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過程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좀 이상 했었다. 으스스하니 춥고 세수하며 손끝에 닿은 물이 그리 찰 수가 없었다. ‘몸살 기운이 있나?’하며 일터로 나갔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열이 나기 시작했고 온 몸이 마디마디 쑤시기 시작했다. 오후 들자 콧물 나고 잔기침이 잦아졌었다. 아무래도 좀 심상치 않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마자 covid test를 해보니 영락없이 양성 반응이었다. 다행히 아내는 음성이었다. 지난 주 수요일 일이었다. 마침 수요일엔 가정의(family doctor) 사무실이 8시까지 문을 열었다. 전화를 하니 잠시 후 의사에게 연락이 왔다. 내 증상과 증상이 나타난 시점 등을 물은 의사는 먹는 치료제도 나왔으니 이튿날에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이튿날 이런 저런 검진 후 의사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치료를 위해 먹는 약 PAXLOVID를 처방하기 전에 내게 물었다. ‘이 약을 일반인들 누구에게라도 급한 경우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게 바로 어제부터 랍니다. 아직은 연구중인 약품인 것이지요. 약간의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제 생각입니다만 김씨는 특별한 병력도 없고  복용하는 약도 없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선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므로… 묻는 것이지요’

나는 잠시 망설였었다. 그 때 증상으로 보아 참을 만도 했고, 앓아봐야 며칠 고생하면 끝일텐데… 부작용을 염려하면서 까지 먹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과 먹고 빨리 나을 수 있다면 나은 방법 아닐까? 또 아내가 아직 괜찮은데 공연히 내가 옮기기 전에 빨리 복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던 것이었다.

결국 처방전을 받아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약을 받아 들고 돌아와서도 먹을까 말까 많이 망설였었다. 그 때까진 증세가 참을 만 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증상이 시작된 것은 그 날 밤부터 였다. 물은 커녕 침조차 넘기기 어려운 목 통증과 기침 가래에 이은 답답한 가슴 통증 등이 거의 만 48시간 이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장시간 누워 있었다.

그렇게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 아침 저녁 각 세 알씩 오일 간 복용하는 PAXLOVID 30알을 남김 없이 먹었다. 어제 오후엔 의사선생이 전화를 해서 내 상태를 물었다. 나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듯 하다며 감사함을 전했다.

이틀 간격으로 아내는 테스트를 계속했고 정말 감사하게도 연이어 음성이 나왔다. 아파보니 40년 함께 해 온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크게 인다.

누워 있으며 잠시 들었던 생각. < 다 과정인데…. 언젠가 머지 않아 맞이할 내 마지막 때에도… ‘뭘 과정일 뿐인데…’하며 웃을 수 있으려면…. 하루 하루 내가 마주하는 순간 순간들이 그저 과정인데 하며 겸허하고 너그럽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제법 나이 든 생각 하나.

그리고 며칠만에 다시 돌아온 일터에서 만난 진상 손님으로 하여 피로와 짜증과 화가 치밀다 가라앉은 후 중얼거렸던 내 혼잣말. “에이그… 나이가 들긴 뭘…?…. 겸허하고 너그럽게..? 에이고 아직 멀었습니다!”

어쩌겠나?  다 과정인 것을.

그거 하나 되씹어 볼 수 있던 것 만으로도 지난 한 주간에 대해 감사!

과정(過程)

국민학교 몇 학년 때 였던가? 아마도 여름방학을 앞 둔 이 맘 때 쯤이었을게다. 신촌 신영극장 뒷길을 걷다 바라 본 하늘엔 하얀 뭉게구름들이 포근한 솜처럼 피어 있었다. 입 헤벌리고 그 하늘을 쳐다보며 걷는데 벌이 내 눈가를 쏘았었다. 그야말로 눈탱이가 밤탱이 되었던 그 여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제 오후 가게 밖 하늘 풍경은 딱 그 때였다. 1960년대 어느 여름 신촌 그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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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문 닫고 돌아오는 길, Curtis Mill Park 숲길을 걷다. 새소리 물소리, 길가 강아지풀에 담긴 옛 생각들을 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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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 주어야 할 것이 어찌 잡은 물고기 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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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루 치매끼가 더해 가시는 노인들과 이제 막 신혼을 꾸미고 인사차 들린 처조카 내외를 보며  든 생각 하나.

무릇 삶은 놓아 주어야 할 과정의 연속.

과정(過程)

생각해보니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아이들을 키우며 좋은 학군, 좋은 대학, 좋은 직업 등에 대해 우리 부부는 거의 무지, 무관심, 무대화로 일관했었다. 아이들은 그저 제 힘으로 컸고 우리 부부는 두 아이들이 대학을 마칠 때까지 등록금 한 푼 도와 준 적이 없다. 생각할수록 참 미안하다. 더 큰 미안함은 아이들 덕에 이 땅의 교육정책과 교육기관에 대해 조금은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 땅의 노인의료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 것은 모두 우리 부모님들 덕이다. 나도 이젠 법적 노인이므로 알아 두어야 할 지식인데 구태여 배울 것도 없이 몸소 체험으로 깨닫게 해 준 이들이 바로 부모님과 처부모이다.

어머님이 어제 오후 병원에서 퇴원해 단기 재활원으로 옮기시면서 우리 동네 노인 재활원과 양로 시설에 대해서는 거의 꿰차게 되었다. 어머니가 퇴원을 기다리던 오전 시간, 양로 시설에 계시던 장인이 응급환자로 병원에 실려가며 우리 부부는 동네 병원 구조를 훤히 그릴만큼 확실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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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다 과정이다. 그저 때 되면 다 터득하는 삶의 과정이다.

며칠 전 어머니 병상을 지키며 날밤을 지새며 읽었던 호주 홍길복 목사님의 인문학 강의록 스물 두 번 째 들어가는 말이다.

1963년, 제가 대학에 들어간 첫 해 교양과목으로 수강한 ‘문화사 개론’ 첫 시간이었습니다. 대형 계단식 교실에 들어선 30대 초반의 젊은 김동길 선생님은 첫 말문을 이렇게 열었습니다.

‘제 과목에 수강신청을 하고 함께 자리한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영원한 자유의 저변 확대사입니다. 이는 철학자 헤겔이 한 말입니다. 역사는 지난 날 오직 한 사람만의 자유에서 출발하여 몇몇 사람들의 자유를 거쳐 마침내는 온 인류의 자유를 향하여 확대 전진되어 왔습니다. 나는 이번 학기 강의를 통하여 인류의 역사란 자유의 저변 확대사라는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역사를 이해하고, 또 역사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반짝이는 눈빛에는 이슬이 서려 있었고 강의는 피를 토해 내는 열변처럼 들렸습니다. 55년 전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들었던 ‘역사는 영원한 자유의 저변 확대사’라는 선생님의 선언은 당시 군부독재가 대학을 비롯하여 온 나라를 얽어 매던 마당에 저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고 고민하게 했습니다. 그 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자유’라는 단어는 저의 사유의 틀을 형성시켜 온 중심개념 중 하나가 되어왔습니다.

이제는 90이 넘으셔서 선생님도 예전 같지는 않으시지만 사실 ‘젊은 날에는 진취적이고 혁명적이지 않는 지성인이 어디 있겠으며 늙어서는 보수적이고 사려 깊지 아니한 인생이 어디 있으랴!’ 하는 말을 상기하면서 지금도 가끔은 그 때 그 젊은 시절로 돌아가곤 합니다.

그의 글은 온전히 내 경험이었다. 1972년 봄 문화사(미국사였던 것 같기도 하고?) 개론. 그 강의실 첫 시간 김동길 선생님에게 똑같은 내용의 헤겔을 알게 되었고, 나는 이즈음에도 ‘자유의 저변 확대사’라는 말을 종종 쓰곤 한다. 다만 나는 그날 지각한 학생 하나를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공개 비난하는 김동길 선생님에 대해 그리 마뜩치 않은 느낌이 있었다.

김동길 선생님과의 연은 좀 남다른 데도 있다. 민청련사건과 긴급조치 7호 사이 잠시 세월 좋았던 1975년 봄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김선생님댁에서 Henry David Thoreau의 Civil Disobedience의 특강을 받았던 기억과, 1980년 봄 5.18 직전 선생님 차로 학교를 빠져나와 도피했던 기억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제 노추(老醜)의 대명사가 되었거니와 나 또한 그와의 인연이 그리 자랑스럽지 않다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그제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그제나 지금이나 그가 이해한 자유의 대상은 매우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저변 확대’의 범위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는 말이다. 그 것에 매어 있는 한 나이 들어 노추(老醜)다.

그에 대해 감사한 것 하나는 Henry David Thoreau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이즈음도 틈나면 내 가게 손님들에게 미국의 정신인 Henry David Thoreau를 소개하곤 한다.

홍목사님의 글은 헤겔의 변증법과 철학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긴 설명 끝에 그는 내게 이렇게 묻는다.

<자유를 넘어서> – ‘자유’(정치, 사상, 종교, 양심 등)와 ‘평등’(경제, 성, 인종, 문화 등)은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일까요?

또 다시 미안하게 나는 건방을 떤다. 십년 선배이자 은퇴 목사이자 내 선생이자 큰 형님이신 홍목사님의 물음에 대한 답이다.

‘아니, 그게 다 과정인 걸 아직도 모르셔요?’

출애굽과 신명기 고백으로 시작된 일찍 깬 인류의 어른들이 바라 본 세상으로 가는 길은 아주 더딘 걸음의 과정이다. 비단 성서적 가르침만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 어른들의 깨우침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 전체가 이해할 수 있는 날, 바로 하나님의 나라, 자유와 평등이 동시에 더불어 함께 하는 세상은 참으로 더디게 더디게 다가 온다.

우리네 삶이란 그 과정의 아주 작은 계단 하나.

그 것 하나 알고 그 과정에 순응하는 흉내라도 내고 가면 족할 일.  내 건방스럼에 꿀밤 하나  날리실 홍목사님 생각하며, 봄 내린 공원 길을 걷다.DSC04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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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뒷 뜰에 내린 봄은 늦저녁에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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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과정이란….

그저 우린 과정이라는 것을 아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