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 – 예언자 12

(당신의 천국 – 마흔 한 번 째 이야기)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 이사야 6 : 3, 공동번역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 이사야 9 : 6, 표준 새번역 개정판 

이제 우리는 우리들이 가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 길목에서 또 다른 아주 중요한 이정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기록입니다. 

구약성서의 복음서라고도 불리우는 책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인용한 구약성서의 책들 가운데 제일 많이 인용된 책도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특히 우리들이 나중에 만나게 될 바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잘 읽어 두고  머리 속에 새기고 가야할 책이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환상, 메시아 시대, 메시아 왕국, 메시아의 통치, 주의 종, 야훼의 종, 메시아의 고난, 대속, 심판, 구원, 새 하늘 새 땅 등등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우리들이 이제껏 만났던 아모스, 미가, 호세아 등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책입니다. 직선적이고 직정적인 예언자들과는 달리 때론 환상을 보고,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 심판과 구원을 이야기하면서도 때론 말이 바뀌는 듯한 인상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좀 어려운 책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들이 어렵듯이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사야 이야기, 바울 이야기라고 하면 좀 쉽게 읽히지만 이사야 신학, 바울 신학 그러면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요. 같은 말인데 말입니다.

이제 나중에 만나게 될 “예수의 말씀”과 “바울의 이야기”를 비교하면서 들여다 보면 아주 쉽게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답니다. 

쉬운 말과 어려운 이야기의 차이는 가방의 끈 길이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똑같은 “나무”를 설명하는 말도 어린아이 다르고 어른 다르고요. 어디 그 뿐인가요? 직업에 따라 설명하는 방법도 다를 수 있고, 왈 배운 정도에 따라 또 설명하는 말들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나무는 나무”라는 사실이지요. 

이사야서를 바로 읽는 눈과 생각을 세워야 하는 까닭입니다. 

이사야, 다니엘, 요한계시록 같은 책들을 잘못 읽고 엉뚱한 이해를 하게되면 하나님 나라와는 멀어지게 된답니다. 특히 가짜들과 사기꾼들이  이런 책들을 이용해 제 배를 불리는 수단으로 삼기도 한답니다. 이건 사람들이 살아 온 역사가 증명해 주는 일이지요. 

자! 이제 서론 마치고, 이사야 이야기 서너차례 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의 상황과 그가 예언자로 나서게 된 연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렵니다. 

그가 스스로 야훼에게 사로잡혔던 때가 우시야왕이 죽던 해(이사야 6 :1)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가 예언을 시작했던 시기는 유다왕 아하스 때입니다. 이 때는 아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유다까지 위협하던 시절입니다. 

아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직전에 아하스는 자주냐, 사대냐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일테면 북왕국 이스라엘과 수르(시리아) 등 약소국들이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와 맞서 싸우느냐 아니면 아시리아에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면서 왕국을 유지하느냐에 대한 선택을 해야하느냐 하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던 것이지요. 

아하스왕은 아시리아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드리는 길을 선택합니다. 성서는 아하스가 죄를 지었다고 기록합니다.  이후 남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은 북왕국 이스라엘 처럼 아시리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 직전까지 이르게 됩니다. 

남왕국 유다가 아주 멸망 직전에 있을 때 이사야의 예언 활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궁중과 연관이 있는 많이 배운 자라는 점은 확실한 사실로 여겨집니다. 왕의 조카라는 설도 있고, 왕실의 기록관이었다는 설도 있답니다. 

이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사야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기로 하지요. 그가 예언자로 나서게 된 까닭을 설명하는 것이랍니다. 다른 예언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답니다. 

이사야서 6장을 꼼꼼히 살펴보는 일입니다. 

환상

먼저 이사야의 환상입니다. 환상이 무엇일까요?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유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 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요엘서 2 : 28, 사도행전 2 : 17에서 인용) 

마지막 때가 되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야훼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평시에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예견이라는 것입니다. 

그 환상을 통해 이사야가 본 것은 한마디로 “야훼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는 것입니다. (6 : 3)이 때 ‘거룩’의 뜻은 ‘사람과 다르다는 것’이다. 역사 이래 땅을 밟고 살다 간, 또는 살고 있는,  또 살아 갈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두번 째 주목해야 할 점은 이사야 스스로에게 하는 말입니다. (6 : 5)이건 다른 예언자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막바로 사회, 정치, 종교적인 죄들에 대해 비판과 선언으로 들어가는 데 비해 이사야는 “내 잘못이 크다”는 회개로 부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천사(스랍)가 나타나 이사야의 죄가 사해졌음을 선포합니다.(6 : 7) 

그리고 천사(스랍)들이 사라지고 야훼 하나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습니다. ( 6 : 8) 

“누굴 보낼꼬?” 라고 묻는 야훼께 이사야가 응답합니다. “제가 갑니다”라고요. 

이렇게 이사야 이야기를 시작하고요. “거룩”에 대한 기억 한가지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하여도 “거룩하신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기도 소리를 거의 모든 예배 때마다 듣곤하였답니다. 이즈음엔 조금 듣기 힘든 것 같습니다. 

뭐 제사의식이나 형식은 시대 흐름에 따라 변한다고 하지만, 제가 이즈음 박수치고 양 손 올리고 이른바 찬양 예배 형식에 어울리지 못하는 까닭은 늙어가는 징조이기 때문일겝니다.

도낀 개낀 – 예언자 11

(당신의 천국 – 마흔 번 째 이야기)

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 간다.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리라.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면, 그가 백성의 목자로 나서리라. 야훼의 힘을 입고 그 하느님 야훼의 드높은 이름으로 목자 노릇을 하리니, 그의 힘이 땅 끝까지 미쳐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 – 미가  5 : 1 – 4, 공동번역 

성서와 예언사상이 겨냥하는 목표는 인간이다. 인간이 먼저 개조되고, 인간 속에 자리잡은 ‘악의 세력’이 극복되어야만 한다. 그 때에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가 되고 겸허하고 헌신적인 사람이 된다. – 서인석의 <오늘의 구약성서 연구>에서 

앞선 글에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다른 점들 몇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언자 미가는 이렇게 서로 다른 유다와 이스라엘이 야웨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똑같다고 선언합니다. 

남이나 북이나 야훼 하나님께 지은 죄를 놓고 보면 난형난제(難兄難弟)요, 오십보 백보이고, 도낀 개낀이라는 선언입니다. 

미가의 통렬한 비판과 공격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 비판과 공격은 남과 북에게 똑같이 퍼부어졌습니다. 

전통적인 생계 수단이었던 소작농들이 무너지는 현상은 아마 농촌출신인 미가의 직접경험일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회적 현상에 대한 경고나  부정직한 상행위에 대한 고발, 돈에 매수된 사제와 예언자들의 타락에 대한 심판 예언,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핍박하거나 못본 체 하는 왕과 권력에 대한 심판 경고들을 남과 북을 향해 동시에 선언한 것입니다. 

“야곱 가문의 어른들이라는 것들아, 이스라엘 가문의 지도자라는 것들아. 정의를 역겨워하고 곧은 것을 구부러뜨리는 것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백성의 피를 빨아 시온을 세웠고, 백성의 진액을 짜서 예루살렘을 세웠다. 예루살렘의 어른이라는 것들은 삯을 받고 판결을 내리며 예언자들은 돈을 보고야 점을 친다. 그러면서도 야훼께 의지하여,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재앙은 무슨 재앙이냐?”하는구나!” – 미가 3 : 9-11 

“이 성읍에 사는 무리들은 들어아. 남을 등쳐 치부하는 것들아, 거짓말만 내뱉는 도시놈들아, 말끝마다 사기를 하는 것들아, 들어라. ‘천벌받을 것들, 부정한 되로 부정축재한 것들을 나 어찌 용서하겠느냐?’” – 미가 7 : 9 – 10 

또한 미가는 허례 의식만 남은  예배와 제사, 심지어 이방 종교의 의식까지 섞여진 제사와 그 제사를 집행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도 쏟아냅니다. 그러면서 미가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나님과 함께 살아 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미가  6 : 8)고 말입니다. 

그러나 미가의 선포가 심판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는 동시에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예언을 그치지 않습니다. 

심판과 구원을 반복적으로 기록한 것이 미가서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신약의 마태복음(마태 2 : 6)이 인용하게 되는 미가서 5장 1절의 예언은 메시아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미가와 동시대의 인물인 이사야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오실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우뚝 선 인물입니다.  

미가 이야기를 마치면서 오늘 본  한국 뉴스 한 꼭지로 인해  제 머리 속에 이어진 생각 하나 덧붙입니다. 

경상도 구미시의 시장이라는 者가 “박정희는 반신반인(半神半人) 이었다”고 했다는 기사였습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내노라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고, 박정희 역시 그 한가운데 있는 인물입니다. 극과 극을 이루는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한국사회가 그만큼 극과 극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대변하는 증표일 것입니다. 

박정희에 대한 호, 불호나 긍정 평가 또는 부정 평가는 보는 사람과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또 그런 다른 평가들이 자유롭게 논의되고, 떳떳하고 공정하게 서로 다른 의견들이 표출될 수 있는 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일 것입니다. 

동상

그러나 죽은 귀신을 신의 반열에 올려 놓는 일은 정신 나간 행위 곧 미친 놈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태양절이라며 죽은 김일성 귀신을 섬기는 북이나 탄신절이라며 죽은 박정희 귀신을 섬기는 남이나 정말 도낀 개낀인 셈입니다. 

성서적 관점, 적어도 미가 예언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북의 정권이나 남의 정권이나 죽은 귀신이든 산 귀신이든 사람을 신의 반열에 올려 놓는 정권의 말로는 그야말로 임박한 붕괴 뿐입니다. 

미가의 예언대로 북왕국 사마리아와 남왕국 예루살렘이 결국은 모두 망했듯,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올려지는 정권의 말로는 눈에  훤히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로는 “이미 왔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의 진리입니다. 

<신적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 진리치고 영속적인 진리 없고, 사회정의의 열매를 맺지 않는 진리 치고 참된 신적 진리는 없다.>  S J Samartha 의 말입니다.

독설(毒說) -예언자 10

(당신의 천국 -서른 아홉 번 째 이야기)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할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탐나는 밭이 있으면 빼앗고 탐나는 집을 만나면 제 것으로 만들어 그 집과 함께 임자도 종으로 삼고 밭과 함께 밭 주인도 부려 먹는구나. 나 야훼가 선언한다. 나 이제 이런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 미가 2 :  1- 2, 공동번역 

예언자 미가가 활동했던 시기는 기원전 725년에서 기원전 701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시기이고 남왕국 유다에서는 아하스왕 말기와 히스기야왕 초기에 해당하는 때입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분단된 남북왕국 가운데 북왕국에 대해서는 지난 글들에서 대충 훑어 보았습니다. 

남북이 분단된 기원전 922년 부터 미가 예언자의 활동시기인 유다왕 히스기야까지의 남왕국 이야기를 북왕국과 비교해서 대충 훑고 넘어 가겠습니다.

남왕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열왕기와 역대기 두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 상하에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역사가 함께 기록되어 있고, 역대기 하에는 유다의 역사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통독하다보면 종종 읽기 지루한 곳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전혀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족보이야기가  이어지는 역대기상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역대기에 대한 이야기와 두 개의 다른 사관(史觀) – 신명기 사관과 역대기 사관 –에 대한 이야기는  남왕국 유다 이야기가 끝나고 바벨론 포로 시기 이야기를 할 때 자세히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남왕국과 북왕국의 드러나는 차이점들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북왕국은 열 개의 부족 지파 동맹체였고, 남왕국 유다는 두 개지파 공동체였습니다. 두 개지파라고 하지만 베냐민지파는 소수였고 유다지파 단일체제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유다 지파의 세가 컸습니다. 

북왕국은 시작부터 모든 면에서 새로 출발하는 입장이었고, 남왕국은 다윗과 솔로몬의 위업을 계승하며 시작되었습니다. 

북왕국은 수도를 결정하는 일, 성전과 제단을 만드는 일, 정치 체제를 만드는 일 등 모든 면에서 새로 시작하는 처지였던 반면에 남왕국은 다윗의 성 예루살렘과 솔로몬의 성전과 체제를 그대로 이어받고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북왕국은 여러 부족이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이 넓었고, 남왕국은 북왕국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영토를 갖고 있었습니다. 경작지 곧 수확을 거둘 수 있는 땅의 크기는 북쪽이  남쪽보다 거의 네배나 컷습니다.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스리기가 남쪽이 훨씬 유리했다는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북왕국은 북쪽의 아시리아 등 외세의 침략을 당하기 쉬운 조건에 있었고 남왕국 유다로써는 그런 북왕국이 일종의 방패막이가 되는 좋은 조건에 놓여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북왕국 이스라엘은 왕조가 아홉번이나  바뀌었지만 남왕국은 단일 왕조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북왕국 이백년 역사에서 아홉번이나 왕조가 바뀌었다는 말은 정권이 그만큼 불안정했다는 말입니다. 일테면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왕씨 고려왕조 오 백년, 이조왕조 육 백년 이렇게 이어오는 것처럼 이백년 사이에 이씨, 박씨, 김씨 등 왕조가 아홉번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그에 반해 남왕국 유다는 약 335년의 역사를 단일 왕조로 이어져 내려 왔다는 것이지요. 다윗과 솔로몬의 후예들이 대를 이어 왕통을 이었답니다.특히 남왕국 유다의 제 3대 임금이었던 아사왕 때부터는 후계를 미리 선정하고 그 후계자와 일정기간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공동섭정 정치전통을 세웠답니다. 

한마디로 집안 싸움없이 왕위를 잘 이어가는 전통을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전통이 무너져 가는 시대가 왔습니다. 북의 완충지대였던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남왕국 유다 역시 이제 강력한 외세의 침략 위기에 내몰린 것입니다. 

미가가  예언 활동을 하던 시기는 바로 이런 때였습니다. 

남왕국 유다가 생존하는 방식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들이 충돌하는 시점이었습니다.  이른바 자주(自主)냐 사대(事大)냐 하는 논쟁이 권력의 흐름을 결정하는 시대로 접어든 때였다는 것입니다.

독립문

쉽게 말씀드려서, 강력하고 힘센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고 비위를 맞추어 가며 왕조를 이어갈 것이냐, 나름대로 왕조의 전통을 고수하고 독립 노선을 걸을 것이냐의 싸움이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역사 이래 강대국의 영향 아래 있는  모든 약소국들이 겪어 온 모습입니다. 생존을 위한 투항이나 복종을 할 것인지, 죽음을 마다치 않는 항거나 투쟁을 할 것인지 결단이 필요한 때를 맞아 어느 것이 현명한 선택인지 자신들 끼리 노선 싸움을 벌이는 현상이지요. 

그런데  남왕국 유다나 이미 망한 북왕국 이스라엘이나 그 역사를 고백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유사한 다른 민족이나 국가들에 비해 선택의 기준이 남달랐다는 것을 머리 속에 그려 넣으셔야 합니다. 

바로 그들의 선택의 기준은 야훼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 이제 미가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미가는 예언자 이사야와 같은 시기에 남왕국 유다에서 예언 활동을 한 예언자입니다.

이사야서는 자그마치 66장이나 되는 긴 이야기인데 비해 미가서는 달랑 7장에 그칩니다. 그래 이사야는 대예언서, 대선지서로 부르는 네 개의 이야기 중 하나이고, 미가는 소예언서, 소선지서라고 부르는 열 두 개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그 ‘크다’, ‘작다’의 의미는 기록의 양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가는 이사야 못지않은 아주 중요한 예언자 가운데 한사람이랍니다. 

미가와 이사야는 같은 시대를 산 사람이지만 아주 다른 점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미가는 촌사람, 이사야는 도시사람이었고 

미가는 가난한 사람, 이사야는 있는 사람이었고

미가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이사야는 뼈대있는 가문이었고

미가는 시장 사람이었고 , 이사야는 왕궁 사람이었고

미가가 쓰는 말은 단순하고 직선적이었고, 이사야가 쓰는 말은 고상하고 문학적이었습니다. 

일테면 “내 겨레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며 내 겨레의 살을 뜯는구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바수며 고기를 저미어 남비에 끓이고 살점은 가마솥에 삶아 먹는구나.”라며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쏟아 붓는 미가의 독설(毒說)은 철저히 그의 면목을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미가 이야기 한번 더 이어집니다.

이해(理解) – 예언자 9

(당신의 천국 – 서른 여덟 번 째 이야기)

아시리아 왕은 바빌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사마리아 성읍들에 이주시켜 그들로 하여금 그 곳에서 자리잡고 살게 하였다.  – 중략  – 이렇게 그들은 야훼를 공경하면서도 각 민족이 붙잡혀 오기 전에 가졌던 풍습을 따라 저희의 신도 섬겼다.  – 중략 – 그들은 후손들도 대대로 이날까지 선조들의 풍습을 그대로 지켜 내려 왔다. – 열왕기하 17 : 24 – 41 

그러는 동안 유다와 갈릴레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 들어 선 교회는 안정이 되어 터전을 튼튼히 잡았고 주를 두려워하며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효가 차츰 늘어났다. – 사도행전 9 : 31(이상 공동번역) 

넷째 우리 동방은 오래 전부터 중국풍습을 본받아 문물, 예악, 제도를 다 그대로 준수하여 왔다. 그러나 지역이 다르고 사람의 성품도 같지 않으니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다. 그리고 거란은 우매한 나라로서 풍속과 언어가 다르니 그들의 의관, 제도를 아예 본받지 말라. – 고려사(高麗史) 권2, 세가(世家)  2. 태조(太祖) 26년, 이른바 고려 첫 임금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남왕국 유대 이야기로 넘어 가기 전에 몇가지 정리해 두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 순례 길에  놓여있는  이정표들을 확인하는 일들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첫째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하면서(주전 721년) 새롭게 등장하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는 수도 사마리아 성읍 인근의 모든 이스라엘인들을 아시리아의 포로로 잡아 갑니다. 그리고 그 사마리아 인근 성읍에 구다(Cuthah)와 바벨론 인근 지역의 사람들을 이주 정착시킵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확 물갈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성서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준답니다. 야훼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혼내시느랴고 야훼께서 사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잡아 먹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시리아왕은 잡아왔던 이스라엘 사제를 사마리아에 돌아가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sama5(사마리아의_전경)

새롭게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과 아시리아, 바벨론 등지에서 사마리아 땅에 이주한 이방인들 사이에서 새로 태어난 혼혈부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종교 역시 혼합종교가  되었습니다. 야훼 하나님 신앙과 이방 신이 섞이게 된 것입니다. 문화, 언어, 종교 등의 전통이 다른 새로운 종족이 그 좁은 땅 한 구석에 새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칠백 년이 훨씬 지난 예수 시대에 이르러 예수가 만났던 사마리아인들의 조상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우리들의 머리 속에 기억해 놓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는 유대인이었다는 사실과 예수 시대에 예수의 말씀 선포를 듣는 사람들은 이런 수백 년, 아니 거슬러 올라가 천 오륙 백년 전의 출애굽사건부터 그 말씀을 듣는 시대까지 모든 역사적 경험들을 공유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역사와 문화와 전통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한국인들과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엄연히 존재했던 서로 다른 생각들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행위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어떻게 이해되었으며, 결국은 그 땅에도 그리스도 교회가 들어서게 되었다는 사도행전의 기사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들만의 역사적 경험을 알고 넘어가자는 뜻입니다. 

두번 째는  호세아와 아모스의 심판 예언은 곧 다가올 일에 대한 선포였다는 점을 머리 속에 기억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아오지 않으면(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그들의 예언, 곧 야훼의 선포는 단지 한 세대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바로 현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훼의 선포에 대한 응답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멀지 않은 시간에 야훼의 날(아모스가 사용한 말입니다)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 응답을 하라! 그러나 시간을 주겠다. 다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로 정리할 수 있는 예언자들의 선포였다는 점을 기억하고 가자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우리들이 종말론, 또는 종말 신앙, 묵시 사상 등을 이야기할 때 아주 중요한 이해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 째로는 이제 남쪽 왕국 유대의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그들만의 역사적 경험을 다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처지가 비슷한 경험들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최근 십수년 사이에 각 나라와 서로 간의 정세에 따라 작동했다가 말았다가 하는 기구가 하나 있지요. 바로 육자회담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대한민국과 북조선 인민 공화국, 이렇게 여섯 나라가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벌려 온 일련의 회담을 일컫는 것이지요. 

한반도는 남북 양 당사국을 둘러 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강대국 사이에  힘의 역학관계에 따라 영향을 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비단 21세기에만 일어난 일은 아니지요. 고조선 이래 오늘까지 북방세력과 바다 건너 일본, 20세기 이후에는 유럽과 미국의 영향을 피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지요. 

그래 자주(自主)와 사대(事大),  민족의 주체를 찾다 멸망하느냐 비록 굴종이라도 번영의 길을 택하느냐 등등의 단순 이분법적인 싸움이 결코 그치지 않는 역사를 지니고 온 것이지요. 

바로 남왕국 유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런 역사적 경험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북에는 아시리아, 북동엔 바벨론, 남쪽에는 이집트라는 강대국들이 에워 싸고 있는 상황에서 약소국 유대가 선택할 수 있는 길 역시 자주와 사대, 주체와 굴종 같은 이분법적 선택아래 놓여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만 우리 한민족이 한반도에서 고민했던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판단과 결정 기준이 바로 야훼 신앙을  근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야훼 신앙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자!  이 정도 머리 속에 꼭 기억해 두시고 남왕국 유대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 첫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가로 하겠습니다.

식(食)과 색(色) – 예언자 8

(당신의 천국 – 서른 일곱 번 째 이야기)

“이 땅에는 사랑하는 자도, 신실한 자도 없고 이 하나님을 알아 주는 자 또한 없어 맹세하고도 지키지 않고 살인과 강도질은 꼬리를 물고,  가는 데 마다  간음과 강간이요, 유혈 참극이 그치지 않는다.” – 호세아 4 : 1-2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에집트에서 불러 내었다. 그러나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 중략 –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이 아니다. – 호세아 11 장 전체를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상 공동번역) 

1994년 8월 플레이보이사는 웹사이트를 개설함으로써 웹을 받아들인 최초의 대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 경영진은 <플레이보이>가  웹사이트가 있는 최초의 미국 잡지였다고 말한다.  – Peter Nowak의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Sex, Bombs, and Burgers)에서 

여호수아, 예수, 호세아라는 이름의 공통점은 바로 그 뜻에 있습니다. 모두 “야훼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호세아의 뜻처럼 호세아의  예언 및 메세지는심판과 멸망을 넘어선 구원에 촛점이 있습니다. 

타고나기를 여러 남자들을 거칠 운명이었던 아내 고멜에 대한 호세아의 사랑은 바로 구원하시는 야훼에 닿아있는 것입니다. 

“너는 정부와  놀아난 네 아내를 찾아 가 다시 사랑해 주어라.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에게 마음이 팔려 건포도 과자 따위나 좋아하는데도 이 야훼가 여전히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 주어라.”(호세아 3 : 1) 

끊임없는 야훼 하나님과의 약속과 계약을 위반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직 아내 밖에 모르는 순결남 호세아를 버리고 바람난 고멜과 견주어지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야훼 하나님과 예언 선포자 호세아가 동일시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야훼 신앙에 대한 모습 뿐만 아니라 실제 여로보암 2세 당시의 사회적 실상을 그린 호세아 4장 1-2절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정말 막장으로 치닫는 사회를 보는 듯합니다. 

살인, 강도, 사기, 간음, 강간, 유혈 등등으로 표현되는 사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 또는 이 글을 누군가가 읽고 있는 시점의 그 날 하루 뉴스들을 훑어 본다면 그 사회는 바로 오늘이 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시기에  예언자로서 사명을 삶의 의미로 살았던 아모스는 사회정의에 촛점을 맞추어 예언 선포를 했다면, 호세아는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시대의 모순을 드러낸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아모스는 식욕(食慾)에 촛점을 맞추었고, 호세아는 색욕(色慾)에 촛점을 맞추어 예언을 했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식욕과 색욕은 사람들 일반이  피할 수 없는 욕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입니다. 

불가(佛家) 또는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오욕(五慾) -재욕(財慾), 색욕(色慾), 식욕(食慾), 명예욕(名譽慾), 수면욕(睡眠慾) – 도 따지고 보면 식(재욕,  명예욕, 수면욕)과 색으로 단순화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유가(儒家) 또는 유학(儒學)에서 말하는사단(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 역시 따지고보면 식욕과 색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서 나오는 사람의 본성을 말하는 것일겝니다. 

(신구약 이야기가 끝난 뒤, 교회시대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한인 기독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불교, 유교, 선교, 미신등의 버리지 못한 전통 – 그 버리지 못함이신앙생활에 득일수도 있고, 실일 수도 있는- 들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아무튼 사람들이 피해갈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과 색욕을 통해 죄를 짓는 이스라엘과 사람들을 향해 멸망과 심판,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이루고자하는 야훼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 아모스와 호세아였다는 것이지요. 

아모스는 부익부(잘사는 사람은 더 잘 살고), 빈익빈(못사는 사람들은 더 못사는)이라는사회현상과 권력을 지닌 자와 부림을 당하는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비인간적인 모습들을 향한 심판을 선포했다는 것이고요. 

호세아는 한편으로는 아모스와 동일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개인적으로 문란한 비상식적(이 말은 물론 야훼가 바라시지 않는 의미로)인 생활 태도에 대한 경고가 강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심판은 피해 갈 수는 없지만 끝내 버리지는 않고 안고간다는 야훼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선포는 야훼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의 크기를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식욕과  색욕은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죄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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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식욕과 색욕이야말로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고 사는 기술문명의 원천적인 힘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답니다.   CBS 온라인 뉴스 과학기술 전문기자인 Peter Nowak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전쟁, 포르노, 패스트푸드라는 세 가지 ‘나쁜 것들’이 현대 기술문명을 이끌었다고 말하면서  인간 문명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열쇠라고까지 이야기한답니다. 

음탕하고, 사람을 죽이고, 건강을 해치는 나쁜 것들이 거의 모든 기술을 낳게되는 원인이 된다면서 그런 실례들을 여러가지 들고 있답니다. 

일테면 포르노는 인간이 이성을 잃고 지갑을 여는 산업인데다 소규모 사업체의 특징상 혁신이 빨라, 온라인 카드 결제, 화상 처리, 심지어 장난감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기술이 쓸 만한지 보려면 포르노 업계에서 통하는지 보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Peter Nowak이 말하는 식과 색이 인류 기술문명의 발달에 기여한 점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호세아는 그의 예언과 그의 삶을 통해,  인간으로서 한계 곧 식욕과 색욕으로 어쩔 수 없이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들의 욕심보다 크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곧 다가올 멸망과 심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는 북왕국 이스라엘은 결국 기원전 721년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그 때의 일을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답니다. 

“이스라엘의 열 지파가 유대 밖으로 옮겨진 것은 선조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한 지 947년, 여호수아가  그들의 지도자가 된 지는 800년, 다윗의 손자 르호보암에게서 떠나 여로보암을 왕으로 섬기기 시작한 지는 240년 7새월 7일 만의 일이었다. 이런 비극이 이스라엘인들에게 닥친 것은 그들이 악을 버리지 않으면 이런 벌을 받을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율법을 범한 때문이었다.” – 유대고대사 9권 14장 

이제 남왕국 유대의 예언자들과 유대 멸망까지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운명 – 예언자 7

(당신의 천국 – 서른 여섯 번 째  이야기)

“나는 정말 부자가 되었다. 한 몫 단단히 잡았거든, 이 손이 닳도록 벌었는데, 누가 나를 부정축재했다고 하랴”라고  에브라임은 말한다만은, 너희를 에집트에서 이쓸어 낸 것은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이었다. – 호세아 12 : 8-9, 공동번역 

이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 이만이나 되고 가족도 많다.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 – 요나 4 : 11, 공동번역 

아모스와 같은 시대에 야훼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예언을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호세아와 요나입니다. 

먼저 요나 이야기는 세상에 참 많이 알려져 있는 것에 비해 그 이야기의 본 뜻을 아는 사람들이 그리 많치 않은 듯합니다. 요나서는 겨우  4장으로  이루어졌고 성경 페이지수로 네장이 채 안되는 짧은 내용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요나가 그 명령이 두려워 도망쳐 배를 탓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질 절체 절명의 위기를  맞지요. 그 풍랑을 잠재울 제사제물로 바다에 던져진 요나가 고래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내다가 야훼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나서는 야훼가 명령한 사명을 이룬다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고생시킨 야훼 하나님을 향해 투정을 부리고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달래는 이야기로 끝나지요. 

얼핏 그저 옛날에, 옛날에… 하는 동화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이 요나서가 성서 66권 안에 편집되어 들어가 있는 까닭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니느웨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라고 명령한 니느웨는 당시 신흥 강국인 앗시리아의 수도 서울입니다. 당시는 비록 위세가 조금 위축되었기는 했지만, 몇 십년 후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제국 앗시리아의 수도라는 말입니다. 

성서 요나서를 보면 야훼 하나님이 요나에게 명령하고 요나는 그 명령을 피해 도망가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유대고대사를 쓴 요세푸스는 그의 기록을 통해 이 야훼의 명령이 있기 전에 요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때 선지자 요나가 와서 ‘왕은 수리아와 전쟁하여 그들을 정복하고 국경을 넓히도록 해야합니다. 이것이 원래 가나안 땅의 경계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여로보암2세는 수리아를 공격하고 그 땅을 정복하기에 이르렀으니 모두가 요나 선지자의 예언대로 성취되었다.” –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9권 제 10장(특정 지명들을 빼고 약간 내용을 줄였습니다.) 

결론은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야훼의 명령을 받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에서 예언을 했던 사람이고 나름 성공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적국의 수도 그것도 만만치 않은 큰나라의 수도 서울로 가서 도대체 야훼신 이라고는 모르는 그 곳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안하면 니들 망해!”하는 소리를 외치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 도망친 것이지요. 

전체 이야기 구성은 그런데요. 우리가 정말 요나서를 통해 알아야 하는 것은 두가지가 있답니다. 

하나는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언자들이 새로 깨우쳐 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회개하면” 어느 민족이든 거두신다는 신의 새로운 약속입니다. 

이제 호세아로 넘어가지요. 

호세아  역시 아주 독특한 인물입니다. 민족의 역사, 민족의 운명과 자신의 일생, 자신의 운명을 같은 것으로 본(동일시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운명과 역사를 해석하는 잣대로 “사랑”을 사용하는데  그 사랑은 바로 “결혼관계”라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이야기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혼관계, 결혼약속 같은 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야훼 사이의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결혼관계, 결혼약속이란 전통적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맺는 약속이고 , 이 약속은  평생을 버리지 않고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지요. 적어도 호세아 이야기의 배경에도 이런 전통적 관습 이해가 바탕으로 깔려 있답니다. 

이런 “한남자와  한여자가 평생”이라는 개념이나 인식은 오늘날 많이 깨진 것이라고는 하지만 비단 오늘의 시점만이 아니라 역사 이래 어느 사회이건 비상식이 상식을 넘어섰던 때는 많았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있을 수는 있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타고나기를 여러 남자를 거쳐야 할 운명을 지닌 여자를 골라 장가를 들어야 하는 순결남 이야기라면 정말 흔치 않은 것일겝니다. 

호세아의 운명이 그런 것이었는데, 거기서 그치면 좋으련만 자식들마저 제 에미를 닮은 아이들을 두어야만 하는 피할 수 없이 타고난 것이라면 막말로 축복하고는 거리가 먼 인생인 것이지요. 

호세아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답니다. 

“야훼께서 호세아를 시켜 하신 말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너는 바람기 있는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아라. 이 나라가 야훼를 저버리고 음란을 피우고 있구나.” – 호세아 1 : 2 

참 예언자의 타고난 삶이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호세아의 예언의 또 다른 특이한 점은 심판과 멸망의 예언을 시작하면서 먼저 축복의 예언이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의 모래알 같이 불어나 셀 수도 없고 잴 수도 없이 되리라. 너희를 버린 자식이라 하였지만, 이제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자녀라 하리라.” – 호세아 2 : 1

자! 호세아의 본격적인 예언은 다음 글에서…

정의(正義) – 예언자 6

(당신의 천국 – 서른 다섯 번 째 이야기) 

저주받아라! 너희, 공평을 뒤엎어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 성문 앞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 말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자들아. – 아모스 5 : 7-8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 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 아모스 5 : 21-23 

북왕국 이스라엘 이백 년 역사(기원전 922년 부터 기원전 721년까지) 가운데 나라가 가장 융성했던 시절이 바로 여로보암2세가 통치하던 때였습니다.(기원전 786년에서 기원전 745년까지 40년) 

성서 열왕기하 14장에는 여로보암 2세 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맛 어귀로부터 아라바해에 이르는 이스라엘 영토를 되찾은 것은 그(여로보함 2세)였다. – 중략 – 이스라엘의 고생이 막심한 것을 야훼께서 눈여겨 보셨던 것이다. – 중략 –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하늘 아래서 지워버리지 않기로 하시고 요하스의 아들 여로보암을 시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또한 역사 기록에 따르면 여로보암 2세 때에 이미 북쪽 앗수르(아시리아)가 기세를 떨치며 수리아(시리아, 암몬)를 정복했답니다. 수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에게는 늘 성가신 존재였답니다. 외세에 대한 근심 하나를 던 것입니다. 

특히 여로보암2세는 나라 경제 운용에 특출한 재능을 발휘한 군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쪽 앗수르와 남쪽 이집트를 잇는 무역 통로를 장악하고 대상(隊商) 무역을 통해 국부를 쌓은 것입니다. 

실제 당시의 북왕국과 우시야가 다스리던 남왕국 유대를 합친다면 솔로몬 시대를 능가하던 시절을 구가하였답니다. 

영토도 넓히고 국부도 늘리고 이렇게 잘 나가던 여로보암 2세의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해 곧 닥칠 심판과 멸망의 날카로운 예언을 쏟아 부어었던 사람이 바로 아모스입니다. 

아모스는 북왕국이 아닌 남왕국 유대 땅 드고아 출신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예언자가 된 까닭을 밝힙니다. 

“나는 본래 예언자가 아니다. 예언자의 무리에 어울린 적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목자요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이다. 나는 양떼를 몰고 다니다가 야훼께 잡힌 사람이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가서 말을 전하라고 하시는 야훼의 분부를 받고 왔을 뿐이다. “(아모스 7장 14 – 15, 공동번역) 

이 말은 아모스의 예언이 거슬렸던 여로보암 2세가 그의 사제 아마지야를 시켜 아모스의 예언을 그치게 하고 이스라엘에서 떠날 것을 명하자 아모스가 자신이 받은 야훼의 명령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아모스 역시 예언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처럼 어느날 야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 명령에 따릅니다. 아모스는 엘리야처럼 무조건 명령에 따른 축에 속합니다. 

남쪽 출신으로 북쪽에 가서 예언을 하게 된 특성만큼이나 독특하게 그의 예언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에게  야훼 하나님의 선고를 먼저 내립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마스커스(다메섹), 가자, 블레셋, 띠로, 에돔, 암몬,  모압 등의 주변국가들에게 먼저 야훼께서 받은 예언들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유대에 대한 짧은 선고를 한 후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선고를 내립니다. 

아모스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해 내린 야훼 하나님의 경고는 크게 두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공평치 못한 사회에 대한 경고이고, 두번 째는 가짜 제사, 가짜 예배에 대한 경고입니다. 

여로보암 2세 치하의 북왕국 이스라엘은 잘 나가던 시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쌓인 부(富)와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치중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익부 빈익빈, 곧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부자는 곡간이 부족할만큼 자꾸 쌓이는 현상에 대한 경고입니다. 

특히 아모스는 가진 자들이 거짓과 허위와 권력의 힘으로 못가진 사람들은 속이고 누르는 사회 현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합니다. 

“되는 작게, 추는 크게 만들고 가짜 저울로 속이며…. 힘 없는 자 빚돈에 종으로 삼고…”(아모스 8장)라며 그 당시의 사회를 통렬하게 비난합니다. 

두번 째는 가짜 제사, 가짜 예배에 대해 야훼 하나님이 느끼는 역겨움을 알리고 결국 그 일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말리라는 예언을 강조합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을 버리거나 외면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예후왕 시절에 바알 신전은 다 부수고 바알을 신으로 섬기던 시절은 옛날 일이 된 때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 빠뜨렸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고 그 악습을 그대로 답습하였다.”(열왕기하 14 : 24)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로보암은 여로보암 1세 곧 북왕국 이스라엘의 시조왕입니다. 그의 죄는 이미 제가 말씀드렸듯이 야훼 하나님의 제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은 일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고 야훼 앞에서 드려야 할 모든 제사들 곧 모세의 계약법에 따른 모든 제사들과 십일조를 열심히 드리기는 하는데,  야훼는 얼굴을 돌리고 역겨워 하신다고 선포하는 까닭입니다. 바로  예배와 제사의 본질, 본 뜻은 잃어 버리고 의식과 겉치레만 남은 것에 대한 심판 예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모스가 야훼 하나님께 받은 참 제사, 참 예배의 본 뜻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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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의 입을 통해 내린 야훼 하나님의 선포랍니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처럼 넘쳐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 : 24, 공동번역)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표준 새번역 개정판) 

“Instead, I want to see a mighty flood of justice, an endless river of righteous living.” < NLT(New Living Translation) version>

 2013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아모스의 예언입니다. 

다음 글은 요나와 호세아의  예언입니다.

성숙(成熟) – 예언자 5

(당신의 천국 – 서른 네 번 째 편지)

이스라엘 백성들아너희가 나에게 있어 에디오피아 백성과 무엇이 다르냐? –야훼의 말씀이시다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이끌어  것이 나라면블레셋 백성을 갑돌에서 데려 내오고  시리아 백성을 키르에서 데려  것도 내가 아니겠느냐?  – 중략 –  ‘하나님이 설마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시겠느냐우리를 고생시키지는 않는다 하면서 못할 짓만 하는데도  백성이라고 하여 칼에 맞아 죽지 않게 하겠느냐? – 아모스 9 : 7-10. 공동번역

예언자에 의해서 심판으로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서 하나님은 백성을 변화시키며하나님에 대한 신실성을 회복하게 하신다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날 비로소 오랫동안 기다렸던 약속은 성취될 것이다이러한 사고 구조는 영원한 열쇠를 제시하였는데그것으로 유대 민족은 그들 자신의 역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하였다. – R. R. Ruether  The Radical Kingdom에서

혹시 ‘케빈 베이컨의 6단계 법칙(The Six Degrees of Kevin Bacon)’이라고 들어 보신  있으신지요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여섯 단계만 거치면  연결 된다는 법칙이랍니다 법칙의 이름으로 영화배우Kevin Bacon 사용하게  까닭은  TV방송 프로그램으로 시작된 “케빈 베이컨 놀이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비록 케빈 베이컨과 함께 출연한 경험이 없는 모든 헐리우드 배우들일지라도  두세 단계만 거치면  연결된다는 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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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2006년도에 마이크로 소프트사가 전혀 모르는  사람을 무작위로 걸러낸  조사를 해보니 평균 6.6 단계를 거치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밝혀 냈다고 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제가 지금 미국 동부에 살고 있는데요서부에 사는 이아무개나 서울에 사는 박아무개라는 사람과 저는 아무 관계도 없고 만난 적도 없지만 아는 사람들 여섯 단계만 거치면 뭔가 인연의 끈이 닿아 있다는말씀입니다.

세상  좁다는 이야기를 실감할  있는 법칙이지요실제 세상이 많이 좁아지기도 했고요세계 어느 곳에서 소리 소문없이 일어난 일이라도 금방 전세계적 뉴스가 되는 세상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  같습니다특히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같지요보도통제라는 전가의 보도를 지금 세상에도 아무 때나 휘두르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이건  문명천지인 서기 2013 오늘의 일이라고 치더라도세계사를  훑다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찾아   있답니다.

지금으로부터  이천 오백   쯤인 기원전 7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중국인도중동그리스 등지에서 아주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답니다사람들의 생각이 한단계 성숙되고 깊어지는 현상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것입니다.

우선 중국에서는 이미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공자맹자노자장자순자 등의 제가백가들이 이즈음에 나타났습니다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시대를 살다  때입니다그리스에서는 이솝부터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사상가들이 등장한 시대입니다. 

그리고 중동지방 가나안에서는 예언자들이 나타난 시기입니다.  

우리들은 지난 이야기들을 통해 모세와 야훼사이에 맺은 계약과다윗과 야훼 사이의 맺은 계약을 통해 신과 사람 사이의 맺은 계약의 범위가 넓혀지는 것을 알아본  있습니다.

이제 예언자들을 통해 일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계약의 범위가 더욱 넓고 깊어짐을 알게  것입니다.

예언자 이전 시대의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관하는 신이었습니다예언자들은  역사와 범위를 세계사와 모든 민족으로 넓혀 놓습니다이스라엘 민족 뿐만 아니라 이방 모든 민족들의 현실과 미래가 야훼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고백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만의 신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을 믿는 모든 민족들의 신으로 확장시킨 예언자 사상은 신약시대에 이르러 그리스도 예수와 바울의 구원 선포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인 셈입니다.

중국이나 그리스에서  시대의 이루어진 일들이 신화의 세계에서 역사의 세계로 넘어가는 일이었듯이야훼신앙은 민족 단위의 제사종교에서 죽을  밖에 없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구속신앙으로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예언자들이 외치는 정의공의공평가짜 제사에 대한 심판불공정한 재판에 대한 경고부익부 빈익빈 등의 사회 부정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주 등등의 심판과 멸망에 대한 예언들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예언자들의 예언은  훗날 일어날 일들에 대한 점술 같은 것이 아닙니다이제  닥칠 일들에 대한 예견입니다그러나 예언을 듣는 사람들이 선택할  있는 짧은 시간의 여유는 제공합니다야훼 하나님께 돌아 (회개)선택을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기회를 받느냐 안받느냐는 철저히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언은 오직 지금오늘이라는 현재의 선택을 결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서 예언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언자가 아닌 예언을 먹고사는 방편으로 삼는 가짜 예언자들도 많았다고 합니다거짓 예언자와  예언자를 구분하는  가지 방법들도 성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가장 먼저는 예언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받는 고통입니다 고통을 어떻게 받아 드리느냐에 따라 참과 거짓이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예언을 빙자하여 불의한 재물이나 권력을 탐하는지의 여부도 참과 거짓을 가리는 잣대로 이야기합니다야훼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판의 때라고 판단함에도 불구하고지금이 제일 좋은 때고  나가는 평화로운 시대라고 선언하는 거짓예언자들에 대한 경고도 이어집니다.  

이제 처음으로 만나게  예언자는 “겉치레  제사보다는 정의가 먼저다라고  선언했던 아모스입니다.

응답 – 예언자 4

(당신의 천국 – 서른 세 번 째 이야기)

그가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 – 에제키엘(에스겔서) 18 :23 

예후가 소리쳤다. “그 계집을 떨어뜨려라.”  내시들이 그 여자를 떨어뜨리자 피가 담벽과 말에 튀었다. 예후가 탄 말이 그 몸을 짓밟았다. –  열왕기하 9 : 33, 이상 공동번역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신(神)은  이 세상의 삶의 조건적인 관계들 안에서 그것들과 함께  또 그것들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 John Robinson 의 책,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에서 

엘리야 이야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여자가 한 명있습니다. 아합왕의 왕비인 이세벨입니다. 이 여자는 시돈 왕 에드바알의 딸입니다. 아합왕이 “선대의 어느 이스라엘 왕들보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의 속을 썩”(열왕기상 16 : 33)힌 배경에는 바로 이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남북으로 왕국이 갈리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임금이 된 여로보암의 죄는 성소에 야훼 제단을 쌓고 거기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일에서 시작됩니다. 여로보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남왕국 유대와 달라야 한다는 신생국가로써 내세워야 할 국가적 모델이 필요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똑같은 야훼를 섬기지만 남왕국 예루살렘과 다른 형태의 제사 방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죄를 쌓게 된 배경입니다. 

여로보암 이후의 왕들인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때까지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런 모습에서 크게 엇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아합왕 때에 이르러 야훼는 철저히 버려지고  이세벨의 신인 바알이 나라의 신으로 섬겨지게 됩니다.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 사당이 들어선 것입니다. 또한 아세라신의 목상도 만들어 세워 섬겼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가 갑자기 등장하게 된 것이고, 갈멜산에서 일 대 850 싸움까지 겪게되고 바알신을 섬기던 예언자들을 모두 죽이는 일대 숙청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 뒷심은 바로 야훼만이 하나님이라는 백성들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 이후 목숨줄 연명하고자 도망친 쪽은 아합왕이 아니고 엘리야였습니다. 

여전히 권력은 이세벨과 아합의 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를 죽이고야 말리라”는 이세벨의 다짐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9 : 2) 

엘리야가 느닷없이 아합왕 앞에 나타나 몇 년 동안 비는커녕 이슬 한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며 뚱단지 같은 소리를 전할 때 아합왕 입장에서는 “이런 미친 놈!”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삼년 이상 비 한방울, 이슬 한방울도 내리지 않는 가뭄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내기를 받아주고 내기에서 졌습니다. 그 내기가 끝난 후 기적처럼 비가 내렸습니다. 

백성들의 환호속에 바알신을 섬기던 예언자들의 일대 숙청도 일어났습니다. 

보통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쯤 엘리야가 맞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게 맞을 것이라고 하겠지만 이세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하여 엘리야를 죽이려 나섭니다. 

이쯤 두가지를생각하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이세벨의 생각과 엘리야의 행동입니다. 

첫째는 이세벨이 정말로 비정상적이었을까 하는 물음입니다. 물론 성서 이야기의 관점에서 보면 비정상적으로 야훼 하나님께 도전을 한 것입니다. 아니 야훼 하나님과 엘리야를 따로 떼어 놓고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이세벨의 생각과 행동이야말로 권력이나 인간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이 살아가는 오늘이라는 현실속에서 이세벨의 생각과 행동이야말로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은 아닐까? 

두번 째는 엘리야가 느낀 두려움과 그가 선택한 도망질입니다. 그가 이제껏 보여 준 자신감과 야훼의 대변자로서 보여준 준엄함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다 이긴 싸움인데 무엇이 그리 겁이 나 도망을 쳤을까? 그러나… 

혹시 엘리야의 생각이나 행동이야말로 진실과 현실적 힘 앞에서 보이는 인간들의 참 모습은 아닐까?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구태여 목숨까지 걸 이유가 있을까? 

갈멜산에서의 싸움과 달리 바로 이 싯점에서의 승리자는 이세벨이었고 도망자는 엘리야였습니다. 

이세벨은 그 뒤로 거침없는 행보를 합니다. 나봇이라는 평민의 포도원을 뺏습니다.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포도원의 주인 나봇을 돌로 쳐 죽입니다. 갈 때까지 나아가는 권력과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편 엘리야는 도망길에서 두려워 떨다가 야훼(천사)의 도움으로 호렙산에 들어가고 그 곳에서 야훼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야훼에게 “돌아가라 ”명령을 받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5절에 나오는 야훼의 명령인 “돌아가라”는 명령형 동사의 뜻에는 “회개하라”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야훼의 예언과 명령을 받습니다. 그의 제자 엘리사를 점지받고, 아합왕 이후의 일들에 대한 예언을 박습니다. 이세벨의 죽음에 대한 예언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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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벨에 대한 예언은 이렇습니다. “나봇의 피를 핥던 개들이 같은 자리에서 네 피도 핥으리라.” 

세월이 흘러 아합왕은 죽고, 그를 이어 아하지야, 여호람이 왕위에 오릅니다. 이 때 까지도 이세벨은 권력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바알신도 여전히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섬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엘리야는 자신이 떠날 시점을 알고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후 그를 이은 엘리사가  일으킨 많은 기적 이야기들을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성서에 기록된 기적 이야기 중 예수 다음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지켜낸 사사(판관)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명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예후 장군이 이즈음 말로 하면 구테타를 일으켜 성공을 합니다. 군사혁명을 통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조가 바뀌는 것입니다. 

북왕국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많은 피를 흘려 왕이 된 사람이 바로 예후왕입니다. 예후는 바알신을 모셨던 이들을 모두 죽여 없앴습니다. 왕 여호람을 비롯하여, 바알사당을 사마리아에 세웠던 아합왕의 후손들 모두를 죽여 없앴습니다. 이세벨도 이 때 죽음을 면치 못했고, 그는 엘리야의 예언대로 개밥이 되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에제키엘)이 전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회개하는 인간을 기다리시는 모습”입니다.  엘리야와 이세벨의 모습을 통해 “회개하는 인간을 기다리는” 야훼 앞에서 응답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와 엘리사의 뒤를 따르는 예언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가려 합니다. 이른바 4대선지자와 12소선지자들의 이야기를 시대별 순서로 다루려고 합니다.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 사이에서 드러나는 야훼 하나님의 모습, 그리고 우리들의 천국의 모습들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도망 2 – 예언자 3

(당신의 천국 – 서른 두 번 째 이야기) 

한낮이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말하였다. “바알은 신이니까, 더 크게 불러 보아라. 깊은 사색에 빠져 계신지도 모르지. 외출중인지 아니면 여행중인지 혹은 잠이 드셨는지도 모르니 어서  깨워 보아라.” – 열왕기상 18장 27 

엘리야는 두려워 떨며 목숨을 구하여 급히 도망쳤다. – 중략 –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선조들 보다 나을 것도 없는 못난 놈입니다. “ – 열왕기상 19장 3-4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중략 –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맞추지도 않았던 칠천 명을 남겨 두리라.” – 열왕기상 19장 18, 이상 공동번역 

엘리야에 대한 성서 기록을 읽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어렸을 때 본 영화들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들을 영화화한 십계니 솔로몬과 시바여왕, 벤허 같은 영화들은 당시 학교에서 단체로 구경갔었던 것 같습니다. 1960대 이야기입니다. 

당시 서울 4대문안에 있었던 개봉관들, 일테면 퇴계로 대한극장,  충무로 명보와 스카라 극장, 종로의 단성사나 피카디리 극장 같은 곳은 그렇게 학교에서 단체로 갔을 때나 들어가 보았던 곳들이었을 겝니다. 

그런 개봉관들 말고 사대문 밖 동네들에는 저마다  동네극장들이 있었답니다. 영등포, 용산, 보광동, 응암동, 제기동 등등 말입니다. 제가 살던 신촌에도 그런 동네 극장이 두군데가 있었답니다. 신영극장과 대흥극장이랍니다. 신영극장은 제가 기억해 낼 수 있는 세월 이전에  이미 그 곳에 있었고, 대흥극장은 제가 국민학교 때 세워진 곳입니다. 

중고등학교 때 공짜표를 자주 얻을 수 있었던 곳들이지요.(그 공짜표의 출처는 정확히 기억에 없습니다.) 당시 대흥극장은 동시상영관이었습니다. 입장권 하나로 영화 두편을 볼 수 있었던 극장이었지요. 물론 두 개의 영화들 중간중간이 잘리기도 한 영화지만, 시간 보내기로는 안성맞춤이었던 곳이었지요. 

당시 주로 그 곳에서 상영했던 영화들은,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같은 당시 마카로니 웨스턴이라고 부르던 서부영화들이거나 돌아온 외팔이 시리즈 같은 홍콩 무협영화였답니다. 클리턴 이스트우드, 왕우(王羽) 같은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들이었지요. 

70년대 들어서는 제 머리도 굵어져 갔고, 사대문 안 출입도 잦아진 편이라 동네 극장 출입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중국 무협영화를 다시 보게 된 것이 아마 대학 이학년 때인 1973년도였을 겝니다. 몇 해 전에 지병을 앓다 먼저 간 친구를 비롯한  몇 아이들과 함께 보았던 영화랍니다. 아마 단성사였을 것입니다. 브루스 리 바로  이소룡의 영화 정무문(精武門)입니다.

정무문

쌍절곤과 기성(奇聲)으로 당시 동네 꼬마들의 우상이 된 이소룡의 첫영화였지요.  성서 엘리야 이야기를 읽다가 떠오른 영화는 바로 이 정무문이랍니다. 

일대 백의 싸움도 그렇거니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일본 군인들이 겨누고 있는 총을 향해 붕 떠서 발길질을 하는 이소룡의 정지된 모습이 떠오르더란 말씀이지요.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만 관객들의 머리 속엔 일본군의 총에 벌집이 된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져 있을 줄도 모를 일입니다. 

엘리야라는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야훼다.” 또는 “야훼는 나의 하나님이다.”라는 뜻이랍니다. 엘리야가 하는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열왕기상 17 :1, 18:15)”라는 말은 바로 자신의 삶의 의미였답니다. 

엘리야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부터 갈멜산에서 일대  850의 대결을 벌이는 순간까지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마치 정무문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소룡이 일본군들이 겨눈 총을 향해 붕 떠서도 결코 죽지 않고 다 때려 누이는 장면을 연상케 한답니다. 

도대체 겁이 없습니다. 왕과 권력이 잘못 되었다고 무조건 찾아가서 “내가 믿는 신이 그러는데 너희들은 이제 몇 년 동안 비는커녕 이슬 한방울도 볼 수 없을 것이다.”고  말이 예언이지 듣는 입장에서는 공갈을 하는 것입니다. 

일테면 백악관에 가서 “내가 믿는 신이 그러는데 앞으로 몇 년 동안 미국 땅에 비는 커녕 이슬 한 방울 안내릴거야! 그게 다 너와 민주당 탓이거든”이라고 하던가, 한국의 청와대에 가서 “박근혜와 새누리당 때문에 몇 년 동안 한반도에 비 한방울,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을 것이다. 이건 신의 계시다.”라고 한다면 그게 제 정신인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예언자의 아버지격인 엘리야가 그랬듯이 이후로 저희들이 계속 이야기하려고 하는 예언자들은 어찌보면 다들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랍니다.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느닷없는 선언을 하거나, 현실속 이야기가 아닌 꿈같은 이야기를 하거나, 듣는 사람들인 권세를 쥔 이들에게 딱 맞아 죽기 십상인 이야기들을 겁없이 하는  요즘 말로 하자면 돌아이(乭아이, 또라이)가 될 터이고 좀 점잖은 말로 하자면 반체제(反體制)인사들이었답니다. 

뭐 하나님의 힘이 함께 한 사람들었고 믿음이 있었기에 그리했다고 쉽게 이야기들도 합니다만 당시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본다면 그게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아무튼 성서는 당시 북 이스라엘에 실제로 삼 년이 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정말 목이 타는 쪽은 아합왕을 비롯한 권력을 쥔 자들이었습니다. 때를 맞추어 야훼는 엘리야에게 명합니다. “가라, 만나라, 그러면 내가 비를 내리리라.”(열왕기상 18 : 1)” 

엘리야는 그 명령에 사족을 달지 않습니다. 갑니다. 만납니다. 그리고 대결 신청을 합니다. 

“야훼 하나님을 대표한 나 엘리야와 바알신을 대신하는 바알 예언자들  450명, 아세라신을 대리하는 예언자들  400명 그렇게 1대  850의 대결”을 신청하는 것입니다. 

갈멜산에 제단을 두군데 쌓은 후 소 두마리를 잡아 각 제단에 올려 놓고 그 제물에 하늘에서 내리는 불을 불러오는 쪽이 이기는 게임을 한 것입니다. 일 대 팔백 오십으로 말이지요. 아무리 믿는 구석이 있다고 하여도 이거 목숨 내놓고 하는 일인데 아무나 쉽게 던질 결투 도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이 때까지 거침이 없습니다. 심지어 브루스리, 이소룡이 싸우기 전에 코 한 번 쓱 만지듯이 850명 상대를 비웃기까지 합니다. “니들이 믿는 신은 잠 자냐?” 하면서 말입니다. 

이 결투에서 엘리야는 보기좋은 승리를 거두고 야훼 하나님이 유일한 신임을 온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선포합니다. 선포뿐만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신의 예언자들을 다 잡아 죽이기까지 하는 혁명을 이룬답니다. 물론 백성들의 환호속에서 말입니다. (열왕기상 18: 39-40) 

마치 이소룡이 일본군들이 겨눈 총을 향해 날아가 일본군들을 다 때려 죽이는 장면이 연상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야기가 거기서 끝난다면 엘리야 이야기도 그저 무협지 수준의 영화 스토리가 될 것입니다. 

분명히 야훼의 명령에 따라 가짜 신들의 세력을 죽이고 비도 내리고 모든 기적을 다 보여 주었건만, 아니 백성들 조차 모두 야훼가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소리쳐 고백을 했건만, 목숨이 위태롭게 된 것은 아합왕과 권력이 아니라 엘리야 였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전개상 줄행랑을 치거나 크게 뉘우쳐야 할 사람과 세력은 아합왕과 권력이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고자 도망치고 숨게 된 쪽은 다름아닌 엘리야였답니다. 

그렇게 기세 등등하게 왕과 권력을 향해 도전했던 엘리야가 승리를 거두고도 도망치고 몸을 숨기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야기를 조금 소급에 돌아가 보기로 하지요. 

아합왕의 아버지 오므리왕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룬 사람이었다고 했지요. 북왕국의 시조인 여로보암왕부터 오므리왕까지는 이방신들을 섬기면서 야훼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았답니다.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아합왕 때에 이르러서는 야훼를 부인하고 이방신을 섬기는 시대로 접어 들었던 것입니다. 부끄러움 조차 모르는 시대로 접어 든 것이지요. 

엘리야가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랍니다. 

(이즈음 대한민국의 뉴스를 볼 때 마다 자꾸 드는 생각이 바로 ‘부끄러움 조차 잊어버린 모습’이랍니다.) 

결국 어느 한 쪽의 파국을 부르게 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