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열에

어제 아침 일입니다. 빨갛게 떠오르는 해도 서늘한 날씨에 놀랐는지 구름 속에 숨어 빛을 발하고 있었답니다. 늘 그렇듯 토요일 아침은 저도 좀 게으르답니다. 가게 문을 열려고 하는데 바로 문 앞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누워 파르르 떨며 곧 넘어가려는 듯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깃털도 몇 개 빠져 있었답니다.

‘도대체 왜 여기서…’하는 생각은 이내 숨은 답에 이르렀습니다. 여린 아침 햇살이 드리운 하늘을 담은 가게 유리창을 창공으로 착각한 녀석이 들이받아 일어난 일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녀석은 게으른 아침을 떨치고 일에 빠져야 할 나를 조금 허둥거리게 하였습니다. 우선 녀석을  햇살이 들지 않는 기둥 그늘로 옮겨 놓고는 가게 문 열 준비를 하였답니다. 신경이 온통 녀석에게 꽂혀 급히 가게 문을 열고는 작은 종지에 물을 담아 녀석 부리 앞에 놓아 두었습니다. 녀석은 곧 스러질 듯 여린 숨을 할딱일 뿐 내 부산한 몸짓엔 아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한 시간이 가까이 지날 무렵까지 녀석은 그렇게 맥을 못 추고 있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도 떠오르지 않고 손님들은 들락거리기 시작하여 녀석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바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반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녀석이 물을 쪼는 것을 보게 되었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녀석은 깡총걸음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해가 구름을 벗어날 즈음 녀석은 휑하니 날아갔답니다.

일도 잠시 잊고 녀석을 쳐다보던 제게 일기 시작한 것은 작은 희열이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깊어 가는 가을의 나른한 아름다움이 그 희열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떨어져 구르는 마른 나뭇잎들 마저 바람에 살아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살아있음. 그 희열에, 감사에.

24년 시월에.

행복에

이런 날은 참 행복하다. 더할 나위 없이 맑은 초가을 마음이 마냥 여유로운 하루, 손에 든 책에 완전히 빠져 든 날에 누린 행복이다.

나이 쉰이고 제법 이름 꽤나 알려진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라는데 나는 그녀의 책이 처음이다. 케스린 슐츠(Kathryn Schulz)가 쓴 <상실과 발견, Lost & Found>이다. 책에 쉽게 빠져 들게 한 요인 중 하나일게다. 바로 번역자 한유주 덕이다.

300여쪽 제법 긴 자전적 에세이에 엉덩이 몇 번 들썩이지 않고 반나절 빠져 지냈다. 몸에 받으면 좋은 영양제가 될 듯한 가을 햇빛과 그 볕으로 나는 열을 식혀주곤 하는 마른 바람은 오늘 내가 누린 복을 더했다.

내 초기 이민 생활에 큰 힘이 되었던 월트 휘트만(Walt Whitman)의 시들을 다시 곱씹을 수 있게 한 것은 이 책이 덤으로 내게 준 행복이다.

에세이를 읽으며 post-it flag들을 이리 많이 붙여 보긴 처음인 듯하다. 그만큼 내가 빠져 시간을 보냈다는 징표일게다.

책 마무리 부분에 나오는 몇 문장이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드는구나.” C의 아버지, 빌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딜 보나 평범한 사람치고 나는 경이로운 삶을 살아온 것 같아” C의 아버지는 실내 배관이 없는 집에서 자랐고…그는 평생을 농부로, 식료품점 점원으로, 관리인으로, 경비원으로 일했고….>

내 또래일 작가의 배우자 아버지에 대한 묘사인데 세탁업이 평생 직업인 내가 종종 이즈음 읊조리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문장들이다.

<우리는 놀라운 삶을 살아간다. 삶 자체가 경이롭기 때문이다.>

<상실은 일종의 외부적 의식으로, 우리에게 유익한 날들을 잘 사용하라고 한다. 우리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고, 인생을 잘 산다는 건 보이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것이다.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경의를 표하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대상을 돌보고, 아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과 이미 사라진 것들을 포함한 이 모든 것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우리는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켜보기 위해 여기 있다.>

가을의 초입, 나뭇잎들은 물들기 시작했고, 성미 급한 녀석들은 이미 떨어져 뒹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을 빛에 더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들도 있고, 이제 막 피려고 봉오리 맺는 놈들도 있다.

이런 날은 참 행복하다.

계절 그리고 관점(觀點)에

호들갑스런 일기예보가 지나치지 않을 때가 있다. 어제만 해도 늦가을이거니 했는데 기온이 뚝 떨어졌다. 일기예보처럼 오늘 밤엔 얼음이 얼 모양이다. 이번 주말에는 첫 눈도 내릴게란다. 이렇게 계절이 또 바뀐다.

오후에 좀 걸을 요량으로 찾은 Longwood Garden 풍경은 이미 겨울이었다.

곳곳마다 사람 손 닿아 가꾸지 않은 데 없는 정원일지라도 그 역시 계절을 따라가는 법, 자연을 담은 바깥 풍경은 흔히 하곤 하는 말 그대로 춥고 스산하고 을씨년스럽기 까지 하였다.

허나 사람의 욕심이 어디 끝이 있겠나? 실내 정원은 사람들의 손길이 만들어 놓은 꽃들의 세상이었다. 더하여 시간이 아무리 한겨울로 치달아도 그 계절이 주는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또 한번 이렇게 바뀌는 계절의 길목을 아내와 함께 손잡고 걷는 시간에 대한 감사의 크기라니!


그리고 관점에 대하여.

해마다 이 맘 때면 한번씩 읊조려보는 시 한편,

Shel Silverstein이 고백하는 ‘관점(Point Of View)’이다.

<관점>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주일만찬은 즐겁지 않다
부활절축제도 재수 없을 뿐
닭과 오리의 관점으로
그걸 바라 본다면.

한때 나는 참치 샐러드를 얼마나 좋아 했었던지
돼지고기 가재요리, 양갈비도
잠시  생각을 멈추고 식탁의 관점에서
식탁을 바라보기전까지는.

<Point Of View>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
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

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아주 오랜만에 주일예배를 드렸다. 목사님께서 던져 주신 물음 하나, ‘관점’이었다.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며 감사를 놓치지 않는 하루 하루를 살 수 있기를 비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관점’을 곱씹어 내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난 아직 멀었나 보다. 내가 칠면조의 관점으로 사람들의 세상을 이해할 수 없듯,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잣대는 준비되어 있지도 않고 이번 생에서는 내게 허락치 않은 일일 것 같다.

다만, 내가 신을 고백할 수 있는 ‘관점’ 하나. 사람의 눈으로 사람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일, 그것 하나는 이루며 사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그리 보면 칠면조의 관점도 하나님의 관점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므로.

DSC04975 DSC04976 DSC04980 DSC04983 DSC04992 DSC04996 DSC04997 DSC05002 DSC05005 DSC05012 DSC05015 DSC05018 DSC05020

놀이

시간이 바뀐 첫 하루는 꽤나 길다. 한 시간이 주는 여유를 만끽하며 놀이에 빠진 하루였다. 일과 놀이가 잘 어우러진 삶은 그야말로 축복이다.

-오전-

어제와 똑같이 눈을 뜨니 아직 새벽 시간이었다. 시간이 바뀐 까닭이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계획했던 놀이를 시작했다.

막 이민을 왔던 무렵이었으니 우리 내외가 아직 풋풋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아내가 김치를 담아 보겠노라고 했었다. 아내는 열심히 긴 시간을 부엌에서 보냈다. 그 날이었던가 이튿날이었던가? 내가 아내에게 건넨 말이었다. “앞으로 김치는 사 먹는 것으로…”

그 날 이후 오랜 동안 집에서 김치를 담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세월 흘러 내가 놀이 삼아 김치를 만들어 보곤 했었는데 번번히 실패를 거듭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나면 김치를 담곤했다. 어차피 놀이였으므로. 이왕 즐기는 놀이라면 즐거워야 하는 법, 김치 깍두기 총각김치 물김치 갓김치 동치미 등등 흉내 낼 수 있는 일들을 즐겼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제법 그럴듯한 김치를 만드는 일도 일어나곤 했다.

오늘 오전 내 놀이는 조청을 만들고 고추장을 담는 일이었다. 밖에는 추적추적 가을을 밀어내는 비가 추적이고 있어, 내가 놀이를 즐기기엔 마치 주어진 듯 딱 좋은 날이었다.

그렇게 고추장도 담고, 내친김에 거둔 후 어찌할지 모르고 돌보지 않았던 늙은 호박으로 호박조청도 만들고, 덤으로 식혜까지 얻는 즐거움을 누렸다.

이 즐거움을 얻기까지 내가 내 놓아야 했던 대가가 있었으니 점점 가늘게 높아만 가는  내 목소리, 바로 세월.

-오후-

추적이던 비 그치고 가을걷이 끝난 밭들조차 아직은 풍요로와 보이는 가을 오후, 벗의 농장을 찾아 가 한 나절 또 다른 놀이를 즐겼다.

이 나이에 만나서 좋은 친구와 함께 한 잔 술에 좋은 먹거리 더하여 계절을 즐기며 이야기하며 노는 즐거움에 더 할 게 무엇이 있을까?

벗이 잘 키워 넉넉히 넣은 매실로 담근 매실주에 먹거리는 그야말로 우리네 입맛에 달라붙는 내 어릴 적 어머니 맛, 눈으로 즐기는 농장의 가을 정겨운 풍경은 덤으로 누렸던 놀이의 즐거움이라니!

뭐 이야기라야 별게 있어야 하나? 그저 덤덤히 늙어가는 우리들 이야기.

친구 내외와 우리 내외 모두 아직은 일과 놀이를 즐길 수 있어 아직은 청춘. 암만!

세월을 타고 즐기는 놀이에.

20221106_145822 20221106_145856 20221106_145911 20221106_150043 20221106_150507 20221106_152322 20221106_152602 20221106_162817

가을, 휴일 하루

지난 여름 내게 눈 호사(豪奢)를 누리게 했던 글라디오스 구근을 거두었다. 참 고맙기도 하여라! 올 봄에 심었던 구근 수에 비해 숱한 종근들은 차치 하고라도 내년 봄에 다시 심을 실한 녀석들을 거의 세배에 달하게 거두어 갑자기 큰 부자가 된 듯 했다.

화단과 뒤뜰 여기저기에 수선화, 무스카리, 아이리스, 튜립 등속의 알뿌리들을 심고 나니 갑자기 짧아진 하루 해가 저물었다.

낮에 호미와 꽃 삽질 하다 문득 바라 본 하늘, 수리 한 마리 나무 꼭대기에서 한참을 두리번 하더니만 솟구쳐 날았다. 먹이 하나 찾았나 보았다.

하! 그 순간 문득 떠오른 후회 하나. “왜 그리 조급 했었을까? 나는…. 그저 한 계절, 아니 한 나절, 어쩜 그도 아닌 한 순간을 준비하지 않고 그 많은 시간들을 다 이룬 양 들떠 살았을까?”

한참을 하늘 바라보다 다시 호미를 들고 감사! 이제라도 이렇게 누리는 시간들에 대해.

** 씹는 맛의 즐거움 되찾은 날에. 먹는 즐거움이라니. 그저 넉넉한 감사!

DSC04906 DSC04908 DSC04914 DSC04919

DSC04901DSC04912DSC04922

가을과 모국어

이즈음 내 목소리는 참 싫다. 듣는 일은 물론이고 내는 일도 마찬가지다. 내 것 같지가 않다. 소리는 점점 가늘게 높아지고, 쓸데없이 빨라지는 내 목소리를 느끼는 순간 나는 움찔하며 입을 닫곤 한다.

말도 마찬가지다. 영어야 원래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말도 이젠 참 어눌해져 내 머리 속 생각을 차분히 내어 놓는 일이 쉽지 않다. 하여 말수는 점점 줄어 든다.

그렇다고 불편한 일은 없다. 비록 돋보기 도수도 점점 올라가 글을 오래 보는 일조차 버거워 지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새롭게 느끼는 촉은 예전보다 예민해 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한번 꽂히는 일을 곱씹고 되새겨 보는 즐거움들이 새로 그 자리를 채우기 때문이다.

그래 다 저마다 제 자리에서 살기 마련일게다.

아침마다 스쳐 지나가곤 하는 옥수수 농장에 가을걷이가 시작되었다. 농장에 봄꽃 가득하던 게 그야말로 바로 엊그제였는데…

맞다! 나는 여름을 너무 쉽게 잊곤 한다.

그 여름을 보내는 내 뜰도 가을을 맞이했다.

나도 이젠 시간을 쫓아 계절을 맞는다.

시인처럼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워 보는 시간을.

목소리도 말도 글도 아닌 온 몸으로 느끼는 사람 됨으로. 어차피 모국어란 신에게 닿아 있는 부호일 터이니.

DSC04735 DSC04740 DSC04743 DSC04745 DSC04758 DSC04760 DSC04764

지족(知足)에

눈길 닿는 곳마다 가을인 일요일 하루를 만끽하다. 쉬는 날 하루 계획에 온전히 들어맞게 시간을 보내고 난 후 맞는 저녁 시간에 맛보는 족함이 크고 또 크다.

애초 대단한 계획을 세운 일은 없다.

한 시간 늦게 아침을 맞는 일, 뜰에 낙엽 거두는 일, 아욱 상추 깻잎 쑥갓 무우 등속 가을 푸성귀 거두는 일, 누워 계시는 아버지 찾아 뵙고 점심 한끼 드시는 것 도와드리는 일, 돌아와 낮잠 한숨 즐기는 일, 아내와 함께 장보는 일, 푸성귀 다듬고 무우 김치 담그는 일, 이젠 길어진 밤시간 노장자(老莊子) 글귀 하나 곱씹어 보는 일.

그저 그렇고 그런 쉬는 날 하루 계획대로 보내고 맞이 한 왈 시월의 마지막 밤에 곱씹어 보는 말, 지족(知足).

DSC03151 DSC03162

찬양에

가을이 떠나기가 아주 서러운 모양이다. 연 이틀 이어진 빗줄기가 그칠 듯 하더니만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가을과 함께 떠날 채비에 바쁜 나무들은 제 옷 벗어 땅들을 노랑과 빨강으로 물들여 놓는다.

DSC01311

가게가 한가하여 이른 시간에 보일러를 끄다가 가게 뒷문 사이로 떠나기 서러운 가을을 보았다.

고개 끄덕이며 혼자 소리로 중얼거려 본 말, ‘그래 삶이다’.

처남 아이들 덕에 성경을 펼쳐 곱씹어 보는 저녁이다. 에고 버리지 못하는 내 못된 말본새라니… 아이들이라니… 쯔쯔… 이젠 모두 환갑 줄인 처남들인 것을.

아내는 물론이거니와 두 처남 모두 독특한 재능들을 타고났다.  막내 처남이 기타 치며 혼자 4중창으로 부르는 찬송을 큰 처남이 자신의 페북에 올려 놓았다. 함께 영상을 보던 아내가 한 말, ‘하여간 얘들은 재밌고 참 이상해!’. 나는 차마 입으로는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셋 다 독특한데…’

그렇게 읽고 또 읽어 본 성서 시편 136편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찬양시는 떠나기 서러운 가을에게도 유효할 게다.

무릇 삶이 하늘과 이웃에 닿아 있는 한.

DSC01325

처남들에게 고마움을.

막대사탕

내 세탁소 카운터에는 막대사탕을 담은 작은 나무접시가 하나 있다. 나무접시는 족히 30년 넘게 우리 부부와 함께 했다. 나무접시에 담긴 막대사탕을 즐기던 아이들이 이젠 중년이 되어 내 세탁소를 찾기도 한다.

올들어 역병 탓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세탁소를 찾는 이들은 매우 드물다. 그래도 막대사탕을 담은 접시는 금새 비어지곤 한다.  이즈음 막대사탕을 주로 집어가는 이들은 노인들이다. 이따금 나보다 족히 세 배는 됨직한 젊은 친구가 사탕 두세 개를 한 입에 넣어 빠그작 소리를 내며 씹을 때면 그 둔한 몸은 전혀 아니지만 그의 건치(健齒)에 이르면 여간 부러운 것이 아니다.

지난 몇 달 사이 내 눈에 밟힌 노인 손님 한 분이 있다. 평소 내가 카운터를 보는 일은 매우 드물어 오랜 단골 손님들 빼고는 기억하는 손님들이 그리 많지 않다만, 이즈음엔 한가한 탓에 카운터를 차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노인이라고 했지만 내 또래 거나 몇 년 더 산 정도인 사내는 늘 나만큼 허름한 모습으로 두 주에 한 번 꼴로 내 가게를 찾는다. 들고 오는 빨래거리라고는 언제나 달랑 셔츠 두 장이다. 사내가 눈에 띤 것은 막대사탕 때문이었다. 다른 일을 하다가 그를 맞기 위해 카운터로 다가서는데 그는 흠칫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 땐 잘 몰랐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내 세탁소에 올 때 마다 막대사탕을 한 줌 주머니에 넣곤 하는 것이었다. 한 줌이라고 해 보았자 대 여섯 개 정도일 터이다.

어차피 오는 손님 누구나 원하면 집어 가라고 놓아 둔 것이므로 몇 개를 집어가든 상관할 바 아니데, 문제는 그가 내 눈치를 본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이후 나는 그가 가게로 들어서면 그를 위한 틈을 만들어 주곤 한다.

모를 일이다. 그가 사탕을 좋아하는지, 병든 아내를 위해 챙기는 것인지, 손주 녀석들 생각으로 그리 하는지, 내가 또 알면 뭐하랴. 사탕 몇 개로 그가 잠시 삶에 단 맛을 얻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일 터.

누군가 접시채로 막대사탕을 다 집어간들 또 다시 채울 수 있는 부요함은 아직 누리고 사니 그저 고마운 오늘이다.

나이든다는 것은 소소한 고마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뜻일게다.

아내와 함께 가을 길을 걷다. 먼 길 나서지 않아도 우리 내외가 넉넉히 즐길 수 있는 가을 풍경이 놓인 오늘의 삶에 또 고마움이 인다.

곰곰 생각해 보니 늘 허름한 내가 막대사탕 하나를 온전히 다 먹은 기억이……

……없다.

DSC01138 DSC01139 DSC01154 DSC01179 DSC01180 DSC01191 DSC01196 DSC01205 DSC01210 DSC01212 DSC01222 DSC01226 DSC01231 KakaoTalk_20201018_125327983

자연에

세상 소식엔 제 잘난 사람들 이야기들이 넘쳐 나지만 하늘은 이미 가을이다.  사람살이 아직은 유한(有限)이 무한(無限)을 품을 수는 없다. 어쩜 신(神)은 그렇게 영원할지도 모른다. 그 사이에서 숱한 사기질과 도적질은 이어질 것이고. 그리고 또 때가 되면 산자들은 계절을 맞는다.

달포 전 허리케인 영향으로 심한 비바람에 나무가 쓰러져 차고 지붕을 덮쳐 놀랐던 앞집 사내는 나무들을 다 잘라 버려야겠다고 했었다. 그는 아직 젊다. 하여 행동도 빨랐다. 그의 말대로 거금을 들여 나무 열댓 그루들을 잘라 버렸다.

DSC009160918201613a

하늘이 너무 맑아 모처럼 어머니와 장인 장모 쉬시는 곳을 찾다. 반 마일 거리 떨어져 있는 두 곳 모두 맑은 하늘과 환한 빛을 한껏 누리는 장소라 참 좋다.

DSC00965DSC00968DSC00962

주문한 지 두어 달 넘어 어머니 묘소 앞 꽃병이 마련되었다. 여기와 저기 사이 그 틈새를 이용해 도적질 하기로는 장례업종도 만만치 않을게다. 알루미늄 캐스트 꽃병 하나에 팔백 불이나 요구하는 녀석에게 난 속으로만 외쳤었다. ‘이런 도적놈들!’ 맑은 가을하늘 아래서 만나는 어머니 앞에서 그 미움 그냥 가셨다.

돌아오는 길, 모처럼 동네 공원 길을 걸었다. 공원도 사람 손길이 닿아 만들어진 곳이긴 하지만 자연에 가까워 참 좋다.

DSC00977DSC00985DSC00991DSC00993DSC00994DSC00995DSC01004

저녁 나절 뜰을 돌보다 맛 본 세상, 꽃은 그림자도 아름답다.

DSC00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