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을 끝내며- 황금시대

부일이와 정일이 아버님 최창한장로님께서는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들에게 ‘Golden Age(황금시대)’라는 말을 즐겨 하셨다. 십대 나이야 말로 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멋진 시절이므로 알차게 보내야만 한다는 당신의 속 깊은 충고를 담아 내신 말씀이었다. 허긴 그 나이에 그 충고가 귀에 들어오기나 했었겠냐마는.

이제 노년의 초입에 이르러 대현교회 최장로님의 충언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어 본다. 바야흐로 내가 서 있는 오늘이야말로 나에겐 ‘Golden Age(황금시대)’가 아닐런지.

여느 해 추수감사절이면 나는 음식하기에 바빴었다. 허나 오늘은 어릴 적 추석 같은 명절이면 어머니가 차려 준 명절상 즐기며 놀 듯, 아이들이 차려 준 감사절 만찬을 즐겼다. 사라진 부모님 자리를 손주뻘 아이들이 채워주었고, 우리 세대는 이제 손 움직이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

허나 혼자 있어 좋은 시간들, 혼자 있어 즐기는 시간들, 혼자 있어 감사한 시간들을 누리는 오늘이야말로 진정 삶의  ‘Golden Age(황금시대)’가 아닐런지.

이 황금시대를 구가할 수 있는 힘의 첫째 원천은 아내다. 돌이켜보면 역사 이래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회수가 천 번을 넘는다고 한다만, 우리 내외가 이제껏 싸운 회수를 따진다면 족히 그 몇 곱을 될 터. 그 숱한 전투속에 쌓인 것은 미움이 아니라 적과 아군을 넘어선 굳건한 전우애, 바로 그 사랑.

그 사랑의 결실인 우리들의 가족들. 이번 여행 중 두 처남 내외가 베풀어준 가족 사랑에 대한 기쁨과 감사도 꼭 기억해야 할 추억이다.

아내와 연을 맺어 여기까지 오게 된 길목 길목들을 따라 쫓다 보면 그 끝에 서 있는 담장이 넝쿨 뒤덮인 곳, 바로 신촌 대현교회이다.

이젠 넉넉한 맏형이 되어 계신 송영길 형님, 교회의 기둥이 된 김석수, 박성규, 안희주, 김난애 장로님들, 늙막에 들어선 우리들에게 믿음이 함께 하는 새로운 길을 바라 보라고 새 길눈 열어 주신 홍길복 목사님, 그리고 차리기 결코 쉽지 않은 잔치자리 기꺼이 마련해 주신  대현교회 최영태 목사님과 당회원 여러분들께 머리 숙여 속 깊은 감사를.

언제나 꿈속에서 들어도 반가운 병덕, 종석, 종민, 용철, 응복, 성식, 경애, 경자, 영숙, 경희 그 아스라히 언제나 그리운 얼굴들, 멀리 남쪽 진주에서 올라와 긴 이야기 나누지도 못하고 헤어진 병훈이…. 그저 만나 고마움으로.

길환이, 영환이…

그리고 규복이. 그저 끝없는 고마움으로.

우리 모두의 황금시대를 위하여!

2023년 가을에.

시간여행 – 4, 변화에

변화는 늘 놀라운 것이지만, 내가 적응하지 못할 때는 그저 불편함 뿐이다. 그런 불편함이 자꾸 쌓인다는 것은 내가 늙어간다는 표징일게다. 하여 애를 쓰는 편이다. 변화로 인한 불편함을 최소화 하려는 노력을 최대화 시키는 애씀인데, 그런 모습에 스스로 ‘쯔쯔쯔’ 혀 찰 때가 자꾸 늘어간다. 그럴 때면 스스로 위로하는 한마디, ‘내 노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변화가 너무 빨라서…’

서울은 내가 쉽게 적응하기엔 지나치게 많이 변했다. 십 삼 년 만에 나섰던 나들이였는데, 그 변화의 폭은 내 가늠 이상이어서 불편함 보다 먼저 다가선 것은 놀라움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다가선 놀라움은 사람들이 건네는 말소리들 크기와 억양이 매우 작고 부드러워진 변화에서 왔다. 지하철이나 버스, 식당이나 거리에서 사람들의 말소리는 분명 내 기억 속 서울사람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웃에 대한 배려에서 온 듯한 이런 변화는 실로 큰 놀라움이었다. 솔직히 뉴스 속에서 만났던 서울소식들은 매우 거칠게 소리 높은 소음처럼 다가오곤 했었는데, 실제 사람들의 말소리들은 부드럽고 온유했다. 그게 참 좋았다.

지하철 친절한 안내 방송도 좋았는데, ‘발빠짐 주의’나 ‘나빠짐 주의’, ‘하차입니다.’라는 경고 등은 외국어처럼 매우 낯설었다. (불편함, 놀라움이라는 말을 쓰다보니 생각난…)

그 보다 큰 놀라움을 느낀 것은 어디를 가나 잘 꾸며진 조경(造景)을 바라보면서 였다. 얼핏 쉽게 잔상으로 남게 되는 풍경들, 일테면 아파트 공화국이니 콘크리트 공화국이니 하는 말들을 잘 치장해 주는 놀라운 변화는 내겐 실로 경이롭게 다가왔다. 놀랍게 변한 종로통 뒷골목 직장인들의 점심시간 풍경과 그들의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잘 꾸민 조경 때문이었다. 돌아와 내 가게 손님들에게 자랑할 요량으로  조경과 자연 사진들을 제법 많이 찍었다.  

또 다른 놀라움은 딱 두 시간 오분이 걸린 서울과 속초 간의 거리였다. 아주 오래 전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북평해수욕장에서 놀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때 청량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워 거의 열시간 넘게 달려 닿던 곳이었다. 터널 예순 세 개로 이루워 졌다는 서울 속초간 도로를 달린 일은 내게 완벽한 시간여행 경험이었다. 아내와 단 둘이 맞았던 속도 앞바다 해돋이 풍경은 우리들의 내일로 품고.

그 동창들을 거의 오십 년 만에 만났다. 졸업사진을 떠올리며 옛 이야기를 나눈 몇 몇은 졸업 후 처음이었으니 만 오십 이년이다. 동창회를 이끄는 친구가 말하길, 졸업 동기들 중 1/4이 먼저 이 세상길 떳고, 1/4 정도는 연락 두절, 1/4 정도는 연락은 닿지만 모임에는 나오지 않고, 나머지 1/4이 이런저런 모임으로 연과 끈을 맺고 늦은 시간들을 함께 걷고 있단다.

실로 오십 년만의 변화인데, 또 다른 놀라움 하나는 바로 모두가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함께 한 동창들 중 몇몇은 그 옛날 북평 해수욕장에서 같이 놀았던 친구들이었는데, 그들은 물론 다른 친구들도 떠들고 즐기는 동안 변하지 않은 옛모습 그대로 둘러 앉았었다.

그랬다. 해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만, 분명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으련다. 바로 나다. 내 마음에 따라.

느긋하게 맞는 추수감사절 아침이다. 해마다 Thanksgiving, 이 맘 때면 읊조려보는 시 한 편이 있다. 언제부터 인지 잘 모르겠으나, 이젠 철들 때도 되지 않았나는 생각이 들었던 내 나이 환갑 전후일게다. Shel Silverstein이 읊은 관점(Point Of View)의 첫째 연이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2013년 추수감사절 아침, 돌아볼수록 그저 감사한 일 하나 꼽는다. 살아오며 보아 온 숱한 변화들 또는 기억조차 못하는 나의 변화들 나아가 옹고집으로 변치 않는 모습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관점의 잣대가 비록 어설프고 부끄러움 투성이지만 예수라는 잣대, 성서라는 잣대라는 믿음을 잊지 않았다는 감사이다.

큰고개(대현) 언덕 옛 친구들이 일깨워 준 감사이다.

<시간여행 – 3, 희망에>

겨울시간은 해가 너무 짧다. 오랜만에 늦잠을 즐기며 느긋하게 시작한 탓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하루 해가 너무 짧다. 여행 전, 미처 다 심지 못했던 히야신스, 무스카리, 알리움 등 구근들을 묻고,  뜰을 가득 덮은 낙엽들을 거두고 난 뒤, 아버지와 함께 잠시 시간을 보내고 온 것 뿐인데 벌써 어두워졌다. 그 짧은 하루, 봄을 기다리며 가꿀 수 있는 오늘에 감사하며.

신촌 대현교회 고등부 3학년 때 일이다. 따져보니 52년 전 일이다. 그 때 우리들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 가운데 박대위, 이열모 선생님이 계셨다. 두 분 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이열모 선생님은 우리 고3  남학생들을 위해 이런 기도를 하셨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이들이 장차 이 나라의 꿈입니다. 헌데 지금은 고3입니다. 열심히 공부할 때 입니다. 이 녀석들이 공부하다가 쓸데없이 바지 속으로 손 넣고 장난치는 유혹을 이기게 해주시고….”

박대위선생님은 제2한강교와 절두산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양옥에 살고 계셨는데, 당시 우리에게 지나치듯 이런 말씀을 던져 주셨었다. “집에 앉아 멋진 한강 풍경을 내려다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단다. 과연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런 사치를 누리며 사는 일이 옳은 것인가?하는 물음 때문이지!”

그 시절 참 좋은 선생님들 덕에 크게 엇나가지 않고 이 나이에 여기서 요만큼 이나마 살고 있는 것에 그저 감사다.

박대위 선생님은 내 대학시설 총장이셨던 박대선총장의 동생이셨다.

그리고 내 친구이자 동지인 김규복목사. 대학시절, 박대선총장 사퇴운동부터 박정희 유신 철폐, 전두환 타도 투쟁에 이르기까지 나보다 늘 한발 앞서서 나아갔던 벗, 김규복 목사를 독수리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이민 보따리를 꾸리고 있을 때 그는 대전 대화동에서 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교회를 세웠었다.

독수리다방은 이름만 이어져 올 뿐, 옛 모습이라곤 다방안 사진 속에만 남아 있었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불편한 걸음으로 다방 안으로 들어섰다. 만 36년 만에 만난 내 오랜 벗 김규복목사였다. 그는 오래전에 겪은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다.

우린 짧은 시간 손을 꼭 맞잡았고, 부둥켜 안았을 뿐 긴 말은 나누지 못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오늘도 옛 모습 그대로, 비록 많이 변한 세상일지라도 여전히 바닥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신과 함께 일 하고 있다.

살며 이런 벗 하나 사귀고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누린 은총은 족하다.

목사님 다음에 장로님 이야기.

어느 날 우리 내외는 ‘이것 한 번 먹고 가자!’라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 저녁에  박성규 장로내외가 초대해 준 저녁식사 자리는 바로 우리가 먹고 싶어했던 그 요리 전문점이었다. 아무렴! 장로님 기도발은 나 같은 얼치기 예수쟁이 보다 세긴 센 모양이었다.

교회 후배이자 대학 후배인 박장로- 일년 터울 후배라긴 보단 그저 친구일 뿐- 그와 함께 공유했던 사람들과 시간들을 되새기며 삶의 아쉬움과 감사함을 조근조근 나눈 참 좋은 시간이었다. 두 내외에게 감사를.

옛날 동쪽 끝인 워커힐 언덕에서  옛날 서쪽 끝 신촌까지 오가며 아직도 한결 같은 모습으로 교회를 지키고 있는 그의 모습에 경외를.

이번 여행에서 꼭 가 보고, 아니 꼭 가 보아야 할 곳이 있었다. 세 곳이었는데 모두 서울 시청 부근 이었다.

그렇게 시청앞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다 보게 된 시 한 편이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함께 삶의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이 서울 나들이를 하면 반드시 찾게 되는 세 곳이다. 바로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추모와 기억 공간 그리고 윤석열로 대변되는 사람을 계층화 시키는 세력 타도를 외치는 현장이었다.

그렇게 찾아 나선 시청앞 광장에서 나는 절망했었다. 옛 시청 건물인 서울도서관 옥상과 아내와의 추억이 쌓여 있는 정동 세실극장 옥상에서 바라본 토요일 오후 시청앞 광장 풍경은 대한민국 정치 뉴스처럼 절망적이었다.

광장 북쪽 광화문 방면을 점령한 내 또래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 남쪽 남대문을 향해 모인 무리들 모두 확성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소음은 내겐 너무 낯설었다.

확성기로는 절대 역사를 바꾸지 못한다. 웅웅거리는 거대한 침묵의 함성 소리, 바로 지축을 흔드는 민중의 함성이라야 새 세상 열리는 법이다.

멀리 갈 것 없다. 80년 서울역 광장, 87년 시청앞 광장, 2016년 청계광장. 내가 아는 한 모두 확성기가 아니었다. 아직 갈 길 먼 듯 하다만….

허나 나는 그저 희망적이다.

내 친구 김규복과 박성규 같은 굳건한 바닥 단단히 다져 하나하나 반듯하게 세워 이어가려는 이제 칠십 노인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하여 희망으로.

바라건대 더불어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희망으로.

이 희망! 내가 내 고향 대현교회에서 배운 믿음이다.

시간여행 – 2, 우연(偶然) 또는…

돌아볼수록 신기한 일이다. 치밀한 계획은 커녕 어설픈 밑그림 조차 없이 엄벙덤벙 여기까지 왔건만, 지금 내가 누리는 삶은 온통 감사해야 마땅하다. 오늘 가게 손님 한분이 내게 건넨 말이다. “당신 얼굴이 참 편해 보여요. 휴가를 통해 넉넉한 쉼을 즐기신 것 같아요.”

  1. 고모님을 뵙고 온 지 겨우 한 나절 정도 시간이 지났을 새벽이었다. 사촌동생이 ‘어머님께서 떠나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튿날 아침 고모님을 모신 빈소를 찾았다.

문상을 마친 우리 내외에게 동생이 말했다. “저쪽으로 가시죠”. 동생을 쫓아 따라간 곳은 이웃한 빈소였다. 그곳엔 동생의 부인 제수씨가 상복을 입고 서 있었다.

그랬다. 사촌 동생 내외는 몇 시간 사이로 함께 떠나신 ‘어머니와 장모’ 또는 ‘어머니와 시어머니’의 장례를 함께 치루고 있었다.

2.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 내외는 얼기설기 어설픈 계획을 세웠었다. 만나야 할 사람들, 가보고 싶은 곳들, 먹고 싶은 것들을 나열한 그저 낙서 비슷한 계획이었다. 어찌어찌 그 어설픈 계획대로 시간을 보냈다만, 전혀 이루지 못한 것들도 있거니와 반면에 전혀 계획치 않았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곤지암 제법 깊은 산골에서 지낸 하루 밤은 전혀 계획치 않았던 우연이었다, 허나 그 우연이 우리 내외에게 베푼 여유로운 쉼은 오래 기억될 듯하다.

아내가 친구를 만나러 곤지암을 간다고 했다.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곤지암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찾아보니 우리들이 묵었던 숙소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전철을 타고 늦은 시간에 아내 혼자 거기까지 오가는 것이 무리다 싶어 함께 가기로 했다. 그렇게 나섰던 길인데 하루 밤을 거기에 묵게 되었다.

잠자리에 매우 예민한 내가 숙박업소 이외에 누군가의 집에서 하루 밤 묵은 일은 거의 몇 십년 만의 일이었다. 그 밤의 편안함과 이튿날 아침 누렸던 그 상큼함은 오래 간직될 듯. 아내의 오랜 친구 내외에게 깊은 감사를. 우연하게 누린 곤지암의 하루 밤에.

3. 내겐 나이 터울이 크게 뜬 사촌동생이 있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는데 그 동생을 만났다. 처음 만난 동생의 남편 곧 내 매제는 내 여행길 피로를 싹 가시게 하는 참 좋은 인상이었다. 동생 내외와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조카들을 보며 나는 마냥 사람 좋은 웃음을 닫을 수 없었다. 동생 내외가 우리 내외 서울 구경을 시켜주다 내려준 곳이 명동입구였다. 아하! 그렇게 우연치 않게 옛 젊음의 거리 명동을 아내와 팔짱 끼고 걸었다.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몇 십년 만에.

4. 따지고보니 신촌 대현교회 홍목사님을 비롯한 옛 친구들을  만나게 된 일도 그저 우연이었다. 우리 내외가 계획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이 나이에  누린 큰 복이었다. 그야말로 우연하게.

돌아볼수록 신기한 일 투성이다. 어찌보면 삶은 우연의 연속이다.

돌아와 생각하니 이젠 그 우연들의 뜻을 새겨야 마땅할 나이가 되었다.

어쩜 이제야 믿음의 첫걸음 내딛고 있는 게 아닐런지.

우연 또는…

믿음에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이후 달라진 풍경 가운데 하나는 온라인 모임인 zoom meeting의 일대 유행이다.

나는 온라인 모임 프로그램을 십 수년 전부터 사용해 왔다. 이즈음 유행인 zoom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프로그램을 이용했었는데 사용료는 월 120불 정도의 고액이었다.  미주 전역의 세탁인들과 정보를 나누고 대화를 잇는 목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사용했었다. 내가 세탁업으로 거부가 된 사람도 아니거니와 지식도 일천하지만, 그저 세탁업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조금씩이라도 어제보다는 나은 세탁소를 운영해 가는 방법들을 함께 나누던 지난 세월 이야기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일이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는 생각에 하나 둘 일을 정리하면서 그 일도 접었다.

그래도 온라인 미팅은 이어와 이즈음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젠 나도 zoom을 사용하고 있고, 매주 한 번 모이는 모임에는 세탁인들이 아니라 필라 인근에 살며 세월호 가족들과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모인다. 나는 이들에게서 참 많은 것들을 배우며 산다.

팬데믹 이후 아내가 나보다 zoom meeting을 더 많이 사용한다. 한국학교 수업 및 교사회의, 이사회, 한인회 등등 이즈음 아내는 가히 유행 따라 산다.

아내가 참석하는 온라인 모임 가운데 옛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이 있다. 일주일에 한 차례 모이는 이 모임이 시작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어린 시절에 교회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족히 사십 년 넘는 세월이 흐른 후 화상으로 얼굴 맞대고 만나는 모임이다.

카톡 등으로 간간히 서로 간의 소식을 주고 받던 친구들 가운데 한 친구가  중한 병을 얻었단다. 그 친구를 위해 서로 기도해 주자고 시작한 온라인 모임이란다. 그렇게 한 주간 한 차례 씩 모여  함께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며 사십 여년 만나지 못하고 살아 온 지난 세월들의 이야기도 나누곤 한단다.

그 친구들 몇몇은 나도 익히 기억하고 있다. 아내와 나는 한 교회를 다녔고 내게는 사 년 후배가 되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그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또래 친구들을 생각했다.

한 해 후배인 종석이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난 말이유,  어릴 때 주일학교라도 다녔기에 요만큼이라도 살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우.’ 그를 본 지도 어느새 십년이 흘렀다. 그가 은퇴를 코 앞에 두고 있던 때였다.

최근 몇 년 사이 노부모들이 연이어 병상 생활을 하시다 한 분 두 분 떠나시며, 먼 여행길은 한 해 두 해 미루어져 왔다. 이즈음엔 한 분 홀로 남으신 아버지 얼굴 한 번 들여다 보는 일이 일과이다. 더더우기 지루하게 이어지는 팬데믹 까지 한국 여행은 이젠 계획에서 멀어졌다.

나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옛 벗들을 생각한다.

어찌 보냈건 흘러간 세월들에 감사를, 어떤 연으로 잇던 오늘의 소식들에서 서로 간에 위로를, 지나간 세월에 비해 턱없이 짧을 내일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나누는 만남들이 되기를 빌며.

믿음이란 딱히 극적일 까닭도 없고 절벽 끝에 서야만 만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므로.

우리 부부가 다니던 교회 이름은 대현大峴교회. 큰고개(大峴)에서 함께 뛰놀던 옛 벗들을 생각하며.

(십년 전, 딸아이와 함께 찾았던  옛 시간은 지금도 소중하다.)

이상동몽(異床同夢)

<홍길복 목사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에 수강 신청을 하며….

해마다 이월은 내 생각을 좀 넓히는 때이다. 뭐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만큼 좀 한가하다는 말이다. 이맘 때면 춥고 눈도 많이 오곤 해서 내 가게가 좀 한가하다. 일요일 말고도 하루 이틀은 눈 때문에 가게 문을 닫고 쉬기도 하거니와 가게 영업시간을 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돈은 좀 덜 들어온다. 허나 시간은 좀 풍부해진다. 그러다보니 평소에 생각지 아니했거나 못했던 것들이 보이게 되어 생각의 폭과 깊이가 넓고 깊어지는 나름 내가 좋아하는 이월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삼월 초이면 언제나 내 지갑은 가난하다. 삼월 초 내 생일을 해마다 늘 그렇게 맞는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다르다. 눈도 전혀 오지 않았고 날씨도 추워 본 적이 없다. 가게는 내가 많은 짬낼 틈없이 바빳다.

이 달초에 호주에 계시는 홍길복목사님께서 이메일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그 편지를 소화해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생각의 용량을 초과하는 것이어서 생각과 돈 모두 풍족하게 삼월 내 생일을 맞게 되었다.

이달 초에 홍목사님께서 보내주신 편지 내용이다.

참 오랜만 입니다. 그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안부를 묻는 일조차 쉽지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벌써 해가 바뀐지 한달이 지났습니다. 한가닥 작은 희망에 대한 희망 조차도 사라져 가는 땅 입니다. – 중략 – 시드니에서 작은 ‘인문학 교실’을 열었습니다. 한 달에 두번 모입니다. 첫번 모임에 그래도 마음을 함께하는 친구들 한 30여명이 모였습니다. – 중략 –  옷은 새 것이 좋지만 사람은 옛 사람이 좋네요.

그랬다. 홍목사님과 헤어져 그는 호주로 나는 미국으로,  함께 했던 한국이라는 삶의 자리를 바꾸었던 시절에 그는 30대였고 나는 20대였다.

이제 그이는 70대 중반의 은퇴목사이고, 나는 은퇴를 바라보는 60대 중반이 되었다. 그래, 우린 서로 옛사람이었다. 다만  거기에 수식어 하나를 얹는다. <변하지 않은…>이라고.

‘각자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이 교실을 통하여 이상동몽(異床同夢)하는 <인문학 친구들> 입니다. <異床同夢>! 이 얼마나 멋진 말 입니까? 잠은 각기 다른 데서 자지만 꿈 만은 같이 꾸기를 소망합니다.’

그 이가 첨부파일로 덧붙인 <시드니 인문학 교실> 강의록에 적어놓은 말이다.

나는 홍목사님의 허락을 받고, 그 이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강의록을 이 곳에 올린다. 더하여 내가 참 사랑하고 존경하는 필라 인근의 친구들과 함께 한 달에 두번씩 이 강의록을 참조하면서 인문학 공부를 쫓아가려 한다.

자!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로  ‘들어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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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살며 딱 두 교회에 적을 올렸다. 한국의 신촌 대현교회 – 그 곳에서 만났던 많은 친구들은 내 삶을 지배했다. 홍목사님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내 아내 역시. 수 년전에 아내와 딸과 함께 그 곳을 찾았었다. 그리고 이민와서 한 곳…. 나 역시 옛이 그립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

 교실문을 여는 글 1 – 왜 인문학인가? 

일찌기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기 전 한양에 있을 때 몇몇 친구들과 계(契) 모임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름하여 ‘죽란시사’(竹欄詩社)라 했습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며 세상을 걱정하며 자아를 성찰하는 선비들이 모여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일종의 풍류계(風流係)였습니다.

우리도 지금 ‘시드니 인문학 계’를 통하여 인생의 시름과 아픔은 서로 위로하고 시대와 인간을 피차 보듬어 주면서 이 절망의 땅에서도 함께 희망의 무지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같이 먹고 자면서도 꿈과 생각은 서로 다른 동상이몽(同床異夢)가들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이 교실을 통하여 이상동몽(異床同夢)하는 <인문학 친구들> 입니다. <異床同夢>! 이 얼마나 멋진 말 입니까? 잠은 각기 다른 데서 자지만 꿈 만은 같이 꾸기를 소망 합니다.

지난 12월 이 모임을 준비하던 이들은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목적과 기대를 다음과 같은 말로 다듬어서 표현했습니다.

(1) 동양과 서양에서 이어온 인문학의 전통과 역사, 목적과 내용, 방법론과 한계를 함께 공부해보자. – 클라스의 진행은 주로 준비된 강연, 토의, 책읽기와 나눔 등이 될 것이다.

(2) 이를 통하여 인문학적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개인적 사고의 깊이를 심화 시키고 또 그 틀을 좀 더 넓혀 나가자. – 우리는 종교단체들 처럼 무엇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하고 의심하고 고민하고 진솔하게 마주침으로’ 더 바른 삶이란 무엇인지를 추구해 나가려고 한다.

(3) 이런 사유의 깊이는 인문학 교실에 참여하는 친구들 개개인의 삶에 의미와 보람을 갖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4) 더 나아가 우리는 이 교실을 통하여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으로 하여금 보다 정의롭고 사랑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약간은 논리적으로 서술된 이런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목적>을 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야기들을 통하여 좀 유연하게 풀어보겠습니다.

 

신촌연가 8

탈신촌기(脫新村記)

대야성, 복지, 캠퍼스, 독수리…

찻값 꽤나 부조했던 다방 이름들입니다.

누나네 집, 페드라, 태정식당…

막걸리값 수월치 않게 건네 주었던 술집들 이름이지요.

꽉 찬 10년, 제 대학생활은 그렇게 신촌과 함께 했었지요.

대학을 다니던 그 어느 한 해도 제대로 수업을 다 해 본적 없는 학교생활이었지요.

큰 딸은 간호대학 나와 조신하게 있다가 시집 보내고, 아들놈은 대학교수를 시키고… 아버지의 소박한 꿈을 허문 것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나와 제가 거의 동시에 벌린 일입니다.

대학 졸업을 코 앞에 두고 있던 누나는 탈신촌(脫新村)을 선언하였습니다.

“전 졸업하면 미국으로 취업이민 가요.”

고집 세신 어머니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누나는 그렇게 훌쩍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아버지의 머리칼이 세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형사들이 아들을 찾을 때만 하여도 아버지는 “큰 일 아니겠지”하셨답니다. 아들을 만나러 경찰서로 유치장으로 구치소로 들락거리시던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하얗게 세셨습니다.

학교도 짤리고 골방에서 쳐 박혀 있는 아들을 보시며 아버지는 아직 꿈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아버지의 꿈을 다시 살리시던 1980년 5월.

피신한 아들 덕에 평생 처음 무서운 곳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자랑스러워 하시던 화랑무공훈장을 탓하시며 이민짐을 꾸리셨습니다.

그 해 벌어진 어머니, 아버지의 탈신촌입니다.

이따금 신촌거리를 배회하던 제게 신촌은 이미 제 어릴 적 신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신촌을 떠나신 지 7년 후.

요식행위일 뿐이라며 내어민 종이에 각서라는 것을 쓰고 받아 든 대한민국 여권이었지요. 그날 밤 미국에 계신 어머니는 전화통에 대고 신신당부를 하셨지요.

“이 눔아! 책 같은 걸랑 하나도 갖고 오지 말어! 일할 수 있는 작업복만  챙겨 가지고 와!”

그렇게 신촌을 떠났답니다.

<그리고 13년 후>

11박 12일.

13년만의 귀향이었다. 아기자기한 반도의 산하(山河)모습을 한 창 밖 구름들을 보며 서울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크고 깨끗한 영종도 새 공항과 빠르고 친절한 입국절차에서 엄청나게 변한 도시를 예감할 수 있었다.

새벽, 시원히 뚫린 공항로를 달리며 바라 본 낯 익은 산들과 거기 휘며 춤추듯 자라는 나무들이 열 세해의 공백을 메워버렸다. 김포쯤해서 눈에 들어 온 거대한 아파트군(群)들은 한강 호위병처럼 서서 강변을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강 건너 난지도에 솟아 오른 두 개의 산봉우리는 흐른 세월이 만만치 않았음을 말하고 있었다. 잘 꾸며진 강변 고수부지 공원들과 제법 푸른 도시 녹지공간들은 남산을 가로 막은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들의 삭막함을 덮기에 충분하였다.

그 뿐이랴! 짐을 풀기 바쁘게 나선 서울거리는 정말 깨끗하였다. 담배꽁초 하나, 휴지 한 조각 찾을 수 없는 거리는 매우 낯 선 것이었다. 시내는 물론 외곽도시까지 잘 연결된 깨끗하고 시원한 지하철은 그 끈끈하고 무더운 날씨를 잊게하기에 충분하였다. 모든 거리를 뒤덮은 자동차의 행렬은 이미 나를 주눅들게 하였지만 그 복잡함에 비해 제법 질서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울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튿날, 내 고향 신촌을 찾아 가는 길에서 나는 급작히 무너지고 말았다. 지하철 신촌역에서 내리자 이십대 아니 십대들의 물결에 휩쓸리고 말았는데 그들을 뚫고 친구들과의 약속장소로 가는 채 1Km도 안되는 그 짧은 거리에서몇 번이고 주저앉고 싶었다. 아아! 내 유년과 소년, 청년을 보냈던 그 거리 어디에서도 낯 익은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슬픔이었다.

스무명 남짓한 옛 벗들의 만남의 장소로 갈비집을 택한 까닭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이미 그 곳을 떠나 사는 친구들모두가 기억할 수 있는 장소란 스무 해 넘게 한 곳에서 장사하는 그 갈비집밖에 없었으므로.

완전히 변모한 거리 모습에 비해 벗들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은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더러는 흰머리를 이고 더러는 대머리를 겸연쩍어 하며 악수를 나누었지만 세월의 두께로도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잊게 할 수는 없었다. 바쁜 서울생활에 나 뿐 아니라 그 곳에 사는 친구들끼리도 오랜만인지라 서로의 근황과 옛 시절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그 도시의 복잡함을 쉽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들이 어린시절 드나들던 목로주점이 그 시절 그 모습대로 있다는 것을 떠 올렸고 우리는 한 목소리로 그것이 사실이야고 되묻곤 일어나 우르르 그 집을 찾아 나섰다.

그랬다. 이제는 없어진 신촌시장 한 귀퉁이 바로 그 자리에 옛날 모습을 안팎으로 고스란이 간직한 채 막걸리와 소주그리고 동태찌게 안주를 파는 목로주점이 있었다.  그 밤 우리는 “이 곳을 역사 보호구역으로 정하자”는 흰소리를 해가며 마시고 마시고 그렇게 취했다.

그 밤 그 곳에서 함께 취했던 벗들은 모두 서울을 버티는 중년들이었다. 정치인, 회사중역, 대학교수, 행정가, 변호사,목사, 성공한 자영업자 – 서울을 버텨 내야만 하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그 밤 나는 그들이 지쳐 있음을 보았다. 그들의얼굴 어디에고 서울의 버팀목으로서의 자부나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모습, 채울 수 없는 허탈, 마지못해 버티는 무력감들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랬다. 그 밤 서울은 내게 내 벗들의 지친 얼굴처럼 다가왔다. 헤어져 돌아가는 길, 그 거리를 사랑하는 법을 생각해보았다. 그 어떤 모습일지라도 내 고향이므로. 내 조국이므로. 내 어머니의 땅이므로.

문질러도 문질러도 희어 질 수 없는 피부색처럼 끈질긴 인연의 땅이므로.

(2001. 7. 17)

그리고 다시 십년 후인 2011년의 추억들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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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딸과 함께 옛 추억속으로

신촌연가 7

<그리운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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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지금도 변화의 연속인 곳이 대한민국입니다만 그 변화무쌍한 것들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정책과 입시제도일 것입니다.

나이가 한 삼년 차이만 나면 아마 다른 교육정책과 입시제도 아래서 성장을 했을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입학을 할 때부터 달라진 것은 이른바 동일계 진학이라고 해서 인문학교의 경우 고등학교를 무시험으로 그대로 그 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입니다. 일테면 A중학교를 나왔으면 한 울타리에 있는 A고등학교로 무시험 진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업계 고등학교는 입학시험을 치루게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중학교만 있는 경우였지요. 한 울타리에 고등학교가 없으니 갈 데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 각 인문학교의 학급 수를 조금 늘린 것이지요. 그렇게 늘린 숫자만 입학전형을 통해 학생을 선택하였던 것이지요.

지금도 생각해보면 도대체 어떤 짱구가 그런 입시제도를 생각해 냈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이지요. 평등, 형평이라는 개념이 탑재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지요.

어쨋거나 제가 다니던 중학교 한 울타리에 같은 모표를 쓰는 고등학교는 경기상업고등학교였답니다. 중학교 동창들 가운데 거의 많은 아이들이 별 선택없이 한 울타리 안에 학교를 선택했지요.

물론 제 짝궁 상태처럼 비좁은 경쟁을 뚫고 당시 일류학교라는 인문계 K학교에 입학을 한 경우도 있으니까 다 제 탓이겠지만, 공정한 게임은 아니었다라는 생각이지요.

한국의 돌아가신 두 분 대통령님께서 상업고등학교 출신이셨지요. 두 분 다 정말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들이시지만 두 분들께 따라다니는 수식어 “똑똑했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상업학교를 나왔다는 말에는 불만이 좀 있답니다.

똑똑한 아이들도, 가난한 아이들도, 잘 사는 아이들도, 덜 똑똑한 아이들도 갈 수 있는 곳이 실업계 학교이고, 실업계학교가 대우받은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상고를 나와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실업계를 보는 눈이 달라져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다가 올 초에 받은 “도상(道商) 45회” 수첩을 꺼내 보았습니다.  이젠 다들 중늙은이가 되었습니다. 참 좋았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에 제 평생에 영향을 끼친 몇 분들을 만났습니다.

우선 신촌 대현교회의 황인기목사님이십니다.

“고난받는 예수”를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영문학을 전공하신 분답게 늘 영어로만 하셨지요. Suffering Jesus라고요.

그리고 또 한 분. 박대위교수님입니다.

까까머리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지혜를 주십시요. 이 아이들이 이 나라의 앞날입니다. 지금은 공부할 때입니다. 아이들 잘 때 빤스 속으로  손 집어 넣지 않게 해 주십시요.”

그리고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김기영선생님입니다.

제가 공부를 지지리 못했습니다. 우선 주판이 싫어서 주판으로 스케이트 타다가 선생님께 꿀밤 맞기 일수였고, 타자시간에는 소설책 읽다가 걸려서 인도산 고무라는 롤라로 머리 터지기 다반사였지요.  성적은 늘 뒤에서 세어야 빨랐고요.

영어선생님이시던 김선생님께서 고등학교 이학년 어느 날 저를 부르셔서 하신 말씀이지요. “니 아직 안 늦었다. 공부해서 대학가라. 니 글을 쓰던 언어학을 하든 대학가라.” 그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제 길을 선택해 주셨지요.

그 김선생님 훗날 제가 졸업한 후 전근 가신 곳이 제 아내가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였답니다. 그래 제 아내의 영어선생님이시기도 하지요.

아! 제 아내의 얼굴을 교회가 아닌 하교길 버스 안이나 길에서 종종 마주친 것도 그 무렵이었지요. 아내는 중학교 또뽑기 학번이라 세검정 꼭대기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이지요.

백년대계라는 교육정책만이라도 일관성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시절 “대망의 70년대”라는 플랭카드가 신촌, 이대앞 구름다리를 비롯한  신촌 곳곳에 내 걸리기 시작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