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 강도맞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환갑 진갑 다 지났어도 웬만한 모임에 나가면 말석차지랍니다. 하여 자리 펴고 자리 접는 뒷일과 막일들이 제 몫이거니하며 개의치 않는답니다. 물론 말석차지가 좋은 점도 있답니다. 그런 자리에선 이 나이가 아직 청춘이라는 생각도 할수 있거니와 조금 헝클어진다 하여도 눈감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나이로 따져 저보다 어린사람들이 많은 모임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자리에선 아무래도 더욱 신중해지고 가급적 뒷자리에서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려고 애쓰는 편이랍니다. 허나 타고난 성격 때문에 불쑥불쑥 튀는 통에 모임이 끝나고나면 ‘아차!’하는 때가 종종 있답니다.

그렇게 종종 ‘아차!’하면서도 이즈음 제가 즐겨하는 모임이 있답니다. 모임의 이름도 있답니다. 바로 “필라 세사모”입니다. 정식 명칭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이랍니다.

명확히 말하자면 제 거주지가 필라델피아는 아니지만 제가 사는 델라웨어주도 범 필라델피아 지역 변방에 위치함으로 끼워 주신 것이랍니다. 가급적 박수나 치며 앞서가는 이들을 쫓아나 가자고 얼굴 내민 일인데, 종종 버리지 못한 못된 습관으로 ‘아차!’하면서도 모임을 즐기고 있답니다. 무엇보다 모임에 대해 열성적이며 나이살에 비해 ‘아차!’하는 빈도수가 높은 저를 잘 이해해주는 이 모임의 구성원들이 넉넉한 까닭입니다.

이 모임에서 아주 뜻깊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이 온라인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랍니다. 이 행사를 위해 어제 저녁에 약 한 시간에 걸쳐 시험적으로, 온라인에서 여러 다른 지역에 있는 이들이 같은 시간에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연습을 해보았답니다.

한국의 세월호 유가족들 몇 분들을 비롯하여 호주, 영국, 캐나다, 그리고 미국 동부의 뉴욕과 뉴저지 그리고 필라델피아, 중부의 시카고와 테네시, 서부의 켈리포니아 등 여러 곳에 계신 분들이 함께 했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는 일요일(11월 15일) 저녁에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이 온라인에서 만나는 첫번째 행사를 갖는답니다.

자, 이쯤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려합니다. 제가 바라보고 느끼는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의 모습입니다.

제가 잠시나마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님들 가운데 서남동목사님이 계시답니다. 목사님께서 세상 뜨신지 벌써 서른 해가 넘었답니다.  그 어르신께서 즐겨 인용하시던 예수의 비유가 있답니다. 잘 아시거나 한번쯤은 들어보셨음직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0: 29-37

성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 말씀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예수믿는 이들이 해야할 일이라는 해석은 익히 아는 교회의 전통적 이해입니다. 그런데 서남동목사님은 이 비유를 놓고 이렇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의 역할은?” 이라고 말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서목사님은 “강도만나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2015년 현재, 제가 이해하고 느끼고 만나는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모습이랍니다. 바로 이들이 제가 섬겨야하는 예수라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길을 가다 강도만났던 일에 대해 적절한 보상과 배상을 받았고, 이미 다 치유되고도 남을 대접을 받았다고 여긴답니다. 더하여 그렇게 강도 맞는 일은 살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인데 유달리 특별나게 군다고 혀를 차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의 시작은 “영생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 바로 영생을 꿈꾸는 이들에게 대한 답변입니다.

서남동선생님은 그 성서적 물음과 답변을 제게 이렇게 해석해 주신답니다. 오늘 네가 보고 있는 ‘강도만나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인 줄로 알라고 말입니다. 바로 제가 만나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하는 일은 이런 제 생각을 넉넉히 이해해주는 필라세사모의 구성원들이랍니다.

혹시라도 오는 11월 15일 저녁에 있을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의 온라인 만남” 행사에 참여 하시기를 원하시는 페친이 계시다면(단, 재외동포 페친들만) 제게 연락 주시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답니다. 이메일([email protected] 으로)을 주시면 함께 하실 수 있는 안내를 보내 드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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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일로 정말 잔인하고 몹쓸 세상도 경험했지만, 사회를 지탱해 주는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됐어요. – 중략- 아, 소수라도 이렇게 힘써 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덜 억울하구나, 내가 덜 바보구나, 내가 덜 외롭구나 싶어요. – 중략- 그런걸 보면 외면만 받는 세상속에 있는건 아니네요.” – 세월호희생자 길채원학생의 어머니 허영무씨

“진실이라는 목표 하나 보고 달려가다보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 중략-  어쨌든 내가 할수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간다. 그거예요. 이길 가다보면 또 다른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 가고난 뒤에 다른사람들이 언젠가는 밝혀줄거다. 그건 확신해요. 우리가 앞서서 얼마만큼 가줬으니까 다음사람들이 거기에서 출발하면 되니까….” – 세월호희생자 이창현학생의 어머니 최순화씨

누군가의 외로움을 덜어줄 소수가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이 사회를 지탱해 나갈 좋은사람이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누군가 앞서가다 지친 이들의 곁에서 잠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않으시렵니까? 그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강도만난 예수

연재글인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을 잇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느해와 마찬가지로 삼월과 사월 사이는 몹씨 바쁘답니다. 이런 저런 봄맞이 준비도 있거니와 제가 운영하는 가게의 각종 보고 및 검열 등이 몰려있는 탓입니다. 게다가 이즈음 새 일을 준비하느랴 시간을 좀 나누어 쓰다보니 글을 쓸 여유가 그리 만만치 않답니다. 

이야기의 진행상 예수가 하셨던 비유말씀들을 풀어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번 한주간은 고스라니 건너 뛰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사순절 곧 예수의 삶 가운데 마지막 순간들을 곱씹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비록 연재글은 잇지 못하지만 예전에 제가 쓴 글 가운데 예수의 비유 말씀에 대한 것이 있어 소개 드립니다. 

혹시라도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 교회에서 배우고 믿는 신앙으로 보는 성서 이야기 또는 자신의 신앙(전통적인?)과 제 이야기 사이에 다른 느낌을 받는 분들이 계시다면 계속 이어질 제 이야기를 조금 더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마 바울 이야기로 넘어가면 많은 부분 서로간에 같음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은 쉬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신약성서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다. 나그네가 산길을 걷다 강도를 만나, 있는 것 다 빼앗기고 반쯤 죽은 상태로 누워 있다. 그 옆을 사제(그 시대의 최고의 귀족계급)와, 레위 사람(하급 성직자들), 사마리아인( 당시 유태인들이 가장 미워했던 사람들로 유태인과 이방인 사이의 혼혈족)이 지나간다.

사제와 레위는 그냥 못 본 체 지나치고 사마리아인이 반쯤 죽은 피해자를 응급조치하여 그를 여관으로 데려가 쉬게하고 여관 주인에게 넉넉한 돈을 지불하며 간호를 부탁한다. 

예수와 율법학자(오늘날 목사나 신학자들쯤 될까? 일정기간의 정규 연구과정을 거친 이들이다. 단지 이것이 직업은 아니었고 포도주장수, 기름장수, 목수등의 생업을 따로 갖고 있었다)의 대화체 서술인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 –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 강도들, 강도 만난 사람, 여관주인 – 가운데 누가 예수의 역을 담당한 사람일까? 

전통적인 교회의 해석대로라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의 역을 담당해서 강도 만나 죽을 고비에 있는 사람을 구원했다는 것이 정답이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같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운 이웃을 돌보자는 뜻으로 이 비유는 곧잘 사용된다. 

서남동그런데 이 물음 “누가 예수의 역할이냐?”라는 질문에 엉뚱한(?) 답을 한 사람은 고(故) 서남동(徐南同)목사이다. 그는 비록 그 흔한 신학박사 학위 하나 없었지만 살아 생전 “한국 신학계의 안테나”라고 불릴 만큼 큰 학자였으며 이른바 ‘민중신학’, ‘한(恨)의 신학’, ‘단(斷)의 신학’의 틀을 세운 분이다. 

그 서남동목사가 내 놓은 답은 “강도 만난 사람” – 바로 그 이가 예수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신학적 용어로 ‘한(恨)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강도를 만나서 얻어 맞고 빼앗기고 죽을 고비에 빠져 “살려달라”고 애처로이 신음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예수가 강도를 만났다. 애당초 가진 것 없었으니 빼앗긴 물건이야 변변하겠냐만 반쯤 죽을만큼 맞아 쓰러져 신음하고 있다. 그 옆을 내가 아니면 당신이 지나간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조차 뭉개져 나오는 절박한 소리, 그 소리의 주인공이 예수라면 어떻게 응답하고 일해야 할까?

예수의 비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이렇게 풀어야 한다는 것이 서남동목사의 해석이다. 

자! 강도를 만난 예수를 찾아 떠나자. 그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의 상처를 감싸주고 마침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 진정 참된 이웃이 되기 위하여! 멀리 갈 것 없다. 나는 지금 내가 사는 이 곳 델라웨어에서 찾을 터인즉, 그대는 그대가 사는 곳에서 그 소리를 찾아 볼 일이다. 

예수를 믿느냐, 아니 믿느냐의 전제는 단연코 필요치 않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들의 전제이니 그들의 몫이다. 살면 살수록 답답함이 늘어 가는 이민(移民), 귀와 입 트이지 않아 늘 당하고 산다는 생각, “오직 새끼들만 잘 되면…”하는 소원으로 하루 열 몇 시간을 노동으로 보내지만 만만치 않은 세상. 

“나도 옛날엔 한국에서…” 큰 소리 쳐 보지만 끝내 허한 가슴 쓸어내야 하는 오늘. “이쯤 살았으면 넉넉한데…” 그래도 밀려오는 외로움 -이 모두 “강도 만난 예수”의 소리 아니겠나. 

***서남동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셨을 때가 1970년대 한국이었다.

2014년 오늘, 때때로 듣는 한국발 뉴스 속에서 그리고 여기 내가 발딛고 사는 미국에서 여전히 “강도 만난 예수”의 한맺힌 소리들을 듣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