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에

아내의 비명과 함께 차는 빙 돌아 우리가 달려오던 쪽 갓길에 처박혔다. 순간 세상이 정지된 느낌이었다. 엊그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 였다. 그 찰나의 순간은 지금 느린 영상으로 기억속에서 되풀이 되곤 한다.

생각할수록 천만다행이었다. 십 수대의 경찰차와 구급차 소방차들이 난리 법석을 부리고, 망가져 견인된 차의 형태에 비하면 우리 부부는 다친데 거의 없이 말짱한 편이기 때문이다. 이십 대 젊은 아이가 운전을 하고 제 또래 친구들이 함께 탄 차가 느닷없이 아내가 앉아 있는 내 차 passenger side를 들이 받았던 것인데, 그야말로 찰나의 행운으로 아내가 앉아있던 좌석 뒤편을 치는 덕에 크게 다치지 않았던 것이다.

놀라 잠 못 이룬 밤이 지나고  X-ray를 찍고 의사의 검진을 받고 처방전을 받고 무언지 모르게 어수선했던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오늘 일요일 아침, 편안하고 긴 잠을 누린 아내와 나는 그 찰나의 순간을 다시 느린 화면으로 되돌려 이야기하며 감사를 되풀이 한다.

내일부터 내 일상이 아닌 일들로 조금은 번잡할 것이다. 보험회사 claim 조정관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이고, 의사를 찾는 번거로움과 만나기 싫은 변호사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보험회사의 발 빠른 처리 덕에 임시 렌트카는 마련 하였다만 새 차를 구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일로 잡힌 가게 건물주와의 마지막 협상과 메뚜기 한 철로 바쁜 가게 일들도 머리속을 뒤숭숭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감사하다. 그 찰나의 순간에 대하여. 아내와 나는 일상을 벗어난 번거로운 일들을 누군가의 도움없이 치루어 낼 수 있는 건강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정말 아쉬운 일이 하나 있다. 아들 며느리와 한 엊저녁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까만 얼굴 아프리칸 아메리칸인 내 며늘 아이가 한국학교에 등록한 것은 올 9월이었다. 템플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 선생으로 일하고 있는 며늘아이는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등 몇 마디 한국말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와의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다. 그 아이가 엊저녁 한국말로 이야기하는 대회에 참가했다.

뉴저지 해밀턴에서 열린 한국 재외동포재단이 후원하고 해밀톤 한국학교가 주관하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였다.

해밀톤 한국학교 교장인 시인 강남옥선생님도 모처럼 만날 겸해서 꼭 가겠노라고 약속을 했던 터였는데, 오고가는 길 세 시간 여 밤운전이 영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며늘아이가 한국말로 자신을 표현할 정도는 전혀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적은 영어  글을 한국 말로 옮겨 발음부호대로 외어서 대회에 나간 것이니, 솔직히 그 대회의 본래 뜻과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만 내겐 아이가 참 대견한 것이었다.

그 아이의 생각 가운데 하나이다.

저는 가족들과 더 많이 이야기하고 남편과 가족들을 더 많이 이해하기 위해 한국말을 배우려고 합니다. 저는 남편과 가족들을 통해서 한국인들이 어렵고 힘든 일들을 잘 이기고 견디어 왔는지를  배웠습니다. 제가 낳고 자란 문화와 환경도 비슷합니다. 제 부모님들과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잘 이겨 내어, 제가 오늘 여기에서 이야기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저는 남편의 나라 한국에서 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잘 이겨낸 이야기들과 같은 것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이 많은 아픔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제일 큰 힘은 가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렌트카를 빌려 돌아오는 길에 장을 보았다.아들과 며느리, 모처럼 집을 찾는 딸, 부모님과 장인과 내 누이네들이 함께 할 Thanksgiving Day 저녁상을 위한 장보기였다.

사고 위로를 겸해 서울 처남이 보내 준 한국영화를 즐기면서 오늘은 그날 저녁상을 위해 느긋하게 만두를 빚을 것이다.

찰나에 대한 감사를 위해. 어쩌면 모든 것들이 찰나일 터이니.

기도

일흔 세 해를 함께 살고 있는 부부가 몇 이나 될까? 여전히 티격태격 다투다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딴소리들 하시는 일흔 세 해 차 부부, 내 부모님 이시다.

어제도 여전한 모습들이었다. 모처럼 먼 길 오가는 일이 두 분들에게 만만치 않으셨나 보다. 모시러 갔더니 두 분은 이미 한 판 중이셨다. ‘가시겠다’, ‘못 가시겠다’ 로 붙은 다툼의 시발은 막내 딸년이 주문한 드레스 코트 탓이었다. 평소엔 전혀 먹히지 않는 삼녀 일남, 환갑 넘어 칠순을 바라보는 외아들의 입김이 먹히는 순간은 이 때였다.

‘아니! 그 아이는 먼 길 오가시는 노인들에게 불편한 한복 타령을 했다니…’, ‘쯔쯔쯔…’ 과하게 혀까지 차면서  두 노인들의 다툼에 무승부를 선언한 결과였다.

그렇게 오간 뉴욕 Flushing 금강산 연회장이었다. 한국에서 결혼식을 치룬 조카 아이가 여기서 피로연을 치루는 자리였다.

오가는 길, 두 노인들이 입을 모아 여러 번 반복한 말… ‘이젠 둘 남았구나…’ 아직 결혼 안 한 손주 둘을 말씀 하신 것인데, 그 중 하나가 내 딸이다. 나는 차마 입 안에서 뱅뱅 도는 그에 대한 내 뜻을 말하지는 아니하였다.

뉴욕 가는 길 운전은 내가, 돌아 오는 길은 내 아들 녀석 몫이었는데 부모님 집에 이르러 두 분이 함께 하시는 말씀. ‘운전은 아들보다 손주가 한 수 위다. 오는 길 아주 편하게 왔구나!’하시며 손주에게 사례금을 하사하시다.

바라기는 올 겨울도 티격태격 하시다 한 목소리로 아들 놈 꾸지람 이어가시길. 내 아들 , 며느리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덤으로 그 티격태격에 묻혀 있을 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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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추석을 앞두었던 지난 주 온라인 모임으로 만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다문화가정을 이루고 사는 이가 문화의 차이에 대한 재미있는 경험을 나누어 주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머리에 꽃여 지난 일요일 내 가게 손님들에게 문화의 차이에 대해 짧은 편지를 보냈었다.

손님 가운데 Charlie가 내가 보낸 편지의 두 배나 되는 긴 답장을 보내왔다. 그는 나보다 나이는 네 살 위지만 손주가 다섯이고, 대기업 간부로 있다가 은퇴한 내가 만난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우리 동네 중심이겠지만…) 백인이다.

그가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누군가 단 한사람에게 만이라도 그의 생각을 전하고 싶어 그에게 제안을 했다.

“당신 답신을 번역해 내 한글 블로그에 번역해 올려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이내 답변이 왔다. “오, 기대되는데….”

그와 내가 주고 받은 편지의 길이를 합치니 제법 길어졌다만, 인종에 관계없이 내 세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한 단면일 터이니… 누구가에겐 꼰대스러울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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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어느 모임에서 만난 이에게서 들은 말이랍니다. 그녀는 한국계 미국인이고 남편은 백인(코카시언, 유러피안 아메리칸, 당신이 무어라 부르든…)입니다.

결혼한지 오래되어서 이제는 매사 생각하는 관점이 비슷해 졌지만, 젊은 시절 결혼 초기에는 사소한 것에서 부부 사이 의견이 충돌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예를 든 상황들에는 이런 것도 있었답니다. 어느 날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그녀가 말했답니다. “이 음식은 한국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것이예요.” 그 말을 들은 남편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답니다. “아니 어떻게 한국사람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지? 한국사람들 모두는 아니겠지?”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인들의 독특한 언어습관을 떠올렸답니다. 일인칭 단수인 ‘나’를 쓰기 보다는 복수인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쓴다는 것입니다. 일테면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교회, 우리 나라’ 등입니다. ‘우리 오빠, 우리 누나, 우리 아들, 우리 딸’ 등도 자주 쓰는 말들입니다. 여기까지는 그저 그럴 수도 있겠다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 남편, 우리 아내’라는 말은 어떠신지요? 실제로 제 또래 정도만 하여도 입에 붙어 다니는 말들이랍니다.

말의 습관도 세월 따라 변하기 마련이어서 이즈음 젊은이들은 우리 남편, 우리 아내 대신에 내 남편, 내 아내라고 한다고들 합니다.

‘나’보다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쓰는 언어습관은 오랜 농경사회에서 대가족 중심으로 살아온  공동체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는데 그저 제 생각일 뿐이랍니다.

월요일인 내일은 한국인들에겐 일년 중 가장 큰 명절인 추석입니다. 한국인들의 추수감사절이랍니다. 각자 ‘나’로 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우리’가 되는 날이지요.

재미있는 사실은 형제 자매들이 부모와 함께 모이는 이 명절 전후에(특히 명절 후에) 부부 싸움을 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답니다.

누구나 ‘나’와 ‘우리’로 살아갑니다. ‘나’로 살 때와 ‘우리’로 살 때, 그 어느 순간이라도 넉넉하고 너그러운 한 주간이 되시길 빕니다.

At a gathering last week, I talked with a woman. She is a Korean-American whose husband is white (Caucasian, European American. Whatever you may call this race!).

As they have been married for a long time, their ways of thinking or viewpoints have become similar now. But, early in their marriage, trivial things caused conflicts of opinion between them so often, she said.

One among the instances which she told me about was what happened at a restaurant one day.

She said, “This is food which Korean people like very much.” In response to her words, her husband tilted his head and asked, “How can you say ‘Korean people’ so surely? Not all the Korean people, right?”

While I was hearing about the instance, one of the unique linguistic habits of Korean people came across my mind. Koreans so often use the first-person plural, “우리 (woori, meaning ‘we or our’)” instead the first-person singular “나 (nah, meaning ‘I or my’)” where the latter should be used, especially in English. For example, Koreans usually say “our house, our school, our church, our country,” and so on. Even, expressions like “our brother, our sister, our son, and our daughter” are used quite naturally. Thus far, you may say, “Strange! But it could be.”

How about the expression “our husband or our wife”? In fact, for many Korean people, at least those in my generation, it is quite a natural expression.

As the linguistic habits also change over time, nowadays young people use the words, “my husband and my wife” instead.

The linguistic habit of using “we or our” instead of “I or my” may come from the community culture in agricultural society which lasted for a long time. It is just my thought.

Tomorrow, Monday, is “Chuseok,” the biggest holiday in Korea. It is like Thanksgiving Day in America. It is the day in which family members who have been living individually as “나 (nah, meaning ‘I’)” gather and become “우리 (woori, meaning ‘we’).”

What is interesting is that around this holiday (especially after it) in which brothers, sisters and parents gather together, the quarrels between husband and wife happen in many families.

All the people live as “나 (nah, ‘I’)” at the same time as “우리 (woori, ‘we’).” I wish that you’ll be generous and broad-minded at every moment, whether you live as “나 (nah, ‘I’)” or “우리 (woori, ‘we’),” in this week and beyond.



 

Young에게,

(네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단지 한국 대 서구 문화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네! — 누군가의 대가족 성원이 되는 것, 잠재적 새 구성원 또는 불행하게 (혹은 부지불식간에) 곧 “가족”을 떠나게 되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은 세대간의 논쟁 가능성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어떤 가족의 경우, 주먹, 총, 칼이 등장하기까지 하지. 모든 이들을 진정시키고, 만취자를 내쫓기 위해서는 강한 인물이 요구될 수도 있지.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어렵다고? 그것이 가족 모두를 서로 행복하게 유지시키는 것 만큼 어려운 것은 아니라네.

자네가 언어사용에서 문화간의 미묘한 차이가 의견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러한 것들이 (고등학교 때 배웠듯이)  서구문화에서 전쟁을 촉발시키기 까지 했다지.

내 첫번째 정식 직장은 뉴욕주 서부에 있는 영국과 캐나다 사람들이 소유한 엔지니어링 컨설팅 회사였네. 미국내 첫번째 지사로, 내가 17번째로 채용된 직원이었지. 불과 5년동안에, 직원은 220명으로 불어났고, 정확히 50개 국가 출신 직원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지.

때로는, 문화(의 차이)가 문제가 되었었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화합하며 일하여, 정해진 시간과 예산으로 모든 (업무) 계약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지. 실제 잘 되어나갔지만, 노력이 필요했었다네.

(그 때의 경험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소개받는 기회였으며, 거의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것, 일테면 행복한 결혼생활, 자랑스러운 자녀, 생활수준의 향상, 개인적 성취감 등을 원한다는 것을 꽤 일찌기 깨닫게 해 주었지.

이후 직장에서는 동부 유럽과 아시아의 가혹한 문화에서 탈출했고, 그러기 위해 극심한 위험과 고난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과 일했다네. 이 지역에 거주하는 한 사람은 어느 중동 국가 사람들이 발견한다면, 그와 가족들은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처지에 여전히 놓여 있었다네. 그렇지만, 그와 가족들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추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목표들이라네. 그 가족 중 일부는 고국을 탈출하지 못했고.

어딘가에서 온 이웃 혹은 인근 지역 사람들에 대해서 앎으로써 평화롭고 화합하며 함께 사는 삶은 우리 모두에게 달려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그 만큼 그들도 우리를 도울 수도 있기 때문이라네.

하지만, 내 장인은 어렸을 때, 다리 건너 다른 지역에 가면 심하게 얻어터지거나 심지어 죽는데, 장인이 알았던 아이들 몇몇이 “있어야 할 곳”에 머무른 사람들에게 이것이 사실임을 입증했다고 내게 말씀하셨었네. 새롭게 도착한 문화가 이 나라에 완전히 받아들여지는데 수십년이 걸리고, 어떤 문화는 더 많은 세월이 걸린다네. 그것은 마찰을 일으키고.

진실은 우리 모두는 정말로 같은 것을 원하며, 만일 우리가 우리와 다른 점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기여할 수 있는 것에 보다 더 초점을 맞춘다면, 모두가 유복해 진다는 것이지.

나아가서, 이 같은 태도가 가정에서도 필요한데, 열린 태도는 각 개인이 이기적이거나 무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다네.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학대 행위를 용인하지 않는 것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경우에 한해, 교육이 도움이 될 걸세.

사람들이 변화에 마음을 터놓게 하는 것, 대화 중에 차이점을 끝까지 듣도록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가정이 그 방법을 배우는 좋은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네.

가족모임은 자녀와 잘 지내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가족의 ‘어른’은 다른 가정과의 관계에서 열린 태도를 고무시켜야 할 걸세. 하지만, 모든 가정이 그렇게 하지 않고, 그리고 어떤 문화는 그것을 옹호하지 않는다네.

중동 문화의 아주 많은 것들이 수 세기에 걸쳐 지속되온 부족적 행태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중동 사람들에 대한 문제로 보고 있다네. 부족적 관점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다르게, 아마도 위험하거나, 어떤 경우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바라보지.

역사적으로 볼 때, 일단 사회가 부족적 행태를 넘어서서 여러 혹은 다수 민족의 “국가 (national)” 문화가 된다면, 우리의 꿈을 이루는 진전은 성취가능성이 더욱 높아져 가는 경우가 많다네.

불행히도, 현재 이 나라에서는 갈등 수준이 대단히 높은 것 같네.

역사상 처음으로, ‘대화’의 대부분은 마주 보면서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인터넷 플랫폼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어떤 집단은 그 플랫폼을 이용하여 갈등을 부추기고 있지. 모든 관계자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모두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 어려운 일 일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패배하게 될테니까.

Charlie


Young,

Not just in Korean vs. Western culture! — getting anyone’s extended family, plus the prospective new members, plus those who may be unhappily (or unknowingly) soon leaving “the family” — creates a situation ripe for generation of arguments!  In some families, fists, guns or knives come out. It can take a strong personality to keep everyone calm and throw out the drunks.  Running a company is tough?  Not as hard as keeping an entire family happy with each other.

You point out that just subtle differences in use of language between cultures can generate some disputes, and such things supposedly (so we’re told in high school) have started wars in Western cultures too.

My first professional job brought me into a consulting engineering organization owned by a mix of British & Canadian people, with the office based in western NY state.  First American office, I was the 17th person hired.  Within five years, we had 220 people in that one office — and there were exactly 50 different nationalities working together with me.  In some instances, culture became an issue.  Almost everyone realized that this was something we all had to work together on to create working harmony and complete our contracts on time and in budget.  It actually went well, but took work.  I realized fairly quickly that this had been a great introduction to the people of the world for me, and that most everyone wants the same things in life —a happy marriage, children they can be proud of, advancement in their living standards, and a feeling of personal accomplishment. In later jobs, I worked with people who had escaped from harsh Eastern European and Asian cultures, and had endured great danger and hardship to do so. One man living in this area still has a standing death sentence for him and all his family if a certain Middle Eastern people find them.  Even then, these same goals were what he and his family sought in coming to the United States.  Some of his family didn’t make it out of their home country in the escape effort.

It is up to all of us to want to live together in peace and harmony by learning about the people next door or across town who came from somewhere else, because those very people might be able to help us just as much as we can help them.  Yet my father-in-law told me that as a child he couldn’t walk across certain bridges into other neighborhoods without be severely beaten or killed – and some of the kids he knew proved that to be true to those who stayed “where they belong”.  It takes many decades for any newly arriving culture to be fully absorbed into this country, some longer than others.  Many people do not like change, but others realize it is an opportunity.  That generates friction.

The truth is that all of us really want the same things and if we focused more on what the other person can contribute and less on their differences from us, everybody is better off.  By extension, the same attitude is needed in families, but an open attitude requires that each person understand what people want, and not be selfish or rude.  Education helps only if the school teaches about what causes conflict and does not tolerate abusive behavior.  I know it is not easy to open people up to change and hearing out differences in talking with others, but the family is a good place to start learning how.  Family gatherings teach how to get along to their children and the family ‘elders’ should encourage an open attitude in their relationship with other families.  Not every family does that, and some cultures don’t promote it.

This is the problem many people see in the Middle East, as so many parts of those cultures are based on tribal behavior that has existed for many centuries. A tribal outlook inherently looks at others as different, possibly dangerous, and in some cases unacceptable.  History suggests that once a society gets past tribal behavior to become a “national” culture of several, or many peoples, progress in obtaining our dreams becomes more achievable.

Unfortunately, right now we have an unusually high level of conflict in this country.   For the first time in history, much of the ‘ dialog  is taking place on the largely impersonal Internet platform rather than face-to-face, and some parties are using that platform to encourage conflict.  It may be difficult to get all the parties working together and working towards the goals everyone wants, but it needs to happen. Everyone will lose if it does not.

Charlie

가족

연 이틀 비가 쏟아진다는 예보에 많이 망설였었다. 오래 전 예약해 놓은 숙박업소 취소 가능 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이번 산행에 맞추어 예정 시간에 집에 도착한 딸아이는 그냥 계획대로 산행에 나서자고 했다. 이른 아침 하늘은 꾸물거리고 있었지만 아직 비를 내리지는 않았다. 아들내외 집에 도착했을 때에도 하늘은 우리 가족이 세운 계획과 함께 하는 듯 했다.

21개의 폭포가 있다는 펜실베니아 Ricketts Glen 주립공원 하이킹 코스 거리는 약 7.2 마일. 아이들과 이야기하며 걷는 재미와 살을 좀 뺏으면 좋겠다 싶은 아들 며느리를 위해 선택한 곳이다.

공원에 도착하기 한 시간여 전부터 하늘은 우리들의 계획보다 일기예보에 충실했다. 비가 간간히  오락가락 하더니만 이내 폭우를 쏟곤 하였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우비라도 살 요량으로 상점들을 찾았으나 Pennsyltucky라더니 우리는 이미 켄터키 같은 펜실베니아 산골에 있었다.

때때로 일기예보가 무의미 할 때도 있다. 산행을 시작할 무렵부터 비는 그쳤고 산행을 마칠 때까지 이따금 오락가락 했지만 하이킹하기엔 최적의 날씨였다.

쏟아진 빗물로 계곡 물은 붉은 색을 띄었다. 아내와 며늘아이는 자꾸 뒤쳐졌고 덩달아 아들녀석도 그 무리에 함께 했다. 나는 줄곧 딸아이와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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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보다 더 즐거운 시간은 아무렴 먹는 시간이다. 평소 찾지 않았던 특별한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에 더해 횃불 조명을 받으며 낙조에 물들어 가는 강변에서 가족들과 함께 나누는 이야기들로 배부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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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직장생활, 우리 부부 세탁소 이야기, 할아버지들과 할머니 이야기에서 시작해 곧 있을 중간선거 이야기까지 모처럼 우리 가족들의 이야기는 오래 이어졌다.

이튿날, 딸아이 집에 데려다 주는 길에 사진 찍기 딱 좋은 작은 정원에서 즐긴 나른한 오후 풍경도 이번 산행에 덧붙여진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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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녀석보다 더 한국음식을 즐겨하는 며늘아이를 위해 선택한 식당은 그야말로 우리 가족을 위한 안성맞춤이었다. 며늘아이는 육개장, 아들과 아내는 설렁탕, 딸아이는 순대국, 나는 선지 해장국에 소주 한 잔, 그리고 덤으로 시킨 콩나물 도가니찜은 더할수 없이 풍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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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하이킹에서 내 시선을 빼앗았던 작은 비나리 돌탑들. 사람들은 누구나 비나리가 있고, 그 비나리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뜻으로 정성 들여 탑을 쌓는다. 나나 아내나 아들이나 며느리나 딸이나, 서로 각자의 비나리 돌탑들을 쌓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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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2618A아이들과 헤어지며 함께 쌓은 작은 비나리 돌탑이다. 가을 단풍 들면 다시 산행에 나서자고….

사는 맛

가족을 제외하고 한국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아주 드물다. 가족 이라야 거의 붙어사는 아내와 일주일에 한두차례 찾아 뵙는 노부모님과 장인 어른이 자주 보는 얼굴들이다. 아들 며느리는 많아야 한달에 한번 꼴이나 될까 모르겠는데, 고마운 것은 우리 부부가 원하면 언제든 볼 수 있을 만큼 아이들이 착하다.

딸아이는 좀 다르다. 일년에 몇차례인지 내가 정확히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볼 수 있는데, 그 회수는 전적으로 딸 아이의 뜻에 달려 있다. 그런 딸아이에 대한 못마땅함으로 내가 궁시렁 거리기라도 할라치면 ‘천상 당신인데 뭔 소리냐’는 아내의 핀잔을 듣곤 한다.

가족 이외에 만나는 한국사람들이라야 일년에 한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회수로 나가는 한인교회나 이따금 들리곤 하는 한국 식품점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이 전부가 아닌가 싶다.

이런 저런 연으로 얽힌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한인 이웃들도 제법 있지만, 그들을 만나는 일엔 딱 내 딸아이를 닮아서 그야말로 내 맘대로이다.

그러다보니 한 달 정도는 가족 이외에 한국사람들을 전혀 만나지 않고 지내는 때가 흔하다.

예외적인 일이 있긴 하다. 지난 수년 동안 일주일에 한번씩 거의 빠지지 않고 얼굴을 마주하는 한국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필라세사모’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이들인데, 세월호 참사 이후 만나기 시작한 모임이다. 그러나 이 모임은 온라인으로 만나는 것이어서 비록 얼굴을 마주한다 하지만 실제 만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내 지극히 이기적인 성격 탓이겠는데, 나는 이 모임에서 만나는 이들의 개인사에 대해 참 무지하다. 엊저녁 일만 해도 그랬다. 좀 뒤늦게 이 모임에 함께 하긴 하였지만 벌써 셀 수 없을 만큼 마주했던 얼굴인데 어제서야 그가 하는 일에 대해 물었었다. 아마 다른 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하다.

그가 학교에 있다는 소리는 얼핏 들어 알곤 있었지만, 역사 그것도 한국사 그 중에 또 현대사 더더구나 해방 이후 한국 전쟁사에 대해 연구한다는 사실을 어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살며 이따금 가슴이 쿵쾅거리는 설렘을 만날 때가 있다. 나이 탓인지 이즈음엔 사람을 통해 그런 경험을 하는 일은 매우 드물지만, 책을 통해서는 종종 그 즐거움을 누린다. 그런 책들의 편저자들이 이젠 많은 경우 나보다 어린 이들이다. 나보다 윗대들의 생각에서 배우는 기쁨보다 후대들의 생각을 통해 깨치는 맛은 또 다르다.

그런데 이번엔 책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것도 매주 만날 수 있는 후배이다. 순간적으로 그를 졸랐다. 가르침을 달라고…

찬바람 기운이 돌면 그 모임에 참석하는 우리는 이제 그에게서 해방 이후 한국사에 대해 듣게 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사람이다.

이번 주말엔 아들 며느리 그리고 딸아이를 앞세우고 우리 부부는 계곡을 찾아 하이킹을 즐기려 한다.  그날 아이들과 함께 나눌 밥상을 위해 불고기 거리를 장만하여 돌아오는 길목에서 만난 저녁하늘은 아침이었다.

이 사는 맛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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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집에서 내 가게까지는 약 10마일, 내겐 하루 20마일이면 늘 족하다. 이즈음 내 생활 반경이 그러하므로.

그런 내가 어제 오늘 사이 족히 350마일을 오갔다.

아내가 장고춤에 이어 소고춤을 배운다고 선생님을 찾아 나서는 길에 기사 노릇하기로 약속한 날짜는 원래 오늘이었다.

두어 주 전에 어머니가 하신 말씀, “얘야! 애들 이사 간 새집엔 언제 가는게냐?” 그 말씀에 아들 내외를 재촉해 오늘 약속을 잡고 아내의 연습은 어제로 당겼었다.

아내가 춤 배우러 오가던 길, 때때로 시속 90마일을 밟기도 했다. 모처럼 쉬었다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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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은 참 좋다. 창문을 열고 새소리를 들으며 가게 손님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시간과  아내가 교회에 간 시간을 특히 즐긴다. 중국의 스타 철학자라는 조사림(趙士林, 자오스린)이 해석하는 맹자를 읽으며, 이즈음 뉴스들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는 기쁨을 맛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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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부모님을 모시고 아들내외 집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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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애완 동물에 대한 관심이 없다. 거부까지는 아니더라도 키워볼 생각은 조금도 없다. 아들 녀석은 어릴 때부터 달랐다. 새에 대한  녀석의 지극정성으로 온 집안에 새털과 새똥이 뒹굴던 때도 있었다.  녀석은 결혼 이후 고양이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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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기 도움을 받는 아버지에게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일은 무리였다. 아버지에겐 거실과 부엌만으로도 흡족하셨나 보다. 손주 내외를 위한 아버지의 기도는 제법 오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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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빨강, 파랑, 초록으로 바뀌는 주방 조명을 소개하며 할머니 할아버지를 즐겁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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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걸린 당신들의 사진이 매우 흡족하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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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아버지나 우리 부부나 애초 부페식 식당과는 거리가 먼 식성이지만 돌연변이 아들 내외를 위해 고기 부페 식당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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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넘는 연세에 당신 치아를 본래 그대로 사용하시고 돋보기 없이도 책을 읽으시는 아버지의 비결은 삼시세끼 식사에 대한 감사를 느릿느릿 곱씹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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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할머니, 어머니 소리가 입에 밴 며늘아이는 새로 옮긴 학교 아이들 이야기를 하며 어른들의 사랑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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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어머니는 “감사하다, 감사하다”를 말을 연이으셨다. 아버지는 “그럼, 그럼” 추임새를 넣으시고….

쉼 그리고 즐거움

사흘 연휴, 아이들과 함께 산길을 걸으며 시간을 함께 하기로 계획한 것은 달포 전이다. 아이들은 흔쾌히 내 의견에 동조해 주었다. 운전하기에 피곤치 않을 적당한 거리 쯤에 놓여있는 곳들을 물색하다가 결정한 곳은 뉴욕 주 중심에 있는 Ithaca였다.  Cornell 대학교로 유명한 곳이지만, 곳곳에 이 땅의 원주민 부족 가운데 하나인 Cayuga 부족의 흔적이 살아있는 곳이라는 Wikipedia의 설명에 혹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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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내내 아내와 아들 내외 그리고 딸아이 모두 흡족해 내가 마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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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녀석이 지금보다 조금 나은 조건의 직장으로 옮기련다는 계획과 며늘아이가 새 학기에 맡게 될 학교 아이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지혜로운 인디언 아버지 흉내를 내보기도 했다.

딸아이와 어깨를 닿게 걸으며 아이의 직장 이야기와 설계 중인 결혼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세대의 차이, 생각의 차이를 확인해야 했다. 우리 내외의 건강과 은퇴 계획 등을 묻는 딸아이가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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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여행 내내 아내는 우리 가족의 윤활유였다.DSC02743

함께 모여 먹고 마시는 즐거움 역시 멋진 쉼 이었다. 우리 내외와 아이들이 적당히 타협할 만한 생음악이 연주되는 여행지의 저녁상도 넉넉했다.

무엇보다 어제와 내일 그리고 오늘을 잇는 내 쉼이 참 좋았다.20170703_121911

어느 인디언이 ‘당신’인 내게 남긴 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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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일어나면 아침 햇빛에 감사하라.
당신이 가진 생명과 힘에 대해 당신이 먹는 음식, 생활의 즐거움에 대해 감사하라.
만일 당신이 감사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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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삶에 있어서 머무름, 기다림, 느긋함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철학자 한병철의 생각이 담긴 책이름이다.

‘사색적인 삶이 풍요롭다.’라는 명제는 멋있다. 그러나  ‘사색적인 삶’이 시간에 늘 쫓겨 살수 밖에 없는 평범한 속물인 내겐 애초 가당치 않는 전제이므로 ‘풍요’ 역시 내가 누릴 몫은 아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사색적인 삶’이란 진짜 가당치 않은 지적 사치일 뿐이다.

딸아이가 모처럼 주말을 함께 보내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일요일 오후, 기다리는 버스가 한시간 반여 늦게 도착하였다. 계획에 없이 딸아이와 함께 했던 한 시간 반 동안의 시간은 내게 자유를 일깨워 주었다. 아이의 직장생활과 향후 계획, 남자친구와의 이야기들을 묻고 들으며 버스가 늦어지는 시간에 감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딸아이와 아내는 때론 아주 같기도 하고 전혀 다르기도 하다. 둘 사이에 도대체 닮은 게 무엇이 있을가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거니와 너무 똑같아 깜짝 놀랄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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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구속되어 있지 않거나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주는 것은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그 무엇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롭다- frei, 평화- Friede, 친구- Freund와 같은 표현의 인도게르만어 어원인 ‘fri’는 ‘사랑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나 연인에게 속해 있는’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 >

한병철이 <시간의 향기>에서 하는 말이다.

내가 딸아이가 타고 갈 버스가 늦게 도착한 것을 감사하며 자유를 생각한 까닭이다.

가족

하루해가 저물고 또 새로운 날이 시작될 시간입니다. 오늘은 아버지 날이었습니다. 어제는 우리 부부가 해로(偕老)한지 만 서른 세해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결혼 이전에 연애기간이 오년이요, 한동네에서 자라 얼굴안지는 그 이전의 일이니 족히 사십 수년은 제 곁에 아내가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 부부의 33주년 결혼기념일은 아들녀석의 느닷없는 결혼선언으로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그 또한 삶의 과정이겠거니 하며 두아이들(아들 녀석과 녀석이 말하는 피앙새)과 시간을 보낸 후, 진짜 늙으신(이미 늙은 내가 늙었다는 생각이 이따금 드는 것을 보면, 아마 구순 팔순이어도 마찬가지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내 입장에서) 두 아버님들(친아버지와 장인)께 그저 치레인사를 드리고 지냈답니다.

그리고 오늘 혼자 지내는 딸아이를 보러 뉴욕 나들이를 했었답니다.

그저 키우는 재미는 딸아이 같습니다. 비록 말없는 아이여도 말입니다.

맨하턴에는 셀수 없을 만큼 나들이를 하였지만 이른바 9.11 테러가 사건이 일어났던 곳에는 가 본 적이 없었는데, 그 까닭은 웬지 보면 아플 것 같아서 였답니다.

오늘 딸아이가 “아빠, 어디 갈래?”하며 던진 물음에 제가 한 응답이 “Ground Zero 한번 가볼까?”해서 나섰던 걸음이었답니다.20160619_143745

그 날을 생생히 기억한답니다. 그리고 이어진 애국주의와 그 이후 오늘의 미국을….

그리고 늦은 밤. 시골 제 집으로 돌아와 하워드 진(Howard Zinn)이 한 말을 곱씹습니다.

이 나라의 모든 국민이 향유하는 공통된 이익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데 애국주의가 이용됩니다. 국민은 소속된 계급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애국주의는 공통된 이익을 지향합니다.

국기가 그런 공통된 이익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애국주의는 정부가 흔히 동원하는 그럴듯한 단어와 똑 같은 역할을 하면서 공통된 이익이라는 착각을 조장합니다.

예컨대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라는 단어는 모국을 위한 안전은 하나밖에 없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국익(national interest)’이라는 단어는 모두를 위한 이익은 하나뿐이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국방(national defense)’이란 단어는 우리 모두를 똑같이 지켜주는 것처럼 사용됩니다.

결국 애국주의는 모두에게 균등한 이익을 결코 보장해 줄 수 없음에도 그럴듯한 명분으로 국민을 옭아매는 단어입니다.

개인적 삶이나 공동체적 삶이나 구호란 참 공허합니다.

하여 어떤 세상이어도 가족은 구호가 될 수 없습니다.

 

가족

Francis교황이 오늘 워싱톤 앤두류 공항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밟는 미국 땅에도 그가 꾸어온 평생의 꿈인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넘쳐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영상 뉴스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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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을 맞이하는 공항 모습에서 “왜 교황이 미국 땅을 밟았는가?”하는 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의전적 응대를 통해서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내외와 두 딸들, 바이든 부통령 내외와 가족들이 교황을 맞는 모습은 교황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세계가족대회(the World Meeting of Families)에 참석하는 뜻을 극대화 시킨performance였습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따듯한 교황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 해 여름, 한국에서 보였던 교황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아이들을 잃고 애통해하는 세월호 가족들을 위로하던 교황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잇달은 생각입니다.

세계가족대회(the World Meeting of Families)와 교황(Pope)이라는 말들에 들어있는 몇 개의 명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치는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입니다. 세계, 대회, 가족, 교황들 가운데 말입니다.

그런 생각 끝에 떠올린 천상병님의 시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감상

  • 천상병

청명한 연휴의 오후

가난한 아버지는

오래간만에 딸의 손목을 잡고

싱싱한 가로수 맡을 거닌다.

 

사람들은 모두 교외로 나가고

거리는 몹시도 한산한데

가끔 야외복차림의 가족을 태운

차가 질주한다.

 

갑자기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는 햇살이

눈이 부시다.

“너 아이스크림 사주련?”

“괜찮아,아버지”

조그마한 딸의 손이

아버지 손아귀에서 꼼지락거린다.

아, 행복이 있다면

행복을 손에 잡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꼭

이 뭉클한 작은 손과 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