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 1– 예언자 2

(당신의 천국 – 서른 한 번 째 이야기) 

그 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그리고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 마태복음 17 : 2-3

예수께서는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엘리야는 벌써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사람의 아들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 마태복음 17 : 12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에 따라 요르단강 동편에 있는 그릿 개울로 가서 살았다. – 열왕기상 17 : 5, 이상 공동번역 

통일왕국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때로부터 약 950년 뒤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의 수제자들 세명 곧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본 환상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이들이 보았다는 기록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세 번에 걸쳐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이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본 환상의 대한 기록은 첫번 째 예고와 두번 째 예고 사이에 끼어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본 환상 이야기 끝에 엘리야는 곧 세례 요한이었다는 제자들의 깨달음에 대한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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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성서에는 살아서 하늘로 올라 간 사람들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에녹(창세기 5 : 21, 히브리서 11.5)과 엘리야(열왕기하 2 : 11)가 있고, 죽었다 살아나신 예수가 바로 그들입니다. 

엘리야는 모세에 버금가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예언자 전통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입니다. 

이제 두차례에 걸쳐 엘리야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남북으로 왕국이 갈렸을 때 남쪽 유대왕국은 혈연으로도 다윗과 솔로몬의 혈통이 왕위를 이었지만 북쪽은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으로 시작되었지요. 

또 남쪽 왕국은 다윗의 성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정통성을 어느 정도 안고 시작했지만, 북쪽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하는 형편이었지요.  왕국의 수도 결정도 한 동안 세겜, 브누엘, 디르사 등등을 전전하다가 여로보암의 후손이 아닌 오므리가 왕이 되는 세번 째 왕조인 오므리 때에 이르러 사마리아로 왕국의 수도를 결정하게  된답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중요한 남북의 차이지요. 야훼 하나님을 모시는 제사 체제의 정통성을 남쪽 유대가 갖고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이 세운 예루살렘이 남왕국 소유였으니 말입니다. 그래 북쪽 여로보암은 야훼 하나님에 대한 제사의 틀과 예법 그리고 주관하는 사람들 곧 제사장들을 모두 새롭게 만들거나 임명해야만 하는 입장이었지요. 

그 과정에서 여로보암은 야훼 하나님께 죄를 짓기 시작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답니다. (열왕기상 12 장)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다고 하면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지요. 

이렇게 역사의 시작부터 야훼 하나님의 눈 밖에 먼저 난 쪽이 북쪽 이스라엘이었답니다. 

신앙적 고백이나 믿음, 또는 성서적 기록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서도 남쪽 왕국 유대보다는 북쪽 왕국 이스라엘이 겪어내야 하는 현실적 상황들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답니다. 

우선 남왕국 유대는 지역적으로 남쪽에 있는 작은 지역이었으며 남쪽의 큰 세력인 에집트만 잠잠하면 외세에 크게 시달리지 않을 조건이었고 부족 역시 유다지파를 중심으로 한 거의 단일 지파로 이루어졌던 점에 반하여, 북쪽 이스라엘은 남쪽에 비해 지역도 넓고, 열 지파들이 저마다 제 몫의 목소리들을 내는 조건이었고, 북쪽으로는 세력 판도가 수시로 변하는 제국들이 존재했다는 점이지요. 

정통성의 문제도 있었거니와 북쪽 이스라엘은 남쪽에 비해 여러 다른 민족들과 국가들과 교류가 많다보니  야훼 신앙에 대한 도전들과 이방신에 대한 유혹들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시작부터가 불안했던 북왕국 이스라엘에 첫 왕조와 두번 째 바아사 왕조가 지나 들어선 오므리 왕조 시대는 사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전성기였습니다. 

오므리왕은 왕으로 즉위하자 마자 사마리아에 솔로몬에 비견되는 화려한 수도를 세웁니다. 또한 다윗과 솔로몬이 꿈꾸었던 중앙집권체제의 왕권을 강화시킵니다. 오므리시대 때의 앗시리아 제국 기록에 따르면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전차부대를 파견했을 만큼 국력이 단단했었답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왕위에 오르고, 아합은 시돈 왕 에드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이세벨의 신인 바알 사당과 제단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세워집니다. 

바로 이 때 나타나는 인물이 엘리야입니다. 그는 정말 회오리바람처럼 느닷없이 거센 힘으로 나타납니다. 

열왕기상 17장에 실린 그의 이야기를 보면 앞뒤 이야기도 없이 갑자기 아합왕 앞에 나타난 사내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그리고 그가 아합왕에게 한 말입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비는 물론 이슬도 한 방울 이 땅에 내리지 않을 것이오.”(열왕기상 17 : 1, 공동번역) 

그리고 이어지는 야훼의 명령입니다. “이 곳을 떠나 동쪽으로 가서….” . 엘리야는 그 명령에 따릅니다. 

예언자들의 첫번 째 공통점입니다. 

무조건적인 야훼의 명령(소명)이 있고 끝내 그 명령에 따른다(추종)는 공통점입니다. 물론 저마다의 유형이 있습니다. 엘리야의 경우는 무조건적인 추종입니다. 군대식으로 명령을 따르는 것이지요. 

모세가 야훼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당사자였다면 엘리야는 신은 오직 한 분 야훼 뿐이라는 증명을 해 낸 사람이랍니다. 어떻게?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역사役事 또는 역사歷史 – 예언자 1

(당신의 천국 – 서른 한 번 째 이야기) 

우리가 다윗에게서 받을 몫이 어디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것이 없구나. 이스라엘아,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가자 . 다윗이여 이제 네 집안이나 돌보아라. – 열왕기상 12 : 16, 공동번역 

통일왕국 분단의 직접적인 원인은 솔로몬의 억압적인 경제정책과 시정방침에 있었다. 북왕국의 초대  왕이 된 여로보암이 이끄는 에브라임 노동자 집단의 반란이 일어났다. – Norman K. Gottwald의 히브리 성서에서 

솔로몬 치하 에서 과중한 세금과 부역에 눌려 살던 백성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비단 여로보암 사건만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 말기에 하닷, 르손 등이 일으켰던 반란 사건에 대해서도 성서는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훼의 약속처럼 솔로몬 당대에는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백성들은 새 왕에게 청을 합니다. “과다한 세금을 줄여 주고 힘에 겨운 부역을 줄여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사흘을 고민하던 새 왕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의 정책을 이어가야 한다는 젊은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드려 백성들의 청을 거절하고, 그 보다 더한 강력한 왕이 될 것임을 천명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새 왕에게 등을 돌립니다. 그 등돌린 백성들의 힘을 규합하여 여로보암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웁니다. 그렇게 여로보암의 북왕국 이스라엘과 르호보암의 남왕국 유다로 분열된 것은 기원전 922년의 일입니다. 

그로부터 200년뒤인 기원전 721년에 앗시리아에게 북왕국 이스라엘이 점령되기 까지 남, 북 왕국 의 왕들은 모두 31명 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기록된 분량을 보면 열왕기와 역대기에 이 시기에 대한 이야기의 분량은 다윗과 솔로몬 두 왕의 이야기보다도 적습니다. 

그 뒤 140여년 후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까지의 유다왕들의 기록들 역시 빈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성서는 남북왕국 시대에 이야기를 왕 중심의 이야기가 아닌 예언자 중심의 이야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이야기는 우리들의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아주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분열된 남북왕국 시대와 바벨론 포로시대 및 귀환시대까지 왕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언자 중심의 이야기로 엮어 가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예언자 사상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지닌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자! 이제 한 두어 주 정도 이어질 예언자 이갸기를 생각하며 오늘 하루 제가 만끽한 펜실바니아 주립 공원인 Nockamixon 공원의 늦가을 풍경을 함께 합니다. 

야훼 하나님의 일(역사役事) 하심은 사람들의 이야기(역사歷史)에만 한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언자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야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대상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와 부족에게 미치고 있다는 고백이 비로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으로 오늘 제가 누렸던 복을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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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反逆) – 왕국 14

(당신의 천국 – 스물 아홉 번 째 이야기) 

솔로몬은 무려 칠백 명이나 되는 후궁을 거느렸고 그 외에 수청드는 여자가 삼백 명이나 되었다. 왕은 여인들에게 빠져 마음이 흐려졌으며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 열왕기상  11 : 3 

야훼께서 솔로몬에게 노하셨다.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를 마음으로부터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 열왕기상 11 : 9 

(예언자) 아히야는 자기가 입고 있던 새옷을 벗어서 열 두조각으로 찢었다. 그러면서 여로보암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중략 – “잘 들어라. 내가 솔로몬의 손안에 있는 이 나라를 찢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리라.” – 열왕기상 11 : 30- 32, 이상 공동번역 

혹시 해동증자(海東曾子)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해동(海東)은 옛날 중국에서 한반도를 지칭하는 말 가운데 하나랍니다. 증자(曾子)는 아주 뛰어난 공자(孔子)의 제자로서 적통을 이어 받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특히 증자는 효(孝)에 관한 한 대가로 알려져 있고 그가 쓴 책이 효경(孝經)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해동증자, 곧 한반도의 증자같은 사람은 누굴까요? 아마 아주 예상 밖의 인물일 겝니다. 바로 백제의 마지막 임금이랍니다. 삼천궁녀로 유명한 바로 그 의자왕(義慈王)입니다. 누가 그렇게 기록하고 있느냐고요?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당서(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편에 나오는 말이랍니다. 

낙화암

백제  31대 임금인 의자왕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답니다. 그 첫번 째 까닭은 역사의 승리자였던 신라 위주로 기록한 김부식의 삼국사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여러 연구 결과들로 인해 의자왕의 제 모습들이 많이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삼천 궁녀 이야기지요. 물론 의자왕이 술과 여자를 좋아했던 것은 틀림없었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삼천 명의 궁녀를 거느리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의자왕으로부터 약 750년 쯤 뒤에 생긴 조선시대 임금들이 거느린 궁녀 수가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을 때 600 – 700명 정도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일이랍니다. 

그런데 왜 삼천궁녀 소리가 나왔을까요? 한마디로 뻥이고요, 중국의 천자는 삼천궁녀를 거느린다는 민간적 속설(이 또한 뻥이랍니다.)이 의자왕 이야기에 결합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솔로몬이 거느렸었다는 천명의 여자들은 사실일까요? 

그  또한 불가능한 일이랍니다. 솔로몬 역시 여색을 즐긴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거느리는 여자들이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 많다는 뜻으로 천이라는 숫자가 사용되었다는 것이지요. 

일테면 “만백성”의 ‘만’이 숫자가 아닌 온나라의 사람들을 뜻하듯이, ‘천’이라는 숫자는 보통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할만큼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강조한 것이지요. 

그런데 솔로몬이 천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살았건, 만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살았건, 이미 야훼 하나님이 약속하신 부귀 영화인데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었을까요? 그만큼 누리는 게 다 야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말입니다. 

사실 솔로몬은 다윗의 그늘 아래 있는 인물입니다. 솔로몬이 여색을 밝힌 것 까지는 그 당시의 여건으로봐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랍니다. 다만 그 여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 전통을 지닌 여자들이 아니라 다른 문화 전통을 이어받은 이른바 외국 출신들이라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여건을 만든 것은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이 가나안을 통일하면서 내건 정책이 바로 포용정책이었지요. 남쪽 유대, 북쪽 이스라엘, 가나안 원주민, 블레셋 등등 모든 것들을 포용한 것이지요. 

성서 기록에 따르면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자마다 첫 번 째로 한 일이 이집트 왕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었답니다. 이른바 결혼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열왕기상 3: 1-2) 이런 일은 바로 다윗이 시작한 일이랍니다. 그리고나선 온갖 주변 이방 출신 여인들을 맞아 드립니다. 

짧은 시간에 급격하게 문화가 섞이면서 좋은 점 나쁜 점들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우선 좋은 점들은 당시 이집트면 중동의 중심 문화권이었으니 앞서 나가는 문화들을 받아 드린 것이겠지요. 이를테면 문자, 건축, 법률, 산술을 비롯하여 아주 중요한 세제(세금 거두는 일) 등등을 새롭게 받아 드린 것이지요. 왕국이 발전 할 수 있는 요인들이지요. 

수많은 그런 긍정적인 요인들을 단 한숨에 날려버리는 부정적인 요소는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를 이방 여자들이 섬기는 신들과 같은 반열에 놓거나 때론 외면하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답니다. 바로 “사람”의 “한계”를 솔로몬이 보여주는 것이지요. 제 아무리 송사에 대한 재판에 능한 지혜를 지닌 솔로몬도 베겟머리 송사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는 것이고, 그런 일들은 사람 일반의 문제라는 깨달음이지요. 

두번 째 요인 역시 아버지 다윗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윗의 인구조사 또는 병적조사인데요. 야훼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다윗은 하고 말았지요, 성서는 그것을 죄라고 단정했지요. 도대체 왜 그 일이 죄가 될까요? 바로 솔로몬이 그 일이 죄가 된다는 것을 인증하게 된답니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지만 옛날의 인구조사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행해진 일입니다. 바로 백성들에게 의무를 지울 목적이 있었던 것이지요. 세금과 부역(군사및 노역), 곧 돈을 거두어 들이고 군대에 병력으로 차출하거나 국가적으로 벌이는 노역에 차출하는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었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그런 일들은 신의 권한이라고 믿었고, 사람이 사람들을 향해 그런 권한을 누릴 수 없다고 고백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처음 왕국을 세울 때 야훼 하나님과 양보와 이해의 선을 긋는 이야기들은 지난 이야기에서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선을 양보하면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알고 계셨던 것이랍니다. 솔로몬이 그걸 보여 준 것이랍니다. 

야훼의 성전, 솔로몬의 성전을 비롯한 주요 국가 시설물들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것은 바로 돈이지요. 그 돈이 어디에서 날까요? 누가 그 노동을 했을까요? 

다윗 시절만 하여도 성서는 세금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꿈이었고, 솔로몬은 현실이었지요. 

솔로몬는 이제 세금을 거두어 드리게 되고, 처음엔 자의 힘으로 거두었다고 생각한 노예 또는 이방인들을 노동에 동원시키지만 손이 딸리면서 동족인 유태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그런 일에 동원하게 된답니다. 

이제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요? 

반역(反逆)이랍니다. 

통일왕국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도 다윗의 치맛폭(?) 부성의 힘이 작용한답니다. 솔로몬대 까지는 아비 다윗의 충성 때문에 봐 준다는 것입니다. 성서가 그렇게 기록하고 있답니다. 그렇게 솔로몬은 야훼의 약속대로 모든 영화를 다 누리며 아비 다윗이 간 길을 간답니다. 

이제 우리들이 누리고 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는 세 번 째로 큰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평등, 계약. 

제가 지난 글들에서 말씀드렸던 중요한 낱말들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는 ‘예언’ 입니다.

지혜 – 왕국 13

(당신의 천국 – 스물 여덟 번 째 이야기) 

제 성질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성벽이 뚫린 도시와  같다. (잠언 25 : 28) 

네 우물의 물을 마셔라. 네 샘에서 솟는 물을 마셔라. 어찌하여 네 샘을 바깥으로 흘려 보내고 그 물줄기를 거리로 흘려보내느냐?(잠언 5 :15)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어리석은 자는 교육을 받아 지혜로와지는 것을 멸시한다.(잠언 1: 7, 이상 공동번역) 

남을 헐뜯는 가십(gossip)은 살인보다도 위험하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으나, 가십은 반드시 세 사람의 인간을 죽인다.  즉 가십을 퍼뜨리는 사람 자신,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  그 화제가 되고 있는 사람. 

당신의 혀에게 “나는 잘 모릅니다”라는 말을 열심히 가르쳐라. 

상대에게 한 번 속았을 땐 그 사람을 탓하라. 그러나 그 사람에게 두 번 속았거든 자신을 탓하라. 

승자는 눈을 밟아 길을 만들지만, 패자는 눈이 녹기를  기다린다. (이상 탈무드에서)

올해 노벨상도 유태인들의 밥상이었지요. 자그마치 6명의 수상자들이 유태인들이었지요. 유태인들이 노벨상을 많이 타는 까닭들을 이야기하는 글들은 수없이 많답니다. 

그 중 하나가 유테인들이 시나고그에서 갖는 ‘바르 미츠바(Bar Mitzvah)’ 또는 ‘바트 미츠바( Bat Mitzvah)라는 의식과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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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바르) 13살, 여자아이(바트) 12살 때 갖는 일종의 성년의식입니다. 이 때 탈무드에 나오는 가르침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는 의견을 내놓아야만 이 의식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묻고 답하는 훈련들이 유태인들이 유태인이 되는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지혜교육입니다. 

잠언과 전도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솔로몬은 바로 이런 지혜교육의 아버지이자 원조였던 셈입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로 견주어 보자면 공자, 맹자, 장자 등과 겨룰만한 솔자(?) 쯤 되는 인물입니다. 게다가 솔로몬은 무려 왕이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솔로몬이 이복형제와의 권력다툼에서 승리하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찾아간 곳은 야훼의 놋제단이 있는 기브온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번제물  일천 마리를 살라 바쳤습니다.(열왕기상 3장, 역대기하 1장) 야훼께서 아주 흡족하셨고,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셨답니다. 그리고 묻지요. “네가 원하는게 뭐냐? 다 주마!”라고요. 

그 때 솔로몬이 대답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혜”라고요. 

번제불 일천 마리가 소였다는 기록도 있고요. 어떤 짐승을 잡아 제물을 받쳤더라도 천마리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었을까요? 제사를 담당했던 레위인들을 비롯한 백성들이 그것을 나누어 먹었을 것인데요. 흡족해 하신 게 어찌 야훼 하나님 뿐일까요? 솔로몬 치하의 백성까지도 좋았던 일이지요. 적어도 그  싯점까지는 말입니다. 

그 응답에 감복하신 야훼께서 지혜 위에 부귀와 영화까지 주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솔로몬 당대에 넘치게 주신답니다. 

자!  이쯤 당시 고대 중동지방의 지혜운동, 아니면 지혜학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지혜학당은 고대 애굽(이집트)에서 일찌감치 자리잡은 교육 풍습이었다고 합니다. 그 교육의 기본은 질서에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공자와 맞먹는 왕과 신하의 질서, 윗사람과 아래 사람의 질서를 헤아리고 아는 지혜가 교육의 근본이었다는 말이지요. 그  질서를 잘 깨닫고 그 질서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질서 체계를 야훼 하나님 한 분과 사람들이라는 관계로 바꾸어 놓은 것이 솔로몬의 지혜서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에집트나 바벨론 등 고대 중동에서 일어났었던 지혜운동이 오늘까지 이어 온 것은 유태인들이 유일하다는 말씀이고, 그들은 그 일을 야훼가 한 것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때까지만 해도 솔로몬은 썩 그럴듯한 왕이었답니다. 

더더우기 그의 아버지 다윗이 그렸던 그림대로 야훼의 성전을 건축한 일은 솔로몬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이지요. 

자신의 궁인 솔로몬 성전을 짓는데 십 삼년, 야훼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칠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겨우 경상북도 보다 조금 넓은 땅을 다스렸던 솔로몬과 통일 중국을 이루었던 진시황과 땅의 크기로 비교할 일은 아닙니다만, 두 양반의 솟는 과정과 무너지는 과정이 매우 엇비슷한 부분이 있답니다. (노벨상 수상자로 견준다면 중국인들은 이 비교가 과분할 수도 있답니다.) 

천마리의 번제물 제사와 천명의 처첩(妻妾) 들로 비교되는 솔로몬의 과오와 무너짐은 다음 시간에 잇도록 하지요.

성공신화 – 왕국 12

(당신의 천국 – 스물 일곱 번 째 이야기)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대답하셨다. “부귀영화를 청하지도 않고 원수의 목을 청하지도 않으며, 오래 살도록 해 달라고 청하지도 않고 내가 맡겨 준 이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갖추어야 할 슬기와 지식을 달라고 청하다니, 네 뜻이 갸륵하구나. 슬기와 지식 뿐이랴? 내가 너에게 부귀와 영화도 주리니, 너와 같은 임금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다시 없으리라.” – 역대기하 1 : 11-12, 공동번역 

아주 오래 전 중국에 제자백가(諸子百家, Hundred Schools of Thought) 또는 백가쟁명(百家爭鳴, Contention of a Hundred Schools of Thought)의 시대가 있었지요.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순자 등이 노닐던 시절 이야기 말입니다. 이름하여 춘추전국시대의 일이었지요. 춘추시대가 시작한 것이 기원전 770년 경 쯤으로 알려져 있고, 우리들이 이제 이야기할 솔로몬시대가 기원전 1000년 전후의 일이니 그 보다는 약 250년 뒤에 일인 셈입니다. 공자가 기원전 500년 경의 사람이니 그렇게 따진다면 솔로몬 이야기는 공자보다도 500년 전의 일인 셈이군요. 

공자(孔子)보다 약 300년 뒤에 살았던 사람으로 진시황제(秦始皇帝)로 알려진 사람이 있지요. 진(秦)나라의 첫번 째 황제라는 말이지요. 그의 본명은 영정(嬴政)이었답니다. 이 양반이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시켰지요. 

이천 여 년이 훨씬 지나서 중국의 언어를 통일시킨 마우쩌둥(모택동)이 좋아했던 인물이 바로 이 진시황이라고 합니다. 만일 진시황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중국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처럼 갈라져 있지 않았을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아무튼 그 전까지는 나라의 임금을 왕(王)이라고 불렀답니다. 나라들이 많았으니 왕들도 많았겠지요. 진시황은 천하통일을 이룬 후 자신은 왕으로 불리우는 게 싫다고 황제(皇帝)라고 부르라고 했답니다. 진나라의 첫 황제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첫 황제가 된 것입니다. 이 황제의 의미에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지만 신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었답니다. 

역사기록인 진시황본기(秦始皇本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답니다. “짐은 시황제이다. 후세는 숫자로 계산한다. 이세부터 삼세, 만세까지 영원무궁하도록 전해지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자식들이 진이세황제,…진만세황제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지요. 

그는 또 불로장생 곧 늙지 않고 오래 사는 약을 찾았던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그의 나이 39살이었던 기원전 221년에 통일업적을 이룬 진나라 초기에는 여러 개혁정치가 성공하면서 빠르게 제국을 안정시켜 나갔답니다. 그 전까지 봉건제로 왕과 봉건군주들이 나라를 다스렸던 체제를 버리고 군과 현을 만들어 모든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하는 중앙 집권체제를 세움으로 황제권을 강화시켰답니다. 또한 화폐, 문자, 도량형 등의 통일을 시도하기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지나친 사상 개혁으로 인해 생긴 분서갱유사건을 비롯하여 아방궁, 진시황릉, 만리장성까지 과도한 토목사업 등으로 인한 민심의 급격한 이반이 일어났답니다. 

결국 황제의 자리가 자신의 자손 만대까지 이르리라는 그의 호언은 고작 이대황제에서 끝나버린답니다. 자신이 황제가 된지 만 15년 뒤에 일어난 일이랍니다. 

그리고 불로장생의 꿈도 그의 나이 쉰 살에 그만 마치고 말았답니다. 불로장생 약으로 믿고 먹었던 수은중독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죽기 전 말년에는 미신에 빠져들어 정신도 오락가락 했었답니다. 

들꽃

이제 솔로몬보다 천 년 후에 가나안 땅 갈릴리 바닷가를 걸으며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 못하였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마태복음 6 : 29-30)라고 한 예수의 선포를 곱씹으며 솔로몬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솔로몬의 뜻은 샬롬 곧 평화라고 합니다. 워낙 아버지인 다윗이 전쟁터에서 피를 보고 살아 온 탓에 지어진 이름일 것입니다. 물론 야훼 하나님께서 그리 하라고 명하시기도 했고요.그러나 솔로몬이 왕이 되는 일은 그리 순탄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평화스럽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열왕기상 1장과 2장의 기록들을 보면 당연한 일들이 순서적으로 일어난듯이 보이지만 아마 솔로몬 당시의 상황은 그렇게 여유롭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배다른 형제인 아도니야와 사무엘과의 왕위 계승 쟁탈전이 결코 만만치 않은 싸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다윗왕의 가신들 면면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평생을 다윗의 오른팔 심복으로 전쟁터를 누볐던 요압 대장군 – 그는 밧세바의 전 남편인 우리야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다윗의 심복이었던 것을 기억하시길, 또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여 다윗과 대적했을 때 다윗의 아들을 죽이고서도 다윗의 신임을 잃지 않았던 다윗 권력의 핵심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과 제사장 에비아달 – 이 사람은 다윗이 왕국을 통일하고 제사장 임명의 권한까지 틀어 쥐었을 때 첫번 째로 임명된 제사장임을 기억하시길 -, 등이 아도니야편에 서서 그를 왕위에 앉히려고 합니다. 

반면 솔로몬쪽에는 나단 선지자와 사제 사독, 그리고 어머니 밧세바 등이 함께 합니다. 

열왕기상 1장 초입의 기사에 따르면 솔로몬을 따르는 쪽의 세가 좀 약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답니다. 

나단과 바셋바의 계략이 성공하여 마침내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한 첫번 째 일들은 바로 정적을 과감히 제거해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형제 아도니야와 아버지 다윗의 오른팔이었던 요압을 죽여버립니다. 에비아달은 죽이지는 않았지만 사제직에서 영원히 쫓아버리는데 이는 사제직을 담당하는 가문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엘리 가문에서 사독 가문으로 제사장의 권한을 바꾸어 버리는 어찌보면 당사자의 죽음보다 더 큰 보복이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이름처럼 평화롭지만은 않은 왕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솔로몬의 초기 통치 시절은 아버지 다윗처럼 승승장구의 세월을 누리게 됩니다. 

우선 영토에 있어서 아버지 다윗보다 영역도 넓히고 왕권의 권위도 높히게 됩니다. 특히 아버지 다윗에 비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세움으로써 왕권을 더욱 강화시키게 되는데, 다윗시절까지 있었던 전통적인 부족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12개 지방관리 체제로 전환하고 그 관리들을 중앙의 왕이 통제하는 체제를 세운 일입니다. 

이 체제 아래에서의 솔로몬 제국은 그야말로 태평세월이었고, 모든 군사와 말들까지 배부르던 시절이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유프라테스로부터 불레셋 땅을 지나 이집트 국경에 이르는 지역 안의 모든 왕국을 지배하였다. 그들은 솔로몬이 살아 있는 동안 조공을 바치며 섬겼다. 솔로몬의 하루 양곡은 고운 밀가루 삼십 섬, 거친 밀가루 육십 섬, 기름진 소 열 마리, 목장 소 스무 마리, 양 백 마리였고 그 밖에 수 사슴, 산양, 수노루, 날짐승이 있었다. 

그는 답사에서 가자에 이르기까지 유프라테스 서쪽 전지역을 다스려 사방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이렇게 솔로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마음놓고 살면서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솔로몬에게는 병거를 끄는 말을 둘 마굿간이 사천 간 있었고 말이 만 이천 마리있었다. 그리고 이들 관리들이 솔로몬 왕과 솔로몬 왕의 식탁에 참석하는 이들을 위하여 각기 한 달씩 부족함이 없게 양곡을 내었다. 그들은 병거 끄는 말과 짐 나르는 짐승들이 먹을 보리와 밀짚을 지정한 곳으로 가져왔다.> – 열왕기상 5 : 2-8, 공동번역 

그의 영화는 이런 부(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런 인간적 부에 속한 일로 치부한다하여도 야훼 하나님께서 머무르시는 성전 역시 그가 지었다는 일입니다. 

솔로몬 초기의 영화스런 모습은 성공신화의 최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극(史劇) – 왕국 11

(당신의 천국 – 스물 여섯 번 째 이야기) 

이제 네가 한 아들을 얻을 터인데, 그 아들은 태평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내가 사방에 있는 적들을 다 물리쳐 태평을 누리게 해 주리라.그러니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하여라. 나는 그가 다스리는 동안 이스라엘의 번영과 평화를 내릴 것이다. 그가 바로 내 이름으로 불릴 성전을 지을 사람이다. – 역대기상 22: 9, 공동번역 

다윗은 죽을 날이 가까와지자 그의 아들 솔로몬을 불러 훈계하였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야 할 것 같다. 힘을 내어 사내 대장부가 되어라. 야훼 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분이 보여주신 길을 따라 가며 또 모세법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법도와 계명, 율례와 가르침을 지켜라.” – 열왕기상 2: 1-3, 공동번역 

민족과 국가의 대영도자 따위의 관념은 이스라엘의 (예언자적)  전통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사울의 왕권을 거부하고, 다윗과 솔로몬의 왕조체제를 비판했다. 그리고 왕권에 대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솔로몬에 대한 르호보암의 항거이다. – 송기득이 쓴 ‘인간’에서

이제 다윗 이야기를 마치려 합니다. 다윗 이야기 가운데 인구조사 이야기를 건너 뛰었습니다. 솔로몬 이야기의 후반부 세금과 노역 부분에서 함께 다루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다윗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다시 돌아봅니다. 우리들이 만나려고 하는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스물 세번 째 글에서 저는 “계약”이라는 말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모세를 통한 야훼 하나님과 히브리족 사이에 맺은 계약과 다윗을 통한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사이에 있는 차이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이거 머리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랍니다. 

야훼 하나님과 맺는 계약의 범위가 넓어졌다고 했습니다. 또한 계약의 틀을 제도화하고 한 곳에 모이게 하는,  이른바  중앙집권화를 이룬 것이 다윗 때에 이르러서의 일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 차이를 계약이 다윗 이전과 이후로 달라졌다는 말씀으로 요약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성서 사무엘서를 마치고 열왕기와 역대기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넘어 가기 전에 지나온 곳들 두군데를 다시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신명기  30장과 사무엘하  7장 두 곳입니다. 

신명기 30장은 광야에서 히브리족과 야훼와 맺은 계약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계약을 지키면 살고, 안지키면 죽는다.”입니다. 계약의 ‘갑’과 ‘을’이 있고 서로 하는 의무가 있는 계약입니다. 

사무엘하 7장은 무조건적으로 야훼가 다윗으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왕국에 대해 내릴 은총에 대한 계약 곧 약속입니다. 

바로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기다리는 유대족들의 메시아니즘, 구세주를 기다리는 염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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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마지막 모습을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 왕의 장례식에 따르기 마련인 장엄하고 웅장한 의식에 따라 장사되었다. 더우기 막대한 돈이 다윗의 시신과 함께 매장 되었다. 얼마나 막대한 양의 돈이 함께 묻혀 있는지는 아래의 사실에서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1,300년 후 데메트리우스의 아들로서 피우스라고 부르는 안티오쿠스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돈을 내면 포위를 중단하고 물러가겠다고 했을 때 대제사장 힐카누스는 돈을 모을 방법이 없자 다윗 무덤의 한 방을 열어 3,000달란트의 돈을 꺼내 그 일부를 안티쿠어스에게 주어 포위를 풀게 한 일이 있다. – 중략 – 그 후 오래 지난 헤롯왕이 또 다른 방을 열어 거액의 돈을 꺼냈다.> –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7권 15장에서 

그렇게 다윗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갈 때 나이가 일흔살이었다고 합니다. 

그 길을 떠나기 전 다윗의 모습은 정신도 오락가락 했을 뿐만 아니라 몸에 마비증상도 자주 찾아왔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부인 아비삭은 이런 다윗의 몸을 녹여주는 동녀(童女) 노릇을 한 여인입니다. 그녀가 슈넴 출신이라고 하여 슈네미티즘(Shunammitism)이라는 말이 생겼는데 바로 동녀회춘라는 뜻입니다. 

아무튼 그 무렵부터(다윗의 정신이 거의 오락가락할 무렵) 왕위 승계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진답니다. 다윗과 학깃 사이에서 난 아도니야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생긴 솔로몬과의 싸움입니다. 

다윗을 평생 따르던 가신 그룹이 아도니아와 솔로몬파로 둘로 갈라져 치열한 다툼을 벌입니다. 바로 그 순간 한 수 하는 사람이 바로 밧세바이지요. 

마치 이조시대 왕궁에서 일어나는 사극을 보는 듯 하답니다. 

그렇게 사극처럼 시작하는 솔로몬 이야기는 앞으로 세 번에 걸쳐 잇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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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케어 – 마켓플레이스 해설 3 보기

http://socialkoam.com/?p=1017

사건 – 왕국 10

(당신의 천국 – 스물 다섯 번 째 이야기)

“다윗은 몹시 괘씸한 생각이 들어 나단에게 소리쳤다. “저런 죽일 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는 없다. 그 양 한마리를 네 배로 갚게 하리라. 그 때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 중략 –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소.” 다윗이 이렇게 자기 죄를 고백하자 나단이 말하였다. “야훼께서 분명 임금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 사무엘하 12 : 5 – 13, 공동번역 

다윗이 아내 바쎄바를 위로하여 잠자리를 같이 하니 바쎄바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솔로몬이라 히였다. 야훼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셨다.  – 사무엘상 12 : 24, 공동번역 

예루살렘 정복은 다윗 이야기에 있어 정점이었습니다. 다윗 개인에게 있어서는 수많은 고초를 헤쳐 온 길이었지만 결과는 늘 풍족했습니다. 승승장구의 인생길을 구축해 온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나단을 통해 이미 예고된 일들이지만 다윗은 가혹한 심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자식들 사이의 일어난 근친상간, 형제간의 살육, 아들의 반역, 피난 등등 이미 이전의 다윗이 아닌 일들이 연속됩니다. 

다윗의 끝없는 상승 곡선의 인생길을 내리막길로 꺽어 놓은 사건이 바로 유부녀와의 간통사건입니다. 

다윗 개인에게는 인생을 뒤바꾼 일이지만, 성서 전체의 이야기를 놓고 본다면 이 사건은 실로 야훼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낸 사건일 뿐만 아니라 유대족들 곧 이스라엘 민족이 고백하는 야훼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날까지 기다리는 메시아의 원형,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그려 보이는 사건이라고 저는 해석한답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던진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마가복음 1: 15, 표준 새번역 개정판)라는 첫번 째 선언을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선포하는 예수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선포를 듣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그리고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차이를 알게 되는 열쇠라는 말입니다. 

자! 이렇게 중요한 사건이라는 점을 말씀드리면서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사무엘하 11장과 12장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가 전장에 나가있던 어느 날 저녁에 낮잠을 잤으매 틀림없던 다윗이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녀가 누군지 먼저 확인해서  자신의 부하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궁으로 불러 들여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밧세바

밧세바의 임신 사실을 안 이 두 불륜남녀는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실행에 옮깁니다. 처음엔 사실을 숨길 수 있는 계략을 꾸미고 실패하자,  멀쩡한 사내 그것도 다윗 개인에게나 왕국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난 사내를 전쟁터에서 맞아 죽게 일을 꾸밉니다. 

그리고 둘은 결혼을 합니다.  사무엘하 11장의 요약입니다. 

이 이야기를 당신이 다윗의 입장이 되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밧세바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번엔 개죽음을 당한 우리아가 되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이 모사에 권력쪽에 붙어 함께한 모압이 되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일을 두고 다윗 앞에 서서 왕의 잘못을 드러내야 하는 나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십시요. 

아마 처한 위치에 따라 사건을 바라보는 느낌이 아주 달라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내가 왕인데…”,  밧세바의 입장에서는 “왕이 부르는데 어찌….” 아니면 “아무리 내가 꼬실 마음이 좀 있었기로서니 왕이….” , 우리아의 입장이라면 “이런 천하의 처 죽일 년놈들….”, 모압의 입장이라면 “아무렴 나도 살 길 찾아야지. 왕한테 붙어야…”, 그리고 이제 왕앞에 나가야 할 나단의 입장이라면 “젠장, 내가 왜 이렇게 모가지 걸 일에 나가야 하지?”라는 생각들도 한번 해 볼만 하지 않을까요? 

저는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다윗의 숨겨진, 아주 보통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품이 드러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답니다. 

유혹, 현혹, 저지름, 숨김, 할 수 있는 능력 때론 위법적일지라도 모든 힘을 다해 드러나는 것을 막음, 성공하면 안도와 함께 쉽게 잊어 버림, 끝내 드러나면 후회. 

이런 공식이 당신의 일생에서는 몇 번이나 일어났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처럼 이름없이 사는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이나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에게나 단지 크기의 차이는 좀 있겠지만 이런 공식이 통하는 일들은 누구에게나 수시로 일어날 수 밖에 없지요. 

다윗과 밧세바의 이 불륜사건을 사람이면 누구나 빠질 수도 있는 일로 전제한다는 고백이 바로 사무엘하 11장의 기록입니다. 

나아가 누구나 우리아가 될 수도 있고, 모압이 될 수도 있고, 나단의 입장에 처할 수도 있다는 전제입니다. 

이 사건 전체를 야훼는 눈에 거슬려했습니다. 

그래 나단을 내세웁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의 새끼양 한마리까지 빼앗는 예를 들어 다윗의 죄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나단은 야훼의 눈에 거슬린 불륜의 댓가로 받게 될 심판들을 나열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말입니다. “너는 그 일을 쥐도 새도 모르게 했지만, 나는 이 일을 대낮에 온 이스라엘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루리라.”고요. 

그 나단의 마지막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윗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혹시 이 장면에서 다윗의 속죄와 회개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 장면에서 생각나는 시가 있어 먼저 소개드립니다. 참여 시인의 대명사로 불리우기도 하는 김수영 시인의 시 “죄와 벌”입니다. 

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은/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어떠신지요? 술에 취한 시인이 길거리에서 자신의 아내를 우산으로 때리고 돌아 온 날 밤 그의 마음속 생각이랍니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보지는 않았을까하는 부끄러움, 그보다 더 절실한 것은 두고 온 우산이라는 마지막 행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말입니다. 

사람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나단의 생사권조차 틀어 쥐고 있었던 위치에 있었습니다. 

우리아를 깜쪽같이 없앴듯이 나단 정도도 우습게 처리할 수 있는 권력자였습니다. 나단이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다윗이 직접들은 말도 아닙니다. 설혹 나단의 말이 야훼의 말이라고 생각했더라도 이미 받을 심판으로 결정된 일입니다. 이제껏 숨겨왔듯이 한 입 정도 더 막으면 그것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인 것입니다. 

설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면 세계사를 다시 훑어 보시거나, 아주 멀리 갈 것없이 당신의 주변을, 더욱 가까이는 바로 당신의 지나간 삶을, 만일 그게 부담이 되신다면 지금 대한민국과 미국, 아니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의 국가가 하는 일들을 더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시인 김수영이 하는 후회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상 것이 모두 내 손 안에 있는 왕이 단 한 순간의 충고로 무릎을 꿇고 회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마무리합니다. 

유대인들이 다윗을 통해 야훼를 고백하는 방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는 한정적 모습을 지닌다. 그러나 회개는 용서라는 은총으로 되돌아 온다. 다만 그 죄에 대한 댓가는 일정 수준 받을 수 밖에 없을지라도. 

또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 곧 다윗을 원형으로 하는 메시아의 모습입니다. 

가나안을 통일한 다윗처럼 강력한 힘을 지닌 지도자이지만 야훼 앞에서는 늘 무릎꿇을 수 있는 용기를 지닌 권력의 소유자가 바로 그 메시아의 모습입니다. 

비록 다윗 개인에게는 걸림이었지만 야훼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들의 고백이 출애굽 이후로 아주 강력해진 사건이 바로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약속 – 왕국 9

(당신의 천국 – 스물 네 번 째 이야기) 

나는 그를 맏아들로 삼아, 세상 임금 중에 가장 높은 임금으로 세우리라. 그에 대한 나의 사랑, 영원히 간직하겠고 그와 맺은 나의 계약, 성실하게 지키리라. 길이길이 그의 후손 이어 주리라. 그의 왕조는 하늘이 무너지기까지 이어지리라. – 시편 89: 27-29 

그곳은 무척이나 우아해서 유대인의 종교문학에서는 언제나 관능적이고 활기 넘치는 여성이자 미인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추잡한 매춘부로, 또 한편으로는 연인에게 버림받아 상처 입은 공주로 그려지기도 한다. 예루살렘은 하나의 신이 사는 집이자 두 민족의 수도이며 세 종교의 사원이고, 하늘과 땅에서 두 번 존재하는 유일한 도시다.  –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예루살렘 전기에서 

남쪽 유다와 사울왕의 아들 이스보셋이 다스리던 북쪽 이스라엘을 통합한 다윗은 이제 예루살렘성을 점령합니다. 가나안의 한 가운데 위치한 예루살렘은 남, 북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성(城)이었습니다. 

이미 우리들이 알아 본 바대로, 다윗의 통일 위업이 달성되기 전 까지 가나안에는 이스라엘족과 가나안 원주민들이 혼재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역시 가나안 본토인들인 여부스족이 살고 있는 성이었습니다. 

여부스인들이 철옹성이라고 믿고 있었던 예루살렘 또는 시온이라고 부르는 이 성은 “만군의 하나님 야훼께서 함께 하신(사무엘하 5: 10)” 다윗의 손에 간단히 무너집니다. 

물론 이 전투에서도 주력부대는 다윗이 거느려 온 다윗의 부대, 용병들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다윗의 성으로 불리워지게 됩니다. 이름만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성 자체가 다윗 개인의 소유였던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 남쪽 유대의 성도, 북쪽 이스라엘의 성도, 이스라엘 전체의 소유도 아닌 다윗 개인의 소유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또한 이런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장소 가운데 왜 하필 예루살렘인가?” 

이 질문은 자그마치 961페이지에 달하는 예루살렘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기록한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가 그의 책 예루살렘 전기를 시작하면서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통곡의 벽

“왜 하필 예루살렘인가?”라는 이 질문은 제가 지금 제 연재 글을 읽고 계신 바로 당신과 함께 풀어 나가고 있는 숙제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답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으로부터 약 천년 뒤에 유배지 밧모섬에서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의 환상을 이야기 할 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의 윤곽이 들어날 것입니다. 

요한의 말한 이 환상 말입니다.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이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1: 1-2)” 

자! 오늘은 삼천여년 전 다윗이 점령한 예루살렘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남북을 통일한 다윗이 이룬 업적은 가나안 모든 땅을 이스라엘 이름으로 편입한 것입니다. (물론 아직 점령하지 못한 곳들이나 예루살렘 역시 솔로몬대에 이르러서는 모두 이스라엘에 편입되기 때문에) 

무슨 말씀인고하니, 다윗 이전에는 열 한 부족(레위 부족을 빼고) 이 싸워 이겨 차지하는 땅은 부족 소유의 땅이 되었지만, 이젠 이스라엘왕국의 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로 유다지파로 대변되는 남쪽 왕국사람들, 다윗이 전투를 벌이면서 새롭게 그의 휘하에 들어 온 남쪽지방의 가나안 족들, 북왕국 이스라엘의 사람들, 예루사람을 차지하고 있던 여부스족 등 중북부에 남아 있던 가나안 족들의 도시국가 사람들, 다윗과 연결되어 있었던 블레셋 사람들이 모두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두번째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왕국이 야훼에게 드리는 제사의식의 중심도시로 만든 것입니다. 사무엘시대까지만 하여도 사무엘은 부족들이 사는 곳들을 돌아 다니며 제사를 집전하거나 재판을 진행했지만 이제 야훼 하나님에 대한 제사와 예배는 예루살렘성 한 곳에서만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세번 째는 가나안 땅에 당시까지 남아있던 가나안의 전통들과 히브리에서 유대, 이스라엘로 변화되면서 겪어 온 온 이스라엘의 전통이 하나로 합쳐진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인 유일신 야훼 하나님 사상과 가나안의 전통이었던 왕권신수설(神受說- 왕의 권력은 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통합되면서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새로운 계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네 번 째는 야훼의 법궤를 예루살렘에 안치시킨 일입니다. 이 일에 의미는예루살렘을 종교적 중심지로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윗과 그 가문의 후계자들의 왕위권을 야훼께서 보장했음을  뜻합니다. 

나아가  예루살렘  또는 시온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뜻으로써  다윗의 가문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특권의 의미로 발전하게 됩니다. 

바로 시편에 실린 이 노래의 뜻입니다. 

“나는 그를 맏아들로 삼아, 세상 임금 중에 가장 높은 임금으로 세우리라. 그에 대한 나의 사랑, 영원히 간직하겠고 그와 맺은 나의 계약, 성실하게 지키리라. 길이길이 그의 후손 이어 주리라. 그의 왕조는 하늘이 무너지기까지 이어지리라(시편 89: 27-29)” 

마지막으로 다윗의 예루살렘 입성으로하여 다윗은 왕국의 관료 임명권, 군대 인사권 뿐만 아니라 제사장 임명권까지 갖는 명실상부한 왕국의 왕이 된 것입니다.  (삼하 8 :15-18) 

바로 새 이스라엘이 탄생하는 싯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가 죽기 직전까지 이런 새 이스라엘의 모형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전쟁, 반란의 진압 등 싸움의 한 가운데서 평생을 보내게  됩니다. 

이제 다윗에 대한 성서적 고백, 유대족들의 고백을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왜 다윗이 메시아의 원형이 되는 것인지?  왜 그리스도(메시아) 예수가 다윗과 연계되어 있는지? 

다윗을 통한 믿음의 고백에 대해 이야기 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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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케어 두번 째 이야기 올렸습니다.

오바마케어 – 마켓플레이스 해설 2 보기 :  http://socialkoam.com/?p=1014

군대와 아내들 – 왕국 8

(당신의 천국 – 스물 세번 째 이야기) 

다윗은 그 곳을 떠나 아둘람의 굴로 피해 갔다. 그의 형들과 그의 온 집안이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을 찾아 그리로 내려 갔다. 또한 억눌려 지내는 사람, 빚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 그 밖의 불평을 품은 사람들이 다윗 주변에 몰려 들었다. 다윗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 수는 사백명 가량이 되었다. – 사무엘상 22: 1- 5, 공동번역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진입한 이후, 경제적으로는 토지에 대한 지파 공동재산 원칙이 점점 무너져 개인 사유 원칙으로 바뀌었고, 사회적으로는 종족간의 평등원리가 사라지면서 새롭게 등장한 부유한 땅 소유자들과 고대 사회질서의 유물인 가난하고 땅없는 농민들 사이의 괴리가 심해졌다. –롯스(Adolphe Lods)의 <이스라엘 역사 – 시초로부터 기원전  8세기까지>에서) 

마온이라는 곳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기업은 가르멜에 있었다. 그는 양이 삼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가 되는 큰 부자였다. 그는 가르멜에서 양털을 깍고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나발이요,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었다. 아비가일은 재색을 겹비한 여자였으나 그 남편은 갈렉 가문 출신으로서 인색하고 거친 사람이었다. – 사무엘상 25 : 2-3, 공동번역 

다윗은 유대땅에 사는 부유한 지주인 나발의 아내와 결혼함으로써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이 되었고, 또 블레셋인에게는 그들의 신하로서블레셋족속으로 받는 위험에 대해서도 보호하여 주었다. –군네벡(Antonius H. J. Gunneweg)이 쓴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음악가이자 시인이었으며, 삼손 못지않은 힘을 지녔었고(사무엘상  17 : 34-36), 언변도 뛰어났고(사무엘상 17 : 44-47), 빼어난 전사였으며(사무엘상 17 : 48-51) 무려 잘 생기기까지(사무엘상 16 : 13) 했었답니다. 

그러나 다윗이라는 인물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은 이런 인간적으로 잘난 모습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찾아 가려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다윗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서 전체 이야기의 흐름 가운데는 큰 봉우리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모세, 다윗, 요시아, 세례요한, 바울, 묵시록의 요한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지금 누리며, 앞으로 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 길목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는 길목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히브리족 사이에 맺은 계약의 핵심 당사자입니다.  여기서 “계약”이라는 말은 우리들이 성서나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가 쉬운 말들로 설명해 준 하나님 나라와 바울이 어려운 말로 해석하는 하나님 나라, 이 모두를 우리들이 잘 이해하고 누리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 계약의 틀을 제도화한 사람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첫째는 이 계약(야훼 하나님과 유다 사이에 맺은)의 영역을 확대한 사람입니다. 이 계약의 틀안에 들어 와야만 하는 백성들의 지경을 넓힌 일입니다.

두번 째는 흩어져 있던 계약에 대한 이런 저런 각종 이야기들과 전승들을 하나로 묶고, 예루살렘 한 곳으로 모든 계약의 권위와 그 계약에 따른 모든 제사권을 중앙집권화하는 틀을 세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다윗 이전과 다윗 이후의 이스라엘족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는 다음 글에서 잇고요, 다윗이 어떻게 이 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다윗과 이스라엘의 신앙적 고백에 대해서는 그 다음 글에서 다루면서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넘어 가려고 합니다. 

오늘은 신앙적 고백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조건으로 보았을 때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치고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를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왕국 이스라엘을 세울 수 있었던 까닭을 알아 보려고 합니다. 

다윗 개인의 여러 잘난 모습들은 제껴 놓더라도 결정적인 요인 세가지가 있습니다. 

King David

하나는 다윗이 이끌었던 군사들이고, 둘째는 다윗의 여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인간적 요소들이 다 담긴 다윗의 성품입니다. 

첫째 다윗이 이끌었던 군사입니다. 이 점은 사울과 다윗이 비교되는 결정적 차이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열 두지파가 세운 첫 왕이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군대는 각 지파들이 약속과 필요에 따라 내어 놓은 군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군대는 지난 글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블레셋과는 비교되지 않는 열악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지휘하는 군대와 블레셋군의 전력 차이의 상징적인 비교가 바로 다윗과 골리앗의 비교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초반 전투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 승리요인은 바로 야훼 하나님이 이끄는 성전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초기 싸움을 이끌었던 사울부대의 병사들을 움직였던 힘은 사울이 아니라 사울과 함께하는 신 야훼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쉽게 말씀드려 사울군대는 야훼의 믿음으로 뭉쳐진 이스라엘 각 지파들의 연합관군인 셈입니다. 

다윗이 이끌었던 부대는 다릅니다. 다윗의 부대는 일종의 용병이었고, 다윗은 용병대장이었습니다. 

애초  사울의 한 부대를 이끌고 있었던 다윗은 사울과 왕위 쟁탈전을 벌리다가 힘이 부쳐 밀려나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다윗은 사무엘에게로 갔다가 놉이라는 성의 제사장인 아히멜렉으로 가서 몸을 숨기기도 합니다. 또 이 과정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이렇게 도망다니는 처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다윗이 왕위에 오르거나, 오른 후에 아주 주요한 도구들이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인은 마지막으로 다윗의 도망 근거지가 된 아둘람 산채입니다. 바로 그 곳에 있을 때 모여 든 사람들이 다윗의 주력 부대가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 22장에 나오는 이 기사를 읽다가 보면 수호지 양산박에 모여 든 송강을 비롯한 108 장수들 이야기가 떠오른답니다. 

이야기를 조금 되돌려 보기로 합니다. 다윗이 아둘람 산채로 피신하기 약 이백여년 전 쯤 히브리족이 처음 가나안에 정착하였을 때, 각 지파들은 서로 땅을 분배하고 그 안에서 서로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열였습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첫 세대가 지나자마자 각 부족들 간에 힘의 격차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각 부족내에 개별 가족들 사이에도 빈부 격차가 생겨나게 됩니다. 

다윗 때 쯤에 이르니 애초 사회 평등의 원칙은 이미 사라졌고, 빈부의 차이는 크게 벌어져 있었고, 떠도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다윗 주변에 몰려 들었고, 그들을 군사화 시켜서 용병으로 만든 것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들을 이끌고 블레셋의 용병이 됩니다. 

사울의 부대와 다윗의 부대는 이런 차이가 있었습니다. 서로 거느린 부대의 성격 차이는 바로 사울과 다윗이 생각하고 그린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모습 차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울은 열 두 부족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인 왕국을 꿈꾸었었고, 다윗은 이미 열 두 부족을 넘어선 가나안 전체를 통일하는 왕국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블레셋행은 바로 그 꿈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던 셈입니다. 

또한 사울의 군대는 야훼로 부터 받은 힘, 카리스마가 사울에서 빠져나갔다는 소문에 응집력과 전력이 와해 되었지만, 다윗의 부대는 다윗 개인에 대한 충성심으로 뭉쳐 있었으므로 다윗의 고백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에 단단한 응집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두번 째는 다윗의 여자들입니다. 

사울의 둘째 딸 미갈, 갈멜 여인 아비가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 학깃, 아비달, 에글라, 밧세바, 아비삭. 

모두 다윗의 아내들 이름입니다. 

사무엘상 25장에 기록된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는 과정을 보면, 이런 여러 아내와의 결혼은 바로 다윗왕국의 지경 곧 영토를 확장하는 일과 맞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밧세바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이 지녔던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성품입니다. 어찌보면 사람들이 지닐 수 있는 여러 성품들을 다 지니고 있었다고해도 큰 탈이 없을 듯 합니다. 

다윗의 작품들로 알려진 시편들에서 들어나는 아주 우아하고, 고상하고, 사려깊은 모습들을 따로 이야기 하도록 한다 하여도, 아비가일을 아내로 취하는 모습이나, 밧세바를 취할 때의 모습을 보면 인간적으로 사악하기 그지 없는 것이지요. 

북쪽 이스라엘 왕,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멸망하는 과정도 생각하면서 들여다보면 다윗의 교활함이 뛰어나게 드러나는 장면들이 있답니다. 물론 이스보셋이나 북 이스라엘의 총사령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해 성서는 다윗이 전혀 몰랐다고 기록하고는 있지만 말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장면들을 아주 장황히 설명하고 있답니다. 특히 아브넬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에 다윗은 모든 백성들을 불러 모아 증인으로  삼고 양손을 하나님을 향해 쳐들고 자기는 아브넬의 살인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자기가 명령한 것도 승인한 것도 아니었다고 소리쳤다라고 기록하고 있답니다.) 

아무튼 이런 남다른 조건을 지니고 있었던 다윗은 블레셋과 사울 사이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자의반 타의 반으로 벗어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투는 사울과 블레셋 군대 양쪽 모두 결정적인 손실과 타격을 입게됩니다. 

다윗은 바로 그 싯점에 슬그머니 그의 용병부대를 이끌고 자기의 고향 유다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무 일도 안했는데 유다 사람들이 다윗을 찾아와 왕으로 삼았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다가 비명에 죽고 난 후(사무엘하 4장) 북쪽 왕국 이스라엘이 저절로 다윗에게 굴러 들어옵니다. 

통일왕국을 이룬 다윗은 이제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갑니다.

변신 – 왕국 7

(당신의 천국 – 번외호)

불레셋군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동원령을 내린 때였다. 아기스(블레셋의 왕)가 다윗에게 일렀다. “그대는 부하를 거느리고 우리 대열에 끼어 같이 출전하게 될 터이니 그리 아시오.” 다윗이 “알았습니다. 분부만 내리시면 그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선뜻 대답하자 아기스는 다윗에게 “그렇다면 나는 장군을 나의 종신호위대장으로 삼겠소.”하였다. – 사무엘상 28 : 1-2, 공동번역 

한주간의 일을 마친 토요일 저녁입니다. 아내도 출타중이어서 혼자 느긋한 저녁상도 즐기고 설거지도 마치고 오늘의 제 마지막 과제인 “당신의 천국” 연재글을 쓰려고 앉았습니다. 

오늘은 다윗의 일생 가운데 정점이었던 다윗의 도성(都城) 예루살렘 입성까지의 일을 더듬어 보려는 생각이었답니다. 

10 26

그러다 달력을 보니 오늘이 10월 26일입니다. 제가 사는 미국 동부시간으로 말입니다.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날입니다. 

제 나이 이십 중반일 때의 일입니다. 지난 일에 “만일….”이라는 상상은 허전하기 그지 없는 일이지만, 만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이 한 두해만 늦추어졌거나 좀 빨랐다면 다른 건 다 모를 일이지만 제 인생은 조금 다른 길을 걸어 오지 않았을까하는 그저 늙막에 그림이나 그려 보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답니다. 돌이켜보면 제 인생 가운데 가장 호사스런 때였습니다. 

1975년에 다니던 대학에서 제적을 당하고, 징집되어 군생활 마치고 제대한 것이 1977년 성탄전 날이었답니다. 그런데 할 일이 없던 것이었습니다. 학교로 되돌아 갈 길도 없었고 말 그대로 백수였던 젊은 날이었지요. 

그러다 이듬 해 봄부터 신학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었답니다. 한국신학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선교교육원이라는 평생교육기관이 당시 서대문 충정로에 있었답니다. 

그 곳에서 저처럼 본의 아니게 백수가 된 젊은이들을 위한 신학공부의 장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선생님들도 역시 본의 아니게 당시에 백수가 되신 분들이셨습니다. 

서남동,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김용복, 송건호, 이문영, 박현채 선생님 등등 그야말로 당시 이름만 들어도 설레던 분들 에게 강의를 들으며 공부를 하고 있었답니다. 함께 배우던 친구들이 약 이십 여명 쯤이었는데 저보다 한참이나 앞선 친구들이라 쫓아가느냐고 엄청 애쓰던 때였답니다. 

그 때 그 분께서 궁정동에서 그렇게 가시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신학공부를 계속하면서 학문을 하거나 목사가 되거나 그러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지요. 

아무튼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사건으로 인해 우리들은 다니던 대학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답니다. 

십년만에 대학을 졸업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답니다. 그래 이번엔 진짜 목사의 길을 가보자하고  제 신앙의 본고장인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신학교인 장신 이른바 광나루 신대원에 입학을 했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영 제게 맞지를 않던 것이었습니다. 그래 하나님께 기도와 서원을 했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제 나이가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한 오십까지 좀 살다가 인생을 좀 알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고요. 

그리고 이제 환갑줄입니다만 영영 그 서원은 짐으로 지고 갈 모양입니다. 

박정희. 지금은 그의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였다고 말해도, 해방후 남조선 노동당 군사총책인 빨갱이였다고 해도 잡혀가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1960, 70년대에는 그런 말을 하면 잡혀 갔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래도 아직 쉬쉬하는 모습이지요. 고만큼 부끄러움은 남아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윗 역시 그런 과거를 지닌 인물이었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부끄럼없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답니다. 

사울과 왕권을 놓고 다투다 일신상의 안위를 위해 적군인 블레셋의 호위대장이 된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사울과 블레셋의 아기스가 서로의 총력을 다해 마지막 일전을 앞 둔 시점에서 다윗은 블레셋에 충성 맹세를 합니다.

 그리고 출전을 코 앞에 두고 블레셋의 장수들이 다윗의 출신을 트집잡아 믿지 못하겠다고 하자 다윗은 블레셋 왕에게 다시 한번 굳은 충성 맹세를 합니다. (사무엘상 29장) 

만일 그 싸움에 다윗이 출정을 했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기억이나 성서의 기록에 그의 이름은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민족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그가 적군에 빌붙었던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후대의 기록자들도 그러했고 다윗을 기리는 유대인들도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박정희의 인물을 비교하자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시장터의 장삼이사(張三李四)로 사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인물의 장단점이 있는 법이거늘, 신 앞에서 비교해 본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건물의 높이겠지요. 

다만 어떤 인물을 기리는 그 시대 정신을 생각해 보자는 뜻입니다. 

다윗의 변신은 야훼 하나님과 신명기적 법정신을 이스라엘에게 심었고, 박정희의 변신은 잘 살아 보세와 하면 된다는 정신을 낳았습니다. 

다윗의 결과는 신 앞에 홀로 설 줄 아는 인간, 신을 두려워 하는 인간을 낳았고(나중에 다윗의 시편들을 이야기 할 때 이런 거 이야기하렵니다.) 

박정희의 결과는 오늘 누리는 힘(돈, 권력, 명예, 성 등등)을 위해서라면 부끄러움이나 신은 사치일 뿐인 인간을 낳았다는 생각입니다. 

오늘은 좀 엉뚱한 데로 이야기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번외호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