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기리며

아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찾아 온 까만 얼굴의 젊은 손님이 내게 물었다. “아내 분은 안계시나요?”. 잠시 자리를 비웠노라는 내 대답에 그녀는 가게 한 쪽에 붙여 있는 한국학교 안내문을 가리키며 함박 웃음을 담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한국학교에 등록했어요. 내일이 개학이거든요.”

며늘아이와 엇비슷한 나이쯤 되어 보이는 손님과 나눈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내가 말하길, “이젠 한국학교 등록 학생 가운데 반 수는 한국애들이 아니고, 어른들이라구! 희거나 까만 얼굴들 뿐만 아니라구. 이젠 정말 많이 달라졌다구. 한국에 대한 관심으로 또는 한국 드라마를 보려고 아님 케이 팝 들으려고 한국어를 배우는 여기 어른들이 등록한다니까!.”

삼십 수년 간 한국학교 선생 소리를 듣고 있는 아내가 자랑스레 늘어 놓는 수다였다.

이런 아내의 수다는 충분히 일리가 있고,들을 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한 세대만에 크게 바뀐 한국의 위상 덕일게다.

(지난 해 이래 내가 부끄러울 소식들만 전해오는 이즈음 한국 뉴스들은 잠시 잊을란다.)

아내가 자랑스러워 하는 델라웨어 한국학교의 큰 지원자였던 사람이자 내가 아는 한 델라웨어 한인 사회를 위해 가장 오랜 시간 넉넉하게 헌신했던 사람 이명식의 부음을 들은 것은 어제였다. 그리고 오늘 저녁 그의 가족 중 하나가 그의 페북을 통해 그의 마지막 소식을 올렸다.

서둘러 떠난 그를 추억하는 밤, 술 한 없이도 넘치던 흥과 늘 넉넉함… 이명식 그를 기리며.

* 몇 안 되는 동네 내 또래 중에 어느새 작별 인사를 건네는 친구들이…

** 헤어짐과 이어짐 모두 사람살이

*** 그가 섬기던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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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

오늘 델라웨어 주지사는 지난 13개월 이래 가장 완화된 COVID-19 제한 규정을 발표하였다. 펜데믹 이후 바뀐 주민들의 생활들이 그 이전에 누리던 일상으로 많이 돌아갈 수 있을 만한 내용들이다.

오는 5월 21일 부터 적용될 변경 사항들로는 우선 6피트 거리두기 규정이 3피트로 줄고, 실내에서는 여전히 마스크 착용이 필수이지만, 야외에서는 백신 접종을 받은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단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식당을 비롯한 각종 상점들과 교회 모임에 있어 3피트 거리 두기 요건만 충족된다면 최대한 수용 가능하단다.

이는 백신 접종율이 늘어나고,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줄어들며, 날씨가 따듯해 지는 등 여러 조건들이 규정을 완화해도 좋을 만큼 나아졌기 때문이란다.

반가운 일이다.

어제 내 세탁소에 동네 보건소 직원들이 찾아와 포스터 한 장 가게에 부착해 달라며 두고 갔다. 내용인즉 동네 보건소에서 백신 접종을 하니 누구라도 예약없이 찾아와 맞을 수 있다는 홍보물이었다.

한달 사이에 참 많이 바뀌었다. 달포 전 내가 백신을 맞을 때만 하여도 신청을 하고, 수시로 확인을 하고 기다리고 하였는데, 이젠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접종을 받게 되었다. 이달 말 까지는 집단 면역이 이루어지는 전 주민 접종률 70%를 달성할 수도 있으리라는 전망 기사도 보았다.

그래도 아직은 좀 이르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따른다. 여전히 인구 백만명에 하루 확진자 수가 200명을 웃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 수는 현격히 줄었다고 한다.

제한된 일상을 제자리로 돌려 놓는 일처럼 좋은 일은 없다.

내 아이들과 가족들이 한 상에 둘러 앉아 본 지도 꽤 오래 되었다. 서두르지는 않을 일이지만 아이들을 위한 상을 준비하다. 아이들 상에 올릴 이제 막 자라는 푸성귀들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참 좋다.

이런 날은 반갑지 않은 손님인 딱다구리에게도 너그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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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살며 이따금 짜릿한 즐거움을 맛 보는 순간들이 있다. 가족들로 하여 그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때 그 맛은 극에 이른다.

오늘은 델라웨어 한국학교에서 학생들의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열린 날이다. 솔직히 내가 어떤 작은 관심도 기울이지 못한 행사이다. 아내가 한국학교 교사이고 며느리가 학생이긴 하지만 내가 관여할 어떤 틈도 없거니와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다. 오늘 낮에 아내가 보낸 카톡을 받기 직전까지는.

아내가 보낸 카톡엔 내 며늘아이가 대회에 참석해서 이야기를 펼친 녹음파일이 있었다. 듣고나서 아내에게 보낸 내 첫 응답은 아내를 나무라는 말이었다. ‘아니 좀 애 한테 쉬운 말을 쓰게 했어야지, 그렇게 어려운 말들을…’ 늘 그렇듯 내 나무람은 아내에게 닿지 않았다. 언제나 옳은 아내 대답이었다. ‘내가 며늘아이의 선생은 아니지, 그 반 선생님은 따로 계시지. 내가 뭐랄 처지가 아니잖아. 나도 오늘 처음 들었거든.’

저녁 나절에 아들녀석과 며느리가 전한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나는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며느리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에게 고맙고, 어눌한 한국말 구사력으로 제 아내를 도운 아들 녀석이 고맙고, 무엇보다 문장 하나 하나에 숫자를 매겨 외우고 또 외었을 며늘아이가 고마웠다.

그 무엇보다도 이젠 모두 떠나신 내 어머니와 장모와 장인까지 추억해 준 며늘아이에 대한 고마움이라니…

내 며늘아이 이름은 ‘론다야 김’.

<가족>- 론다야 김

  1. 가족은 저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2. 그래서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바로 가족입니다.
  3. 제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때마다, 가족들이 영어로 말하면서 저를 배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4. 가족들은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영어로 말한 것을 알려주십니다.
  5. 제 어머님은 한국어로 특정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주십니다.
  6. 제 아버님은 특정 요리에서 어떤 조미료가 가장 잘 맞는지 설명해 주십니다.
  7. 제 할아버지께서는 군대와 한국사에 대해 알려주시고 할머니들께서는 제가 잘 챙겨 먹었는지 묻곤 하셨습니다.
  8. 저는 그분들의 친절이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9. 그러나 저는 그분들에게 특정한 말을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0. 저는 가족과 저의 언어 장벽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가족이 말하는 모국어를 말하고 싶어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11.저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1. 몇 마디 말로 가족들 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2. 미래의 아이들과 언젠가는 한국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3. 저는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국어를 배웁니다.
  4. 감사합니다.

구호(口號)에

내가 사는 델라웨어 주는 몇 개의 별칭을 갖고 있다. ‘The First State’, ‘Diamond State’ 또는 ‘Small Wonder’ 등이다. 최초 13개 주들이 미국헌법에 서명을 할 때 델라웨어 대표가 제일 먼저 서명을 했다 해서 생긴 것이 ‘The First State’이고, 토마스 제퍼슨이 미국 동해안의 전략적 요충지가 바로 델라웨어라고 했다는 전설에 따라 전해온 말이 ‘Diamond State’이다. ‘Small Wonder’는 한 때 델라웨어 주가 슬러건으로 사용했던 것인데 미국에서 두 번 째로 작은 주이지만 살 만한 곳이라는 뜻이다. 한국의 충청북도 면적과 엇비슷하니 정말 작은 곳이다. 내 집에서 5분 거리면 펜실베니아 주경계를 넘고, 15분이면 뉴저지에 닿는다. 내 가게에서 5분이면 또 메릴랜드로 이어진다.

그리고 또 다른 별칭 하나가 ‘Dela Where?’이다.미국인들도 델라웨어라고 하면 어딘지 잘 모르거니와  ‘아니 그런 주가 다 있어?’ 할 정도로 그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는 뜻에서 생긴 말일게다. 그게 또 이 곳의 홍보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런 델라웨어주가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 뉴스의 생산지가 된 며칠 간이었다.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 때문이다.

이 곳 신문은 “첫 번 째 주에서 첫 번 째 대통령이 나오다”라는 제목의 들뜬 기사를 비롯하여 전 세계 유수한 신문들이 일면 머리기사로 장식한 바이든 대통령 당선 소식을 전하고 있다. 애석하게도 한국신문은 소개하지 되지 않아 좀 아쉬웠다. 최근 몇 년간 한국 관련뉴스를 종종 비중있게 다룬 것에 비해 그렇다는 말이다. 한국이라는 국가 위상 보다 한국언론은 아직 거기 쫓아가지 못하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참 다행이다. 바이든이 당선 되어서가 아니라,  생각보다 빨리 큰 혼란이 없을 정도로 제법 격차를 이루고 드러난 선거 결과 때문에 해보는 말이다.  선거 후 두 후보자들이 내세운 구호들로 하여 자칫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현재로선 판세가 완전히 기울어 조금은 차분히 선거 후유증을 가라앉힐 가능성이 열려 다행이다.

만일 Count Every Vote와 Stop the Count 라는 구호가 엇비슷한 힘으로 맞붙어 오랜 시간을 끌었다면 그 혼란은 가히 만만치 않았으리라는 걱정을 덜어 정말 다행이다.

가만 돌아보니 셀 수 없이 많은 구호의 시대를 살아왔다. 시대의 권력자들이 만든 구호들이거나 때론 군중들이 만든 구호들도 있었다. 멀리는 ‘반공통일’에서 부터  ‘때려잡자 김일성’, 독재 타도’, ‘선진 조국’ 가까이는 ‘United we stand’, ‘Occupy Wall Street’, ‘Yes we can’,  ‘America great again’ 등등.

구호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고 그 구호 아래 사람살이는 때론 진보하고 많은 경우 그 시대의 혹독한 시련이 되기도 한다.

편 갈음, 증오, 혐오의 언어보다 치유, 화해, 공감 등등의 언어를 내세운 바이든의 연설은 때에 맞는 듯하여 듣기 좋았다.

허나 트럼프라는 캐릭터와 그가 내세운 구호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살며 듣기 좋은 구호만 앞세우는 축들에게 등돌렸던 이들이었을게다.

문제는 누가 내세우는 구호이던 그 구호에 담긴 속내를 곱씹어 꿰뚫어 저항하거나 박수치는 시민들이 주인 되는 세상으로 나아가야하는 것일 게다.

이명박근혜 시대를 겪으며 한국사회가 진일보 했듯, 트럼프시대를 지낸 미국사회도 여러모로 진일보 하는 시대를 맞기를 바란다. 내 아이들을 위하여.

화창한 가을날, 한껏 부지런 떨며 하루해를 바삐 보내다.

일주일치 아침 양식 빵도 굽고, 내년 봄을 맞이할 준비로 튜립, 수선화, 아이리스, 무스카리, 히아신스 등 구근을 심고, 배추 절여 김치를 담그다.

김장 끝나면 어머니는 맛난 배추찜을 상에 올리곤 하셨다.

살며 이런 저런 흉내는 즐기지만 제대로 하는 것 하나 없는 내가 어머니에 이르면 벽이다. 그래도 그 덕에 흉내라도 낼 수 있다는 감사에 배추찜 하나로 아내와 넉넉한 저녁상을 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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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낮에 교회 담임목사께서 내 가게를 방문하였다. 그는 마스크 두 장을 우리 부부에게 건넸다. 마스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내에게서 들었다.

마스크는 서울시에서 뉴욕 영사관으로 보냈고, 영사관에서는 관할 지역내 각 한인회로 보냈단다. 내가 사는 델라웨어 한인회는 각 교회 등 지역내 한인 기관들을 통해 법적으로 규정된 노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란다.

그저 고맙고 뭔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영 가시질 않는다.

먼저 서울시와 시민들을 비롯해 우리 부부의 손에 닿기까지 마스크로 이어진 모든 손길들에게 드려야 할 마땅한 감사가 있다. 삼십 수 년 서울특별시민으로 산 적은 있다만, 그 보다 더 긴 세월을 떠나 산 사람이 받는 물건에 대한 감사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안함이 더욱 크다. 이즈음 전해지는 뉴스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감사에 대한 답과 미안함을 푸는 방안들을 생각해 본다. 서울시에 드리는 감사를 전하려고 서울시 홈페이지를 두루 둘러보며 저녁시간을 보냈다.

우선 마스크들은 내 아이들에게 주어야겠다. 아들 며느리, 딸 세 아이들에게 두 개를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생각 많은 저녁에.

걱정에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내가 사는 동네는 이른바 청정구역이었다. 미 동부 쪽에선 유이하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없는 주로 메인 주와 델라웨어 주를 꼽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오후에 받은 경보 뉴스,  ‘왔다! It’s here.’ 였다. 내가 사는 동네 델라웨어 주에 첫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가 나왔다는 뉴스였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뉴스가 우리 부부를 놀라게 한 것은 감염자의 신분이었다. 그가 50대 델라웨어 대학 교수였기 때문이었다.

내 세탁소는 바로 델라웨어 대학교 바로 코 앞에 있고, 내 가게 손님들의 주 고객들 중 많은 이들이 대학교와 연관된 이들이다.

우리 부부는 이런 저런 염려와 걱정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곧 이어진 뉴스는 델라웨어 대학이 오늘부터 봄방학을 앞당겨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작 반시간 정도 지났을까? 내 이웃 가게인  liquor store에 학생 아이들이 줄을 이어 술들을 사가고 있었다.

마침 세탁물을 찾으러 가게로 들어 선 경찰 하나가 한 말, ‘에고, 오늘 밤 애들이 저리 마시면 밤 근무 하는 이(경찰)들이 고생 많겠네!’

그리고 늦은 밤, 필라에 사는 벗이 전해 준 성철 선사의 말씀 하나.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걱정할거면   딱 두 가지만 걱정해라.   지금 아픈가?  안 아픈가?   안 아프면 걱정하지 말고, 아프면 두 가지만 걱정해라.   나을 병인가?  안 나을 병인가?   나을 병이면 걱정하지 말고, 안 나을 병이면  두 가지만 걱정해라.   죽을 병인가?  안 죽을 병인가?  안 죽을 병이면  걱정하지 말고 죽을 병이면  두가지만 걱정해라.  천국에 갈 거 같은가?  지옥에 갈 거 같은가?  천국에 갈 거 같으면  걱정하지 말고, 지옥에 갈 거 같으면 지옥 갈 사람이 무슨 걱정이냐?>

봉준호라는 이름으로 하여 고향생각에 젖어 보낸 한주간 생각을 내 가게 손님들과 함께 나누다. 내가 태어난 곳은 부모님의 피난지였던 부산이지만 그 곳에 대한 기억은 없다. 유년의 첫 기억부터 청년의 끝물까지 아련한 세월을 묻어 둔 곳은 신촌이다.

문득 따져보니 신촌 (새마을 , New Village)에서 보낸 세월보다 이 곳 델라웨어 Newark(새 방주, New Ark)에서 세탁소를 하며 지낸 시간들이 더 길어졌다. 그 생각 끝에 편지를 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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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가게 손님 몇 분들이 한국영화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셨답니다. 그 영화가 올해 4개의 오스카상을 탔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인들에게는 그 수상 소식이 매우 큰 뉴스였답니다.

영화나 아카데미 영화제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깊지 않은 제가 영화나 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랍니다.

그 영화 감독인 봉준호라는 이름 때문에 떠올린 제 고향 이야기를 드리려 한답니다.

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곳은 대한민국 서울시 신촌이라는 동네입니다. 지금은 시내 한복판이 되었지만,  제가 살 때만 하여도 서울 중심부에서 서쪽 외곽에 떨어져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신촌이라는 동네 이름의 뜻이 새마을이랍니다. 새로 생겨 도시와 시골 분위기가 함께 어우러진 동네였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야기들을 풀어 놓으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여서 제 블로그에  ‘신촌연가’(신촌을 그리워 하며 부르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연재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답니다. 벌써 십 수년이 지난 오래 전 일이랍니다.

연재의 마지막 글에 ‘봉준호’라는 이름으로 댓글이 달렸었답니다. “글을 인상깊게 잘 읽었다. 신촌에 대한 이야기들을 더 듣고 싶다. 당신이 살았던 때의 거리의 풍경, 많이 보던 나무들 등등….”이라는 글과 함께 그의 이메일 주소가 남겨 있었답니다.

저는 그 댓글을 남긴 봉준호라는 이가 영화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와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답니다. 제가 응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그 이름이 유명한 영화감독 이름인지도 몰랐거니와 알았다한들 역시 응답은 하지 않았을겝니다.

그렇게 지난 주 봉준호라는 이름을 들으며 다시 떠올리게 된 제 고향이랍니다. 이따금 아주 이따금 내 고향 신촌과 함께 떠오르는 얼굴들이 그리울 때가 있답니다. 언젠가 한 번은 가 봐야겠다는 생각 위로 한 해 한 해 세월의 숫자만 쌓여가고 있답니다.

따지고 보니 제가 신촌에서 산 세월보다 Newark에서 세탁소를 하며 보낸 시간들이 더 길답니다. 세탁소는 현재 진행형이고, 언젠간 은퇴할 것이고 이곳에서 노년을 보낼 계획이니 또 다른 고향이 Newark인 셈입니다.

신촌(새마을 , New Village)에서 Newark(새 방주, New Ark)까지의 내 삶을 추억하게 한 지난 주 다시 만난 봉준호라는 이름에 감사하며.

지난 일요일 아침 Newark 저수지 방죽길에서 찍은 내 제2의 고향 Newark 사진 몇 장 함께 나눕니다.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로 하여 새 힘이 솟는 시간들이 되시길 빌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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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week, some customers talked to me about the Korean movie, “Parasite.” That was because it won four Oscars this year. Of course, it was very big news to Korean people.

I don’t have much knowledge about movies and Academy Awards, and I’m not trying to talk about them.

The name of the director, Bong Joon-ho, reminded me of my hometown, and I’m going to talk about it.

The place where I spent my childhood and youth was Shinchon in Seoul, South Korea. Now it has become a part of the heart of the Seoul Metropolitan area, but when I lived there, it was like a village distant from the downtown of Seoul. The meaning of “Shinchon” is “new village.” As it was a newly developed village, it had the urban atmosphere alongside the countryside feeling.

If anyone starts to reel off a story about the hometown where he/she grew up, it would be endless. Like anybody else, I have lots of stories and memories about my hometown. I had posted a series of them at my blog site with the title, “Shinchon Yeon-ga (a song for missing Shinchon).” It was more than a decade ago.

At the last post of the series, a comment was written under the name of “Bong Joon-ho.” It said, “I read the series of your posts and was impressed. I’d like to hear more about Shinchon, such as scenes of trees, streets and so on when you lived there…” He also left his e-mail address.

I’m not sure whether the comment writer, “Bong Joon-ho,” and the director of the movie “Parasite” is the same person. That’s because I didn’t respond to the comment. At that time, I didn’t know that it was a famous director’s name. Even if I had known it, I would not have responded.

Like that, when I heard the name, “Bong Joon-ho,” last week, I recalled my hometown. Occasionally, really occasionally, I have missed faces sweeping across my memory along with my hometown. On the thought that I’d visit there sometime, the number of years has been heaping one by one.

After calculation, I realized that the years which I have spent in Newark running a cleaners are longer than ones which I spent in my hometown, “Shinchon.” Furthermore, I’m running a cleaners now, and I’ll retire sometime in the near future and spend the rest of my life here. So, Newark is definitely my second hometown.

Thanking the name, “Bong Joon-ho,” for prompting me to go on a trip down my memory lane from “Shinchon (New Village)” to “Newark (New Ark).”

I’m sharing with you some pictures of my second hometown, Newark, which I took at the causeway of the Newark Reservoir last Sunday morning.

I wish that you will be reinvigorated with thoughts of everything and everyone that you are missing.

From your cleaners.

흐르는 시간에

긴 한 주간이 지났다.

하루와 주간과 월, 년이 구분되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저 구분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연속 뿐이라면 삶이 얼마나 피곤할까? 게다가 오늘 밤은 시간이 바뀌는 날, 한 시간 더 잘 수 있다는 여유까지 누리는 이  순간으로 하여 그 긴 한 주간의 피로를 던다.

지난 일요일, 온 종일 내리는 가을비에 집에 갇혀 어머니 흉내를 내 볼 요량으로 녹두 빈대떡을 부쳤다. 녹두 빈대떡 몇 장 들고 부모님을 찾았는데 어머니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셨다. 맥없이 누워 계시던 양반이 나를 보더니 일어나 서랍 속 자잘한 물건들을 내어 미셨다.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이런 저런 패물 들에서 동전에 이르기까지 내게 내어 미시며 ‘이젠 정말 끝이다. 이건 다 내겐 필요없다. 니 딸에게 주렴.’

이튿날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 드렸다. 누나와 막내와 나는 번갈아 밤을 병원에서 보냈다. 그리고 어제 어머니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지금 당신께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맘껏 누리고 계시다. 이즈음 들어 부쩍 기복이 심하시지만 그래도 지극히 건강하신 아버지가 정말 고맙다.

주로 어머니를 보살피는 누나가 내게 건냈던 말이다. ‘얘! 어머니는 그저 니 얘기만 하신다. 어쩜 그렇게 아들 뿐이시다니?.’ 엊저녁 내가 한 대답. ‘그려 그게 내겐 또 벽이라우!’

그리고 오늘, 양로 시설에 계시는 장인의 생신. 아내와 내 아들 며느리 정성 덕인지 장인 어른 최근 들어 최고조로 몸과 맘이 지극히 정상이셨다. 웃고 울고 모처럼 한 순간 장인이 살아 있던 순간이었다.

델라웨어 한인 침례교회 이홍 목사 기도빨이 생각보다 쎈게 아닐지? 우리 부부가 이목사님 내외를 비롯한 그 교회 교인들에게 진 빚이 정말 크다.

솔직히 나는 예수쟁이지만 교인은 아닌데… 이럴 때 내 미안함이 정말 크다.

툭하면 빼먹지만 그래도 한국학교에 등록해 한글을 배우고 있는 며늘 아이가 쓴 카드를 보다가 얻는 기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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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되어 있던 아내와 내 건강 진단까지 겹쳐 몹시도 길고 길었던 한 주간을 보내며.

그래 또 사는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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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걷기

길을 따라 길을 걷다.

이즈음 틈나면 걷는 길 위에서 얻는 즐거움이 크다. 크다 하지만 뭐 행복 운운할 만큼 대단하지는  않거니와 삶의 뜻을 따질 만큼 깊지도 않다. 그래도 그 즐거움은 여전히 크다. Middle Run Valley 숲길은 그저 길을 따라 걸으며 얻는 즐거움이 아주 크다.

풀숲을 헤집고 걷는 길은 문득 신촌 안산 숲길에 가 닿기도 하고, 아름드리나무들 사이로 스민 오월 햇살에 홀리다 내 스무살 언저리 무주구천동에 이르기도 한다.

즐거움은 그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부부가 노인들 식당이라고 부르던 Perkins Restaurant 가까이에 이런 깊은 숲길에 있다는 점이다. 올들어 아내와 내가 아침식사를 가장 많이 하는 곳, 바로 Perkins Restaurant이다. 집과 가게를 오가는 길 한 가운데 있는 숲길이다.

한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하루 길 넘는 먼 여행은 나설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동네 길을 찾아 걷기 시작한 일인데 그 즐거움이 여간하지 않다.

내 생각과 다르게 일상화 된 삶 역시 살만한 것이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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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산악용 자전거를 타고 길을 달리는 이들과 반려견과 함께 뛰는 젊은이를 만나기도 하고, 옛풍습을 따라 사는 Amish 마을 처자나  늙어가는 남편이 불안한지 잔소리를 이어가는 내 또래일 마나님과 그들 부부의 길을 안내하는 반려견을 만나기도 하며…

연휴에 느긋한 마음이 되어, 길안내 표지를 쳐다보지 않고 그저 길을 따라 숲길을 걸었다.

 

변화에

1.

얼마 전 우리 마을 한인회 봉사하는 이들에게서 부탁 메일을 받았다. 그들의 부탁이란 한인회 회칙을 새로 정비해 개정하려 하는데 검토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인회 일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 영어가 주언어인 관계로 영문본을 먼저 만들었고, 그를 번역해  한글본을 만들려고 하는데 특히 그 부분에 대한 검토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짧은 시간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이십 여 년 전 내가 한인회 봉사를 할 때 가장 큰 일 가운데 하나는 한글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이젠 그게 바뀐 것이다. 그렇게 한인 사회가 바뀐 것일 게다. 그 바뀜이 참 좋다.

나는 그 부탁에 감사하다는 말을 붙여 거의 내 의견을 덧붙이지 않은 응답으로 대신했다. 솔직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기까지 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견하다고 말할 만큼 늙지는 않았고, 그들과 함께 할 만큼 젊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란 박수 치며 말없이 쫓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2.

가게 이전이 코 앞에 다가오자 노 부모님들이 목사님 모시고 개업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신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거창하게 기복(祈福) 의식에 대한 거부를 내세울 일도 아니었다. 남들은 은퇴를 하는 나이에 가게 옮긴다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이 남사스럽기도 하거니와 솔직히 의식에 대한 내 심한 거부증도 한 몫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네들에 대한 미안함은 끝내 가시질 않았다.

그러다 손님 몇 몇이 농으로 우리 부부에게 던진 말, ‘새 장소로 가는데 잔치 안 해?라는 말’이 꽂혀 진담으로 받았다.

하여 가게 손님들 몇 몇에게 조촐히 신장개업 잔치 자리를 열면 오겠느냐고 물었더니  좋다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한국음식 몇 가지 차려 놓고 단골 손님들 몇 십 명 초대해 잔치를 하겠노라는 말에 노 부모님들 얼굴 환해 지셨다.

변화가 두루 모든 이들에게 맞는 일이란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