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며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1

이즈음 젊은이들이야 생각지 못할 일이겠고, 아마 우리들 세대들도 “정말 그랬나?하는 이야기로 다가갈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신분증에 적혀있는 신장 곧 키높이는 5피트 5인치 라고 적혀 있답니다. 165cm라는 것입니다. 이게 거의 삼십년 전에 잰 것이거니와 그 당시 어떤 신발을 신고서 운전 면허국에 섰었는지 모를 일이므로 거의 정확치도 않답니다. 그 이후로 제가 키를 재본 적은 없지만 아마 제 키높이는 163-165cm 사이 정도가 될 것입니다. 

아주 작은 키이지요. 제 또래의 사내 평균치 아래이니 이즈음 한국 남성 평균으로 본다면 ‘아주 작은 사람’축에 속한답니다. 

제가 학교을 다닐 때인 1970년대 초 170cm의 여학생이 있었답니다. 이 친구는 그 큰 키(?)가 부끄러워 늘 높이가 전혀없는 샌들같은 신발을 신고 허리를 구부정하니 굽히고 다녔었답니다. 아마 이즈음 아이들은 이해 못할겝니다. 

제 키인 163cm 의 크기가 한국인 남성 표준키 였던 때가 있었답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시대였습니다. 

이제, 이천 여년 전에  신기원을 열며 이전, 이후를 통털어 오직 하나 뿐인 소리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에 대한 모습에 대해  약 13년 전인 2001년 영국의 BBC 방송은 이렇게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의 초상“넓고 투박한 농부의 얼굴에 짙은 올리브색(황록색) 피부,  짧은 고수머리, 툭 튀어나온 코를 가진 키 153㎝ 정도에 몸무게는 약 50㎏ 정도의 사내” –  바로 예수의 모습을 영국 의학자 리처드 니브 연구팀이  1세기경의 이스라엘인 유골을 토대로 컴퓨터 프로그램과 인조피부, 진흙 등을 사용해 얼굴을 재현한 결과에 대한 보도였습니다 . 

153cm의 키, 50kg의 몸무게 사진같은 얼굴의 사내가 당신 앞에 서서 “내가 예수요!”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런지? 

예수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 몇 가지를 간추려 본다면… 당신도 한번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이야기를 간추려 보시기를… 

첫째, 그는 팔레스타인 나사렛 출신으로 갈릴리에서 활동했다.  둘째, 그의 어버지 또는 그의 직업 역시 목수였다. 세째, 그는 초등학교 졸업장 정도도 없거니와 글 한 줄 조차 남긴 게 없다. 네째, 그가 결혼을 했다거나 자식을 두었다는 어떤 물중도 없다. 다섯 째 그는 도대체 가진 것이 없는 떠돌이였다. 여섯 째 그는 주로 갈릴리 사람들하고만 놀았다. 일곱번 째 그는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행한 일들이 있다. 여덟번 째 서른 셋 짧게 살다 갔다. 아홉 번 째, 죽기 전에 기존 체제(성전 체제)에 도전을 했었다. 열번 째 그는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열 한번 째 지난 이천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구세주로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자신도 부활함을 믿고 살다가 죽었다. 

마침내 열 두번 째,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나 읽고 있는 당신은?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갑니다.

눈(眼, 視覺) – 그 날 5

(당신의 천국 – 일흔 아홉 번 째 이야기)

지난해(2012년) 미국 제 45대 대통령 선거를 코 앞에 둔 11월 초 시사주간지 타임은 표지 인물로 에브라함 링컨대통령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표제를 ‘링컨이었으면 무엇을 했을까?(What would Lincoln do?)라고 달았습니다. 그 기사에는 이런 말이 있었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의 기억은 위태로운 질주를 하는 현재의 두 후보(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미트 롬니 공화당 후보)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둘 중 누가 승리하더라도 극단적으로 분열된 국가를 영리하게 이끈 링컨의 정치수완을 진지하게 돌아볼 줄 알아야  먼 훗날 가치 있는 승리로 평가 받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lincoln

이 기사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 두가지는 오늘날 미국사회가 극단적으로 갈려 있다는 것과 미국 역사상 정치 수완이 뛰어났던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은 링컨이라는 것입니다. 

제 기억에 이 링컨대통령을 팔아서 재미를 좀 본 한국 사람 두 명이 있답니다. 한 분은 돌아가셨고, 한 사람은 여전히 활동 중이십니다. 두 분 다 제가 뵌 적도 있거니와 한 때 두 분 모두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분들이셨습니다. 또한 두 분 모두 생각할수록 안타까움에 제 가슴에 눈물을 흘리게 하시는 분들이십니다. 한 분은 돌아 가셔서 슬픔을 주시고, 다른 한 사람은 살아계셔서 슬픔을 주시는 분입니다. 

살아계신 분은 링컨 연구로 박사를 학위를 받고 링컨 이야기로 책장사 좀 하셨던 김동길선생이고, 돌아가신 분 역시 링컨 팔아 책상사도 하고 감히 대통령까지 지내신 노무현님 이십니다. 

두 분들이 쓰고 펼치셨던 링컨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읽어 보았답니다. 그리고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김동길선생은 링컨이 살아가면서 만들었던 가십(gossip )에 대한 관심과 그 이야기를 팔았던 것이고, 노무현님은 정치인 링컨의 고뇌와 당시 미국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거리를 팔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똑같은 링컨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삶에 그 모습을 투영해 보려고 했던,( 어쩌면 비교 자체가 슬프기는 하지만), 두 분에 대한 평가의 차이가 어쩜 오늘 한국말을 쓰고, 한반도에 관심을 두는 이들에 대한 올바른 평가의 잣대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이쯤 성서를 보는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세주 예수를 바라보는 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나라를 보는 눈이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전했던 말씀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만나는 문앞에 서 있습니다. 신약시대를 코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가십(gossip)으로만 만나면 추하거나 슬퍼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들어 가야할 길 마주할 때 자신이 없고 두렵고, 놓고 싶지 않고, 아니 웃으며 간다하여도 가십으로 남는 삶이 된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만나려면 이천여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온 몸으로 곧 눈으로 손으로 입으로 껴 안았던 당시 갈릴리 사람들을 알고 만나고 이해하는 일을 먼저 해야만 합니다. 

기원전 167년 어간부터 헤롯왕 시대까지 약 130여년간의 팔레스타인  특히 갈릴리로 시야를 좁혀가며 당시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과 갈망, 염원 등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유태인들의 축제 하누카의 기원은 기원전 165년경으로 올라갑니다. 지금으로부터 얼추 2300년 쯤입니다. 한반도에서는 부여왕국 시대이고 고구려는 아직 시작하지 않은 때였답니다. 

마카베오 가문의 유다라는 이가 헬라(그리스) 셀라큐스 왕조에 대항하여 유대 독립혁명을 일으키고 잠시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의 일입니다. 채 이년도 되지 않아서 이들 곧 마카베오 일당의 세력은 다시 광야로 내몰린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말 하나가 있다는 것 머리 속에 깊히 생각해 두셔야 합니다. 

“채 이년”이라는 말입니다. “채 이년”도 길지요. “채 일 년”, “채 한 달”, 아니 “채 하루” 때문에 역사와 인생이 바뀌는 거 어디 한 둘 이던가요? 

아무튼 용맹스럽던 유다 마카베오가 죽고 그의 동생 요나단이 뒤를 이어 독립투쟁을 이어갑니다. 요나단은 아주 뛰어난 정치꾼이었습니다.  정치꾼을 나쁘게 표현한 말이 아닙니다. 시대를 읽고 자기 시대를  잘  이끌어 갔다는 말입니다. 그를 이은 시므온 역시 대단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정치가라는 것이 우리들이 가서 만나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들이 바로 마카베오일가의 하스몬 왕조입니다. 

마카베오 일가를  중심으로 유대 독립 전쟁을 일으키게 했던 주 요인은 헬라(그리스) 계통인 셀류커스 왕조 에피파네스왕이 유대 전통 및 신앙을 전면 거부 및 금지 조치로 인해 생긴 일이었습니다. 

일단 “아니다”하는 일에 생각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뭉치는 것 당연한 일이지요. 그렇게 뭉치다 보면 또 생각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도 있게 마련인 것이고요. 

그렇게 유다 독립이라는 큰 틀에서 뭉쳤던 사람들의 실제 속내는 다 달랐다는 것이지요. 특히 야훼 하나님과 나 또는 내가 속한 무리들의 이해 관계 나아가 믿음의 속성에 따라 말입니다. 

그 마지막을 향해 찢어져 가는 상징으로 대변되는 실존 역사 인물 헤롯왕 이야기까지를  구약 이야기로  삼고 두 차례 더 잇겠습니다.

상생(相生) – 그 날 2

(당신의 천국 – 일흔 여섯 번 째 이야기)

2013년 성탄절 아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예수가 그 때(2013년 전 12월 25일) 거기(팔레스타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것에 대한  역사적 사실 여부, 또는 그가 구세주로 오신 신의 아들임을 믿는 신앙의 여부를 묻지 않더라도 일반적인 상식이 된 일은 예수로 인해 신기원(新紀元)이 열린 사실입니다. 

물론 유태력(猶太曆Hebrew calendar)이나 한국의 단기력(檀紀曆), 일본의 천황력( 天皇曆) 등 자기 민족만이 사용하는 기원력들이 있거니와 불기력(佛紀曆), 회교력 (回敎曆Islamic calendar) 등의 종교력도 있지요. 요즘 젊은이들은 모르겠지만 저희 새대가 어릴 적만 하여도 달력에 단기표시가 있었답니다. 서기 2014년과 단기 4347년이 달력에 함께 박혀 있거나 단기만 박혀 있기도 했답니다. 

현재 전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서기력(西紀曆)은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뉘어져 있지요. 기원전은 B.C. 곧Before Christ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시대를 말하고, 기원후는A.D. 곧Anno Domini라는 라틴어를 사용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해의 시작을 말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예수로 인해 기원(紀元)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이즈음에는 예수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호칭이 특별한 종교(기독교)에 치우쳐 있음으로 새로운 용어를 써야한다는 운동이 있습니다. 바로BCE(기원전)과 CE(기원후)라는 말입니다. BCE는 Before Common Era (공동 시대 이전)의 약자이며, CE는 Common Era (공동 시대)를 줄인 말인데 점점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추세랍니다. 

그러나 이름을 바꾸어도 기원이 바뀌는 것엔 차이가 없는 것이지요. AD 2014와 CE2014는 같은 것이니까요. 

신기원이 열린다는 말은 옛 세상이 지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한반도에서 이런 새로운 세상을 고대하는 종교, 사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때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1592 – 1598)과 병자호란(1636 – 1637)이라는 두 개의 큰 난리를 겪고난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삶은 실로 팍팍한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기강은 무너져가고, 전통적으로 사회 근간을 이루어 오던 유학의 세력도 약해지면서 그야말로 나라 꼴이 꼴이 아닌 세월이 이어져 가고 있었답니다. 

그 무렵부터 민간에 소리없이 퍼져나간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바로 정감록(鄭鑑錄)과 조선의 노스트라다무스로 불리우는 남사고(南師古)의 예언들입니다.  이씨조선은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되는데 새시대에 살만한 곳들은 남쪽에 있다는 남조선사상(南朝鮮思想)이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민간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설왕설래하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마침내 종교운동으로 변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서의 일입니다. 

최제우(崔濟愚)의 천도교(天道敎, 동학), 강일순(姜一淳)의 증산교(甑山敎), 김일부(金一夫)의 정역사상( 正易思想),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의 원불교(圓佛敎) 등이 일어난 때입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새로운 세상입니다.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이라고도 합니다. 수 백년 동안 불안과 고통, 차별, 빈곤 등으로 이 세상이 아닌 어떤 구원을 이루어주는 세상을 갈망하는 백성들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새 세상을 선포한 것입니다. 

상생

후천개벽사상 또는 종교란  지난 시대 곧 선천시대(선천시대)는 지났고 이젠 모든 재난과 고통에서 해방되는 새로운 세상 곧 후천시대가 열렸으며, 이 새로운 세상에서는  해원상생(解冤 相生) 곧 맺힌 원한들이 모두 풀리고 온 세상 사람들이 한 가족처럼 더불어 사는 일이 일어나며, 사람들모두가 무자기(無自欺)의 마음 곧 스스로 속이지 않는 마음을 안고 사는 세상이 열린 것을 믿는 것이랍니다. 

천도교의 지상선경(地上仙境), 증산교의 후천선경(後天仙境),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 원불교 의  이상적인 불국토(佛國土) 등이 모두 후천개벽에 대한믿음과 이제 올 후천낙원에 대한 가르침이랍니다. 

이런 새로운 신앙운동은 사회변혁운동의 힘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동학운동이나 삼일운동 등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역할도 하게된 것입니다. 나중에 감리교인이 된 백범 김구선생도 젊은 시절엔 천도교인으로 동학혁명운동에 참여하였었답니다. 

한반도에 후천개벽 세상을 염원하는 민족종교들이 일어난 후 이미 백 오십여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반도에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고대가 이어지고  있지요. 

자!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보고 지나가기로 하지요. 어느날 갑자기 최제우가, 강증산, 김일부가 원불교의 박중빈이 한반도 역사속에 툭하고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들이 큰 깨달음을 얻기까지 이미 고통에 신음하는 백성들이 삶을 이어오고 있었고, 백성들 가운데 정감록과 남사고의 이야기들이 떠돌아 다녔었다는 것입니다. 

이천 여년 전 팔레스타인 광야에서 앞 뒤 자르고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는  예수의 선포 역시 그 선포를 듣는 당시 팔레스타인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이어온 삶과 그들 가운데 떠돌던 이야기들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비행접시를 타고 다니다가 어느날(2014년 전) 어떤 곳(베들레헴)에  갑자기 짠!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퍼져 살았던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던 이야기 곧 사상과 종교적 운동은 바로 묵시문학사상이요, 묵시종교였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묵시문학운동, 묵시종교가 널리 성행했던 시절은 예수가 오기 약 200여년 전 곧 기원전 200여년 경부터, 예수 나신 뒤 약 200여년 곧 기원후 200여년 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이 묵시운동이 사라져 버리고, 그것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어져 오게 된답니다. 

묵시 운동은 마지막 때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시작됩나다.  그 마지막 때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밀을 알려주는 천사와 마귀이야기가 나오고, 그들이 알려주는 메시아 왕국의 모습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이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 그 이후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것이 바로 묵시문학운동입니다. 

그러면 묵시문학운동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묵시(默示) – 그 날 1

(당신의 천국 – 일흔 다섯 번 째 이야기)

그가 대답했다. “다니엘아, 물러가라. 이 말씀은 마지막 때가 오기까지 봉한 채 비밀에 붙여질 것이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단련을 받아 깨끗해져서 빛날 것이다. 악한 사람들은 끝내 눈이 열리지 않아 악한 짓을 계속하겠지만 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눈이 열려 환하게 알 것이다. 정기제사가 폐지되고 파괴자의 우상이 선 다음 일천 이백 구십 일이 지나야 끝이 온다. 일천 삼백 삼십 오 일을 기다리며 버티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러니 그만 가서 쉬어라. 세상 끝날에 너는 일어나 한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다니엘 12 : 9 – 13, 공동번역 

지난 해 초에 세상을 뜨신 후배의 아버님께서는 독실한 천도교인이셨습니다.  그 이는 “가르치고 지도할 능력과 역량과 신심을 갖춘 도인”에게 내리는 명예직이지만 본인의 결단에 따라 교역자로 활동할 수 있는, 기독교의 목사직에 준하는 천도교 선도사였답니다. 

후배의 아버님께서는 자신이 가셔야할 길을 예비하시며 평생 살아 오신 일들을 간략히 메모해 남겨 놓으셨답니다. 그 메모를 통해 저는 그 분께서 스스로 걸어오신 평생의 길을 되돌아보며 크게 뜻과 의미를 부여하신 세가지를 짚어낼 수 있었답니다. 

용담

첫째는 동학(천도교)에 귀의하여 접주가 된 일, 두번 째는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를 만난 일, 세번 째는 경주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 천도교 성지 복원 및 준공 역사의 한 몫을 담당하셨던 일이었습니다. 

천도교 구미산 용담정은 동학(천도교) 교주인 최제우가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상태로 상제(上帝)를 만나는 종교 체험을 하고 포교를 시작한 곳입니다. 그 때가 1860년 4월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조선사회를 이끌어오던 유교, 불교, 선교는 이미 때를 다했고 새로운 종교가 세상 사람들을 구언하리라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34년 뒤인 1894년 갑오년에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혁명이 일어납니다. 내년이 또 다시 갑오년이니 딱 120여년 전의 일입니다. 

유, 불, 선은 다 되었고 이젠 동학의 세상이라는 선포가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한 세대만에 혁명의 불씨를 짚힐 수 있었던 것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어떤 절실함을 담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동학 혁명은 실패했고, 동학(천도교)도 그 이후 크게 그 세를 확장하지 못했으며 그리 된  까닭들을 제가 이야기할 바는 아닌 듯하여 이쯤 접고요. 

이제 우리들이 찾아가는 하나님 나라 길목에서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되었답니다. 

바로 묵시론, 묵시문학, 묵시사상, 묵시적 종말 등등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삼년 동안 그가 말한 설교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제대로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한민족이 가장 최근에 겪어낸  종교, 사회, 정치적 역사 경험이자 종말사상 운동인 동학을 돌아보는 일은 아주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묵시(默示)란 ‘잠잠할 묵’자와 ‘보일 시’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없이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영어의 apocalypse란 말의 뜻은 드러내다, 폭로하다, 계시하다라는 의미가 있고요.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드러내며, 무엇을 폭로하고, 무엇을 계시하는 것일까요? 

바로 고통과 비애로 가득찬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대망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래에한 소망와 희망과 꿈을 보여주고, 드러내고, 그 계획을 폭로하고 계시하는 것이랍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 묵시론, 묵시신앙이란 말은 바로 지금 위기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위한 문학이요, 사상이요, 신앙인 것입니다. 

이런 묵시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제 우리들이 새롭게 펼쳐나갈  신약시대 이야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는 바로 묵시적 종말과 예언적 종말을 완성한 세상입니다. 

또한 묵시, 종말이라는 말은 지난 이천년 이래 숱한 이단과 종교적 사기꾼들이 제 뱃속 채우기 위해 막다른 절벽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등쳐먹는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구약성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묵시에 대한 이야기 몇차례 이어갑니다. 

(연말이라 자꾸 일이 생겨… 오늘은 짧게.)

감사 – 지혜 2

(당신의 천국 – 일흔 네번 째 이야기)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나는 넋을 잃었다. 그대 눈짓 한번에 그대 목걸이 하나에,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 사랑 아름다워라. 그대 사랑 포도주보다 달아라. 그대가 풍기는 향내보다 더 향기로운 향수가 어디 있으랴! 나의 신부여! 그대 입술에선 꿀이 흐르고 혓바닥 밑에는 꿀과 젖이 괴었구나. 옷에서 풍기는 향내는 정녕 레바논의 향기로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울타리 두른 동산이요, 봉해 둔 샘이로다. – 아가 4 : 9 – 12, 공동번역 

이런 말들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실 겝니다. “고사리도 꺾을 때 꺾어야 한다.”라거나 “썩은 새끼줄도 잡아 당겨야 끊어진다.”같은 말들 말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물려 준 지혜 곧 속담입니다. 이런 속담이나 격언들이 우리 민족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것은 아니지요. 

일테면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영국 속담도 있는 것이고,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단다. 네가 죽을 때에는 세상이 울고 네가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거라.”라는 인디언 속담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가하면 펄벅이 남긴 말 “힘은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있고 용기는 속에 있는 의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것처럼 유명한 사람들이 남겨놓은 명언들고 많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의 말들은 대대를 걸쳐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구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전 세계로 파송되어 가며 제일 먼저 현지민들에게 전했던 성경책은 잠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세상 어느 민족에게나 인생 살아가는 지혜의 책은 낯설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이질감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한 책이었다는 말입니다. 

잠언이란 책 이름은 중국어 성서이름 箴言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지요. 영어성경의 이름 Proverbs는 물론이거니와 그 어원인 라틴어 역시 격언, 속담, 금언 등의 뜻으로 쓰인 것이지요. 그러나 중국어 번역 잠언이 더 뜻이 깊다는 생각을 해 본답니다. 잠(箴)은 바늘 또는 침(鍼)이라는 뜻이거든요. 바늘이나 침으로 꼭 찌르듯 정신을 일깨워주는 말씀의 책이라는 이름이 좋다는 것이지요. 또 어떤 이들은 “잠을 부르는 책”이라고 부른다고도 하더군요. 

wisdom

구약성서에 있는 이른바 지혜서들은 잠언, 욥기, 전도서, 아가 등입니다. 이 지혜서들과 율법서와 역사서들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야훼 하나님과의 계약을 내세우느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율법과 역사서의 기본은 계약정신에 입각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행위들과 계약백성들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인데 비하여 지혜서는 이런 계약사상 또는 계약정신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지혜라는 말이나, 속담과 격언 또는 금언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살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사람들이 남긴 것임으로 야훼 하나님이 끼일 자리가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동서고금 어느 민족에게나 전해오는 속담들과 격언들이 야훼 하나님 없이도 이어져 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지혜서들은 자칫 이렇게 사람 중심으로 빠질 수도 있는 지혜 이야기들을 비록 들어나게 강조하지는 않지만 야훼 하나님의 계약정신과 계약법과 연결시켜 놓았답니다. 지혜의 근원이 사람이 아닌 야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들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잠언으로 알려져 있는 잠언은 솔로몬을 비롯한 가나안 정착 초기의 사사시대로 부터 입으로 전해져 오던 이야기들과 포로기, 포로기 이후 시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모아 포로기 이후인 기원전 450년에서 35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가르침을 들어 학식이 더해지고 슬기로운 사람은 남을 이끌 힘을 얻어 잠언의 깊은 뜻을 풀이해 주고 현자의 말이 품은 뜻을 깨우쳐 준다.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어리석은 자는 교육을 받아 지혜로와지는 것을 멸시한다.”(잠언 1 : 5 – 7)는 말처럼 모든 지혜의 근본은 야훼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다는 잠언의 교훈들은 자칫 지혜 만능주의에 빠질 우려도 있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 식의 해석이 가능한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부유함과 가난함에 대한 금언들은 그런 수렁으로 안내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답니다. 잠언의 말들을 만들고 전해준 계층들이 초기의 사사(또는 씨족 부족의 족장)들로 부터 왕, 나중에는 궁중이나 성전의 서기관 등 부를 누리는 쪽의 입장에서 바라본 지혜의 결과물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또한 짧고 간명하게 표현된 지혜의 말들 속에 자칫 당시의 부조리 또는 부정직한 현실들을 쉽게 감출 수도 있는 함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잠언의 부족한 부분들을 매워주는 책들은 바로 욥기와 전도서입니다. 

욥기는 지혜서인 잠언이 야훼를 믿고 착하고 부지런하면 복받고 잘 살고, 믿지 않고 악하고 게으르면 벌 받고 못산다는 일률적인 잣대의 도덕과 지혜 만능주의에 대한 도전입니다. 

사는 모습이나 삶의 자세로 볼 때 도대체가 고난을 받아야 할 아무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받는 고통과 고난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잠언을 엮고 믿었던 사람들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현실에 대한 고발입니다. 고통이나 고난 또는 성공에 대한 사람들의 습관적인 믿음이나 단정적 결론에 대한 도전입니다. 

욥기는 왜 비교적 죄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는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욥기는 “사람은 사람일 뿐이고, 사람은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그러나 스스로 기꺼이 야훼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따라야 한다.”는 신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말로 시작되는 전도서는 자칫 회의주의자의 책으로 오해할 수도 있답니다. 우리 말로 “헛되다”로 번역된 말의 원뜻은 무의미하다, 무익하다, 공허하다라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자연이 시간이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지루한 반복을 이어가듯이 사람들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이고, 지혜, 쾌락, 수고, 부귀, 여자(남자) 등등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고 추구하는 것 모두 부질없으며, 불의, 억압, 위험, 죄악 그리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이렇게 분명한 한계 속에서 사는 하루하루의 삶가운데서 먹고 마시는 일부터 모든 일상에 감사하며 살라고 권고합니다. 또한 인과응보의 법칙에 매달리지 말고, 삶의 불확실한 상대적 가치들을 즐겁게 추구하며 살 것을 권유합니다. 

마지막으로 아가서에 대한 해석이나 주석들 역시 많습니다. 또한 해석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말들도 합니다. 신랑은 하나님, 신부는 이스라엘로 이해하는 유대의 전통도 있고,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신부는 교회라는 바울을 비롯한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신부는 신부, 신랑은 신랑으로 읽고 이해함으로 우리들 각자의 가정생활에서 사랑하는 부부관계를 일상화 시킬 것을 강조한 책으로 이해한다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지혜서 이야기 이렇게 맺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 이야기들의 마지막입니다. 종말론, 종말문학, 묵시문학, 묵시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법칙 – 귀환 6

(당신의 천국 – 예순 세 번 째 이야기)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듯한 주일 아침입니다. 미국 전역에 때이른 한파가 몰려왔다는 아침 뉴스가 일요판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워싱톤 타임즈는 눈 구경하기 힘들다는 텍사스등의 남부에 쏟아진 눈소식을 멤피스발로 전하고 있습니다. 

날씨 변화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종종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장벽에 부딪히고는 합니다. 이럴 때면 사람들은  그 일을 해결해 줄 어떤 힘을 상상하거나 소망하게 됩니다. 일테면 슈퍼맨이라든지 스파이더맨 같은사람들 말입니다. 이른바 영웅입니다. 

영웅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런 시대가 지났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약 백년 전에 이탈리아에 살던 한 사내가 무리지어  움직이는 개미떼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답니다.  개미들은 자신들이 먹을 양식을 열심히 개미집으로 운반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당연히 모든 개미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내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단지 20%의 개미들만 열심히 일하고 있었답니다.  일하는 개미떼  20%와 왔다갔다 하면서 놀기만 하는 개미떼 80%로 나누어지더라는 말씀입니다. 사내는 20% 와 80%의 개미떼를 따로 모아서 서로 다른 곳에서 살게하였답니다. 그랬더니 똑같은 현상이 반복되더랍니다. 열심히 일하던 20%들 사이에도, 놀기만 하던 80%들 사이에도,  일하는 20%와 놀기만 하는 80%로 다시 나누어지더라는 말이지요. 

이번엔 벌들이 일하는 모습을 관찰했더니 개미에게 나타난 현상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더랍니다. 하나 새로운 법칙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법칙을 사내의 이름(Vilfredo Pareto)을 따서 파레토의 법칙(Pareto Principle)이라고 부른답니다. 

파레토는 개미와 벌들 뿐만 아니라 사람사는 세상에도 이 법칙이 똑같이 적용된다고 보았답니다. 그리고 20%에 해당하는 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일컬어 엘리트(elite)라고 했답니다. 나아가 그는 역사란 엘리트가 바뀌고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는 건강한 사회란 엘리트가 제 몫을 잘 해내고 나머지 대중들인 80%가 잘 따라주는 사회라고 이해를 했답니다. 

그럴듯한 내용이지만 신영웅주의라고 할 만한 것이지요.  엘리트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대중 지향적, 곧 전체 그룹인 100%를 생각하며  일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드문 일이지요.  뭐 말로써야 할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longtail

그런데 약 십년 전인 2004년에 영국출신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이란 이가  롱테일(Long Tail)이란 말로써 파레토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 이야기를 합니다. 

엘리트에 속하는 20%가 아니라 나머지 대중(mass)인 80%의 영향력이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급격한 기술변화에 따라 바뀐 시대가 만들어 낸 법칙이지요. 이를 롱테일(Long Tail)법칙이라고 하지요.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해 생긴 시장과 유통 형식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생긴 말이지만 사회구조 변화에도 여전히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이즈음 한국뉴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기사 가운데 하나가 국가기관이 개입한 부정선거 논쟁이지요. 그 핵심이 바로 댓글이라고 말하는 인터넷 여론조작에 국가기관이 주도적으로 개입을 했느냐는 것이지요. 다른 여러가지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건 제가 잘 모르는 일이니 접고요. 

엘리트 중심사회로 굳어져 내려왔던 한국 사회체제가 이전에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이 한 번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노무현 정권의 등장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 원인을 찾으려면 여러 분석들이 가능한 일이지만 그 중 하나가 롱테일법칙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지요. 

그래 엘리트 중심사회로 회귀하려는 집단들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그 동안 해오던 일들이 결집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국정원이라는 기관을 통해 롱테일 법칙이 통하는 사회를 지배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눈 이야기와 날씨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무릇 역사란 어떤 독립적인 사건 하나 하나를 이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前)과 후(後)라는 시간의 연속성, 여기 저기라는 공간의 상관성들이 어우러져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이 이어져 만들어지는 법이지요. 

그 사건들의 기록이 역사라면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의 생각을 사관(史觀)이 되겠습니다. 그 기록을 신, 곧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면서 남긴 것이 신앙고백이고, 그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한 이는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으로 쓰여진 책은 성서가 되겠지요. 

예루살렘 제2성전(제 1성전은 파괴된 솔로몬 성전)의 건축과정과 예루살렘 성의 재건에는  바로 이런 여러 사건들이 어우러져  담겨 있답니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합니다. 

2500년전의 이야기는 오후에 잇겠습니다.

거룩 – 예언자 12

(당신의 천국 – 마흔 한 번 째 이야기)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 이사야 6 : 3, 공동번역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 이사야 9 : 6, 표준 새번역 개정판 

이제 우리는 우리들이 가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 길목에서 또 다른 아주 중요한 이정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기록입니다. 

구약성서의 복음서라고도 불리우는 책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인용한 구약성서의 책들 가운데 제일 많이 인용된 책도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특히 우리들이 나중에 만나게 될 바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잘 읽어 두고  머리 속에 새기고 가야할 책이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환상, 메시아 시대, 메시아 왕국, 메시아의 통치, 주의 종, 야훼의 종, 메시아의 고난, 대속, 심판, 구원, 새 하늘 새 땅 등등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우리들이 이제껏 만났던 아모스, 미가, 호세아 등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책입니다. 직선적이고 직정적인 예언자들과는 달리 때론 환상을 보고,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 심판과 구원을 이야기하면서도 때론 말이 바뀌는 듯한 인상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좀 어려운 책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들이 어렵듯이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사야 이야기, 바울 이야기라고 하면 좀 쉽게 읽히지만 이사야 신학, 바울 신학 그러면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요. 같은 말인데 말입니다.

이제 나중에 만나게 될 “예수의 말씀”과 “바울의 이야기”를 비교하면서 들여다 보면 아주 쉽게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답니다. 

쉬운 말과 어려운 이야기의 차이는 가방의 끈 길이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똑같은 “나무”를 설명하는 말도 어린아이 다르고 어른 다르고요. 어디 그 뿐인가요? 직업에 따라 설명하는 방법도 다를 수 있고, 왈 배운 정도에 따라 또 설명하는 말들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나무는 나무”라는 사실이지요. 

이사야서를 바로 읽는 눈과 생각을 세워야 하는 까닭입니다. 

이사야, 다니엘, 요한계시록 같은 책들을 잘못 읽고 엉뚱한 이해를 하게되면 하나님 나라와는 멀어지게 된답니다. 특히 가짜들과 사기꾼들이  이런 책들을 이용해 제 배를 불리는 수단으로 삼기도 한답니다. 이건 사람들이 살아 온 역사가 증명해 주는 일이지요. 

자! 이제 서론 마치고, 이사야 이야기 서너차례 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의 상황과 그가 예언자로 나서게 된 연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렵니다. 

그가 스스로 야훼에게 사로잡혔던 때가 우시야왕이 죽던 해(이사야 6 :1)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가 예언을 시작했던 시기는 유다왕 아하스 때입니다. 이 때는 아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유다까지 위협하던 시절입니다. 

아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직전에 아하스는 자주냐, 사대냐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일테면 북왕국 이스라엘과 수르(시리아) 등 약소국들이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와 맞서 싸우느냐 아니면 아시리아에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면서 왕국을 유지하느냐에 대한 선택을 해야하느냐 하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던 것이지요. 

아하스왕은 아시리아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드리는 길을 선택합니다. 성서는 아하스가 죄를 지었다고 기록합니다.  이후 남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은 북왕국 이스라엘 처럼 아시리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 직전까지 이르게 됩니다. 

남왕국 유다가 아주 멸망 직전에 있을 때 이사야의 예언 활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궁중과 연관이 있는 많이 배운 자라는 점은 확실한 사실로 여겨집니다. 왕의 조카라는 설도 있고, 왕실의 기록관이었다는 설도 있답니다. 

이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사야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기로 하지요. 그가 예언자로 나서게 된 까닭을 설명하는 것이랍니다. 다른 예언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답니다. 

이사야서 6장을 꼼꼼히 살펴보는 일입니다. 

환상

먼저 이사야의 환상입니다. 환상이 무엇일까요?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유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 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요엘서 2 : 28, 사도행전 2 : 17에서 인용) 

마지막 때가 되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야훼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평시에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예견이라는 것입니다. 

그 환상을 통해 이사야가 본 것은 한마디로 “야훼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는 것입니다. (6 : 3)이 때 ‘거룩’의 뜻은 ‘사람과 다르다는 것’이다. 역사 이래 땅을 밟고 살다 간, 또는 살고 있는,  또 살아 갈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두번 째 주목해야 할 점은 이사야 스스로에게 하는 말입니다. (6 : 5)이건 다른 예언자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막바로 사회, 정치, 종교적인 죄들에 대해 비판과 선언으로 들어가는 데 비해 이사야는 “내 잘못이 크다”는 회개로 부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천사(스랍)가 나타나 이사야의 죄가 사해졌음을 선포합니다.(6 : 7) 

그리고 천사(스랍)들이 사라지고 야훼 하나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습니다. ( 6 : 8) 

“누굴 보낼꼬?” 라고 묻는 야훼께 이사야가 응답합니다. “제가 갑니다”라고요. 

이렇게 이사야 이야기를 시작하고요. “거룩”에 대한 기억 한가지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하여도 “거룩하신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기도 소리를 거의 모든 예배 때마다 듣곤하였답니다. 이즈음엔 조금 듣기 힘든 것 같습니다. 

뭐 제사의식이나 형식은 시대 흐름에 따라 변한다고 하지만, 제가 이즈음 박수치고 양 손 올리고 이른바 찬양 예배 형식에 어울리지 못하는 까닭은 늙어가는 징조이기 때문일겝니다.

독설(毒說) -예언자 10

(당신의 천국 -서른 아홉 번 째 이야기)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할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탐나는 밭이 있으면 빼앗고 탐나는 집을 만나면 제 것으로 만들어 그 집과 함께 임자도 종으로 삼고 밭과 함께 밭 주인도 부려 먹는구나. 나 야훼가 선언한다. 나 이제 이런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 미가 2 :  1- 2, 공동번역 

예언자 미가가 활동했던 시기는 기원전 725년에서 기원전 701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시기이고 남왕국 유다에서는 아하스왕 말기와 히스기야왕 초기에 해당하는 때입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분단된 남북왕국 가운데 북왕국에 대해서는 지난 글들에서 대충 훑어 보았습니다. 

남북이 분단된 기원전 922년 부터 미가 예언자의 활동시기인 유다왕 히스기야까지의 남왕국 이야기를 북왕국과 비교해서 대충 훑고 넘어 가겠습니다.

남왕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열왕기와 역대기 두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 상하에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역사가 함께 기록되어 있고, 역대기 하에는 유다의 역사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통독하다보면 종종 읽기 지루한 곳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전혀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족보이야기가  이어지는 역대기상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역대기에 대한 이야기와 두 개의 다른 사관(史觀) – 신명기 사관과 역대기 사관 –에 대한 이야기는  남왕국 유다 이야기가 끝나고 바벨론 포로 시기 이야기를 할 때 자세히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남왕국과 북왕국의 드러나는 차이점들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북왕국은 열 개의 부족 지파 동맹체였고, 남왕국 유다는 두 개지파 공동체였습니다. 두 개지파라고 하지만 베냐민지파는 소수였고 유다지파 단일체제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유다 지파의 세가 컸습니다. 

북왕국은 시작부터 모든 면에서 새로 출발하는 입장이었고, 남왕국은 다윗과 솔로몬의 위업을 계승하며 시작되었습니다. 

북왕국은 수도를 결정하는 일, 성전과 제단을 만드는 일, 정치 체제를 만드는 일 등 모든 면에서 새로 시작하는 처지였던 반면에 남왕국은 다윗의 성 예루살렘과 솔로몬의 성전과 체제를 그대로 이어받고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북왕국은 여러 부족이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이 넓었고, 남왕국은 북왕국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영토를 갖고 있었습니다. 경작지 곧 수확을 거둘 수 있는 땅의 크기는 북쪽이  남쪽보다 거의 네배나 컷습니다.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스리기가 남쪽이 훨씬 유리했다는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북왕국은 북쪽의 아시리아 등 외세의 침략을 당하기 쉬운 조건에 있었고 남왕국 유다로써는 그런 북왕국이 일종의 방패막이가 되는 좋은 조건에 놓여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북왕국 이스라엘은 왕조가 아홉번이나  바뀌었지만 남왕국은 단일 왕조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북왕국 이백년 역사에서 아홉번이나 왕조가 바뀌었다는 말은 정권이 그만큼 불안정했다는 말입니다. 일테면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왕씨 고려왕조 오 백년, 이조왕조 육 백년 이렇게 이어오는 것처럼 이백년 사이에 이씨, 박씨, 김씨 등 왕조가 아홉번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그에 반해 남왕국 유다는 약 335년의 역사를 단일 왕조로 이어져 내려 왔다는 것이지요. 다윗과 솔로몬의 후예들이 대를 이어 왕통을 이었답니다.특히 남왕국 유다의 제 3대 임금이었던 아사왕 때부터는 후계를 미리 선정하고 그 후계자와 일정기간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공동섭정 정치전통을 세웠답니다. 

한마디로 집안 싸움없이 왕위를 잘 이어가는 전통을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전통이 무너져 가는 시대가 왔습니다. 북의 완충지대였던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남왕국 유다 역시 이제 강력한 외세의 침략 위기에 내몰린 것입니다. 

미가가  예언 활동을 하던 시기는 바로 이런 때였습니다. 

남왕국 유다가 생존하는 방식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들이 충돌하는 시점이었습니다.  이른바 자주(自主)냐 사대(事大)냐 하는 논쟁이 권력의 흐름을 결정하는 시대로 접어든 때였다는 것입니다.

독립문

쉽게 말씀드려서, 강력하고 힘센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고 비위를 맞추어 가며 왕조를 이어갈 것이냐, 나름대로 왕조의 전통을 고수하고 독립 노선을 걸을 것이냐의 싸움이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역사 이래 강대국의 영향 아래 있는  모든 약소국들이 겪어 온 모습입니다. 생존을 위한 투항이나 복종을 할 것인지, 죽음을 마다치 않는 항거나 투쟁을 할 것인지 결단이 필요한 때를 맞아 어느 것이 현명한 선택인지 자신들 끼리 노선 싸움을 벌이는 현상이지요. 

그런데  남왕국 유다나 이미 망한 북왕국 이스라엘이나 그 역사를 고백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유사한 다른 민족이나 국가들에 비해 선택의 기준이 남달랐다는 것을 머리 속에 그려 넣으셔야 합니다. 

바로 그들의 선택의 기준은 야훼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 이제 미가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미가는 예언자 이사야와 같은 시기에 남왕국 유다에서 예언 활동을 한 예언자입니다.

이사야서는 자그마치 66장이나 되는 긴 이야기인데 비해 미가서는 달랑 7장에 그칩니다. 그래 이사야는 대예언서, 대선지서로 부르는 네 개의 이야기 중 하나이고, 미가는 소예언서, 소선지서라고 부르는 열 두 개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그 ‘크다’, ‘작다’의 의미는 기록의 양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가는 이사야 못지않은 아주 중요한 예언자 가운데 한사람이랍니다. 

미가와 이사야는 같은 시대를 산 사람이지만 아주 다른 점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미가는 촌사람, 이사야는 도시사람이었고 

미가는 가난한 사람, 이사야는 있는 사람이었고

미가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이사야는 뼈대있는 가문이었고

미가는 시장 사람이었고 , 이사야는 왕궁 사람이었고

미가가 쓰는 말은 단순하고 직선적이었고, 이사야가 쓰는 말은 고상하고 문학적이었습니다. 

일테면 “내 겨레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며 내 겨레의 살을 뜯는구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바수며 고기를 저미어 남비에 끓이고 살점은 가마솥에 삶아 먹는구나.”라며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쏟아 붓는 미가의 독설(毒說)은 철저히 그의 면목을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미가 이야기 한번 더 이어집니다.

식(食)과 색(色) – 예언자 8

(당신의 천국 – 서른 일곱 번 째 이야기)

“이 땅에는 사랑하는 자도, 신실한 자도 없고 이 하나님을 알아 주는 자 또한 없어 맹세하고도 지키지 않고 살인과 강도질은 꼬리를 물고,  가는 데 마다  간음과 강간이요, 유혈 참극이 그치지 않는다.” – 호세아 4 : 1-2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에집트에서 불러 내었다. 그러나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 중략 –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이 아니다. – 호세아 11 장 전체를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상 공동번역) 

1994년 8월 플레이보이사는 웹사이트를 개설함으로써 웹을 받아들인 최초의 대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 경영진은 <플레이보이>가  웹사이트가 있는 최초의 미국 잡지였다고 말한다.  – Peter Nowak의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Sex, Bombs, and Burgers)에서 

여호수아, 예수, 호세아라는 이름의 공통점은 바로 그 뜻에 있습니다. 모두 “야훼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호세아의 뜻처럼 호세아의  예언 및 메세지는심판과 멸망을 넘어선 구원에 촛점이 있습니다. 

타고나기를 여러 남자들을 거칠 운명이었던 아내 고멜에 대한 호세아의 사랑은 바로 구원하시는 야훼에 닿아있는 것입니다. 

“너는 정부와  놀아난 네 아내를 찾아 가 다시 사랑해 주어라.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에게 마음이 팔려 건포도 과자 따위나 좋아하는데도 이 야훼가 여전히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 주어라.”(호세아 3 : 1) 

끊임없는 야훼 하나님과의 약속과 계약을 위반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직 아내 밖에 모르는 순결남 호세아를 버리고 바람난 고멜과 견주어지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야훼 하나님과 예언 선포자 호세아가 동일시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야훼 신앙에 대한 모습 뿐만 아니라 실제 여로보암 2세 당시의 사회적 실상을 그린 호세아 4장 1-2절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정말 막장으로 치닫는 사회를 보는 듯합니다. 

살인, 강도, 사기, 간음, 강간, 유혈 등등으로 표현되는 사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 또는 이 글을 누군가가 읽고 있는 시점의 그 날 하루 뉴스들을 훑어 본다면 그 사회는 바로 오늘이 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시기에  예언자로서 사명을 삶의 의미로 살았던 아모스는 사회정의에 촛점을 맞추어 예언 선포를 했다면, 호세아는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시대의 모순을 드러낸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아모스는 식욕(食慾)에 촛점을 맞추었고, 호세아는 색욕(色慾)에 촛점을 맞추어 예언을 했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식욕과 색욕은 사람들 일반이  피할 수 없는 욕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입니다. 

불가(佛家) 또는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오욕(五慾) -재욕(財慾), 색욕(色慾), 식욕(食慾), 명예욕(名譽慾), 수면욕(睡眠慾) – 도 따지고 보면 식(재욕,  명예욕, 수면욕)과 색으로 단순화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유가(儒家) 또는 유학(儒學)에서 말하는사단(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 역시 따지고보면 식욕과 색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서 나오는 사람의 본성을 말하는 것일겝니다. 

(신구약 이야기가 끝난 뒤, 교회시대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한인 기독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불교, 유교, 선교, 미신등의 버리지 못한 전통 – 그 버리지 못함이신앙생활에 득일수도 있고, 실일 수도 있는- 들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아무튼 사람들이 피해갈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과 색욕을 통해 죄를 짓는 이스라엘과 사람들을 향해 멸망과 심판,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이루고자하는 야훼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 아모스와 호세아였다는 것이지요. 

아모스는 부익부(잘사는 사람은 더 잘 살고), 빈익빈(못사는 사람들은 더 못사는)이라는사회현상과 권력을 지닌 자와 부림을 당하는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비인간적인 모습들을 향한 심판을 선포했다는 것이고요. 

호세아는 한편으로는 아모스와 동일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개인적으로 문란한 비상식적(이 말은 물론 야훼가 바라시지 않는 의미로)인 생활 태도에 대한 경고가 강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심판은 피해 갈 수는 없지만 끝내 버리지는 않고 안고간다는 야훼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선포는 야훼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의 크기를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식욕과  색욕은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죄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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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식욕과 색욕이야말로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고 사는 기술문명의 원천적인 힘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답니다.   CBS 온라인 뉴스 과학기술 전문기자인 Peter Nowak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전쟁, 포르노, 패스트푸드라는 세 가지 ‘나쁜 것들’이 현대 기술문명을 이끌었다고 말하면서  인간 문명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열쇠라고까지 이야기한답니다. 

음탕하고, 사람을 죽이고, 건강을 해치는 나쁜 것들이 거의 모든 기술을 낳게되는 원인이 된다면서 그런 실례들을 여러가지 들고 있답니다. 

일테면 포르노는 인간이 이성을 잃고 지갑을 여는 산업인데다 소규모 사업체의 특징상 혁신이 빨라, 온라인 카드 결제, 화상 처리, 심지어 장난감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기술이 쓸 만한지 보려면 포르노 업계에서 통하는지 보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Peter Nowak이 말하는 식과 색이 인류 기술문명의 발달에 기여한 점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호세아는 그의 예언과 그의 삶을 통해,  인간으로서 한계 곧 식욕과 색욕으로 어쩔 수 없이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들의 욕심보다 크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곧 다가올 멸망과 심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는 북왕국 이스라엘은 결국 기원전 721년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그 때의 일을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답니다. 

“이스라엘의 열 지파가 유대 밖으로 옮겨진 것은 선조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한 지 947년, 여호수아가  그들의 지도자가 된 지는 800년, 다윗의 손자 르호보암에게서 떠나 여로보암을 왕으로 섬기기 시작한 지는 240년 7새월 7일 만의 일이었다. 이런 비극이 이스라엘인들에게 닥친 것은 그들이 악을 버리지 않으면 이런 벌을 받을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율법을 범한 때문이었다.” – 유대고대사 9권 14장 

이제 남왕국 유대의 예언자들과 유대 멸망까지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