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 – 광야 3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11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 로마서 1 : 15 – 16, 개역개정에서 

그러므로 로마에 계신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나는 그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 로마서 1 : 15 – 16, 공동번역에서 

신약성서는 그에게서 옛 세계를 마감하는 종말론적 사건 곧 하나님이 하신 행동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이 메세지에서 종말론적 사건은 항상 현재가 되는 것이며, 믿음에서 그것은 항상 사건으로 되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서 옛 세계는 끝났다.  –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이 쓴 “역사와 종말론(History and Eschatology)”에서 

지난 주일에 모처럼 뉴욕 맨하턴에서 딸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었답니다. 제 일정 가운데 하나였던 한인거리에 있는 책방 방문도 딸아이와 함께 였답니다. 이즈음 책을 사는 일은 인터넷 서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그래도 책방 나들이가 주는 감흥에는 또 다른 맛이 있는 것이기에 간만에 있는 도시 구경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정이었답니다. 

서대에 꽂힌 책들을 훑다가 눈에 들어 온 책이 “사진으로 본 1954년 한국”(제가 이 책은 사오지 않아서 정확한 제목이 아닐 수도 있답니다.)인가하는 사진첩이었습니다. 딱  60년 전 한국의 모습들을 담은 사진첩이었습니다. 

그 사진첩의 책장들을 넘기다가 아내와 딸아이를 불렀답니다. 그리곤 우리 세 식구는 제가 태어났던 해, 한국의 모습들이 담긴 사진들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옛날 우리시대와 아버지 시대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딸아이는 연신 고개를 잘레잘레 흔들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고, 아내는 “맞아, 맞아”하거나 “정말 이랬나?”하며 그로부터 십수년 뒤였을 자신의 기억과 짝을 맞추던 것이었습니다. 

지난간 육십 년의 경험들은 비단 저에게만 일어난 일들이 아닙니다. 그 시대를 함께한 우리 아버지의 경험과 할아버지의 경험 나아가 증조 할아버지의 경험과 아들과 손주와 증손주들이 함께 이어져 경험한 세월입니다. 

무릇 모든 기록이란 그렇게 세월의 경험들을 담는 것입니다. 그 기록에 자신이나 공동체의 믿음을 담아내는 일이 신앙고백서이고, 그 고백들을 모아 경전화한 것이 바로 성서라는 게 제가 이해하는 역사 가운데 이루어진 성서입니다.

“성서형성사”를 담아 낸 책들만해도 수도 없거니와, 제가  새롭게 쓴다하여도 제법 길게 쓸 수 있을만큼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성서가 이루어지기까지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서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아니면 나중에 교회사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성서형성사에 대한  것들은 보충하기로 하고요, 오늘은 아주 간략하게 광야의 세례요한을 만나러 가기 위해 놓여진 이야기만 해보려고 합니다. 

도마복음

혹시 성서의 사도행전말고  도마행전, 안드레행전, 빌립행전, 베드로행전, 요한행전, 바울행전, 데 클라 행전이라는 책들이 있다는 말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아니면 애굽인의 복음, 도마 복음, 마띠아 복음, 바돌로메 복음,  12사도의 복음, 바실리데스 복음, 아벨레스 복음 이라는 이름들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계시록이 요한계시록 뿐만 아니라 베드로계시록, 바울계시록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 있었다고 전해지거나 실제 오늘날 발견되어진 책들도 많고요, 도마복음서 등은 한국어 번역으로도 이미 많이 알려진 것 가운데 하나랍니다. 

예수의 부활승천 이후 약 20-30년 후에 쓰여진 바울서신들을 비롯하여 마태,마가,누가,요한을 비롯한 복음서들 말고도 이렇게 이름만으로도 많은 기록들이 쓰여진 것은 기원 후 50년에서 150년 사이의 일입니다. 

예수이후 처음 기록들이 생기기까지는 구약성서가 초기 기독교인들의 성서였고, 바울서신들이 쓰여지고, 예수와 함께 했던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자 구전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들이 마구 문서화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무렵 세상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답니다. 유대라는 나라는 멸망을 했고, 유대의 종교적 경험을 일부 이어받은 신흥종교인 기독교는 로마가 닦아 놓은 길을 타고 헬라(그리스)정신과 함께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무렵 쏟아져 나온 많은 책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오늘날 우리들이보는 신약성서 27권 안에 들어갔고 어떤 것들은 잊어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서신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중에 바울서신들을 이야기할 때 드리기로 하고요, 우선 4복음서만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사백년전인  17세기까지 사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순으로 쓰여졌다고 믿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성서는 하나님이 주신 영감에 따라 기록된 것이라고들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역사비판이라는 새로운 연구 잣대를 들이대고 성서를 연구하는 일들이 일어나면서 복음서가 오늘날처럼 만들어진 이유들을 학문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한답니다. 

처음 나온 이론은 원복음가설(1794년 아이히홀른의 주장)로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복음서의 원 자료가 되는 책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는 주장이었는데 이건 이미 오래전에 무너진 이론이고요. 

그 후에 구전설, 단편설, 마가복음 원전설, 두 자료설(마가복음과 Q자료), 네 자료설(마가복음과 Q자료, M자료, L자료) 등의 이론들이 있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복음서에 대한 학문적인 결과들이므로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오면 또 새로운 학설이 생기게 마련인 것이지요. 

다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지금 우리들이 읽고 보고 있는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는 역사물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읽어야 하는 신앙고백서라는 점입니다. 이게 바로 진실인 것이지요. 

그리고 누가 어떤 환경에서 이런 믿음의 고백서들을 만들어 놓았느냐를 아는 것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내 삶과 연결 지을 수 있는 바른 판단의 근거를 세우는 일일 것입니다. 

이쯤 변죽 울리는 일을 마치고 이천년 전 세례요한이 서 있었던 광야로 나아갑니다.

생각의 크기 –광야 2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10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또는 교묘하게)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 베드로후서 3 : 15 – 16, 개역개정판에서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로가 하느님께로부터 지혜를 받아 여러분에게 써 보낸 바와 같습니다.  바울로는 어느 편지에서나 이런 말을 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더러 있어서 무식하고 마음이 들떠 있는 사람들이 성서의 다른 부분들을 곡해하듯이 그것을 곡해함으로써 스스로 파멸을 불러 들이고 있읍니다.  – 베드로후서 3 : 15 – 16,공동번역에서 

Don’t forget that the Lord is patient because he wants people to be saved. This is also what our dear friend Paul said when he wrote you with the wisdom that God had given him.  Paul talks about these same things in all his letters, but part of what he says is hard to understand. Some ignorant and unsteady people even destroy themselves by twisting what he said. They do the same thing with other Scriptures too. – 2 Peter  3 : 15 – 16, CEV(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서 

사람들이 모이면 공통화제(話題)가 있게 마련입니다. 자질구레한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부터, 공통 관심사나 공통의 경험들,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각자의 의견들까지 이야기거리들이 있는 것이지요. 

모인 이들의 연령, 성별, 취미, 교육, 직업, 경제, 정치, 종교적인 입장에 따라 그 공통화제들은 더욱 다양해 질 수도 있거니와, 구성원들의 수준에 따라 그 화제의 격도 달라지는 법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이런 저런 모임에 나가는 일들이 줄어드는 까닭은 여러가지들이 있겠지만 제 경우엔 이런 공통화제 속에 쉽게 제가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우선이랍니다. 일테면 우선 제가 골프를 치지 않는다거나 아직 손주를 보지 못했다거나하는 이유로 제 또래들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주화제에 끼어들 수 없는 것은 참을만한 것이랍니다. 그런데 미국이나 한국의 정치 이야기, 종교 이야기, 사회 현상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이어지면 거의 제가 외톨이가 된답니다. 

이제 제 의견을 내세워 논쟁을 주도할 나이도 아니거니와 서로가 다 머리가 굳을대로 굳은 사람들 끼리 모여 자기 먹고 사는 일과 부대끼는 일도 아닌 화제에 시간과 열정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우선하게 되면서 애초 그런 모임에 나가는 일을 줄여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십수년 전에 제가 동네 일을 한답시고 초랑이 방정을 떨며 동네를 휘젖고 다니던 때가 있었답니다. 그 무렵 워낙 입성에 관심없는 제가 단지 편하다는 이유로 개량한복을 좀 입고 다녔답니다. 그 무렵 동네 양반 한 분이 조심스럽게 제게 건넨 말이랍니다. “누가 그러는데… 당신 고향이 전라도고, 약간 빨갱이랍디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느낌은 그저 황당함이었습니다. 그래 제가 물었답니다. “왜요?” 라는 제 물음에 대한 답을 듣고서는 정말 쓴 맛으로 웃을 수 밖에 없었답니다. 서울 신촌내기인 저를 전라도로 바꾸어 놓고  민주주의 신봉자이자 예수쟁이이 저를 두고 ‘약간 빨갱이’로 생각한 사람의 수준과 발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든 다른 생각이었지요. 도대체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전라도는 어떤 곳이고, ‘약간 빨갱이’란 어떤 사람일까? 

아무튼 그 까닭이란 첫째 제가 개량한복을 입고 다닌다는 것과 둘째 당시 제가 한인신문에 컬럼을 쓰면서 교회를 비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답니다. 

1-14

그리고 오늘, 뉴욕 타임즈가 ”Politicians and Textbooks(정치가들과 교과서들)”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고  이 사설에 있는 한 문장인 “박씨의 아버지인 박정희는 일제시대시대 때 일본 제국 군대의 장교였고, 1962년부터 1979년까지 남한의 독재였다. Ms. Park’s father, Park Chung-hee, was an Imperial Japanese Army officer during the colonial era and South Korea’s military dictator from 1962 to 1979.”라는 문구에 대한 이런 저런 뉴스들과 그에 대한 반응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랍니다. 

역사 이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똑같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무엇을  “믿고  사느냐”가 바로 옳고 그름의 잣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뉴욕 타임즈 사설을 보는 관점들은 저마다 생각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무엇때문에 그 신문이 하필 이 싯점에서 그런 글을 실었느냐는 원인 분석에서부터, 단순한 찬반 양론까지 그 이야기의 옳고 그름을 떠나 여러 생각과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외교부가 직접 유감을 표현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든 제 첫번 째 느낌은 “아! 이 어쩔 수 없는 국내용이라니”라는 것이었답니다. 

NY Times 사설이 황당함으로 다가온 축들은 아마 친미(親美) 일변도의 생각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진실은 그것을 믿는 사람의 생각의 크기에 달린 것일겝니다. 

이쯤 제 이야기의 주제로 돌아갑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나 읽고 계시는 당신이나, 이천 년전 팔레스타인에서 예수(이 이름도 순전히 한국 이름이지만)라고 이름부르는 한 사내가 살다 간 것은 일단 믿고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가짜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과거형입니다. 과거 언제냐고요? 지금으로부터 거의 이천년전인 기원 후 100년에서 150년 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느냐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답니다. 

이른바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자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면 구원이라는 것이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종교적 발상이 전제 되는 것인데(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모든 이야기의 바탕은 바로 믿음이랍니다.),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은 구원이란 어떤 “비밀스러운 앎 곧 영지(靈知gnosis)”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주장이었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첫번 째 이단으로 알려진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사람이 아니었다고 주장한 것이고, 그들이 역사 속에서 패배한 것은 예수가 사람이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후서의 기록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답니다. 

바울이 남긴 편지를 놓고 내 생각이 옳다, 아니 그르다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 일들이 일어난 것은 아직 성경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 잡기 수백년 전인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고작 몇 십년이 지난 무렵이었습니다. 

예수의 사역 이전에 광야에서 외쳤던 세례요한의 참 모습을 찾는 길은 바로 이런 “기록”이 이루어진 일들을 짚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과 진실 – 광야 1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9 

주변은 고요하다. 세례자가 나타나 외친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잠시 후 예수가 와서, 자신이 오실 ‘사람의 아들’임을 알고, 이 세상의 수레바퀴를 돌려, 정상적인 모든 역사를 끝장낼 마지막 혁명으로 굴러가도록 만든다, 그 수레바퀴가 굴러가기를 거부하자, 그 분은 그 위에 자신의 몸을 던진다. 그러자 그것이 굴러가 그 분을 깔아 뭉갠다. 그 분은 종말론적 조건들을 초래하는 대신에, 그것을 파괴시켰다. 수레바퀴는 앞으로 굴러가, 자신을 인류의 영적 지배자라고 생각하고 역사를 자신의 목적대로 바꾸려 했을 만큼 충분히 강했던,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한 인간의 깔아 뭉개진 몸은 그 바퀴 위에 매달려 있다. 이것이 그 분의 승리이며 그 분의 통치이다. –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쓴 책 “역사적 예수 탐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에서 

이즈음 한국 뉴스들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로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 생각과 이해는  “지난 일을 제대로 정리해 본 경험이 없는 공동체가 겪는 아픔의 하나로써 정리되어야 마땅한 세력들의 마지막 총공세”라는 것인데, 제 바램일 수도 있겠습니다. 

역사를 어떻게 정리하고 후세들에게 가르칠 것이냐하는 문제에 있어 자기 이익을 결부시키는 세력들이야 제 배 부르자는 도둑 심보로 그리한다고 하여도, 이도 저도 아닌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어떤 매체를 통해 그 뉴스를 접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 지금 바로 여기에서 두 눈 똑바로 뜨고 보고 있는 사실일지라도 어떤 매체가 어떤 목소리로 그 이야기를 전하고 듣느냐에 따라 진실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과서문제만 보더라도 수천년 전의 이야기나 수백 년 전의 이야기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길어야 고작 백년에서 바로 지난 해에 이르는 기간 중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진실 여부를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 사진, 동영상들을 비롯한 숱한 기록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두 눈 뜨고 보고 경험한 사람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현실임에도 전혀 상반된 이야기들이 진실이라고 우기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국가나 공동체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개인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겪은 일이라도 시간이 흐른 뒤 지난 사실을 전혀 다른 진실로 만들어 버리는 일들은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개인사던 적고 큰 공동체나 국가의 역사던 어떤 역사적 자료와 관점을 가지고 지금 내 자리에서 보느냐에 따라 진실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믿는 진실의 결과가 미래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_땅에_쓰신

이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요한이나 예수는 스스로 글 한줄 남기지 않았습니다. 예수와 글에 대한 기록으로 유일한 것은 간음한 여인을 두고 군중들에게 한 말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를 말을 하기 전에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썻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릅니다.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여졌다고 알려져 있는 데살로니가서 부터 일련의 바울서신들은 바울이 남긴 것임으로 그의 생각과 사상, 신앙, 의도 등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기록들과 행위들은 이야기로 전해지다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문자화된 기록들입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닙니다. 수많은 불경 가운데 어느 하나도 석가모니가 기록한 것들은 없습니다. 심지어 공자의 경우도 논어를 비롯한 어떤 경전도 공자 스스로 써서 남긴 기록은 없습니다. 무하마드 역시 그가 코란을 남긴 것이 아닙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변명’도 그가 스스로 썻다고 하지 않는답니다. 

모두 후대의 제자들이나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에 대한 이야기들이 불경이나 유교 경전등에 비해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점이 있다면 구전(이야기 전승)을 기록화하는 기간이 짧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주고 부활한 후 승천했다고 생각되는 시기는 대략 기원 후 30년경 전후입니다. 그리고 바울서신등이 기록되어진 것이 기원후 50년경 부터이고, 이른바 공관복음서들이 기록된 시기들이 기원후 70년에서 100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고 제일 늦은 연대라고 해도 기원 후 150년을 넘지 않는답니다. 

그러나 제일 빠르게 기록화된 바울서신들이 예수가 떠난 뒤거의 한세대 뒤에야 이루어진 까닭은 무엇일까요? 크게 두가지 이유들을 들고 있답니다. 첫째는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예수가 행한 행위들과 말씀들이 전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고요, 둘째 직접적인 원인인데 당시 예수 이야기를 신앙으로 받아들였던 초대교회 사람들은 세상 끝날이 곧 온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종말이 눈 앞에 이르렀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바울도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유대의 종말은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로마에 의해 파괴되고, 73년에 마사다요새에서 항거하던 유대인들이 모든 자결함으로 현실화되었지만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소위유대독립전쟁 또는 제1차 유대 로마 독립전쟁에는 열심당파들은 물론이요, 바리새파, 에세네파 등 파벌에  상관없이 전 유대인들이 나섰고,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공방전에서만 죽은 유대인들이 110만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유대인들은 로마의 노예가 되거나 디아스포라가 된 것이고요. 다만 이 전쟁에 기독교 초대 교인들은 참여하지 않았답니다. 

종말은 오지 않았으나 삶의 상황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예수에 대한 이야기들이 문서화되고 기록되는 일들이 봇물 터지듯 일어납니다. 

이 때의 일을 누가는 이렇게 기록에 남깁니다. 

“존경하는 데오필로님,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그 일들을 글로 엮는 데 손을 댄 사람들이 여럿 있었읍니다.  그들이 쓴 것은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사실 그대로입니다.  저 역시 이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 둔 바 있으므로 그것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각하께 써 보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러하오니 이 글을 보시고 이미 듣고 배우신 것들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 누가복음 1 : 1- 4, 공동번역에서 

이제 우리들이 이야기할 세례요한과 예수의 이야기들은 이렇게 기록된 사복음서와  기원후 95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지는 요세푸스의 역사서 ‘유대고대사’를 바탕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믿음이란? – 쉬어가는 글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8 

지난 삼개월 동안 구약성서를 중심으로 유대인들의 신앙과 삶에 대해 저나름으로 이야기를 풀어왔습니다. 예수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당시의 팔레스타인 시대상황도 짧게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세례요한을 시작으로 예수와 바울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이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제껏 해 오던 이야기들보다 한층 더 제 나름의 의견들과 생각들이 많고 깊게 드러날 것 같습니다. 믿음 곧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늘 예수쟁이라고 말하기를 즐겨합니다. 이제 신약성서를 중심으로 이어질 이야기들은 엄밀하게 보자면 제 신앙고백이 될 것입니다. 

“예수는 나의 구주이고, 그로 인해 나는 오늘 여기에서 천국을 누리고 살(며, 아야 할, 수 있는, 아 야만 할) 까닭이 있거니와, 마침내 하늘 문 열고 그의 나라로 들어가는 그 순간 (천상병 시늉으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쉬면서 “그럼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일까?”라는 이야기를 좀 하고 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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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도에 한국의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만들어 발표한  “한국의 종교현황”이라는 286쪽 짜리 자료가 있답니다. 거기 들어가는 글에 보면 2008년 조사치로 한국내에 자생종교와 외래종교를 합쳐 약 510여 개 이상의 교단과 교파가 있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또한 2003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인구 가운데 약 53% 이상이 스스로 종교인이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즈음은 한국사회도 다민족 국가로 변해간다는 뉴스들을 종종 보거나 들을 수 있지만, 전통적으로 한국사회는 단일민족으로 여겨지고 이해되어 왔습니다. 단일민족으로 이렇게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는 그리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의 자유’라는 덕목이 마음껏 구가되는 사회라서가 아니라 민족적 특성이 종교적이라서 그렇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위에 도표를 참조하시면 눈에 띄는 점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와 기독교(개신교)의 단체 및 교단 숫자입니다. 천주교, 유교, 천도교, 원불교, 대종교 등은 교회수는 제법되지만 종단, 교파, 단체는 오직 하나일 뿐인데 불교와 기독교(개신교)는 유난히 숫자가 많다는 점 말입니다. 

신자숫자로 1, 2 위를 다투는 불교와 기독교(개신교)는 다양한 종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도수에 비해 교직자 숫자가 눈에 띄게 많은 개신교의 모습도 눈에 뜨이지요. 

어떤 종교냐하는 다양성은 물론 같은 종교라도 또 다른 모습으로 믿고 있다는 현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고요, 무엇보다 대한민국인의 거의 반 수 이상이 무종교라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랍니다. 

이제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렵니다. 

지난 2009년에 백살의 나이를 꽉 채우고 세상을 떠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라는 프랑스 사람이 있답니다. 이십세기의 내노라하는 세계적인 석학 가운데 한 사람이랍니다.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이자, 구조주의 인류학을 꽃피운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오늘날의 토테미즘”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소위 문명화된 종교가 원시 종교와 접촉하면 녹아 없어질까 두려워 최대한 그것을 문명화된 종교와 멀리 떨어뜨리고 필요하면 풍자하고 비하했다. 뒤르켐의 경험처럼, 종교이면서 토테미즘이라는 원래의 속성이 없는 이상 그 조합은 새로운 형체를 만들어내지 않았다.>라고 말입니다. 

원래 많이 배운 사람들은 쉬운 말도 어렵게 하는 법인지라, 언듯 뭔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 것이 저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 양반 이야기의 촛점은 우리들이 보통 토템이즘(totemism : 동물이나 식물 등의 자연에 대한 신앙), 샤머니즘(shamanism : 초자연적인 존재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샤먼 곧 무당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 애니미즘(animism : 무생물계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신앙) 등의 신앙이나 믿음을 이야기하면 옛날 사람들이나 미개한 사회에서나 일어나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로 치부하곤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옛날 수천년 전 사람이나 오늘 2014년을 사는 사람이나, 오늘날 최고의 문명 사회를 구가하는 유럽이나 북미 (아니면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으면 되는 일이고..)에 사는 사람이나 아직도 원시적 삶을 사는 아프리카 어딘가나 아시아의 어딘가에 사는 사람이나 신앙과 생각에는 전혀 아무런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2014년 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각이나 신앙이라는 것이 삼, 사천년 전 또는 이천 년 전에 살던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구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하나 드립니다. 

헤로도토스(Herodotus)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들 계실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에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학자입니다. History(역사)라는 말을 처음 만든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중국 사마천의 사기(史記)로 대변되는 동양 역사가와 비견되는 서양 역사가의 아버지랍니다. 

그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라는 책에  아주 우수꽝 스러운 바벨론의 종교관습이 소개된답니다. 그 진실성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를 일이지만 말입니다.바로 이 구절입니다. 

“모든 여자들은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 앞 뜰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낯선 남자와 성관계를 가져야 했다” 

신앙치고는 참 이상한 신앙인데요, 이게 바벨론 신앙이랍니다. 사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방신이라는 것이 다 이런 종류의 믿음들이었답니다. 

참 말도 안되는 신앙행위이자 믿음의 행태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나  똑같거나 유사한 일들이 오늘날에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레비-스트로스의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닌 성 싶은 것이지요. 

또 다른 신앙이야기 하나 더하고 마치렵니다. 

우리 민족의 종교성입니다. 

언젠가 유투브에서 검색을 하다가 북한의 태양절인가 뭔가하는 행사를 본 적이 있답니다. “어, 뭐 이런게 다…”하는 생각으로 잠시보다가 결국 눈을 떼지 못하고 몇 십분을 그걸 들여다 본 적이 있습니다. 

평양 광장에 수만의 사람들이 정확한 시간은 재보지 않았지만 꽤 긴 시간을 정물화가 처럼 전혀 움직임없이 소리도 없이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서있는 모습이 계속되었답니다. 저는 그게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장면이었답니다. 그러다 그 정지 화면이 앳된 얼굴의 김정은이 나타나자 일순 열광의 도가니로 변하던 것이었습니다. 

그건 종교였습니다. 믿음이요, 신앙이었습니다. 그것이 강요된 것이던 교육에 의한 것이던 말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의 남쪽 케이스입니다. 

지난해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일을 앞두고 후보들 간에 있었던 TV 토론 장면이었습니다. 

문재인후보가 묻습니다. “과학기술 인력이야말로 국가자원이고 경쟁력이다 . (당신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은 물론이고, 참여정부 때도 이 문제에 대해 깊게 고민했다. 이명박정부는 이런 점을 다 까먹었다. 그 때 박근혜후보는 뭐했나?”라는 질문에 박근혜 후보가 답합니다. “그래서 (제가) 대통령되려는 거 아녜요 지금..(웃음)” 

이 장면을 본 그 당시의 제 생각은 “설마 저런 바보가 대통령이 되지는 않겠지…”였답니다. 

그런데 그녀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깨달은 사실은 “아! 종교구나”하는 것이었답니다. 제 생각과 다르게 그 생각조차 없는 바보가 다 이루어 줄 수 있는 신처럼 다가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무릇 모든 종교에는 여타의 다른 세상 일들과 마찬가지로 브로커 곧 중간자들이 있습니다. 뭔가를 빙자해 챙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종교는 곧 밥벌이요 , 출세의 도구가 됩니다. 그거 뭐라 할 수 없답니다. 사람이므로… 

문제는 그 종교에 내 돈, 내 시간, 내 정성, 내 몸, 내 맘 바쳐 속고 사는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넘쳐난다는 것이지요. 

“이 사람들아! 무릇 믿음이란 그런게 아니라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내가 곧 그라네. 나를 믿게! 그 순간 자네가 곧 내가 되는 것이라네. 물론 거긴 브로커나 중간자가 없지! 자네가 곧 하늘이란 말일세. 나만 믿고 오늘 하루 살아보시게! 자네 죽은 다음도 내가 보장하지!” 

이제 그렇게 말하다 간 사내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요.

유언비어– 전야(前夜) 5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7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마가복음 4 : 21 – 25, 개역개정본에서 

‘강남’이라는 말이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가게 된 까닭은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 덕이고, 그  배경에는 구글과 유튜브라는 현대판 통신수단이 있습니다. 십여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강남의 일부인 잠실을 제가 어릴 적에 어떻게 갔는지 알려 드릴까요.  제 어머님의 외가가 당시 잠실이었답니다. 제가 살던 신촌에서 잠실을 가려면 우선 신촌에서 버스를 탑니다. 지금의 신촌노타리가 당시 버스의 종점이었습니다. 동대문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그 곳에서 전동차를 갈아 탓습니다. 전동차로 광나루까지 가서 나룻배로 갈아 탓습니다.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고 모래사장을 걸어 올라가면 논밭이 이어졌답니다. 그리곤 어머니의 외갓댁 잠실에 가 닿을 수 있었답니다. 꼬박 하루길이었습니다. 언젠 적 이야기냐고요?  1960년대 초였답니다. 

느낌은 옛날 고려적 이야기지만 고작 50여년 전의 일이지요. 

자!  이즈음의 시간 차이는 빠르게 변하지만  옛날 정말 고려적에는 그런 빠른 변화가 있었을까요? 칠백 여년전 고려 말이나 천이 백여년 전 고려 초나 아마 생활의 변화 속도란 이즈음 십년에 미치지 못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하물며 이천 여년 전에는 어땠을까요. 

이런 저런 역사적인 사건들이 이어지지만 실제 보통 사람들의 삶의 변화란 백년 전이나 백년 후나 크게 변한 것들이 없었던 시절이었을겝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삶이 급변하는 어떤 계기들이 있게 마련이랍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제가 중학교 들어가던 해인 1965년에 개통한 제2한강교를 들수 있겠습니다.  이 다리를 놓는데에 약  2년 6개월이 걸렸다면 이즈음 사람들은 “정말이래?” 할 수도 있겠는데 정말 그만큼 걸렸거니와  당시 신촌사람들에게는 정말 신촌(新村)이  새 마을이 되는 새로운 역사의 계기였답니다. 신촌이 더 이상 버스 종점이 아니라 시내 중심가가  되기 시작한 때랍니다. 

다시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으로 넘어갑니다. 

팔레스타인에 살던 다시 유대인들의 삶이 급격한 변화를 격게되는 시초는 헤롯1세가 왕위에 오른 때로부터 로마의 총독시대가 이루어지던 무렵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약 70여년에 이르는 동안 그 땅에서는 무수한 반란과 도적(이 도적을 의적 또는  혁명가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들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자칭 메시야라고 하면서 사회 혁명을 꿈꾸거나 사람들을 규합하여 테러를 일삼거나 하는 무리들이 넘쳐나던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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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알렉산더대왕이 “당신의 소원을 말해보시요. 내가 다 들어 드리겠오.”라는 말에 거적깔고 드러누운 노숙자인 주제에 “좀 비켜 주시겠오, 햇볕 가리지 말고….”라고 대답했다는 전설적 이야기의 주인공인 디오게네스로 유명한  견유철학자(犬儒哲學者)들도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많았답니다. 

견유철학들자들의  삶의 태도를 잘 나타내는 유명한 말이 있답니다. 

“나는 내가 배고프지 않을 만큼, 목마르지 않을 만큼 가졌다. 벗지 않을 만큼 입었다. 밖에 있을 때는 저 부자 칼리아스보다도 더 떨지 않고 안락하다. 안에 있을 때는 따듯한데 왜 옷이 필요한가?”  견유철학자(犬儒哲學者)의 시조인 안티스테네스의 말입니다. 

빈정거리며 사회와 등을 지거나 저항하거나 하는 무리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기후는 아니랍니다. 특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쪽 유대 지방은 그리 농사에 적합한 땅은 아니었답니다. 그에 반해 갈릴리 호수 주변의 땅들은 농사에 적합했다고 합니다. 그 지역의 농산물들이 유대의 젖줄이 되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로마시대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수입은 수확물의 반도 가져가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마저도 자기 농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만큼 각종 세금으로 이들에게 뺏어가는 것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농토의 많은 부분들은 예루살렘 중심의 권력자들의소유였고 농지는 대부분 소작농들이 경작을 하는 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를 살던 소작농들을 더욱 어렵게 했던 것은 당시 부자들이 즐겨 사용한 매점 매석행위였다고 합니다.  농사가 잘 된 해에 마구 거두어 들여 창고에 쌓아 놓았다가 흉년이 들 때 엄청 높은 값에 파는 일들이었는데  당시 기록에 보면 16배 정도의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답니다. 

당시 떠돌던 유언비어에는 이런 것들이 있답니다. 

“어떤 랍비의 일년 수확은 예루살렘 시민이 십년  동안 먹을 정도이었다.”, “마을 천개와 배 천 척을 가진 부자들도 있었다.”,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가 송아지 만 삼천마리인 부자가 있었다.” (안병무가 쓴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등등이랍니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가질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마가 4 : 25)라는 성서의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에게는 인두세 및 각종 간접세들을 내야하고 유대 종교 자치기관에게는 성전세(이 세금은 빈부의 차이없이 유대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냈답니다.) 와  십일조세(당시만 하여도 정확히 지켜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를 내야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점 살기가 팍팍해 갔답니다. 

그렇게 하루살이조차 힘들어진 사람들에게 수많은 “하라”와 “말라”라는 율법들은 애초 지키기 힘든 굴레였을 뿐입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판국에 종교적, 전통적, 관습적 죄인이 되어 사는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소수(minority) – 전야(前夜) 4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6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 사도신경에서 

1961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안토니오 프로바(Antonio Frova)는 지중해 연안 도시 가이샤라(Caesarea)에 있는 원형극장 입구에  놓여 발판으로 사용되고 있던 한 돌판에서 다음과 같은  비문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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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S AUGUSTI]S TIBERIÉUM

[…PO]NTIUS PILATUS

[…PRAEF]ECTUS IUDA[EA]E

[…FECIT D]E[DICAVIT] 

Tiberium(티베리움) Pontius Pilate(본디오 빌라도) Prefect of Judea(유대의 장관)  …has dedicated [this](헌정되다) 라는 의미랍니다. 이를 빌라도의 비문(The Pilate Stone)이라고 합니다. 

가이샤라는 헤롯 대왕이 건설한 항구도시입니다. 당시 로마황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따서 “가이샤라”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유대를 로마 총독이 다스리면서부터 로마 총독이 머물던 도시입니다. 나중에 바울과 베드로 이야기를 할 때 중요하게 등장하게 될 도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읊조리는 신앙고백문인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받으사 십자가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적시되는 본디오 빌라도는 다섯 번 째 유대 총독입니다. 초대총독인 코포누스(Coponus)로부터 유대가 완전히 멸망할 때의 총독인 폴로루스(Gessius Florus)까지 14명의 총독이 65년 정도를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을 다스립니다. 

그 가운데 본디오 빌라도와 안토니오 벨릭스(Antonius Felix), 폴시우스 베스도(Porcius Festus) 등이 신약성서 중요한 장면에 등장합니다. 

유대를 다스리던 로마총독은 로마의 점령지 총독 가운데 일급 총독인 시리아(수리아)총독 아래 위치한 이급 총독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군사 및 사법권을 쥐고 있었고 가장 중요한 권한 중에 하나는 세금을 거두어 드리는 징세권(徵稅權) 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세금은 세금을 거두어 드리는 청부인들이 맡아서 했고 실제적인 일들은 성경에 나오는 세리들의 몫이었습니다.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은 세금 징수 청부인들은 정해진 세금 이상을 거두어 드리면 그 몫을 챙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총독은 천인부대(千人部隊)라는 다섯개의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 중 네개 부대는 가이샤라에 일개부대는 예루살렘에 배치했다고 합니다. 주로 가이샤라에 거주하던 총독은 유대의 명절때이면 대규모 군중이 모여드는 예루살렘의 치안을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총독은 로마의 직접통치자 였습니다. 다만 식민지의 상황을 고려하여 식민지 고유의 종교및 전통적인 사회규범들의 치리는 유대의 최고법정인 “산헤드린”의 몫이었습니다. 

이 최고법정 ‘산헤드린’의 최고 책임자는 대제사장이었고 당시 그들은 ‘유대인들의 원수(元首)’로 불리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사독가문의 몫이었던 대제사장은 유대의 마지막 왕조 하스몬시대에 이르러 왕이 대제사장을 겸하게 됩니다.(자세한 것은 제가 이 이야기 시리즈 일부인 구약 및 중간사이야기를 참조하시길..) 

그러다 유대가 로마총독 시대에 접어들면서 헤롯대왕의 아들 아켈라오스의 몰아낼 때 큰 역할을 한 사두개파인 안나스가 대제사장이 되면서 이후 그 권력을 5대에 걸쳐 이어갑니다. 예수 시대의 대제사장 가야바도 안나스의 세력 아래 있던 인물입니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필두로 70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의원이 되려면 순수한 유대혈통이어여만 했습니다.  70명 의원 가운데 8명에서 10명 정도의 최고 평의원회가 있고, 이들이야말로 당시 유대의 종교 및 사회의 최고 지배계층이였습니다. 이들은 대토지 소유자들이었고, 이들에 의해 각종  제사들이 집행되었으며, 성전 수비 및 성전 금고 관리가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이들은 각종 성전세를 거두어 드리는 주체였습니다. 그 하급 직원으로 레위인들이 전통적인 십일조세를 거두어 드리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70명의 의원들은 크게 두 개의 당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입니다. 사두개파는 종교적으로는 모세 5경만 경전으로 인정을 했고, 천사나 부활 등을 믿거나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지향적이었습니다. 그 구성원들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고위 직급과 경제적으로 부유한 축들이었습니다. 일테면 산헤드린의 보수세력이었던 셈입니다. 

반면 바리새파는 종교적으로는 율법에 충실하여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충실한 사람들로서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과는 분리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해석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천사나 부활을 믿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유대 민족주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나중에 유다의 독립전쟁에도 가담을 합니다. 이들은 민족주의적 입장을 취하기는 했지만 구약시대부터 내려온 예언자의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했고, 율법을 생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나중에 유대교를 세우는 주류가 됩니다. 직업적으로 천막이나 가죽 세공업 등의 도시 소시민층이었습니다 .일테면 산헤드린의 진보세력이자 야권의 대표였던 셈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사람사는 세상은 다 똑같듯이 당시 왕, 총독, 산헤드린을 비롯한 그 세력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은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당시 왕, 총독, 산헤드린을 비롯한 그 세력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과는 무관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들 때문에 하루 하루가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세례요한과 예수와 바울의 이야기를 듣게되는 당시 보통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심당(熱心黨) – 전야(前夜) 3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5 

헤롯이 죽은 뒤에, 주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일어나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그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하였다.  요셉이 일어나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요셉은, 아켈라오가 아버지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 지방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서,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씀하신 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마태복음 2 : 19- 23, 표준 새번역에서 

헤롯 1세가 죽고 그의 세 아들이 아비가 다스리던 지역을 나누어 차지하게 됩니다. 첫째인 아켈라오스(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에돔) 지역을, 둘째인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세째인 필립포스(빌립보)는 북요르단 지역을 차지하고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헤롯 1세처럼 왕으로 불리우거나 대접 받지는 못합니다. 로마가 승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아켈라오스를 민족지도자로 나머지 안티파스와 필립보스는 그 보다 한 단계 아래인 분봉(分封)지도자로 대우했습니다. 

첫째 아들 아켈라오스는 약 10년간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메 지방을 다스리다가 로마에 의해 추방을 당합니다. 그는 심한 악정을 편 것으로 알려져 있고,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에 삼천 명 넘는 유대인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의견이 일치되어 약 8천명의 사절단이 로마황제를 찾아가서 아켈라오스를 탄핵합니다.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들의 탄원을 받아드려 아켈라오스를 추방하고 그가 다스리던 지역을 “유대주”로 하고 로마 총독이 직접 관할하여 다스리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 이 내막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실력자들 곧 사회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지배층들이 자기 땅과 재산을 유지 증식시키려는 속셈과  직접통치로 더 많은 것을 거두어 갈 수 있는 로마의 잇속이 서로 맞아 떨어진 속내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원후 6년부터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및 이두메는 로마 총독 관할령이 되었고 갈릴리의 안티파스와 가이사랴 지역의 필립보스는 이 총독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무렵에 대한 성서의 기록으로 누가복음 2장을 보기로 하지요.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서 온 세계가 호적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이 첫 번째 호적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호적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동네로 갔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중이었는데,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레뇨(Quirinius)가 시리아(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인구조사가 있었고, 바로 그 무렵 예수가 탄생했다는 누가의 기록입니다. 이 시기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아주 분분하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 무렵 유대의 인구조사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인구조사 곧 호적조사의 근본적인 목적은 인두세(人頭稅, 주민세)와 토지세 등의 직접세와 이동세와 시장세 등의 간접세를 잘 거두어 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 문제는 민심을 자극하는 직접적이고도 자극적 요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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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구조사에 항거하는 민중 반란이 일어난답니다. 더더군다나 자기 나라 정부도 아닌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실시되는 호구조사에 반대하는 운동은 민족주의 열망이 더하여져서 아주 탄력을 받는답니다. 이 때 생긴 집단으로 젤롯당(the Zealous)이라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열심당(熱心黨)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들 가운데 아주 극렬한 사람들로 “단검을 가진 자들”이라는 뜻으로 불린 시카리파(Sicarians)도 있습니다. 

이 반란의 중심지 가운데 한 곳은 갈릴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갈릴리 지역을 다스렸던 사람이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예수도 그를 “여우”로 불렀듯이 헤롯 안티파스는 아주 교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관할지 백성이 아니라 식민지 주인인 로마의 환심을 사는 것이 늘 우선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이방인들이 많이 살았고, 예루살렘과 달리 사회 하층 계급에 속한 이들이 많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통과 종교적 측면에서는 예루살렘 못지않게 유대적인 것을 고수하는 지방이었습니다. 로마의 인구조사에 반발하여 일어난 젤롯당의 반란의 진원지는 바로 갈릴리의 세포리스였습니다. 

이 반란의 결과로 세포리스시는 폐허가 되고  세포리스시 입구에는 반란 유대인들을 매달은 십자가가 2000여개가 세워졌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포리스시는 예수가 자란  나사렛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대도시였고(약 8km 거리), 이 사건은 바로 예수 탄생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이 세포리스를 재건하고 요새화합니다.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의 반란을 대비한 요새화였습니다. 그리고 이 곳을 갈릴리의 수도로 삼았다가 후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딴 티베리아(디베리아) 시를 건설하고 그 곳으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시절의 갈릴리, 그리고 그의 동생  필립보스가 다스리던 지역 가이샤라를 중심으로 같은 시대에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전했던 이가 바로 예수입니다. 

헤롯 1세의 셋째인 필립보스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기의 영지를 다스리다가 기원 후 37년에 죽고, 그  영지를 물려받는 이가 조카인 아그리빠입니다. 이 아그리빠에 의해 또 다른 삼촌인 헤롯 안티파스는 유배를 당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그리빠 대왕, 카이자르의 친구, 로마의 믿을만한 친구”로 불리우기를 즐겼던 아그리빠왕 시절에 기독교 첫 순교자 스테반이 죽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도 처형되고, 베드로가 옥에 갇히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아그리빠는 당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상류층으로부터는 진실한 야훼 하나님의 신앙인이자 유대 전통의 수호자로 대접받은 인물입니다. 이는 곧, 당시 유대 상류층들이 이미 썩을대로 썩은 “부(富)”에 정신을 팔렸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탄생했던 무렵 로마의 총독이 유대를 관할하기 시작합니다. 로마 총독의 권한은 실로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군사, 경제, 사형권 들을 손에 쥐고 있었으며 화폐 발행권에도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수시대를 전후한 로마 총독들에 대해 살펴보고, 그 당시 시대상을 간략히 훑어 본 후 세례요한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헤롯 1세- 전야(前夜) 2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4 

헤롯은 격정의 노예가 되어 모든 인간을 짐승같이 취급한 야만스러운 인간이었으며 의(義)와는 담을 쌓은 사람이었으나 그 누구보다 운이 좋은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일개 평민으로서 왕의 지위까지 올랐을 뿐만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위험에 직면했음에도 그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장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롯 자신은 적들을 물리쳤으므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의 가정과 자식들의 문제를 두고 볼 때에는 매우 불행하였다. –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7권 8장에서 

권력에 대한 욕망과 의지로는 당대 최고였으나 정통성이 허약했던 헤롯왕에 대한 이야기들은 유대의 기록 뿐만 아니라 로마쪽 기록에도 별난 인물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헤롯왕(이하 헤롯 1세) 말년의 모습에 대한 기록으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 소개드립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입니다. 

그가 병이 들어 이제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자기가  다스리던 유대에서 평생해  온 일을 생각해보니 자기가 죽은 다음에 유대 백성들이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기는 커녕 박수치고 좋아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 헤롯1세는 전 유대에 유력한 인사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모두여리고로 모여라!”라고 말입니다.(당시 헤롯1세는  여리고에 거주했답니다.) 

헤롯1세의 명령이기도 하고 전 유대에 내린 명령인지라, 헤롯1세왕 밑에서 완장차고 행세했던 이들이 모두 여리고로 모였답니다. 행여 눈밖에 나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인 유력한 유대인들을 그 자신(헤롯1세)이 세운 로마식 대형 경기장안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 살로메와 매제 알렉사스를 불러 명령을 내립니다. “내가 죽거든 경기장에 가둔 모든 유대의 유력인사들을 모두 죽여라. 내 마지막 길에 두 가지 큰 기쁨이 될 것이다. 하나는 내 유언이 그대로 집행되어 곧 죽어서도 왕이 되는 기쁨이요, 두번 째는 죽은  유대인들의 가족들이 모두 통곡을 할 것이니 전 유대가 울음바다가 될 것이고 그 울음 속에서 내 장례식이 거행되는 기쁨이다.”라는 명령이었답니다. 

이런 헤롯1세를  이용한 것은 로마였고, 헤롯1세는 또한 로마를 적절히 이용하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식민지를 조용히 다스릴 수 있는 완장찬 똘마니가 절대 필요했던 것이고, 로마의 완장을 차고 유대 지방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것이 헤롯1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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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재능은 그의 아버지인 안티파트로스에게서 물려 받은 것이었습니다. 강자 곧 로마에게는 온갖 아부와 뇌물로 신뢰를 얻고, 약자인 유대인들은 철저히 힘으로 억누르면서도 적절히 필요한 것들을 자신이 주는 것처럼 포장하는 기술이 뛰어 났던 것입니다. 

이제 몇가지 실례를 들어봅니다. 

그이 아버지 안티파트로스로가 로마에 아부와 뇌물를 주고 받은 로마 식민지 유대 총독 자리를 두 아들에게 넘겨 줍니다. 첫째인 파자엘은 예루살렘 지역을 둘째인 헤롯1세에게는 갈릴리 지방을 넘긴 것입니다. 이 때 갈릴리 지방에서는 반(半)유대인인 헤롯에게 거센 저항을 합니다. 히스기야라는 민중 지도자를 중심으로 반기를 들자, 헤롯1세는 이들을 무차별 학살을 합니다. 

이런 헤롯1세의 만행에 분노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전 유대인들이 로마에 진정서를 올리고 헤롯을 탄핵해 달라는 청원을 올립니다. 헤롯은 엄청난 뇌물로 로마의 실권자들을 매수해 버립니다. 이후로도 헤롯1세가  34년 동안 로마의 대리인인 유대의 왕 노릇하며 이런 유사한 일들을 수없이 반복합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치적들도 만만치 않게 많답니다. 

그이 삶과 그의 치적을 짧게 정리해 봅니다. 

첫째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일지라도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의 출신이 반쪽 유대인이라는 약점을 가리기 위해 제사장 가문의 딸과 결혼을 하고, 필요에 따라 그 아내는 물론 장모와 자식까지 죽여없애기도 한 인물입니다. 자신의 권력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아무도 모르게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도 서슴치 않고 행한 인물입니다. 정통성이 허약했던 그는 늘 유대인들의 반란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 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둘째 그는 오늘날 통곡의 벽으로 유명한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비롯하여 예루살렘성의 수로(水路)건설 등 괄목할만한 토목공사와 건축물들을 남겼습니다. 

세째 유대인들의 전통을 최대한 지킬 수 있도록 로마를 설득하고, 이 일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일테면 유대지방에서 통용되는 로마화폐에는 시이저의 초상을 넣지 않도록 로마를 설득해서 실제 성과를 거둔 일 등이 그러합니다. 

네째 예루살렘은 유대 중심으로 사마리아는 로마 중심으로 로마의 입 맛에 맞게 변형시킨 일입니다. 사마리아를 이름까지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바꾸고 아폴로 신전을 세우고, 경기장을 세우고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옷을 벗고 경기를 벌이는 일들을 서슴치 않고 벌인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로마의 입맛에 맞게, 유대인들은 적당히 구슬려가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뛰어난 재능을 보인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이 다스리던 땅을 삼등분하여 세 아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러나 미처 로마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그의 아들들은 더 이상 왕의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분봉왕으로 불리웁니다. 그 가운데 갈릴리 지방을 차지하게 되는 헤롯2세 곧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성서에 나오는 헤롯1세의 대한 이야기로는 동방박사를 만난 후, 동방박사가 헤롯의 말을 듣지 않고 그냥 자기들 나라로 돌아가자,  당시 2살 미만의 아이들을 모두 죽였다는 이야기와 믿음에 대한 제 생각은 나중에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할 때 몰아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세례요한의 목을 따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받게 한 헤롯2세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 시대 – 전야(前夜) 1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 

박사들이 물러 간 뒤에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하고 일러 주었다.  요셉은 일어나 그 밤으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내가 내 아들을 에집트에서 불러 내었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대중하여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 마태 2 : 13 – 16, 공동번역에서 

이제 이천 여년 전 유대 광야에서 젊음을 태우다 간 사내 세례요한과 갈릴리 해변 마을을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 이야기에 온 몸과 맘을 던졌던 사람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광야, 갈릴리, 세례요한, 예수의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려면 먼저 몇가지 알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당시 광야에 나갔던 사람들, 갈릴리 해변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광야, 갈릴리, 세례요한과 예수와는 아무 연관없이 그저 그들을 바라 본 사람들 등등의 모습들을 먼저 알아 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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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조선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의 사회상을 좀 알 필요가 있는 것과 똑같은 이치에서입니다. 이즈음은 너나없이 다 제 뿌리가 양반인양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따지고 보면 양반의 후손들 별로 안된답니다. 오늘날에야 돈과 권력이 곧 양반인 세상이지만 그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뿌리를 따지곤 하는 것이지요. 

조선시대말사회가 아주 문란해서 양반을 돈으로 사고 파는 세상이 되었어도 그 숫자는 전체 인구의  5%를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이화 선생의 한국사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답니다. 

“서기 1910년의 호구조사에서도 확인되는데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충청남도가 충남 전체 가구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고 충북(4.5%) 경북(3.8%) 서울인 한성(2.1%) 그리고 전북(1%) 순 이었다. 여타 도는 모두 1% 미만이고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북 경주군(2599호), 충남 목천군, 경북 풍기군, 충남 공주군 순 이었다. 경상북도와 충청도, 한성에 양반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나마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다시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보지요. 조선시대 양반, 상놈 따지기 이상으로 신분을 따져 묻던 시대였답니다. 혈통이 어떤 혈통이냐가 매우 중요한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기준은 뭘로 밥먹고 사냐? 곧 직업의 귀천을 매우 중요시하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당시의 시대상도 좀 알아야 세례요한이 왜 그 때 그 말을 했고, 예수는 왜 그 때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이해가 좀 정확하고 빠르게 다가오겠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주 쉬운 예를 하나 들지요. 누가복음을 쓴 누가의 직업은 의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의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일반적으로 말하면 ’똑똑한 사람’들이 ‘공부 잘해서’ 가질 수 있는 직업으로  ‘돈 잘 벌고’,  ‘안정적인’,  ‘때론 사회적으로 존경까지 받을 수 있는’ 직업이라고 말하는 것이 크게 엇나간 정의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 유대사회에서의 의사란 ‘가정 휼륭한 의사라도 지옥으로”갈 뿐이고, ‘의사란 도둑과 같은 직업일 뿐’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는 천대받는 직종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지요. 물론 돈은그 당시도 좀 벌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천대받는 직종으로 낙인 찍혔는가 하면 첫째는 의사를 믿게 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고, 두번 째는 부자들에게는 잘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멸시하고 잘 봐주지 않는다는 것,  세 번 째는 의사들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죄 지은 자들 뿐이라는 것이랍니다(당시에는 병은 곧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던 시대였으니까요). 

이게 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앞으로  제가 예수와 바울 이야기를 하면서 자주 인용하게 될 요하임 예레미아스(Joaehim Jeremias)라는 사람이 쓴 책  “신약성서시대의 사회경제사 연구 –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이라는 책과  잔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쓴 책 “역사적 예수”에 나오는 당시 시대상이랍니다. 

이런 저런 뜻으로 예수 이야기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명의 헤롯 이야기 –  곧 성서에 나오는 동방박사를 만나고 난 뒤 두 살 미만 갓난 아이를 다 죽인 헤롯대왕과 세례요한과 예수를 죽인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 – 와 당시 로마 총독들의 이야기를 먼저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경제적인 상황과 사회적인 상황들을 대충 짚어 본 후에야 광야로 나가 세례 요한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권력을 움켜 쥘 때는 여우처럼, 권력을 행사할 때는 호랑이 처럼, 그러나 죽을 때는 개처럼…” 살다 간 독재자들의 이야기는 동과 서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넘쳐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흉내를 못내 안달하는 권력자들이 숱하고요. 

그런 인물 가운데 전형적인 사람이 바로 헤롯대왕이었습니다. 헤롯이 임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희생된 이스라엘 사람 숫자가 10만 명이 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답니다. 

그 헤롯 이야기 이어집니다.

우리시대 – 들어가는 글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 

예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점검해 보고 싶은 것들이 있답니다. 

‘예수’라는 말이 당신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기독교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요? 교회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요? 당신이 알고 있는 ‘교회’란 어떤 곳인지요? 교회와 기독교 그리고 예수는 어떤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는 것인지요? 

아니 그런 어려운 말들 다 접고요. 

당신에 있어서 예수란? 교회란? 기독교란? 도대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요. 

일테면 이런 질문으로 다시 바꾸어 물어보지요. 

이즈음 한국방송에서 연예 또는 스포츠 스타들에게  상을 주고 받는 프로그램에서 상을 받는 이들이 하는 인사말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운운하는 말을 들을 때 당신의 느낌은 어떤 것인지요?   

그래요, 이게 제일 간단한 점검일 것 같습니다. 그럴 때 당신의 느낌 말입니다. 

그럴 때 제 느낌은 어떤 것이냐구요?  예, 저는 “쯔쯔쯔…” 혀를 찬답니다. 물론 그 말을 한 이를 경멸한다거나 우습게 본다는 뜻이 아니랍니다. 그저 조금만 더 생각 깊게 믿으면 안될까 하는 마음으로 뱉는 탄식이랍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보면 교회 성장이 폭발적으로 이루어 졌던 때가 두 번 있었습니다. 첫번 째는 1907년 길선주 목사의 “내가 바로 아간입니다”라는 회개로 시작된 평양 대부흥사건입니다. 그리고 두번 째는 1973년 여의도광장에 백만명이 넘게 모였던 빌리그래함 집회였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사건과 길선주 목사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경험했던 일이 아니므로 기록과 이야기를 통해 알고 이해하고 있답니다. 

그러나 1973년 빌리그래함 여의도 집회는 제 직접 경험이었고, 그 시대를 신앙적으로 깊이 고민하며 살았던 시절이므로 제 나름으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순간 가운데 하나랍니다. 

1960대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약 6 – 7년 동안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 사회는 아주 새로운 경험들을 몇 가지 겪게 된답니다. 

당시만해도 한반도 북쪽이 남쪽보다 조금 잘 살던 시절이었답니다. 

김신조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1.21사태가 일어나고, 남북은 극단 대결국면으로 접어 들던 무렵 다가온 선거에서 삼선개헌을 밀어부쳤던 박정희 대통령은 그야말로 간발의 차로  당선이 됩니다. 그리고 10월 유신이 일어났던 해가 1972년이었습니다. 

이 무렵 기독교계에서 일어났던 세가지 운동이 있었습니다. 

들어가는...

사영리(사영리)로 잘 알려진 김준곤목사의 CCC (한국 대학생 선교회)운동과 삼박자 축복으로 오늘까지 이어져 오는 조용기목사의 순복음운동과 일부 카톨릭과 민중신학을 바탕으로한 기독교 사회참여 운동이 바로 그 세가지였습니다. 

당시에 친구들이나 선후배 가운데,  만나는 이들에게 손바닥만한 작은 책자를 보여주며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는 이들을 종종 볼 수있었답니다. 사영리 전도 책자가 대학가의 유행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영리란 성경66권에 나타난 구원의 원리를 네가지로 축약 시켜놓은 것입니다. 첫째 원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둘째 원리는 사람은 죄로 인해 멸망하고 영원한 형벌에 놓여 있다. 세째 원리는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의 길이 열렸다. 네번째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원리입니다. 

이 사영리가 만들어진 것은 1958년 미국 CCC  수련회에서 당시 총재였던 빌 브라이트이 만든 것이랍니다. 만든 동기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답니다. 당시 수련회에 강사로 초빙된 이는 세일즈맨으로 거부가 된 사람이었는데 세일즈맨으로써 그가 성공한 이유를 당시 이렇게 설명했답니다. 

“성공적인 세일즈맨이 되는 지름길은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짧고 알기쉬운 그러나 눈에 띄는  선전 문구를 사용해야 한다. 고객에게 항상 기본적으로 똑같은 내용의 말을 하고, 그것을 잘 전할수록 성공적인 세일즈맨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말에 감명을 받은 빌 브라이트총재가 만든 것이 바로 사영리 전도지라는 것입니다. 

이 사영리전도지를 당시 젊은이들의 손에 쥐어 준 사람은 한국 CCC 총재인 김준곤목사입니다. 1960년대 말 지금의 정동 및 신문로 일대에는 판자집들이 즐비했습니다. 신문로일대는 중국인들이 촌을 이루어 살기도 했고요.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이 일대를 개발하기 위해 판자집 철거를 하고 철거민들을 지금의 홍은동 일대로 소개시켰답니다. 홍은동 일대에는 천막촌이 들어선 것이지요. 

당시 정동의 구 러시아 공관 일대 헐어버린 판자집 터 위에 높은 빌딩이 우뚝 세워지는데 바로 CCC회관 건물이었습니다. 

이 때의 일을 기록으로 남긴 이는1970년대에 일본 도쿄의 외신기자 클럽에 소속한 미국 언론인 짐 스탠츨(Jim Stentzel)입니다. 다음의 그의 기록입니다. 

“서울시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서울에 있는 전 러시아대사관 부지 일부를 대학생선교회에 제공하였다.(무상 제공되었다고 전해진다). 미대사관저 근처에 자리한 이 대사관 부지는 대한민국이 소련과의 관계를 끊은 이후로 판자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1968년 경찰이 밀려들어가 수 시간에 걸친 혈투 끝에 판잣집들을 제거하였다. 그 피가 마르자마자 고층 건물이 건축되기 시작했는데 그 건물에 오늘날 한국대학생선교회 전국본부가 자리 잡고 있다. 

1년 후 박 대통령이 삼선개헌을 고려하고 있을 때 김준곤은 청와대를 방문하여 삼선개헌은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충고하였다. 1971년과 1972년 억압이 강화되고 기독교회의 반응이 묵종(침묵속의 복종)과 대결로 양극화되기 시작하자 박은 또 다시 김을 신임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두 사람의 만남에서 네 가지의 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1) 한국 군대를 기독교인화하기 위한 선교단체와 친정부 보수교회들의 계획을 정부가 전적으로 지원한다. 2) 닉슨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본 뜬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기 위한 일련의 계획을 강력히 지원한다. 3) 새로운 헌법이 제정된 후 조속한 시일 내에 빌리 그래함 선교단이 한국에 올 수 있도록 추진한다. 4) 그래함 선교단에 뒤이어 대학생선교회 자체의 친정부적 대작품을 서울에서 선보인다. “

 1973년 여의도 빌리그래함 대전도집회는 당시 사영리를 손에 쥐고 다니던 모든 친구들의 축제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정동에 살고 있었던 얼굴이 동글던 제 친구는 홍은동 천막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난민촌이었답니다. 천막안에 땅을 파고 연탄화덕을 놓고 베니아판을 깔고 살았습니다. 그 천막촌에 뿌려졌던 전단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잘 믿으면 영혼 구원뿐 아니라 물질과 건강까지 얻는다.” 는  서대문 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의 삼박자 축복 전도지였습니다. 

사영리와 삼박자축복 교리는 1973년 여의도 빌리그래함 전도 대집회와  이듬해인 1974년 같은 장소에서 열린 ‘EXPLO’74’대회를 시발로 오늘날까지 한국 기독교와 교회 밑바탕에 깔려 있는 정신이 됩니다. 

‘EXPLO’74’란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예수혁명-성령의 제3폭발’과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를 표어로 하여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되었던 행사입니다.  엿새 동안 열린 이 행사에 연인원 655만명이 참여하였고  17일 하루 동안은 약 20만명이 길거리 전도에 나서 27만 여명의 새신자를 얻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이 행사에서 눈여겨 볼 대목하나는 한국기독교에 깊게 심어진  반공주의의 한 단면입니다. 

이 행사 둘째날인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가 저격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행사의 기도 제목과 내용은 쾌유를 비는 통성기도로 바뀌고 , 끝내 육영수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눈물을 흘리며 추모기도를 바쳤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튿날 집회에는 추모와 분노가 뒤섞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당시 목사들의 기도 내용들은 “북괴의 간악한 도발에 맞서 한국을 이끌어온 박정희 대통령에게 용기와 지혜를 불어넣어 달라”,  “공산당의 악랄한 만행을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해주시기를”  등 이었습니다. 

천막교회에서 시작하여 서대문 성전 시대를 거쳐 여의도 순복음 성전이 삼박자 축복에 맞추어  성장해 오듯 한국 교회는 약 사십여 년간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왔습니다. 

물론 교회만 성장해 온 것이 아닙니다. 한국사회, 한국인, 한국 역시 엄청난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왔습니다. 

홍은동 천막집에서 국수를 끓여 나누어 먹던 그 친구 역시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 터입니다. 

이제 시작하려는 제가 만나고 이해한 예수 이야기는 이런 사영리와 삼박자 축복과 민중신학이라는 제 경험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제 이천년 전 갈릴리 호수가로 가보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