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葛藤)

뒤 뜰 등나무 그늘과 꽃들이 멋지고 고마울 때가 있었다. 겨우내 이젠 죽었다 싶은 모습으로 앙상했던 가지들에 보랏빛 꽃을 피어 내는 봄의 등나무는 한 때  내 뒤뜰의 여왕이었다. 여름이면 등나무 그늘 아래 반가운 사람들과 둘러앉아 우리 동네 명물인 찐 꽃게 까먹던 추억도 새롭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그 등나무 그늘을 좋아하셔서 어쩌다 내 집에 들리시곤 하면 그 그늘 의자에 오래 앉아 계시곤 했다.

그러다 몇 해 전인가 내 게으름을 틈타 등나무 넝쿨이 라일락 나무를 휘감아 더는 그 향내 못 맡게 하는 사건이 인 후 나는 등나무를 거두어 내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등나무의 원뿌리 세 개 중 마지막 제일 큰 놈을 거두었다. 등나무나 라일락이나  모두 한 때 내 뒤뜰의 주인공들이었다만 이젠 없다.

캐낸 등나무 뿌리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앉아 있다 떠오른 말 ‘갈등’이다. 칡 갈(葛) 등나무 등(藤)이다. 서로 얽히고 설킨 상태로 배배 꼬여 풀 수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오늘 땀 흘린 생각을 하니 옛사람들이 오늘의 나보다 훨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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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세상 소식은 온통 갈등으로 휘감겨 있는 듯 하다.

어찌 보면 사람사는 세상이란 그 갈등을 풀어내는 과정의 연속일 지도 모르겠다.

저녁 나절 모처럼 찾아 온 아들 며느리를 위해 준비한 갈비도 굽고, 삼겹살과 오리도 구워 애비 노릇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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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은 그저 서로 조심이 최고라고 아이들은 집안 식탁에서, 우리 부부는 바깥 등나무 식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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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가장 손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집안 갈등에서 내 휘감기 멈추는 일.

갈등에.

갈등(葛藤) 또는 포등(葡藤)

한때 뒷뜰 등나무와 포도나무는 내 집 자랑거리였다. 등나무는 deck의 지붕이었고 포도나무는 울타리였다. 특히 아버님이 좋아하셔서 내 집에 오실 때면 늘 뒷뜰 등나무 그늘에 나가 계시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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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 아래 내 아버님의 한 때 

봄이면 등나무 꽃과 이어피는 라이락 꽃에 취했었고, 여름이면 등나무 그늘 아래서 잔치를 벌리곤 했었다. 포도가 영글 즈음 등나무 그늘 아래서  쏘로우나 휘트먼을 읽는 호사는 분에 넘치는 것이었다. 겨울이면 deck 위에 쌓인 눈을 치우며 마치 죽은듯이 앙상히 마른 등나무를 걱정하곤 했었다. 어느 해 봄이던가 등꽃이 주렁주렁 달린 뒷뜰 deck에 현판을 걸었었다.

“은혜원(恩惠園)” – 뒷뜰을 바라보거나 그 곳에 나가 앉아있을라치면 내가 느꼈던 감정을 드러낸 작명이었다. 현판 글씨는 아버님께서 써 주셨다. 그 등나무 그늘 아래서 초, 중, 고, 대학을 마친 내 아이들이, 이젠 아버님처럼 이따금 들르는 곳이 되었다.

몇 해전이던가? 거동이 불편해지신 아버님께서 내 집을 찾으시는 일도 아주 드물어지고, 아이들도 더는 자기 집이 아니게 될 무렵부터 나 역시 뒤뜰에 나갈 일이 부쩍 줄기 시작하였다.

등나무 줄기와 포도나무 줄기가 엉겨 라일락 나무를 휘감기 시작한 것 조차 모르고 한 해를 넘긴  후에야 등나무와 포도나무가 더는 은혜원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었다.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그 무렵 등나무와 포도나무는 내 은혜원을 파괴하는 무법자였을 뿐이었다.

등나무와 포도나무의 만행으로 라이락을 잃고 나서야 나는 분노하였고, 두 해 전 봄에 등나무와 포도나무 밑둥과 deck 기둥들에 전기톱을 대어 잘라내었다. 물론 “은혜원(恩惠園)” 현판을 떼어낸 일이 먼저였다.

갈등(葛藤)이 아닌 포등(葡藤)이 빚어낸 참사였다. 아니 내 게으름이 만들어낸 아픔이었다. 그렇게 휑하게 변해버린 뒷뜰을 이젠 다시 가꾸려 한다.

Deck을 다시 꾸미고 꽃나무를 심으려 한다. 글쎄… 언제 그 세월을 맞을런가는 알 수 없지만…. 이따금 찾아올 지도 모를 내 손주들을 위하여….

**** 이즈음 한국 소식을 들으며 밑둥까지 잘라낸 내 뒷뜰  등나무가 자꾸 생각나는지. 갈등의 밑둥이 아니라 갈등의 원인을 송두리째 뽑아버릴 기회는 어느 민족 어느 개인에게나 주어지기 마련아닐까?

비 맞으며 필라 친구들과 함께 하고 온 날 밤에.

2-25-17

 

8.15 단상(斷想) 5 – , 그리고 끝없는 갈등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1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8.15 단상(斷想) 5 – <공약(公約)>, <공약(空約)> 그리고 끝없는 갈등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 1945년 10월 16일,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다음 날 저녁 8시 30분 서울 중앙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연설 방송을 했는데,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라고 말했다.

광복 70년을 뒤돌아보며, 여러 가지 면으로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다> <싱겁다 신익희(申翼熙) 장난 마라 장면(張勉)>

slogan위에 나온 표어(標語) 중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를 앞 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申翼熙], 부통령 후보 장면[張勉])이 내놓은 선거 표어고, <갈아봤자 별 수 없다 ……… 장난 마라 장면[張勉]>은 민주당이 내놓 은 표어를 반박(反駁)하는 자유당의 선거표어였다.

<구악(舊惡)을 일소(一掃)하고 …… >

이것은 앞에 이미 적은 것처럼 1961년 5월 16일, 박정희(朴正熙) 육군소장을 중심으로 일단(一團)의 청년장교들이, 4.19의거 이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일으킨 쿠데타의 이념과 성격을 밝힌 6개 항의 혁명공약(革命公約) 중, 한 부분이다.

혁명공약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1.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社會)의 모든 부패(腐敗)와 구악(舊惡)을 일소 (一掃)하고 퇴폐한 국민(國民)의 도의(道義)와 민족정기(民族正氣)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淸新)한 기풍(氣風)을 진작(振作)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한데, 그러한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변했다. 그런 것 뿐만 아니다. <구악(舊惡)> 대신 <신악(新惡)>이 생겼는데, 신악의 위세(威勢)는 구악을 뺨칠 정도였다.

movie영화 이야기 하나 더 하며  <8.15 – 단상>을 마치고, <권불십년>이라는 이야기로 넘어간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영화 <자유부인>의 감독인 한형모가 만든 영화로 ‘성벽을 뚫고’라는 것이 있다. 1948년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麗順叛亂事件)을 배경으로 한 민족분단 의 비극을 그린 1949년에 나온 작품이다.   영어로는 [Breaking the Wall] 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반공영화로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이념(理念)의 갈등(葛藤) 때문에 생긴 한 가족의 불행한 비극(悲劇)을 그려낸 그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집길과 영팔은 대학 동기동창이자 처남매부 간이다. 그러나 매부 영팔은 공산주의자이고, 처남 집길은 육군 소위이다. 이에 매부는 처남을 매수하려 하고, 처남은 매부를 설득하려 한다. 그런 가운데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 이들은 숙명적으로 맞서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처남은 다시 매부를 설득하려 하지만, 매부는 처남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처남도 하는 수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광복 70년을 맞는 오늘날까지 이 영화적 상황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