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그 감사에 -2

살며 문득 문득 쳐다보는 하늘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 아름다움이 그야말로 황홀지경에 이를 때도 있거니와 때론 무서움이 극에 달할 만큼 노엽게 다가 올 때도 있다. 그 어떤 경우에건 하늘을 바라 보노라면 내가 살아있음을 맘껏 누릴 수가 있다.

구름들이 만들어내는 언제나 다른 그림들과 , 해와 달 그리고 별과 무지개가 보여주는 빛의 향연, 뿐만 아니라 바람과 새들이 추는 언제나 새로운 춤사위와 소리들, 문득 쳐다보는 하늘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그 중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꼽자면 해 저물녘  서쪽하늘이다. 빛의 아름다움이 절정인 순간이기도 하고, ‘그 즈음에 노래하는 새소리만큼 평안한 소리가 어디 있을까?’ 할 만큼 감사가 절로 일어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황혼(黃昏) – 2023년은 내 삶의 길에서 그 황혼 속으로 첫 걸음을 떼는 한 해였다. 딱히 나이를 따져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맘의 상태와 내가 처한 여러 환경에 비추어 이젠 저무는 때가 되었다는 자각(自覺)을 곱씹는 한 해였다.

하여 이제부터라도 나도 조금은 아름답고 싶다는 생각이 다가 온 한 해였다.

올 한 해 깨달은 또 한가지.

지난 수 년, 지나치게 겉늙어 버린 나는, 사람보다는 자연, 하늘 바람 꽃 나무 무지개 별 달 해 들에게서 사는 재미를 찾으려 했지 않았나?하는 자각이다.

누군가는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했지만 내겐 틀린 노래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사람이었다.’

오늘도 내 방 사진 속에서 함께 숨쉬는 어머니 아버지, 장모 장인을 비롯해 목소리 들으면 편안하게 하루를 감사케 하는 아들 딸 내외,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세상 바라보는 눈 높이 맞추어 함께 이야기 나누는 좋은 친구들.

사 오십 년 건너 띄어 만났던 듣기만해도 설레고 반가운 내 어릴 적 동무들. 병덕, 종석, 경애, 경자….열 손가락 두 번 세 번 꼽아도 모자랄 신촌 대현교회 옛 신앙의 벗들.

규복, 길환, 영환, 진황… 비록 옛 얼굴에 주름 깊게 새겨 놓았으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맘으로 살아가는 옛 친구들.

아내 역시 마찬가지일 터.

선희, 경림, 동훈, 강언… (말 한번 터지면 끝없이 이어질 아내의 손 꼽음 이쯤 막으며)

홍목사님을 비롯한 숱한 선생님들은 잠시 접도라도.

돌이켜 그저 감사 뿐.

저녁 해질 무렵 새소리 듣노라면 어렵고 모질고 슬펐던 기억들은 사라지고, 그저 이어지는 건 감사 뿐. 사람에게.

그 이어짐을 확실히 믿게 하는 손녀딸의 가르침까지.

감사에.

2023년 마지막 날 밤에.

 (오늘 산책길에서)

2023, 그 감사에-1

지난 주일 교회에서 마주친 그가 건넨 말, ‘그러지 않아도 세탁소로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 해 넘기기 전에 밥 한끼 꼭 합시다.’. 내 대답, ‘뭘 다 바쁜데… 감사하고요. 해 바뀌는 게 뭐 그리… 그래요, 언젠가 한 번 뵙죠.’

오늘 낮에 그가 내 세탁소를 찾아와 나를 끌어 근처 식당에서 밥 한 끼 하며, 지난 이 십 수년 동안 서로가 살아 온 이야기 나누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동문 모임에서 였을게다. 워낙 그런 모임과는 연이 먼 내가 그 무렵 몇 번 참석하곤 했을 때다. 그는 당시 동문회장이었고, 필라델피아에서 미주 동아일보를 발행하고 있었다.

그 때가 아마 20세기가 막 문 닫을 즈음이었으니 이십 사 오년 전 쯤일 것이다. 이민 와서 한 십 여년 세탁소일에 파묻혀 살다 보니, 먹고 사는 일에 좀 자신감도 붙었고 일에 지치기도 했던 내가 헛바람 들어 동네 일 앞장 서던 때였다.

그러다 어찌어찌 그가 하던 신문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 일에 빠지기 시작했었다. 내 어릴 적 꿈을 이룰 기회일 듯도 싶었다. 정말 웃기는 이야기지만 한국에서 오늘날 뉴스 포탈의 첫 선구자는 바로 나 아니었을까?(누구에게나 허풍 섞인 소설이 있듯) 1979년 그 한 해 내가 했던 작업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국에 일간지라고 해 보았자 사 오십을 넘지 못했다. 그 모든 일간지들 한 달치를 정리하는 책을 발간하는 출판사를 운영했던 내 푸르렀던 스물 중반이었다. 신문의 행간을 읽는 내 노력에 당시 내노라 하던 언론인들이 매달 추천사를 이어 주시는 관심도 받았었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그 때의 흔적들을 보면 얼굴 후끈 달아 오르는 부끄러움 뿐이지만.

아무튼 논설위원, 주필 등으로 그 신문에 글을 쓰다가 이런 저런 까닭으로 그와 헤어져 주간신문사를 운영하였었다. 점점 헛바람이 단단히 불어 내 능력 밖 일을 벌이다가 그만…

몇 년 동안 고생 엄청 했었다.

그도 바뀌는 세상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사이 병이 들어 그 신문사를 접었고, 필라를 떠났었다.

그리고 오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안 일이지만 팔 년이 되었단다. 그가 우리 동네로 이사해 내가 적을 두고 있는 교회에 나온 지 벌써 그리 되었단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성실한 주일 교인이 아니라서 일 년에 서너 차례 얼굴 내미는 이른바 ETC(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교인이다.  아마 지난 일요일 성탄 예배 참석은 올들어 내가 한 첫 교회 나들이였을 게다.

아직 팔순에 이르지도 않은 그와 그의 아내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그가 오늘 내게 건넨 말들이다. “우리가 이 교회에 오고 처음에 당신 얼굴은 안 보이고 권사님(내 아내)만… 해서, 혹시 나 때문인가? 걱정도 했었고….”, “내가 죽기 전에 김회장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인사는 꼭 한 번 해야 되는데…. 하는 생각으로… 오늘…”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장로님! 뭔 말씀을… 전 장로님께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는 오늘도 옛날처럼 나를 ‘김회장’이라고 불렀다만, 나는 그의 옛 호칭인 ‘선배님’ 이나 ‘사장님’이 아닌 ‘장로님’으로 그를 대했다.

내 ‘고맙다’는 인사는 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 진심이었다. 내가 신문을 할 때 썻던 글들은 날카로웠었다. 내 글의 대상이 되었던 누군가는 매우 아팠다는 이야기들을 종종 들었었다. 심지어 글 때문에 소송을 당한 적도 있었고, 칼침을 놓겠다는 협박을 받았을 때도 있었다. 그게 또 당시 내 자랑이었다.

신문을 접고 난 후, 모진 고통 속 시간을 보낸 뒤에 내가 쓰는 말과 글들은 삶에 대한 감사, 이웃에 대한 고마움 등으로 바뀌었다. 상대도 대중이라는 다수가 아닌 ‘내가 마주 대하는 단 한사람만 이라도’ 로 바뀌었다.  나는 그런 내 변화에 대해 정말 크게 감사하며 산다. 신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 사람들 덕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도 그 중 하나였다.

나는 그런 시간의 흐름들을 이야기하며 그에게 말했다. “이게 다 장로님 덕입니다.”

그가 헤어지면서 말했다. “해 넘기기 전에 내 소원 다 풀었네. 참 고마워요! 김회장.”

그와 헤어진 뒤, 세탁소 도와주는 이들에게 가게를 맡긴 후 아내와 함께 어머니와 장인 장모 계신  곳을 찾아  한 해를 보낸 감사 인사를 드렸다.

생전에 매사 ‘감사하다’를 잇던 어머니와 ‘고마워’를 자주 말하시던 장모가 우리 내외에게 던지신 말씀. ‘그래, 그래 또 한 해 감사다!’, ‘고마워요, 고마워, 우리 한울이가 애도 낳고…’

매미 소리

한낮에 내 일터는 여전히 눅눅한 더위와 겨루는 싸움터이지만 일터로 향하는 이른 아침 바람엔 이미 마른 찬기가 담겨있다.

이 나이에도 아직 급한 성정을 버리지 못하고 저녁 나절 매미 소리 가득한 내 뜨락에서 가을맞이를 궁리한다.

장자(莊子) 왈 부지춘추(不知春秋)라 했다던가.

하루살이가 한 달을 알지 못하고, 여름 한 철 울다 가는 매미가 일년을 어찌 알겠느냐는 가르침이라지만, 매미가 땅속에서 오랜 시간 짧은 생명을 위해 버텨낸 시간에 대해선 장주(莊周)선생은 알지 못했을지니.

하루살이는 하루살이, 매미는 매미 답게 제 삶을 사는 것이고.

내 생각속에서 꿈꾸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길고 큰 것이니, 그를 즐기는 짧은 여름 날 저녁 한 때에 대한 감사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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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八字)에

모처럼 아들 며느리가 내 집을 찾은 토요일 오후, 나는 길이나 함께 걷자고 했다.

아이들이 찾아올 줄도 몰랐거니와, 내 집에 오기 전에 친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 뵙고, 양로 시설에 계신 외할아버지도 뵙고 왔다고 하여 내 얼굴에 크게 웃음이 피었다. 하여 함께 걷자고 했던 것이다.

낮이 많이 짧아졌다. 반나절 가게 일보고 나선 길이라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짧을 듯 하여 조바심이 일었다.

동네 공원엔 시월 하순의 가을이 가득 찼다.

공원길을 걸으며 수시로 쎌폰을 확인해 본다. 딸아이가 열흘 여행에서 돌아 왔다는 소식이 도착할 시간이 지나서였다.

아내는 양로 시설에서 처음 생일을 맞는 장인을 위한 자리에 대해 말했다. 덧붙일 것 없는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함께 하고 올라가라는 내 말에 아들 며느리는 선약이 있다며 떠나고, 어머니 아버지는 손주 녀석이 찾아왔었다는 일에 감격하여 전화를 끝내시지 못하고, 스무 시간 비행 끝에 제 아파트에 돌아왔다는 딸아이 소식에 내 가슴은 은단 입에 문듯 화하게 뻥 뚫리고…

그저 감사가 이어지는 시월인데…

나는 왜 지금 이 나이에도 한국 뉴스에 속을 끓이는지?

참 팔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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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에

하늘은 하루에도 숱하게 얼굴을 바꾼다. 오늘도 마찬가지.

일터에서 틈틈이 하늘을 바라보다 떠오른 옛 생각 하나.

정동 세실극장이었다.  이강백의 연극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를 보고 나선 극장 밖엔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1978년, 암울했지만 꿈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제나 지금이나 하늘은 변화무쌍이다.

변덕에 이르면 나 역시 하늘 못지 않다.

그래도 이 나이에 문득 하늘 보며 던져보는 질문.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감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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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침

가게문을 열고 부산하게 움직이다가 문득 눈에 들어 온 아침 하늘에 빠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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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이사 후 첫날 아침, 먼 길 이사 가는 새떼들이 내 생각을 오래 전 내 젊었던 시절로 데려갔다. 이민(移民)후 정말 멋 모르고 시작한 세탁소, 가게 이름을 지을 때였다. ‘나는 김씨고 당신은 이씨니 그냥 K&L로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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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한 세탁소가 내 평생의 업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새 장소로 이전해 첫 날을 맞았다.

솔직히 이제껏 내 맘과 내 뜻대로 이루어진 일이란 별로 없다. 나는 그게 나에 대한  신의 은총이라고 고백하곤 한다.

새 장소에서도 여전할 것이다.

높이 나는 새들도 있고, 낮게 팔랑이며 나는 새들도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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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4869김가인 나와 이가인 아내가 같은 생각으로 날고 있으므로.

2019년 3월 11일, 참 좋은 아침에

일기에

‘아파요?’ 늦잠에서 깨어 일어난 내게 아내가 물었다. 이젠 몸이 맘을 쫓아가긴 틀린 모양이다. 장기요양원으로 옮기시기로 결정하고 장인의 아파트를 정리하면서 아내는 사람을 부르라고 했었다. 노인네 짐이 뭐가 그리 많을까 싶기도 했고, 들기 버거운 가구나 물건들은 모두 청소하는 이들의 몫으로 남기고, 이제 장인에게 꼭 필요한 물건들만 챙겨 옮기는 일인데 번거롭게 사람을 부를 일은 아니라 우겼었다.

몇 시간 과외 노동에 늦잠을 요구하는 몸을 스스로 다독여 위로하며, 아침 일기를 쓰듯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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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어 달 전에 넘어지신 후 수술을 받고 재활원으로 옮겼다가 다시 병원과 재활시설로 오가셨던 장인이 이젠 장기 요양원으로 옮기게 되었답니다.

어제 오후 장인이 사시던 아파트 방을 정리하면서 눈에 뜨인 노트 한 권이 있답니다. 장모의 일기장이었습니다. 2012년에 발견된 담낭암과 싸우셨던 장모는 2016년 12월에 돌아가셨는데 그 기간 동안에 쓰셨던 일기장이었습니다.

매일매일 아주 짧게 두 세 문장 정도로 그날의 일상들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날 그날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 만난 사람들, 먹은 음식, 가족 이야기 등등 아주 자잘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기록해 놓으셨는데, 그 일기의 형식이 매우 독특했답니다.

모든 일기는 대화체로 쓰여져 있었고, 매우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이 쓰여져 있었답니다. 그리고 모든 일기의 시작은 똑같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참 감사한 하루였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일기는 그날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와 음식에 대한 감사로 이어졌습니다. 일기는 돌아가시기 한 달여 전 글씨가 삐뚤빼둘한 모습으로 바뀔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일기 속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밉다’라고 지칭한 유일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바로 장인이었습니다. 그 ‘밉다’라는 표현은 몹시 싫다는 뜻은 아니었고, 철없는 아이를 바라보는 애처로운 심사를 표현한 말이었습니다.

이즈음 장인은 그야말로 철없는 아이와 다름없답니다. 게다가 이따금 오락가락하셔서 엉뚱한 말씀을 일삼곤 하신답니다.

장모의 일기장을 훑어 보다가 제 머리 속에 든 생각 하나랍니다. 장모가 살아 계셔 오늘 일기를 쓴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참 감사한 하루였습니다.’라고 쓸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난간 시간들을 돌이켜 보며 감사한 마음이 들 때 삶은 언제나 살 만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답니다.

새로운 한 주간 감사함이 매일매일 넘쳐나는 하루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My father-in-law, who fell down about two months ago, underwent a surgical procedure, and then moved back and forth between a rehabilitation center and a hospital, is to move to a long-term care facility.

While I was cleaning up the apartment in which he had been living, I found a notebook. It was my mother-in-law’s diary. It was the record of her life and thoughts during the period from the time when cancer had been found on her gallbladder in 2012 to the time when she had fallen to it in December 2016.

She very briefly wrote about her day in a few sentences every day. While she recorded small stories about everyday life, such as the condition of her body and mind, people who she met, food, and family, her diary had a very unique style.

It was written in the conversational style, as if she had been having a nice chat with a very close friend. And all the beginnings were the same every day: “God, it was a really grateful day today, too.” Then, she continued with gratitude for the people who she had met and food that she had eaten on that day. The diary was written until her handwriting became wobbly, about a month before she passed away.

There was only one person who she said she “hated” in the diary. It was her husband, my father-in-law. Of course, she did not mean that she really hated him, but she expressed it as a wistful and distressful feeling for an immature child.

In these days, my father-in-law has been like an immature child. Furthermore, as his mind often wanders, he strikes false notes frequently.

While I was scanning through my mother-in-law’s diary, one thought came across my mind. It was that if she were alive to write her diary today, she would definitely write, “God, it was a really grateful day today, too.”

I think that life is always worth living, if we feel grateful when we look back on for the past time.

I wish that you’ll have days of overflowing gratitude every day this week and beyond.

From your cleaners.

감사에

추수감사주일에 한 해를 돌아본다. 어느새 노년의 초입에 선 내게 한 해는 참 짧다. 그저 모든 일들이 어제 같다.

오늘은 우리 부부가 적을 둔 교회가 아닌 델라웨어 한인 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장인 장모가 적을 둔 교회이다. 지난 해 장모께서 떠나신 후, 나는 그 교회 목사님께 약속을 드렸다. 일년에 네 번 쯤은 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겠노라고.

우리 내외는 침례교회 목사님 내외분을 비롯하여 교우들에게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산다. 참으로 작은 신앙공동체이지만 공동체의 제 멋과 맛이 도두라져 내놓을만한 교회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돌아가신 장모에게나 홀로이신 장인에게 딸, 사위보다 사뭇 가깝고 정겨운 교회 식구들이다. 감사 주일에 느끼는 감사의 크기가 남다른 까닭이다.

구순(九旬)을 코 앞에 둔 장인은 오늘 하모니카를 부셨다.

노인의 하모니카 소리에 함께 화답해 준 공동체 식구들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우리 부부는 늪이 있는 공원에서 머물고 있는 가을의 마지막 풍경들과 함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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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어찌 성장하는 젊음만이 감사이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모두 감사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