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어제나 오늘이나 욕심의 끝은 없다. 그 욕심 쫓다 보니 일이 제법 커졌다. 애초 부엌이나 조금 손대어 고쳐 볼 요량이었는데 그만 일이 커져 버리고 말았다. 다 버리지 못한 욕심 탓이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다 맞이한 새해 첫 날, 장기 요양 시설에 계시는 아버지와 제법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젠 말하기도 힘들고 귀찮다”고 하시는 아버지는 “아버지, 오늘은 정월 초하루… “라는 내 말에 “정월 …초하루, 정월… 초…하루…”를 몇 번 되뇌이셨다.

올해는 호랑이해, 1926년생 내 아버지가 여덟 번 째 맞이하시는 호랑이해이다. 두어 달 후면 꽉찬 만 아흔 여섯, 우리 나이 아흔 일곱 그야말로 백세 나이가 욕심이 아닌 아버지를 생각하다.

내가 세탁소를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얘야! 이 동네 이름이 Newark이구나. 여기가 너의 새 방주(New Ark)가 되길 바란다!” 따져보니 그 말씀을 하셨을 때의 아버지의 나이보다 지금의 내 나이가 훨씬 많아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 동네 뉴스. 거의 대개의 뉴스들이 어둡다만 오늘자 News Journal도 크게 엇나가지 않는다.

델라웨어 공중보건국(Delaware Division of Public Health)은  지난 주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수가 급증했으며 지난 수요일에만 하루 3381명의 확진자가 발생하는 등 Covid 팬데믹 이후 가장 높은 수의 감염자가 생겼다고 하였다. 또한 John Carney 주지사는Delaware주는 1월 3일 월요일부터 비상사태에 들어가고 정부가 운영하는 건물에 일반인 출입을 금한다는 발표하였단다. 모처럼 활기를 띠었던 UD(델라웨어 대학교) 겨울 학기도 전면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 한단다.

날씨는 예년에 비해 따듯하지만, 새해 첫 뉴스는 몹시 춥고 어둡다.

곰곰 이제껏 내가 맞아 온 새해 아침을 돌아본다. 아버지에게 들었던 새해 경험들도 되새겨 본다. 더하여 오래된 옛사람들이 남긴 새해 격언들도 새로 새겨본다.

그렇게 다시 만난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

언제 어디서나 사람사는 세상에는 New Ark(새 방주)은 반드시 준비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새해 첫날 늦저녁,  아주 오래 전 옛사람의 말 한마디 되새겨 새해 욕심을 품어 본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2022년, 새해 나와 이어진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하느님 나라를 꿈꾸어 보며. 이런 꿈의 욕심은 끝이 없어도 좋겠지.

어제 밤, 아내와 함께 한 공원 풍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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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꿈이 하나 있다. 아무 걱정없이 일년에 보름 정도는 쉬며 여행을 다니는 꿈을 정말 오래 꾸었었다.

그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틈틈이 몇 년에 한 차례 씩 그 쉼의 즐거움을 누리기는 하였다.

나이 60을 넘길 무렵이었던 때엔 정말 다부지게 그 꿈을 이루고자 마음 먹었었다. 기차를 타고 서부여행을 하기도 했고, 남부 플로리다와 바하마를 다녀오고, 파리 여행도 즐겼다.

그렇게 그 오래된 꿈을 해마다 누릴 수도 있겠다는 기쁨에 빠질 무렵에, 부모들이 노환으로 앓기 시작하면서 먼 여행을 갈 여유와는 멀어졌다. 장모, 장인, 어머니 순서로 병 간호를 하고 그들을 떠나 보내며 여행의 꿈을 접기 시작했다. 이즈음엔  95세 아버지 곁을 떠날 수가 없다.

더더구나 끝을 모를 팬데믹으로  여행의 꿈은 이젠 사치가 되어버렸다. 휴가에 대한 꿈 역시 마찬가지다. 생업인 세탁소의 존폐가 걸린 눈앞의 현실에 휴가란 더 할 수 없는 사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꼭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꿈이 오늘을 사는 즐거움의 샘물인 것만으로도 이미 족하다.

하여 이즈음엔 새로운 꿈을 꾼다.

보름 동안에 긴 휴가를 누리는 꿈을 접는 대신, 한가해진 가게 영업으로 남는 자투리 시간들을 여유롭게 즐기는 꿈이 하나요, 책과 다큐멘타리 영상 등 간접경험으로 그 여행의 꿈을 대신하는 시간을 관리하는 꿈이 둘째다.  그 재미도 만만치 않다.

텃밭농사 일년 계획을 세우며 맛보는 즐거움은 예전에 누리지 못했던 호사다.

오후에 아내와 함께 겨울 숲길을 걸었다. 겨울 숲은 을씨년스럽게 황량하고 숲속 바람은 소리로만 불지만, 나무들은 어느 때보다 자신에게 가장 충실하다. 꿈을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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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부수는 건 순식간이네!’ 손님 한 분이 가게에 들어서며 내게 던진 말이다. 이즈음 내 가게가 있는 상가의 반을 부수는 공사가 진행 중인데 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원래 내 가게는 지금 부수고 있는 상가 쪽에 있었다. 그 쪽에서 30년을 있다가 올 봄에 맞은 편에 상가가 살아남는 쪽으로 이전하였다. 내가 30년 정(情)을 붙였던 곳도 다음 주면 더는 볼 수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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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 건물주는 상가의 반을 헐고 그 곳에 아파트를 짓기로 하고 공사에 돌입한 것이다. 건물주의 청사진에 따르면 아파트가 완공되면 내 가게는 그야말로 동네 최고의 명당이 될 것이라고 했다. 물론 내가 그의 말에 귀 기울였을 만큼 순진하거나 어리지 않았으므로 그저 그의 청사진이었을 뿐이었다.

당장의 내 고민은 공사로 인한 내 손님들이 불편을 감내할 수 있는 최대치와 건물주의 청사진을 이루는 시간 사이에서 내가 참아내야만 하는 어려움을 가늠하는 일이다. 그 간극은 어쩌면 내가 상상하는 이상일수도 있다. 그래 떨칠 수 없는 불안이 있기는 하지만, 믿는 것은 내 경험과 나이다. ‘내가 여기까지 온 세월이 얼마인데….’

일을 마치고 돌아와 상가 건물이 부숴지는 모습을 담은 모습을 보다 문득 떠 올린 글 하나. 단재 신채호선생이 쓰신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이다.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를 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 중략-

다시 말하자면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족통치의> <약탈제도의> <사회적 불평등의> <노예적 문화사상의> 현상을 타파함이니라. 그런즉 파괴적 정신이 곧 건설적 주장이라. 나아가면 파괴의 <칼>이 되고 들어오면 건설의 <깃발>이 될지니, 파괴할 기백은 없고 건설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만 있다 하면 5백년을 경과하여도 혁명의 꿈도 꾸어보지 못할지니라.>

내 나이 스물 적에 내 가슴을 마구 뛰게 했던 단재 선생의 외침이었다.

세월 흘러 역사 속 모든 혁명이란 순간적 변혁일 뿐 늘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이 굳어지고 혁명보다는 개혁을, 아니 어려운 개혁보다는 서서히 감히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변화가 좋은 것이라는 노회함이 어느새 익어버린 나이에 단재 선생의 선언이 떠오른 것은 아마도 이즈음 내가 한국 뉴스에 너무 몰입해 있기 때문일게다.

어쩌겠나? 이 땅에서 산 날이 한국에서 산 날보다 많을지라도 여전히 한국어로 사고하는 한 한국인인 것을.

이즈음 한국뉴스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할수록 한국과 한국인들이 자랑스럽다.

역사 이래 어느 공동체도 감히 이루지 못한,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아주 서서히 혁명적 변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단재 선생께서 꿈꾸었던 혁명을 이루되 결코 혁명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변화를 이루어내는 모습이 그려 지기 때문이다.

하여 여의도에 모이는 시민들에게, 나와 같은 세대로 흔치 않게 참 떳떳한 삶을 이어온 듯한 문재인 대통령과 이해찬 대표에게,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변화가 끝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응원을 보내며…

오늘 내 가게 손님 한 분께 받은 작은 화분과 분에 넘치는 찬사보다 수 천 수 만 배 큰  박수가 여의도에 모이는 시민들과 문대통령과 그들과 꿈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들리는 그 날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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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놀이

업(業)의 성격으로 주중 하루를 쉬는 벗이 낚시 한번 가보자고 제안을 했었다. 주중에 가게를 온종일 비우는 일에 익숙치 않아 머뭇거리는 내게 아내는 흔쾌히 ‘가도 좋다’고 했다. 내심 ‘이 정도의 사치는 누릴 만한 나이가 아닐까?’하는 내 생각이 앞선 탓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 낚시 놀이를 다녀왔다.

애초 낚시놀이를 제안한 C와 나처럼 낚시놀이가 그리 흔치 않은 일인 H와 낚시놀이가 일상이요, 나름 그 방면에 도트인 J와 함께 즐긴 하루였다.

처음 놀이를 제안했던 C는 일행을 위해 모든 준비를 도맡았고, J는 낚시놀이에 필요한 제반도구와 정보와 지식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H와 나는 그 두 사람 덕에 그저 하루를 즐겼다.

올해 일흔 하나가 된  J는 나와 같은 업을 하며 한 동네에서 산지 30년 넘은 오랜 지기이다. 그는 지난 해 현업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홀로 산다. 그렇다 홀로 되어 산다.

사실 내가 J를 가장 최근에 만났던 것은 그가 홀로 되어 살기 전 일이다. 그가 과묵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리 말수가 많은 이는 아니었다. 그랬던 그의 입이 낚시놀이 하루 길에서  온종일 쉬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그 무엇보다도 말이 많이 고픈 듯 보였다.

밤 늦은 시각, 돌아와 헤어지며 그가 내게 남긴 말이다. ‘언제든 불러, 언제든… 낚시 가고 싶을 때 그냥 전화만 해!’

다시 혼잣말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홀로 사는 삶으로 돌아가는 그를 보며 내가 혼잣말로 해 본 소리이다. ‘가을바람 불면 낚시놀이 한 번 더 해 볼까…’

낚시터에서 만났던 돌고래 가족들이 떠오른다. 그래,  J뿐만 아니라 H나 C나 나나, 우리 모두 한땐 고래사냥을 부르며 꿈을 꾸던 때가 있었다.

아니, 꿈을 꾸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젠 조촐한 꿈을 꾸자. 찬바람 불면 내가 먼저 J와 H와, C에게 제안을 하는 꿈을 꾸자. 낚시놀이 한 번 가자고. 그날 다시 J가 온종일 이야기하게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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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꿈 그리고…

아내는 북치며 춤을 추고 나는 상추를 씻고 고기를 굽는다. 오늘 저녁 내 집안 풍경인데, 이즈음 이따금 우리 부부가 저녁을 맞는 모습이다. 물론 북치고 춤추는 아내 모습은 한결 같지만, 나는 상추를 씻는 대신 된장찌개를 끓이거나, 고기를 굽는 대신 생선을 튀기기도 한다.

나이 육십대 중반으로 들어선 나는 아직도 꿈이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철부지다. 어찌하리, 환갑 나이 아내도 여전히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 것을.

아내는 더 늦기 전에 춤을 한번 추고 싶다며 춤을 배우겠다고 했다. 춤 배우러 한국에 갔다 오겠노라고도 했다.

올 봄 어느 날이던가, 아내는 동영상 두 개를 보여주며 어떤 춤을 추면 좋겠냐고 물었다. 태평무와 진도북춤이었는데 솔직히 나는 둘 다 마뜩치 않았다. 춤과는 거리가 아주 먼 내가 뭘 알아서가 아니었다.

태평무(太平舞)는 그냥 내 체질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무릇 춤이란 흥이여야 하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그저 만들어낸 동작 같아서 ‘아니다’ 하였다. 진도북춤은 춤으로써는 대만족이었으나 아내가 저걸 과연 흉내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를 떨칠 수 없어 차마 둘 중 어느 하나도 선뜻 집지 못하였다. 경쾌하고 빠른 춤사위가 이어지는 진도북춤을 아내가 흉내내다 자칫 자빠지거나 넘어질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내는 그렇게 진보북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까지는 아니고 주말이면 몇차례 왕복 하루길인 북부 뉴저지를 오가며 춤을 배우고 있다. 나는 운전 기사와 촬영 기사가 되어 그 길을 함께 한다. 녹화된 연습 동작들을 보며 아내는 저녁이면 춤 연습을 한다. 오늘 저녁도 그렇게 보냈다.

아내에게 춤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었다.

‘진도북춤은 한 잔 마시고 세상사 희로애락을 춤으로 풀어내는 그런 춤인 것 같아요.’

이제 곧 아내는 자기 흥으로 진도북춤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추게 될 것이다. 그게 춤으로써는 그저 흉내에 불과할지라도 아내의 몸짓과 맘짓은 온전히 꿈을 이루는 행위라고 나는 믿는다. 아내의 꿈과 삶에 얽힌 희로애락을 풀어내는 춤으로써.

그리고 나는 춤추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한잔 그 힘만으로도 삶의 희로애락을 느낄 터.

복 그리고 꿈

이 나이에 누리는 복이 하나 있다. 생각이 엇비슷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사는 복이다. 몇 사람 되지도 않거니와 온라인 화상으로 만나는 일이니,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 “그걸 복이라고… 쯧쯧…” 혀차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일이겠다만 내겐 참 소중한 복이다.

이름하여 ‘필라세사모 온라인 모임’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와 아픈 사람들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모인 필라델피아 인근에 사는 이들의 모임이다.

만나서 뭐 그리 큰 일 하지도 못하거니와 대단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다. 한국에 새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하며 그들과 함께 원을 풀어 나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로 나누어 왔고, 최근 정권이 바뀐 이후엔 새 정권이 세월호의 진실을 밝혀내고, 한국 및 한인 사회가 보다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우리들이 나누는 이야기들 대부분은 우리들의 이야기로만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가는 고사하고 작은 지역 사회 아니 우리들 각자가 속한 아주 작은 공동체 하나 바꿀만한 특별한 여력들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겐 분명하고 소중한 복이다. 때론 한주간 겪는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이야기일지라도 우리들의 이야기 바탕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일 테면 이번 주 모임에서 한 젊은 학자가 던진 이야기로 인해 나는 사람살이에 대해 다시 생각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여 복이다.

대학에서 언론학을 연구하는 친구인데, 그가 최근 연구했던 주제에 대해 말한 아주 짧은 요약이다.

<사람들에게 하나의 사실을 얻는 정보 매체가 어떤 것인가? 를 묻고, 사람마다 사실을 인식하는 차이와 정보 매체와의 연관관계를 따져 보았다. 이즈음 판을 친다는 가짜 뉴스를 인식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연구도 해보았다.>는 것이다.

여러 이야기들 중에 짧게 언급했던 그의 말이기에 깊은 그의 연구 내용은 모르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런데 그날 그의 짧은 이야기를 들으며, 누군가가 자꾸 생각이 났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오늘에서야 그 이가 생각났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청암(靑巖) 송건호 선생님이다.

송선생님께서 남기신 말씀이다.

“일선 기자로서 오랜 체험을 가진 언론인이라면 결코 없는 사실을 허위 보도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입장을 달리하고 시각을 달리하는 취재와 보도를 통해서 독자들에게는 중대한 정치, 경제 사실들을 얼마든지 사실과 사건의 이미지를 참된 진실과는 상반되는 방향으로 독자들의 머리 속에 심어 넣을 수가 있다.>

내가 청암 선생님을 따랐던 때가 1970년대 말이니 거의 40여년이 지난 일이다. 이제 젊은 학자를 만나 진일보한 청암 선생님의 소리를 듣는 듯 하여 누리는 내 복이 크다.

필라세사모 이름으로 내가 누리는 복을 이야기하듯, 세월호 아이들과 유가족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이들이 안전한 사회에서 누리는 복을 이야기하는 세상이 어서 오기를 꿈꾸며….

기차여행 – 9

꿈을 꾸다

대평원을 달려온 기차는 덴버에서 긴 시간을 쉬었다. 이제 로키산맥과 시에라 네바다 사막과 산맥을 넘기 위해 호흡을 조절하기 위해서였다. 역무원들은 열차에 새로운 공급물자들을 나르기에 바빳다.

덴버는 고도 해발 1마일(5,280ft, 1,610m) 높이에 위치하고 있단다. 솔직히 우리는 그렇게 높은 곳인지를 느끼지 못했다.

이제 열차는 최고 높이 14,440 feet (4,401 m)에 이르는 로키 산맥을 넘어간다. 열차를 타고가며 산꼭대기에 흰천처럼 덮어있는 것이 만년설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게된 것은 로키가 아닌 시에라 네바다의 요세미티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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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바라보는 로키의 풍경들이 한라산, 백두산보다 높다는 게 실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자연에서 노는 곰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콜로라도 강변에서 유유자적하며 우리가 탄 기차를 쳐다보고 있는 곰을 넋나간 채로 쳐다보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일을 잊었던 것이 지금도 아쉽다.

콜로라도 강에는 rafting 놀이를 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기차를 보고 이들이 보내는 인사가 재미있었다.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고 맨 엉덩이를 드러내서 손을 흔들듯 엉덩이를 흔드는 것이었는데 사내 아이들 뿐만 아니라 젊는 처자들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곰과는 다르게 차마 카메라를 손에 들수 없었다.

나는 로키를 넘어가면서 신과 인간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이라고 해도 좋고, 인간과 인간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그 산을 넘으며 꿈을 하나 키웠다. “언젠가 겨울에 이 산을 다시 넘으리라”고.

동영상 편집을 좀 할까하다가 말았다. 그저 자연과 인간을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한과 꿈

얼추 이십년 전에 아버님께서 책을 한 권 펴내신 적이 있다.

일흔 해 이 땅을 살아오시면서 당신께서 겪고 느끼셨던 일들을 담담히 적어 내신 것이었다. 아주 평범하지만 영육간에 건강하게 살아오신 모습대로 책의 내용 역시 지극히 평범하였지만 건강하고 바른 삶을 일깨우게 하는 것이었다. 책 제목이 <한울림>이었는데 나는 내용보다 제목이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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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부제로 붙여 논 <하나뿐인 인생을 위하여>가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하나뿐인 인생,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세월 – 동서고금의 철인(哲人)이나 현인들의 말씀에서부터 유행가 가사까지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이지만 그게 제 삶에 무르녹아 드러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하나 뿐인 인생을 외길로 걸어 온 이웃들의 모습을 보면 나는 한없는 부러움을 느낀다.  아주 작은 일이지만 뜻을 세우고 그 길을 서두르지 않고 오직 한걸음으로 또박또박 걸어 온 이웃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천방지축으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엄벙덤벙 살아 온 내 삶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뭐 대단한 것을 이루어 낸 이들을 말함이 아니다. 이민와서 이삼십 년 때로는 사오십 년 가까이 다운 타운 코너 스토아나 세탁소를 꾸리며 웃음 잃지 않고 자식들 훤출하게 키워 내고 어려운 이웃에게 작은 손길 선뜻 내어 밀지만 결코 내세우지 않는 모습들이 부럽다는 말이다.

 

꿈많던 어린시절이 어찌 나에게만 있었을까 보냐!

품었던 꿈에 소원과 기도와 비나리를 아니 실었던 이가 어디 있겠는가? 한참을 걸어오다 보면 꿈은 그냥 꿈이 되고 꿈조차 꾸지 않았던 모습의 자신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는 일이 나만 겪었던 일은 아니리라. 그랬다. 꿈이 많았다. 이것도 해 보고 싶고, 저것도 해 보고 싶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저런 사람이 되어야지 그런 꿈도 꾸었다. 어쩌랴! 모두 개꿈이었던 것을.

 

이제 환갑줄이지만 철이 아니 든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 

 

스무 살 그 언저리쯤이었다. 나는 <한>이라는 말에 깊이 빠져 들었다. 한,  ,   깊이 천착(穿鑿)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마는 떼어 놓을 수 없는 동무처럼 내 삶의 그림자가 되어 쫓아 다녔다.  

 

신분이 미국시민으로 변신하며 <한>은 더욱 나를 따라 다녔다.

내 자식놈들 특별히 아들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놈의 <한> 때문이다. 딸아이의 이름 “한나”는 그런대로 넘어 가겠는데 아들 녀석의 이름 “한울”은 아이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 준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아들녀석의 이름은 이제 <한 Han>이 되어 제 친구들이 다 그렇게 부른다. 감사한 일은 녀석의 맘 씀씀이나 이웃에 대한 배려가 크다.

 

이 나이에 다시 꿈을 꾼다 하였거니와 그 꿈은 다시 <한>에서 시작한다.

더러는 나더러 장사꾼이라고 말하지만 애시당초 장사와는 연()이 먼 사람이다.

믿거나 말거나 이민을 가꾸는 우리 한인 동포들을 위하여”라는 내 말은 순수하다. 내 거울에 비추어 그렇다는 말이다. 그 맘으로 새롭게 꾸어 보는 꿈.

 

늘 그 꿈으로 산다.

원컨대 기도해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