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신궁과 가미가제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6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일본인들의 토속신앙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사람들의 정신을 송두리째 없애고, 조선을 착취(搾取)하기 위하여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라는 뜻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를 만들어, 그런 것을 조선사람들에게 강요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행위는 그런 것 뿐만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다음, 조선인들에게 일본어 교육을 점차 실시해 나갔고, 조선의 민족적인 모든 문화활동을 못하도록 막음으로써,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말살해버리려고 했다.

그러한 목적으로 일본은 <내선일체>라는 것을 내세워 조선사람도 일본  사람처럼 <신사참배(神社參拜)>라는 것을 하도록 강요한 적이 있었다.

이쯤에서 그러한 ‘신사’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엔 그들의 고유한 토속신앙(土俗信仰)인 신도(神道)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한 신앙(信仰)의 대상이 되는 신(神, 가미)의 위패(位牌)가 있는 곳을 <신사(神社)>라고 한다. 그러한 <신사>란 일본 황실의 조상, 또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신(神)으로 받드는 사당(祠堂)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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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 모습>

그 중엔 다른 신사보다 격(格)이 높은 신궁(神宮)이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때.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朝鮮神宮)’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조선신궁의 주제신(主祭神)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明治)천황이다. 일본 신화의 여신인 天照大神은 일본 황실(皇室)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明治天皇은 일본이 조선을 빼앗을 당시의 일본 왕이다.

한데, 조선총독부 시절 특히 일제 말기 때, 그들은 조선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강요에 굴복하였다.

하지만, 그런 것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목숨을 잃은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주기철 목사에 관한 기록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에 실려 있으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각설하고, 신사(神社)엔 도리이 (鳥居)라는 일본 특유의 <기둥문>이 있는데, 그것은 불경(不敬)한 곳과 신성(神聖)한 곳을 구분 짓는 경계라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일반적인 세상과 성스러운 곳인 신사가 있는 곳은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곳을 드나드는 경계에 도리이라는 문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도리이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고 몇가지 설(說)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이론은 <닭이 머무르는 자리>를 뜻하는 한자인 <鷄居>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神道>에서는 닭이 <神의 전령(傳令)>이라고 여기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건, 도리이의 기본적인 구조는 두 개의 기둥이 서 있고, 기둥 꼭대기를 횡목(橫木)으로 서로 연결해 놓는 형태이다.

도리이의 기본적인 구조와 거의 비슷한 모양으로 된 구조물(構造物)이 한국에도 있다.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는‘홍살문’이 바로 그런 것인데, 홍살문은 능(陵), 묘(廟), 궁전(宮殿) 등에 세우던 일종(一種)의 문이다.

홍살문의 구조는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홍살문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에도 있는데, 홍릉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高宗, 재위 1863 – 1907)과 비(妃)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 – 1895)를 합장한 무덤이다.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연대순(年代順)으로 또는 시간 수서대로 하나씩  수직(垂直)으로 늘어놓는 것이 보통이다.

한데, 태평양전쟁 이야기를 적다 말고, 느닷없이 일본 온천 이야기와 그들의 토속신앙에 관한 것을 적으면서 도리이 (鳥居)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도리이 와 비슷한 모양으로 된 구조물이 한국에도 있다.” 라는 설명을 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가 묻혀 있는 무덤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명성황후가 목숨을 잃게 된 이야기를 하자면,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후 생긴 신정부(新政府)의 군인이 된 미우라 고로는 주한일본공사(駐韓日本公使)로 조선에 부임하여, 조선의 친로 (親露)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세우고자,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그는 일본 자객(刺客)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시해(弑害) 하고, 그 시신을 불태운 국제적 범죄를 저지른 자다.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등 조선에 있는 러시아 세력을 없애고, 일본의 세력을 그 땅에 넓히기 위하여 미우라 고로 등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담긴 텔레비전 연속극도 있고, 명성황후에 관한 이야기 는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므로 줄이고, 태평양전쟁 이야기를 계속한다.

가노야 비행장

나는“오사카(大阪)에서 지낼 때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유치장 생활을 하다가 후쿠오카 탄광으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그 탕광에서 또 탈출하여 다루미즈(垂水)라는 곳에서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라는 이야기까지 적었다.

나는 전쟁이 끝난 다음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더 지내게 되었다.

시모노세키 (下關)나 하카타 (博多)항 부두엔 한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배를 타기가 쉽지 않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귀국을 서둘지 않고, 다루미즈 근처에 있는 가노야 (鹿屋)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엔 가노야 비행장이 있다.   마침 그 비행장에 들어와 있는 미군부대에서 현지인을 고용인으로 채용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가노야 시청 앞에서 그런 광고문이 있는 것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귀국할 때까지 임시로 그 비행장에 취직했다. 내가 맡은 일은 자동차 타이어를 수리하는 미군들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조수(助手)다.

그 비행장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神風)의 기지(基地)였다. 특히, 그 전쟁이 끝나게 될 무렵엔 전체 가미가제 수의 약 반(半)이 그 비행장에서 출격(出擊)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나는 70년 전에 있었던 것들을 더듬어 생각해보면서 이 글을 엮고 있는데, 내 기억을 더 생생(生生)하게 하려고 인터넷 검색도 해본다. 하지만‘오늘날의 일본은 내가 그곳에서 지내던 때의 일본이 아니다.’ 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세상이다.’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지명(地名)도 그런 것 중 하나다.

내가 한국을 떠나던 해인 1984년엔 없었던 지명이 지금은 한국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일본도 그렇다.’라는 것이다.

몇 해 전에 일본 큐슈(九州)지방에 미나미큐슈시(南九州市)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지람특공평화회관(知覽特攻平和會館)이 라는 것이 그곳에 있다. 지람(知覽, 일본발음 지란)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 육군 특공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그 회관은 태평양전쟁 당시 폭탄을 실은 비행기 전체가 육탄(肉彈)이 되어 적함(미국 군함)에 몸으로 타격(打擊)한 특별공격대원의 유영(遺影), 유품(遺品), 기록 등 자료를 수집, 보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태평양전쟁 때 가미가제 특공대의 기지였던 가노야와 지란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그 전쟁이 절정에 달하자 일본은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 특공대까지 내세워 그 전쟁을 버텨보려고 했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知覽特攻平和會館 앞뜰엔, 다음과 같은   비문(碑文)이 있다.

‘아리랑 노래 소리로 / 멀리 어머니의 나라를 그리워하며 …..’ (원문은 일본어다.)

가미가제 특공대 …… 그들 중엔 조선 젊은이들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비문이다.

***지람특공평화회관(知覽特攻平和會館)에는 조선인 대원도 11명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1945년 3월 29일 당시 17세였던 박동훈은 유서에 큼직하게 ‘결사(決死)’라는 단어와 함께 “몸을 던져 적함과 함께 옥쇄해 영원히 황국을 지키겠다”고 썼다. 하지만 그는 ‘육군이 가족을 책임져 준다고 해 어쩔 수 없었다. 동생은 절대 군대에 보내지 말라’며 아버지를 안고 울었다고 가족은 증언했다. 그는 오카와 마사아키(大河正明)라는 일본 이름으로 올라 있다.

24세 탁경현은 출정 전날 밤 식당 아주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조국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그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아리랑’을 불렀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는 교토 약학대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차출돼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