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왕국 6

(당신의 천국 – 스물 두 번 째 이야기)

예루살렘에서 통치를 시작한 첫 유대의 왕인 다윗부터 (로마)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되기까지의 기간은  1,179년간이다. –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6권 10장에서 

한편 로마 병사들은 더 이상 살해하거나 약탈할 유대인들이 없으므로 분노를 풀 데가 없었다.  –중략 – 티투스는 나머지 성벽은 기초가 드러나도록 완전히 파괴하여 사람이 살던 곳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완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7권 1장에서 

야곱에게서 한 별이 솟는구나. 이스라에서 한 왕권이 일어나는구나 그가 모압사람들의 관자노리를 부수고 셋의 후손의 정수리를 모조리 부수리라. – 민수기 24 : 17, 공동번역 

다윗을 이야기 하려고하면 빼 놓을 수 없는 이름 가운데 하나가 블레셋입니다. 다윗이 통일 왕국을 세우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블레셋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몰라도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다윗이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블레셋과 함께 등장합니다. 다윗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가 몸을 의탁하고 재기의 꿈을 키운 곳은 바로 블레셋 진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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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과 다윗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는 말이지요. 

블레셋(Pleshet  또는 Peleset)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의 어원이 됩니다. 블레셋족속이라는 Phililster라는 말에서Philistine이라는 말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국기에는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습니다. 

삼천년 전의 악연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블레셋과 다윗 관계를 들여다 보면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다보면 “사람의 뜻”과 “신의 뜻” 또는 “힘의 뜻”과 “믿음의 뜻” 사이에 있는 차이를 느낄 수 있답니다. 

오늘은 그거 한번 짚고 넘어 가려고 합니다. 힘 또는 사람의 뜻과 신 또는 믿음의 뜻 사이에 있는 차이 말입니다. 

블렛셋족은 히브리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때와 엇비슷한 무렵에 가나안에 나타난 족속입니다. 바다로 부터 온 사람들, 섬으로 부터 온 사람들이라는 불리움을 받는 블레셋 족속은 그리스반도나 크리티섬에서 에게해를 건너온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답니다. 

이들은 당시 철기문화권에 이미 이르러 있었기 때문에 아주 강력한 철기 무기로 무장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요, 반면에 가나안에 정착한 히브리족들은 아직 청동기문화권에 속해 있었답니다. 

사무엘상 13장 19절에서 23절의 기록을 보면 아주 흥미 있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대장장이가 한 명도 없었다. 블레셋인들이 히브리인들에게 칼이나 창 같은 것을 만들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습이나 곡괭이나 도끼나 낫을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보습이나 곡괭이를 벼리는 값은 삼분의 이 세겔이었고 도끼를 벼리고 낫을 가는 값은 십분의 일 세겔이었다. 그래서 그 전쟁이 터졌을 때 사울과 요나단을 따르는 무리에게는 칼도 창도 없었다. 무기를 가진 사람은 사울과 요나단 뿐이었다.> 

이 성경의 기사로 유추해보자면 히브리 부족 동맹은 블레셋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것이고요, 사울이 블레셋을 무기도 없이 초반에 승승장구했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같은 일이었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그런 큰 힘의 격차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가자 자치구를 중심으로 한 해안지방에 터 잡고 있었던 블레셋족은 당시 가나안지역의 터잡으려 하던 이스라엘족에게는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이들과 맞붙어 최후에는 처참한 패배를 당했지만 그들의 기세를 확연히 꺽어낸 사람입니다. 그 기반 위에서 다윗은 그들 블레셋 세력을 완전히 꺽어 버린 것입니다. 다윗은 한동안 블레셋족에게 몸을 의지하고 그들의 용병대장 노릇을 합니다. 아마 그런 경험들이 블레셋을 이기는 요인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다윗의 성격을 다룰 때 다시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다윗이 통일 왕국을 세운 후 블레셋족은 점차적으로 사실상 지구에서 사라집니다. 그런데 왜 그 땅의 이름이 그들의 이름을 따서 팔레스타인이 되었느냐는 것이지요. 

이야기는 다윗시대로 부터 약 일천년 뒤로 빠르게 지나갑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고 부활하신 후로부터 약 한 세대가 흐른 뒤인 기원 후 66년 유대와 로마 사이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제 1차 유대-로마 전쟁이라고도 합니다. 이 전쟁으로  로마황제 티투스에 의해 유대와 예루살렘은  73년에 처절한 멸망을 합니다. 

저 위에서 인용한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그 때의 상황을 그려 볼 수 있답니다. 요세푸스는 이 전쟁에 로마인으로 참전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60년이 흐른 기원 후 132년에 제 2차 유대-로마 전쟁이 일어납니다. 숨죽여 살던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전통인 할례를 금한다는 로마에 새 법령에 항거하여 일어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이끈 시므온이라는 대장은 바르-코흐바(Bar-Kochba)라고 불리었는데 그 뜻은 ‘별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민수기 24 : 17에 나오는 예언이 그를 두고 한 말이라고 믿은 전 유대인들이 로마에 항거하는 전쟁을 벌입니다. 

결국은 처절한 패배를 당한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의 명에 따라 그 땅을 떠나게 됩니다. 이른바 유대 디아스포라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후 유대인들은 바르-코흐바(Bar-Kochba) 대신에 바르-코지바(Bar- Koziba)라고 시므온을 불렀는데 그 뜻의 거짓의 아들이라는 이름이었답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랍니다. 

이즈음에 중국의 소수민 정책은 자치구정책을 쓰고 있지요. 일테면 조선족 자치구처럼 말입니다. 소수민족이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문화와 관습을 용인하면서 자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게 하는 정책 말입니다. 

바로 로마의 식민지 통치도 그랬답니다. 식민지의 전통 문화와 관습을 보장한 것이지요.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은 그런 모습을 보였답니다. 

그런데 유대와의 일, 이차 전쟁을 끝낸 로마는 유독 식민지 유대에게는 아주 가혹한 처분을 내린 것이지요. 모든 유대족들을 그 땅에서 내 몬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의 이름조차 유대인들이 메시아로 생각하는 다윗의 원수 블레셋의 이름을 딴 팔레스타인으로 정했답니다. 다시는 유대인들이 그 땅을 밟을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약 1800여년이 흐른 뒤 그 땅에는 다윗의 별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것이지요. 

다윗 이야기로 돌아가기 전에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에게 드리는 퀴즈입니다. 

이즘 현재 이스라엘국가와 팔레스타인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어느 쪽이 더 많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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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안내 말씀을 드립니다. 

이 글을 연재하게 된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복지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께서 미국에 살고 계신 영세업자나 소상인이거나, 오바마케어라는 건강보험에 관심이 있는데 뭔지 잘 모르시는 분이라면 누군지 모를 당신을 위해서 오바마케어와 마켓플레이스에 대한 설명을 제 웹(http://socialkoam.com/?p=1008)에 연재해 올리고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무료로 정보를 제공하듯이 이웃에게도 무료로 함께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지도(地圖) – 왕국 5

(당신의 천국 – 스물 한 번 째 이야기) 

다윗은 나이 삼십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을 다스렸다.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는 삼십 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 – (사무엘하 5: 4-5, 공동번역) 

그는 왕이 갖추어야 할 모든 덕망과 인격을 소유한 걸출한 인물로서 그렇게 많은 지파의 안위를 책임질 만한 인재였다.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용맹하였으며 위험에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뛰어드는 담대함을 가진 용사였다. – 중략 – 그는 신중하고 온유하며 재난 가운데 처한 자들에게 친절하였으며 의로우며 인정이 많은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왕이 갖추어야 할 덕성을 다 갖춘 사람이었다. –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7권 15장에서) 

제가 27년 째 살고 있는 델라웨어주는 미국에서 두 번 째로 작은 주입니다. 제가 사는 집에서 5분이면 펜실베니아주가 되고, 15분 이면 뉴저지도 가고 메릴렌드도 만난답니다. 시속 약  60마일(96km)로 달린다면 동서를 가로지르는데 30분이면 족하고 남북을 달린다해도 채 두시간이 안 걸리는 작은 주랍니다. 

총면적이 6,452 km²이니 대한민국에서 제주도를 빼고는 제일 작다는 충청북도 면적(7,431.50 km²  ) 보다도 조금 작은 곳이지요. 

이 글을 쓰노라고 대한민국 지방자치단체들의 면적 크기를 보고 있노라니 특별시, 광역시, 자치시를 빼 놓고 도(道)면적으로는  경상북도가 제일 크더군요. 그 면적의 크기가 19,027.96 km² 랍니다. 

갑자기 웬 땅크기를 따지냐고요?  이제부터 서너 번에 걸쳐 이야기할 다윗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랍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에 자리잡고 있는 이스라엘의 면적은20,770 km² 랍니다. 대한민국 경상북도보다 조금 넓은 정도입니다. 

약 삼천년 전 이야기 속에서 우리들이 머리 속에 그리는 일들이 이렇게 아주 작은 땅에서 벌어진 일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는 뜻이지요. 

그런데 성서를 보면 다윗이 왕이 되는 의식을 세 번이나 치룬답니다. 첫번 째 이야기는 사무엘상 16장에 나오는 이야기로 사무엘에게  기름을 부어 받고 왕이 되는 것입니다. 두번 째는 사무엘하 2장에 나오는 이야기로 유다의 왕이 되는 장면입니다. 세 번 째는 사무엘하 5장에 나오는 이야기로 통일국가의 왕이 되는 장면입니다. 

자!  이제 다윗이 치룬,  이 세번의 왕위 즉위 의식을 제대로 알려면 당시의 상황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다윗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남왕국, 북왕국 또는 유다나 이스라엘이 지닌 의미를 좀 더 확실히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이 왜 필요하냐고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이고, 그 선포를 설명하는 바울의 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이고, 마침내 “나는 예수쟁이요, 나는 구원을 받았소, 나는 지금도 천국에 살지만 죽어서도하나님 나라에 가오.”라는 선언을 하기 위해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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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좀 돌이켜 봅니다. 탈애굽을 한 히브리족들이 가나안을 정복했던 시기로 돌아가 보자는 것입니다.  위에 지도는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열 두지파 부족들 가운데 레위지파를 빼고 각 지파가 차지한 땅을 그림으로 그려 본 것입니다. 

경상북도만한 땅을 열 한 지파가 그림처럼 나누어 가졌다는이야기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림처럼 딱 선을 그어서 각 지파들이 그 땅을 차지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땅 안에는 가나안 땅에 살았던 원래 부족들이 살아있었고, 해안 지방으로는 블레셋이라는 힘이 센 족속이 있어서 그들이 가나안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사사(판관)시대 이야기는 바로 이런 각 지파들, 또는 한 두지파의 연합체의 땅에서 일어난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지요.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는 블레셋이라는 강한 세력이 각 지파들 모두에게 큰 위협이 되었을 때 지파 곧 부족 동맹의 총연합체인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뭉쳐 싸우던 시절이었답니다. 

그런데 레위지파를 뺀 열 한 지파 가운데 남쪽에 자리잡은 유다지파가 있지요. 그 아래로 시므온 지파가 있지만 이 시므온지파는 유다지파로 흡수되어 버렸고요.  다윗은 바로 이 유다 지파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유다 지파에 대한 예언은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유언으로 소급된답니다. (창세기 49장 10절 :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유다지파 바로 위에 있는 베냐민 지파의 일부와 유다지파가 훗날  남왕국  유다의 원류가 되는 것이고요. 나머지 지파들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본류가 되는 것이지요. 

다윗이 왕이 세 번되는 과정을 잠시 다시 생각해 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첫 왕이 된 것은 지금 보통 우리들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고구려의 왕이나 신라의 왕 또는 백제의 왕처럼 평양이나 경주, 공주에 있는 궁궐에 앉아 있던 왕이 아니랍니다. 

경상북도를  각 군으로 나누어 땅을 차지하고 있지만 각 군의 작은 읍들에 모여 살고 이웃하는 읍들에는 적들이 있고 뭐 그런 상황이었는데 블레셋이라는 엄청난 세력의 적들이 경상북도 전체를 위협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 사울이 각 군(지파)들의 힘을 모아서블레셋과 싸움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 때 다윗은 사울왕 밑에 있는 여러 장수들 가운데 하나 였다는 것이고요.(어떤 장수였는가는 다음 글에서) 그런데 야훼 하나님이 그런 상태에서 사울을 제끼고 다윗 네가 왕이 되라고 사무엘을 시켜 기름을 부었다는 것이 첫 번 째 이야기이고요. 

두번 째는 자기의 고향땅 유다에서 자기 고향  땅 사람들, 곧 유다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고요. 그 떄 유다와 일부 베냐민 지파를 뺀 나머지 땅인 북쪽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곳의 왕은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이었지요. 

마지막으로 세 번 째 왕위에 오른 것이 바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통일한 후에 예루살렘에서 치루어 진 일이지요. 

오늘의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인 삼 천년 전에 대한민국 경상북도만한 작은 땅에서 열 두 부족이 서로 땅을 갈라 살던 때에, 그나마 각 부족의 땅엔 이런 저런 적들이 함께 했고, 서쪽으로는 블레셋, 남쪽으로는 아말렉, 동으로는 모압 등등의 적으로 싸여 있던 시절에 다윗이 통일 왕국을 이루어가는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 한번 지도 설명을 한 것이랍니다.

결과 – 왕국 4

(당신의 천국 – 스무 번 째 이야기)

“사울은 수천을 치셨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사울은 이 말이 비위에 거슬려 몹시 화를 내어 투덜 거렸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죽인 공을 돌리고 나에게는 고작 수천 명을 죽인 공밖에 돌리지 않으니 왕의 자리마저 그에게 돌아가겠구나.” (사무엘상 18: 7-8, 공동번역) 

“모든 역사의 경우가 대부분 그렇듯이, 어느 인물을 평가하는 후기의 입장에 대해서도 결국은 결과가 결정해 주었다. 결국 사울의 평가는 다윗이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사울의 업적을 떠나서 다윗의 성공을 생각할 수 없다.”  ㅡ군네벡(Antonius H. J. Gunneweg)이 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주인공들 일테면 조조와 유비 제갈공명이나 관우, 장비, 조자룡, 하후돈, 하우연 손권 등에 대해 어떤 인상들을 가지고 있으신지요? 

하늘이 내린 책략가로 떠오르는 공명이나 착한 이미지로 떠오를 수도 있는 유비, 간사하고 교할한 이미지로 떠 올릴 수도 있는 조조 등등 사람들 사이에 어떤 굳어진 이미지들이 있지요. 

그러나 실제 역사적 사실로 보자면 공명이 했다는 일 가운데 많은 것들이 허구이거나 사실과 다르답니다. 소설의 도입부에 나오는 유비, 관우, 장비가 맺는 도원결의는 소설가 나관중의 상상 속에서 그린 허상이고요. 

조조에 이르면 사실과 다른 것들이 더욱 많답니다. 소설속에서는 나쁜 이미지를 지닌 인물로 그려져 있지만 실제 역사적 인물 조조는 학문 특히 시에 능한 시인이었고, 서화(書畵)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사람입니다. 학문의 깊이도 남달랐고, 군사와 무예 실력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 인물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서 일하게 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답니다. 그런 탓인지 이즈음에는 성공하려면 조조의 처세술을 배우라는 글들도 종종 눈에 뜨인답니다. 

아무튼 소설과 역사적 사실 사이의 차이지요. 

소설이 아니더라도 실제 똑같은 사실도 보는 관점에 따라 아주 달라지는 경우도 있지요. 

혹시 고려시대 역사에 나오는 묘청(妙淸)의 난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시는지요. 요승(妖僧 – 요망한 중) 묘청이 서경(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대위국(大爲國)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가 토벌된 일로 기억하시는 분들이 아마 많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그러나 단재 신채호선생은 이 묘청이 일으킨 사건이야말로 한반도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던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하셨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국에서 전시작전권을 환수해야한다는 축과 그건 종북주의자들이 하는 소리라는 축의 대립이 있지요. 바로 이런 대립의 시초가 고려시대 묘청이 시도했던 서경천도(묘청의 난)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낭불 양가 대 유가의 전쟁이며(郎佛 兩家대 儒家의 戰-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화랑과 불교의 세와 유교의 세력이 맞선 전쟁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전쟁이며(國風派대 漢學派의 戰- 고려의 정신과 중국 종속 정신과의 전쟁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事大黨)의 전쟁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전쟁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이었던 것이다. 

이 전역(전쟁)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하였으므로 조선사(朝鮮史)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束縛的)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진전(進展)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 신채호선생의 일갈입니다. 

이 묘청의 반란을 진압한 고려 정부군의 대장이 김부식이었고, 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고, 이 사건에 대해 기록을 남겼습니다. 

어느 쪽 시각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것 같으신지요? 어느 쪽 해석이 한반도나 전세계에 퍼져사는 한민족의 미래를 위한 해석이 될까요? 

자! 이쯤 우리들 이야기의 본류인 성서의 사울 이야기로 옮겨갑니다. 

이스라엘 첫 왕 사울에 대한 이야기를 읽노라니 삼국지도 생각나고, 묘청의 서경천도 사건에 대한 단재 선생의 글도 생각나고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성서 사무엘상에 나오는 사울 이야기를 읽다보면 사울은 참 불쌍한 사람이랍니다. 화려한 등장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첫 왕이 되었지만, 무수한 전쟁만 치루다가 목이 잘려 나가 효수되는 처참한 죽음을 맞습니다. 더더구나 세 아들과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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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나오는 사울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울은 야훼 하나님이 예비해 둔 왕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부족 동맹을 상시적으로 위협해 온 블레셋을 비롯한 이스라엘과 철천지 원수였던 아말렉 등 많은 가나안의 적들과 크고 작은 전투와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왕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부족의 총사령관에 가까웠습니다. 초기에 그는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야훼 하나님 앞에 결정적인 죄를 연달아 짓게 되고, 야훼 하나님이 세운 사사(판관)였던 사무엘과 반목을 하게됩니다. 

이 무렵 야훼 하나님의 눈길은 이미 사울을 버리고 다윗에게 꽂혀 다윗을 새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어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에 대한 시기에 불타 정신적으로 여러 불안 증세를 보이다가 끝내 무당을 찾아가 자기의 앞날을 묻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습니다. 

블레셋과의  마지막 대접전이었던 길보아 싸움에서 세 아들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블레셋군은 그의 주검에서 목을 치고 그의 시체는 벳산 성벽에 못박아 달아 놓았다고 성서는 기록합니다. 

성서적 고백과 야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고요. 

사울은 왕이 된 후 집권 중반부터 다윗과 아주 심한 권력 투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제 이어질 다윗 이야기에서 주로 다룰 일이지만 인물론으로 보자면 사실 다윗보다 사울이 훨씬 잘난 사내이고 성격의 됨됨이도 낫다는 생각입니다. 

사울은 왕이라기 보다는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전형적인 무관 스타일입니다. 그에 비해 다윗은 잘 알려졌다시피 시도 잘 쓰고 악기도 잘 다루는 등 가무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변신도 밥 먹듯이하는 아주 교활한 성격이었으며, 때론 탐욕스럽기도 한 마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나쁜 이미지의 조조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을 이기고 왕위를 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들이 그 왕위를 이어나갔고요. 역사는 다윗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말이랍니다. 그렇다면 실제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성서의 기록이 억울할 수도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되는 것이지요. 

자! 여기서 성서적 고백 곧 야훼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천국을 위해서 말입니다. 

성서가 기록한 사울의 죄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왜 사울에게 얼굴을 돌리고 그를 버리기로 결정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사울의 죄는 저 위에서 말한 무당을 찾아갔던 일 말고도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직분과 왕의 직분이 엄격히 분리된 약속을 범한 죄입니다. 전쟁을 치루기 전에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사사인 사무엘의 몫인데 그 일을 사울이 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3장을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의 결정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답니다. 

둘째는 아말렉과의 전쟁을 치루고 난 뒤에 벌어진 일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 전쟁을 치루기 전 사울에게 명령을 내렸답니다. 아말렉족을 싹 죽여 없애고, 모든 재물도 태워 없애라는 명령이었답니다. 

사울은 이 전쟁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말렉 왕인 아간과 양과 소 등의 재물들을 죽이지 않고 탈취를 한 죄입니다. 

이 역시 인간적으로 보면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무엘이 이런 사울의 행태를 보고 나무랄 때 보인 사울의 태도입니다. 그는 야훼의 명령을 어긴 일에 대해 묻는 사무엘에게  자신의 군대와 야훼를 위한 제사용이었다는 변명을 한 것입니다. 뒤늦게 그는 후회하며 용서를 빌지만 이미 때는 늦은 일이었습니다. 

이 세가지가 성서가 말하는 사울의 죄입니다. 그 유명한 성서 구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사무엘상 15 : 22, 표준 새번역 개정판)라는 대목이 나오는 장면입니다. 

성서와 이스라엘이 사울왕의 생을 놓고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물론 제 생각일 뿐입니다. 

첫째 세상의 그 어떤 권력도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주관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권력은 신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고백이라는 말입니다. 

두번째는 이스라엘족들의 민족적 신앙고백인 야훼 신앙에 영향을 끼칠 외부의 것들은 애초 싹을 자르는 철저한 경계를 두자는 고백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이제 이야기가 이어질 다윗과 사울의 결정적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 이스라엘의 메시아 원형인 다윗과 저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구원자 예수 사이를 잇는 다리인 바로 “회개”입니다.

왕도(王道) – 왕국 3

(당신의 천국 – 열 아홉 번 째 이야기)

베냐민 지파에 속한 명문 출신으로서 덕이 출중한 기스(Kish)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사울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긴 미남 청년이었다. 더우기 그의 지혜와 총명함은 외모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 (요세푸스 의 유대 고대사 6권 4장에서) 

가문 좋고  키 크고 잘 생긴데다가 지혜와 총명이 출중한 사울은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한 첫 번 째 왕이었습니다. 성서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은 이 점에서 완벽한 일치를 보여 줍니다. 

이즈음처럼 상징조작으로 준비된 대통령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야훼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한 왕의 재목이었다는 말입니다. 

사울의 이야기를 풀어 가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보려는 것들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왕을 세워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기 약 이백 년전에 이미 이스라엘 왕도(王道)에 대해 기록한 성서의 기록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은 마땅히 이런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며, 이러 몸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규정들을 이미 정해 놓았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광야에서 히브리족과 야훼 하나님 사이에 맺은 계율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답니다. 

자! 우리들이 지나왔던 신명기로 잠시 다시 돌아가 봅니다. 신명기 17장 14절에서 20절까지 이스라엘 왕도(王道)에 대한 규정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야훼 하나님이 앞날을 예견하시고 미리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언젠간 틀림없이 왕을 세울 것인즉 왕은 이러해야 한다라고 명령했다는 말입니다. 

“왕은 반드시 동족이어야 하고, 큰 군대(군마)를 거느려서는 안 되고, 많은 후궁을 두어서도 안되며 재산을 많이 모아도 안된다.  왕이 된 후 반드시 두루마기에  이런 명령들을 적어 놓고 매일 되뇌이며 지켜야 한다. 혼자 힘으로 힘드니 사제가 늘 옆에 있어야 한다.  특히 동족을 얕잡아 보는 일은 절대 금한다.”라는 내용입니다. 

두번 째입니다. 이런 성서(출애굽기에서 열왕기까지) 역사 이야기들의 기록연대입니다. 뭐 물론 그 때 그때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의뜻으로 기록되었다고 믿으셔도 괜찮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도(王道)를 이백 수십년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예견하시고 말씀하셨다고 믿는 것도 좋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저 위에서 인용한 요세푸스라는 유대의 역사가가 유대고대사를 기록한 것은 기원 후 약 95년경의 일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제 이야기 가운데 신구약 중간사와 예수 시대사는 이 양반의 글이 많이 인용될 것입니다. 

오늘날 성서학자들의 의견들은 이 이야기들(출애굽에서 열왕기까지)의 근간을 이루는 기록들은 남왕국 유대왕 요시아 때를 전후한 기원 600년 경에 이루어졌다는데로 모아져 있습니다. 

사울 왕의 등장이 대략 기원전 1030년에서 1000년 즈음으로  보고 있으므로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지고 거의 망할 무렵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했던 왕도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기록연대를 한번 생각해 보다는 뜻은 역사를 어떻게 되돌아보고 해석하느냐의 중요성을 되짚어 보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적 경험과 사건을 되뇌일 때마다 야훼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의 일하심이라는 관점으로  고백하고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인류사에 나타난 수많은 족속들 가운데 전민족적으로 수천년을 일관되게 이런 고백으로 역사를 되돌아 본 민족은 유태족이 유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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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측면에서 이즈음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교과서 문제를 보고 있노라면 측은함이 밀려 들 뿐입니다. 아마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지금 대한민국에 살아계셨다면 유영익, 이명희 등을 비롯한 김무성 등등 역사 왜곡론자들을 향해 육혈포를 들이될 의열단 하나 만드시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답니다. 

세번 째입니다. 한국 역사도 제대로 모르면서 왜 유대 역사나 이스라엘 왕조사를 우리가 이야기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쟁이로서 이따금 기독교인들을 비난하거나 비평하는 이들이 하는 이 말 “자기 역사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라는 말에 강력히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역사에 대해서만은 이스라엘 역사 이상으로 잘 알고 해석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한답니다. 

아무튼 천국,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하면서 왜 유대사와 구약 성서에 이리 매달리느냐는 것이지요.

그리스도 곧 메시아 예수의 계시와 구원, 부활과 영생,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시간과 공간의 매임없이 전세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에 전생애를 바쳤던 사람 바울, 그의 믿음의 밑바탕에 깔린 의식이 바로 유대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이 들여다 볼 이스라엘 역사 곧 유대사는 정말 보잘 것 없는 역사입니다.  왕을 세운지 백년만에 나라는 두 동강나고, 남북으로 갈린 두나라가 서로 으르렁거리다 북쪽 이스라엘는 앗시리아에게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합니다. 참 보잘 것 없는 역사랍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가는 제 이야기 속에서 이 보잘 것 없는 유대사가 중요한 것인가 하는 까닭을 말씀드립니다.

바로 바울 사도가 구원의 확신으로 세상사람들을 향해 쏟아내는 말의 기본 정신은 바로 보잘 것 없는 유대사와 그 역사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 고린도전서 1: 26-30, 공동번역) 

이제  세가지 곧 내가 누릴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고백했던 왕도를 근간으로 사울왕부터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순장(殉葬) – 왕국 2

(당신의 천국 – 열 여덟번 째 이야기) 

그 때에 가서야 너희는 너희들이 스스로 뽑아 세운 왕에게 등을 돌리고 울부짖겠지만, 그 날에 야훼께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무엘상 8 : 18, 공동번역) 

이스라엘 부족들이 왕을 세우게 해달고 조르자, 내키지 않았지만 그 청을 들어 주기로 한 야훼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부족들의 마음을 돌려 보려는 시도를 해 봅니다. 

사무엘상 8장 10절에서 18절 사이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그 내용입니다. 

너희들이 왕을 세우겠다면 그렇게 하기는 하겠다만, 너희가 세울 왕들이 도대체 어떤 일들을 할 것인지를 알기나 하느냐? 내가 미리 말해주마! 너희가 세운 왕들은 너희와 자손들에게 병역의 의무, 노역의 의무 등을 부과할 것이고, 비록 지금 네 소유인 것도 왕이나 주변 권력이 원하면 마음대로 빼앗아 가기도 할 것이고, 심지어 너희들을 종으로 삼는 일도 일어날 것이다. 또한 이제껏 나 야훼가 만든 법률인 율법에 따라 거두어 들인 너희 소득의 십분의 일과는  아주 다른 십분의 일세가 부과될 것이고, 이제껏 레위족속과 너희 부족들의 평등한 복지에 쓰여졌던 그 돈들은 왕과 그 주변의 배속 채우는 일에 쓰여질 것이다. 그리고 이 일 곧 왕을 세우는 일로 너희와 제 자손들은 후회하게 될 것이다. 

대충 이런 내용이지요.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라는 마지막 충고였지요. 그러나 끝내 이스라엘 부족은 이런 야훼의 마지막 충고를 외면하고 고집을 피어 마침내 왕을 세우게 됩니다. 

자!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것이 있답니다. 

애굽에서 탈출했던 히브리족들의 기억 속에는 분명 애굽 곧 이집트의 왕들의 모습들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의 고향 땅 우르에 있었던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왕들에 대한 기억도 남아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가나안 땅에 먼저 뿌리 내리고 살던 부족들의 모습에서도 많이 보아왔을 것입니다. 

왕에 대한 모습입니다. 

우리로 치면 단군이나 일본, 몽골 등의 왕의 역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답니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전설은 약간 다르긴 하지만 거의 맥락에 있어서는 같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고대의 왕들은 곧 신(神)과 동일한 위치에 있거나 신과 사람 사이의 중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답니다. 

‘단군’이라는 말의 어원을 여러가지로 해석하고 미루어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당골’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지요. 바로 무당 곧 신과 사람과의 중개자라는 뜻이지요. 

고대의 왕들은 신 또는 신을 대행하는 사람이었답니다. 이게 뭔 말이냐하면 “왕 마음대로 자기 지경에 있는 사람들과 모든 생명체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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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언론에 등장한 말 가운데 하나가 “순장(殉葬)”이라는 말이 있답니다. 제가 언제부터인지는 따져 보지는 않았지만 얼추 노무현 아니면 김대중 대통령 퇴임 이후에서 부터 퇴임 대통령 이후를 함께 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이  말을 쓴 것 같습니다. 

“순장조”라는 말로 말입니다. 

저는 전두환 치세 말기에 이민을 와서 솔직히 잘 모릅니다만, 특히나 인터넷이라는 희대의 물건이 뜨기 전까지, 아니 제게 생활화되기까지 전두환 말기부터 김대중 대통령 퇴임 무렵까지 한국 신문을 거의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 기간에 대해서는 어둡답니다. 뭐 그 때 그랬다는 말이지요. 이제는 알고자 노력만 하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이즈음 제가 보고 있는 신문 또는 잡지를 들면 조선, 동아, 중앙, 경향, 한겨레, 오마이, 뉴스타파, 국민 TV 등등의 한국 매체에서 부터, Washington Post, New York Times, The Times를 비롯한 미국내 지역 신문들까지마음 먹고 시간 나면 아무데나 수시로 들어가 볼 수가 있답니다. 

그런데 2013년 현재 한국 언론은 정말 문제라는 생각이랍니다.  두 가지입니다. 

참 똑똑한 젊은 이들이 취재를 할 것이고, 오랜 경험이 있는 데스크가 판단들을 하겠지만, 돈에 너무 매어 있다는 것이 첫 번 째이고, 그러다보니 쓰는 언어나 보도 태도들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점입니다. ‘순장’이라는 말의 사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 오지요. ‘순장’이란 왕이나 그 주변의 권력자가 죽었을 때 그 죽은 이의 재산인 사람이나 동물들을 산 채로 또는 죽여서 함께 묻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부족들이 왕을 세울 무렵 왕권국가에서 동서를 막론하고 일어났던 일이고, 세계사로 보자면 약 오 륙 백년 전까지 남아 있던 풍습이랍니다. 왕의 절대 권력은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 부족에게 경고했던 것보다 훨씬 사나웠다는 사실입니다. 

탈애굽 40년과 사사(판관)시대 약 200년 동안 이스라엘 부족 동맹은 신정체제 곧 신이 직접 다스리는 시대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등함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꿈꾸어 왔고, 그것이 가나안 세상이라는 자기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오랜 동안 겼었던 노예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 두어 세대를 지나면서 야훼에 대한 믿음과 조상들의 경험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성서는 그런 징조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에서 17절의 기록에는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담당하고 있는 사무엘의 스승 엘리사제의 두 아들이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그 권력을 마구 사용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사무엘상 8장 1절 이하에는 사무엘의 아들들이 돈을 받고 재판을 하거나 행정을 보는 뇌물수수죄를 범하고 있다거나 사무엘상 22장 1, 2 절에 다윗 주변에 모이는 사람들을 보면 “억눌려 지내는 사람, 빚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 그 밖의 불평을 품은 사람들”이라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평등한 가나안의 꿈은 사라진 모습입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첫 징후이자 모습이라고 제가 말씀드렸던 평등한 세상으로써의 하나님 나라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왕국의 첫 임금인 사울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한가지는 짚어야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세운 역사적 사실, 고백들과 다른 민족의 왕들에 대한 이야기 사이에 아주 큰 차이 두가지입니다. 

첫째 고대 왕국 시조왕들은 대부분이 왕이 내려와 백성을 다스리거나 백성들이 원하는 것들을 먼저 알아서 해 주었기에 왕이 되었다(중국의 예)는 설화들을 지닌 반면 이스라엘은 백성들이 원해서 그리 되었다는 점이고요. 

두번 째는 고대 왕국의 왕들은 대개 신의 반열과 동일시 되거나 중개자의 모습이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철저히 야훼 신 앞에서는 백성들과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신의 양보 – 왕국 1

(당신의 천국 – 열 일곱 번 째 이야기) 

요담의 우화(寓話) – 판관(사사)기 9장 8-15절에 있는 – 는, 임금 곧 왕이 된다는 것은 아무런 업적도 이루지 못하는 직업으로써,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런 자리를 좋아할 리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임금의 체제 곧 왕정은 항상 폭군적 성격을 띤다고 가시덤불의 입을 빌어 이야기 한다. (한스 발터 볼프(Hans Walter Wolff)의 구약성서의 인간학에서) 

한민족의 첫 임금은 단군입니다. 잘 알다시피 단군은 하늘나라 임금인 환인의 아들 환웅과 곰에서 처녀가 된 웅녀 사이에서 나온 임금입니다. 이름하여 단군신화입니다. 

이런 첫 임금 설화는 한민족에게만 전해 지는 것은 아니지요. 고대 국가의 첫 임금들은 대부분 하늘, 태양, 달, 별 등 자연과 연계된 신화들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바로 대부분의 고대 국가들은 시작을 왕에서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좀 다르지요. 

성서는 왕 이야기가 아니라 창조 이야기(제가 글을 시작하면서 창세기부터 하지 않았답니다. 창세기는 나중에 요한 계시록 이야기 할 때 함께 하려고 합니다.)부터 시작되지요.

그리고 아브라함과 모세 이야기를 풀어 내고, 가나안 정복 후, 그것도 약 이백년이 지나서야 왕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사실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고 왕국을 이루던 그 시기에는 주변의 많은 나라들은 이미 왕권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요. 

마침내 왕을 세우고 이스라엘 왕국으로 들어서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책이 바로 사무엘서입니다. 

사무엘서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판관(사사)기의 두 곳 기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답니다. 

한 곳은 사사(판관)기의 마지막인 21장 25절입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 멋대로 하던 시대였다.” 

그리고 다른 한 곳은 저 위에서 소개드린  9장 8-15절에 있는 요담의 우화입니다. 우화의 내용입니다. (한번 찾아서 읽어 보시길) 

나무들이 모여서 왕을 세우는 장면입니다. 나무들은 올리브 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 나무 들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청을 합니다. 이 나무들은 모두 다른 나무들이 왕이 되달라는 청을 거절합니다. 나무같은 나무들에게 청을 거절 당한 나머지 나무들이 정말 나무같지 않은  가시나무에게 청을했더니 그 가시나무가 덥썩 그 청을 받아드리면서 공갈 협박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왕이란 이런 것이라는 왕에 대한 히브리족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왕은 야훼 하나님일 뿐이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마지막 절에는 왕이 없어서 제멋대로 하던 시대라는 말을 합니다. 이제 왕을 세우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기 위안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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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사무엘상 1장에서 12장 까지를 보시면 이스라엘의 첫 임금 사울왕이 즉위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답니다. 다시 한번 그 부분을 읽어 보시기를 권하면서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들의 천국을 찾기 위한 핵심이라는 제 생각이랍니다. 

첫째는 사무엘상 8장 7절에서 9절의 이야기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내리는 계시입니다. 

“백성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어 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데려 내 온 이후 이 날 이 때까지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런 짓을 해 왔다. 너한테도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히 경고하여 왕이 그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를 일러 주어라.” 

이렇게 마지못해 내리는 야훼 하나님의 양보에 의해 사울왕이라는 첫 임금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 째는 사무엘서 4장에서 7장까지로 이어지는 블레셋이라는 외부의 적 이야기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일반적인 합리적 사고로 따지더라도 이 블레셋이라는 외부 세력의 침략이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게 된 직접적 동인인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 때까지만 하여도 열 두 부족 동맹국이었으니 말입니다. 동맹국이라는 게 다 그런거 아니겠어요. 서로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관계 말이지요. 

강력한 적 앞에서 강력하게 뭉칠 힘이 필요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부족들이 느끼는 절실한 현실적 요구에 야훼 하나님이 응답은 하시되 정말 마뜩지 않은 응답을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 니들이 왕을 세울려면 세워라. 할 수 없다. 다만 이 것만은 명심해라.”라는 조건과 함께 말입니다. 

그  명심해야만 하는 조건들이란 사실 인간들이 지키기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랍니다. 구약 야훼의 역사관인 신명기적 역사관으로 본다면 인류 역사란 바로 그 감당하기 어려운 신과의 약속을 더 많이 이루려 애쓰는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왕국 시대의 시작은 야훼 하나님께서 그리 마뜩찮게 생각한 역사의 시작이랍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은 그렇게 시작된 약 사백년의 왕국 역사 가운데 통일 왕국이었던 약 백년 동안의 이야기 곧  사울, 다윗, 솔로몬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과연 이들 시대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천국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말입니다.

쉬어가는 이야기 2 – 니가 뭔데?

“네깐 놈이 뭔데?” 또는 “니가 뭔데?”라는 질문을 누군가에게 받아 보셨거나, 스스로에게 던져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라거나, 누군가 당신의 등 뒤에서 한 말을 듣지 못했을 뿐이라는 강변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보통 일반적 수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는 일입니다. 

스스로에게 “니가 뭔데?”, “내가 뭐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일 수도 있고, 어떤 일에 대한 자신감이 없을 때나 손해를 입게 되거나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피하려 할 때 사용하기도 하지요. 

누군가가 제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질문한 사람의 생각에 비추어 제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하거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겠지요. 이럴 경우 대처하는 방법들은, 그 말을 들은 사람의 성격과 그 상황에 따라 아주 여러 가지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자리를 피할 수도 있겠고, 다툼이 일 수도 있겠거니와 제 삼자를 끌어 들일 수도 있을겝니다. 

이런 일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소한 일상에서 겪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조금 크기를 넓혀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말을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이 말은 내가 속한 국가 공동체가 정해놓은 헌법과 법률 및 자연법 곧 사람답게 살 권리 보장법 아래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뜻이지요. 

다른사람과 똑같이 법과 제도 아래서 “니가 뭔데?”라는 질문을 받지 않을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국가에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또한 국가라는 시민의 합의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에게  “니가 뭔데?”라는 질문이 마구 돌아다니지 않도록 요구할 권리도 있는 것이지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루고자하는 평등의 의미지요.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백성이 아니라, 법과 제도 아래서 누구나 평등해야 하는 시민들이 모인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이겠지요. 

그런데 다스리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시민보다는 백성이 훨씬 편한 일이고, 다스림을 받는 게 편한 사람들 역시 늘 있게 마련이고요. 그냥 그렇게 나누어져서 살면 좋겠지만 또 시민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 있어왔지요. 그래 다스리고자 하는 자들과 시민이고자 하는 자들의 다툼이 있게되는 것이고 그런 일들이 연속되면서 역사가 이루어 진 것이지요. 

당연히 역사는 백성에서 시민들이 늘어가는 쪽으로 흘러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가겠지요. 

그런데 점점 돈의 권력이라는 힘이 세어지고, 시민으로서의 경험이 그리 많지 않거나 단기간에 백성에서 시민으로 바뀐 곳에서는 그 시민 앞에 수식어가 붙게 되는 것이지요.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거나 행동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거나 말입니다. 물론 불행한 사회이지요. 

이제 “니가 뭔데?”의 크기를 조금 더 넓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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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바로 “모든 사람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다 평등한 모습으로 서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천국”이라는 제목으로 쓰고 있는 제 이야기 앞에 던져진  “니가 뭔데?”라는 질문에 대한 아주 간단 명료한 답이랍니다. 

“신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이 말을 “성서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말로 대체 하면서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은 계속되는 제 이야기 속에서 이어질 것입니다. 

Layman 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평신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말의 또 다른 뜻은 “이제 막 시작한” , “아주 초보적이어서 잘 모르는”의 의미가 담겨 있답니다. 아마츄어 곧 전문가가 아니라는 뜻도 담겨 있고요. 

성서연구방법론으로 유명한 한스 베버(Hans R Weber)의 말입니다. “종종 성직자들은 자기들만의 교회의 목회를 수행하려고 한다. 또한 평신도들은 그들의 목회를 한 사람 –성직자-에게 맡겨 버린다. 이 한 사람의 독무대(one man show)는 철저히 비성서적이다.”(‘Salty Christians-소금 노릇하는 기독인들’에서) 

교회안에서나, 신심이 돈독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말들을 하곤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목회자나 성직자는 말씀을 먹여 주는 사람이고, 평신도는 먹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아주 잘못된 일이랍니다.

이제 연재되는 제 이야기로 돌아가려합니다.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과 왕조 시대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혹시 성서를 처음 읽는 사람이나 새롭게 성서를 알려고 다시 읽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저 나름대로의 성서 읽기 방법을 소개 드립니다. 그냥 제 경험과  아주 오래 전에 성서 스타디 그룹들을 이끌 때 유용했던 방법이기에 소개 드립니다. 

우선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죽 읽는 것입니다.  그냥 창세기 첫 글자인 “태”에서 계시록 마지막 “멘”까지 죽 읽어 보시라는 말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어떤 역본을 보시느냐는 것입니다. 성서 한글 번역본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아무런 선입관도 갖지 마시고 자신이 읽게에 편한 번역본이 제일 좋습니다. 그래야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살아있는 한글 세대들에게 읽기 적합한 번역본은 공동번역이나  표준 새번역 개정판일 것입니다. 그렇게 성서를 새롭게 읽는 기회가 되시는 분이 한 분이라도 계신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제 이 글쓰기에 큰 의미를 둘 수 있겠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냥 죽 쓰고 올리기 때문에 때때로 뜻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들도 있고, 맞춤법에 틀린 말들도 있어 읽기에 좀 불편하실 때도 있습니다. 일단 전체 이야기를 다 마친 후 교정을 보도록 할 것입니다. (현재 생각으로는 백 번 째 이야기 정도에서 마치려 합니다.) 

자! 이제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한 수 접고 이스라엘 왕을 세우게 되는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쉬어가는 이야기 1

사사시대 이야기를 마치고 이스라엘이 국가가 되고 왕을 세우는 왕권시대와  예언자 시대 이야기로 넘어가려다 잠시 쉬다 가려고 합니다. 

성서 사사(판관)기와 사무엘서 사이에 끼어 있는 룻기 역시 쉬어가는 이야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뭐 성서 그러면 신구약 합본책을 말하고 어디에서나 보려고만 한다면 쉽게 구해 볼 수 있습니다만, 옛날 한 세기 이전에 한국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성서라야 중국 성서를 번역한 마태, 마가 등의 신약성서 낱권이었답니다. 번역 출간된 순서대로지요. 

딱 그 때 뿐만이 아니라 소형 책으로 편집된 신약성서로 처음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이 첫 페이지를 넘겨서 읽는 마태복음은 아주 낯설게 다가 온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답니다. 족보 이야기로 시작되기 때문이지요.

누가 누구를 낳고…로 시작되는 족보 이야기 말입니다. 

룻기는 바로 그 족보 이야기 가운데 하나랍니다. 누구의 족보냐하면 이제 왕권시대의 주인공이자 유태인들의 메시아 원형이 되는 다윗의 것이지요. 다윗의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랍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바로 예수와 다윗 그 윗대로 아브라함과 연계되는 핏줄을 밝히는 것이랍니다. 

이건 단지 제 생각일런지 모르지만 그 족보 이야기 별로 중요하진 않고요, 그게 사실 이건 아니건 그건 더더구나 중요하지 않고요. 왜 그렇게 연결이 되어져야만 했을까하는 물음은 아주 타당하고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은 한답니다. 

자! 그 이야기는 나중에 마태복음 이야기할 때 드리기로 하고요. 오늘은 저도 좀 쉬어가려고 한답니다. 

제 이야기의 주제인 당신의 천국 –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잠시 쉬고요. 도대체 제가 왜 이런 글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제 정신의 족보 이야기를 좀 드리려고 한답니다. 

그러므로 제 연재 글을 읽다가 지치신 분들도 잠시 쉬어 간다는 생각으로  읽어도 좋고 안 읽어도 좋답니다. 

벌써 오륙년 전 쯤의 일이 되었습니다만 마더 테레사 수녀가 세상을 뜬 후 그녀가 남긴 기록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녀가 오랜  기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했었다는 뉴스들이 Time지를 비롯해 회자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사는 인근 필라델피아에서 발행되는 어느  한인 일간지에 지역에서 제법 이름난 규모있는 교회 목사의 컬럼이 실렸답니다. 내용인즉은 마더 테레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 까닭은 그녀가 성서를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답니다. 

화장실에 앉아서 볼 일보다 그 컬럼을 읽고는 “쯔쯔쯔”하는 생각에 그 컬럼을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게제시킨 적이 있답니다.(제가 시켰다고 표현한 것은 당시 그 신문에 조금 관여를 했었기에)  

Mother-Teresa-1981.07.09

제가 쓴 글의 내용인즉은 “테레사 수녀가 성경을 안 읽었다기보다  목사인 당신이 성경을 안 읽은 것 같다. 성경은 신을 의심하고 배반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런 사람들에게 꾸준하게 사랑으로 신의 존재를 알게하고 인도하려는 것이 성서이다. 심지어 인간이 된 신 곧 예수도 신에 대한 물음을  던졌었다. 십자가 상의 칠언을 생각해 보라. ‘어찌하여 나를 바리시나이까’하는 처절한 물음을 테레사는 안고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삶을 보라. 두툼하게 살찐 당신의 사진 얼굴로 보아 아마 당신은 그 경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성서를 열심히 좀 읽어라.”라는 아주 도발적인 글이었답니다. 

참 저도 할 일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엔 저만큼 할 일 없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제 글을 읽고  전화를 주시는 분들이 계셨는데요. 크게 두 부류였답니다. “네 깟 놈이 뭘 안다고  감히 목사님께…”하던 사람들과 “참 시원했다. 참 목사들이 문제다.”라는 사람이었답니다. 물론 후자는 딱 한 분, 직업이 목사였구요. 전자는 글을 쓴 목사가 당당하는 교회 교인들이었답니다. 

그 일 이후로는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나 목사들을 향한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답니다. 먹고 살기 바빳던 이유도 한 몫 했고요.

그러다 한 두 해전에 고등학교 후배가 아버님께서 돌아가실 듯 하니 선배가 좀 장례예식 좀 맡아달라는 부탁을 해 왔는데 그 이유가 아주 걸작이었답니다. 

후배의 선친께서는 독실한 천도교인이셨고, 본인의 마지막 길을 천도교 예식으로 마치길 원하셨답니다. 그런데 여기는 미국, 그것도 대도시가 아닌 촌구석, 천도교 교령이나 선도사커녕 교도들도 찾아보기 힘든데 누가 그 일을… 후배가 생각하기에 가짜라도 만들어야겠는데 그 가짜로 선배인 제가 적격이라는 것이었답니다. 

그래 그 일을 맡게 되었답니다. 그 때 천도교에서 고백하는 죽음에 대한 자세도 배우게 되었고요, 고인이 되신 후배의 선친께서 남기신 기록들을 보면서 죽음이란 안고 가는 것이다라는 생각도 해 보았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과 봄 사이 심하게 병원 신세를 지시면서 마치 곧 돌아가실 것 같던 어머님과 장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삶의 과정으로써의 죽음에 대해 깊히 생각해 볼 수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초여름이 지날 무렵 잘 나가지도 않던 교회 소모임에서의 경험은 제가 이 연재글을 쓰기 시작한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답니다. 

죽음, 천당, 다른 종교 라는 물음입니다. 이거 하나 하고 가자하는 생각이 확 밀려 왔답니다. 

그 누군가 단 한 사람만에게라도 성서가 인도하는 계시의 세계, 구원의 세상, 죽음조차 과정인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하는 생각이었답니다. 

쉬어가는 이야기조차  1, 2로 나누어 연재해야겠습니다. 하다보니 이야기가 길어지는 탓입니다. 

혹시 사기꾼 신드롬이나 가면(mask) 신드롬이란 말 들어 보셨나요?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말할 때 쓰는 말이지요. 

올 여름 내내 제가 빠져있었던 신드럼 현상이라는 생각으로 이 연재글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네깐 놈이 뭔데…”라는 질문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두번 째 이야기로 넘깁니다.

드러냄 – 새 부족 5

(당신의 천국 – 열 여섯 번 재 이야기) 

너의 아비는 법과 정의를 펴면서도 먹고 마실 것 아쉽지 않게 잘 살지 않았느냐? 가난한 자의 인권을 세워 주면서도 잘 살기만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바로 나를 안다는 것이다. (예레미아 22: 15-16, 공동번역) 

“ 그 사람은 내가 잘 알지!”, “축구라면 내가 한 수 한다니까!”, “그 교회라면 내가 훤하지?” 등등의 말들 많이 들어 보시지 않으셨나요? 혹시 당신이나 제가 그런 말들을 많이 하는 축에 속하지는 않을까요? 

누군가를 안다거나 어떤 사실이나 정황을  알고 있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  아는 정도와 크기를 어떻게 계량 또는 계측하고  다른 이들의 앎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할 수 있을까요? 나아가 그런 비교들이 필요한 것인지, 의미가 있는 것인지요? 

먹고 살기도 바쁜데 이런 이야기 좀 골아프지요? 

자! 옛날 이야기로 돌아가 보지요. 삼천년 전의 가나안으로 말입니다. 

탈애굽과 가나안 정복이야기(성서 출애굽기에서 여호수아서까지)와 이스라엘 왕국 건설 이야기 사이에 끼어 있는 책이 사사(士師)기 입니다. 공동번역은 판관기로 번역되어 있지요. 영어 성경으로는Judges라고 하고요. 재판관이라는 뜻으로 보자면 판관기가 적합한 것도 같고요. 히브리어 본래의 뜻은  재판한다, 또는 다스린다는 뜻 이외에도 구원한다는 뜻도 있답니다. 또 그런 의미에서는 사사라는 말도 적합한 것 같고요. 

아무튼 사사기 2장 16절에 보면 “야훼께서 판관들을 일으키시어 약탈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 내시곤 하였다.(공동번역)”라는 있는데 구원자로서의 역할이 컷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사기에는 열 두 사사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왕권시대 직전의 사무엘도 사사라고 했고 그 두 아들도 사사라고 했으니 성서에 나오는 사사들의 수는 열 다섯으로 볼 수도 있고요. 바락장군 까지 넣어서 16명 이라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그들이 한 일들 또는 야훼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한 일들은 사사기를 한번 읽어 보시길 바라고요. 

제가 사사기를 이야기하면서 전해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두가지랍니다. 

첫째는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족들을 위해 사사(판관)들을 세우신 까닭이랍니다. 이스라엘족들의 고백이기도 하지요. 바로 툭하면 야훼와 맺은 계약을 어기고 바알신 등 다른 신을 섬기거나 조상들보다 더 나쁜 짓들을(사사기 2장 19절) 일삼는 이스라엘족속에 대한 경고와 함께 구원을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들의 끊임없는 배신 행위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계약 상대인 을의 구원, 곧 이스라엘 족속의 구원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는 고백입니다. 

두번 째는 성서 전체 이야기 중에서 “앎”에 대한 뚜렷한 변화가 시작되는 시점이 바로 사사기입니다.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앎” 곧 아는 일이고, 신의 입장에서 보면 “드러냄” 곧 계시입니다. 

드러냄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말은 지금 우리들이 찾아가고 있는 천국 곧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이르는 첫 번 째 핵심 열쇠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그의 드러남과 나나 우리가 그를 만나고 아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이 어떻게 나나 당신에게 나타셨는가? 그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모세는 직접 사람의 말을 하시는 야훼 하나님을 본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런 모세에 후계자입니다. 이 두 지도자들에게 나타났던 신 야훼는 스스로 드러내셨던 분입니다. 비록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끌었던 무리들이 때론 의심하고, 불신을 드러내긴 했지만 모세와 여호수아가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에는 깊은 신뢰와 믿음을 보냈습니다. 그런 고백들을 쉬지 않기도 했습니다. 

사사시대 이후의 야훼 하나님의 드러남 곧 계시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바뀝니다. 직접 신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꿈이나 어떤 징후로 사람과 만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사람들의 고백을 통해 신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세나 여호수아시대의 야훼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태도와 사사시대 이후의 태도 사이에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의 드러남 곧 계시에 대해 모세나 여호수아시대의 사람들이 신의 계시를 보고 만났던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보낸 신뢰의 크기보다 사사시대 이후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 곧 사사들이나 예언자들에게 보내는 신뢰의 크기는 현저하게 작아진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일들이 점점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 크기의 차이 곧 야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크기가 더는 작아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신이 택한 드러남의 방식이 바로 직접 계시였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첫 번째 전환점이 바로 사사기의 기록이라는 제 생각입니다. 

얼핏 옛날 이야기로 치부하기 쉬은 사사기의 중요함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아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유다왕 여호야킴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너의 아비는 법과 정의를 펴면서도 먹고 마실 것 아쉽지 않게 잘 살지 않았느냐? 가난한 자의 인권을 세워 주면서도 잘 살기만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바로 나를 안다는 것이다. (예레미아 22: 15-16, 공동번역)” 

신학자 본 훼퍼는 “신은 우리의 삶의 중심안에서 그 피안(彼岸)에 있다.”라고 했답니다. 

하나님이 저 하늘 위에서, 아니면 저 쪽 다른 세상 어딘가나 죽음 저 편 어딘가에서 불쑥 누군가에게만 특별히 나타나는 신이 아니라 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아니 평범 이하인 사람에게 조차 늘 일상적으로 하루하루의 삶 가운데 전능자와 구원자로서 드러나는 시대로 바뀌는 첫 번 째 시점이 바로 사사시대라는 말씀이랍니다. 

계시에 대해서는 앞으로 여러번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말과 이야기로 계속될 것입니다. 

계시, 구원, 하나님 나라 – 이 세 개의 단어는  제 이야기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천국 이야기는 이제  왕국과 예언자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염치(廉恥) – 새 부족 4

(당신의 천국 – 열 다섯 번 째 이야기)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백 십 세에 죽었다. –중략-  그의 세대에 속한 사람으로는 그가 죽어 조상에게로 돌아 간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야훼를 모르는 새 세대,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일을 해 주셨는지 모르는 새 세대가 비록되었다. (판관기(사사기) 2 : 8, 10, 공동번역) 

모세의 후계자로 가나안 정복의 임무를 잘 수행한 여호수아도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출애굽의 경험과 가나안 정복의 첫 경험들을 쌓은 세대들이 모두 죽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겪었던 탈애굽과 가나안 정복 과정의 일들과 그 일들 위에 함께 하셨던 야훼에 대해  겨우 이야기로만 전해들은 세대들이 가나안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일제의 경험들과 해방, 6.25 등의 경험이 없이 이야기로만 전해들은 세대들이 주인이 된 한국을 생각하신다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다만 보는 이에 따라 생각들이 다 다를 일이지만, 제 생각으로는 지금의 대한민국의 경우는 지난 역사의 경험이 없는 새 세대의문제가 아니라, 마지막 옛 세대들과 그들이 남긴 부(정치, 경제, 언론, 문화, 교육, 군사 등등 모든 면에서 가진 富)를 이어 받고자 갖은 수단을 동원하는 특정 그룹의 후예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을 한답니다.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비단 성서의 잣대가 아니더라도 염치(廉恥)없는 짓을 너무 대놓고 하니 참 볼성 사납기만 할 뿐입니다. 

적어도 오,육, 칠십년대 이승만, 박정희 정권 아래서도 친일이 부끄러운 짓이었다는 양심은 통했었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본인 자신들의 친일 행각이나 부모 세대의 친일에 대해 숨기거나 우린 그런 일과는 무관한 척 행동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문명의 21세기에 이르러 일제 통치의 부끄러운 역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저 뻔뻔스러움이 활개치는 것을 보면서,  제가 믿는 신앙의 눈으로 보면 “때가 꽉 차 오르고 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랍니다. 

“때가 이르렀다.” – 이즈음 한반도 남북을 바라보는 제 심정이랍니다. 어쩌면 기도일 수도 있겠고요. 

자! 이쯤, 우리들의 이야기인  천국 곧 하나님 나라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약 60년에서 백년 정도가 흐르니 세대가 싹 바뀌게 된 것이지요. 세겜에서의 새로운 계약으로야훼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믿고 의지하고 칭송할 것을 선언하며 새 출발한 이스라엘 부족 동맹은 세대가 바뀌자마자 야훼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맙니다. 

세 새대들이 들어서면서 일어난 제일 큰 문제는 바로 십계명의 제 일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들을 섬겨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못할 짓들을 하였다.” 

판관(사사)시대(왜 판관 또는 사사로 불리었는지는 다음 글에서 하기로 하고요) 약 200년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새 세대들이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택한 바알신들은 어떤 신이었을까요? 

가나안_문화와_바알신앙_페이지_09_philosophy78

혹시 만신전(萬神殿)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오만 잡신들이 다 모인 신들의 전당을 일컫지요. 대단히 미안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나, 이 글을 읽고 읽는 당신에게나 우리 조상들이 섬겨 왔던 오만 잡신들에 대한 믿음과 생각들의 어떤 인자들을 조금씩은 다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랍니다. 한국인이라는 사고체계, 한글을 쓰는 사고 체계에서만 느끼는 신에 대한 관념이 있다는 말씀인데, 이런 문제들은 나중에 바울을 이야기하면서 좀 상세히 이야기 해 보려고 합니다. 

아무튼 가나안에는 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지역은 농사를 짓는 지역이었고, 농사는 계절에 영향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농사란 반복되는 일입니다. 씨뿌리고 거두는 일이 반복딘다는 말입니다. 올해는 이런 결과를보았지만 내년에는 다른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이지요. 또한 농사는 땅과 하늘이 잘 도와 주어야 되는 일입니다. 토질도 좋아야 하고 물의 관리도 쉬어야 하지요. 그러러면 또 하늘이 도와 주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족을 이룬 첫 세대들 곧 광야세대와 가나안 정복세대들의 꿈과 목적은 노예에서의 해방과 내 땅을 가진 자유인이었습니다. 시작이 있었고 끝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야훼신은 그 시작과 끝을 만드신 신이었습니다. 

가나안에 있었던 신들은 야훼 하나님과는 다른 신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유혹이 가는 신들이었던 것입니다. 

원래 농사를 짓는 가나안인들이 믿는 많은 신들 가운데 으뜸되는 신의 이름은 엘(EL)이었고 그의 아내되는 신의 이름은 아세라입니다.(열왕기상 18:19)  그 둘 사이에서 나은 아들 신이 바로 바알인데 이 바알신이 주관하는 일은 비와 식물들이었답니다. 곡식들을 자라게 하는 신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알신의 부인은 아나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사랑과 전쟁을 주관하는 신이었답니다. 

자!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스라엘족들이 범한 야훼에 대한 배신 행위들이 시작된답니다. 

크게 두가지입니다. 부(富)에 대한 욕심과 성욕(性慾)으로 지배된 사회로 변모되어간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공평과 평등으로 자유하는족속들을 위한 신이었는데 말입니다. 서로 크게 부딛힌 것이지요. 

가나안인들이 믿었던 바알신앙의 핵심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농사가 잘 되어서 부를 쌓는 것이 최고의 복인데, 그 농사가 잘 되는 일은 바알신과 아나스가 성적관계를 즐겁게 잘 맺어서 하늘과 땅의 조건을 만드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바로 성의 자유화를 맘껏 구가하는 사회였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지요. 또한 가나안 사람들은 해마다 죽음의 신(Mot 신)이 바알을 죽이고, 바로 그 바알의 죽음 때문에 각종 자연 재해들이 생겨 농사를 망치는데, 아나스가 모트를 죽임으로 바알이 다시 살아나고 바알과 아나스의 성관계를 통해 다시 풍년이 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족의 선조들이 가졌던 야훼라는 드높은 이상(理想)에 비해 참으로 감각적인 현실 만족을 추구하는 바알신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바알이 훨씬 가까운 신이었던 셈입니다. 

기원전 약 1200여년 전, 지금으로부터 3300여년 전,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족의 모습이 그럤다는 것인데요. 뭐 오늘날과 그리 다를 게 있나요? 

그렇게 시작한 판관(사사) 시대 이야기는 또 내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