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 2022

때때로 일기예보는 참 정확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일기예보대로 눈이 하얗게 쌓였다. 쌓인 눈 위로 쌀가루 같은 눈발이 쉬지 않고 있다.

곧 설날이란다. 오늘의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저 하루일 뿐이다만, 아득한 그 시절 섣달 그믐이면 어머니는 밤새 불린 쌀 한 말이 담긴 커다란 양푼(그땐 ‘다라이’라했던가?)을 목이 휘어질 듯 이고 방앗간으로 향하셨다. 나는 그 뒤를 졸래졸래 따르고.

덜컹덜컹 피댓줄 돌아가는 소리와 찜통에서 나오는 허연 김들이 가득한 방앗간  모습이 선하게 다가온다. 어머니가 잠시 목을 푸는 사이에 밤새 불린 쌀은 하얀 가루가 되어 커다란 사각 시루떡이 되고, 절구판을 거쳐 길고 따끈한 흰 가래떡으로 변했다.

어머니는 다시 목을 꼿꼿이 세우시고 그 무거웠을 가래떡 양푼을 이고 집을 향해 큰 걸음을 보채셨다. 나는 어머니가 손에 쥐어 준 따끈한 가래 떡을 양손에 쥐고 한입 베어 물며 어머니를 따라 총총 걸음을 걸었었다.

그래! 아주 아주 오래 전 일이다.

눈 내리는 오늘 아침 바람은 차고 매웠다. 눈을 치우고 가게로 나가려다가 포기하고 눈 그치기를 기다렸다. 이 게으름은 다 내가 나이든 탓이다.

문득 눈에 들어 온 작은 새 한 마리. 카메라를 찾아 들고 새와 함께 한참을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 카메라 셧터를 누르는 순간, 새는 어찌 그리 내 손놀림을 빨리도 알아채지는 푸드득 날아 자리 옮기기를 여러 번 하였다.  나는 놀이였는데 작은 새는 삶을 위한 몸부림 친 노릇이었는지도 모른다.

열 두시가 다 되어서야 눈이 멎었다.

추위를 이기노라 옷으로 몸을 두 배나 불리우고 드라이브웨이를 덮은 눈을 치웠다. 삽질이 이젠 버겁다는 생각이 든 것은 몇 해 전 일이다만, 그래도 ‘운동 삼아’라는 생각으로 snow blower를 장만하는 일은 매해 미루고 있었는데 이젠 ‘때가 되었나?’ 싶게 눈 치우는 일이 제법 고되다.

거의 다 마치었다 싶을 때가 가장 힘든 법이라고 온 몸에 땀이 흥건히 배이고 숨도 거칠어질 즈음 앞집 네이든(Nathan)이 성큼성큼 내게 다가 오더니만 “제가 도와 드립죠” 말을 건넸다. 그의 손에 들린 삽은 족히 내 삽 크기의 두 배는 되었다.

종종 친구처럼 이야기를 건네는 유태계 네이든은 사십대 중반 쯤(내가 나이를 물어본 적은 없으니…)이다.

그 덕에 쉽게 눈 치우는 일을 마친 후, “내가 탈진할 무렵에 도와주어 정말 고맙소, 눈 치울 때면 늘 그렇듯 마지막 조금 남았을 때 정말 힘든데… 정말 고맙소.”라고 던진 내 인사에 그가 보낸 답이 내 다리에 남은 힘을 쪽 빼놓았다.

“뭘요! 그저 아들처럼 생각하세요!.”

그랬었다. 네이든이 보기에 나는 그저 작고 초라한 노인이었다. 눈 치우는 일조차 버거운.

나는 사십대 사내를 친구로 생각하며 살고 있었고.

나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신(神)을 만나는 순간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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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할머니

오랜 옛 일들은 또렷한데 최근의 일일수록 기억이 희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는 내 나이를 수긍하곤 한다. 이즈음 제 아무리 ‘신 중년’이라는 말로 치장하더라도 그저 화장일 뿐, 모든 일에 내 나이에 걸맞는 생각과 행위로 측정해 보자면 어쩔 수 없이 나도 이미 노년이다.

모처럼 아무 생각없이 즐기던 연휴 오후,  게으른 긴 낮잠에서 깨어 일어나 아내를 재촉했다. 아내 편에서 보면, 목소리 톤만 높아가는 주제에 제 생각에 빠져 재촉하기 일쑤라고 핀잔주는 일이 당연하고 마땅할 것이다. 솔직히 이런 아내의 모습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 피곤을 더할 만큼 미련하지는 않은 나는 조용히 차 시동을 걸고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아내를 재촉해 집을 나서 찾은 곳은 필라 외곽 지역에 있는 노인 요양원이었다.

벌써 너 덧 해가 지났나 보다.  당시 어머니는 곧 돌아가실 듯 하셨다. 응급으로 병원에 실려 가셨던 어머니는 평소에 ‘난 죽거든 화장으로’라는 말씀을 ‘매장으로’ 바꾸셨다. 유언처럼.

그 때 그렇게 마련한 것이 어머니 아버지 묘자리부터 우리 형제들 묘자리 까지, 누울 순서까지 다 정한 우리 가족 장지였다. 누울 묘자리 순서를 정하는데 가장 입김이 센 것 역시 어머니셨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자리가 정해진 나는 혼잣 말로 웅얼거렸었다. ‘죽어서도 이 자리라니, 피곤하고만…’

그러다 병원에서 퇴원하셨던 어머니가 일주일 가량 머무르셨던 곳이 동네  요양원이었다.

올 초엔 동네 지인 한 분이 계신 뉴저지 양로원에 위로 방문을 다녀 오신 후, 어머니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으시며 선언하셨었다. ‘얘야, 우린 요양원이나 양로원에는 안 갈란다!’ 그 선언으로 우리 형제들은 언젠간 맞게 될 시간에 대한 준비를 마치었다.

어머니는 오늘도 정정하신 모습으로 내 오른 편에,  아내는 당연히 팔팔하게 내 왼 편에서 나를 지탱한다.

그리고 어제 찾았던 요양원에 누워 계신 분은 손 할머님이시다. 할머님은 어제 또렷하신 목소리로 아흔 둘이라고 하셨다. 그게 만 나이라면 내 어머니와 같다.

손 할머님은 필라세사모 모임의 최연장자이시다. 나는 아흔 두 해 그녀의 삶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이웃의 아픔에 대한 진한 공감으로 살아오셨음은 몇 번의 만남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런 통증과 함께 병원에 실려갔던 손 할머님이 요양원으로 옮겨지신 것은 이틀 전이었다. 손 할머님 곁을 지켰던 젊은 필라세사모 친구들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손 할머님을 위로 방문해 달라는 통문을 보내 온 것도 그 때 쯤이었다.

아내와 내 손을 꼭 잡으시고 ‘고맙다’를 몇 번이고 되뇌이시던 할머니는 ‘이젠 곧 일어날 것 같다’고 하셨다.

한 시간 여 짧은 자식 노릇을 마치고 나온 요양원 앞 뜰에는 꽃밭을 바라보며 어린 사슴들이 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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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할머니는 몇 해 전 내 어머니처럼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건 우연이다. 노년과 죽음 그리고 오늘을 살아야 하는 까닭들에 대한 책들을 내게 권하는 호주 홍 목사님의 편지를 받은 것은.

신고식

<2016년 2월 호된 신고식을 치루다.>


한 두해전부터 받기 시작한 광고 메일들이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와 올들어 그 수가 많이 늘었습니다. 은퇴자들을 위한 아파트와 콘도 광고들과 각종 은퇴 관련 상품 광고들입니다.

아직 은퇴라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거니와 제 계획에 따르자면 아직 먼 훗날 이야기이므로 그런 종류의 광고물들은 곧장 휴지통행이 되곤합니다.

지난달인가는 이제 원하면  Social Security 수혜 가능한 연령이 되었다는 안내 메일도 받았답니다.  기차 요금을 비롯한 각종 공공요금의 노인 할인혜택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처럼 관심이 없었답니다. 당연히 ‘은퇴 이후’라는 생각은 제 머리속엔 없었다는 말입니다.

다만, 가능성은 늘 있는 법이므로 죽어 누울 땅 한조각은 준비해 두었답니다. 물론 먼먼 훗날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그러다 독한 감기에 걸린 일은 이달 둘째주 월요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만 삼주가 흘렀습니다만 여전히 약기운으로 지냅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일주일 이상 앓아본 일도 처음이거니와 약을 일주일 이상 먹어본 일도 처음입니다. 사흘 이상 전혀 먹지 못한 일도 처음이고, 이렇게 오랫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일도 처음입니다.

급기야 저혈압 증상으로 일어서다가 맥없이 작대기처럼 쓰러져 잠시 정신을 잃어 본 일도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어, 어..”하는 생각은 분명 있었는데 생각과 몸이 전혀 따로 노는 일을 겪으며 속으로 꽤나 놀라는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쓰러지며 무릎에 생긴 퍼런 멍자국을 보며 “이게 신고식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년으로 들어서는 신고식 말입니다.

제 아무리 백세 시대라 하여도 이미 노년으로 들어선 자신을 바로 바라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은 2월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참 많았던 2016년 2월 한달도 저뭄니다.

마음 편한 글들을 찾아 읽다가 눈에 들어온 임어당(林語堂)선생의 가르침으로 신고식 역시 새로운 삶의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노자1<남을 아는 것은 지혜(智)라 하고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明)이라 한다. 남을 이기는 것은 힘이 있다고 하지만, 자기를 이기는 것은 강하다고 한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자는 부자라 하고, 자기를 이기는 강함으로 행동하는 자를 뜻(志)을 얻었다고 한다. 근원의 바탕을 잃지 않는 자는 영속할 수 있으니, 설사 죽더라도 그 바탕만 잃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장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