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 세상 – 말씀 8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2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 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읍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 누가복음 15 : 4 – 7 

 “너희의 생각은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 마태복음 18 : 12 -14 

아주 잘 알려진 예수의 비유 말씀 가운데 하나인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 기록된 이 비유의 마지막 서로 다른 구절들 곧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마태)”와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누가)”는 기록자들인 마태와 누가의 첨언이었을 가능이 높다는 것이 성서 연구자들 사이에 정설입니다. 

나머지 남은 예수의 비유 원형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마태)”,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누가)”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나서는 주인 또는 목자의 행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생각을 해 봅시다. 

양 백마리라는 한무리의 집단이 있습니다. 그 집단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에게는 백마리들 하나 하나가 모두 소중한 가치를 지닌 재산입니다. 주인이나 목자의 입장에서 보면 말입니다. 백마리로 구성된 양의 무리는 들판 또는 산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전한 우리(울타리나 가옥)에 있었던 상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lost sheep만일 양들이 안전한 어떤 우리안에 있었던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린 조건이었다면,  당연히 예수의 비유는 합당한 이야기가 됩니다. 상식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충분히 되찾은 후에 일어난 잔치자리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잃어버렸던 양 한마리의 가치 중 십분의 일 정도 한도내(?) 또는 양 한마리 값 통째를 다 써서 맘껏 먹고 마셔도 손해 볼 일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잃어버린 양의 가치만큼 즐긴 것으로 치부하면 될 일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비유는 이런 전제조건이 깔린 상황이 아니였습니다. 

들판이나 산에서 방목 상태에 있는 양떼에게는 그들을 지켜 줄 목자나 하다못해 양들을 지켜 줄 개들이 필요했습니다. 만일목자나 지킴이 동물조차 없이 양떼들을 방목상태로 방치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재산권을 포기하거나 양들의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양떼들을 공격하여 먹이로 삼으려는 들짐승이나 남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훔치는 일을 일삼던 당시 횡행했던 도적들에게는 내 놓은 밥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 비유에서 양떼들을 지킬 목자나 어떤 장치도 없이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들이나 산에 그대로 방치한 채로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 나선 주인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해서 우리 스스로에게 한번 묻기로 하지요. 

만일 똑같은 상황이라면 저나 당신은 어떤 행동을 보일까요?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일테면 “믿음으로”라는 수식없이 솔직하게 우리들이 보일 수 있는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런 비유가 더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뉴욕 맨하턴 타임 스퀘어 광장이나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좌판 행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도록 하지요. 개당 백불 또는 십만원씩 하는 물건 백개를 놓고 팔려고 하는데 그 중 하나를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확 가로채 도망가고 있는 상황을 그려 보실까요. 

그 좌판에 있는 아흔 아홉개 곧 구천 구백불  또는 구백 구십만원을 버려둔 채, 잡을 수 있는지도 모를 그 백불 또는 십만원을 낚아채 도망간 이를 찾아 나설까요? 

한번 이런 상황을 머리 속에 그려 보면서 한번 솔직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생각해 보시자는 말입니다. 

아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나 읽고 있는 당신이나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오늘 재수 더럽다”며 좌판에 있는 구천 구백불의 물건을 지키는 쪽으로 선택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지 않으신가요? 

이건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지요, 그리고 합리적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글쎄 만일 이러한 제 물음에 당신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거나 예수 반열에 올랐거나…. 

예수가 말한 이 잃어버린 양 한마리의 비유는 바로 그런 우리들의 선택 지점에 대한 물음입니다.

상식에 대한 역설(逆說,paradox)을 넘어 상식에 대한 반역(反逆)이었습니다. 

혹시 역설, 반역. 이런 말들이 거슬리시나요? 그러면 그런 말들을 순하게 써보지요. 바로 바보랍니다.

바보들이 사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씀이랍니다. 

다가오는 주일이 기독교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사람들이 “바보들의 세상”에 열광하던 시간을 기리는 주일이지요. 그러나 똑똑한 인간들은 바보 한 사람 곧 예수를 죽이고 말지요. 십자가에 매달아 말입니다. 

자! 예수의 비유 몇 가지 더 이야기 하렵니다.

그의 선언 – 말씀7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1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 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돈을 받아 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 마태복음 20 : 1- 16 

인용성서 구절이 좀 길었습니다만, 이럴 때 성서 한번 다시 읽어보자는 뜻으로 길게 인용을 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 가운데 꽤 널리 알려진 대목입니다. 

예수가 한 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아니면 이  비유에 대해  이제껏 당신이들어 본 설교나 성서공부를 돌이켜 보면서 다시 곱씹는다면 어떤 해석과 신앙고백을 하실 수 있으신지요? 

자! 제 생각을 말씀드리기 전에 최근에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 하나 먼저 소개를 드립니다. 

제 또래의 한 사내가 지난해에 한국을 다녀왔답니다. 큰 맘 먹고 나선 십수년 만에 고국방문이었답니다.  이 사내는 이민 오기 전에 한국에서 제법 유수한 회사의 직원으로 있다가 해외파견 근무 형식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답니다. 그러다 여기 눌러 앉게 되었고, 작지만 제법잘 나가던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그만 통째 말아먹고 빚더미를 안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십 수년 만에 자녀들도 다 시집 장가를 들이고, 부부가 그저 하루 밥 먹고 살며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을만큼 살게 되었답니다. 그렇다고 치부를 해서 쌓인 재산이 있거나 한 형편은 아니었답니다. 

십 수년을 그렇게 고생을 하며 다시 일군 삶을 돌아보며 큰 맘 먹고 고국에를 다녀왔다는 것이지요. 짧은 모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그 사내가 하던 말이었답니다. “이젠 다시는 그 곳에 가지 않을겝니다. 너무 많이 변했어요. 모든 판단의 기준이 그저 돈이더라고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바로 돈이더라니까요.” 

이어지는 그의 말입니다. “만나는 친구들과 지인들은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답니다. 그들의 관심은 제가 얼마짜리 집을 소유하고 있는지, 얼마짜리 차를 타고 다니는지?  뭐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더라는 말입니다.” 

글쎄, 그 사내의 말을 100%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즈음 한국뉴스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치판단의 기준이 ‘돈’ 인 것은 틀림없는 듯 합니다. 어떤 특정 분야뿐만이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 규칙은 어디에서나 통용되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 예수의 비유로 돌아갑니다. 

저 위에서 인용한 마태복음 20장의 기록에서 아주 유명한 16절의 말씀,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라는 것은 예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의 이야기 곧 그가 첨가한 부분이다라는 것이 학자들 사이의 주된 의견이랍니다. 

16절을 빼 놓고 본다면 이 비유의 촛점은바로  15절에 있습니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라는 말입니다. 

vineyard-workers“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주인이 “네가 뭔데?”라며 꾸짖는 상대는 바로 아침 일찍부터 온종일 일하고도 한 시간 남짓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임금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오늘날 이런 임금지불 방식을 고수하는 고용주가 있다면 각종 송사로 재산을 날리는 일은 고사하고 아마 사법 판단의 대상이 될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의 비유는 상식을 뒤엎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상식을 뒤엎는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했을까요? 

귀가 열린 척, 눈이 뜨인 척이라도 해 가면서 비유를 곱씹어 보아야하지 않을까요? 

십수년만에 모국방문을 하고 돌아온 사내가 본 오늘날의 한국사회나 지금 저와 그 사내가 살고 있는 이 미국 땅이나 이천년전 예수가 숨쉬고 있었던 팔레스타인 유대사회나 전혀 다르지 않은 사실이 한가지 있답니다. 

법이나 율법, 아니 나아가 상식이 우선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나 율법 나아가 상식까지도 지킬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존재한다는 것이고, 법이나 율법 나아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제 배불리는 사람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여기나 저기나 늘 있어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 “그건 아니다!”라는 반기를 든 것입니다. 사람 곧 인간은 신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 시대의 사람에 대한 평가가 율법의 잣대에 올려져 있었고, 제 또래의 한 사내가 본 오늘날 한국사회(한국말을 사용하는 사회)의 사람에 대한 평가가 돈에 올려져 있다는 것은 모두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에 대한 평가는 누구나 다 평등한 자리에 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말씀5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0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 누가복음 17장 20 – 21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일찌기,’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리라.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 마태복음 13장 : 10- 17 

예수가 주로 한 일은 기적행위와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그 말씀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이른바 “비유”라는 형태의 이야기들입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들은 많은 경우 이 비유라는 형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오늘부터 몇차례 예수가 했던 비유말씀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비유란 예수 당시 사람들과 그 이전 구약시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 방식의 한 형태입니다. 비유라는 말의 히브리어( ‘마샬’lvm, mashal)은 잠언, 속담, 풍자(satire), 비웃음(taunt), 조롱(derision), 수수께끼(riddle), 풍유 또는 비유(allegory) 등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런데 예수는 스스로 왜 이런 비유를 사용해서 말씀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마태복음 13 : 10- 17, 마가  4: 10-12,  누가 8: 9-10) 

바로<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 보고 알아 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 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되새기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예수가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예수가 떠나고 난 뒤 한 세대 후쯤부터 글자화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비유로 이야기하는 까닭을 설명하는 말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 구약의 이사야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사야가 야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로 나서기 전에 야훼 하나님께 들은 음성입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말아라(못하리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말아라(못하리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 이사야 6: 9- 10 

이사야에 나오는 말과 예수의 말을 곱씹어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비유로 이야기하는 까닭은 바로 “모르게 하기 위해서”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닌지요? 조금 우스꽝스럽지 않으신지요?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까닭은 제 생각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키고, 읽는 이들로 하여금 제 생각을 잘 드러내어 알게 하기 위해서 인데요, 읽는 사람들이 읽을수록 모르게 쓰는 글이라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런데 비유란 역설 곧 패러독스(paradox)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의 이런 비유에 대한 설명은 바로 역설이지요. 

바로 믿음을 전제하고 들어야만 들리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가짜 믿음”이 끼여들 여지가 너무나 많거니와, 실제 지난 이천년 동안 숱한 가짜들이 판을 쳐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 채 전혀 엉뚱한 예수만 바라보다가 간 사람들이 넘쳐나지요,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마찬가지고요. 

here and now“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여기있다, 저기있다”, “내가 보았다, 갔었다.” 등등 숱한 유혹들이 넘쳐났거니와 지금 오늘도 마찬가지랍니다. 

예수의 비유는 자칫 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 곧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이해하기 쉬습니다. 

이제 예수의 비유에 대해 이야기하렵니다. 저도 바르게 쓰고 읽는 이들도 바르게 이해하려면 바른 믿음의 잣대가 전제되어야 한답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말씀에서 “바로 너희가운데 있다”라는 말에 원뜻은 “바로 너희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다.”라는 의미라는데는 성서학자들의 의견이 일치된답니다. 

예수의 비유, 예수의 말씀은 바로 저나 당신의 손길이 닿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연탄화덕 – 말씀 3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8 

어느 날 예수께서는 레위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중에는 세리와 죄인들도 많았는데 그 중 여럿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리사이파의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죄인이며 세리들과 한 자리에서 음식을 나누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저 사람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같이 음식을 나누고 있으니 어찌된 노릇이오?”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고 대답하셨다. – 마가복음 2 : 15 -17 

페이스북 친구 한분이 올린 사진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댓글을 달았었답니다. 제가 단 댓글에 그 분은 사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선운산으로 유명한 전북 고창을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 몇 장이었습니다. 내 눈길이 꽂혔던 사진은 고창 여행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장어구이였습니다. 

사실 그 장어구이보다는 장어를 굽는 연탄불에 제 눈길이 꽂혔었답니다. 제 눈에는 영락없는 연탄불이었답니다.

연탄화덕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연탄화덕에 둘러앉아 돼지갈비와 동태찌게에 막소주나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던 시절과 그 때에 함께 했던 얼굴들을 추억했었답니다. 돼지갈비나 삼겹살, 매운탕 등은 그나마 주머니 사정들이 넉넉할 때 그 화덕 위에 올려졌을 터이고, 많은 경우에 동태찌게 한 뚝배기를 연탄화덕 위에 올려놓고 물 붓고 고추장 풀고를 거듭하며 막걸리동이나 제법 비우던 시절이었답니다. 

이젠 추억이 된 연탄화덕과 함께 했던 시절들을 떠올리게 했던 사진이었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올린 페친의 설명을 듣고서는 세월의 간격이 제 추억속의 시간보다 더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답니다. 

그 페친의 사진 설명이랍니다. “야자수로 만든 불이랍니다. 킬로에 65,000원이고요. 셀프로 구워 먹는 곳입니다.”

연탄화덕1

이런 친절한 사진 설명에도 불구하고 저는 장어를 굽고 있는 사진 속의 화덕은 연탄화덕이라고 믿기로 했답니다.

 자! 사진을 찍고 사진을 소개하는 사람이 야자수로 만든 불이라고 설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연탄불로 생각하고 믿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연탄화덕에 동태찌게를 올려놓고 물붓고 고추장 풀고를 거듭해가며 막소주를 들이키던 시절은 가난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가난이라고 하지만 절대 빈곤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술집 연탄화덕에 둘러 앉을 수 있었다는 말은 절대 빈곤과는 거리가 먼 그저 그 시절 소시민들의 일반적인 모습에 비교적 가까운 것입니다. 

아마 그 시절 함께 했던 많은 친구들에게  2014년 오늘에  “야자수로 만든 불에 킬로에 65,000원하는 장어를 셀프로 구워먹는”  일들은 그리 고민하지 않아도 선택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2014년 한국사회 소시민들이 맘 한번 먹으면 즐길 수 있는 일일겝니다. 

그런데 연탁화덕에 동태찌게를 끓여먹던 1960, 70년대나 야자수로 만든 불에 장어를 구어먹는 2014년 오늘이나 절대 빈곤 상태에 놓인 이웃들은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여기서 말하는 “절대 빈곤”이라는 말은 경제적인 문제만 국한해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 노동, 정치, 종교 등의 모든 사람들이 살며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모든 분야에서의 절대빈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는 절대빈곤층들(예수 시대에 죄인으로 불리우던 사람들)을 향해 치유와 용서의  기적을 배푼 후에는 “가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른바 귀환명령입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라는 명을 내린 것입니다. “네가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물론 돌아갈 수 있는 상태로 기적을 베푼 후에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제가 이야기했듯 그들이 돌아갈 곳, 곧 가족들이 있는 세상을 바꾸는 일의 몫은 돌아간 사람(치유받은 죄인들)들이 풀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가 “가족을 떠나라.”, “가족을 잊어라.”, “가족을 버려라.”라고 명하는 사람들은 예수 시대에 소시민계층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연탄화덕에 동태찌게를 우려 먹던 사람들, 야자수로 만든 불에 장어구이를 구어 먹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서를 읽다보면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드는 구절들을 읽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의 소시민 계층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찌보면 선한 구석이 있는 소시민들이었습니다. 성경(구약 특히 오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묵상하며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애쓴 이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절대빈곤층(소외된 자들, 죄인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고 더불어 함께 살려 하지 않고, 당시의 사회 종교 지배층들을 떠바치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글에서 제가 추억했던 소정(小丁) 이문영(李文永)선생님께서는 이런 소시민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절대로 절대빈곤층으로 떨어지지 않고, 소수의 가진 그룹 곧 사회 상류층으로 올라가려는 욕망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가 이른바 이탈명령, 곧 가족을 버리라고하는 명령하시는 지점입니다. 

얼핏 전혀 다른 명령인 것 같은 “가족에게로 돌아가라”는 명령과 “가족을 버려라”고 하는 명령 사이에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똑같은 내용의 명령이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가 내린  이 두가지 다른 명령으로 하여 예수는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바른 중간 – 말씀 2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7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 누가복음 16 : 13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을 진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이 두 사람이 다 빚을 갚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돈놀이꾼은 그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 누가복음 7 : 41- 42 

집이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뜰에 앉아서 하느님을 명상하는 신성한 곳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가 세계를 다니며 아름답게 본 곳이 두 곳인데, 하나는 미국에 있는 내 동생 인영의 집 뜰이다. 집집의 뜰이 연이어진 넓은 공간을 나는 아름답게 보았다. 집집마다 명상하는 정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내 정치적 입장이기에, 나는 좌우 정책 스펙트럼 중심부에서 약간 우 쪽에 기운 보수주의자이다. 만인의 명상을 믿는 나는 좌단이 아니며, 약자를 편드니 우단은 아니다. – 이문영의 ‘겁많은 자의 용기’에서 

“나는 의당 해야 할 최소한의 발언을 했을 뿐인데  그 시절에  모두 17번 붙잡혀 갔고 3번 해직돼 총 9년 8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으며 3번 구속돼 5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올해 초인 지난 1월 16일 향년 87세로 하늘나라로 돌아가신 소정(小丁) 이문영(李文永)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이문영

1960년 4.19 혁명 때 서울시내 대학교수 가두시위 때 플랭카드를 들고 맨 앞에 섰던 양반이십니다. 1973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장으로 있을 때 데리고 있던 연구소 직원들이 반정부 지하신문을 만들었다고 봉급을 주지말라는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의 압력을 뿌리쳤다가 교수직을 잃었던 양반이십니다. 

이후 1976년에 있었던 ‘3·1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된 이후 3번 구속되었고  오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시기도 했던 양반이십니다. 

그 분은 스스로 호를 ”소정(小丁)”으로 지은 까닭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내 호를 소정(小丁)이라고 정한 일이다. 작은 일꾼이 되겠다는 뜻을 보여주는 호였다. 여기서 정(丁) 자는, 어렸을 때 공부를 못한 나의 성적표에 적힌 갑을병정(甲乙丙丁) 중 정이었고 남들이 천히 여기는 백정의 정이었다. 나는 무서운 유신 정부 아래서 꼭 필요한 저항을 하는 최소의 한 일꾼, 바닷고기로 치면 고래는 당연히 아니고 삼치나 갈치나 조기도 아니고 이런 것들이 먹는 멸치도 아니고 멸치들이 먹는 부유 생물 플랑크톤이 되자고 나는 다짐했다.  그러나 회상컨대 내가 최소이기를 바랐던 이 무렵이 바로 나의 최고의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덩치도 크셨고 눈도 크셨고, 말씀은 어눌하며 더디셨던 양반이셨습니다. 자상하기엔 이를데 없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이즈음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이자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만  한반도의 가능성이 열리는 문제이기도 한  “빈부의 문제, 교육, 노동, 세금, 행정” 등을 아주 간단히 요약해서 그 분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유럽은 노동조합이 많고 또 힘도 세다. 대신에 운동을 평화적으로 최소화한다. 물론 우리와는 사정이 다르다. 운동을 최소화하게 하려면 정부가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줘야 한다. 노동자의 자녀들이 대학을 거저 다닐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부자들한테서 세금을 많이 걷어야 한다. 부자들이 세금을 많이 내는 대신 그들에 대한 저항은 약화된다. 말하자면 대타협을 이뤄야 한다. 우리도 노동 쪽이 강해져야 하지만 실력행사는 최소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 요약의 말씀에 강조하는 부분이 있답니다. “최소화한 실력행사는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말고 사수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이 어르신의 행정학 강의를 한 학기 들을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답니다. 

삼십년이 훌쩍 넘은 저 쪽 세월의 일이지만, 당시의 수업노트를 지금도 제가 간직하고 있답니다. 그 중 아직도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이문영선생님의 강의 내용입니다. 

“어느 사회건 철저히 소외된 그룹과 많은 것을 누리는 그룹이 있다. 문제는 적당히 누리면서 조금은 소외된 느낌으로 살아가는 이른바 그 사회의 중간 그룹이다. 이 중간 그룹의 일반적 특성은 소수의 누리는 그룹속에 들어가려는  신분상승을 늘 꿈꾼다는 것이다. 

바로 이 중간그룹들의 선택이 그 사회를 규정한다. 여러분들은 이미 우리사회에서 중간그룹 이상의 삶을 보장받고 있는 셈이다. 

여러분들이 사는 세상을 건강한 세상으로 만들려면 중간그룹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소수의 누리는 그룹으로 나아가는 욕망과 비례한 만큼 아래 그룹 곧 소외된 그룹에 대해 관심을 가져햐만 한다.” 

그 어르신께서 하신 정확한 말씀 그대로는 아니지만 대충 뜻은 이러했답니다. 

자! 지금 저는 약 삼십 오년 전에 (제가 이문영선생님께 배웠던 시절은 1978 – 1979년 이었습니다.) 배웠던 “이문영”선생님네 대한 이야기와 그가 하셨던 이아기들을 글로 써서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께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문영 선생님은 거의 60년 가까운 세월동안 가르치시고 글을 남기신 분입니다. 그 분의 대한 기억이나 생각이 누구나 다 저와 똑같을 수가 있을까요? 

100%  아니지요. 

일테면 당시 중앙정보부나 후에 안전기획부에서 일하셨던 이들이나 오늘날의 박근혜대통령을 비롯한 일단의 세력들의 눈으로 본 이문영선생님의 모습에 대한 그림은 제가 그린 것과 전혀 딴판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잣대을 돌아가신 이문영선생님을 빗대 말씀드립니다. 

이제 “가족에게 돌아가라!”가 아니라 “가족으로부터 떠나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말씀을 전한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떤 이들에게 예수는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일구이언 – 말씀 1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6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하셨다.  또 한 사람은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읍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자격이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 누가복음 9 : 59 – 62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아내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 마태복음 19 : 29 

가령,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누가복음 14장 26절의 말씀을 인간 공동생활의 토대였으리라고 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특별한 공동체 삶의 한 정황이라는 양식사의 한 전제를 문제삼고 싶을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극단주의 때문에 예수의 말씀은 일상의 행동을 규정하기에는 아주 부적합하다. 그렇게 때문에 오히려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러한 말씀을 30년 동안이나 구전으로 전달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누가 그런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까? 누가 그런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 들일 수 있었을까?   – 게르트 타이쎈(Gerd Theisen)의 “원시 그리스도교의 예수 말씀에 대한 문학사회학적 고찰”에서 

이즈음에도 이런 말을 쓰는지는 모르겠으되 “일구이언이면 이부지자라(一口二言 二父之子)”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입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면 아버지가 둘인 사람이다라는 말이지요. 후레자식이라는 말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상황에 따라 자기가 한 말을 뒤집기 일쑤인 사람을 일컬어 하는 말이지요. 특히 여기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치판에서 먹고 사는 이들이 주로 듣고사는 말일겝니다. 

애비가 둘이다는 말은 욕이지요. 이즈음은 세상이 하도 급변해서 애비 두 서넛, 애미 두 서넛 되어도 욕은 될 수 없지요. 솔직히 저는 실제 그런 사람들을 욕되게 할 뜻이 전혀 없답니다. 그런 상황은 전혀 본인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고,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일지라도 제가 믿는 신인 야훼(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똑같이 의미있는 삶인 까닭입니다. 

아무튼 이부지자(二父之子)  곧 애비가 둘이라는 말은  예전에는 큰 욕이었답니다.  후레자식이었지요. 후레자식이란 호래자식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하지요.  호(胡)와 래(來)에서 온 말입니다. 오랑캐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그렇다고요? 바로 한 입으로 딴 소리하는 사람을 일컬어 그리 불렀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말에 약속에 책임지지 않고 말을 바꾸는 사람은 오랑캐의 자식이란 말이지요.

운보 김기창

예수가 딱 그 짝이라고 제가 말한다면 아마 저를 미친놈으로 몰아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칠 것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죄송하지만 예수가 한 말씀들을 찬찬히 놓고보면 영락없이 딱 그 짝이랍니다. 

일구이언(一口二言)을 밥먹듯이 했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기적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는 기적을 통해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라”는 명령을 즐겨했습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는 똑같은 입으로 “가족을 버리라!”고 명령을 한답니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가족을 버려라.”, “가족을 떠나라.”, “가족을 잊어라”, “가족을 돌아보지 마라”는 명령을 한답니다. 

도대체 이런 예수의 일구이언(一口二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이라는 말도 있지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지요. 귀걸이 코걸이는 옛말이지요. 요즈음엔 피어싱(Piercing)이라고 하지요. 입술,  혓바닥, 배꼽 등등 몸 아무데나 제 맘대로 장신구들을 달곤 하는 일 알입니다. 

일구이언이 이현령 비현령으로 아무 때나 어디서나 예수의 이름으로 만병통치가 되는 오늘날의 교회, 이른바 넘쳐나는 설교들은 때론 그저 성황당이 되곤 하지요. 

이게 누구 때문일까요? 일구이언한 예수 때문이라구요? 그런 답에는 그냥 웃고요. 

그럼 교회나 설교자들 때문이라고요? 어느 정도의 탓을 만드는 요인이 되겠지만 주된 요인은 아니랍니다. 그럼 누구 탓이냐고요?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탓이랍니다. 

자! 이제부터 예수의 말씀을 통해 그 까닭을 알아보도록 하지요.

가라(GO) –기적 8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35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 (마가  1 : 44)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마가 2 : 11) 

주께서 자비를 베풀어 너에게 얼마나 큰 일을 해 주셨는지 집에 가서 가족에게 알려라.(마가 5 : 19)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마가 5 : 34) 

예수께서는 “저 마을로는 돌아 가지 말아라” 하시며 그를 집으로 보내셨다. (마가 8 : 26)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마가 10 : 52)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셨다. (누가  7 : 15)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누가 17 : 19)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가거라.(요한 5 : 9)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 왔다.(요한 9 : 7)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7 : 44) 

영어와 한국어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언어 학습에 있어 이런 차이점들을 인정하고 그 차이들을 그대로 받아드리는(외우는) 방법이 학습효과를 높이기도 합니다. 

우리말 “오다”와 “가다”인 영어의 “come”과 “go”의 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come

제 직업은 세탁업이지요.  세탁소에 손님이 들어옵니다. 그 순간 카운터는 가게 뒤에서 일을 보고 있습니다. 그 때 카운터는 손님을 향해 “I’m coming.”하면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카운터로 움직입니다. 

이 때 “I’m coming.”을 “내가 옵니다.”라고 하지 않지요. “제가 갑니다.”가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나고 자란 제 두 아이들은 비교적 한국말을 잘 하는 축에 속합니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두나라 말을 구사하는데 불편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 모두 종종 헷갈리게 말하는 것 가운데 하나 역시 바로  이 “오다”와 “가다”입니다. 

집에 오기로 한 시간에 도착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묻습니다. “어디냐?, 언제오냐?” 그러면 아이들의 대답이지요. “지금 올께” 또는 “지금 오고 있어.” 바로 “I’m coming”을 한국식으로 표현한 말이랍니다. 

뭐 이 정도야 서로 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수를 믿는 신앙에 있어서 이 come과 go, 곧 오다와 가다를 헷갈리면 정말 잘못된 신앙에 빠질 수가 있답니다. 

예수는 치유기적을 행한 이후  치료받은 이들을 향해 “가라”로 명하셨습니다. 어디로 가라고 했습니까? 바로 가족에게로 돌아가라. 네가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네 병을 고쳐 주었으니 나를 따르라”라고 하거나, “내가 네 병을 고쳐 주었으니 세상 끝까지 돌아 다니면서 이를 알려라.”라고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병을 고치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를 찾아갔던 사람들이나, 예수가 찾아갔던 사람들의 본래 소망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남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에서 떳떳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시대 당시의 나병환자를 비롯하여 병자나 신체불구자들은 사회로 부터 차단되어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는 “가라”, “네가 그렇게 원했던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깊게 살펴볼 지점이 하나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실로암못에서 눈 먼 사람을  고쳐주는 예수의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눈이 뜨여 세상을 다시 보게된 전에 소경이었던 사람을 향해 예수는 “가라”고 명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간 이 눈이 다시 뜨인 사람에 대한 후기가 이어집니다.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요한 9 : 34) – 눈을 뜬 전에 소경었던 사람을 맞이한 고향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를 다시 내 쫓아 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병을 고쳐주고 “가라”고 명했습니다만, 그가 “가는” 곳의 환경을 바꾸는 기적을 행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길게 보면 “환경이 바뀐 기적들”을 확인할 수가 있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만든 이들은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이 예수의 기적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이해한답니다. 

이에 관련된 글 하나 함께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몇 해전에 쓴 것인데  제 이해를 함께 하시는데 도움이 좀 될 것입니다.

가라(GO)! – go and sin no more (링크)

죄인 – 기적 7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4 

“최근 일주일 사이 네 가정이 생활고와 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버렸다. 이들은 행복했던 서민층 가정이었으나 병마와 실직으로 졸지에 ‘틈새 빈곤층’이 됐다. 그중 대부분은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이 아니어서 일반적인 정부 지원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최근 신설된 복지제도에 따라 긴급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도 이를 배제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 2014년 3월 5일자 동아일보 인터넷판 사회면 

“추정소득 180만원 ‘송파 세 모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없었다.” 

“정부는 국민들의 복지 체감을 높이겠다며 오는 10월부터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전면 개편하기로 했다. 최저생계비를 없애고 별도의 소득 기준으로 생계·주거·교육급여를 따로 지급하는 맞춤형 급여제도를 설계했다. 서울 송파구의 세 모녀가 살아있었다면 새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 제도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까다로운 조건들 탓에 여전히 사각지대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 2014년 3월 5일자 국민일보 인터넷판 사회면 

“그 때 어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고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계신 바로 위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요에 눕힌 채 예수 앞에 달아 내려 보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중얼거렸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 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네 요를 걷어 가지고 걸어 가거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중풍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곧 요를 걷어 가지고 나갔다. 그러자 모두들 몹시 놀라서 “이런 일은 정말 처음 보는 일이다”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 마가복음 2 : 3 – 12 

“예수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이란, 그들이 처한 물질적, 도덕적,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상류층의 사람들에 의해 경멸받고 벌받고 경원시 당하면서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사람들 모두를 말한다. 가령 하급 재정관리, 즉 강제로 로마 수비군에 협력했던 세리를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수준으로인해 양심적으로 율법을 준수할 수 없는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 불리웠던 사람들 모두를 말한다. ‘죄인’이라는 말은 종교적으로 세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결과 공동의 도덕을 수립했던 자들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붙여준 상표임이 분명하다.” – Georges Casalis의 가난한 자들의 복음에서 

1970년대 까지만해도 동아일보 이름값 좀 했었답니다. 한겨레신문 초대사장이신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선생도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이시지요. 

송선생님께서 동아일보를 그만 두시고 한국 현대사에 대한 연구에 정열을 쏟으시던 무렵에 하셨던 말씀이랍니다. 

“일제시대에 자란 나는 경성제국대학이 꿈이었다. 해방이 되서 서울대학으로 바뀐 경성제국대학 법대에 입학하였다. 언론에 관심이 있어 그 길로 들어섰고, 조선 동아 등의 기자생활을 하면서 사회 엘리트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누리며 큰 고민없이 편집국장 자리까지 갔었다. 1975년 동아투위 사태이후 신문사를 그만 두고 한국 현대사를 다시 돌아보면서 내가 누려온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서울대를 다니고 사회 엘리트로써 승승장구 하며 살아오는 동안 내 동족들이 앓고 있던 터무니 없는 아픔을 외면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아니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그 동족의 아픔을 거름 삼아 내가 살아 온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송건호선생님이 일한던 곳, 동아일보의 오늘자 신문 기사를 보면서 “참 망가져도 더럽게 망가졌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든 책임을 죽은 이에게 돌리는 뻔뻔스런 모습은 비단 동아일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겝니다. 

삶의 모든 궁극의 목표나 가치 판단의 사회적 기준이 “돈”이 된 일은 박정희시대의 “잘 살아 보세” 깃발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다만 “더불어 함께 잘살아 보는” 고민과  과정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잠시 그런 과정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민주정부 10년이 바로 그런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옳고 그름도 문제도 아닙니다. 역사의 발전과정은 분명 “사회 공동체가 더불어 함께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해 전진해 왔고 앞으로도 그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핏값을 치루기도 합니다. 또 어떤 민족은 이미 조상들이 치룬 피값과 오랜 경험을 토대로 토론과 흥정을 통해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솔직히 우리 민족은  이런 “더불어 함께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고민의 역사가 짧습니다. 이런 문제로 피흘려 본 경험도 일천합니다. (사실 이 부분을 이야기하자면 깁니다. 그래 이런 이야기를 제 나이에 맞게 옛날 화롯가에서 이야기해 주시던 할아버지 흉내내며 해 보고 싶은 마음으로 “예수쟁이, 예수로 세상보기”라는 팟캐스트를 시작했는데… 이런 저런 일들로 이즈음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답니다.) 

아무튼 “돈” 뿐만 아니라 “실리”, “권력” 등을 손에 쥐는 것만이 “승리”하는 것이라는 이즈음 잘 쓰는 “공학적” 사고들을 성서적 관점, 예수의 기적행위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지탄받아 마땅한 것들입니다. 

이런 모습들은 이즈음 한국의 정치세력이나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 또는 사회의 아젠다를 만들고 이끄는 언론과 경제주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일겝니다. 

그래 아파야합니다. 이 세대를 한글을 사용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이 말입니다. 특히 성서를 읽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고 아파해야만 합니다. 그게 기독교인의 바른 길입니다. 

신문기사

 

이제 성서로 돌아갑니다. 

예수가 기적을 통해 고쳐준 사람들이 앓고 있던 병이란 당시 사람들에게는 병일 뿐만 아니라 죄였습니다. 

뭐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이즈음은 그런대로 많이 좋아져서 장애우니 장애인이니 하는 말을 쓰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하여도 “병신”이라는 말로 아픈 사람들을 욕보이게 부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예수시대에는 병(문둥병, 맹인, 농아, 앉은뱅이, 광인 등등)은 곧 사회에서 격리되어야먄 하는 죄인이었습니다. 문제는 누가 이런 병에 걸렸느냐는 것입니다. 과중한 세금, 불공평한 나눔은 가난한 이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며 영양실조에서부터 각종 질병 나아가 불구자가 되는 곳으로 밀고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정치적 또는 종교적 지배계층들은 과중한 세금이나 불공평한 나눔 같은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거나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아픈 이들을 향해 죄인이라는  팻말을  걸게하고는 그들을 희생삼아 자기 뱃속을 채웠던 것입니다. 

마치 2014년 오늘날 동아일보와 그 세력처럼 말입니다. 

예수의 치유기적은 바로 “아니다! 지금 아픈 너희는 단연코  죄인이 아니다!”라는 선언이었습니다.“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이웃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사회는 반성서적인 사회입니다. 그 사회에서 입다물고 있는 교회는 예수와는 아무 상관없는 헛것입니다. 

물음 – 기적 6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3 

“생활고 때문에 세 모녀가 사망한 데 이어 30대 주부가 또 극심한 빈곤에 4살배기 아들을 안고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경기 동두천경찰서는 지난 2일 오후 7시 45분쯤 동두천시 상패동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윤모(37·여)씨와 아들(4)이 숨진 채 발견됐다고 3일 밝혔다. 윤씨의 옷에서는 ‘미안하다’는 등의 글씨가 적힌 세금 고지서가 발견됐다.”  – 2014. 3. 3. 서울신문 인터넷판 사회면 기사 

“서울에 살던 세 모녀가 지난 2월 26일 저녁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대로 12년 전 아버지가 떠난 뒤 이들 모녀는 어머니의 식당 노동과 작은 딸의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왔다. 35세, 32세였던 두 딸은 어려운 생활과 지병으로 신용 불량자가 되어 있었고, 병원비 부담 때문에 치료조차 포기하고 지내왔다고 한다. 60세 어머니는 지난 1월 팔을 다친 뒤 식당 일조차 하지 못해왔다. 이런 상황에 빠져 있었지만 그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최후의 안전망,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략 -고인이 된 세 모녀가 남기고 간 짧은 글에는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등장했다. 가난 때문에 생명을 포기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 이토록 강한 염치였다는 것이 우리 사회를 여러 번 울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죄송해야 할 것은 세 모녀를 방치한 이 나라의 복지와 사회일 것이다.”  –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2014년 3월 3일자 김윤영컬럼 중 

“기적신앙은 무엇보다도 낮은 계층에 널리 퍼져 있었고, 주후 3세기 동안에 비로소 상류층에 까지 비교적 널리 침투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주는 몇가지 간접적인 증거들이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도혈루증 앓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 여인은 열 두해동안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모든 소유를 헛되이 없앤 후에 예수에게로 왔다. 이전의 사회경제적인 신분(status)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그녀는 비합리적인 기적신앙에 매달린다. 돈이 있을 때 의사에게 갈 수 있었고, 돈이 없을 때 생명을 다루는 다른 방책에 의존했다.” – 게르트 타이센(Gerd Theisen)의 공관복음서의 기적이야기에서 

“ 예루살렘 양의 문 곁에는 히브리말로 베짜타라는 못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행각 다섯이 서 있었다.  이 행각에는 소경과 절름발이와 중풍병자 등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는데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 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먼저 못에 들어 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삼십 팔 년이나 앓고 있는 병자도 있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이 거기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아주 오래된 병자라는 것을 아시고는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병자는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읍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 갑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가거라” 하시자 그 사람은 어느새 병이 나아서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갔다.” – 요한복음 5 : 2 – 9 

세모녀

그들은 왜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등졌을까요? 살아있는 자들 가운데 그들이 남긴 그 미안함과 죄송함을 받을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염치없는 사회에게 던진 이들의 염치있는 마지막 인사를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성서의 눈높이로 고민해야 마땅한 신앙인들은 이런 사회적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그런 질문들을 안고 예수가 행한 기적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을 찾아가 보도록 합니다. 

예수가  행한 기적으로 치유를 받은 사람들이 앓았던 병명들을 보면 이들의 당시 삶을 알 수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들린자, 혈루증 환자, 눈 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병들은 당시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생긴 병이기 때문에 이런 환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었습니다. 반사회적인 병인 동시에 종교적으로 보호를 받기는 커녕 종교의 이름으로 철저히 버려질 수 밖에 없는 병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병이 아니라 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철저히 버림받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자격과 환경을 박탈당한 사람들이므로 경제적은 측면으로 보자면 사회의 가장 밑바닥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더우기 문둥병자에 이르면 주검 곧 시체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는 환자들이었습니다. 문둥병을 고쳤다는 말은 거의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예수가 치유 기적을 행해 고쳐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가 치유기적을 행한 사람들 가운데 그 사람의 직업이나 신분을 밟힌 기록은 한번 뿐입니다. 바로 회당장 야이로입니다.(마가복음 5 : 22 – 23,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회당장 야이로를 제외한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의 면면들을 보면, 여인들, 아이들, 거지, 종 등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 뿐입니다. 

예수 기적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곳이 없는 사람들, 희망을 잃은 사람들, 정상적인 보통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조차 막힌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기 직전의 사람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오늘날 “염치있는” 마지막 인사말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잃고 사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에게  스스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나 단체들을 향해 반사회적(때로는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몰아세우는 “염치없는” 이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오늘도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제 예수가 무엇때문에 왜 치유 기적을 행했었는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주인공 – 기적 5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2 

그 때 더러운 악령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 소리로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읍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그래서 예수께서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꾸짖으시자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 갔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졌다. – 마가복음 1 : 23- 28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이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요한복음 20 : 30 – 31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가 갈릴리로 나아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주로 한 일들은 치유의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귀신들린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문둥병, 열병, 중풍 등등의 각종 질병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함으로써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마가 1 :28)”졌거나,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 들(마가 1 : 33)”었고,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께 모여 들었(마가 1 : 45)”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 갈 수가 없었(마가 2 : 4)”거니와,  “예수께서는 밀어닥치는 군중을 피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 척을 준비하라고 이르(마가 3 : 9)”시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몰려든 첫 번째 이유가 병고침의 기적을 행한데 있었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에 이르면 미처 기록하지 못한 기적들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런 치유의 기적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까닭을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바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 : 31)”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예수의 치유기적 사건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가 행한 권능으로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실로 믿고 있듯이,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 전까지만해도 이런 기적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만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당연하고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했었습니다.

Pool at Bethesda

그런데 약 삼백 여년 전부터 성서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하면서 이런 기적 이야기들을 전하는 자료들과 성서를 분석하기 시작하였고, 그런 연구를 통해 예수의 기적이야기들은 다큐멘타리 같은 기록 영화같은 것이 아니고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겨지기까지 여러 전승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테면 똑같은 예수의 기적이야기라 할지라도 마태가 전하는 이야기와 마가의 이야기 그리고 누가가 기록한 이야기들 사이에 서로 다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지요. 

“그런데 군중 속에는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어 따라 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 서서 군중을 둘러 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 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둘러 보시며 옷에 손을 댄 여자를 찾으셨다.  그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 마가복음 5 : 25 -34 

“마침 그 때에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어떤 여자가 뒤로 와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돌아 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 여자는 대뜸 병이 나았다.” – 마태복음 9 : 20 -22 

혈루병자를 고치시는 예수의 기적을 전하는 마가와 마태와의 차이입니다. 기적사건을 전하는 이런 마태, 마가, 누가의 차이점들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어떤 모습이 가장 예수가 했던 원형에 가까운 것인가를 연구하는 일이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약 200백년간에 걸친 이런 연구들을 한군데 모아 집대성한 사람은 아프리카의 성인 슈바이쳐입니다. 그의 책 “ 예수의 생애 연구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라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이 책에서 성서학자들이 예수의 기적을 바라보는 여러가지 유형들과 그 연구의 변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에서 학문적인 연구 결과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으로, 이런 연구들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소개드리는 것으로 줄이고요, 아주 획일적으로 이렇다하는 결론은 아니지만 대충 예수의 기적이야기들의 변천에 대한 큰 틀에서의 같은 생각들이 있다는 점만 말씀드립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한 내용들을 보면 기적이야기의 주도권이 예수에게 있고,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부를 때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사용되고, 고침을 받은 사람의 선교 이야기가 이어지고, 고침받은 사람의 신앙이 강조되는 것들 <아라이 사사꾸(荒井 獻)의 예수의 행태> 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예수의 기적이야기로 가까이 시간을 돌려보면 예수는 누군가에게 요청을 받고 기적을 행하며 기적행위의 주도권을 쥐지도 않고, 메시아나 그리스도의 호칭도 없습니다. 기적 그 자체보다는 기적을 통해 고침을 받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더 크고, 고침을 받은 자의 신앙이 전제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적을 통해 치유받은 사람들이 원래 병들기 전에 그들이 있던 곳, 곧 그들의 가족이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예수의 기적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곧 기적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만나 보도록하겠습니다. 이들을 만나보는 일이야말로 에수의 기적 이야기를 바로 이해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