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위하여

엊그제 밤 평소 들을 수 없는 물 떨어지는 소리에 ‘뭔 비가 이렇게 많이 와!’하며 창문을 내다보니 지붕에서 폭포수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뿔사! 며칠 푹푹 찌는 더위 속에 비바람이 오락가락하더니 나뭇잎들이 떨어져 지붕 처마끝 물통이 막힌 모양이었다. 물통(gutter)에 낙엽 방지용 가림막을 친다 친다 하면서 미루는 내 게으름 탓에 해마다 한 두차례 겪는 일이다.

오늘 오후 지붕에 올라보니 물통 끝 빗물 내리받이(downspout)로 이어지는 부분에 한 두어 줌 낙엽들이 물 흐름을 막고 있었다. 지붕 위에 오르내리는 어려움에 비해 너무나 하찮은 노동에 피식 웃음이 났다.

문득 지붕 위에 서서 바라본 동네 풍경은 보통 때와 다르다는 사실에 놀라 카메라를 찾아 들고 다시 오르내리며 사진 몇 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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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지내는 후배가 하나 있다. 그는 이 주 초에 세상 뜬 한국 정치인 노회찬 의원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노회찬에 대해 궁금했던 나는 후배에게 물었다. 그가 어렸을 때 모습에 대한 기억에 대해. 후배가 내게 준 대답이었다.

‘한 땐 같은 반 이기도 했다. 나도 놀라 그에 대한 기사들을 다시 찾아 두루 읽어 보게 되더라. 참 잘 살다간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학년 때던가 생활관 학습 시간이었을 것이다. 방학 동안 있었던 경험들을 나누던 시간이었는데 그는 좀 남달랐다. 여름 방학 내내 전국의 산을 찾아 돌아다닌 이야기를 했으니….’

나도 후배의 말에 크게 고개 끄덕이며 동조했다. 참 잘 살다가 간 삶이라는 생각에.

그저 내 삶에 스스로 만족하며 살다가도 옳은 길, 외길 걸으며 사는 이들을 보면 웬지 부끄럽고 부럽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을 맞는 이들을 대할 땐 부끄러움과 부러움 이전에 딱히 뭐라 말할 수 없는 애틋함에 흐르는 눈물을 애써 삼켜야 한다. 특히 내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노회찬에 대한 기사들을 읽으며 내가 그를 정리하는 생각이다. <소외된 이들을 위해 스스로 소외된 삶을 마다치 않은 삶을 살다간 사람>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지하의 삶을 이해하며 지붕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이들 앞에선 언제나 부끄럽고 부럽다.

그나저나 이젠 사다리 타고 지붕 위에 오르는 일은 멈추어야 하겠다. 다리가 떨려서…

소외의 힘에 대항하는 우리의 싸움에는 지름길이 없다. 이러한 힘에 대해서 정말로 승리를 거두려면 우리 사회의 새로운 기반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도전을 받아드리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 사회 제도의 근본적인 변화에 따르는 온갖 고뇌와 아픔을 감수해야할 까닭이 있다. 오늘의 인간 소외를 극복할 인간 역사의 새로운 단계를 위해 온갖 모험적인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 프리츠 파펜하임이 쓴 현대인의 소외에서

인간 소외를 극복하는 죽음의 모험까지 감수한 노회찬이라는 사람을 위하여.

(그의 죽음을 빙자하여 그의 삶을 내리깍는 허접한 모습의 이웃들에게 그가 날렸을 이른바 촌철살인 그 한마디를 생각하며… )

– 7/ 28/ 18

삼가…

마른 체구의 내가 그나마 건강을 유지하는 으뜸 요인은 잠이다. 하늘 무너지는 걱정이 있어도 누우면 나는 금방 잠에 든다. 그리고 이튿날 정해진 시간이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내 특별한 노력없이 되는 일이므로 내가 누리는 복 중 하나이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짧고 깊게 낮잠을 즐기는 일은 덤으로 얻은 복이다.

그런데 어제 밤엔 두 시에 잠에서 깨어 뒤척이며 멀뚱거리다 아침을 맞았다. 그 달고 단 월요일 낮잠도 건너 뛰었다.

한 밤중 두 시라는 시간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낯선 일이 였음으로 ‘이게 뭐야! ‘ 하는 생각이 앞섰는데 이내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은 잠들기 직전에 보았던 ‘노회찬’에 대한 비보였다.

그의 죽음이 내 잠을 앗아갈 만큼 내가 그를 아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를 만나 본 적도 없거니와  평소 내가 그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어떤 아린 것이 내 잠을 자꾸 쫓아 내어 그대로 아침을 맞고 말았다. 그리고 월요일 그 단 낮잠 까지도 그의 죽음에 대한 생각에 달아났다.

나는 모든 삶에 뜻이 있다고 믿는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생각은 그것이 이어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여 모든 삶과 죽음에는 깊은 뜻이 있다. 그 뜻은 죽은 자가 새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이 새긴다. 그게 사람이 사람인 까닭이라고 믿는다.

나는 노회찬의 죽음 앞에서 부끄럽다. 매우 부끄럽다. 그와 동시대 같은 공간에서 삶을 나눈 적은 없지만 웬지 그냥 부끄럽다.

그저 그 부끄러운 생각에 딱 하루 내가 잠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그가 남겼다는 유서에 있는 글이란다.

부끄러움을 잃어가는 시대를 향해 그가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그 순간, 그 처절한 순간을 던져 그가 꿈꾸었던 진보적 외침을 외친 것은 아닐까?

그의 죽음에 대해 두루 말 많은 이들의 말은 이어질 것이다. 그게 또 사람사는 세상의 한 모습일 터이니.

묘하다. 오래 전 투신으로 시대의 아픔을 안고 떠난 소설 속 주인공 이명준에게 생을 부여했던 최인훈의 부고를 함께 듣다니.

아마 나는 오늘 밤 깊은 잠을 즐길 것이다. 내 부끄러움은 늘상 값싼 것이었으므로. 다만 엇비슷한 내 또래 노회찬이라는 이름은 오래도록 아리게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