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에 결석증으로 크게 고생한 적이 있다. 허리를 가르는 듯한 통증을 견디다 못해 응급 환자로 병원을 찾았었다. 요 며칠 사이 그 당시와 엇비슷한 증상이 몸을 괴롭힌다. 아무래도 내일엔 의사를 만나야 할 것 같다.

아침 나절 한바탕 폭우가 지나가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오후에 숲길을 걸었다. 내 가게 오랜 단골이자 벗인 Charlie가 소개해 준 공원 길이다.

지난 주간에 또 한 차례 다리 수술을 받은 Charlie가 십 여년 전 까지  그의 아내와 함께 즐겨 걸었다는 길이다. 그가 이 산책길에 대한 장황한 설명 끝에 덧붙인 말이다. You might like it.

그 길을 걷는 동안에도 통증은 멎지않고 오갔지만 그 길이 내게 준 위안은 매우 크다.

늦은 저녁 노자(老子)의 한마디가 낮에 길에서 얻은 위안을 크게 더하다.

“내게 큰 병(걱정)이 있음은 내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몸이 없다면 어찌 병(걱정)이 있으리요.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

DSC05247 DSC05249 DSC05252 DSC05253 DSC05258 DSC05259 DSC05263 DSC05267 DSC05281 DSC05282 DSC05286DSC05290 DSC05298

거짓에

뜰에 낙엽이 수북하다. 세상의 변화가 어지러울 지경이라고들 하지만, 계절의 변화처럼 때론 순차적이다. 사람 사는 모습도 매양 한가지다.

모처럼 게으른 아침에 복잡한 세상 뉴스들을 훑어 보다가 꺼내든 생각들은 노자와 예수이다.

인위人爲란 것이 곧 거짓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거짓이란 글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위僞’입니다. ‘僞위는 인人+위爲입니다.’ 거짓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 <신영복의 ‘강의’에서>

관습의 수호자는 항상 인간의 행동을 일반화하려고 애쓴다. 이 때 사회를 하나로 묶는 데 사용하는 끈은 거짓됨이다. – 중략 – 그들은 내적인 덕을 배양하는 대신에 사회를 보다 더 인위적으로 규제하려고 애쓴다. – <마틴 아론슨(Martin Aronson)의 ’예수와 노자의 대담’에서>

예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들의 위선을 조심해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말한 것은 모두 밝은 데서 들릴 것이며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것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  < 성서 누가복음 12장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일요일 아침에.

삶이란?

연일 95도를 웃돌고 습기가 높은 날씨에 지친 몸이 만사가 귀찮다고 풀어질 즈음 기온이 뚝 떨어졌다. 오늘 내일은 최고 기온이 70도 어간에 머무른단다. 그렇다하여도 지친 몸이 쉽게 탄력을 되찾지 못한다. 나이 탓이려니.

몸 생각만 하다가 맘 생각이 들어 노자(老子)를 펼쳐 든다.

<사람들은 모두 여유가 있는데 나만은 늘 가난하다. 내 마음은 바보의 마음, 그저 멍청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모두 똑똑하고 활발한데, 나만은 흐리멍덩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상세하고 분명한데, 나만은 우물쭈물 결단을 못 내린다. 바다처럼 흔들리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정처 없다. 사람들은 다 유능한데, 나만은 우둔하고 촌스럽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20장의 한 부분이다. ‘그랬구나, 노자 어르신도 그 맘 아셨구나’ 그 맘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찌 노자 뿐이랴!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 조차 없다.>
예수는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한 모습을 고백하기도 했거늘.

노자와 함께 생각이 뒹구는데 튕기는 아내의 소프라노 소리.

“와요!”
저녁밥 준비되었다는 소리에 엉덩이 드는 순간, 이어졌던 아내의 웃음소리.
“미안, 미안! 밥솥을 안 눌렀었네….”

하여, 삶이란 무릇 살만한 것이려니.

삶이란!

옛사람의 위로

뉴스 보기가 겁납니다. 뻔뻔스러움이 도를 넘었습니다. 빤한 거짓말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제 자랑으로 늘어 놓습니다.

백주 대낮에 거짓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도 눈 하나 깜작하지 않습니다. 해 떨어지기 전에 이미 거짓을 진실로 바꿀 수 있는, 아니 거짓임을 밝혀낸 이들을 사회를 어지롭히는 불순분자로 낙인 찍기까지 할 수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위력은 실제로 발휘되곤 합니다.

답답함으로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이나 넘겨봅니다.

노자

도덕경 제 3장 위무위(爲無爲)편 마지막 문장입니다.

“위무위 즉무불치(爲無爲 則無不治)” – “무위로써 (정치를)하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위(無爲)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억지로 하거나 꾸며대는 것을 말합니다. 즉 꾸미지 말고(속이지 말고, 거짓으로 하지 않고 정치를 하면) 다스리는 일(정치)가 잘못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위’ – 곧 (백성을) 속이거나, (백성을 향해) 꾸미거나 거짓말 하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치란 그렇게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정치란 사람이 하는 일임으로 100% 그렇게 할 수는 없을 터이니, 위무위(爲無爲)라는 말 속에는 설혹 ‘속이거나, 꾸미거나, 거짓말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최소한 무위한 것처럼 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속이되 속이지 않은 것처럼은 하라는 말입니다. 바로 최악의 경우에라도 부끄러움을 잃어서는 아니된다는 경고입니다.

노자가 정치를 비롯한 사회 제반 분야의 이른바 지도층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부끄러움을 잃고 뻔뻔함이 당연시되는 사회는 결국 혼란을 맞게되고 망하거나 쇠한다는 것은 인류 역사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때론 옛사람들이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