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 귀환 8

(당신의 천국 – 예순 다섯 번 째 이야기)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백성을 공평 무사하게 다스렸다. 군 총사령관에는 스루야의 아들 요압, 공보대신에는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  사제 일은 아히툽의 아들 사독과 아히멜렉의 아들 에비아달, 비서 일은 스라야,  그렛 외인부대와 벨렛 외인부대의 지휘관에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다윗의 아들들도 사제 일을 보았다. –사무엘하 8 : 15 – 18 

(솔로몬)왕은 요압 대신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에비아달의 자리에 사제 사독을 앉혔다. – 열왕기상 2 : 35 

레위인은 예수아의 일가, 곧 카드미엘과 빈누이와 호다야의 일가 칠십 사 명이었다. – 에스라 2 : 40, 이상 공동번역에서 

그들은 그 동안 경비를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를 드렸으며 바사(페르시아) 왕의 마음을 움직여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율법을 되찾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이들은 하나님께 넘치는 제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에 거주했다. 이들은 귀족정치(aristocracy)에 과두 정치(oligarchy)가 가미된 정부 형태를 취했다. 과두 정치가 가미 되었다는 말은 대제사장이 정부의 수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제 11권 4장에서 

우리들이 찾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중심을 바로 알고 이해하려면 예수가 일하고 말했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현장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일테면 백 이삼 년 전에 한반도에서 ’양천주(養天主) 곧 우리 안의 하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다 목이 잘린 해월 최시형을 바로 이해하려면 당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거니와, 똑같이 ‘아간의 범죄’ 행위를 인용하였지만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을 촉발시켰던 길선주목사의 “내가 아간입니다.”라는 고백과 2013년 그 규모로는 세계적 순위로 꼽히는 순복음교회의 조용기목사가 “나는 아간이 아닙니다.”라는 주장을 펴는 것을 제대로 알려면 당시와 오늘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들과 형편을  잘 이해해야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약 2,500년 전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무너진 솔로몬 성전의 재건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다보면 열 두지파, 대제사장, 제사장, 사제 , 레위 등등의 말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이쯤 한번 생각해 보자구요. 이스라엘의 12 부족을 나타내는 12지파 중 레위 지파는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배를 담당하는 지파였는데 왕국이 망하기 전에 남쪽에 속했을까요? 북쪽에 속했을까요?  남왕국은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  둘이었으까 당연히 북쪽에 속했겠지요. 

남왕국 유다의 전통을 잇는 포로 귀환 후에 역대기 사가들이 생각했을 때 이 레위지파의 위상은 어떠했을까요? 

highpriest

또 한가지 혹시 “사독”이라는 이름 기억나시나요? 

다윗이 왕위에 오르고나서 정권의 요직 개편을 하지요. 사무엘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왕 밑에 최고 권력자는 군 사령관 요압, 공보대신에 여호사밧, 두 명의 사제장에 사독과 에비아달이라는 이름들이 나옵니다. 권력 순위 3 – 4위에 사독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다 솔로몬시대에 이르러 에비아달이 숙청되고 사독이 단독으로 사제장 곧 대제사장 자리를 꿰어찹니다. 

그로부터 남왕국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사독의 후손들이 대제사장과 제사장 자리들을 독차지합니다. 이 말은 바로 성전을 중심으로 한 권력 곧 신권을 대행하는 권력이 사독 가문에 집중되었다는 말입니다. 

왕국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주된 사람들 역시 이 사독가문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레위가문과 이들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었을까요? 북왕국 이스라엘에 속했던 레위 가문들 가운데 북왕국이 망하고 남왕국으로 내려 온 많은 레위 가문 사람들이 있었고요. 주로 이들은 산당이라고 하는 지방에 산재된 야훼 하나님을 기리는 예배처소를 담당했을 것이라고들 추정한답니다.

사독가문의 제사장 그룹들은 예루살렘 중심의 예배를 주창한 것이고, 레위 가문은 후예들은 지방 예배처를 관장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랍니다. 

그런데 유다왕국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이들은 모두 왕 아래에 놓인 계급이었습니다. 

바벨론포로기 이후로부터 하스몬 왕조가 세워지기 전까지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에는 약 400년 이상 왕이 없다고 헀습니다. 

왕이 없는 세상에서 최고의 권력자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사독 가문의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룹들이었답니다. 신권정치를 움켜 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게 독립국가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권정치를 내세우고 권력을 잡은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룹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철저히 친 페르시아 입장에 서서 그들의 정치 군사적 권력 아래 놓이게 된 것이지요. 

솔로몬 제 2성전의 건축은 이런 상황들이 맞물려서 성취된 것입니다. 

사독가문인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룹들, 비록 위축된 형편이었지만 명맥을 유지해 오던 레위지파가 페르시아 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신권정치를 이어간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의 신앙고백은 성전 중심인 예루살렘의 새 날에 대한 기대였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는 그 고백을 축약한 것이고요. 

그로부터 약 오백 년이 흐른 뒤 세상에 오신 예수는 이 역사를 송두리채 뒤집어 엎어 버린답니다. 

이제 구약의 성문서(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애가, 에스더..) 이야기로 넘어 갑니다. 

짧게 살피고 신구약 중간시대 이야기로 넘어 가려고 합니다.

적통(嫡統) – 귀환 7

(당신의 천국 – 예순 네 번 째 이야기)

그 해 칠월 이십 일일, 주께서 예언자 하깨를 시켜 말씀을 내리셨다.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사제와, 그 밖에 살아 남은 모든 백성에게 일러라. ‘이 성전이 예전에는 얼마나 영광스러웠더냐? 너희 가운데 그것을 본 사람이 더러 남아 있으리라. 그런데, 지금 이 성전은 어떠하냐? 너희의 눈에도 이 따위는 있으나 마나 하지 않으냐? 그러나 즈루빠벨아, 힘을 내어라. 나 야훼의 말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사제 여호수아야, 힘을 내어라. 이 땅 모든 백성들아, 힘을 내어라. 그리고 일을 시작하여라. 내가 너희 곁에 있어 주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 학개 2 : 1 – 4 

오후 늦게 일인치 정도의 눈이 내릴 것이라던 일기예보는 빗나갔습니다. 오전부터 펑펑 쏟아지던 눈발이 조금 잦아들었지만 밤 늦게까지 약 6인치 이상의 눈이 내린다는 수정 예보가 나왔습니다. 

눈발이 날리기 전에 교회에 갔었는데 돌아오는 길은 눈길이었습니다. 모처럼 사람의 말로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말씀에 기쁨을 맛보고 돌아 온 주일이었습니다. 

집 앞 드라이브웨이 눈을 치우고  난 뒤 나무가지에 내려 앉은 눈 사진 몇 장 찍어보았답니다. 잦아들던 눈발이 다시 굵어지고 있답니다. 

DSC01575

DSC01574쌓이는 눈위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해오던 이야기를 이어가야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 팔레스타인 이야기 말입니다. 

먼저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당시를 뒤돌아 보려고 합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바벨론에 살다가 예루살렘 땅으로 돌아 온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당시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가 70년을 살았던 유다인들이 모두 돌아 온 것은 아니라는것 쯤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겠거니와 당시의 유적들을 통해 확인할 수도 있는 사실이랍니다. 

아무리 주변 상황이 바뀌었더라도 거기(바벨론) 남아 사는 게 훨씬 나았던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돌아 온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뚜렷한 특징들을 찾아낼 수 있답니다. 한마디로 단정지어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야훼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을 이끌어 나가는 엘리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외골수 믿음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해야 할 최고의 우선 순위는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고 유지하고 이어나갈 증표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파괴된 솔로몬의 성전 재건축이야말로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야훼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건이었고, 스스로들이 생각하는 민족적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은 달랐습니다. 같은 조상의 자손들이고, 야훼 하나님을 똑같이  말하고는 있었지만 현실적인 삶의 모습들을 보면 자신들과는 다른 생활을 하는 사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호히 이를 거부합니다. 사마리아인들과 70년 사이 바뀐, 그 땅의 주인들과 함께 하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바로 “너희와 우리는 다르다.”입니다. 고로 “성전 건축은 우리의 일이지 너희의 일이 아니다.”였습니다. 

이제 사마리아인들과 그 땅에서 여호수아(이 여호수아와 예수아로 불리는 귀환 시대 제사장 여호수아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점 기억하시고요.)이래 사사시대를 거쳐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이어 그 땅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70년 동안 세월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근근히 또는 잘 살면서 그 땅에서 살아 온 사람들입니다. 

어느날 느닷없이 70년 전에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돌아와서 옛 전통을 잇는다며 성전을 세운다는 소리에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네, 우리도 함께 하지”라고 손을 내밀었더니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매몰차게 내민 손을 내칩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뿔 날 일이지요. 더더군다나 땅, 그 가운데 값나가는 땅은 예나 지금이나 한정되어 있는 것이고, 70여년을 누리던 땅도 나누어야 하는 처지에서 본다면 열받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감정 꾹꾹 숨기고, 같은 핏줄이니까하며 손을 내밀었더니 그 손을 내치다니! 돌이킬수록 분이 난 것이지요. 그래서 그 땅에서 계속 살던 사람들이 택한 방법이 정치, 군사적으로 그 땅의 주인인 페르시아 황제에게 “내 편 좀 들어 달라”는 장계를 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자!  이런 이야기들을 이어가는 당시의 주인공들, 당시의 영웅들이 바로 페르시아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여호수아),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이었습니다. 

빠르게 성전터와 토대를 세웠지만 사마리아와 그 땅에 살던 이방인들 및 이방 종교에 물든 이들의 방해 공작 앞에 머뭇거리게 되는 스룹바벨과 예수아 그리고 그들을 향해 “너희야말로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할 영웅이다. 성전 건축에 온 맘과 힘을 다해라.”라는 부추김을 하던 사람들이 학개와 스가랴였습니다. 

이제 당시 그 땅의 정치, 군사적 주인이었던 페르시아 입장이 되어서 그 시대를 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보지못한 엄창난 땅을 지배하게된 페르시아왕 고레스는 점령지를 지속적으로 잘 다스리기 위한 정책으로 점령지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를 이어가도록 허용합니다. 이러한 정책의 혜택을 받은 족속 가운데 하나가 유다족입니다. 그런데 그 고레스황제가 죽고난 뒤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 캄비세스는 고작  7년 동안 황제위에 있다가 후사(후계자)가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기원전 522년에서 기원전 521년 사이 약 일년 동안 페르시아는 극심한  왕위 쟁탈전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 혼란한 권력 다툼의 정세를 뚫고 이겨내 권력을 쟁취한 사람이 바로 다리우스 1세입니다. 

다리우스1세는 왕국의 시조인 고레스의 정책을 이어받는 동시에 지방 변방의 소국들을 이웃한 큰 나라들이 세력을 키우는 것을 막는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정책을 편답니다. 

이런 세가지 서로 다른 상황들이 맞물려 제 2 성전의 건축은 터를 세웠다가 잠시 중단되고  결국은 다시 이어져 완공되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 이 당시의 상황을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고백한 기록들이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서 라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이 완성되면서 새로운 전통이 하나 세워집니다. 바로 대제사장의 적통이 예수시대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왕이 없는 시대, 총독과 대제사장이라는 이원 체제가 자리잡는 시대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대가 이어지면서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오면”이라는 대망이 깊어지고  있었답니다.

복병 – 귀환 5

(당신의 천국 – 예순 두 번 째 이야기)

황제가 내린 회신은 다음과 같았다. “사령관 르훔, 비서 심새는 사마리아를 비롯한 유프라테스 서부지방에 있는 동료 관리들과 함께 평안하기를 빈다.  경들이 보낸 편지 읽는 것을 내가 똑똑히 듣고,   조사를 시켰더니 과연 그 성은 예전부터 반역 음모를 꾸미어 이 황실에 반기를 든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예루살렘에는 일찌기 강한 왕들이 있어 유프라테스 서부지방을 모두 손안에 넣고 조공과 세금과 관세를 거두어 들이곤 하였다.  그러니 내가 다시 지시를 내릴 때까지 성 쌓는 일을 중지시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부디 명심하여 일을 소홀히 다루지 않도록 하여라. 사태가 악화되어 이 황실에 손실을 끼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 에스라 4 : 17 – 22 

내가 마음으로 증오하는 민족이 둘 있는데 세째 번 것은 민족이라 할 수도 없다.  사마리아산에 사는 주민들과 불레셋인들, 그리고 세겜에 사는 어리석은 자들이 그들이다. – 집회서 50 : 25 – 26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성과 솔로몬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고 유다의 마지막왕 시드기야가 처참한 모습으로 바벨론으로 끌려 가면서 유다왕국이 무너졌었지요. 그리고 약 70년 후 바벨론 포로들이 귀환하였지만 나라를 되찾았다거나 왕을 새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페르시아의 식민지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식민지를 거쳐 희랍의 식민지로 이어져 기원전 166년 하스몬왕조가 들어서기까지  약 500년이 넘는 동안 유다인들에게는 “왕”이 없었습니다. 

유다의 역사와 유다인들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점은 우리들이 만나고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나기 위해서도 중요한 내용입니다. 

여전히 페르시아 지배 아래 식민지였던 예루살렘은  페르시아의 총독이 다스리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귀환 이후 약 백 년 뒤인 느헤미야 시대까지 총독은 바벨론에 포로로 있던 유다인들 가운데 선정되어 파송된 듯 합니다.(성서의 기록으로 보아서) 

일제 시대 총독이 일본인이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체제였던 것입니다. 일테면 일본에서 교육받고 일본화된 한국인을 총독으로 세우는 정책을 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세스바살이라는 사람인데(에스라 1장) 그리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아니고요.(이 사람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답니다. 그 가운데는 스룹바벨과 동일인물일 것이라는 추정도 있고요. ) 아무튼 그 다음 등장하는 총독인 스룹바벨(즈루빠벨)이라는 인물에 좀 주목할 필요가 있답니다. 

식민지를 관할하는 총독의 임무 가운데 첫째는 본국(지배국)의 이익을 위하고 본국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 스룹바벨은 한 때 유다인들이 메시아로 생각했을 만큼 카리스마가 있었던 사람이랍니다. 예언자 스가랴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등장하게 될 인물입니다. 스룹바벨은 분명 페르시아가 지명해 내린 사람이었습니다. 

자! 총독이 한 사람있습니다. 지배지의 정치 및 군사를 주로 담당했겠지요. 

그 다음에 유다인들을 유다인이게 한 야훼 하나님을 위한 제사를 관장하는 사제 그룹이 있었지요. 이들의 중심은 이미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갔던 사람들에게 있었고, 당연히 귀환 이후에도 그들의 몫이었지요. 

그들 가운데 예수아(여호수아)라는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식민지의 종교를 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 두사람이 귀환 이후 예루살렘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정치, 군사, 종교의 최고 지도자 두 사람이 야훼 하나님께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 두사람이 의기 투합하여 한 일이 바로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의 재건이었습니다.  일을 시작하고 성전의 기초를 놓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곧 새 성전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방해하는 복병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바벨론이 지배하던 시대에 그 땅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을 비롯한 유다의 동족들과 인근의 이방 민족들이었습니다. 

동족인 사마리아인들과 철천지 원수 사이가 되는  계기인 동시에 유다의 정통과 제사장의 정통이 예수시대까지 이어지게 되는 시대가 바로 이 무렵입니다. 

또한 페르시아의 내부 권력 다툼과 권력을 움켜쥐는 승자가 결정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다리우스

그렇게 정통이 세워지고, 권력을 움켜지는 세력이 공고해지기 까지의 수 십년 동안의 혼돈의 시기였고, 불안한 시기였습니다. 마치 세상이 끝날 것 같은 불안함이 사람들을 휘감고 있던 때였던 것입니다. 종말론이 등장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이 깊어지게 된 것이지요.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가 일하던 때였습니다. 

그렇게 솔로몬 성전 재건축의 열망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과 합쳐질 즈음  다리우스라는 페르시아 황제가 등장합니다.

고백 – 귀환 4

(당신의 천국 – 예순 한 번 째 이야기)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 사무엘하 24 : 9 

병적조사한 결과를 다윗에게 보고했다. 칼을 쓸 수 있는 군인이 이스라엘에는 백 십만이 있었고 유다에는 사십 칠만이 있었다.  – 역대상 21 : 5, 공동번역에서 

“하나님이 살아있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가 성서를 바르게 읽을 때는 거짓된 겸손,주저 , 냉정한 마음으로써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읽을 때이다.” – 칼 바르트(Karl Barth)의 성서안에 있는 새로운 세상(The Strange New World within the Bible)에서 

어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신명기 역사가들과 역대기 역사가들의 차이를 아주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은 다윗왕이 시행했던 병적(인구)조사를 시킨 주체에 대한 생각입니다. 

먼저 신명기 역사가의 기록을 보지요.야훼께서 다시 이스라엘에 진노를 내리실 일이 있어 다윗에게 이스라엘과 유다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셨다. – 사무엘하 24 : 1 

다음은 역대기 사가의 기록입니다.사탄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려고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였다. – 역대기상 21 : 1 

야훼 하나님께서 시킨 일이라는 고백과 사탄이 시킨 일이라는 고백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느끼게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또한 인구조사를 하고 난 뒤의 결과도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사가들은 남, 북 합쳐서 130만 명이라고 했고, 역대기 사가들은 남, 북 합쳐 157만으로 기록하고 있답니다. 

이런 차이에 대해 이미 많은 주석가들과 학자들이 여러 의견들을 내 놓았고, 오늘날 이 순간에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수많은 동네 목사님들이 나름대로의 해석과 설명을 이어가고 있지요. 그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비하하는 사람들이나, 신앙의 경전인 성서를 폄훼하려는 사람들이 “이것 봐라! 한 가지 사실 가지고도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성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이고, 기독교 신앙이란 헛된 것이다.”라는 주장의 도구로도 사용되고는 합니다.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옆길로 돌립니다. 

이즈음 한국 뉴스를 보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것이 “창조경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창조경제라는 게 뭔지 잘 모른답니다. 이따금 설명하는 분들의 글을 읽어보아도 제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 이 친구도 모르고 있구나”하는 생각 뿐이랍니다. 더더군다나 이걸 대통령이 심심치 않게 사용을 하시던데, 이 말을 만든 친구가 누군지 몰라도 참 불경하기가 짝이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랍니다. 이왕 만들고 알려 주려면 제대로 잘 알려주어서 사용하시는 나랏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할 일이거늘, 그 말을 쓰실 때마다 사람들로 하여금 “참 딱하네”하는 생각이 들게 해서야 되겠느냐는 말이지요. 

아무튼 그 창조경제라는 소리에 창조과학이라는 말이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창조과학이란 한마디로 성경에 나오는 천지창조부터 모든 이야기들이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하거니와 과학은 성경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생긴 신흥종교 가운데 근본주의 기독교도들이 만든 제7일 안식교의 교인인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라는 이가 쓴 책(새로운 지질학 The New Geology)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답니다. 

제가 여기 미국에서 사반세기 넘게 살아봐서 잘 아는데요, 이 땅에 또라이(乭아이)들 정말 많답니다. 1960대에는 이 창조과학에 빠진 사람들이 꽤 많았고요, 한 때는 창조과학이론으로 학교교육을 시켜야한다는 운동도 있었답니다. 지금은 미국 국립 과학원(United States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이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Creation science is in fact not science.”라고 규정하고 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바꾸어가며 이 운동에 전념하고 있는 미국인들이 지금도 많답니다. 

그런데 또라이들이 여기만 있겠어요. 혹시라도 “미국서 한다더라…”라는 소리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에서도 자칭 과학자, 목사라는 양반들이 한국창조과학회라는 것을 만들어 뭘 한다나하는 소리도 듣는답니다. 

저는 또라이라고 했지만 그 분들이야 그 분들 나름대로 다 신앙적 결단으로 하는 일일 터이니 그 이들 쪽에서 본다면 제가 또라이거나 사탄이겠지요. 

설혹 그네들 말마따나 지구의 나이가 성경의 역사대로 약 팔 천년 전후이고, 천지창조가 과학적으로 증명된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다 기독교인들이 될까요? 종종 신앙을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이들을 보면, 모든 것을 “믿씁니까? 아멘”으로 끝내고마는 단순 복종형 무조건적인 신앙과 서로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이른바 근본주의 기독교 신앙인들)을 제가 비난하거나 비판을 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아니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를 하나님 나라로 만들고, 궁극적으로 그들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간다면 뭐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사회인데요. 물론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 곳들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거나 오늘날 세상을 돌아보아도 수많은 다툼과 전쟁을 유발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무조건적이거나 편협한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종교집단”이라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연재글을 쓰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바로 성서를 하나님 뜻에 맞게 제대로 읽고 이해하자는 뜻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자 구세주임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일이며, 마침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믿음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성서의 이런 서로 다른 고백에 대한 설명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자신의 믿음이요 고백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시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성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로, 사람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과 그 일들을 통해 얻은 사람들의 생각을 기록한 책입니다. 다만 성서가 성서인 까닭은 그 기록에 관여한 사람들과 사용하는 말과 일어난 일들과 그를 통해 얻은 생각들 모두가 야훼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일 안의 일부라는 믿음의 고백을 전재하고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전제로 하고 쓰여진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으로 읽어야하는 책입니다. 

그렇다면 창조과학을 말하는 사람이나 “무조건 믿씁니다. 아멘”하는 사람과 저같이 고백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고백

바로 기록을 남긴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제대로 바라보자는 것이고,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들었거나 본 야훼 하나님의 일하심은 어떤 것이었느냐를 찾아보는 일입니다. 나아가 왜 그들은 그 자리에서 그런 야훼 하나님을 고백하게 되었을까? 왜 야훼 하나님은 그 때 그들에게 그렇게 일하고 계셨을까?라는 물음을 통해 성서가 말하는 해답을 찾는 일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린다면 성서는 사람이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쓰여진 책입니다. 다만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기록된 것이지요. 그 신앙의 기초는 “절대”라는 말은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절대로 “절대”일 수가 없습니다. 

성서에 나타난 서로 다른 기록이란 바로 그 지점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 지점에서 나타난 사람들의 한계에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준답니다. 우리들이 그 당시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그 사실을 볼 수가 있답니다. 

성서 기록의 다름을 그대로 보면서 다르게 기록한 당시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오늘은 이야기가 좀 돌았습니다. 다시 역대기 사가들의 핵심 인물인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성전 재건 및 예루살렘성 개축 이야기를 이어 가겠습니다

시대정신 – 귀환 2

(당신의 천국 – 쉰 아홉 번 째 이야기)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에스라 4 : 1 – 4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을 들으며 여의도 광장을 헤매던 때가 1983년의 일입니다. 당시 저와 아내는 평안도 정주 땅에서 내려 온 이들 가운데 장모의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나 사진이 혹시 있을까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손피켓과 벽보에 나붙은 이름들을 훑고 다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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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또 다른 30년이 흘렀지만 제 장모님은 아직도 북에 남아 있었던 혈육의 소식은 듣지 못하고 있답니다. 당시 20대 중반쯤이었을 청년가수 설운도씨도 이미 50대 중반을 넘겼을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60년이 되는 올해도 그렇게 저물어갑니다. 북진통일에서 평화통일로 평화공존에서 이즈음은 이대로 이렇게 나누어진 채로 죽 살자는 축들도 제법 많다는 이야기들도 들립니다. 

어찌어찌 설혹 통일이 된다고 하여도 해결해야만 하는 어려운 문제들이 이만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념, 언어, 경제체제 및 구조, 종교 등등 하나가 되기에는 고착되어진 다름의 크기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아마 땅의 소유권에 대한 문제도 그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또한 통일이 된다고 하여도 미, 중 ,일, 러 등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정립에 대한 문제도 여전히 숙제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넘어 가야만하는 어려움들이 있더라도 한반도의 통일은 한민족의 소망이어야 하고, 통일 이전 시대를 살아가는 한민족의 시대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년 전에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성을 중심으로 한 유다 땅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바로 우리들이 염려하는 통일 이후의 문제점들을 고스란이 안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시조인 고레스왕은 이전의 제국들인 바벨론과 아시리아와는 아주 다른 점령지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바벨론과 아시리아는 점령지의 모든 지역을 제국화시키는(하나의 권력 아래 온 땅이 똑같이 지배되는) 정책을 폈던 반면에 고레스는 점령지의 피지배 민족이나 국가들이 그들의 고유한 문화적 종교적 생활과 전통을 보장해서 이어나갈 수 있도록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제국이 성립된 초기라는 점도 있었겠지만 페르시아제국은 이전의 바벨론이나 아시리아 제국보다 그 땅이 거의 두 배나 되는 거대한 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레스왕의 명령에 따라 포로지 바벨론을 떠난 세스바살, 스룹바벨, 여호수아 등의 일행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시기는 기원전 529-520년 사이입니다. 이 무렵 말기, 그러니까 기원전 520여년 경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이 학개와 스가랴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를 기록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 온 것은 기원전 445 -433년 무렵의 일입니다. 처음 바벨론 포로 출신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지 약 60 – 70년이 흐른 뒤의 일인 것이지요.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 모두 합쳐보아야 25장 정도되는 짧은 글입니다. 역사 이야기라 읽기도 쉽습니다. 아무 선입관 두지 마시고 그냥 죽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전체 10장으로 이루어진 에스라서에서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이야기는 7장에서야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1-6장) 지나간  6,70년을 돌아보면서 기록한 것이지요. 

다시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볼까요? 이즈음 역사 이야기들 많이 하지요?  일본 식민지 때 이야기, 해방 후의 이야기, 이승만, 박정희 이야기 등등 말입니다. 길어야  70년이고  짧게는 사십년도 지나지 않은 저 쪽 이야기인데요, 오늘날에는 수많은 기록과 사진, 영상 등등의 자료들이 남아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있었던 지난 사실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와 주장들이 넘쳐 나지요. 도대체 누가 정말 옳은 말을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요. 

자! 다시 2500여년 전 팔레스타인으로 가 볼까요. 

기록이라고 해 보았자 별거 없던 시절이고 거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존하여 옛 일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시절이랍니다.  이런 조건에서 일어난 어떤 사실에 대한 이야기가 후세 사람들이 “이것이야말로 그 시대의 진실”이었다고 믿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기록을 남기는 일이었답니다. 

우리들이 지난 이야기에서 사관(史觀)을 알아 본 적이 있습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눈, 또는 역사를 기록하는 시각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사관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에스라는 신명기 사관과는 다른 눈으로 역사를 보고 기록했답니다. 에스라와 같은 시각을 가진 기록자들을 일컬어 역대기 사가(史家)라고 하고, 그들의 사관을 일컬어 역대기 사관이라고 부릅니다. 

이 역대기 사가들에 의해 기록된 책들이 역대기 상 하와 에스라 느헤미야서입니다.

우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과 그들이 도착한 당시 예루살렘과 유다땅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바벨론 포로였던 계층은 왕국이 멸망하기 전에 유다의 상층부에 속한 사람들과 성전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대를 이어 온 사제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은 모세의 법에 통달한 사람이었습니다.(에스라 7 :  1-  5) 

바베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대표성를 드라내는 사람이 바로 에스라입니다.에스라서  2장에 나오는 첫 귀환자들의 명단과 숫자를 보면 42,360명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에스라 6 : 64) 당시의 전통으로 미루어 성인남자들의 수로만 생각하여도 사람의 수는 많지만 당시 유다 전체의 인구에 비해서는 그리 크지 않은 숫자랍니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예루살렘과 유다 땅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 더욱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다인들과 옛북왕국 이스라엘인들, 그리고 주변의 작은 왕국이나 나라 출신들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70여년 전 유다 왕국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 갔던 사람들의 땅은 오래 전 토지개혁으로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소유가 되었고 그들이 경작을 하던 때였습니다. 

아마 돌아 온 이들 가운데는 그 땅의 옛주인들의 자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땅의 소유권 문제가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성서 전체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아서 땅의 소유권 문제보다 더욱 큰 문제는 전통을 잇는 정신의 문제가 이 시대에는 우선했습니다. 

탈애굽이후 가나안 정복, 사사시대, 다윗 솔로몬 시대를 거쳐, 남북 왕국이 멸망하기 까지는 땅의 소유가 구원의 문제로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만 이 때에 이르러서는 정신적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구원의 소중한 가치로 여겨지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 중심이 예루살렘이었고, 솔로몬의 성전이었습니다. 역대기 사가들이 바라 본 유다의 역사입니다.  그들의 생각을 좀 더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전제(前提) – 귀환 1

(당신의 천국 – 쉰 여덟 번 째 이야기)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에스라 1 : 1 – 2, 공동번역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아시아 전 지역에 이같은 방을 붙이도록 만드셨다. “고레스 왕이 이같이 선포하노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인간 세계의 왕으로 삼으셨는데, 나는 그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하나님인 줄 믿고 있노라. 그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내 이름을 예언하신 것을 볼 때 이는 매우 분명하다. 따라서 나는 유대 땅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어 드리고 싶노라.” –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11권 1장에서 

서기 1636년  12월 중순의 일이었습니다. 오늘이 12월2일이니 지금으로부터 얼추 만 377년 전의 일입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이끄는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한양을 향해 밀려오자 조선왕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하던 때입니다. 그리고 한 달 보름이 지난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 항복을 주도한 이른바 주화파들의 주장에 따라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지금의 서울 잠실 석촌호수 부근)로 향합니다. 

도19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청 태종 앞에서 조선왕 인조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 큰 절 세 번을 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라는 항복의식을 행합니다.  야사(野史)는 이 날 인조의 이마에 피가 홍건히 고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이를 일컬어 삼전도의 치욕이라고 합니다. 

이 항복 이후 조선인으로 청나라에 끌려간 사람들의 수는 대략 17만 명이 웃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역사가 한반도에서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뒤 당나라에, 고려 시절에는 몽고족의 원나라에, 아주 후대에 이르러는 일본에 많은 이들이 끌려 간 역사가 있답니다. 

아무튼  삼전도의 치욕 이후 10년이 지나서 끌려 갔던 이들 가운데 약  5만 명이 고향 땅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그 가운데 약 2만여명이 일년 안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왜냐고요?  돌아 온 이들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는데 그들을 향해 조선 땅에 남아 있던 고향사람들이 붙여 준 별명 때문이었답니다. 바로 “환향녀(還鄕女)” 곧  “화냥년”이라는 별명 때문이었지요. 끌려가 몸을 더럽힌 여자라는 손가락질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돌아 온 부인들을 버리는 이혼이 잇달자 조정에서는 이혼이 옳다 그르다 싸움으로 해가 뜨고 저무는 일까지 벌어진답니다. 

아무튼 자살하는 여인들이 잇다르자 왕이 명을 내립니다. 회절강(回節江) 에 가서 목욕을 하는 모든 여인들은 깨끗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명이랍니다. 한양과 경기도 출신은  한강에서, 강원도는 소양강에서, 경상도는 낙동강에서, 충청도는 금강에서, 전라도는 영산강에서, 황해도는 예성강에서, 평안도는 대동강에서 목욕을 하면 절개를 지킨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었답니다. 

혹시 이런 사실들이 진짜일까? 너무 슬픈 이야기다!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정말 슬픈 것은 그런 역사를  잊고 사는 것이 슬픈 일이랍니다.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유다민족들의 바벨론 포로 후기의 이야기들을 잇기 전에 나와 같은 말을 썻던(물론 오늘날과 같은 말은 아니더라도), 내 조상들의 이야기 또는 나는 모르지만 내 안의 습관이나 전통이 되어 흐르고 있는 선조들의 경험을 한번쯤 생각해 보자는 뜻으로 들추어 본 우리들 조상들이 살아온 삶의 한 조각이었답니다. 

신바벨론이 중동 지방을 경영하던 시대는 짧았습니다. 바벨론 영향아래 있던 메대의 한 부족왕이었던 고레스가 메대의 전 지역과 파사(바사, 페르시아) 지역을 통합시킨 때는 기원전 549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십년 뒤 고레스는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중동의 새로운 강자로 등극합니다. 바로 페르시아 제국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 거대한 제국은 약 200년 뒤인 기원전 333년에 희랍의 알랙산더 대제에게 무릎을 꿇기까지 그 지역의 주인이 됩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곧 가나안 땅은 페르시아, 그리스, 시리아 등을 거쳐 로마의 식민지 역사를 이어갑니다. 기원전 140년에서 기원전 63년까지 약 80년 동안 유대 민족의 왕국이었던 하스몬 왕조 시대를 빼고는 그런 역사로 이어져 내려오다 세례요한의 소리가 들리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조금 지루하지만 우리들이가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길이 제대로 된 여정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역사 이야기랍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했을 때,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나 그 선포를 들은 갈릴리 사람들이나, 후에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던 바울이나 모두가 이런 역사적 경험과 전통을 이어받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일테면 “떡을 나누다”라는 말과 “빵을 나누다”라는 말과 “밥을 나누다”라는 말을 이해하는 한국인들의 느낌은 다르답니다. 그 느낌의 다름을 잘 알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이 살아오면서 겪는 이야기들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지요. 

유다인들이 바벨론 포로기를 끝내고 예루살렘 땅으로 돌아오던 무렵부터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들은 역대기 상하 뒤에 나오는 에스라, 느헤미야서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의 이야기를 읽기 전에 먼저 우리들이 들여다 보아야 하는 그 당시의 상황들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이런 성서의 기록들이 쓰여졌고, 거기에 담긴 신앙적 고백들은 어떤 것들이 있고, 그 고백들은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는데 어떤 해답을 주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입니다. 

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다인들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었고, 유다왕국이 망할 당시 그 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유다 땅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이집트나 인근의 다른 나라로 피난 곧 이민 또는 이산되어 간 유다인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끄려가던 기원전 598년부터 첫 귀환이 있던 기원전 538년까지 일흔 해가 지났습니다. 지금처럼 수명이 길지 않았던 시절의 70년이면 전혀 다른 세대들이 주인공이 된 세상입니다. 

유대 땅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나 바벨론 포로였던 사람들이나 이집트 등 주변 다른 국가로 이주했던 사람들에게나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 시간이 흐른 뒤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엄밀한 뜻으로 보면 포로 귀환시대라는 말은 바벨론 포로였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유다 땅에서 그대로 살았던 사람들 입장 다르고, 바벨론에서 돌아 온 사람들 입장 다르고, 이집트 등 다른 나라 땅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 입장 다르고요. 그런데 그들 모두가 유다인들이었다는 것이지요. 

당연히 처한 입장에 따라 생각들이 달랐겠지요. 

이런 분위기를 전제하고 이제 에스라 이야기로 넘어가 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