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

가을이 편히 쉬고 있는 숲길을 걸었다. 먼 길 걸어와 노곤한 몸 따뜻한 온돌에 누인 듯 가을은 그렇게 쉬고 있었다. 이따금 이는 소슬바람과 내 발자국 소리가 가을을 깨곤 했지만 숲은 이미 가을을 깊게 품고 있었다.

횡재였다. 집 가까이 새로운 산책길을 찾은 오늘 내 운세다. 숲길에 홀려 걷다 보니 지나쳤던지 오랜만에 긴 낮잠도 즐겼다.

김진균이 쓴 ‘죽음과 부활의 신학’을 만지작 거리다 책장을 덮었다.

아침 나절 찾아 뵌 어머니는 넋 나간 눈길로 중얼거리셨다. ‘왜 이리 안 데려 가신다니…’.

아버지는 우리 네 남매 전화번호만 달랑 저장하고 있는 아이폰을 목에 걸었다 어깨에 걸었다 하시며 ‘빨리 받지를 못해요…’를 반복하셨다.

햇볕 잘 드는 창가에 놓인 쟁반에는 자른 사과 조각들이 마르고 있었다. 삐뚤빼둘 도무지 어느 한군데도 가지런한 곳 없는 조각들도 보아 아버지 솜씨였다. ‘아이고, 우리 아버지가 사과도 다 깍아서 말리시나?’하는 내 소리에 아버지는 나쁜 짓 하다 걸린 아이처럼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마른 사과 혹시 네 어머니가 자실까해서…’

가을이 쉬는 계절이다.

깨어날 봄을 믿으며… 숲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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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비지

짧은 해에 쫓겨 가을이 저문다. 일기예보는 어느새 눈소식을 전한다.

‘장소 옮기고 장사는 좀 어때?’ 가게 손님 Mayer씨가 내게 물었다. ‘뭐 그저 그렇지… 큰 변화는 없어. 네 장사는 어때?’ 꽃가게 주인인 그에게 되물었더니 대답이 길었다.

‘여름에 꽃장사는 젬병이거든. 가을 바람 불고 여름 휴가 끝나면 우린 좀 바빠지지. 이제부터 제 철이랄까… 날 추워지면 호시절이지! 웬지 솔직히 말해 줄까? 세상 뜨는 이들이 부쩍 늘거든! 정말이라니까!’

‘정말이라니까!’라는 그의 말에 나는 웃었다.  그나 나나 일흔이 손에 잡힐 듯 하건만…

토요일 오후 가게 문 일찍 닫고 찾은 공원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공원 길을 걷지만 땀은 커녕 한기가 몸을 감싼다.

가을은 언제나 너무 짧다.

짧은 입이 더욱 짧아져 음식물을 거의 입에 대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옛날에 먹던 거를 찾으셔서 콩비지 찌개를 만들어 보다.

하루 종일 잠에 취해 ‘여기가 한국이야? 미국이야?’를 되뇌시는 장인은 오늘은 좀 반짝 하셨단다.

비록 가을은 짧고 겨울은 길어도 올 겨울 꽃장사는 그리 잘 되지 않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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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 가는 가을, 숲 속 정원 길을 걷다.

시간이 바뀌어 밤이 부쩍 길어진 날, 동네 Mt. Cuba Center에서 – 11/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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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어느 안식일

한 주간 쌓인 피로의 무게에 눌려 엊저녁 일찍 자리에 누웠더니, 몸이 ‘피로의 무게’란 단지 맘이란 놈의 생각 이었을 뿐 아직은 견딜 만하다며 새벽녘에 눈을 뜨다.

어제 필라 지인이 했던 부탁이 떠올라 컴퓨터 앞에 앉다. 오는 11월 6일 중간선거 투표와 입후보자들의 약력과 정책공약 등을 알리는 한글 안내 번역 교정을 보다.

가을 점퍼를 꺼내 입다. 아침 바람이 어느새 차다. 휴일 아침 커피 맛은 일하는 날의 그것보다 깊고 달다.

모처럼 교회 한 번 가지 않겠느냐는 아내의 제안에 따라 나서다. 목사님의 말씀 ‘착하게 살자’. 딱 고만큼의 거리와 간격에서 만나는 이들과의 인사도 때론 살가운 법이다.

오후엔 아내와 함께 가을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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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를 일하고 하루를 쉰 안식일은 역시 신의 한수다.

저녁상을 물리고 이즈음 한국 현대사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 보내주신 해방 이후 빨치산에 대한 연구 논문들을 읽다. 민(民)에 대해 천착하는 연구자의 시각이 가슴에 닿다.

참다운 안식일 하루를 만드는데 사람들이 고민하고 투쟁해 온 역사는 거의 육천년.

우리 세대의 70년 고민은  이제 시작이다.

내일은 손님들이 떨구고 간 빨래감들과 뒹굴 터.

또 다른 안식일을 위하여

가을 – 일요일 아침

맨하탄에서 일어난 폭발사고 소식에 가슴이 철컹 내려앉는다. 우선 사고 지역과 딸아이 거주지역과의 거리를 따져보고, 아이에게 연락해 본다. 딸아이는 사고조차 모르고 있었다. 가슴을 쓸어 내리며 찬찬히 뉴스들을 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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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한 마음을 다스릴 겸 이른아침 동네 한바퀴를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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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체육공원 어귀 밤나무엔 밤들이 한가득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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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색으로 변해가는 풀밭에 핀 들꽃이 아침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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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공원 앞에 “Nip”이라고 불렸던 야구선수 James Henry Winters를 기리는 팻말이 서 있다. 오래전엔 야구도 흑인리그와 백인리그가 따로 있었단다. 흑인리그에서 명성을 떨치던 Nip은 은퇴후 결혼한 그의 아내  Sarah Smith 고향인 이 마을에서 정착해 평범한 일꾼이 되어 살다가 갔다고 한다.

사람사는 곳에 여전한 것은 흑백 갈등 뿐만이 아닐게다.

이 좋은 가을날 아침에 누군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것이고, 또 누군가는 아픔으로 가슴을 저미기도 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곳에서 평범한 일꾼으로 살며 계절을 한껏 느끼며 누리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생애 최고의 가을

제목이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대로 가려고 합니다.

정말 좋은 가을 오후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작은 사업체를 접고 은퇴 수순을 접는듯하던 벗이 땅을 일구기 시작한 것은 올 봄이었답니다.

그리고 오늘 그의 초대를 받았답니다.

그가 일구어 낸 농장에서 정말 찐하고 멋진 쐬주 한잔 붓고 마셨답니다.

가을, 맑은 하늘, 고추, 무우, 배추, 호밀 밭…

갓 따온 상추, 고추에 돼지 바베큐. 그리고 쐬주 한 잔!

정말 간만에 “Wolly Bully”에 맞추어 몸을 뒤튼 벗들의 모습이 아니어도 그저 좋은 가을 오후였답니다.

그 흥에 취해 있다가 상추 비닐 농장으로 들어가는 벗을 따랐답니다.

가을잠바로는 서늘한 기운이 도는 오후였는데 비닐농장의 거적을 벗기자 훅 다가온 열기를 맞으며 든 생각 하나랍니다.

오늘 쐬주 한잔은 환갑 나이에 허리 아픈 줄 모르고 한해 내내 땅을 일군 벗의 땀이라는 생각이었답니다.

제가 정말 멋진 가을 오후를 즐긴 까닭이랍니다.

돌아와, 제 차 트렁크에 가득 실린 무우를 보며 벗의 한 해를 몽DSC01797땅 뺏어온 미안함으로 여간해서는 먹지 않는 생무우를 한 입 베어 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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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부끄러움

화창한 시월 일요일 오후입니다. 동네 한바퀴를 돌았습니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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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을 담은 동네 어귀 개울물도 참 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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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남짓, 이른 가을 오후를 만끽하며 그렇게 걸었습니다.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흐를즈음 다시 들어서는 집뜰에는 가을 햇살이 가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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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걸으며 제 머리속에 오간 몇 가지 생각들입니다.

오늘 오전에는 모처럼 교회 예배에 참석했었답니다. 오늘 주일 설교 본문이었던 성경 말씀이 머리 속을 오락가락했답니다.

“예수께서 뭍에 내리시니, 그 동네에 사는 귀신 들린 어떤 사람 하나가 예수를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았으며, 집에 머물러 있지 않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누가복음 8: 27)

“그래서 사람들이 일어난 그 일을 보러 나왔다. 그들은 예수께로 와서, 귀신들이 나가 버린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서 두려워하였다.”(누가복음 8: 35)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 군대귀신 들린 자를 예수가 치유하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성서 본문을 들어 “옷을 입지 않았”던 귀신 들린 상태에서 “옷을 입”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돌아온 모습을 대비하며 “성령의 새 옷을 입은” 신앙인의 모습을 일깨우는 설교 말씀이 이어졌었습니다.

걷는 동안 구름 한점없는 맑은 하늘아래 가려야하는 모습들을 생각해 보았답니다.

옷은 패션의 상징이기 이전에 부끄러움을 가리는 상징입니다. 가린다는 말은 숨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릴 줄 안다는 것은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걸음과 함께 제 머리속에는 부끄러움이 드러날수록 오히려 목청이 커지고, 부리는 권세의 칼날을 더욱 번득이는 이즈음 세태들이 이어졌습니다.

모세와 예수와 모하메드. 그 모두의 시작은 “신앞에서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사람”의 모습에서였습니다.

오늘 이 순간 저 푸른 하늘 아래서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이름으로 “남의 부끄러움”만을 탓하는 세상은 모두 가짜입니다.

무릇 모든 참된 신앙의 바탕은 부끄러움을 아는 일이고, 가릴 줄 아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