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우말랭이

무우말랭이를 만들어 보았답니다. 머리털나고 처음 해 본 일이랍니다. 정말 간단하고 쉬운 일인데 신기하기도 하고 제가 한 일이 대견하기도 하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튼실한 무우 세 개를 손가락 크기로 썰어서 채반과 oven grill pan에 널어, 부엌 바닥에 있는 air duct vent 위에 올려 놓았을 뿐이랍니다. 그런데 하루 반나절만에 아주 잘 마른 무우말랭이가 되었답니다.

무우말랭이농사짓는 벗이 보내준 무우는 아주 잘 생겼답니다. 여기저기 나누어 주고도 제법 많이 남은 것들을 어떻게 보관할까를 고민하던 차에 짜낸 생각이 무우말랭이였는데 썩 잘한 생각 같답니다. 나머지 무우들도 모두 말랭이를 만들려고 한답니다.

제가 무우를 썰고 말리기까지 하게된 까닭은 아주 엉뚱하답니다.

연말연시를 보내면서 문득 든 생각 하나는 시간을 나눈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것이었답니다. 2014년 12월 31일과 2015년 1월 1일의 차이라는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이었지요.

그저 제가 살아가며 흘려 보내는 시간들의 연속일 뿐인데 거기 숫자를 부여하고 나누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뭐 그런 생각에 빠져 새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답니다.

또 다른 한가지는 그래도 명색이 예수쟁이인데 구태여 사람들이 나누고 의미를 부여하는 이 시간에 대해 예수가 던지는 질문 하나 정도는 찾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답니다.

그 생각들 끝에 “가라”라는 뜻을 찾아냈었답니다.

예수 당시 사회공동체로부터 왕따를 당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왕따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민재판으로 돌맹이에 맞아 죽을 환경에 놓였던 사람도 있었답니다. 예수는 그런 이들을 용서해 주고 고쳐주면서 그들이 살던 공동체로 돌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다시 돌아간 사회공동체를 예수는 바꾸어 주지도 않았고, 왕따였다가 돌아간 이들의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예수는 책임지지 않았답니다.

2015년 이라는 새로운 숫자가 제게 준 의미였답니다. 새로운 시간에 대한 주인은 “바로 너”라는 선언을 예수식으로 하면 ‘가라!’라는 명령일 것이다라는 생각을 해 본 것이랍니다.

그런 생각에 젖어 새해맞이를 하던 제게 아주 엉뚱한 일이 느닷없이 다가왔답니다.

늘 밝고 젊은 생각으로 사는 제 아내가 그 생각이 지나쳐 자신의 나이를 잊은채 운동을 한답시고 뛰다가 그만 뒤로 정말 오지게 넘어지고 말았답니다. 한동안 꼼작을 못하는데 정말 제가 오지게 놀랬었답니다.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려다 잘 아는 정형외과 의사에게 조언을 구했답니다. 사태와 증상을 두루 듣던 의사 양반이 뼈에 이상은 없는 듯 하니 응급실에 가서 생고생하지 말고 처방하는 약을 먹고 하루 두어 본 뒤 가정의에게 응급상담을 해서 그 때 문제가 있으면 병원행을 하는 게 덜 고생할 것이라는 조언을 해 주었답니다.

다행히 아내는 처방해 준 약과 이틀 동안 안떨어지고 벗이 되어 준 침대 덕분에 이젠 걸을만한 지경에 이르렀답니다.

누워있는 아내는 제 일상을 조금 흩트려 뜨렸답니다. 그렇게 흩트려진 일상을 서성이다가 제 눈에 뜨인 것이 창고방에 놓인 무우들이었고 그 무우들이 하루만에 말랭이가 된 것이랍니다.

아마 이번 주말엔 무우말랭이 무침이나 무우말랭이 속이 든 만두가 우리 부부 식탁에 오를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2015년 문을 열었답니다.

가라(GO) –기적 8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35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 (마가  1 : 44)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마가 2 : 11) 

주께서 자비를 베풀어 너에게 얼마나 큰 일을 해 주셨는지 집에 가서 가족에게 알려라.(마가 5 : 19)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마가 5 : 34) 

예수께서는 “저 마을로는 돌아 가지 말아라” 하시며 그를 집으로 보내셨다. (마가 8 : 26)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마가 10 : 52)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셨다. (누가  7 : 15)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누가 17 : 19)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가거라.(요한 5 : 9)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 왔다.(요한 9 : 7)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7 : 44) 

영어와 한국어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언어 학습에 있어 이런 차이점들을 인정하고 그 차이들을 그대로 받아드리는(외우는) 방법이 학습효과를 높이기도 합니다. 

우리말 “오다”와 “가다”인 영어의 “come”과 “go”의 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come

제 직업은 세탁업이지요.  세탁소에 손님이 들어옵니다. 그 순간 카운터는 가게 뒤에서 일을 보고 있습니다. 그 때 카운터는 손님을 향해 “I’m coming.”하면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카운터로 움직입니다. 

이 때 “I’m coming.”을 “내가 옵니다.”라고 하지 않지요. “제가 갑니다.”가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나고 자란 제 두 아이들은 비교적 한국말을 잘 하는 축에 속합니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두나라 말을 구사하는데 불편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 모두 종종 헷갈리게 말하는 것 가운데 하나 역시 바로  이 “오다”와 “가다”입니다. 

집에 오기로 한 시간에 도착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묻습니다. “어디냐?, 언제오냐?” 그러면 아이들의 대답이지요. “지금 올께” 또는 “지금 오고 있어.” 바로 “I’m coming”을 한국식으로 표현한 말이랍니다. 

뭐 이 정도야 서로 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수를 믿는 신앙에 있어서 이 come과 go, 곧 오다와 가다를 헷갈리면 정말 잘못된 신앙에 빠질 수가 있답니다. 

예수는 치유기적을 행한 이후  치료받은 이들을 향해 “가라”로 명하셨습니다. 어디로 가라고 했습니까? 바로 가족에게로 돌아가라. 네가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네 병을 고쳐 주었으니 나를 따르라”라고 하거나, “내가 네 병을 고쳐 주었으니 세상 끝까지 돌아 다니면서 이를 알려라.”라고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병을 고치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를 찾아갔던 사람들이나, 예수가 찾아갔던 사람들의 본래 소망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남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에서 떳떳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시대 당시의 나병환자를 비롯하여 병자나 신체불구자들은 사회로 부터 차단되어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는 “가라”, “네가 그렇게 원했던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깊게 살펴볼 지점이 하나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실로암못에서 눈 먼 사람을  고쳐주는 예수의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눈이 뜨여 세상을 다시 보게된 전에 소경이었던 사람을 향해 예수는 “가라”고 명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간 이 눈이 다시 뜨인 사람에 대한 후기가 이어집니다.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요한 9 : 34) – 눈을 뜬 전에 소경었던 사람을 맞이한 고향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를 다시 내 쫓아 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병을 고쳐주고 “가라”고 명했습니다만, 그가 “가는” 곳의 환경을 바꾸는 기적을 행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길게 보면 “환경이 바뀐 기적들”을 확인할 수가 있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만든 이들은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이 예수의 기적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이해한답니다. 

이에 관련된 글 하나 함께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몇 해전에 쓴 것인데  제 이해를 함께 하시는데 도움이 좀 될 것입니다.

가라(GO)! – go and sin no more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