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부모님 피난지였던 부산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내 기억속엔 없다. 내 고향은 서울 신촌이다. 창천동, 대현동, 대흥동을 전전하는 세방살이, 내 유년을 지낸 곳들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던 해에 우리 집과 내 방을 가졌던 노고산동에서 서른 나이에 이르기 까지 살았으니 신촌 골목 골목이 내 고향이다.

여러 해 전에 찾아 간 신촌은 내 기억과는 사뭇 다른 세상이었다. 그 때까지 연세대 앞에서 개업의를 하던 고향 후배가 ‘너무 많이 바뀌었다’는 내 말에 응수한 말이었다. “아이구 형님, 서울에서 여기만큼 안 바뀐 곳도 드물어요, 여긴 옛날 그대로인거예요.” 나는 그에 말에 전혀 동의하지 못했었다.

지금의 신촌은 또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다만 내 고향 신촌은 일천 구백 육 칠십 년 대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무릇 고향이란 그런 곳일게다.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집을 찾아 온 딸아이가 아이스크림 가게를 가자고 하였다. 아들 녀석도 종종 찾는 곳이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아내가 종종 찾는 우리 동네 아이스크림 집이다.

이젠 이 곳을 떠나 돌아 올 생각이 없는  내 아이들에겐 고향에 대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곳이다.

딸과 사위 앞세우고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은 날, 아내와 나는 아이들의 고향이 되었다.

***고향 – 고향을 추억하는 한 오늘은 마땅히 살아 즐거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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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라는 이름으로 하여 고향생각에 젖어 보낸 한주간 생각을 내 가게 손님들과 함께 나누다. 내가 태어난 곳은 부모님의 피난지였던 부산이지만 그 곳에 대한 기억은 없다. 유년의 첫 기억부터 청년의 끝물까지 아련한 세월을 묻어 둔 곳은 신촌이다.

문득 따져보니 신촌 (새마을 , New Village)에서 보낸 세월보다 이 곳 델라웨어 Newark(새 방주, New Ark)에서 세탁소를 하며 지낸 시간들이 더 길어졌다. 그 생각 끝에 편지를 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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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가게 손님 몇 분들이 한국영화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셨답니다. 그 영화가 올해 4개의 오스카상을 탔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인들에게는 그 수상 소식이 매우 큰 뉴스였답니다.

영화나 아카데미 영화제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깊지 않은 제가 영화나 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랍니다.

그 영화 감독인 봉준호라는 이름 때문에 떠올린 제 고향 이야기를 드리려 한답니다.

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곳은 대한민국 서울시 신촌이라는 동네입니다. 지금은 시내 한복판이 되었지만,  제가 살 때만 하여도 서울 중심부에서 서쪽 외곽에 떨어져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신촌이라는 동네 이름의 뜻이 새마을이랍니다. 새로 생겨 도시와 시골 분위기가 함께 어우러진 동네였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야기들을 풀어 놓으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여서 제 블로그에  ‘신촌연가’(신촌을 그리워 하며 부르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연재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답니다. 벌써 십 수년이 지난 오래 전 일이랍니다.

연재의 마지막 글에 ‘봉준호’라는 이름으로 댓글이 달렸었답니다. “글을 인상깊게 잘 읽었다. 신촌에 대한 이야기들을 더 듣고 싶다. 당신이 살았던 때의 거리의 풍경, 많이 보던 나무들 등등….”이라는 글과 함께 그의 이메일 주소가 남겨 있었답니다.

저는 그 댓글을 남긴 봉준호라는 이가 영화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와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답니다. 제가 응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그 이름이 유명한 영화감독 이름인지도 몰랐거니와 알았다한들 역시 응답은 하지 않았을겝니다.

그렇게 지난 주 봉준호라는 이름을 들으며 다시 떠올리게 된 제 고향이랍니다. 이따금 아주 이따금 내 고향 신촌과 함께 떠오르는 얼굴들이 그리울 때가 있답니다. 언젠가 한 번은 가 봐야겠다는 생각 위로 한 해 한 해 세월의 숫자만 쌓여가고 있답니다.

따지고 보니 제가 신촌에서 산 세월보다 Newark에서 세탁소를 하며 보낸 시간들이 더 길답니다. 세탁소는 현재 진행형이고, 언젠간 은퇴할 것이고 이곳에서 노년을 보낼 계획이니 또 다른 고향이 Newark인 셈입니다.

신촌(새마을 , New Village)에서 Newark(새 방주, New Ark)까지의 내 삶을 추억하게 한 지난 주 다시 만난 봉준호라는 이름에 감사하며.

지난 일요일 아침 Newark 저수지 방죽길에서 찍은 내 제2의 고향 Newark 사진 몇 장 함께 나눕니다.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로 하여 새 힘이 솟는 시간들이 되시길 빌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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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week, some customers talked to me about the Korean movie, “Parasite.” That was because it won four Oscars this year. Of course, it was very big news to Korean people.

I don’t have much knowledge about movies and Academy Awards, and I’m not trying to talk about them.

The name of the director, Bong Joon-ho, reminded me of my hometown, and I’m going to talk about it.

The place where I spent my childhood and youth was Shinchon in Seoul, South Korea. Now it has become a part of the heart of the Seoul Metropolitan area, but when I lived there, it was like a village distant from the downtown of Seoul. The meaning of “Shinchon” is “new village.” As it was a newly developed village, it had the urban atmosphere alongside the countryside feeling.

If anyone starts to reel off a story about the hometown where he/she grew up, it would be endless. Like anybody else, I have lots of stories and memories about my hometown. I had posted a series of them at my blog site with the title, “Shinchon Yeon-ga (a song for missing Shinchon).” It was more than a decade ago.

At the last post of the series, a comment was written under the name of “Bong Joon-ho.” It said, “I read the series of your posts and was impressed. I’d like to hear more about Shinchon, such as scenes of trees, streets and so on when you lived there…” He also left his e-mail address.

I’m not sure whether the comment writer, “Bong Joon-ho,” and the director of the movie “Parasite” is the same person. That’s because I didn’t respond to the comment. At that time, I didn’t know that it was a famous director’s name. Even if I had known it, I would not have responded.

Like that, when I heard the name, “Bong Joon-ho,” last week, I recalled my hometown. Occasionally, really occasionally, I have missed faces sweeping across my memory along with my hometown. On the thought that I’d visit there sometime, the number of years has been heaping one by one.

After calculation, I realized that the years which I have spent in Newark running a cleaners are longer than ones which I spent in my hometown, “Shinchon.” Furthermore, I’m running a cleaners now, and I’ll retire sometime in the near future and spend the rest of my life here. So, Newark is definitely my second hometown.

Thanking the name, “Bong Joon-ho,” for prompting me to go on a trip down my memory lane from “Shinchon (New Village)” to “Newark (New Ark).”

I’m sharing with you some pictures of my second hometown, Newark, which I took at the causeway of the Newark Reservoir last Sunday morning.

I wish that you will be reinvigorated with thoughts of everything and everyone that you are missing.

From your cleaners.

첫 눈 그리고 고향

카리브해에 있는 아루바(Aruba)가 자기 고향이라고 하는 가게 손님이 있다. 아일랜드계 이민으로 뉴욕에서 낳고 학교를 다닌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초등학교 초기까지의 유년 시절을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이란다. 그녀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여행을 다녀 올 때면 늘 작은 선물을 잊지 않아 우린 늘 미안하다. 그런 그녀가 가지 않는 곳, 바로 그녀의 고향 아루바다. 이따금 뉴스들 속에서 만나는 아루바를 보면 자신의 기억속에 있는 고향과 너무나 다르단다. 아름다운 추억들이 새겨진 고향 아루바를 찾는 순간 평생 간직해 온 고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모두 잃어 버릴 것 같아 결코 그 곳을 찾는 일은 없을게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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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그녀를 백번 이해한다. 나는 이미 수 년 전 내 고향 신촌을 찾았을 때  그녀의 염려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즈음 매 주 한차례 한국 근현대사를 배우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훑기 시작한 이야기가 어제로 1960년 4월 혁명 전후 시절까지 이어져 왔다. 1960년 어간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들을 설명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잠시 내 고향 생각에 빠졌었다.

그리고 첫 눈 치고는 제법 눈이 많이 내린 오늘, 손님 발길이 뚝 끊긴 가게에서 내 고향 신촌 생각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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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나는 왼쪽 가슴에 크고 하얀 무명 손수건을 달고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내 아버지가 아직도 소학교라고 하시듯 나 역시 국민학교가 맞다. 소학교나 국민학교나 일본식이라고 하여도 우린 그때 그렇게 불렀으므로. 물론 내 이야기가 아닌 한 초등학교라고 부르려 애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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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몇 안되는 내 유년의 기억 가운데 가장 또렷한 것이 1960년 4월 19일일 것이다. 전쟁 후 태어난 아이들은 많고 학교수는 적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었어도 한반에 70명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한 울타리 안에 국민학교와 뒤늦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위한 공민학교가 함께 였다. 아무튼 당시엔 4월에 새학기가 시작되어 막 입학한 나는 운동장에서 ‘앞으로 나란히’, ‘옆으로 나란히’같은 유희 반 질서 교육 반의 교육을 마치고, 교실을 배정받아 책 걸상에 처음 앉아 보는 날이었다. 그날이 4월 19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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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반이었던 나는 ‘이놈아, 늦겠다! 어여 빨리 가라!’는 어머니의 채근을 뒤로 하고 학교로 향했다. 신촌 노타리 앞 큰 행길을 건너야 학교를 갈 수 있었는데, 내가 그 행길 앞에 섰을 즈음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거대한 시위 행렬이었다. 연대생들이 문안(우린 그 때 사대문四大門안이라는 뜻으로 서울시내를 그렇게 불렀었다.)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이었다. 나는 그 행렬을 구경하노라고 뒤늦게 텅빈 학교를 찾았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날 밤이든가 이튿날 저녁이든가 고등학교 다니던 동네 형 하나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로 골목이 흉흉하였던 기억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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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항쟁, 3선 반대 시위, 교련반대 시위, 그리고 유신 후 여러 시위들과 1980년 봄 그날의 시위까지 나는 그 거리에서 돌멩이와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유, 소년과 청년 시절 30여년을 보냈다. 때론 구경꾼으로 때론 그 시위대의 한 가운데서.

올들어 몇 권의 역사책들을 읽었다. 몇 권의 프랑스 혁명사와 미국사 및 미국 민중사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와 일본 현대사들이 그것들인데  2018년 올 한 해가 내게 참 소중히 기억될 연유이다. 더하여 가르쳐 주는 선생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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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읽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이제껏 내가 살아오며 생각해 온 세상보는 눈(觀點) 이랄까, 믿음(信仰)이랄까, 그게 거창하다면 그저 내가 지금 사는 모습이 크게 엇나가지 않았다는 안도를 느꼈다.

그것은 또한 사람 살아온 세상, 지금 사는 세상, 앞으로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이란 결국 어제보다는 나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내 믿음에 대한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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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 믿음의 바탕은 바로 내 고향 신촌 그 거리 거리에서 만났던 내 고향 사람들일 터이다.

그렇다. 고향은 찾아가야만 하는 곳이 아니라 마음에 간직하는 곳이다. 생각날 때면 언제나 첫눈 같은 설램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바로 그 곳.

아루바 또는 신촌.

  • 첫눈 오는 날 가게 앞에서 담은 사진들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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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누님댁에 들르다. 코스모스가 이웃집과 담장이 되어 춤춘다. 강원도 평창 사람 매형이 고향 생각으로 심었을 터이다. 나도 잠시 내 고향 신촌으로 돌아간다. 고향은 그리움으로 가꾸는 지금 여기에 있다.

기차여행 – 마지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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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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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주택가 상점들 가운데 이른 아침 가장 먼저 문을 연 곳은 미용실이었다. 도시는 치장이 필요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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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가에서도 노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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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곳곳에서 여러 다른 모습의 홈리스들을 보았다. 잠시 제 자리를 비운 다른 노숙자의 짐을 터는 모습, 남녀 노숙인들이 서로 마주보며 스마트폰을 들고 전화놀이에 빠져 있는 모습, 신문 경제면을 샅샅히 훑고있는 모습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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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들의 문제는 비단 캘리포니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해 전, 우리 동네에서 만났던 힘깨나 쓰던 한인 노숙자 사내는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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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서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가늠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아주 넉넉하다싶게 떠난 공항행이었지만 길위에서 꼼짝을 못하고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이 비단 우리 일행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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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샌프란시스코는 여전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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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가 청과상에서 닭한마리 값으로 사먹은 Saturn Peach(도넛 복숭아) 는 새롭고 신기하면서도 익숙한 맛이었다. 무릇 여행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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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 초를 다투며 공항 렌트카 반환지에 도착한 우리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었다는 안도에 조금전 겪었던 일들을 추억거리로 새기며 웃을 수 있었다. 주행거리 겨우 만 마일 정도였던 렌트카가 공항으로 오는 하이웨이 진입로에 들어서자 엑셀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좀처럼 놀란 티를 내지 않고 여행 내내 느긋했던 하나아빠가 당황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말 베테랑이었다.

그렇게 시간에 쫓겨 탑승게이트에 도착한 우리들을 맞은 것은 비행기 연착 안내였다. 샌프란시코에서 1시간 40분 늦게 출발한 비행기 탓에 우리는 환승지 샤롯(노스 캐롤라니아)에서 4시간을 맥없이 앉아 있어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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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행 환승 비행기를 기다리던 노스 캐롤라이나 Charlotte 공항 대합실에서 나는 어느 노부부의 모습을 한동안 넋놓고 바라보았다. 노마나님은 연신 먹을거리를 남편에게 건네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무표정하게 그를 받고 있었는데, 마치 오래전 시골 버스 정거장 대합실에서 마주쳤던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하였다. 짐이라야 달랑 작은 백팩 두개 뿐인 것으로 보아, 떨어져 사는 자식들 얼굴 한번 보고 돌아가는 길이 아니였을까?

나는 노부부를 보면서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Toni Morrison이 쓴 소설 “고향”을 떠올렸다.

소설속 주인공 Frank Money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이다. Frank가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이유는 이  미국땅에서 흑인들이 겪어냈던 아픔 때문이었다. 남부 조지아주 로터스 출신의 흑인 Frank는 아주 어릴 적에 겪었던 일로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그의 경험이란 한 흑인 남자가 백인들에 의해 생매장 당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훗날, 그렇게 생매장당한 흑인은 백인들의 놀이도구로 죽게 된 사실을 알게된다.

백인들은 흑인 아버지와 아들을 싸우게 해놓고는 내기를 벌인다.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그때 흑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네가 나를 죽이라고.” 흑인 아버지는 결국 생매장을 당하고 만다.

작가 Toni Morrison는 1940년대에만 해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던 미국의 원시적이고 병적인 인종차별 현장을 고발하고 있다. 소설속 주인공 Frank Money는 이런 병적인 사회로부터 탈출하고자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평범한 삶의 현장에서 단지 피부색이라는 판단 기준에 따라 누군가에는 심심풀이 놀이가 되고, 또 다른 누구가는 목숨을 걸어야하는 노리개가 되어도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던 세상을 겪어왔을 대합실의 노부부를 보며, 그들이 헤쳐왔을 세월들에 잠시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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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고향의 길목이 되어버린 필라의 스카이라인은 반가움이었다.

그랬다. 여행 끝에서 만나는 일상은 반가움이어야만 했다.

후기 – 하나네와 우리 부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처 맛보지 못했던 중국인촌 만두를 아쉬어하며, 여행 후 두어 주 지나 필라델피아 중국인촌에서 만두로 배를 채웠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부부는 사랑하는 아들이 사랑하는 아이의 부모 Washington씨 부부와 저녁을 함께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