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덕담에

평생 동남아 선교 사역을 이어 오신 아니 지금도 이어 가고 계신 허춘중 목사님께서 제 가족 사진을 보시곤 덕담 한마디를 얹혀 주셨다. ‘두 분 옛날 70년대 모습이 있군요.’라고.

내가 그리 살지 못한 탓 때문일 터이지만, 젊었을 때 잠시라도 함께 했던 이들이 오롯이 한길, 외길을 변치 않고 걸어가며 늙어가는 모습을 보거나 듣노라면 그저 존경의 맘이 앞서곤 한다.

그이가 말한 ‘70년대’라는 말에 꽂혀 오늘 뜰 일을 하는 내내 내 스물 무렵이었던 70년대를 생각하며 잡초를 뽑고 꽃을 심었다. 신촌과 종로 5가, 서소문 거리과 골목을 헤매면서.

1970년대와 오늘 2020년대, 참 많이 변했다.

그 무엇보다 내 자신이 엄청 많이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그나마 푸르고 맑았던 우리 내외의 70년대 모습을 기억해 주시는 허목사님께 감사를.

70년대나 칠십 대 나이 오늘이나 <세상엔 사랑이 가득한 것 같지만 우린 여전히 외롭고 허전합니다.>, <사랑, 친절, 섬김의 본질과 순수성을 잃어버>린 현실 속에서 늘 깨어 살아가야 한다고 깨우쳐 주시는 호주의 홍길복 목사님.

세상 모든 것 다 변해도 <바닥이 하늘인 세상>에 대한 믿음은 변치 않을 것이라고 오늘도 외치고 사는 내 참 벗, 대전 대화동의 김규복목사님.

필라델피아에서 80년 광주를 알리기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월호 가족, 이태원 가족들과 이 땅의 이민자들을 생각하며 사람사랑, 이웃사랑을 외치며 사는 김경지선생을 비롯한 오늘 이 땅의 내 친구들.

어느덧 우리 세대도 저무는 때를 맞는다만….

비록 오락가락 비틀거리며 살아온 나이지만, 변치 않고 오직 신에 대한 믿음, 사람살이 올곧은 방향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온 이들과 생각을 나누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 뿐.

두어 주 전 작은 텃밭에 마구 뿌려 둔 상추 싹이 트기 시작했다. 꽃보다 아름답다던가? 새 싹을 바라 보노라면 늘 설렌다.

70년 대처럼. 암만, 화단엔 가을 국화도 새 싹이 올라오거늘, 내일에 대한 설렘만은…

아버지의 덕담(德談)

새해 인사드리러 갔더니 아버지는 한 밤중이셨다. 아내와 나는 한 동안 아버지가 깨어나시길 기다렸다. 점심 식사 나올 시간이 다가와 아무래도 잠을 깨워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아버지, 저희들 왔어요.” 몇 번을 큰소리로 똑 같은 말을 외친 뒤에야 아버지는 눈가리개를 벗으시며 떠지지 않는 눈을 조금 여셨다. 그리곤 “워러, 워러”를 찾으셨다. 요양원 직원일 줄로 알았나 보았다. 아버지에게 물을 건네며 나는 조금 더 큰 소리로 “아니, 우리 왔다니까!” 더하여 아내가 높은 소리로 물었다. “아버님, 저 모르세요?”그제야 잠에서 깨어나신 아버지가 환한 미소 얼굴에 담으며 하신 말씀. ‘에이! 내가 너희들을 모르면… 정말 가야지!’

그리고 이어지던 아버지의 꿈 이야기.

“너희들 마침 잘 왔다. 이건 아주 심각한 얘기다. 꿈 이야기가 아니야! 내가 실제로 겪은 얘기야. 잘 들어라! 먼저 궁금해서 내가 물어볼 게 있어요. 니들 솔직히 대답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이즈음 아버지가 나를 볼 때마다 먼저 입을 떼시는 도입부로 대체로 내 귀에 익은 대사다. 대개 이 다음을 잇는 아버지의 대사는 당신의 손자 손녀 특히 내 딸아이의 근황이 궁금하셔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이 대사에 대한 내 응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한울네는 애기 나서, 한나네는 일이 있어 오늘은 못 와요. 다들 잘 살아요.’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달라도 아주 달랐다.

“너희들 이거 알어?  그거 그거 … 통일이 어떻게 됐니?…. 이거 이거 꿈 이야기 아니야! 내가 직접 본거야. 통일이 됐어 통일이. 그 잔치 자리에 내가 초대를 받았어. 내가 그 세상 보고 왔는데 천국이야 천국! 잔치자리에 산해진미가 차려졌는데 어찌나 정갈하고 맛있던지 내가 하루에 여섯 끼씩을 먹었어. 여섯 끼를. 거긴 가난한 사람들도 왕처럼 살어, 모두가 왕처럼. 이거 꿈 이야기 아니다. 내가 직접 보고 온거야!”

아버지는 똑 같은 이야기를 세번 반복하셨는데, 단 한 단어만 계속 바꿔 쓰셨다. 바로 ‘천국’이었다. 처음 이야기에선 ‘천국’이 두 번째는 ‘극락’으로 세번 째는 ‘파라다이스’로 바뀌었다.

그리고 덧붙이셨던 말씀. “내가 왜 그 자리에 초대됐는 지는 아직도 모르겠어. 왜 나를 초대했는지? 나를 초대했던 사람은….정씨였어, 정씨.” 나는 속으로만 아버지에게 응답했었다. ‘계룡산 정도령이었나 보다.’고.

아마 아버지는 신년 첫 날 꿈자리에서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모든 하늘나라를 두루 다 돌아보셨나 보다.

그 이야기를 이제 봄이 오면 만 아흔 여덟, 옛 우리 나이로 치면 아흔 아홉 이른바 백수(白壽)를 맞으시는 아버지가 우리 자식들에게 던지시는 새해 덕담으로 받았다. ‘올 한 해 좋은 세상 누리며 살아라!’는 축복으로.

이윽고 나온 아버지의 점심 식탁. 곱게 으깬 닭 요리 한 줌과 우유 반 팩, 요거트 반 컵쯤을 맛나게 오래 즐기시던 아버지가 숟가락 내려 놓으시며 하시는 말씀. “됐다. 고맙다. 이제 가라”

*** 새해 꿈꾸는 한가지. 가게에서 일하는 시간도 좀 많이 줄이고 나 혼자 즐기는 시간을 더 많이 누렸으면 하는 꿈. 그 꿈으로 오늘 혼자 즐긴 일. 말린 나물 불려 나물을 무친 일. 도라지, 취나물, 무말랭이, 말린 호박, 시래기 등.

정월 대보름 나물 무치는 일은 한 해의 풍요와 건강을 위한 비나리였다든가? 나물무침을 딱히 음력 정월 대보름에만 해야 하는 일은 아닐 터. 무릇 기도란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법.

그저 내가 아는 이름과 얼굴들 하나 하나 떠올려 보며 올 한 해 넉넉한 풍요와 건강을 누리는 한 해가 되길 비는 마음으로. 그렇게 나 혼자 즐겨보는…

아버지의 덕담을 받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