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을 함께 고민하며 살아온 벗의 이야기 – 1

Thanksgiving day 아침입니다.

모처럼 아이들도 집으로 오고, 온가족이 모이는 날입니다. 아내와 함께 아침 일찍부터 수선을 피웁니다. 칠면조구이는 이제 완전히 제 몫이 된 일입니다. 올해는조금 색다른 레서피를 사용해 봅니다. 야채를 잘 안먹는 아들녀석을 위해 어제밤에vegetable stock을 끓여 푹 담구어 놓았지요.

음식준비를 하면서 올 한해 감사함들을 꼽아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필라세사모 식구들을 만나게 된 일입니다. 필라세사모는 “세월호를 잊지 않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약칭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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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만난 이들을 통해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느껴본 한해랍니다.

무릇 신앙의 궁극적 목표라면 구원이 될 것입니다. 한두해 전부터 제가 적을 두고 있는 교회의 같은 소그룹에 속해있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죽은 후 구원 문제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돕기위해 한동안 열심히 성서 이야기를 썻던 기억이 납니다. 그 그룹에 속한 멤버들이 대충 저보다 연상들이었으므로 죽음의 문제가 결코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오늘 현재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죽음 이후에 문제로 국한지어 생각하는 것은 좀 따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던 차에 필라세사모 식구들을 만난 것이지요. 구원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은 매우 중요하고 함께 가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런 뜻에서 이들과의 만남은 올 한해 제게 가장 큰 감사가 되어야할 것 같답니다.

그 모임에서 엊그제 대전에서 목회하는 김규복목사를 온라인으로 초빙해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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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쌍전(文武雙全) 또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이라고 하는 말이 있지요. 문(文)과 무(武)를 다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김목사를 향해 ‘이론’과 ‘실천’을 쌍전(雙全)했다거나 겸전(兼全)했다고 칭송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구원에 있어 궁극의 목표라고 할만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 곧 “인간성의 총체적인 회복”을 위해 평생을 ‘이론’과 ‘실천’을 함께해 온 사람라고는 말씀 드리고 싶답니다.

그날 밤 김목사의 이야기를 들었던 우리 필라세사모 식구들 뿐만 아니라, 단 한사람만이라도 더 이야기를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몇차례에 걸쳐 그의 이야기를 올리려 합니다.

아내의 원성 소리가 들리기 전에 부엌으로 가야할 시간입니다. 오늘은 짧게 첫번 째 이야기입니다.

그들에게 계약이란?

성서 – 우리들의 이야기 6

이스라엘의 희망은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고난의 시대 이래로 수 세기 동안 유태인들을 괴롭혀온 참혹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살아있다.  최근사 아우슈비츠와 그 외의 다른 죽음의 수용소에서 조직적으로 근절되고, 탈출할 수 있는 모든 출구가 닫혀진 것처럼 보였던 나치 횡포의 무시무시한 시절까지도… (John Macquarrie  의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서)

성(聖)금요일 그리고 기억

성(聖)금요일, Good Friday 밤입니다.

예루살렘과 로마 권력, 그리고 당시 평범한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수난을 받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일을 기억하는 날, 밤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하는 믿음의 고백은 바로 이 날 밤부터 일어난 일입니다. 그의 죽음은 나와 인류의 속죄 제물이었다는 신앙고백이 시작된 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에 대한 믿음이 시작되는 밤입니다.

예수의 부활 곧 믿음 가운데서 일어날 나와 인류의 부활은 바로 오늘밤이라는 예수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聖)금요일인 동시에 Good Friday입니다.

그리고 이천여년 전 이 날 밤 일어났던 일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해 우리들에게 남겼습니다.

<유다인의 대사제는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 가서 속죄의 제물로 바칩니다. 그러나 짐승의 몸은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립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함께 겪읍시다.> – 히브리서 13 : 11-13, 공동번역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죽음이 그가 수난과 고난을 겪었던 예루살렘 성안이 아닌 성밖에서 이루어진 것에 촛점을 맞추어 우리에게 그 죽음의 의미를 전해줍니다.

예수를 통한 구원이 성문밖에서 이루어졌다는 히브리서 기사의 해석은 오늘을 예수쟁이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명쾌한 삶의 해답을 줍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내 것으로 삼고자하는 삶을 살아가고저 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예수를 삶의 구세주로 믿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성문 밖에서 그리고 성문 밖의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생각하며 그와같은 삶을 추구할 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39940_29753_918오늘자 기독교타임즈는 <교회협 세월호 침몰현장에서 눈물로 성금요일 예배>라는 제목으로 팽목항을 찾아 예배를 드린 교회협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 말미에 이덕주 감신대 교수가 한 말들이랍니다.

“역사왜곡과 같은 역사적 실수가 반복되는 이유는 ‘기억’하지 않는데 있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과 전망은 항상 같이 가야하며, 미래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도 정확한 기억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비전을 수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현장에 참여한 이유 역시 아이들의 꿈과 비전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고, 살아남은 우리는 이들의 비전을 이뤄야할 의무가 있다.”

“이제는 잊으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된 기억을 방해하는 것이고 이는 역사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2015년 성(聖)금요일밤, 제가 무교회주의를 주창하지 않는 희망이랍니다.

세월호 유가족들, 목사 김홍도 그리고 구원

제가 사는 곳은 한국인들이 그리 많지 않은 곳이라 마음만 먹으면 일년 내내 가족이외의 한국인들과는 말섞지 않고도 살 수 있답니다. 그런데  어디 사는게 두부모 자르듯 할 수 있나요. 그래 주일이면 교회도 다니게 되고, 이런 저런 한인들 모임에도 참석하게 되면서 한국인들과 섞여 사는 것이지요.

그렇다하더라도  많아야 한달에 한 두번 정도이지 그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답니다.

어쩌다 이웃한 대도시인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국마켓에 나가게 되는 일이 있답니다. 이즈음은 동네 마켓(미국인들을 위한)에만 가도 제 입맛에 맛는 찬거리들이 널려 있는지라 굳이 한국마켓을 찾을 일도 그리 많지 않답니다.

아무튼 한국마켓 앞에 가면 만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일요일 오후에 장을 보러 나선 길이면 거의 만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른바 “거리 선교(전도)단”입니다. 그들이 호객행위하듯 묻는 물음이지요. “예수 믿으세요?”, “교회 나가세요?”, “구원 받으셨나요?” 등등 말입니다.

자! 이쯤에서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합니다.

기독교(개신교이든 천주교이든)에서 ‘구원’은 신앙 곧 믿음에 있어서 가장 핵심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곧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하고(여기고, 판단하고, 또는 믿고) 시작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창조 이래 오늘날까지 이 땅에서 살아 숨쉬는 경험을 한 모든 이들은 죄인이라는 전제아래 믿음이 시작되는 종교라는 말씀입니다. 단  한사람만을 빼고 말입니다. 바로 예수지요.

죄인이므로 그에 대응하는 형벌을 받아야 하지만 믿으면 ‘구원’을 받고 형벌을 면할 수 있다는  전제로 믿음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는 대상은 지구상에 모든 인간들입니다. 예로부터 세상 끝날까지 잠시 숨쉬고 살다가는 모든 인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형벌을 면하게 해주고 ‘구원’을 주는 “구원자”는 오직 한 분 야훼(여호와)라고 부르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해가 생긴 이래 해가 없어지는 순간까지 숨 붙어 있던 모든 목숨 가운데 단 한 사람 예수는 야훼와 동급인 구원자입니다.

자!  이제 “단 하나”로 묶인 “둘”입니다. ‘야훼’와 ‘예수’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 그 누구도 이 야훼와 예수를 실제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기서 ‘성령’이 등장합니다.

‘성령’으로 인해 ‘야훼’와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른바 “삼위일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령’은 만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입니다. 바로 믿음의 시작이자 종교의 시작입니다.

저는 이 교리를 믿는 신앙인이자 예수쟁이라고 스스로 고백하며 살아왔고, 그 믿음으로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이쯤, 아주 중요한 고백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단 하나의 신 ‘야훼’, 단 사람 예외인 ‘예수’, 그들과 나를 연결해 주는 단 하나의 고리 ‘성령’ – 사람이 끼어 들데가 없는 이름들입니다. 여기 그 누구라도 사람 이름이 끼여든다면 그것은 이미 사기이고, 삼위일체인 신과 예수와 성령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 이쯤 정리를 하고 넘어 가야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리고 싶습니다. 믿으면 됩니다. 신을 믿으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때, 구원의 주체는 신입니다. 인간은 그저 그에게 맡기면 됩니다. 죽음 이후의 문제입니다. 그럼 이제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어디 여기서 끝나나요?

오래 살고 싶다.  더 갖고 살고 싶다. 남보다는 더 멋지고 낫게 살고 싶다. 걱정없이 살고 싶다. 남들 위에서 살고 싶다. – 등등의 욕망들이 살아있기에 꿈틀거리기 마련이지요.

이 지점에서 ‘구원’과 ‘믿음’은 엉뚱한 곳으로 빠져들어 사기꾼들을 양산하게 되고, 제 스스로 그 사기에 빠져 삶과 죽음의 모습까지 망치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영역, 곧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는 곳에 대해 사람이 말하고 한정짓는 모든 일은 모두 “사기(詐欺)”입니다. 그것은 다만 신의 영역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서 신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모든 파괴, 살인, 살상, 전쟁을 비롯하여 개인적 부귀영화와 죽음 이후의 천당을 파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사기입니다.

다만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이 사는 이 현실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들, 곧 손에 잡을 수도 있고, 실현시킬 수도 있는 길이 있습니다.

저는 이게 바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구원’은 ‘말’이 아니라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구원은 ‘사람의 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한국 마켓 앞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며 “믿으면 구원 받아요!”하는 그런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일요일 아침이면 숱한 목사들이 뱉어내는 그런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바로 오늘 나와 당신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고서야 믿음입니다. 사람들의 영역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깔아 뭉개는 그 어떤 신앙과 종교행위는 모두 사기입니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케 하셨다.”  – 누가복음 4 : 18

오늘 뉴스를 훑어 보가다 머리 속을 스처지나간 생각들입니다.

자신이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상황이 닥쳐오고, 분명 그 상황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외치려는 목소리를 누르고 억압하고, 끝내 한을 안고 주저않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이 때 그들에게 “구원”이라는 소리는 어떻게 다가갈까?

그 ‘구원’의 소리가 오늘 여기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고발, 항거, 개혁, 투쟁으로 나아간다면 믿음이요, 그 누군가인 사람에게 의지하여 자기만족에 족한다하면 사기당하는 일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땅에 널린 김홍도목사 아류들과 세월호 유가족들 그리고 구원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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