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에

똑 같은 일을 삼 십 수년 동안 이어오다 보면 대충 이골이 나도 단단히 나게 마련일 터입니다만, 해마다 맞는 첫 더위는 제겐 여전히 낯설고 일터의 하루는 몹시 길답니다. 제 일터의 환경은 예전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쾌적하기 그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뀌었습니다만, 여전히 보일러 스팀 열기에 끈끈하게 습도 높은 첫더위의 후끈한 바깥 바람이 들어와 함께 노는 날의 세탁소 하루 일은 늘 그냥 처음 겪는 일인 듯 하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지던 비가 그치고 난 뒤 찾아 온 첫더위를 또 그렇게 맞았답니다.

이런 날이면 혼자 중얼거려보는 말이 있답니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어느새 아주 오래 전 일이 되었습니다. 이강백이라는 떠오르는 신예 극작가가 있었습니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는 그의 작품 제목입니다. 그 제목의 연극 구경을 했던 날의 기억을 아직도 담고 있답니다. 솔직히 연극의 내용은 이젠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정동 세실극장이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자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비닐 우산을 받쳐들었지만 겨우 머리나 적시지 않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정동에서 신촌까지 걸었었답니다. 제 곁에는 그 무렵 막 연애를 시작했던 아내가 있었답니다. 78년도였으니  그 사이 마흔 여섯 해가 흘러가 버렸습니다.

변덕스럽기가 날씨만 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고들 하곤 합니다만, 따져 보면 그 보다 더 변덕스러웠던 게 제 삶의 걸음걸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뜰에 나와 앉아 오늘 하루와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게 하는 저녁바람은 아직은 시원합니다. 첫더위 타고 장미꽃이 활짝 피기 시작했습니다.

날씨에 따라 변하는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허나 이젠 날씨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들을 꼽고 쫓는 때에 이른 나이가 되었습니다. 신(神)에 대한 경외와 사랑, 사람 사랑, 내게 주어진 시간과 삶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이어지는 감사들.

24년 첫 더위에.

날씨에

어느 순간 세상이 바뀌어 장사에 일정한 순환 원칙이 무너진 지 오래 되었다만,  내 생업인 세탁업은 여전히 날씨에 따라 그 날의 매상이 널을 뛰곤 한다. 하여 날씨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그렇다 하여도 일기예보를 매일 들여다 볼 정도로 예민하지는 않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할 정도이다.

그런데 이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날의 일기 예보는 물론이요, 한 주간의 날씨 나아가 한 달 예보까지 들여다보기 일쑤이고, 때론 시간대 별 예보까지 챙기기도 한다. 물론 내 생업과는 전혀 관계없이 생긴 습관이다.

얼치기라면 차라리 중간이라도 가는 법이지만, 이건 생짜 초보가 마구잡이로 땅을 헤집어 놓는 형국이라 하늘과 땅의 흐름에 귀라도 기울여야 마땅하다는 생각 때문에 이리 되었다.

유튜브나 구글신이 가르쳐 주는 것은 터무니 없을 정도로 수 많다만, 따지고 보면 모든 결과는 오로지 나에게 달린 일이어서 매사 겁 많고 생각 많은 내가 쳐다보는 것이 하늘이 되었다.

손바닥 만한 채마밭과 화초밭 가꾸는 일에 이리 소심한데도, 이 나이까지 이만큼 산 것은 모두 내가 믿는 신(神) 덕이다. 이 덕담 만큼은 살아있는 한 부끄럽지 아니 할 일이다.

못된 내 성정이 늘 그래왔듯,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그리 없다. 그저 흙을 뒤엎고, 새 흙을 섞어 내 뜻대로 고른 그 한 뼘 땅 위에 싹을 틔우고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그 지속되는 순간 순간들 속에서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해 보자는 내 욕심에 충실할 뿐이다. 그 욕심 속에서 문득 문득 마주하는 신(神)을 만나는 기쁨이라니. 하여 하늘을 본다.

화초와 채마는 욕심을 부려도 그리 후회될 리 크게 없을 듯 하여 마구잡이로 용기를 내었다만, 아직 나무는 이른 것 같아 올해는 화분에 작은 묘묙들을 키워 볼 요량이다.

그렇게 오늘 오후에 흙을 만지며 스쳐 간 생각 하나.

신(神)은 믿어야 할 나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향해 묻고 있는 그의 뜻을 헤아려야 할 물음  – 바로 그 물음 자체일 수도.

날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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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에

하늘은 하루에도 숱하게 얼굴을 바꾼다. 오늘도 마찬가지.

일터에서 틈틈이 하늘을 바라보다 떠오른 옛 생각 하나.

정동 세실극장이었다.  이강백의 연극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를 보고 나선 극장 밖엔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1978년, 암울했지만 꿈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제나 지금이나 하늘은 변화무쌍이다.

변덕에 이르면 나 역시 하늘 못지 않다.

그래도 이 나이에 문득 하늘 보며 던져보는 질문.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감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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