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생각 하나

동네 사람들 누군가가 나를 또라이로 더러는 빨갱이 또는 전라도(이 세 마디가 서로 등치 되는 세상이 정말 웃긴다만)라고들 수근거린다는 소리가 내 귀에 꽂혔을 때 나는 그저 웃었었다. 나는 부산 태생 서울 사람이고, 빨갱이가 될 수 없는 예수쟁이이며 정신상태가 지극히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동포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내가 발행하는 신문은 남쪽으로는 워싱톤 DC, 볼티모어, 북으로는 필라델피아와 뉴욕 지역 한인 동포들에게 배포되었다. 그 무렵은 북한의 제 일차 핵실험이 있었고, 기대했던 6자 회담이 유명무실해 지던 때였다.

나는 한국계 미국시민으로 동포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했다. 특히 동포 신문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있었다. 생각의 끝은 간단했다. 바로 만남과 대화였다. 서로를 이해하는 길을 찾아보자는 생각이었다. 결론에 이르자 나는 조금은 무모해 보이는 일에 도전했었다.

무모해 보인다 하였지만 따져보면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미국 상하원 의원들 가운데 이른바 지한파 의원 몇몇과 미국에 나와있는 남북한 정부 대표들과 동포사회가 한자리에 모여 한반도의 평화를 주제로 이야기해보는 일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아 보였다.

다행히 내 거주지 출신 Joe Biden이 당시 상원 외교위원장 이었는데 그와 안면도 있었거니와 그의 보좌관들 중에는 북한에 정통한 이들이 있어 그들의 도움을 받고, 우리 동네 부지사를 지낸 중국계 우씨가 워싱톤 정가의 마당발이어서 그의 도움도 받을 수도 있었다.

워싱톤 주재 한국 대사관에는 몇 갈래의 연이 있었고, 안 풀리면 한국정부에 직접 연을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문제는 북쪽이었다. 나는 미국내 통일운동가들과 북쪽과 가까운 인사들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나는 워싱턴과 뉴욕을 분주히 돌아 다녔다. 멀리 서부 LA쪽 인사들과의 연도 동원했었다.

내 제안에 대해 미 상하의원 몇 명이 동조해 주었고, 워싱톤 주재 대사관 쪽도 북쪽이 나선다면 주미대사가 나설 수 있다는 응답을 받았다.

분주히 유엔 주재 북한대사관의 문을 두드린 결과 나는 북쪽 대사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그에게 나의 계획과 제안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미 의회 쪽 인사들과 남쪽 대사관 입장을 전했다.

그는 일주일 정도의 말미를 달라는 요구과 함께 이런 말을 내게 남겼었다. “김선생, 우리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의 전화를 받았다. 몇차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그가 말했다. “김선생, 우리 사회주의 국가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내 무모한 꿈은 헛되게 끝났었다.

다만 주미 한국 대사와 몇 차례 북한을 방문했던 Biden의 보좌관과 동포들과의 만남으로 그 헛된 꿈을 조금 달랠 수 있었지만.

2018년 남북정상회담 소식과 함께 숱한 뉴스들과 해설들을 보고 들으며 하루 해를 보내다가 문득 떠오른 십 수년 전 내 경험이다.

그렇다. 문제는 정상(頂上)들과의 만남과 회담, 서약과 선언이 아니다. 민(民)과 민(民) 서로간의 이해가 문제이며 먼저이다.

인민 또는 시민, 민중 또는 씨알이 먼저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의식)이 우선이다.

내 귀에 더는 또라이, 빨갱이, 전라도라는 동네 사람들의 말이 들리지는 않는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잊힌 사람이 된 탓이겠지만 내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우리 사이에

주일 오후, 방 정리를 하다가 눈에 뜨인 오래 전에 쓰던 공책 하나. 내 나이 마흔 중반 어간의 기록들이다. 거의 스무 해 전에 끄적였던 낙서 가운데 하나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게 다가선다. 아마 뉴스 탓일게다.


우리 사이에

그가 ‘우리 사이에’라 했지만
안경 너머 번득이는 동자엔
사이 뿐
우리는 없다
 
사이
그 틈으로 이미 회오리 일고
그 틈으로 어느새 깊은 강물 흘러
닿을 수 없다
 
그는 거푸 ‘우리 사이에’라 했다
 
눈물 쏟아 차라리
그 사이에 흐르는 강물 넘쳐
넘쳐 흘러
우리 잠기면 그 날
우리 될까
우리 사이에

장모(丈母)에게도 기회를…

제 고모부, 처고모부, 장모 – 이 세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답니다. 고향이 북쪽이고 한국전쟁 탓으로 남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 고모부님과 처고모부님은 모두 세상을 뜨셨답니다. 두 분 모두 북에서 가정을 꾸리시다가 남으로 내려와 새가정을 꾸려 사시다 가셨답니다. 한분은 그 언젠가 북의 가족들을 만날 세월을 낚노라고 낚시에 말씀을 묻고 사시다, 다른 한분은 도수에 상관없이 소주잔 한잔이면 나오는 웃음에 세월을 얹혀 날리시다 가셔, 이젠 뵐 수 없답니다.

그래도 두분에게는 함께 남으로 내려온 혈육이 있었거나, 이북 오도민(五道民) 향우회에서 만난 고향분들이 함께 했던 삶이었지요.

아직 팔순이 안된 제 장모는 그야말로 남으로 내려온 홀로랍니다. 이북 오도민 향우회에 홀로 얼굴 내밀기도 뻘줌한 나이랍니다.

십대 어린 나이에 오빠하고 단 둘이 내려왔던 남쪽살이였답니다. 전쟁통에 고향에 간다며 국군에 입대했던 오빠는 그 뒤로 소식을 들은 적 없이 이북에 있던 가족들과는 영영 이별한 채 살아오셨답니다.

사람살이 길은 늘 열려있다고, 장인 어른 만나 가정을 꾸며 열 아홉에 제 처를, 이어 두 아들을 낳고 키우며 오늘도 기도로 사신답니다. 행여 북에 살아있는 어릴 적 헤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래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 놓고 있답니다.

오는 10월로 예정된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는 남북 각기 100명씩 선정해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현재 남쪽 신청자들의 반수 이상의 나이가 90대라고 하니 아직 팔순도 안된 창창하게 어린(?) 제 장모에게 순번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이산가족

한 삼년전 이맘 때, 장모에게 병이 찾아왔답니다. 담낭암이라는 이름의 손님이었지요. 그래 담낭을 떼어내고 전이된 간 일부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도 받으시고 난 후. 그 언젠가의 세월을 기다리시며 잘 버티고 계셨답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 소식이 들리던 이지음 장모에게서 떠났다고 생각했던 손님이 아직도 몸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다는 판정을 받았답니다.

그래 이 저녁, 모처럼 제 가족을 위해 기도해 본답니다.

“장모(丈母)에게도 기회를…”

참 씁쓸한 사진들

미국내 언론들이 한반도에 대한 뉴스를 전하는 빈도수에 있어 남쪽은 북쪽을 따를수가 없답니다. 그만큼 북한에 대한 뉴스를 많이 다룬다는 말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북의 김정은에 대한 뉴스들이 가장 많습니다. 그런 류의 기사들 대부분이 김정은을 희화화하거나 비아냥거리는 내용들입니다. 특히 기사에 달린 사진들이나 동영상들은 정상적인 미국인들에게 웃음을 주기에 충분한 것들입니다.

수많은 사진들 가운데 그나마 가장 젊잖은 사진 두 장을 골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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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leader Kim Jong Un visits Mangyongdae Revolutionary School

저런류의 사진들이 미국인들의 눈에는 우수꽝스럽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겠지만 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통(通)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 제가 본 남쪽의 사진 한장이 어찌 그리 우스꽝스럽고 안스럽던지요. 아마 사진에 달린 설명과 사진에 대한 정황설명을 미국인들이 보거나 듣는다면 그 반응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사진이 통(通)하는 남쪽 사회를 생각해 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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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그리 남북이 닮아가는지요. 그나마 닮아가기라도 하니 좋다고 할까요?

답답함으로.

(혹시 제 느낌을 모르시겠나요? 그럼 어쩔까요? 정말 답답함으로.)

도낀 개낀 – 예언자 11

(당신의 천국 – 마흔 번 째 이야기)

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 간다.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리라.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면, 그가 백성의 목자로 나서리라. 야훼의 힘을 입고 그 하느님 야훼의 드높은 이름으로 목자 노릇을 하리니, 그의 힘이 땅 끝까지 미쳐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 – 미가  5 : 1 – 4, 공동번역 

성서와 예언사상이 겨냥하는 목표는 인간이다. 인간이 먼저 개조되고, 인간 속에 자리잡은 ‘악의 세력’이 극복되어야만 한다. 그 때에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가 되고 겸허하고 헌신적인 사람이 된다. – 서인석의 <오늘의 구약성서 연구>에서 

앞선 글에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다른 점들 몇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언자 미가는 이렇게 서로 다른 유다와 이스라엘이 야웨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똑같다고 선언합니다. 

남이나 북이나 야훼 하나님께 지은 죄를 놓고 보면 난형난제(難兄難弟)요, 오십보 백보이고, 도낀 개낀이라는 선언입니다. 

미가의 통렬한 비판과 공격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 비판과 공격은 남과 북에게 똑같이 퍼부어졌습니다. 

전통적인 생계 수단이었던 소작농들이 무너지는 현상은 아마 농촌출신인 미가의 직접경험일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회적 현상에 대한 경고나  부정직한 상행위에 대한 고발, 돈에 매수된 사제와 예언자들의 타락에 대한 심판 예언,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핍박하거나 못본 체 하는 왕과 권력에 대한 심판 경고들을 남과 북을 향해 동시에 선언한 것입니다. 

“야곱 가문의 어른들이라는 것들아, 이스라엘 가문의 지도자라는 것들아. 정의를 역겨워하고 곧은 것을 구부러뜨리는 것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백성의 피를 빨아 시온을 세웠고, 백성의 진액을 짜서 예루살렘을 세웠다. 예루살렘의 어른이라는 것들은 삯을 받고 판결을 내리며 예언자들은 돈을 보고야 점을 친다. 그러면서도 야훼께 의지하여,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재앙은 무슨 재앙이냐?”하는구나!” – 미가 3 : 9-11 

“이 성읍에 사는 무리들은 들어아. 남을 등쳐 치부하는 것들아, 거짓말만 내뱉는 도시놈들아, 말끝마다 사기를 하는 것들아, 들어라. ‘천벌받을 것들, 부정한 되로 부정축재한 것들을 나 어찌 용서하겠느냐?’” – 미가 7 : 9 – 10 

또한 미가는 허례 의식만 남은  예배와 제사, 심지어 이방 종교의 의식까지 섞여진 제사와 그 제사를 집행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도 쏟아냅니다. 그러면서 미가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나님과 함께 살아 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미가  6 : 8)고 말입니다. 

그러나 미가의 선포가 심판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는 동시에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예언을 그치지 않습니다. 

심판과 구원을 반복적으로 기록한 것이 미가서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신약의 마태복음(마태 2 : 6)이 인용하게 되는 미가서 5장 1절의 예언은 메시아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미가와 동시대의 인물인 이사야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오실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우뚝 선 인물입니다.  

미가 이야기를 마치면서 오늘 본  한국 뉴스 한 꼭지로 인해  제 머리 속에 이어진 생각 하나 덧붙입니다. 

경상도 구미시의 시장이라는 者가 “박정희는 반신반인(半神半人) 이었다”고 했다는 기사였습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내노라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고, 박정희 역시 그 한가운데 있는 인물입니다. 극과 극을 이루는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한국사회가 그만큼 극과 극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대변하는 증표일 것입니다. 

박정희에 대한 호, 불호나 긍정 평가 또는 부정 평가는 보는 사람과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또 그런 다른 평가들이 자유롭게 논의되고, 떳떳하고 공정하게 서로 다른 의견들이 표출될 수 있는 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일 것입니다. 

동상

그러나 죽은 귀신을 신의 반열에 올려 놓는 일은 정신 나간 행위 곧 미친 놈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태양절이라며 죽은 김일성 귀신을 섬기는 북이나 탄신절이라며 죽은 박정희 귀신을 섬기는 남이나 정말 도낀 개낀인 셈입니다. 

성서적 관점, 적어도 미가 예언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북의 정권이나 남의 정권이나 죽은 귀신이든 산 귀신이든 사람을 신의 반열에 올려 놓는 정권의 말로는 그야말로 임박한 붕괴 뿐입니다. 

미가의 예언대로 북왕국 사마리아와 남왕국 예루살렘이 결국은 모두 망했듯,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올려지는 정권의 말로는 눈에  훤히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로는 “이미 왔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의 진리입니다. 

<신적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 진리치고 영속적인 진리 없고, 사회정의의 열매를 맺지 않는 진리 치고 참된 신적 진리는 없다.>  S J Samartha 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