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에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생각 또는 생각의 틀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더우기 신앙이나 신념이라는 말로 포장된 생각들을 바꾸는 일이란 가히 혁명과 같다. 게다가 노인들의 생각에 이르면 이는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된다.

그게 이젠 남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되었다.

하여 웬만해서는 내 또래나 웃어른들과는 신앙이나 신념에 이르는 주제의 이야기들은 그저 피하고 사는 편이다. 어차피 바꾸지 않을 생각들을 나누고 다투는 일을 토론이라고 포장하더라도 서로 간의 아까운 시간 낭비라는 생각 때문이다.

만나는 이들의 폭이 워낙 좁다보니 나보다 나이 어린 이들과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아주 적다만, 어쩌다 기회가 있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은 나이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곤 한다.

신앙이라는 면에서는 여전히 내 또래보다 더 중세(中世)에 갇혀 사는 젊은이들도 만날 수 있거니와, 신념에 이르러서도 케케묵은 이념이나 견강부회나 곡학아세의 틀에 갇혀 저 홀로 독야청청인양 목청 높이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이건 딱히 나이와 상관 없는 일이다.

어쩜 내 모습이기도 하고.

다만, 이따금 나 홀로 추스려 다잡는 생각 하나. 세상 지고지선 그 절대란 절대 없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사람이나 체제를 절대라는 위치에 올리는 일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아니다’라는 그 생각 하나.

철들어 굳어진 그 생각 하나 늙막에 내 고집으로 안고 살아야 할 터. 신앙이나 신념의 이름으로.

새 장난감, 손전화에 대해

‘쓸데없이 고집만 쎄서….’ 내가 종종 아내에게 듣는 잔소리 가운데 하나이다. 아내가 그 말을 던지는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절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아내의 잔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아내가 지적하는  ‘쓸데없는 고집’ 가운데 하나는 손전화(스마트폰 또는 핸드폰)없이 사는 내 삶이다. 이런 나를 골동품 취급하는 이들은 아내말고도 종종 만날 수 있다.  골동품으로 여기든 촌놈으로 여기든 ‘쓸데없는 고집’으로 치부하든, 아내를 비롯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몫일 뿐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손전화를 전혀 사용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십 수년 전 아직 스마트폰이라는 말이 생겨나기 전, 모두들 투박한 모양의 핸드폰들을 사용하던 시절에 한 일년여 손전화기를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그만 전화기를 없앤 이후엔 손전화기와는 상관없이 살았다. 뭐 큰 이유나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단지 편했기 때문이었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내 나이 또래 이상의 노인들 조차 스마트폰을 사용하는게 어색하기는커녕 당연한 세상이 되었어도 나는 그 물건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딴 이유없다. 그저 없이 지내는 편이 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믿을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모르겠지만, 스마트폰에서 사용하는 앱을 만들 수 있을 만큼의 기술적 지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을지언정 스마트폰은 없이 살았다. 다시 말하지만 내 편한 삶을 위해서였다.

아내에게 ‘고집세다’는 잔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없이 살았던 내가 마침내 손전화(스마트폰)를 사서 손에 넣었다.

내가 개인컴퓨터(pc)로 사용하는 텔레그램 말고, 스마트폰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카카오톡을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카톡도 pc버전이 있지만 아내의 스마트폰 전화번호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에이 할 수 없다’하고 하나 장만한 것이다.

이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넣고 지금 열공중이다. 나는 이 장난감을 가지고 전화를 주고 받는 일에 사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내가 밥 먹고 사는 업종인 세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위해 카톡 또는 sns등을 이용해 정보를 손쉽고 빠르게 전달해 주는 일이나, 언어문제로 순간을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해 보고자하는 내 늙으막 꿈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해 보고자 함이다.

내 새 장난감으로 하여 아내의 잔소리 가운데 하나는 사라질런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