 있다. 학생들은 이십 대에서 환갑에 이르는 나이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비한국계 미국인들과 부모 한 쪽이 한국계인 이들이다. 학생들은 K-pop이나 한국 드라마를 즐기고, 몇몇은 한국여행도 다녀왔다.

지난 일년 동안 팬데믹 영향으로 온라인 수업을 이어오다가 다음 학기부터는 대면 수업을 하게 되어 학생들이나 선생이나 이즈음 새로운 기대가 넘치는가 보다. 온라인 수업을 정리라도 하는 듯, 선생과 학생들이 서로의 재능들을 모아 아주 짧은 동영상을 만들었다.

각자 녹음한 파트별 음원을 모아 믹싱을 하고 수화자막도 만들고 그렇게 비록 지극히 어설프지만 나름 대단하게(?) 만들어낸 ‘어머니의 은혜’ 동영상이다.

감자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살아 온 서울 촌놈인 내가 감자를 심어 꽃을 보는 신기한 즐거움을 누리는 이즈음, 아내와 내가 여전히 즐기며 좋아하는 일들이 있고 그를 누릴 수 있음은 감사다.

그 감사의 바탕에 내가 미안하고 부끄러워야 마땅할 얼굴들을 지울 수 없다만.

그저 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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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내일…

아내를 도와 델라웨어 한국학교 30주년 기록들을 모으고 있다. 이 곳 델라웨어에서 살아온지 꼭 서른해인지라 그저 내 지나온 기록을 더듬듯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이 기록들을 들추고 있는 까닭은 지난 서른 해를 돌아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제지 모를 내일을 내다보기 위함이다.

그러다 오늘 어느 분께서 참조하라며 보내주신 동영상을 보며, 멍하니 오랜 시간을 그저 앉아있었다.

월드투게더 에티오피아 어린이합창단이 부르는 노래 동영상이었는데, 나에겐 30년이 아니라 70년이 어른거렸던 까닭이다.

아니, 오늘과 내일이 어른거리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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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세계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단풍나무 숲이나 길게 뻗은 소나무 가지 밑으로 비를 피하게 되었을 때도 그 후미진 곳을 세밀하게 관찰한다면 그 잎사귀나 나무껍질 속, 혹은 발 아래의 버섯에서 새로운 놀라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리라.>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남긴 말에 귀를 기울이며 메모리얼데이 연휴 마지막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일년에 한번 애국가와 미국가를 불러보는 날입니다. 올해로 델라웨어 한인축제가 27년 째를 맞습니다. 모처럼 만난 동네 올드 타이머의 얼굴들을 보며 세월이 많이 흐른 것을 실감했습니다.

해마다 이 행사에 초청하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과 가족들 수는 이 행사의 주인들인 한인들 숫자 만큼이나 부쩍 줄었습니다.

때마침 공원 나들이를 나오신 종(種)을 알수없는 견공 연세가 올해 12살, 사람 나이로 치면 여든 넷이랍니다. 모두 세월 탓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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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행사를 위해 현악기를 연주해 주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가족이 끼인 악단도 있었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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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땜방을 마다치 않고 징채를 잡은 제 아내가 끼인 사물놀이도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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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손주사위가 드린 선물에 흐믓해 하시는 제 아버님의 생신이었습니다. 조카사위(아버님의 손주사위) 녀석이 건넨 선물 보따리에는 백세주도 담겨 있었답니다. 아버님의 백세, 채 십년도 안되어 맞을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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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는 델라웨어 한국학교가 봄학기 종강과 함께 개교 30주년 기념을 하는 조촐한 행사를 치루었답니다. 27년 째 이 학교 선생으로 지내온 아내가 교장으로 치룬 행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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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우리 부부도 올드 타이머가 되어 버섯 키우는 이끼 낀 나무가 되어가는 모양입니다. 아니 그냥 이끼가 되어 가는 줄도 모를 일입니다.

놀라운 세계란 딱히 숲속에 있는 것만도 아니거니와 무릇 멀리 있지 않은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