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활에

유난히 더디 오는 봄입니다. 올핸 봄꽃 보다 먼저 부활절을 맞습니다. 부활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입니다. 예수와 부활과 봄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함께 생각해 보는 말들입니다.

하여 성서를 펴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 마가복음 1장 14-15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 마가복음 16장 6 – 7

예수 이야기가 시작된 첫 장소가 갈릴리였고, 이야기를 맺는 장소 역시 갈릴리라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물위를 걷고, 거친 풍랑을 잠재우고,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숱한 가적과 치유의 역사를 만들어 냈던 곳이 바로 갈릴리였다고 기록자 마가는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못박혀 죽고, 무덤에 머물다 부활한 예수는 다시 갈릴리로 갔다고 기록한 것도 마가입니다.

갈릴리 – 그 땅에서 예수는 나병환자를 고치고,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고, 귀신들린 자의 정신을 바르게 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유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예수는 병 고침을 받은 이들을 향해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명령했다고 마가는 이야기합니다.

이런 예수의 명령을 <가족(사회)에게로 돌아가라는 귀환명령>이라고 규정한 사람은 일본 신학자 아라이 사사구(荒井献, 그의 책 ‘예수의 행태’에서) 입니다.

예수 당시 병든 자들은 죄인이요,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죄가 있어 죄인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외로운 처지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죄 없는 죄인이요, 원치 않은 소외였기에 한맺힌 이들이었습니다. 예수의 귀환명령은 바로 한 맺힌 이들에게 한을 풀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예수의 명령에 따라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성서는 귀환 이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전해지는 당시의 관습이나 체제로 미루어 귀환 이후 그들의 삶은 여전히 곤고 하였을 것입니다. 가족과 이웃들은 여전히 그들을 비정상적이었던 사람으로 취급 하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을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이 나옵니다. 예수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고 가족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여인이 돌아간 곳에는 여전히 손에 돌멩이를 들고 아무 때나 그들이 맘만 먹으면 던질 수 있는 이들이 넘쳐 났을 것입니다.

바로 부활한 예수가 먼저 가 있는 곳, 갈릴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2018년 오늘, 예수가 먼저 와 있는 곳 내가 발 딛고 사는 여기의 모습입니다.

소외된 이들, 한 맺힌 이들이 사람 본래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현장에서 오늘도 함께한다는 예수의 선언 – 바로 부활입니다.

이 봄에 필라델피아  Schuylkill 강변을 함께 걷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예수가 먼저 와 걷고 있던 갈릴리를 떠올려 보는 까닭 역시 바로 그 부활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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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함께하라!

매서운 추위가 몰아친 주일 아침, 제 이메일함에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에 대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인근에 사는 한인들 가운데, 지난해 대한민국 진도 앞바다에서 있었던 세월호 참사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모여 “잊지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까?”라는 물음을 줄기차게 던지며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이들이 오는 3월초에 세월호 유가족들 두 분을 초청하여 모시고 간담회를 개최한다는 내용과 그 간담회를 위한 준비사항들을 알리는 소식이었습니다.

그저 마음으로만 성원을 보낼 뿐 이런 저런 핑계로 적극적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으로 이 글을 씁니다.

육년 전인 2009년 1월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뉴스를 전하는 화면에서는 엄청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즈음 날이 새면 터지는 IS(이슬람 국가)의 만행에 버금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시간 2009년 1월 20일 아침 7시20분, 대한민국 서울 용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크레인에 실린 컨테이너 박스안에 있는 경찰 특공대들이 망루 양쪽을 잡아당겼습니다. 그러자 망루 틈이 벌어지고, 불기둥이 망루 아래로부터 솟구쳤습니다. 불은 삽시간에 망루 전체로 퍼지며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누군가가 외쳤다는 소리입니다.

“저기 사람이 있어요. 저기 사람이….”

애타는 맘으로 외쳤을 “저기 사람이 있어요. 저기 사람이….”라는 절규를 육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리고 열달 전인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 진도 앞바다, 바닷물 속으로 잠겨가는 여객선 세월호에 울려 퍼지던 소리 “가만히 있으라” – 그렇게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은 단 한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2015년 2월, 오늘 우리들 귀에는 이런 소리들이 들립니다. 바로 “그만 하라!”입니다. “제발 지겹다. 이젠 좀 그만 하라.”는 소리 말입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뜻만 있었다면 충분히 살릴 수도 있었던 생때같은 가족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기 사람이 있어요, 저기 사람이….”를 외치는 이들에게 “가만 있으라!”라고 외치는 자들 “이젠 지겨우니 그만 하라”고 외치는 자들의 목청만 높아가는 세월입니다.

성서 마가복음의 기자인 마가는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갈릴리에서 끝나는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 마가복음 1장 14-15절, 개역개정본>

갈릴리에서 일하던 요한이 잡혀 죽음에 이르게 되자 예수는 갈릴리로 나가 그의 일을 시작했다고 마가는 전합니다.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 마가복음 16장 7절, 개역개정본>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는 누구보다도 먼저 갈릴리로 간다는 마가의 전언으로 사실상 마가의 예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갈릴리” – 예수가 나아갔던 곳이고 일했던 곳이고 다시 살아나 달려간 곳입니다.

예수가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기전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 패거리였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 마가복음 14장 70절)”

“갈릴리 사람이니 너 또한 한 패거리지?”라는 물음,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같지 않으신지요?

지친 예수“저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라는 외침을 불온하고 불순하다고 낙인찍으며 “가만 있어라!”, “이젠 그만 하라!”외치는 자들을 향해 나아갔던 이, 바로 예수라는 믿음이 제 믿음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저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 곳, 2015년 오늘 “가만 있어라!”, “이젠 그만 하라!”고 강압하는 자들을 향해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이들이 있는 곳, 갈릴리에 예수가 함께 한다고 믿습니다.

매운 바람소리 온종일 그치지 않는 날,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 사람들의 모임”에서 전해 온 소식 가운데 만난 예수랍니다.

‘우리가 텍스트(성서)에 말을 걸기까지는 텍스트(성서)는 결코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텍스트(성서)는 우리 자신의 언어로 대답한다. 그것이 사회학적인 언어이든 신학적인 언어이든지간에 그렇다. 간단히 말해서, 새로운 대답은 새로운 자료로부터 나오기보다는 새로운 물음으로부터 나온다.” – John Goodrich Gager(전 프린스톤대학 종교학 교수)가 쓴 <우리들은 적들과 손잡을 것인가? 사회학과 신약성서 (Shall we marry our enemies? Sociology and the New Tastament)>에서

갈릴리 – 갈릴리 4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0 

그 동안 베드로는 바깥 뜰에 앉아 있었는데 여종 하나가 그에게 다가 와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군요”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여러 사람 앞에서 “무슨 소린지 나는 모르겠소” 하고 부인하였다. – 마태 복음 26 : 69 – 70 

그러나 베드로는 이 말을 또다시 부인하였다. 얼마 뒤에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시 “당신은 갈릴리 사람이니 틀림없이 예수와 한 패일 거요” 하고 말하였다. – 마가복음 14 : 70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 가시는 동안 그들은 하늘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흰 옷을 입은 사람 둘이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갈릴리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 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 사도행전 1 : 11 

이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리에서 비롯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서 일어났던  나자렛 예수에 관한 일들입니다. – 사도행전 10 : 37 – 38 

예수와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일컬어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했다는 기록들은 성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가 부활승천한 이후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시기와 장소를 이렇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 사도행전 11 : 25 – 26

그러므로 예수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 예수가 떠난 후 믿음으로 함께했던 무리들은  한동안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불리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명칭의 최초 이름이 바로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말도 성립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갈릴리는 어떤 곳이었고,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Map-Galilee-Northern-Palestine

요세푸스는 갈릴리땅이 너무나 비옥해서 게으름뱅이들까지도 그 땅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그 곳으로 이주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말에 좀 과장이 섞여있다 하더라도 갈릴리일대는 남부 유대지방에 비해 비옥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은 곧 갈릴리 거주인들은 대부분 소작농이었습니다. 자기 농토를 경작한다고 하여도  영세농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로마와 예루살렘 종교권력에게 내는 과다한 세금으로 인해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대부분 농지의 실소유주는 예루살렘에 있고, 갈릴리 거주민들은 부재지주의 땅을 일구는 소작농이 주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어업은 갈릴리 사람들의 주요 직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시 갈릴리호수에서 낚은 고기들은 염장처리되어 예루살렘은 물론이거니와 멀리 로마까지 수출되었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갈릴리일대는 우리나라로 친다면 함경도나 만주의 간도 일대쯤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가 갈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역사적 환경 변화에 따라 우리나라 땅도 되었다가 중국을 비롯한 오랑캐의 땅도 되었다가 했던 지역이었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중심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땅 갈릴리라고 불렀던 까닭입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부 유대에 비해 다른 나라들의 문화를 많이 받아 들인 곳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 못지 않게 야훼 하나님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갈릴리가 유대 독립 봉기의 진원지가 된 것은 바로 그런 신앙 전통을 수호코자 하는 정신이 그 주민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 독립운동의 주축이었던 열심당(젤롯당)의 본거지가 바로 갈릴리라고 했을 만큼 예루살렘보다 더 유대적이기더 했던 곳입니다. 

이방인들의 땅이자 유태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반란의 땅이라는 이중성이 공존한 곳이 바로 갈릴리였던 것입니다. 

이쯤 갈릴리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록을 소개드립니다. 

“갈릴리는 광활한 지역이며 수많은 이방 나라들로 둘러 싸여 있었기 때문에 언제 전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강력하게 저항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갈릴리인들은 어려서부터 전쟁에 익숙해졌으며 인구도 수없이 많았다. 갈릴리에는 용맹한 자들이 끊어진 적이 없었으며 땅은 전체가 비옥하고 풍요하였으며 온갖 종류의 나무들로 가득차 있었다. 

어찌난 소출이 풍부하였던지 천하의 게으름꾼들도 갈릴리에 오면 부지런히 경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따라서 갈릴리 지역은 노는 땅이 없었으며 그 주민들도 빈둥거리며 노는 자가 없었다. 

더우기 갈릴리 지역은 마을들이 수없이 많아 어딜 가든지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이는 다 땅이 비옥한 덕분인데 가장 작은 마을도 15,000여면 이상의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곳, 시대의 고통과 고민들이 넘쳐 나던 곳, 삶의 활력과 고통들이 뒤섞여 있던 곳,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동정녀 – 갈릴리 3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19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 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이사야 7 :14 

이 말을 듣고 마리아가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읍니까?” 하자  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 누가복음 1 : 34 – 35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읍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영적인 것이 왔읍니다. 첫째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땅의 존재이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읍니다.  흙의 인간들은 흙으로 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습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또한 지니게 될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15 : 45 – 49 

갈릴리로 향하는 예수의 발걸음을 뒤쫓기 전에 “예수의 탄생과 어린시절” 이야기를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의 탄생과 어린시절에 관한 기록은 성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곳에 남아 있습니다. 물론 도마의 유년기 복음이나 야보고의 유년기 복음과 같은 성서외적인 기록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참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가복음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요한이 잡히자 바로 갈릴리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시작됩니다. 당연히 예수 탄생이나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남기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복음 1 : 14)”고 기록하므로써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른바 선재설(先在說)이라고 합니다. 물론 요한복음도 그 이외에 어떤 탄생 이야기나 어릴 적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마태와 누가에 나타난 예수 탄생이야기에도 같은 점과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우선 같은 점은 예수가 헤롯대왕 때 탄생했다는 것, 탄생지가 베들레헴이라는 것, 고향은 나사렛이었다는 것, 아버지는 요셉이었는데 다윗의 후손이었다는 것, 천사들이 탄생을 미리 알렸다는 것, 예수가 후에 구세주가 된다는 것, 무엇보다도 두 복음서의 일치되게 전하는 것은 마리아는 동정녀였다는 것 등입니다. 

반면에 서로 다른 점을 꼽자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이 마태복음에는 없다는 것, 동방박사 이야기는누가복음에는 없다는 것, 세레요한의 출생과 천사의 알림 등등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있다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보통 예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 즈음에 우리들이 생각하고 나누는 이야기들을 떠올려 보면 이 두 복음서 이야기를 합친 것이 됩니다. 

숫처녀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는 동정녀 탄생을 믿느냐 안믿느냐를 기독교 신자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잣대로 사용하는 교회의 힘은 여전히 막강합니다. 학문적으로는 성서가 쓰여지던 당시 고대에 유행하던 영웅탄생 설화를 기반으로 한, 복음서 기록자들의 신학적 상상력으로 나온 결과라는 학설이 오래전에 이른바 종교사학파라는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습니다. 

또한 기독교 교파에 따라서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그것이 어떤 생물학적인 기적이나 진실을 다투는 문제가 아니라 초대 교회 사람들의 신앙적 고백이라고 믿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하자면 길지만 오늘날 기독교 장로회와 한국신학대학교가 설립된 배경을 보면, 당시(1947년에서 1953년 사이) 한국 기독교의 보수세력들이 장공 김재준목사를 이단으로 몰고 목사직을 박탈하면서 이루어진 일인데, 장공 김재준목사를 공격한 보수세력들이 내세웠던 무기가 바로 성서무오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동정녀 탄생에 대한 교리 해석차였답니다. 물론 보수세력들이 내세운 논리가 그럴 뿐이고 뒷 이야기는 길답니다. 나중 한국교회사 이야기로 다룰 수 있다면 또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요. 

퓨 리서치 - 동정녀

이쯤 아주 최근에 있었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조사결과를 하나 소개 드립니다. 지난해 년말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 18일에 Pew Research Center에서 성탄절 풍습, 어제와 오늘(Celebrating Christmas and the Holidays, Then and Now) 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답니다. 

그 조사 항목 가운데 “예수 동정녀 탄생을 믿는가?”라는 것이 있었고 그에 대한 미국인들의 응답 결과랍니다.(옆에 도표 참조) 

약 ¾인 73%의 미국인들은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고 답을 했답니다. 그 가운데 남성은 69%가 여성은 78%가 그렇게 믿는다고 답했답니다. 백인의 경우는 71%, 흑인의 경우는 90%가 그렇게 믿는다고 답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 가운데 87%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은 크게 놀랄 것은 없는데, 개신교나 천주교인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도 약 1/3가 그렇게 믿는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잇는다고 하자면 꽤 길게 이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죽자고 이 문제에 매달려 있는 분들도 정말 많답니다. 

우리들을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하는 많은 이정표 가운데 하나임에는 틀림없지만 저는 이 문제에 크게 믿음의 에너지를 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답니다. 이것은 바로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교리의 문제이기도 하고요. 

천주교를 비롯한 많은 개신교 교회가 이즈음까지 주요한 신앙고백문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사도신경을 보도록 하지요.(사도신경은 기원 후 400년을 전후한 시대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기위해 정말 중요한 과정이 이 사도신경에는 빠져 있습니다. 바로”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와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사이에 있는 예수가 하신 말씀들과 행위들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예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신앙의 영역에 속하는 부분이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교리에 대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는 완전한 신(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인간 예수)임을 고백하는 아주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로 초대교회가 고백했던 신앙이 바로 동정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에 있어 신자와 아니냐를 가르는 잣대로 사용하는 것도 미련한 일일 뿐더러, 이 신앙고백이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는 일도 미련한 일이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이 함께 할 갈릴리 예수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으로 충분히 이런 잣대나 걸림돌은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왔다 – 갈릴리 2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18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하고 선포하였다. – 마가복음 1 : 4 

이 때부터 예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며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 마태복음 4 : 17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 – 마가복음 1 : 15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공관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느낌들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세례요한도 제자들을 두고 있었고, 예수도 제자들과 함께 였습니다. 서로 무리를 지어서 지낸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얼핏 두 무리들 간에 경쟁이 있었던 것 같은 성서의 기록들도 있습니다. 이미 우리들이 이야기했던 주기도문이 나오게 된 배경은 그런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3장 과 4장에는 세례에 두고 두 무리들 간에 경쟁하는 듯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지방으로 가셔서 그 곳에 머무르시면서 세례를 베푸셨다.    한편 살림에서 가까운 애논이라는 곳에 물이 많아서 요한은 거기에서 세례를 베풀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의 일이었다. – 요한복음 3 : 22- 24” 

그리고 요한은 이런 기록도 남겼습니다. “예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를 얻으시고 세례를 베푸신다는 소문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귀에 들어 갔다. – 요한복음 4 : 1” 

동시에 서로 다른 곳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세례요한에게도 사람들이 많이 갔지만 예수에게 더 많이 몰렸다는 이 기록의 상황은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경쟁 관계에 있는 집단간에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가 세례를 준 사실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머지 세 개의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가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이 없거니와 요한복음도 4장 2절에 바로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베푼 것이었다. 요한복음 4 : 2”라고 말입니다. 

성경의 기록들을 통해서, 또는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우리가 확실히 알수 있는 사실은 요한이 예수보다 조금 먼저였고,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고,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얼마간 요한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마가복음 1 : 4” 라는 선포는 광야의 세례요한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 : 15” 는 선포는 갈릴리에서 행한 예수의 선포입니다. 

얼핏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이 두 메세지야말로 세례요한과 예수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선포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회개”는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마태복음 3 : 10” 운명에 처할 심판을 받게되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나(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면 죄를 용서 받겠지만, 이제 오실 그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데(마태복음 3 : 11),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쭉정이)은 “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 마태복음 3 :12”는 심판을 하실 것 이라고 경고였습니다. 

세례요한의 회개는 무서운 심판이 따르는 두려움과 불안이 전제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회개”는 세례요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회개”는 심판 우선이 아니라 “기쁨”과  “구원” 이 우선하는 회개였습니다. 

 이 차이는 요한과 예수가 살았던 모습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1 : 18 – 19” 

세례요한과 예수는 인간적으로 보자면 둘 다 똑같이 젊은 나이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세례요한은 목이 잘리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온 몸에 피를 다 빼고 죽습니다. 한 사람은 그저 사람이었지만 또 한 사람은 저나 믿는 이들에게는 신이 됩니다. 그 둘의 명확한 차이는 삶의 태도였습니다. 

두번 째 차이는 세례요한에게 있어서 심판은 “오실 이”가 행하실 미래의 일이었지만,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왔다”라는 지금 오늘 여기에서 이루어 진 일입니다.( 이런 예수의 가르침은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확인해 나갈 것입니다. 

시장

마지막 결정적인 차이는 세례요한이 서 있던 삶의 자리는 “광야”였지만, 예수의 삶의 자리는 “갈릴리”였다는 것입니다. 광야는 사람들이 일상적인 삶을 사는 자리가 아니였습니다. 어떤 목적, 일테면 반역이든 혁명이든 같은 생각으로 뭉치기 위한 곳이었기도 하고, 일상을 떠나 기도로 신을 만나기 위한 장소였기도 합니다. 아니면 도피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만나러 가려면 목적을 가지고 찾아 가야만 하는 곳에 요한은 서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갈릴리로 갔습니다. 갈릴리는 사람들이 일상적인 삶을 사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는 먼저 사람들이 하루 하루 살아가는 곳으로 걸어 나간 것입니다. 그의 제자들은 제자들이 예수를 찾았던 것이 아니라 예수가 먼저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다가가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가롯유다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 합니다.) 

이제 갈릴리 예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과정 – 갈릴리 1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17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읍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태복음 11 :  2 – 6 

이제 예수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예수와 세례요한의 관계와 그 두 사람간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아주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답니다. 오늘날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인들이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나 믿음 또는 기독교를 개독교라며 비하하면서까지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의 모습들이 형성된 과정을 짧게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으며 하나님 나라를 바로 만나고 누리려면, 예수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수이기도 하거니와 성서에 나오는 예수 이야기나 예수가 하신 말씀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창조 이래, 또는 인간이라는 종(種)이 지구상에 나타난 이래 사람들의 생각이 획을 긋듯 크게 바뀐 때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가 형성된  17세기가  아닐까합니다. 

예수에 대해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순서대로 있는 사실 그대로 쓰여진 책이고, 예수는 신의 아들이며 곧 신이라는 믿음이 지배해왔습니다. 

태양이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게 사실로 밝혀지면서 천체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는데, 보니까 거기 하늘나라는 커녕 천사 날개같은 것은 다 허구요, 소설이었다는 생각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라”는 마지막 때도 결코 오지도 않았고 올 것 같지도 않은 생각들이 들기 시작합니다. 

교황, 국왕, 귀족 등의 최상위 계급들이 무너지면서 그 자리를 급속하게 돈을 가진 이들이 제 몫으로 차지하는 세상으로 바뀝니다. 인권, 평등, 자유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천부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변하고 생각이 바뀌면서 “신은 죽었다”라는 소리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그 무렵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 실제 예수와는 다르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Herman Samuel Reimarus, 1694년-1768년)라는 사람이 시초라고 합니다. 

그 뒤를 이어 교회나 예수에 대한 관심이 있는 분들(믿음과 교인과는 관계없이)이 한번 쯤은 들어 보셨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학자로서는 슈트라우스 (David Friedrich Strauss)가 시초이고 문학으로는 ‘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 “예수전”을 쓴 죠셉 르낭(Joseph Renan)입니다. 

슈트라우스라는 신학자가 <예수의 생애>를 발표한 것이 1835년이었습니다. 스트라우스는 이 책에서 성서속 예수 이야기에는 신화 곧 전설이 많이 끼어 들었다고 말하면서, 이런 역사적이지 않은 사실이 끼어든 것은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의도적으로 사기를 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신화적 상상력이 발동한 탓이라고 하였답니다 . 

역사적 예수

슈트라우스는 당시 주류들에  의해 크게 비판받기는 했지만, 이후 역사적 예수 연구에 불을 붙이는 역할은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독일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이 거세집니다. 이들은 신의 아들 또는 신이었던 예수보다는 도적적으로 권위있는 사람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학문적으로 이들을 향해 첫 번째 철퇴를 든 사람은 아프리카의 성인 슈바이처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이런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한 것은 미국의 복음주의 또는 근본주의 종교 운동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 무렵 미국 교회의 (거의 전적인 그리고 일방적인) 영향을 아래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 그리고 아래 계속되는 사람들의 생각의 변화 곧 기독교 신학, 신앙, 운동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19세기, 20세기 초 미국의 복음주의 신앙으로 회귀 또는 정체 되어 있는 한국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드립니다.  이러한 성향은 비단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한민족이 불교와 유교를 받아 드렸을 때와 그것을 이어가는 행태와도  매우 유사한 점도 함께 나누어야 할 중요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무튼 의사이자 위대한 신학자였던 슈바이처가 “예수의 생애 연구사”를 펴 낸 것은 1906년의 일입니다. 슈바이처는 이 책에서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사람이었던 예수는 역사속에 살다 간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 곧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고 그려서 만든 그들이 좋아하는 예수의 모습일 뿐”이라고 통박하였습니다. 

여기에 “역사속  예수 연구”에 대해 결정적 쐐기를 박은 사람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불트만입니다. 그의 말을 쉽게 풀어 쓰면 “예수가 어떤 역사적 인물이었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 성서는 오직 예수가 구세주라는 선포에 충실할 뿐이다. 곧 말하는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구세주라는 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론은 매우 강력하였습니다. 적어도 한 세기동안 그의 영향력은 전 유럽을 덮었고 한 동안 역사적 예수를 말하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 불트만에게 “아니요!”라고 나선 사람들은 바로 불트만의 제자들인 케제만, 보른캄등이었습니다. “역사적 예수 이야기 없이 어떻게 신의 아들 예수 이야기가 나오랴?”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 케제만 아래서 대단한 한인 신학자 한 사람 안병무가 나옵니다. 안병무 목사 – 이른바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 사람이며 세계 신학계에 한국말 “민중”을 알린 사람입니다.(무릇 모든 학문은 그것을 뛰어넘는 성과들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시대 앞서 나갔던 인물들에 대한 평가에 있어 제 속차림이나 편협함이 앞서는 민족에게는 미래에도 큰 인물이 나오기 힘든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비단 학문에서뿐만이 아니라, 정치, 문화, 종교, 사상, 나아가 돈을 따지는 경제에 이르기 까지 말입니다.) 

다시 예수 연구 이야기로 돌아가서 최근래에 이르러 1985년에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와  존 도미닠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중심이 되어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가 발족이 됩니다. 이들은 짧은 시간내에 엄청난 양의 연구들을 발표합니다. 이들의 연구 가운데 “진짜 예수가 한 말들은 무엇일까?”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쯤 제 개인적 경험 몇 줄 얹습니다. 

나이 이십까지는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 :성서는 일점 일회도 잘못이 없다)에 기반한 그야말로 미국식 근본주의 교단에서 성장을 했답니다. 교회 주보조차 성물(聖物)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 무렵 막 성장 가도에 불을 짚히던 서대문 순복음 집회에 참석했던 기억도 있군요. 그보다는 제가 다니던 교회 새벽기도를 통해 체험했던(글쎄요, 깜박 졸다가 꿈에서 본 것인지, 기도 중에 제 정신이 다른 세계에서 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수와의 만남이 더욱 선명하답니다. 

그러다 스물 언저리부터 학문적으로 성서를 읽게 되었답니다. 물론 그 무렵 제 개인적인 일탈(이즈음 이 말이 유행인지라)로 하여 성서를 수차례(정확히 몇 번인지는 기억 못하지만) 통독을 하는 경험을 했답니다. 그것 밖에 할 수 없었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답니다. 오랜 동안 성서를 꿰고 있다는 자만으로 살았어도 창피하지 않을만큼 읽었답니다. 

그리고 예수세미나의 열풍이 신학계에 일 때 저는 여기 미국에서 그들에게 빠졌었답니다. 그 그룹들이 내놓는 책들은 거의 읽어 보았다고 하여도 크게 엇나가지 않을 정도로 빠졌었답니다. 

학문적으로 예수세미나 열풍과 신앙적으로는 복음주의(근본주의) 열풍은 극과 극에 있지만 서로가 모두 시들해질 무렵 저는 이제 삶의 내리막을 걷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즈음의 제 생각으로 이 글을 이어가고 있답니다. “모두가 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예수의 복음은 복음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그 믿음으로 예수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되짚어보는 제 노력이며, 궁극으로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순례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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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쯤. 

눈이 엄청 내려 사방이 고요한 밤에

(이야기가 너무 딱딱해 진 듯하여 아까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사진 한장?”하는 아내를 위해 마지못해 찍은 사진 하나 붙입니다.).

 

예수의 수염

밥이 된 사내 이야기 – 2

1. 그의 수염에 대하여

조르즈~1

그는 아비의 일을 도왔다. 맏아들이었던 사내는 아비를 돕고 그 가업을 잇는 일에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시골 마을의 목수노릇이 다 그렇듯 넉넉한 부를 누릴 만한 직업은 아니었다. 그래도 일은 꾸준하였으므로 삶이 궁핍하지는 아니하였다. 놀고먹는 땅 부자나 침략군의 앞잡이 노릇으로 떵떵거리는 권세가들에 비하면 하챦았으나 결코 기죽지 않을 수공업자로서의 아비의 직업에 그는 늘 당당하였다. 장인(匠人)으로서의 자부도 남 못지 않았다.

실내 가구라야 고작 돗자리 하나와 땅바닥에 놓인 방석 몇 개, 두어 벌씩 식구들의 옷가지를 가지런히 챙겨넣은 날렵한 채색무늬로 조금은 가벼운 느낌의 나무 옷장, 사내의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투박한 점토 화병 두어 개가 눈에 띄는 침실이자 부엌, 아니 작업장이기도 한 나사렛의 오두막은 사내가 평생 가져 본 단 하나의 집이었다. 온통 돌쩌귀 울퉁불퉁한 오솔길도 사내에겐 추억이었다. 깡촌이었던 사내의 고향 나사렛은 그의 추억보다 더욱 질기게 그를 따라 다녔다. 그는 “나사렛 예수”로 불리었으므로.

조숙하였던 사내는 열 살 무렵부터 그가 고향을 떠나 떠돌 것을 예견하였다. 끝내 사내는 아비의 가업을 잇지 못하였다. 그는 이미 다른 세상 사람이라는 미치도록 큰 꿈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마침내 사내의 꿈이 그의 삶을 이끌고 갔기 때문이다.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고향을 등진 사내는 갈릴리 호수가 바람맞으며 집 없이 떠돌았다. 때론 홀로 그 호숫가를 배회하기도 하였고 이따금은 수많은 군중이 그를 따르기도 했으며, 그와 함께 떠돌기로 작정한 몇몇 수행자들과 함께 호숫가에서 날밤을 세우기도 하였다. 떠돌이였던 사내의 일행들은 먹고 마시고 하늘나라 이야기 곧 딴 세상이야기를 즐겨 떠들곤 하였는데 그것은 사내가 죽음에 이르게되는 빌미가 되었다. 사내가 서른 세 살 되던 해, 그는 그의 말과 행위로 인해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예수” – 그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서른 세 살 사내의 처음 초상화엔 수염이 없었다. 셈족 특유의 털도 서른 셋 젊음에는 어울리지 않았을 듯 싶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거룩”이란 이름으로 그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었다. 구렛나루가 덧붙여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수염은 길어만 갔다. 짙고 긴 수염은 시퍼런 젊음을 어둡게 가리며 보다 거룩하게 길어갔다.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초상속에서 사람이 아닌 신의 얼굴이 되어갔다.

내가 그의 수염에 이리 매달리는 까닭은 거룩하게 거룩하게 박제된 초상속 그의 길고 탐스런 수염탓에 신음하는 그의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왕실 전용 이발소에서 잘 다듬고 향수까지 칙칙 뿌린 듯한 그의 초상속 수염이 대체 나사렛 촌사람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집을 나와 그가 줄곧 헤매던 갈릴리호수 갯 냄새 배인 수염이 어찌 그리 고울 수 있겠는가? 갈릴리 촌놈들 한 떼 거느리고 죽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그가 성문앞 이발소에 들려 분장이라도 하였단 말인가? 그렇다. 수천금 장식장 속에 고이 모셔둘 거룩한 잔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숨이 코 끝에 달려 허덕이는 내 영혼과 이 땅의 삶, 나와 같은 삶의 자리에서 고뇌하는 이웃에게 한 모금 물 쏟아 부을 쪽박을 찾아 내는 일, 그것은 갈릴리 호수가 거친 촌사람속에서 신바람나게 일하며 즐겨 하늘나라 이야기하던 예수의 모습을 찾아 내는 일이다.

긴네롯호수, 게네사렛호수, 디베랴(티베리아스)호수등으로 불리는 갈릴리호수는 동서 7마일, 남북15마일에 이르는 가히 바다같은 호수다. 최고 수심이 150야드나 되는 깊은 호수는 짠 맛나는 담수이어서 정어리, 자리돔, 자바리등의 바닷고기와 메기 돌잉어등의 민물고기가 공생하는 풍부한 어장이다. 겨울 평균기온이 화씨 60도 정도일 만큼 온화한 기후는 호수면을 평온케 하다가도 이따금 요르단 침하지대에서 불어오는 돌풍에 미친 듯 요동치기도 하는 바다, 그 호수가를 약간의 소금기 엉기고 비린내 밴 수염 날리며 떠돌던 예수를 찾아 내는 길을 떠난다.

“조심스럽게 예수의 행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특징적인 것은 귀신추방, 안식일 금기의 파괴, 정결법의 침범, 유대인의 율법성에 대한 논쟁, 세리나 창기들과 같은 소외된 사람들과의 연대, 아이들과 부인들에 대한 관심 등이다. 또한 예수는 세례자 요한같은 고행주의자가 아니라 먹기를 탐하고 약간의 술도 마셨다는 것이 인정된다. 이에 더해서 그는 작은 추종자들의 무리를 모았다는 사실을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역사적 예수 곧 이 땅을 살았던 예수의 모습을 찾는 일은 공허하다고 설파한 당대의 뛰어 난 신학자 불트만의 말이다. “성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케리그마의 집산”이란 불트만의 어려운 정의을 쉬운 말로 쓰면 “성서와 교회는 오직 거룩한 수염이 달린 예수만 말할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 불트만이 그려 본 실제 예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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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나는 갈릴리 호수가 비린 바람 맞으며, 가끔은 씻지도 않은 손으로 그를 따르던 무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다 턱수염에 손닦는 예수를 찾아 나서련다. “그이는 자신을 밥이라고 했어요. 먹히는 밥 말이예요. 호구요. 호구. 우리에게 먹힐 밥이라고 했다니까요.” 그렇게 증언하는 그와 함께 했던 갈릴리 무리들을 찾아 나선다.

나는 그들을 만나기 전 먼저 해야할 일이 있다. 거친 수염으로 일하던 예수가 어떻게 거룩한 수염으로 제사상에 앉아만 있게 되었는가? 그 역사적 과정을 되짚어 보는 일이다. 그래야만 예수와 함께 떠돌던 그 갈릴리 촌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