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GO) –기적 8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35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 (마가  1 : 44)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마가 2 : 11) 

주께서 자비를 베풀어 너에게 얼마나 큰 일을 해 주셨는지 집에 가서 가족에게 알려라.(마가 5 : 19)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마가 5 : 34) 

예수께서는 “저 마을로는 돌아 가지 말아라” 하시며 그를 집으로 보내셨다. (마가 8 : 26)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마가 10 : 52)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셨다. (누가  7 : 15)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누가 17 : 19)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가거라.(요한 5 : 9)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 왔다.(요한 9 : 7)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7 : 44) 

영어와 한국어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언어 학습에 있어 이런 차이점들을 인정하고 그 차이들을 그대로 받아드리는(외우는) 방법이 학습효과를 높이기도 합니다. 

우리말 “오다”와 “가다”인 영어의 “come”과 “go”의 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come

제 직업은 세탁업이지요.  세탁소에 손님이 들어옵니다. 그 순간 카운터는 가게 뒤에서 일을 보고 있습니다. 그 때 카운터는 손님을 향해 “I’m coming.”하면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카운터로 움직입니다. 

이 때 “I’m coming.”을 “내가 옵니다.”라고 하지 않지요. “제가 갑니다.”가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나고 자란 제 두 아이들은 비교적 한국말을 잘 하는 축에 속합니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두나라 말을 구사하는데 불편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 모두 종종 헷갈리게 말하는 것 가운데 하나 역시 바로  이 “오다”와 “가다”입니다. 

집에 오기로 한 시간에 도착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묻습니다. “어디냐?, 언제오냐?” 그러면 아이들의 대답이지요. “지금 올께” 또는 “지금 오고 있어.” 바로 “I’m coming”을 한국식으로 표현한 말이랍니다. 

뭐 이 정도야 서로 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수를 믿는 신앙에 있어서 이 come과 go, 곧 오다와 가다를 헷갈리면 정말 잘못된 신앙에 빠질 수가 있답니다. 

예수는 치유기적을 행한 이후  치료받은 이들을 향해 “가라”로 명하셨습니다. 어디로 가라고 했습니까? 바로 가족에게로 돌아가라. 네가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네 병을 고쳐 주었으니 나를 따르라”라고 하거나, “내가 네 병을 고쳐 주었으니 세상 끝까지 돌아 다니면서 이를 알려라.”라고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병을 고치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를 찾아갔던 사람들이나, 예수가 찾아갔던 사람들의 본래 소망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남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에서 떳떳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시대 당시의 나병환자를 비롯하여 병자나 신체불구자들은 사회로 부터 차단되어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는 “가라”, “네가 그렇게 원했던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깊게 살펴볼 지점이 하나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실로암못에서 눈 먼 사람을  고쳐주는 예수의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눈이 뜨여 세상을 다시 보게된 전에 소경이었던 사람을 향해 예수는 “가라”고 명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간 이 눈이 다시 뜨인 사람에 대한 후기가 이어집니다.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요한 9 : 34) – 눈을 뜬 전에 소경었던 사람을 맞이한 고향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를 다시 내 쫓아 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병을 고쳐주고 “가라”고 명했습니다만, 그가 “가는” 곳의 환경을 바꾸는 기적을 행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길게 보면 “환경이 바뀐 기적들”을 확인할 수가 있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만든 이들은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이 예수의 기적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이해한답니다. 

이에 관련된 글 하나 함께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몇 해전에 쓴 것인데  제 이해를 함께 하시는데 도움이 좀 될 것입니다.

가라(GO)! – go and sin no more (링크)

죄인 – 기적 7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4 

“최근 일주일 사이 네 가정이 생활고와 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버렸다. 이들은 행복했던 서민층 가정이었으나 병마와 실직으로 졸지에 ‘틈새 빈곤층’이 됐다. 그중 대부분은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이 아니어서 일반적인 정부 지원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최근 신설된 복지제도에 따라 긴급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도 이를 배제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 2014년 3월 5일자 동아일보 인터넷판 사회면 

“추정소득 180만원 ‘송파 세 모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없었다.” 

“정부는 국민들의 복지 체감을 높이겠다며 오는 10월부터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전면 개편하기로 했다. 최저생계비를 없애고 별도의 소득 기준으로 생계·주거·교육급여를 따로 지급하는 맞춤형 급여제도를 설계했다. 서울 송파구의 세 모녀가 살아있었다면 새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 제도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까다로운 조건들 탓에 여전히 사각지대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 2014년 3월 5일자 국민일보 인터넷판 사회면 

“그 때 어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고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계신 바로 위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요에 눕힌 채 예수 앞에 달아 내려 보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중얼거렸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 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네 요를 걷어 가지고 걸어 가거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중풍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곧 요를 걷어 가지고 나갔다. 그러자 모두들 몹시 놀라서 “이런 일은 정말 처음 보는 일이다”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 마가복음 2 : 3 – 12 

“예수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이란, 그들이 처한 물질적, 도덕적,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상류층의 사람들에 의해 경멸받고 벌받고 경원시 당하면서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사람들 모두를 말한다. 가령 하급 재정관리, 즉 강제로 로마 수비군에 협력했던 세리를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수준으로인해 양심적으로 율법을 준수할 수 없는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 불리웠던 사람들 모두를 말한다. ‘죄인’이라는 말은 종교적으로 세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결과 공동의 도덕을 수립했던 자들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붙여준 상표임이 분명하다.” – Georges Casalis의 가난한 자들의 복음에서 

1970년대 까지만해도 동아일보 이름값 좀 했었답니다. 한겨레신문 초대사장이신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선생도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이시지요. 

송선생님께서 동아일보를 그만 두시고 한국 현대사에 대한 연구에 정열을 쏟으시던 무렵에 하셨던 말씀이랍니다. 

“일제시대에 자란 나는 경성제국대학이 꿈이었다. 해방이 되서 서울대학으로 바뀐 경성제국대학 법대에 입학하였다. 언론에 관심이 있어 그 길로 들어섰고, 조선 동아 등의 기자생활을 하면서 사회 엘리트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누리며 큰 고민없이 편집국장 자리까지 갔었다. 1975년 동아투위 사태이후 신문사를 그만 두고 한국 현대사를 다시 돌아보면서 내가 누려온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서울대를 다니고 사회 엘리트로써 승승장구 하며 살아오는 동안 내 동족들이 앓고 있던 터무니 없는 아픔을 외면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아니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그 동족의 아픔을 거름 삼아 내가 살아 온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송건호선생님이 일한던 곳, 동아일보의 오늘자 신문 기사를 보면서 “참 망가져도 더럽게 망가졌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든 책임을 죽은 이에게 돌리는 뻔뻔스런 모습은 비단 동아일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겝니다. 

삶의 모든 궁극의 목표나 가치 판단의 사회적 기준이 “돈”이 된 일은 박정희시대의 “잘 살아 보세” 깃발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다만 “더불어 함께 잘살아 보는” 고민과  과정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잠시 그런 과정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민주정부 10년이 바로 그런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옳고 그름도 문제도 아닙니다. 역사의 발전과정은 분명 “사회 공동체가 더불어 함께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해 전진해 왔고 앞으로도 그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핏값을 치루기도 합니다. 또 어떤 민족은 이미 조상들이 치룬 피값과 오랜 경험을 토대로 토론과 흥정을 통해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솔직히 우리 민족은  이런 “더불어 함께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고민의 역사가 짧습니다. 이런 문제로 피흘려 본 경험도 일천합니다. (사실 이 부분을 이야기하자면 깁니다. 그래 이런 이야기를 제 나이에 맞게 옛날 화롯가에서 이야기해 주시던 할아버지 흉내내며 해 보고 싶은 마음으로 “예수쟁이, 예수로 세상보기”라는 팟캐스트를 시작했는데… 이런 저런 일들로 이즈음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답니다.) 

아무튼 “돈” 뿐만 아니라 “실리”, “권력” 등을 손에 쥐는 것만이 “승리”하는 것이라는 이즈음 잘 쓰는 “공학적” 사고들을 성서적 관점, 예수의 기적행위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지탄받아 마땅한 것들입니다. 

이런 모습들은 이즈음 한국의 정치세력이나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 또는 사회의 아젠다를 만들고 이끄는 언론과 경제주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일겝니다. 

그래 아파야합니다. 이 세대를 한글을 사용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이 말입니다. 특히 성서를 읽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고 아파해야만 합니다. 그게 기독교인의 바른 길입니다. 

신문기사

 

이제 성서로 돌아갑니다. 

예수가 기적을 통해 고쳐준 사람들이 앓고 있던 병이란 당시 사람들에게는 병일 뿐만 아니라 죄였습니다. 

뭐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이즈음은 그런대로 많이 좋아져서 장애우니 장애인이니 하는 말을 쓰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하여도 “병신”이라는 말로 아픈 사람들을 욕보이게 부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예수시대에는 병(문둥병, 맹인, 농아, 앉은뱅이, 광인 등등)은 곧 사회에서 격리되어야먄 하는 죄인이었습니다. 문제는 누가 이런 병에 걸렸느냐는 것입니다. 과중한 세금, 불공평한 나눔은 가난한 이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며 영양실조에서부터 각종 질병 나아가 불구자가 되는 곳으로 밀고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정치적 또는 종교적 지배계층들은 과중한 세금이나 불공평한 나눔 같은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거나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아픈 이들을 향해 죄인이라는  팻말을  걸게하고는 그들을 희생삼아 자기 뱃속을 채웠던 것입니다. 

마치 2014년 오늘날 동아일보와 그 세력처럼 말입니다. 

예수의 치유기적은 바로 “아니다! 지금 아픈 너희는 단연코  죄인이 아니다!”라는 선언이었습니다.“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이웃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사회는 반성서적인 사회입니다. 그 사회에서 입다물고 있는 교회는 예수와는 아무 상관없는 헛것입니다. 

물음 – 기적 6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3 

“생활고 때문에 세 모녀가 사망한 데 이어 30대 주부가 또 극심한 빈곤에 4살배기 아들을 안고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경기 동두천경찰서는 지난 2일 오후 7시 45분쯤 동두천시 상패동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윤모(37·여)씨와 아들(4)이 숨진 채 발견됐다고 3일 밝혔다. 윤씨의 옷에서는 ‘미안하다’는 등의 글씨가 적힌 세금 고지서가 발견됐다.”  – 2014. 3. 3. 서울신문 인터넷판 사회면 기사 

“서울에 살던 세 모녀가 지난 2월 26일 저녁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대로 12년 전 아버지가 떠난 뒤 이들 모녀는 어머니의 식당 노동과 작은 딸의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왔다. 35세, 32세였던 두 딸은 어려운 생활과 지병으로 신용 불량자가 되어 있었고, 병원비 부담 때문에 치료조차 포기하고 지내왔다고 한다. 60세 어머니는 지난 1월 팔을 다친 뒤 식당 일조차 하지 못해왔다. 이런 상황에 빠져 있었지만 그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최후의 안전망,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략 -고인이 된 세 모녀가 남기고 간 짧은 글에는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등장했다. 가난 때문에 생명을 포기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 이토록 강한 염치였다는 것이 우리 사회를 여러 번 울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죄송해야 할 것은 세 모녀를 방치한 이 나라의 복지와 사회일 것이다.”  –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2014년 3월 3일자 김윤영컬럼 중 

“기적신앙은 무엇보다도 낮은 계층에 널리 퍼져 있었고, 주후 3세기 동안에 비로소 상류층에 까지 비교적 널리 침투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주는 몇가지 간접적인 증거들이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도혈루증 앓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 여인은 열 두해동안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모든 소유를 헛되이 없앤 후에 예수에게로 왔다. 이전의 사회경제적인 신분(status)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그녀는 비합리적인 기적신앙에 매달린다. 돈이 있을 때 의사에게 갈 수 있었고, 돈이 없을 때 생명을 다루는 다른 방책에 의존했다.” – 게르트 타이센(Gerd Theisen)의 공관복음서의 기적이야기에서 

“ 예루살렘 양의 문 곁에는 히브리말로 베짜타라는 못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행각 다섯이 서 있었다.  이 행각에는 소경과 절름발이와 중풍병자 등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는데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 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먼저 못에 들어 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삼십 팔 년이나 앓고 있는 병자도 있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이 거기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아주 오래된 병자라는 것을 아시고는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병자는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읍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 갑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가거라” 하시자 그 사람은 어느새 병이 나아서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갔다.” – 요한복음 5 : 2 – 9 

세모녀

그들은 왜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등졌을까요? 살아있는 자들 가운데 그들이 남긴 그 미안함과 죄송함을 받을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염치없는 사회에게 던진 이들의 염치있는 마지막 인사를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성서의 눈높이로 고민해야 마땅한 신앙인들은 이런 사회적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그런 질문들을 안고 예수가 행한 기적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을 찾아가 보도록 합니다. 

예수가  행한 기적으로 치유를 받은 사람들이 앓았던 병명들을 보면 이들의 당시 삶을 알 수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들린자, 혈루증 환자, 눈 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병들은 당시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생긴 병이기 때문에 이런 환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었습니다. 반사회적인 병인 동시에 종교적으로 보호를 받기는 커녕 종교의 이름으로 철저히 버려질 수 밖에 없는 병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병이 아니라 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철저히 버림받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자격과 환경을 박탈당한 사람들이므로 경제적은 측면으로 보자면 사회의 가장 밑바닥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더우기 문둥병자에 이르면 주검 곧 시체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는 환자들이었습니다. 문둥병을 고쳤다는 말은 거의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예수가 치유 기적을 행해 고쳐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가 치유기적을 행한 사람들 가운데 그 사람의 직업이나 신분을 밟힌 기록은 한번 뿐입니다. 바로 회당장 야이로입니다.(마가복음 5 : 22 – 23,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회당장 야이로를 제외한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의 면면들을 보면, 여인들, 아이들, 거지, 종 등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 뿐입니다. 

예수 기적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곳이 없는 사람들, 희망을 잃은 사람들, 정상적인 보통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조차 막힌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기 직전의 사람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오늘날 “염치있는” 마지막 인사말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잃고 사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에게  스스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나 단체들을 향해 반사회적(때로는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몰아세우는 “염치없는” 이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오늘도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제 예수가 무엇때문에 왜 치유 기적을 행했었는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주인공 – 기적 5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2 

그 때 더러운 악령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 소리로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읍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그래서 예수께서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꾸짖으시자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 갔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졌다. – 마가복음 1 : 23- 28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이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요한복음 20 : 30 – 31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가 갈릴리로 나아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주로 한 일들은 치유의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귀신들린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문둥병, 열병, 중풍 등등의 각종 질병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함으로써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마가 1 :28)”졌거나,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 들(마가 1 : 33)”었고,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께 모여 들었(마가 1 : 45)”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 갈 수가 없었(마가 2 : 4)”거니와,  “예수께서는 밀어닥치는 군중을 피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 척을 준비하라고 이르(마가 3 : 9)”시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몰려든 첫 번째 이유가 병고침의 기적을 행한데 있었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에 이르면 미처 기록하지 못한 기적들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런 치유의 기적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까닭을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바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 : 31)”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예수의 치유기적 사건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가 행한 권능으로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실로 믿고 있듯이,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 전까지만해도 이런 기적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만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당연하고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했었습니다.

Pool at Bethesda

그런데 약 삼백 여년 전부터 성서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하면서 이런 기적 이야기들을 전하는 자료들과 성서를 분석하기 시작하였고, 그런 연구를 통해 예수의 기적이야기들은 다큐멘타리 같은 기록 영화같은 것이 아니고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겨지기까지 여러 전승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테면 똑같은 예수의 기적이야기라 할지라도 마태가 전하는 이야기와 마가의 이야기 그리고 누가가 기록한 이야기들 사이에 서로 다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지요. 

“그런데 군중 속에는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어 따라 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 서서 군중을 둘러 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 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둘러 보시며 옷에 손을 댄 여자를 찾으셨다.  그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 마가복음 5 : 25 -34 

“마침 그 때에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어떤 여자가 뒤로 와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돌아 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 여자는 대뜸 병이 나았다.” – 마태복음 9 : 20 -22 

혈루병자를 고치시는 예수의 기적을 전하는 마가와 마태와의 차이입니다. 기적사건을 전하는 이런 마태, 마가, 누가의 차이점들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어떤 모습이 가장 예수가 했던 원형에 가까운 것인가를 연구하는 일이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약 200백년간에 걸친 이런 연구들을 한군데 모아 집대성한 사람은 아프리카의 성인 슈바이쳐입니다. 그의 책 “ 예수의 생애 연구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라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이 책에서 성서학자들이 예수의 기적을 바라보는 여러가지 유형들과 그 연구의 변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에서 학문적인 연구 결과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으로, 이런 연구들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소개드리는 것으로 줄이고요, 아주 획일적으로 이렇다하는 결론은 아니지만 대충 예수의 기적이야기들의 변천에 대한 큰 틀에서의 같은 생각들이 있다는 점만 말씀드립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한 내용들을 보면 기적이야기의 주도권이 예수에게 있고,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부를 때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사용되고, 고침을 받은 사람의 선교 이야기가 이어지고, 고침받은 사람의 신앙이 강조되는 것들 <아라이 사사꾸(荒井 獻)의 예수의 행태> 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예수의 기적이야기로 가까이 시간을 돌려보면 예수는 누군가에게 요청을 받고 기적을 행하며 기적행위의 주도권을 쥐지도 않고, 메시아나 그리스도의 호칭도 없습니다. 기적 그 자체보다는 기적을 통해 고침을 받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더 크고, 고침을 받은 자의 신앙이 전제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적을 통해 치유받은 사람들이 원래 병들기 전에 그들이 있던 곳, 곧 그들의 가족이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예수의 기적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곧 기적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만나 보도록하겠습니다. 이들을 만나보는 일이야말로 에수의 기적 이야기를 바로 이해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바타 – 기적 4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1 

제자들은 마침 역풍을 만나 배를 젖느라고 몹시 애를 쓰고 있었다.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 쪽으로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하였다. 그것은 새벽 네시쯤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 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질렀다. 그를 보고 모두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곧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하시며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 마가복음 6 : 48 -51 

어떤 보도를 실제로 일어난 일로 믿는다고 해서 역사적인 진실이 될 수도 없다.예를 들어 죠지 워싱톤이 실제로 은화 1달러를 포토맥 강 너머로 던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믿는 쪽을 택하겠다.  하지만 이런 나의 믿음은 실제로 그가 그랬는가,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없었는가의 묹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예수가 실제로 이런 일들을 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질문도 그와 같다. 그가 그렇게 했다고 믿는 것은 실제로 그가 그렇게 했는가의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역사적인 질문을 신념이나 믿음으로 풀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 예수의 귀신축출행위나 치유행위를 제외한 권세있는 다른 행동들은 “역사적 미결 보도”로 남을 수 밖에 없다. 

비록 예수전기의 일부분인 이 이야기들이 불확실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예수에 대한 교회의 이야기 일부분으로서 이런 이야기들이 지닌 의미는 명확하다. 그 시대의 연관성을 가지고 비유적 표현들을 풍부하게 사용한 이야기들은 초대교회가 경험한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여전히 –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성도들을 위험과 악에서 구하시며 광야에서 먹여 주시고 죽움에서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분임을 확실하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의 ‘예수 새로보기(Jesus! A New Vision)’에서(김기석 번역)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낳은 예수 이야기,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마태 3:16)” 내려 앉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 :17)”라는 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 물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 갑자기 모습이 변하여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마침내 예수가 부활해서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와 함께 길을 걷는 이야기 등을 읽거나 듣는 당신의 느낌은 어떤 것인지요?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났거나 행해졌던 기적 이야기들은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답니다. 첫째는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 주는 기적들입니다. 곧 치유의 기적 유형입니다. 두번 째는 풍랑이 일어 사나운 바다를 잔잔케 한다거나 베테랑 어부들도 빈 손일 정도로 조황이 안좋은 환경에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낚게 했다는 이야기, 오천명을 먹인 이야기 등 초자연적인 기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제가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든 여러 예들처럼 하나님 곧 신이 나타나는 기적입니다. 신의 현현(顯現) 기적 유형입니다. 영어로는Epiphany라고 하는 신의 현현은 신이 직접 나타나 사람들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 나타나는 현상을 발합니다. Incarnation(화신化身)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예수 그 자체가 신의 현현이라는 말할 때 이 말을 사용하곤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꼭 알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incarnation

아바타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었지요. 흥행기록을 세운 3D 영화로 유명한 영화 말입니다. 바로 그 아바타(Avatar)라는 말이 힌두교에서 쓰는 아바타라(Avatāra)의 영어식 표현인데요, 그 뜻이 신의 화신(神의 化身, incarnation of God)이랍니다. 신이 사람세계에 드러난 모습을 아바타라고 한다는 말이지요. 

힌두교에서는  사람들이  진리를 잊고  악과 부정(不正)에 빠져있을 때,  진리를 가르쳐 악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고 정의를 회복하는 일을 하기 위해 신(브라만)의 대리자로서 아바타가 나타난다고 한답니다. 

그런데 이런 신의 화신은 불교에서도 나타난답니다. 이른바 불교의 삼신설(三身說)이 그것입니다. 삼신이란 첫째  법신(法身)  둘째 보신(報身)  셋째가 바로 화신(化身)인데, 화신이란  진리를  이미 깨달은 붓다가  일반 사람(중생) 모습으로 나타나서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는 일을 하는 모습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현현 곧 신이 나타나는 기적은 딱히 예수에게만 나타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비단 예를 든 고등종교 뿐만이 아니라 원시종교에서도 신의 현현 기적 이야기들은 넘쳐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신이 나타나는 기적을 인정하고 믿되, 거기 매몰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적 이야기를 하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랍니다. 

이런 신 현현 기적에 대한 믿음을 신앙의 전제로 삼는 믿음만으로는 참다운 예수의 모습, 그리스도의 모습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만나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이런 기적에 대한 믿음은 신앙의 전제가 아니라 신앙의 깊은 곳에 이르렀을 때 저절로 거저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런 뜻에서 제가 기적이야기를 하면서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것은 바로 첫번 째 기적 유형인 치유기적에 대한 것이랍니다. 

자!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세 가지 기적의 유형들 가운데 두번째,  세번째인 초자연적인 기적과 신의 현현 기적이야기는 이 정도로 접고 치유 기적으로 넘어갑니다.

포용 – 기적 – 2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은 법> – 29 

요한이 예수께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 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읍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말리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 마가복음 9 : 38 – 41 

완전한 환상가(visionary)와 신비가(mystic)는 자신과 같은 환상가에게만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의 영향은 곧 전해진다. 실천적 지혜의 사람은 이 세상일에만 민첩하며, 단지 머리에만 영향을 미칠 뿐 가슴에는 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가슴 깊은 곳에서 회오리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면, 결코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없다. 

신비적 신앙에 실천적 분별력이 동반될 때만, 강력하고 지속적인 결과가 뒤따른다. 나사렛 예수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 또한 그 추종자들을 통해 그 다음세대들에게 끼친 영향이 바로 이런 성격의 것이었다.  – 죠셉 클라우스너(Joseph Klausner)의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에서 

예수의 첫 사역으로 기적을 베풀자 떠돈 소문이 “미쳤다”는 것이었고, 그 소문에 놀라 예수를 찾으러 온  그의 가족들을 향해 “누가 내 가족(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고 되물었던 예수의 모습을 그린 마가복음의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마가복음 3: 31 – 35) 

가족에 대한 예수의 혁명적인 발언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더 과격해집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하셨다. – 누가복음 9 : 59 – 60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누가복음 14 : 26” 

비단 유대인들의 전통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직도 우리들 실생활과 생각을 깊게 지배하고 있는 유교적 전통에서 보자면 거의 인간말종 수준의 선언인 것입니다. 

딱 예수의 말이였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멘’으로 받을 일이 아니라 한번 생각해 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이나 당신 주변의 사람 누군가가, 아니면 당신이 참으로 신실한 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아무개가 만일 제 부모가 죽었는데 거들떠 보지도 않고 하나님 나라 소식을 전한다고  종로거리에 나가 “예수 천당”을 외치고 있다면 그 사람을 제정신 가진 사람으로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니면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며 가족들을 심히 미워해서 전혀 돌보지않고, 자신마저 학대한다면 그게 어디 사람으로서 할 일이겠습니까? 

가족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그야말로 가족에 대한 일반적 생각을 깨부수는 혁명적 선언이자 가히 급진적이었던 것입니다. 

Millais-christ-in-the-house-of-his-parents

그런데 꼼꼼히 다시 예수의 선포를 들여다보면 예수가 그의 선포를 통해 방점을 찍은 가족의 의미는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에 대한 정의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범위를 끝없이 넓혀 확대한 것입니다. 

예수가 말한 가족은 핏줄 곧 혈연관계로 얽힌 관계가 아닌 그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로 영역을 확대한 것입니다. 

먼저 예수가 찾아나섰던 갈릴리 마을의 살았던 사람들, 문둥병자를 비롯한 환자, 눈 멀고 귀먼 장애인들, 여자, 어린이, 사마리아인, 심지어 원수들 까지 예수의 가족이자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비단 그들 뿐만이 아니라 당시 로마인, 헤롯일가, 제사장들, 레위인,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를 비롯하여 부자와 권력자들까지 예수의 가족일수 있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저는 예수의 이러한 가족에 대한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답니다. 예수는 비록 급진적, 혁명적 언사와 선언으로 가족을 정의했지만 그는 누구나 모두가 가족이 될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을 열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가장 적확하게 드러낸  말씀이 바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마가의  기록입니다. 

예수가 말씀하신 가족에 대한 선언을 바로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폭넓고 깊이있게 하나님 나라를 만나고 볼 수 있는 중요한 이정표인 셈입니다. 또한 사랑의 범위를 넓히는 일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비단 신앙적인 판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진보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한반도의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들, 한반도 남과 북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 살던 한민족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면 반드시 곱씹어야할 예수의 가르침이랍니다. 

제 아무리 생각이 급진적이고, 제 잘난 구석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포용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가 행했던 기적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고 구원을 받는 전제가 바로 예수가 선포한 가족의 뜻을 바로 이해하는 일이랍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제대로 받아드리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입니다.

가족 – 기적 1

<하나님 나라=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8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출애굽기 20 :12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누가복음 14 : 26 – 27 

그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를 불러 달라고 사람을 들여 보냈다. 둘러 앉았던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둘러 앉은 사람들을 돌아 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 마가복음 3 : 31-35 

오늘은 시 하나 읽고 시작하지요. 

식구 

사납다 사납다 이런 개 처음 본다는 유기견도 엄마가 데려다가 사흘 밥을 주면 순하다 순한 양이 되었다

시들시들 죽었다 싶어 내다버린 화초도 아버지가 가져다가 사흘 물을 주면 활짝 꽃이 피었다

아무래도 남모르는 비결이 있을 줄 알았는데,

비결은 무슨, 짐승이고 식물이고 끼니 잘 챙겨  먹이면 돼 그러면 다 식구가 되는 겨 

박제영시인의 시집 <식구>에 실린 시랍니다. 그가 바라 본 식구들의 모습들 두어 개 더 보기로 하지요. 

뻘짓 

나가 시방 일흔인디 그기 다 헛으로 묵은 기라 돈 법네 시 씁네 바꺁으로만 사십 년을 나댕겨 부렀잖여 마누레고 자석이고 평생을 생과부로  생고아로 살았응께 타박을 받아도 싼 기라 그라도 남편이라꼬 애비라꼬 쪼까내지 안능 것만도 고맙제 

취한 노시인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는데 어찌나 얼얼하던지요 집에 와서 잠든 아내와 딸을 와락 깨워, 이리 쪽 저리 쪼옥, 뽀뽀를 한참 해대고 나서야 얼얼한 게 조금 풀리더라구요 

거룩한 계보 

식구들 먹다 남은 밥이며 반찬이 아내의 끼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타박도 해보지만 별무소용이다

버리고 하나 사라 얼마 된다고 빤스까지 꿰매 입나 핀잔을 줘도 배시시 웃는데야 더 뭐라 할 수도 없다

지지리 궁상이다 어쩌랴 엄마의 지지리 궁상이 아버지 박봉을 불리고  자식 셋을  키워낸  것이니 어쩌랴 아내의 지지리 궁상이 내 박봉을 불리고 자식들을 키울 것이니

그래서다 고백컨데우리 집 가계 家系는 대를 이은 저 지지리 궁상이  지켜낸  것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해가면서 식구나 가족의 모습들도 많이 변했거니와, 가족이나 식구를 바라보고 느끼는 생각들도 많이 달라져가고 있습니다. 가족이지만 식구는 아닌 경우도 비일비재 하거니와 그 반대의 경우도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회 구성의 결합형태를 게마인샤프트(Gemeinschft)와 게젤샤프트(Gesellshaft)라는 말로 정의한 것은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F. Tönnies)입니다. 

게마인샤프트(Gemeinschft)란 공동사회(Community)라는 말로써  인간의 본질의지(Wesenswille) 곧 타고난 본성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합니다. 가족이라는 최소단위의 사회로부터 시작해서, 지역적으로는 우리 마을, 우리 나라로 커져가고, 정신적으로는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인 박제영이 그려내는 가족의 모습들이야말로  게마인샤프트(Gemeinschft)의 원형일 것입니다.  

반면에 게젤샤프트(Gesellshaft)란 이익사회(Society)라는 말로써 인간의 선택의지(Kürwille) 곧 후천적 욕심에 따라 이루어진 사회를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틀입니다. 바로 이익추구를 위한 계약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이 최우선인 사회입니다. 

퇴니스(F. Tönnies)는 인류의 사회 발전은 공동사회 곧 게마인샤프트에서 이익사회 곧 게젤샤프트로 진행되어 나가는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고독과 소외, 단절 등의 아픔을 겪게 됨으로 이 두 개념을 아우르는 새로운 사회가 도래해야 한다는 전망을 했답니다. 

그리고 작고하신 한국의 리영희선생은 그의 책 ‘대화’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자본주의의 발전원리는 ‘인간의 가치’를 무시하고, 소유의 ‘물신 숭배’ 신앙으로 물적 생산과 낭비와 파괴를 인간 행복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어요. 그 대신 물질적 획득과 소유가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적 요소들은 손상되고 무시되고 파괴되는 위험도 정비례적으로 커집니다. 

자본주의사회 어디서나 그렇고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지요. 법률이나 종교가 아무리 해도 인간의 소유욕을 다스릴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결국 나의 결론은 인간은 물질적 요소로 존재하는 동물이니까 자본주의적 요소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인간화적 결과를 5할 정도의 선에서 인정하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인간성 파괴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게마인샤프트적 사회주의적 요소를 5할 정도 융합하는 방식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체제가 현실적으로 결함과 약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인류사회의 현 발전단계에서는 가장  낫고, 사회주의 없는 미국식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해요. 

유럽의 사회체제는 소련의 체제보다 훨씬 나은데다, 미국사회의 속성인 이기주의·폭력주의·극심한 빈부격차·범죄·타락을 상당한 정도까지 극복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희구해도 이미 먼 옛날에 인류의 사회적 형태로 지나온 ‘게마인샤프트’(물질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인간적 유대가 기본원리인 공동체)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게젤샤프트’(서로의 이해관계의 계산을 매개로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와 적절히 배합된 인간 생활형태를 미래의 상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겠어요. ” – 리영희의 ‘대화’에서 

자!  다시 예수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 뿐만 아니라 당시 예언자나 메시야를 자칭하던 사람들은 자기가 서 있는 곳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세례요한이 광야로 사람들을 불렀던 것처럼 어떤 이는 요단강가로, 어떤 이는 예루살렘성으로 특정한 장소에서 자신들의 소리를 외치며, 때론 기적을 말하며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the poor

스스로 사람들이 있는 곳,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곳으로 나아갑니다. 특히 주목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각종 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이나, 장애자들을 가까이 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핸디캡 곧 장애나 각종 질환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과는 전혀 다른 사회법이 적용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이런 사람들은 격리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보통 일상적 삶을 사는 사람들 곧 자신들의 가족과도 격리된 삶을 살아야했던 사람들입니다. 

일테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받고 새 삶을 살 수 있으니 이곳으로 오라!”고 목청껏 외쳐도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권리가 기본적으로 박탈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 곁으로 나아갔습니다.  핸디캡을 가진 사람들이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간 것입니다. 그리고 각종 기적을 베풉니다. 

그러자 떠돈 소문이 바로 “미친 놈”이었답니다. (마가복음 3 : 21) 

정작 문제가 일어난 것은 그 다음 일이었습니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에 놀란 것은 그의 가족들이었고, 그들은 예수를 찾아 집으로 끌고 올 요량으로 그를 찾아 나섭니다. 

이 때의 일을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를 불러 달라고 사람을 들여 보냈다.  둘러 앉았던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둘러 앉은 사람들을 돌아 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 마가복음 3 : 31 – 35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전통적 신념과 믿음을 뒤집어 엎는 반란이요, 신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미치지 않고 서는 감히 뱉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았던 십계의 제 오계명을 송두리째 뒤엎는 발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기적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