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 : 1181- 1226. 10. 3.)의 이름을 자신의 교황명으로 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방문중입니다.

그의 방미 일정이 워싱톤, 뉴욕, 필라델피아로 이어지는 까닭에 제가 사는 곳 델라웨어에도 교황에 대한 뉴스가 연일 이어지고 있답니다.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가 정말 인간적인 성인이었듯, 그 이름을 딴 프란치스코 교황도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들을 그가 내딛는 곳, 어디서나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이가 제가 사는 곳에서 인근에 있는 필라델피아에 오십니다. 이미 오래 전에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아주 적은 수의 필라델피아 인근에 사는 한인들이 그이의 필라 방문을 맞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답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된 관심인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함께 기억한다는 외침으로 그 이를 맞이하자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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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이 손을 내밀어 맞잡아 주었던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인 세월호 유가족, 실종자 가족들의 신음이 2015년 9월 현재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외쳐보자는 것이랍니다. 이들의 외침에는 다른 아무 까닭이 없답니다. 

단지 약 천년전 사람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가 썻다는 기도문을 이루고자하는 바램뿐이랍니다.

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하신 주님.

제가 위로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위로할 수 있도록

사랑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삭발(削髮)에

2015년 Good Friday를 하루 앞둔 날, 대한민국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삭발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보았습니다.

뻔뻔스러움에 교활함까지 더한 모든 분야의 권력과 금력 앞에서,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삭발뿐이었던 이들의 눈물은 그저 아픔일 뿐입니다.

기독교력으로 Good Friday는 예수가 못박혀 죽은 날입니다. 그리고 사흘 후, 예수는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다는 믿음은 기독교인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삭발은 불교의식일 뿐만 아니라 한때 카톨릭 사제들에게 이어져온 의식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한인들에게 완전히 잊혀진 풍습이기는 하지만, 오랜 유교적 전통속에서 살아온 우리네 조상들에게 삭발은 곧 불효(不孝)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행위였습니다. 바로 살아있되 죽음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행위였습니다.

다만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택하면 삭발이 용인된 것이고, 이 때의 삭발이란 이제까지 괴로움이 넘쳐났던 사바세계의 자신을 죽이고, 이제는더 이상  괴로움이 없는 세계에서 괴로움이 없는 자기를 만나러 가기 위한 마지막 의식이었습니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도대체 한인이라는 공동체의 인자는 무엇일까?”, “3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그것도 대부분이 10대였던 아이들을, 사상최대의 구조작전을 편다는 거짓말로 국민들을 속인채 생수장을 시켜놓고, 일년이 다되도록 도대체 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었는지조차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그 벽앞에서 삭발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의 사진을 보며 읊조려보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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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삭발이 뻔뻔스러움에 교활함까지 더한 권력과 금력의 탐욕을 죽이고 끊는 일의 시작이기를.

그들의 삭발이 죽은듯이 사회적으로 매장된 것 같지만, 결국 사회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시작이기를.

그들의 삭발이 그들이 잃은 사랑하는 이들을 부활케하는 신앙고백이 되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삭발을 되새기고 기억하는 우리 이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기를. >

주일아침, 두편의 시(詩)

뜰에 가을이 밀려든 주일아침입니다.

이 아침도 제 삶이나 세상 소식들은 그저 일상의 연속입니다. 딱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아침에 느끼는 허전함 말입니다.

그렇게 손에 든 옛 시집을 넘기다가 눈에 꽂힌 시 두편입니다.

차마 버리지 못하는 제 믿음을 확인하며, 일상에 대한 감사를 되찾습니다.

팽목항

풀잎이 하나님에게

–       허형만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우리의 이파리를 꺾이지 않게 하시며

당신의 이름을 위해 우리를 지키소서

야훼, 우리 하나님

태풍이 몰아쳐도 뿌리 뽑히지 않게 하시고

들불이 번져 와도 타지 않게 하소서

비록 어둠 속에서도 두 눈 크게 뜨게 하시며

나팔을 높이 불어 쓰러진 동족을 일으키소서

우리의 햇살을 전과 같이 함께하게 하시고

우리의 새들도 처음처럼 돌려보내주소서

짓밟는 자에게 생명의 귀함을 일깨워주시고

낫질하는 자의 낫은 녹슬게 하소서

야훼, 우리 하나님

우리의 땅은 더욱 기름지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은 버러지로부터 보호해주시고

우리의 뿌리는 더욱 깊이 뻗게 하시며

우리의 하늘은 더욱 푸르르게 하소서.

 

 

–       이탄

돌멩이처럼 굴러 있는 그런 것들의

틈에서 사는 평범한 하루

아침이 왔다 가고 저녁이 왔다 가고

더러는 왔다 갔는지 모르게 가고

아직 한번도

내가 부른 아침, 내가 부른 저녁은 없었지만, 이제 아침이나 저녁은 가족 같은 걸.

 

연기가 새어나오는 틈으로 새어나가듯

틈에서 사는 하루

그래도 보이는 하늘은 넓다.

늘 푸르다.

 

돌멩이처럼 사라져 간들

깨끗한 귀 깨끗한 눈으로

틈을 메우며 살려는 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