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늘~

어머니날이라고 딸아이가 꽃을 보냈다. 기억컨데 딸아이가 직장을 얻어 집을 떠난 이후 기억할만한 날이면 꽃 보내는 일을 잊은 적이 없다. 꽃 선물을 받을 때면 내가 늘 궁시렁 거리는 변치않는 소리다. ‘지 쓰기도 바쁜데 뭐 이런데 돈을 쓴 담!’ 허나 꽃배달이 조금 늦어지는 날이면 아내보다 내가 조바심을 내는 편이다.

한 두 해 전쯤이던가? 딸아이가 내게 물었었다. ‘아빤 이제 일 그만둘 때 되지 않았어? 일 언제까지 할꺼야?’, 잠시 머뭇거리던 내 대답이었다. ‘글쎄…. 일 할 수 있을 때까지…’ 그 대답에 딸아이는 ‘왜?’라고 다시 물었다.

‘Why?’하고 묻는 딸아이의 몸짓과 얼굴 표정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내색과 그런 나를 마치 나무라는 듯한 속내를 담고 있었다. 이어진 딸아이의 주문이었다. ‘일 많이 했잖아! 이젠 좀 쉬고 엄마랑 여행도 좀 다니고….’ 그쯤 나는 적당한 타협안을 내 놓았었다. ‘일 좀 줄이고, 일하며 여행 다닐 계획은 있어.’

딸아이는 어릴 적 내 세탁소를 ‘아빠 집’이라고 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릴 때면 나는 아들과 딸에게 그저 미안하다는 맘이 크게 저며온다. 아이들이 한참 자랄 나이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미안함이다.

그 무렵 내가 자는 시간 빼놓고 모든 시간을 보냈던 세탁소 일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할 수 만 있다면 빨리 세탁소 일을 벗어나고 싶었었다. 이따금씩 들었던 이웃과 지인들이 건넸던 뜻없이 지나가는 인사말, ‘당신은 세탁소 하기엔 참 아까운데…’라는 풍선 같은 말에 혹해 여러 해 들떠 지내다 낭패를 본 부끄러운 시간들도 있었다. 그 모든 시간을 되새기면 무엇보다 난 아이들에게 미안해야 마땅하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내 세탁소에서 나는 내 천직을 받아 들였다. 그 이후 손님들에게 듣는 말들, ‘너희 세탁소가 우리 동네이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너희 내외 웃는 얼굴 보러 온다….’

오늘 하루만 해도 그랬다. 평소 성질 고약한 손님 하나 찾아와 눈물 흘리며 하던 하소연… ‘아이고 글쎄 내가 유방암이란다… 아이고 어쩜 좋니…’ 그 하소연 한참을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걱정마! 괜찮을거야. 기도할게’라는 말에 환한 미소 지으며 떠난 얼굴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려 보는 말, ‘그래 아직은 더 일 할 나이지!’

‘오늘’이라는 말을 ‘오! 늘~’이라고 풀어 주셨던 이는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선생님이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루(오늘)만이 영원히 있는 것이다. 오늘의 ‘오’는 감탄사이고 ‘늘’은 언제나 항상이라는 뜻이다.>

글쎄… 언제까지 내가 세탁소 일을 계속할 수 있을런지 모를 일이다만, 하는 날까지는 ‘오! 늘~’이라는 맘으로 감사하며 할 일이다.

딸아이에게 해 줄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아내와 함께 여행도 한 번 떠나야 할 터.

아이가 보내 준 꽃이 시들 때까지 아내는 손님들에게 말하겠지. ‘제 딸이 제게 보내 준 꽃이랍니다.’

시간여행을 끝내며- 황금시대

부일이와 정일이 아버님 최창한장로님께서는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들에게 ‘Golden Age(황금시대)’라는 말을 즐겨 하셨다. 십대 나이야 말로 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멋진 시절이므로 알차게 보내야만 한다는 당신의 속 깊은 충고를 담아 내신 말씀이었다. 허긴 그 나이에 그 충고가 귀에 들어오기나 했었겠냐마는.

이제 노년의 초입에 이르러 대현교회 최장로님의 충언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어 본다. 바야흐로 내가 서 있는 오늘이야말로 나에겐 ‘Golden Age(황금시대)’가 아닐런지.

여느 해 추수감사절이면 나는 음식하기에 바빴었다. 허나 오늘은 어릴 적 추석 같은 명절이면 어머니가 차려 준 명절상 즐기며 놀 듯, 아이들이 차려 준 감사절 만찬을 즐겼다. 사라진 부모님 자리를 손주뻘 아이들이 채워주었고, 우리 세대는 이제 손 움직이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

허나 혼자 있어 좋은 시간들, 혼자 있어 즐기는 시간들, 혼자 있어 감사한 시간들을 누리는 오늘이야말로 진정 삶의  ‘Golden Age(황금시대)’가 아닐런지.

이 황금시대를 구가할 수 있는 힘의 첫째 원천은 아내다. 돌이켜보면 역사 이래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회수가 천 번을 넘는다고 한다만, 우리 내외가 이제껏 싸운 회수를 따진다면 족히 그 몇 곱을 될 터. 그 숱한 전투속에 쌓인 것은 미움이 아니라 적과 아군을 넘어선 굳건한 전우애, 바로 그 사랑.

그 사랑의 결실인 우리들의 가족들. 이번 여행 중 두 처남 내외가 베풀어준 가족 사랑에 대한 기쁨과 감사도 꼭 기억해야 할 추억이다.

아내와 연을 맺어 여기까지 오게 된 길목 길목들을 따라 쫓다 보면 그 끝에 서 있는 담장이 넝쿨 뒤덮인 곳, 바로 신촌 대현교회이다.

이젠 넉넉한 맏형이 되어 계신 송영길 형님, 교회의 기둥이 된 김석수, 박성규, 안희주, 김난애 장로님들, 늙막에 들어선 우리들에게 믿음이 함께 하는 새로운 길을 바라 보라고 새 길눈 열어 주신 홍길복 목사님, 그리고 차리기 결코 쉽지 않은 잔치자리 기꺼이 마련해 주신  대현교회 최영태 목사님과 당회원 여러분들께 머리 숙여 속 깊은 감사를.

언제나 꿈속에서 들어도 반가운 병덕, 종석, 종민, 용철, 응복, 성식, 경애, 경자, 영숙, 경희 그 아스라히 언제나 그리운 얼굴들, 멀리 남쪽 진주에서 올라와 긴 이야기 나누지도 못하고 헤어진 병훈이…. 그저 만나 고마움으로.

길환이, 영환이…

그리고 규복이. 그저 끝없는 고마움으로.

우리 모두의 황금시대를 위하여!

2023년 가을에.

행복에

“잊지 말아라!’, “적어 놓아라!”, “꼭 인사 전하거라!” 거듭 되뇌이시는 아버지의 당부였다. “그게…. 그게… 쉬운 일 아니야! 섣달 그믐날… 나같은 사람 찾아 주는 거… 인사 꼭 전해라!”

딱히 식사량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줄어든 끼니처럼 아버지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작아들고 있다. 물 몇 모금으로 점심 끼니를 채우신 아버지는 연신 어제 당신을 찾아 주셨던 배목사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라는 당부를 이으셨다.

오늘이 설날이라고 짚으실 만큼 정신은 아직 맑고 또렷하시다.

어제 섣달 그믐날, 아내와 함께 이런저런 밑반찬 만들어 싸들고 딸네 집을 찾았었다. 결혼 후 장만한 첫 집, 정리도 대충 끝났다 하여 나선 길이었다.

고마움, 기특하고 대견함 그리고 함께하는 이런 저런 염려들을 꾹꾹 눌러 숨기고 딸과 사위와 함께 꼭 기억할 만한 좋은 시간들을 보냈다.

멋진 저녁식사 자리에서 며칠 전 생일을 보낸 사위가 내게 건넨 부탁이었다. “제 나이에 걸맞는 좋은 말씀 하나 해주세요.”

나는 사위에게 변변한 도움말을 건네지는 못하였다. 다만 그 순간 내 머리 속을 스쳐간 것들 두가지. 아이들 거실 벽에 걸려있는 바깥사돈이 지금의 사위 나이 즈음에 그리셨다는 그림들과, 내가 지금의 사위 나이 때 아버지와 단 둘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던 시간이었다.

그 생각들이 딸과 사위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되어 내가 건넨 말이었다. “이제껏 지내 온 건실하고 건강한 맘과 몸을 이어 갔으면 좋겠네. 늘 감사함으로.”

곰곰 따져 생각해 보니 어제 음력 2022년 섣달 그믐날, 아버지와 나는 꽤나 행복하였다.

설날 저녁, 떡국 한 그릇 나누고 돌아간 아들 내외에게 딸네 집에 싸들고 간 똑같은 밑반찬 전해주며 드린 내 속 기도.

바라기는 올 한 해도 지금 누리는 행복을 잊지 않고 살 수 있기를…

행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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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내 세탁소 한 쪽 벽면엔 가족 사진 몇 장과 내가 찍은 사진 몇 장 더하여 내가 좋아하는 시 몇 편이 장식으로 걸려 있다.

오늘 거기에 작은 소품 몇 개를 더했다. 천조각들과 실을 이용해 만든 내 바로 아래 누이동생의 작품이다.

내겐 누나 하나 동생 둘 그렇게 누이가 셋이다. 부모들에게 아리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느냐만, 우리 네 남매 가운데 어머니 아버지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은 아마도 세 째 였을 게다. 한국전쟁 통에서 다 키워 잃었던 맏딸 몫까지 온전히  받아 안았던 내 누나는 내 부모의 기둥이었고, 막내는 어머니 아버지의 재롱이자 기쁨이었고, 아들 하나인 나는 늘 걱정거리였다. 세 째에겐 늘 아린 구석을 내비치시던 내 부모였다.

거의 오 분 거리 한 동네에서 사는 나와 누나와 막내와 다르게 세째는 멀리 떨어진 남쪽에 산다.

그 동생이 나를 깜작 놀라게 한 것은 달포 전이었다. 바느질 일을 하며 살았던 동생이 가게를 접은 지도 꽤 오래 되어 그저 손주들 보며 사는 줄 알았는데, 천과 실을 이용한 작품들을 만들어 작은 전시회를 열고 작품집도 만들었다는 소식이었다.

동생의 작품집을 받아 들었던 날, 나는 내 부모님들께 감사한 마음 일어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 한 방울 찔끔했다.

동생의 작품집은 자연, 사계절 그리고 가족이라는 주제로 꾸며 있었다. 나는 그 주제들이 참 좋았다.

이젠 우리 남매 모두 노년의 길로 들어섰다. 이 길목에서 조촐하게 주어진 삶 속에서 신이 내려 주신 은총과 살며 만들어 나가는 관계 속에서 느끼는 감사를 드러내며 살 수 있다는 기쁨을 잠시라도 나눌 수 있음은 우리 남매들이 누리는 축복일게다.

아내와 매형, 매제들은 덤이 아니라, 이 관계의 실제 주인일 수도 있을 터.

*** 엊그제 막내가 내게 보낸 신문 기사 하나. 아틀란타 조지아 Gwinnett County 공립학교 올해의 교사상 semifinalist에 조카 아이 이름이 올랐다고.  열심히 사는 아이들에게 그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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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내 짓

이런저런 흉내들을 많이 내며 살아왔다. 더러는 꿈으로 비나리로 그리 하기도 하였고, 때론 욕심이 동하여 내 본 흉내들도 많았다. 이제와 따져보니 대개가 흉내 짓으로 그치고 말았을 뿐, 온전히 내 몸짓 맘짓 이었다할 만한 것은 없다. 이젠 솔직한 그런 내 모습에 족할 만도 하건만 내 흉내 짓은 지금도 여전하다.

텃밭을 일구고 푸성귀를 거두어 밥상 한 번 차려 내는 일 따위는 꿈 속에서 조차 그려 보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런 일들을 이 나이에 흉내를 낸다.

모처럼 연휴를 맞아 찾아 온 아이들에게 차려 낸 밥상을 달게 즐기는 모습을 보며 모처럼  흉내 짓이 온전히 내 것인 양 좋아라 했다. 그저 속으로 만이지만.

감자 캐어 돼지갈비와 함께 감자탕도 끓이고, 알감자로 감자조림도 켵들였다. 상추와 오이 따다 묵 한 사발 무쳐 놓고 완두콩 따서 콩밥 한 사발 씩, 그렇게 모처럼 나눈 밥상.

아이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나도 내 일터인 세탁소에서 하루를 보낸다.

때론 흉내 짓만으로도 족한 순간들이 있는 법이다.

*** 한적한 공원 길을 함께 걷고, 동네 사람들과 독립기념일 불꽃놀이를 함께 즐긴 일은 아이들이 내 흉내 짓에 건넨 연휴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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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작지만 더할 나위 없이 큰 감사가 넘친 올 추수감사절 연휴는 내 삶 속에 누린 큰 축복  중 하나일게다.

이제껏 살며 내가 선택했던 몇 안 되는 옳은 판단 가운데 하나, 어쩌면 으뜸으로 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드는 것인데 바로 가족들을 위해 한 끼 밥상을 준비하는 일이다.

모처럼 집에 온 아들 딸 내외와 함께 준비하고 나눈 밥상에서 누린 행복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을 만치 크다.

감사의 절기를 따로 정해 둔 옛 사람들의 지혜는 가히 밝다.

누리는 행복을 곱씹게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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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딸아이 혼인 덕에 이박 삼일 도시 여행을 즐겼다.

도시의 해는 건물 사이를 비집으며 떠오르고, 달도 건물  뒤로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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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뉴욕은 아름답다. 하늘이 도시를 감싸고 있고 물이 도시를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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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서른 여덟 해 전 일이 되었다. 아내와 내가 부부의 연을 맺을 즈음, 내 선배이자 우리 부부의 선생 그리고 이젠 삶의 동행자이며 길동무 더하여 신앙의 스승인 홍목사님이 던져 주셨던 말씀. “누군가의 말이라네. 결혼이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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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 년 전 아들과 며늘 아이에게 그 말을 전했고,  어제 밤엔 딸아이과 사위에게 우리 부부가 서른 여덟 해 전에 들은 이야기라는 말을 덧붙여 전했다.

모처럼 일상을 벗어났던 이박 삼일. 아들과 며느리와는 가족 사랑을 깊이 새기는 참 뜻깊은 경험을 함께 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딸과 사위, 그들을 위한 내 기도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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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겁으로 쌓인 인연으로 하여 서로 간 노년의 초입에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만난 캘리포니아 사돈 내외와 함께 바라본 허드슨 강의 아름다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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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감사, 감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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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y>

Thanks to my daughter’s wedding, I enjoyed a city trip of two nights and three days.

The sun in the city rises pushing aside buildings, and the moon hides behind them. Nevertheless, New York City is still beautiful. That’s because the sky enwraps the city and the water curves around it.

Before I knew it, it was something that happened thirty-eight years ago. Around the time when my wife and I were about to tie the knot, Rev. Hong, who was my senior and a teacher of my wife and me at that time, and now a fellow traveler of my life journey and my teacher of faith, spoke the words: “Someone said this. People should marry not just because they love each other, but because they want to love each other.”

Four years ago, I passed it to my son and daughter-in-law. And again, I did so to my daughter and son-in-law last night, adding that it was what my wife and I were told thirty-eight years ago.

Two nights and three days out of my daily repetitive life after a long time! It was very meaningful, as I could think over about family love with my son and daughter-in-law. At the same time, it was a precious time of my prayers for my daughter and son-in-law.

The Hudson River was so beautiful, when I looked at it with my son-in-law’s parents with whom I made a relationship at the beginning of old age through mysterious fate.

Just gratitude, gratitude, gratitude.

 

할머니의 일기

장모 기일을 기리며,  당신 자손 모두가 함께 얼굴 마주할 시간을 갖게 된 것은 이즈음 비대면 세태 덕(?)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니 삶의 역설이다. 그렇게 서울 사는 두 처남네 식구들과 필라 아들 내외와 모처럼 집에 온 딸애와 우리 내외 모두 함께하는 시간을 누렸다. 장모 떠나신 지 사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마침 아내의 생일 직전이기도 하여 두루 감사였다. 비록 그것이 온라인 모임일지언정.

조촐한 가정 예배를 드리며 단지 나이가 가장 많다는 까닭으로 하여 몇 마디 말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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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렇게라도 얼굴들 볼 수 있으니 우리 모두 감사한 오늘이야! 세월이 빠르다는 소리는 너무 많이 들어서 진부하지만 어찌 보면 늘 새로워.

2020년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인류사에 있어 아주 독특하게 남을 한해가 될 것 같아. 나는 물론이거니와 오늘 함께 한 모두가 처음 겪어보는 시간들이었지. 이제껏 전 세계인들이 함께 두려워 했던 것이 전쟁이었다면 올 한해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그걸 뛰어넘는 새로운 경험을 해본 것일게야.

자! 이쯤 우리들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구.

내가 지금 보여주는 몇 장의 사진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인 최용옥 할머니가 남겨놓은 일기장이야.

찬찬히 보라구. 매일 매일 일기의 글은 매우 짧아. 그런데 매일 매일의 일기에 똑 같이 반복되는 문장이 하나 있어. 자! 찾아 보자구.

맞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바로 그 말이야.

내가 가지고 있는 할머니의 일기장은 처음 할머니가 암이라는 판정을 받은 후부터 돌아가시기 몇 달 전 펜을 들어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의 하루 하루 아주 짧은 생각들이 담겨 있어.

할머니의 마지막 몇 년 동안 기록에는 몇 가지 일관된 이야기들이 있어.

첫째는 이미 말했듯 감사야. 하나님에 대한 감사인데 나는 그걸 시간에 대한,  삶에 대한 감사로 읽고 있어. 할머니에 대한 감사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든 모두 너희들 몫이겠지.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 읽고 쓰고 말하고 숨쉬는 순간이 그저 감사라는 할머니의 생각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지.

둘째는 할머니의 일기에는 그 누구에 대한 원망이나 누구의 흉도 없어. 얼핏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결코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오늘 함께 한 우리 모두에게 최용옥 할머니가 남겨주신 큰 교훈이라는 생각이지. 살며 누구에게 대한 원망도 품지 말고 흉보지 않고 사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할머니 흉내라도 내고 살면 좋겠어.

세째는, 두번 째에서 내가 누구에 대한 원망이나 흉 없다고 했지만 딱 한 사람 예외가 있었어. 때때로 흉도 보고 원망도 한 딱 한 사람. 바로 남편인 이영제 할아버지였어. 이건 아주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태도였다고 나는 생각해. 살며 흉보고 원망하는 사람 하나 없다면 뭔 살 맛이 있겠어. 부부란 그런 것 아닐까? 원망과 흉을 품을지라도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관계가 바로 부부라는 생각 말이지. 물론 이즈음 세상은 많이 바뀌었지만 난 부부사이에 대해 최용옥 할머니가 느끼고 남긴 말에 많이 동감하는 편이야.

어때 이쯤, 최용옥 할머니가 우리에게 남겨 준 유산이 뭔지 생각해 보자구.

감사와 사랑 가족. 나는 그렇게 정리해 보구 싶어. 매우 성서적이지.

최용옥 할머니는 그렇게 살았고 우리더러 그렇게 살라하는게 아닐까?

자! 우리 모두 최용옥 할머니에게 감사하자구.

–            장모 4주기에


 

Well! It is a grateful day today, as we can see each other like this. Though the expression, “Time flies!” is a cliché as we’ve heard so many times, it always seems new in some way.

Perhaps, the year 2020 will be remembered as a very unique year in human history. All of you, as well as I, have never experienced a year like this. If what human beings fear most thus far has been a war, all the people in the world may have been experiencing something even more fearful this year.

Now, let’s talk about your grandmother.

These pictures which I’m showing you now are those of the diary which Mrs. Choi Yong-ok, our mother and your grandmother, left.

Look at them slowly and carefully. What she wrote each day was short. But, one sentence appeared repeatedly every day. Well, let’s find it.

Right! “Lord, thank you.” That’s exactly it.

Grandmother’s diary, which I keep, held very short thoughts of hers each day from the time when she had been diagnosed with cancer to the day when she could not have held a pen any more, just a few months before she passed away.

What Grandmother wrote during her last some years showed some consistent and prominent features.

The first was gratitude, as I said before. Though it was gratitude to God, I’d like to read it as gratitude for time and for life. Of course, it is up to you how her gratitude may be read and interpreted. However, I hope that you won’t forget Grandmother’s thought that every moment, whether reading, writing, speaking or breathing, is to be grateful for, no matter how you read and understand.

The second was that Grandmother had never written resentment at anyone or found fault with anybody. It could be passed easily as nothing unusual without notice. But it is not really so easy to do so. I think that it is a very precious lesson which Grandmother, Choi Yong-ok, left to all of us gathered together today. I know that living without holding resentment at and finding fault with anybody is not easy. But I hope that I will be able to imitate her, if not living like her.

Though I said earlier that Grandmother had never revealed any resentment or someone’s faults in her diary, there was only one exception. Who she resented from time to time was her husband and your grandfather, Lee Young-je. In my opinion, it was quite natural and commonsensical. How can a human being live, if he/she has no one to resent at or to find fault with? Isn’t the relationship of husband and wife like that? Yes, the world has changed a lot. But I empathize a lot with what Grandmother, Choi, Yong-ok had felt and left about the relationship of husband and wife.

Now, how about thinking about the legacy which Grandmother Choi, Yong-ok has left us?

Gratitude, love and family. I like to summarize it like that. It appears very biblical.

Grandmother, Choi, Yong-ok lived her life like that and she wanted us to live our lives like that, too. Don’t you think so?

Well! Let’s thank Grandmother Choi, Yong-ok together.

– The Fourth Anniversary to remember the late Mother-in-law

추수감사절 이야기 셋

  • 하나.

“어제 어떻게 지냈니?” 가게 손님 한 분이 내게 던진 물음이다. “아내와 딸과 함께 아주 조용히… 당신은?”. 내 응답에 그녀의 이어진 질문, “나도 남편과 단 둘이 조용히… 우리 가족들 하고는 Zoom으로 함께 두루 안부를 묻는 시간을 가졌는데… 넌 그렇게 하진 않았니?” 유태계 은퇴 변호사 마나님의 연세는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 그리고 내 응답, “그랬구나, 우리 가족들도 그렇게 Zoom으로 함께 했단다.”

어제 추수감사절 오후 한 때, 필라델피아에 아들 내외와 아틀란타에 있는 동생 내외와 조카 조카손주들 그리고  사촌 동생네,  시카고와 워싱톤에 사는 조카들 조카 손주들, 우리 동네에서 함께 사는 누이네들과 조카들 모두 Zoom으로 추수감사절을 함께 했다. 함께 하지 못한 아버지는 늦은 저녁 아이들 전화 인사로 흡족해 하셨다.

지난 일요일 거의 아홉 달 만에 집으로 모셔온 내 딸아이는 거의 상전이다. 뉴욕 맨하턴에서 차를 태운 순간부터 마스크를 써라 창문을 열어라 쉬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갔음 좋겠다 등등. 집으로 돌아와서도 따로 밥상 받기, 거리 유지 하기, 마스크 쓰기 등등 까탈스럽기 그지 없다. 재택근무 중인 아이는 연말까지 내 집에 머무를 요량인데 아내와 내게 내리는 명령들이 단호하다. 나는 그런 딸애가 참 좋다.

어제 추수감사절 밥상은 딸아이 혼자  다 차렸다. 고모들네 저녁까지 넉넉히. 아이의 손 솜씨가 제법이었다.

이젠 시집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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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둘.

추수감사절 앞에 받은 옆서 한 장. 우리 부부에겐 영원한 우체부인 Johnson씨가 보낸 은퇴 인사였다.

내 세탁소 바로 뒤편에 있는 Newark 우체국에서만 만 36년동안 일했던 그가 은퇴한다는 인사 엽서를 보며 한 동안 찡한 생각들이 오고 갔다.

이즈음은 검은 얼굴에 허연 머리털과 풍성하고 흰 수염으로 마치 산타가 다 된 노인이 되었다만 참으로 억척스런 사내다. 나보다 몇 살 아래이긴 하지만 아이들 나이가 서로 비슷해 친구 같은 이다. 한참 아이들 키울 땐 우체국 일이 끝나면 그로서리 생선 가게에서 생선을 다듬는 등 억척스레 애비 노릇을 다했던 사람이다. 보답이랄까? 아이들 모두 정말 잘 컷다.

그가 일을 하며 많은 이들에게 좋은 소식 나쁜 소식들을 전하는 일에 충실했다 했지만, 솔직히  내 입장에서 그는 좋은 소식보다는 귀찮고 듣기 싫은 소식들을 더 많이 전했었다. 내가 가게에서 주로 받는 편지들이란 거의 대부분 각종 공과금 고지서나 공공 기관들에 서 보내온 서류들이 대부분이었다. 허나 따지고 보면 그런 소식들에게 응답했기에 내게 오늘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감사로 응답하는 일은 당연할 터.

그의 은퇴에 박수를, 그가 만들어 나갈 새로운 삶을 위해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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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아침에 읽은 블룸버그 발 뉴스 하나.  <정말 힘든 시간들- 재택근무 시대가 세탁업을 조이고 있다. ‘Ugly, Ugly Time’: Work-From-Home Era Crushes U.S. Dry Cleaners>라는 제목의 기사다.

팬데믹 이후 자영업들이 겪어 오는 어려움들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백신이 개발되어 공급되고 치료제가 일반화 되면 식당업이나 호텔 여행업 등등은 다시 호황을 맞을 가능성이 있지만, 세탁업은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상당 부분 나는 그 기사 내용에 동의한다. 지난 구 개월 사이 6개 중 한개의 세탁소가 문을 닫았다거나 도산하는 업체들이 줄을 이을것이라거나, 여전히 평상시의 반도 못 미치는 매출을 기록하는 업소들이 대부분 이라는 상황 인식에도 동의한다.

오랜 재택근무의 경험들로 사람들의 의복 습관이 달라져 세탁업이 예전으로 돌아가긴 힘들 것이라는 전망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한가지.

추수와 절기는 때가 있듯, 모든 업종 역시 부침의 때가 있겠다만, 감사란 늘 나에게 달린 일.

뉴스가 내 추수감사절을 범하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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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살며 이따금 짜릿한 즐거움을 맛 보는 순간들이 있다. 가족들로 하여 그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때 그 맛은 극에 이른다.

오늘은 델라웨어 한국학교에서 학생들의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열린 날이다. 솔직히 내가 어떤 작은 관심도 기울이지 못한 행사이다. 아내가 한국학교 교사이고 며느리가 학생이긴 하지만 내가 관여할 어떤 틈도 없거니와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다. 오늘 낮에 아내가 보낸 카톡을 받기 직전까지는.

아내가 보낸 카톡엔 내 며늘아이가 대회에 참석해서 이야기를 펼친 녹음파일이 있었다. 듣고나서 아내에게 보낸 내 첫 응답은 아내를 나무라는 말이었다. ‘아니 좀 애 한테 쉬운 말을 쓰게 했어야지, 그렇게 어려운 말들을…’ 늘 그렇듯 내 나무람은 아내에게 닿지 않았다. 언제나 옳은 아내 대답이었다. ‘내가 며늘아이의 선생은 아니지, 그 반 선생님은 따로 계시지. 내가 뭐랄 처지가 아니잖아. 나도 오늘 처음 들었거든.’

저녁 나절에 아들녀석과 며느리가 전한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나는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며느리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에게 고맙고, 어눌한 한국말 구사력으로 제 아내를 도운 아들 녀석이 고맙고, 무엇보다 문장 하나 하나에 숫자를 매겨 외우고 또 외었을 며늘아이가 고마웠다.

그 무엇보다도 이젠 모두 떠나신 내 어머니와 장모와 장인까지 추억해 준 며늘아이에 대한 고마움이라니…

내 며늘아이 이름은 ‘론다야 김’.

<가족>- 론다야 김

  1. 가족은 저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2. 그래서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바로 가족입니다.
  3. 제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때마다, 가족들이 영어로 말하면서 저를 배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4. 가족들은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영어로 말한 것을 알려주십니다.
  5. 제 어머님은 한국어로 특정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주십니다.
  6. 제 아버님은 특정 요리에서 어떤 조미료가 가장 잘 맞는지 설명해 주십니다.
  7. 제 할아버지께서는 군대와 한국사에 대해 알려주시고 할머니들께서는 제가 잘 챙겨 먹었는지 묻곤 하셨습니다.
  8. 저는 그분들의 친절이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9. 그러나 저는 그분들에게 특정한 말을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0. 저는 가족과 저의 언어 장벽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가족이 말하는 모국어를 말하고 싶어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11.저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1. 몇 마디 말로 가족들 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2. 미래의 아이들과 언젠가는 한국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3. 저는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국어를 배웁니다.
  4.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