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에

오늘 손님 하나 가게로 들어서며 연신 내 뱉던 말, “Strange!  Strange! Unbelievable!

난 그의 말을 ‘이런 옘병할!’로 듣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도 아니고, 사월에 장마도 아닐 터인데… 지난 일요일부터 오늘까지 줄기차게 비가 내린다.

어제 밤엔 심하게 바람이 불더니만, 내 가게와 멀리 않은 곳으로 회오리가 지나가 곳곳에 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뉴스가 떳다.

손님의 날씨 불평이 어찌 그의 것이기만 하랴.

저녁에 비가 잦아든 창밖을 보니 그 빗속에서 튤립들이 배시시 얼굴들을 내밀었다.

하여 삶은 늘 익숙하고 믿을만한 것들의 연속이다.

시간여행 – 4, 변화에

변화는 늘 놀라운 것이지만, 내가 적응하지 못할 때는 그저 불편함 뿐이다. 그런 불편함이 자꾸 쌓인다는 것은 내가 늙어간다는 표징일게다. 하여 애를 쓰는 편이다. 변화로 인한 불편함을 최소화 하려는 노력을 최대화 시키는 애씀인데, 그런 모습에 스스로 ‘쯔쯔쯔’ 혀 찰 때가 자꾸 늘어간다. 그럴 때면 스스로 위로하는 한마디, ‘내 노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변화가 너무 빨라서…’

서울은 내가 쉽게 적응하기엔 지나치게 많이 변했다. 십 삼 년 만에 나섰던 나들이였는데, 그 변화의 폭은 내 가늠 이상이어서 불편함 보다 먼저 다가선 것은 놀라움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다가선 놀라움은 사람들이 건네는 말소리들 크기와 억양이 매우 작고 부드러워진 변화에서 왔다. 지하철이나 버스, 식당이나 거리에서 사람들의 말소리는 분명 내 기억 속 서울사람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웃에 대한 배려에서 온 듯한 이런 변화는 실로 큰 놀라움이었다. 솔직히 뉴스 속에서 만났던 서울소식들은 매우 거칠게 소리 높은 소음처럼 다가오곤 했었는데, 실제 사람들의 말소리들은 부드럽고 온유했다. 그게 참 좋았다.

지하철 친절한 안내 방송도 좋았는데, ‘발빠짐 주의’나 ‘나빠짐 주의’, ‘하차입니다.’라는 경고 등은 외국어처럼 매우 낯설었다. (불편함, 놀라움이라는 말을 쓰다보니 생각난…)

그 보다 큰 놀라움을 느낀 것은 어디를 가나 잘 꾸며진 조경(造景)을 바라보면서 였다. 얼핏 쉽게 잔상으로 남게 되는 풍경들, 일테면 아파트 공화국이니 콘크리트 공화국이니 하는 말들을 잘 치장해 주는 놀라운 변화는 내겐 실로 경이롭게 다가왔다. 놀랍게 변한 종로통 뒷골목 직장인들의 점심시간 풍경과 그들의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잘 꾸민 조경 때문이었다. 돌아와 내 가게 손님들에게 자랑할 요량으로  조경과 자연 사진들을 제법 많이 찍었다.  

또 다른 놀라움은 딱 두 시간 오분이 걸린 서울과 속초 간의 거리였다. 아주 오래 전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북평해수욕장에서 놀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때 청량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워 거의 열시간 넘게 달려 닿던 곳이었다. 터널 예순 세 개로 이루워 졌다는 서울 속초간 도로를 달린 일은 내게 완벽한 시간여행 경험이었다. 아내와 단 둘이 맞았던 속도 앞바다 해돋이 풍경은 우리들의 내일로 품고.

그 동창들을 거의 오십 년 만에 만났다. 졸업사진을 떠올리며 옛 이야기를 나눈 몇 몇은 졸업 후 처음이었으니 만 오십 이년이다. 동창회를 이끄는 친구가 말하길, 졸업 동기들 중 1/4이 먼저 이 세상길 떳고, 1/4 정도는 연락 두절, 1/4 정도는 연락은 닿지만 모임에는 나오지 않고, 나머지 1/4이 이런저런 모임으로 연과 끈을 맺고 늦은 시간들을 함께 걷고 있단다.

실로 오십 년만의 변화인데, 또 다른 놀라움 하나는 바로 모두가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함께 한 동창들 중 몇몇은 그 옛날 북평 해수욕장에서 같이 놀았던 친구들이었는데, 그들은 물론 다른 친구들도 떠들고 즐기는 동안 변하지 않은 옛모습 그대로 둘러 앉았었다.

그랬다. 해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만, 분명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으련다. 바로 나다. 내 마음에 따라.

느긋하게 맞는 추수감사절 아침이다. 해마다 Thanksgiving, 이 맘 때면 읊조려보는 시 한 편이 있다. 언제부터 인지 잘 모르겠으나, 이젠 철들 때도 되지 않았나는 생각이 들었던 내 나이 환갑 전후일게다. Shel Silverstein이 읊은 관점(Point Of View)의 첫째 연이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2013년 추수감사절 아침, 돌아볼수록 그저 감사한 일 하나 꼽는다. 살아오며 보아 온 숱한 변화들 또는 기억조차 못하는 나의 변화들 나아가 옹고집으로 변치 않는 모습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관점의 잣대가 비록 어설프고 부끄러움 투성이지만 예수라는 잣대, 성서라는 잣대라는 믿음을 잊지 않았다는 감사이다.

큰고개(대현) 언덕 옛 친구들이 일깨워 준 감사이다.

계절 그리고 관점(觀點)에

호들갑스런 일기예보가 지나치지 않을 때가 있다. 어제만 해도 늦가을이거니 했는데 기온이 뚝 떨어졌다. 일기예보처럼 오늘 밤엔 얼음이 얼 모양이다. 이번 주말에는 첫 눈도 내릴게란다. 이렇게 계절이 또 바뀐다.

오후에 좀 걸을 요량으로 찾은 Longwood Garden 풍경은 이미 겨울이었다.

곳곳마다 사람 손 닿아 가꾸지 않은 데 없는 정원일지라도 그 역시 계절을 따라가는 법, 자연을 담은 바깥 풍경은 흔히 하곤 하는 말 그대로 춥고 스산하고 을씨년스럽기 까지 하였다.

허나 사람의 욕심이 어디 끝이 있겠나? 실내 정원은 사람들의 손길이 만들어 놓은 꽃들의 세상이었다. 더하여 시간이 아무리 한겨울로 치달아도 그 계절이 주는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또 한번 이렇게 바뀌는 계절의 길목을 아내와 함께 손잡고 걷는 시간에 대한 감사의 크기라니!


그리고 관점에 대하여.

해마다 이 맘 때면 한번씩 읊조려보는 시 한편,

Shel Silverstein이 고백하는 ‘관점(Point Of View)’이다.

<관점>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주일만찬은 즐겁지 않다
부활절축제도 재수 없을 뿐
닭과 오리의 관점으로
그걸 바라 본다면.

한때 나는 참치 샐러드를 얼마나 좋아 했었던지
돼지고기 가재요리, 양갈비도
잠시  생각을 멈추고 식탁의 관점에서
식탁을 바라보기전까지는.

<Point Of View>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
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

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아주 오랜만에 주일예배를 드렸다. 목사님께서 던져 주신 물음 하나, ‘관점’이었다.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며 감사를 놓치지 않는 하루 하루를 살 수 있기를 비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관점’을 곱씹어 내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난 아직 멀었나 보다. 내가 칠면조의 관점으로 사람들의 세상을 이해할 수 없듯,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잣대는 준비되어 있지도 않고 이번 생에서는 내게 허락치 않은 일일 것 같다.

다만, 내가 신을 고백할 수 있는 ‘관점’ 하나. 사람의 눈으로 사람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일, 그것 하나는 이루며 사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그리 보면 칠면조의 관점도 하나님의 관점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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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觀點)에

이른 아침 첫 손님으로 맞은 Susan에게 물었다. ‘가족들은 어떠니? 이즈음 뉴스들이 너희 가족들에겐 좀 힘들지 않니?’ 내 짧은 물음에 그녀의 대답은 제법 오래 계속되었다. 다음 손님이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그녀는 내 물음에 고맙다는 인사를 끝으로 내 세탁소를 떠났다.

Susan의 남편은 쌍동이다. 남편과 시동생, 쌍동이 형제들의 직업은 경찰이다. 형제 모두 현역에서 은퇴한 상태이지만 여전히 경찰 관련 일을 하고 있다. 두 집안의 아들들은 모두 현역 경찰이다. 이른바 경찰가족들이다. 이들은 전형적인 왈 백인들이다.

그녀는 이즈음 경찰관련 뉴스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보다 더 무섭단다.

한가해진 시간에 옛 생각을 더듬는다. 어느새 스무 해가 훌쩍 지났다. 그즈음만해도 내가 참 꿈이 많았었다. 당시만 하여도 내가 사는 동네 다운타운으로 일컫는 윌밍톤시에는 장사하는 한인들이 제법 많았었다. 물론 지금도 여러 분들이 계시지만 그 때에 비하면 많이 쇠락한 편이다.

왈 흑인 거주 지역인 다운타운에서 장사하는 한인들의 피해와 사건 사고들이 종종 일어나던 때여서 그 일을 의논하고자 시장과 경철서장을 만났었다.

그 때 시장이 내게 했던 말이다. ‘왜 한인들은 흑인 밀집지역인 시내에서 장사를 하면서 살기는 왜 여기서 안 살죠?’  내 체구에 비해 거의 세 배나 되는 인자한 모습의 흑인 시장께서 내게 던진 느닷없는 질문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었다. ‘제 가게가 시내에 있고요, 제 장인 장모가 가게 이층에서 산답니다. 모든 한인이 다 그런 건 아니랍니다.’

생각해 볼수록 비겁한 대답이었다.

물론 내 장인 장모가 당시 시내에 있던 작은 건물에 있었던 내 세탁소를 돌보면서 이층에 살고 계셨던 것은 사실이지만, 시장의 물음에 대한 응답은 적절치 않았다. 그곳에서 장인 장모는 두 번에 걸쳐 권총 강도를 만났었다. 건물을 처분한 지도 오래이고 두 분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 때 일들을 생각해면  장인 장모에게 지은 내 죄가 크다.

그리고 몇 년 전 아들녀석 장가갈 때 이야기다. 느닷없이 결혼날짜를 잡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아들녀석에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화를 다스리지 못했었다. 그렇게 갑자기 만나게 된 며느리는 정말 새까만 얼굴의 흑인이었다. 아마 내 화를 더욱 키운 까닭이었을게다.

몹시 힘들었던 여름이었다.

아들녀석의 가출이 이어졌고, 어느 날 아들놈의 연락이 있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아빠를 한 번 보자는 데 한 번 만날 수 있어?’ 나는 녀석에게 말했었다. ‘이눔아! 이건 내가 해결할 문제지, 목사님이 해결해 주는 게 아니야!’

그 여름에 우리 부부는 기차를 타고 서부 여행을 했었다. 그 여행에서 나는 몹시 부끄러운 내 모습을 만났었고 그 해 늦가을 나는 까만 얼굴의 며느리를 맞았다.

그 어간에 아주 엉뚱한 자리에서 아들 녀석이 말한 그 한인 목사님을 만났다. 그의 이름 이태후 목사. 만난 곳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다.

며칠 전 그가 신문에 기고한 글을 읽으며 내 마음에 넘치는 감사 하나.

내 아이들이 이런 목사님 영향을 잠시라도 받고 자랄 수 있었다니…. 그저 감사다.

이즈음 나는 며늘아이 얼굴을 보며 아들녀석 걱정을 잊는다. 덤으로 신앙과 교회관 나아가 정치적 관점 역시 엇비슷한 오리지널 까만 얼굴들인 사돈에게 얻는 감사까지.

그리고 이젠 점점 굳어져 가는 생각 하나.

무릇 관점의 핵은 인종도 신념도 이념도 사상도 더더구나 신앙도 다 헛것이라는 것. 다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사람의 관점,  그 마지막 하나 아닐까?

더운 날, 마루 새로 깔다 허리 피며 만나는 새 생명들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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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0803

경칩에

일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  동네 약국 체인점에 있는 사진 현상소에 들렸다. 재미 삼아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 일여 년 만에 어제 밤 처음 사진 현상 주문을 해 보았다.

내일부터 나흘 동안 가게 문을 닫고 새 장소로 이전을 한다. 내가 해야 할 이전 준비들은 거의 끝났고, 장비와 기계 등 큰 이사짐들은 일이 맡겨진 이들의 몫이다.

나는 손님들을 맞는 카운터 공간을 꾸밀 생각으로 사진 현상을 맡겼던 터이다. 내가 찍은 사진 몇 장들과 내가 좋아하는 시 몇 편들을 새긴 판넬로 한 쪽 벽을 장식할 요량이다.

현상되어 나무판에 새겨진 사진들을 찾아와 한참을 들여다 보다 툭 튀어나온 혼잣말, ‘오호 제법인데!’

사진들과 함께 벽을 장식할 시편들을 새긴 판넬들을 찾아 든다. 영역한 이해인님의 시편들과 Thoreau의 생각들, 그리고 내가 참 좋아하는 Shel Silverstein의 관점 (Point Of View)이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나는 이즈음 한국(한반도) 뉴스 또는 한국(한반도)에 대한 뉴스들을 보며 Shel Silverstein의 관점 (Point Of View)을 떠올리곤 한다.

개인 사이의 관계,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 나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 또는 나라와 개인 집단과 개인, 나라와 집단 등등 모든 관계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Shel Silverstein의 관점은 신(神)의 관점이다.

바로 약자(弱者)의 관점에서 공감하는 능력이 최적화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바로 천국이다.

역사란 사람들이 천천히 정말 천천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그 곳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아닐까?

내 욕심으로 살다 문득 문득 현상된 사진처럼 툭 정신을 차리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몹시 추운 경칩(驚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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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에

해마다 이맘 때면 내가 읊조리는 시가 있다.  Shel Silverstein이 읊은 관점(Point Of View)이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주일만찬은 즐겁지 않다
부활절축제도 재수 없을 뿐
닭과 오리의 관점으로
그걸 바라 본다면.

한때 나는 참치 샐러드를 얼마나 좋아 했었던지
돼지고기 가재요리, 양갈비도
잠시  생각을 멈추고 식탁의 관점에서
식탁을 바라보기전까지는.

Point Of View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
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
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
‘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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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 – 그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맞닿을 때 우린 가족이다. 그래서 감사다.

구십 대 내 아버지들과 어머니, 칠십 대 매형, 이 삼십대 내 아들과 며느리와 딸, 그리고 육십대 우리 부부가  함께 둘러 앉은 추수감사절 저녁 몇 시간.

한가지  말을 때론 엉뚱하게 서로 제 입맛에 맞게 이해하며 거기에 덧붙어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이어 가곤 하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까닭은 가족이기에.

지난 한 해에 대한 감사와 함께 맞이 할 또 다른 한 해 동안 우리가 마주칠 모든 일들에 대해 감사할 수 있기를.

비록 칠면조의 관점이나 식탁의 관점 에서라도…

시인이 읊은 슬픔이나 우울함이 아닌 그 관점이어서 더욱 좋고 즐거운….

가족의 관점으로…

2018. Thanksgiving Day 에

관점 – 포로기 3

(당신의 천국 – 쉰 세번 째 이야기) 

그러니 너는 이렇게 일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그들을 멀리 다른 민족들에게 쫓아 보내어 이 나라 저 나라에 흩어져 살게 하였지만, 나는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얼마 동안 그들에게 성소가 되어 주리라.’ – 에스겔  11 : 16 

너희는 아비가 남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겨레 가운데서 못할 짓을 하다가 자기의 죄를 쓰고 죽었는데,  그 아들이 아비의 죄를 쓰고 벌을 받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이냐고들 한다. 그 아들은 내가 정해 준 규정을 지키고 그대로 바로 살았는데 왜 죽겠느냐?  죽을 사람은 죄를 지은 장본인이다. – 에스겔 18 : 18 – 20, 이상 공동번역 

Turkey day라고도 부르는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아침입니다. National Geographic  Daily News에 따르면 오늘 하루 미국인들의 밥상에 오르는 칠면조의 숫자는 대략 사천 육백 만 마리가 된답니다. 

저의 가족들 저녁상도 칠면조 위주로 차려집니다. 아무리 요리를 잘해도 제겐 그렇게 당기지는 않는 음식 가운데 하나랍니다. 이곳을 살아가는 관습이기도 하거니와 모처럼 한 상에 둘러 앉는 식구들 특히 저희 아이들이 좋아하기에 해마다 큼직한 Turkey 한마리를 구어온지도 벌써 스물 다섯해가 넘었습니다. 

에스겔 이야기를 잇기 전에 오늘 아침에 떠오른 시 한 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즐기는 시 가운데 하나랍니다.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관점(觀點Point  Of  View)이라는 시입니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주일만찬은 즐겁지 않다 /부활절축제도 재수 없을 뿐 /닭과 오리의 관점으로 / 그걸 바라 본다면. 

한때 나는 참치 샐러드를 얼마나 좋아했었던지 /돼지고기 가재요리, 양갈비도 /잠시  생각을 멈추고 식탁의 관점에서 /식탁을 바라보기전까지는.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 /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 /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 /’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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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 해 동안 각자 자기의 삶의 자리에서 생활하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해 동안 누린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날이지만, 칠면조 입장에서 본다면 해마다 맞는 칠면조  대학살의 날이 되는 셈입니다. 

사람과 칠면조의 관점이라는 대칭이란 그저 상징이지만, 실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찬찬히 꼼꼼하게 들여다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있는 관점의 차이를 느끼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그 다른 생각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의 결과가 아주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잡혀간  에스겔이 전하는 이야기들은  바로 유대인들이 그들의 기존 관점을 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새롭게 바꾸게 되는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과 유대민족 사이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었다는 말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바로 관점을 바꾸게 하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서 야훼 하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영광스런 하나님의 모습이 움직이십니다.  이제까지 야훼 하나님이 계신 곳은 거룩한 다윗의 성, 영광스런 솔로몬의 성전이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속에서 본 야훼 하나님은 그 곳 솔로몬의 성전을 떠나 동쪽 동산으로 움직이셨고, 바벨론 그발 강가에도 나타나셨습니다. 

솔로몬 성전 안에서 칩거하시는 야훼 하나님이 아닌 흩어진 유다 민족들과 함께 움직이시는 야훼 하나님의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야훼 하나님께 받은 예언을 통해 이제 유대민족들이 야훼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제껏 예루살렘 성안에서 성전 중심으로 바라본 야훼 하나님과 유대 민족의 주관적 시각에서 포로가 되어 지금 살고 있는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을 바라보는 객관적 시각으로 시각을 넓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민족과 야훼 하나님을 바라보는 객관적 시각이 생기자 첫번 째 하게 되는 일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이제껏 이야기로 전해 지거나 조각 조각 단편적 기록들로 전해져 오던 탈애굽 이후로부터 바벨론 포로라는 현재의 시점까지의 모든 이야기들을 기록화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읽고 있는 구약성경의 골격을 이루게 되는 많은 자료들이 바로 이 때, 포로기 시대를 전후해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두번 째는 예배와 제사의 형식에 대한 전통을 세우는 반면 현실적인 여건에 맞는 예배와 제사 의식으로 발전 시킨 것입니다. 전통을 세웠다는 말은 조상들이 해 온 일들에 대한 기록들을 모아 남겨서 후대에 전했다는 것이고, 그 전통을 이어갈 수 없는 현실적 여건에 맞는 제사 의식을 세우고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의 영역을 크게 확대한 것입니다. 

이제껏 조상들이 지켜 온 예배와  제사의식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사 형태였습니다.  물론 에스겔 시대에도 예루살렘과 유다 땅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여전히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의 환상속에 나타나신 야훼는 그 성전을 떠나셨던 것입니다. 에스겔서 전반부는 야훼께서 왜 성전을 떠나게 되셨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제 에스겔의 입장에서 곧 바벨론 포로로 잡혀온 유다인들의 관점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지요.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포로 초기에는 “이제 곧”, “내가 살아 생전에…”  고향 땅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생각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간절한 생각에 사로잡혀 평생을 보낸 이들에 대해 알고 있답니다. 아마 우리 세대라면 거의 기억속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이야기들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아버지들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제 어릴 적 친구들 가운데는 고향이 함경도, 평안도인 아이들이 제법 있답니다. 아니 어릴 적 친구들까지 들출 것 없이 제 장모님, 돌아가신 처고모부와 제 고모부님 모두 평안도 사람들이랍니다. “이제 곧 돌아 갈 고향”을 생각하며 떠나 온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 세대들 중 대부분이  고향땅으로 돌아갈 기회없이 하늘고향으로 떠났습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선포한 예언 가운데 하나가 “너희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포로생활은 길어진다는 것입니다. 70년이 흐르고서야 돌아갈 수 있었으니 포로가 된 당대는 물론이고 아마 그 다음세대들 가운데도 돌아간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은 성전 예배를 더 이상 드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야훼 하나님만을 기리는 약속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세상이 끝난 것과 마찬가지인 현실에 부닥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새로운 예배와 제사 의식을 세운 까닭입니다. 바로 회당(會堂)이 만들어진 계기가 된 것입니다. 나아가 이제껏 예루살렘에서 지켜왔던 희생제물 중심의 예배에서 말씀 중심의 제사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번 째는 이제까지 공동체와 함께 하는 야훼 하나님 신앙에서 공동체는 물론이요 사람 누구나 개개인들이 만날 수 있는 야훼 하나님을 새롭게 보게되는 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에스겔서 18장과  33장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내용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선 나 또는 당신이 될 수 있는 한 개인에 대한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에 대한 민족신앙이란  개인신앙을 내포한다는 선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은 일입니다 .비록 이젠 다  끝난 것 같은 현실이지만 관점을 달리 놓고 본다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구원의 확신을 세운 일입니다. 

그 새로운 세상은 야휘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평화로운 세상이고, 그 일은 마치 마른 뼈들이 모여 다시 생기있는 몸으로 부활하는 꿈같은 일이 일어나는 세상입니다.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들(40 – 48장)은 그의 직업 의식이 잘 드러나는 이야기들입니다.  제사장 출신이었던 에스겔이 바라본 새로운 예루살렘 새 성전에 대한 환상입니다. 특히 47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솟는 샘이 나쪽으로 흘러 사해 바다로 흐르는 환상은 성서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인 22장에 나오는 요한의 환상과 만난다는 사실 하나는 기억해 두시기를 바랍니다. 

에스겔이 꼼꼼히 기록한 성전 건축에 대한 환상은 결코 그가 남긴 기록대로 세워지지는 않는답니다. 

그러나 그가 관점을 바꾸어 바라본 세상은 그의 예언대로 오늘날까지 그 지경을  넓혀오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