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걸으려 두어 시간 길을 달렸다. 한때 뻔질나게 달렸던 길이다. 신문을 한답시고 뉴욕, 필라, 볼티모어, 워싱턴을 무던히도 돌아다녔었다. 북쪽 길인 뉴욕, 필라는 지금도 여전히 오가곤 하지만 남쪽인 볼티모어나 워싱턴 쪽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버지니아 쪽 나들이는 거의 십여 년 만이다.
낯익은 표지판 지명들과 함께 떠오르는 많은 얼굴들로 십 수 년 전 세월이 나와 함께 달렸다.
생각할수록 낯 뜨거운 내 치기(稚氣)였다. 이민(移民)과 한반도 그리고 통일과 평화를 운운하며 다녔던 길이었다. 내 치기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다. 다만 그 길을 쉽게 접을 수 밖에 없었던 내 한계에 대한 부끄러움은 여전하기에 분명 치기(稚氣)였다.
옛 생각으로 두어 시간 달려 도착한 곳, 버지니아 Potomac 강변 Great Falls 국립공원이다.
풍광(風光)은 이름처럼 대단했다. 그러나 정작 나를 매료시킨 것은 길이었다.
바위 길, 숲길, 오솔길, 자갈길, 모랫길, 돌길 등 걷는 맛이 정말 쏠쏠한 곳이었다. 바위 길을 걷다 문득 휘어잡은 나무가지가 그리 반들거릴 수가 없었다. 나무는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손을 빌려 주었을까?
그리고 마주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숨쉬는 생명들에게 눈인사 건네며 걷는 길에서 느낀 즐거움이라니!
삶은 계란, 사과 몇 쪽, 포도 몇 알과 빵 한 쪽… 그 달콤함을 만끽한 길 걷기였다.
숲길로 들어서서 땀 닦으며 벗은 모자, 평소 모자를 써 본 적 없는 내가 아침에 집을 나서며 옷장에서 눈에 띄어 집어 든 것인데,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들은 모자의 내력. – 이젠 장성해 서른을 바라보는 처 조카딸 아이가 초등학교 때 잠시 내 집에 머무를 때 쓰던 모자라고…. 무릇 모든 것에 연(緣)이 없는 것은 없을 터이니.
돌아오는 길, 일요일 오후 교통 체증은 두 시간 거리를 세 시간으로 늘여 놓았지만 그 길에서 되짚어 본 생각 하나. 사람 살이는 때론 정말 더디지만 결국 옳은(또는 신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뭐 내 믿음 같은 거.
딱히 통일 평화 운운 하지 않더라도 어디서나 그저 그런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
오늘, 되돌아 부끄럽지만 부끄럽지 않은 길을 걷게 해 준 이길영 선생에게 감사를…
***때론 아내가 동행하지 않는 길이 편할 때도 있다. ‘더불어 함께’란 ‘홀로’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 서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