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국 4 – 사교(邪敎)

세월호 참사에 연관된 뉴스들을 듣거나 보고 있노라면 분노가 치미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분노의 크기가 절정에 다다른 소리(이건 뉴스도 아니고 그저 소리, 개소리랄까, 아니 개에게 비유하는 것이 모든 개들에게 미안할 정도인 소리)는 바로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라는 소리입니다. 

물론 이 소리는 누가 하느냐에 따라 ‘말씀’이 될 수도 있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제가 들은 소리들은 그 소리를 뱉어 개만도 못한 사람들의 소리들입니다. 

적어도 정치인, 관리, 종교인들이 그 직위 고하, 여야를 막론하고 이런 소리를 지꺼리는 일은 정말 개만도 못한 일입니다. 

이건 바로 “빨리 잊으라”는 개소리이고, “적어도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은 영원히 책임질 일이 없다”는 발뺌으로 내뱉는 여우새끼같은 소리입니다. 

적어도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우리 모두”가 명확하게 누군인지 그 모두의 각자와 집단이 질 책임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그 댓가를 치룰 준비가 있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럴 땐 이 말이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제 “대한민국”에 시민이나 국민이 없고,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에 인민이 없는 2014년 현재의 모습을 바로 보기 위해서 우리 한민족이 걸어 온 최근세사 약 250여년의 역사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그래 정조임금과 박지원의 ‘양반전’ 이야기로 서두를 꺼낸 바 있습니다.  

지난 250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바로 “우리 모두의 책임이니 이젠 잊자.”라는 말에 속고 또 속아 온 역사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곱씹어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덧붙어 꼼꼼히 더듬어 볼 일이 있습니다. 바로 종교, 아니 종교라기 보다는 사교(邪敎)입니다. 

사교이번 세월호 사건에 등장하는 ‘구원파’라는 이단종교(? 저는 이 종파가 정말 이단인지 삼단인지 알지도 못하거니와 그것이 이번 참사의 민족사적 의미와 피지도 못하고 떨어진 넋들을 위로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에 그 종파에 대해 알고싶은 까닭이 없답니다.)가 문제가 아니라, 진실로 진실로 고민하고깊게 돌아보아야 할 일은 바로 ‘사교집단화(邪敎集團化)’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라는 것입니다. 

사교나 이단 종교의 특성 가운데 가장 큰 요인은 “구원 또는 새 생명이나 부활 등”의 달콤한 유혹으로 그 유혹에 매달린 이들의 등을 쳐먹는 브로커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브로커들이 만들어 놓은 신(神)이거나 때론 브로커 스스로 신이라고 참칭하거나 하여 절박한 이들의 등을 쳐 먹는 것입니다. 

그 절박함이란 많은 경우에 질병, 가난, 고통에서의 해방일 수도 있고, 때론 부귀 영화 장수 등의 허영된 비나리일수도 있습니다. 

그 절박한 사람들의 바램을 들어준다는 조건으로 등을 쳐먹는 일이 바로 사교집단들의 특성인 것입니다. 

‘백두혈통’이라는 북의 종교 브러커나 “민생과 종북” 깃발로 멀쩡한 시민들과 국민들 찜져 먹는 남의 종교 브러커들이 판치는 세상은 분명 이미 사교집단화(邪敎集團化)된 모습입니다. 

역사를 바로 보는 일도 사교(邪敎)의 세상에서 빠져 나오는 일도 “우리 모두”도 아니고 “그 누구도”아니라 “바로 나 자신” 또는 “바로 당신 자신”부터 나서서 해야 할 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어떤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에서 해야하는 일이 아니라 늘 밥먹고 물 마시듯 일상적인 삶에서 시작해야 하는 일입니다. 

역사 – 잊으면 집니다. 세월호 – 잊으면 내 일이 됩니다. 

종교 – ‘브로커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저는 예수쟁이이고, 예수가 그 일을 하다 죽고 부활했다고 믿습니다.) 대한민국 또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브로커들을 거부하는 인민, 시민, 국민의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따로이던 합해 하나가 되던 그런 세상이 꿈이어야 합니다. 

이제 역사로 돌아갑니다. 양반이야기 말입니다.

가자! 광장(廣場)으로

광장을 찾아 헤매다 끝내 바다에 투신하여 죽는 이명준.

단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경찰서를 드나들던 명준은 “밀실만 충만하고 광장은 죽어 버린” 남쪽에 구토를 느끼며 월북을 감행한다. 그러나 오직 “복창만 강요하는 구호”만 있을 뿐 북에도 광장은 없었다.

명준은 ‘광장’이 없는 조국 한반도를 등지고 중립국 인도로 향해 가던 배위에서 바다로 뛰어 내린다.

1961년에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그렇게 죽는다.

우리에게 축제의 광장은 없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던 1960년 4월(당시에는 4월에 학기를 시작했었다), 나는 왼쪽 가슴에 커다란 손수건을 달고(이즈음 아이들은 모를 수 있겠지만,당시엔 아이들이 코를 줄줄 흘리고 다녔으므로 손수건을 가슴에 달게 하였다) “서둘러 가라”는 어머니의 채근을 뒤로 한 채 오후반 등교길에 나섰다. (당시 전후-戰後:한국전쟁- 첫 세대인 우리에게 교실은 턱없이 부족하였기에 통상 오전반, 오후반 이부제 때로는 삼부제 수업을 하곤 하였다.)

그날은 두어 주간 동안 운동장에서 있었던 유희와 이즈음으로 말하면 집단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교실을 배정받는 첫 날이었으므로 어머니의 채근은 대단하였다. 서둘러 나선 등교길, 신촌 노타리를 가로 지르는 길목에서 나는 발이 묶이고 말았다. 집 앞에서부터 들었던 함성이 이제 바로 내 앞에서 거대한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깨걸이를 한 대학생들은 “문(門)안으로, 문안으로(당시 우리는 광화문이나 시청을 문안이라고 불렀었다. 사대문안이라는 뜻으로.)” 노도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시청과 광화문 ‘광장’을 향해 내닫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이 경무대(청와대)로 향했던 1960년 4월 19일이었다.

그 저녁, “총소리… 피…. 죽음…” 등등의 어른들 말사이로 이웃집 형이 끝내 돌어오지 않았다는 흉흉한 소리를 들으며 우리 코흘리개들은 여느 날처럼 “다방구와 술래잡기”놀이로 그 밤을 보냈다.

대학생이 된 1970년대. 우리도 시청앞으로 광화문으로 내달리곤 했다. 그 광장을 향해 달리다 더러는 징역을 살았고, 더러는 군대에 끌려 갔으며, 더러는 목로주점에서 얻은 취기로 골방에서 악을 쓰고는 하였다.

그리고 1980년 봄, 우리는 서울역 광장에 악을 쓰고 모였고, 효창운동장에 군부대가 집결했다는 소문이 돌던 밤, 우리들은 ‘밀실’에 갇혀 모진 매를 감내하여야만 하였다.

그 해 오월, 마침내 ‘광장’은 피로 얼룩졌다. 붉은 피, 총소리, 군화소리, 죽음 – 광주 전남도청앞 광장은 우리시대 ‘광장’의 극명한 모습이었다.

오누이 월남하여 홀로되신 장모와 함께 평안도 정주출신을 찾아 여의도 만남의 광장을 헤맨던 일을 몇 해 뒷 일이었다.

ggg최루탄에 맞아 한 젊은이가 죽고, 광장은 만장과 항쟁의 깃발을 든 시민들로 들끓었다. 1987년 6월 10일이었다. 나는 그 광장을 뒤로 하고 돌아온 밤, 이민 보따리를 꾸렸다.

그랬다. 우리에게 광장은 분노와 항거와 저항의 분수대였다. 그곳은 끝내 눈물이었고 패배의 아픔 뿐이었다. 그곳에서의 평화와 안정은 오직 관제(官製)이었다.

워싱톤 광장과 서너 블럭 뒤에 빈민 우범지대의 공존이 더는 낯설지 않은 이민(移民)의 세월을 보내며, 더러는 아슬아슬하지만 내가 살던 때보다는 나은 축제의 광장을 누리는 내 모국(母國)이 자랑스러웠던 때도 있었다.

오롯이 삼 사십년, 아니 최인훈의 광장 오십년을 넘어 백 이십여년 전 고부장터의 원성이 고스라니 다시 살아 울리는 소리 들리는데,  2014년 내 모국의 광장에는 다시 관제(官製)의 깃발만이 나부끼고 있으니 어찌하리!

가자! 다시 광장으로!

환갑(還) 젊은 나이로 자유의 광장으로 나서나니, 젊은이들이여 광화문으로 시청으로 도청앞으로 광장으로 나설진저.

더는 바다에 떠도는 그 숱한 이명준의 넋을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아니 이명준처럼 자기 길을 찾아가지도 못하고 다만 “가만 있으라”는 명령에 순종한 그 숱한 넋들을 위하여…

가자, 광장으로!

 

조선민국(朝鮮民國) 3 – 양반(兩班)

개인의 삶이나 집단 또는 민족이나 국가의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면 “아이고, 그 때 왜 그랬을까?’라거나 “만일 그 때 이렇게 했더라면…”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시점이나 순간들을 돌아보는 관점과 생각들은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집단, 민족, 국가 구성원들 그리고 그 전체의 의사결정 방법이나 문화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많은 경우에 그런 지나간 순간들을 어떻게 뒤돌아보느냐에 따라 또한 지나간 그 사건이나 상황들을 오늘 여기에서 어떻게 곱씹고 해석하며 오늘의 선택을 결정하는데 참고하느냐에 따라 개인이나 집단, 민족, 국가의 미래가 결정지어지곤 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민족이 북으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남으로는 대한민국으로 나누어져 있고 약 700만명에 다다르는 숫자가 중화인민공화국, 미합중국, 일본국 등을 비롯한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북은 나라이름에 걸맞지 않게 민주주의도 아니거니와 인민이 주인인 나라는 더더우기 아닙니다. 남 역시 나라이름에 걸맞지 않게 크지도 않거니와 민(民) 곧 시민이나 국민이 주인은 아닌 듯합니다. 유엔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나라들(단, 일본은 표면상 북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실제적으로는 국가로 인정하는 듯한 관계이지만)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서로 다른 두 개의 국가로 인정하지만 남과 북만은 서로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두 나라는 서로 정식국호의 영문표기로 Republic of Korea(남),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DPRK)(북) 라고 남들이 불러 주기를 원하지만 세계인들은 그저 South Korea(남한), North Korea(북한)으로 부를 뿐입니다. 

남한인구가 약 오천만, 북한인구가 약 이천 오백만이라고 하고 재외동포수가 칠백만을 넘으니 약 1/10의 인구가 세계 다른 나라에 나가사는 셈입니다. 

중국에는 조선족, 일본에는 재일동포, 러시아에는 고려인, 미국에서는 한국계 미국인 등으로 살고 있거니와 최근들어 호주 캐나다를 비롯한 남미나 유럽 등지 아프리카 오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약 팔천만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지난 사월 대한민국(남한)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 소식을 뉴스 보도를 통해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남북을 비롯한 보도 통제나 왜곡보도가 심한 지역에 살고 있거나 정보 통신이 두절된 지역에 살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정상적인 사건 보도와 처리 과정을 접한 한국인들이라면 2014년 4월 현재의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에 던져진 곧 “이게 나라냐?”라는 물음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 이 물음, “이게 나라냐?”라는 물음은 어느 민족 어느 국가나 늘 고민하고 씨름해 온 물음입니다. 그 물음으로 각 나라와 민족들의 역사가 발전해 왔거니와 인류사가 바르고 건강한 쪽으로 발전해 온 것이고, 그렇게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2014년 5월 현재, “한반도 남쪽에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과연 진짜 나라일까?”라는 물음은 아주 건강하고 바람직한 질문인 동시에 같은 물음은 똑같이 북쪽 곧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유효한 것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기위해 저는 약 250년 전의 일부터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250년전 결코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저 양팔 주욱 뻐으면 손 끝에 닿을 저쪽 이야기일 뿐입니다. 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시절일 뿐입니다. 

“아이고 그 때 왜 그랬을까?”라는 물음을 시작해보는 첫 시점입니다. 약 250여년 전만 해도 다 거기서 거기였습니다. 중국(청나라), 일본(에도 막부), 미국(나라가 막 시작할 때), 유럽으로 따지면 문맹자가 80-90% 였던 때이고, 러시아는 나폴레옹에게 시달리던 때였으니 세계의 이른바 문명국들이 다 고만고만 했을 무렵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때 조선왕국에 이산(李祘)이라는 이가 임금으로 있었답니다. 바로 정조(正祖)입니다. 

조선임금 27명 가운데 임금같은 임금 둘로 세종과 정조를 꼽지만 정조는 “아쉬움”이 많은 인물이랍니다. 바로 그 시절이 오늘날 세월호 참사의 한과 아쉬움의 시작이라 하여도 물의 근원을 그리 멀리 잡는 것도 아니랍니다. 

그 시절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구가 둥굴게 생겼고, 지구가 돈다는 주장을 한 첫번 째 한국인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조선인들은 땅은 평평한 것으로 믿고 있었으니 시대의 돌아이였던 셈입니다. 

그가 쓴 소설들 가운데 양반전(兩班傳)이 있습니다. 그 양반전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로 다음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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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백성을 낳으실 때에, 그 갈래를 넷으로 나누셨다. 이 네 갈래 백성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이가 선비이고, 이 선비를 양반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서 양반보다 더 큰 이문은 없다. 그들은 농사 짓지도 않고, 장사하지도 않는다. 옛글이나 역사를 대략만 알면 과거를 치르는데, 크게 되면 문과(文科)요, 작게 이르더라도 진사(進士)다. 

문과의 홍패(紅牌)는 두 자도 채 못 되지만, 온갖 물건이 이것으로 갖추어지니 돈 자루나 다름없다. 진사는 나이 서른에 첫 벼슬을 하더라도 오히려 이름난 음관(蔭官)이 될 수 있다. 

훌륭한 남인(南人)에게 잘 보인다면, 수령 노릇을 하느라고 귓바퀴는 일산(日傘) 바람에 해쓱해지고, 배는 동헌(東軒) 사령(使令)들의 ‘예이’하는 소리에 살찌게 되는 법니다. 방안에서 귀고리로 기생이나 놀리고, 뜰 앞에 곡식을 쌓아 학을 기른다. 

(비록 그렇지 못해서) 궁한 선비로 시골에 살더라도,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 이웃집 소를 몰아다가 내 밭을 먼저 갈고, 동네 농민을 잡아내어 내 밭을 김 매게 하더라도, 어느 놈이 감히 나를 괄시하랴. 네 놈의 코에 잿물을 따르고 상투를 범벅이며 수염을 뽑더라도 원망조차 못하리라.”

조선민국 2 – 세월에

ribon이즈음엔 점포 이름이나 상품 이름에서부터 자동차, 비행기, 선박 등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웬만하면 외래어나 외국어로 짓는 것이 일반화된 세상입니다. 심지어 아이들 이름까지 외국식 이름으로 지어 부른다는 뉴스도 본 적이 있답니다.

그런데 하필 ‘세월’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그 배에 말입니다. 그조차 한국말이 아닌 외국말의 차음 표기는 아니겠지요. 

왜 하필 세월호일까요? 

“세월따라 이 또한 잊혀질 것이다.”라는 뜻으로  그리 지었을까요? 아니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결코 잊지 않으리.”라는 예견으로 그리 지었을까요? 

무릇 모든 사건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건 개인이나 집단이나 단체나 국가를 막론하고 어느 때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어난 사건들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크건 작건, 목숨을 살리는 일이건 앗아가는 일이건 따져보면 엇비슷한 일들이 사람사는 세상에서는 늘상 일어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일어난 사건들과 일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뒤돌아 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곱씹어 보는냐에 따라 개인사나 집단, 민족, 국가의 특성을 이루게 되고 흥망의 역사 원천이 되곤 하는 것입니다. 

“실종자란 곧 사망자”라는 공식을 만들어내며 단 한 명의 목숨도 살리지 못한 채 세월호 사고의 달 사월이 이제 지난 세월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세월이 가면 또 잊혀질 일”이라며 오월을 맞을  것이고, 누군가는 “세월이 갈수록 깊이 새길 것”이라고 다짐을 하며 다가오는 세월을 맞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예견하고 짐작할 수 있었듯이 “차마 사람으로서 하지 못할 말들과 생각들”을 “국가”. 또는 “애국”의 이름으로 마구 내뱉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며칠 전(4월 23일) 영국 The Financial Times는 “페리 (세월호) 참사는 나쁜 문화가 아니라 나쁜 정책이 불러온 일 Bad policy caused the ferry disaster, not bad culture”이라는 컬럼에서 “Korea Inc”라는 표현을 썻답니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말이지요. 

주식회사 대한민국과 국가와 애국이라는 말이 한데 어우러져 잘 굴러 가는 것만 같은 모습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세월은 모든 것을 잊게하는 약이 될 터이지만, “내 애비는 노예였다”라는 고백을 수천년 세월 동안 잊지 않고 곱씹는 유태인들 처럼 “2014년 4월 그 때,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애국을 말하는 자들이…… 우리 아이들의 ….. 목숨을……” 곱씹는 이들에게 세월은 모든 것이 새로와지는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그 뜻으로 이제 역사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역사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조선의 역사를 말입니다.

조선민국 1 – 세월호에

생각도 많거니와 하고픈 말들은 쌓여있건만 단 한마디의 말이나 한 줄의 글조차 부끄러워 그저 맥을 놓고 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비단 저 뿐만이 아닐겝니다. 

기적은  통상 바라는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만 그 바램을 들을 귀도, 볼 눈도, 느낄 감성조차 없는 오직 돈에 환장한 악귀들에겐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단 한명의 목숨도 살려내지 못한 채 이제 주검을 제대로 가족들에게 돌려 줄 수 있기만을 바라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세월호. 

2014년 4월이 그렇게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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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국민을 위한 나라(국가)냐?”라는 물음은 “그걸 이제 알았냐?”라는  뻔뻔스럽게 당당한 답으로 돌아옵니다. 

이쯤되면 무능, 무책임에다 태생자체가 비합법적인 부정한 정권에 대한 타도(打倒)운동이 일 법도 하건만 야당의 대표라는 위인들의 언행을 듣자하니 책임질 정권과 한 통속일 뿐입니다. 

그저 분노가 입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품은 분노는 풀어야합니다.  쌓이면 병이 들기 때문입니다. 

총론과 각론으로 따져 하나 하나 이야기하며 분노를 푸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길에서 막아 선 단 하나의 질문에 그저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너는 떠난 사람 아니냐?”라는 물음이었습니다. 그 물음 앞에서 “다시 보따리 싸고 들어가 싸우련다.”  대답하지는 영영 못할 형편이랍니다. 

그렇게 풀지 못하는 병에 눌려 답답한 사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 돌이켜보니 참으로 긴 싸움으로 이어 온 역사였습니다. 옛날 옛날 고려적 이야기는 접어 놓더라도, 이조(李朝) 오백년 이래 일제 식민지를 이어 북에 김씨 조선, 남에 박씨 조선이라는 아직도 군주국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시대에 이르기 까지 끊이지 않게 싸워 온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정말 엄청난 진보의 과정이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십대 아이들이라는 삼백 명이 넘는 목숨들을 생으로 수장시킨(솔직히 저는 단 한 생명이라도 숨 줄 붙들고 있으리라는 바램은 버렸으므로) 거대한 세력(그것이 박근혜라는 정권의 수장  아니면 그에 빌붙은 그 세력이던, 관(官)이라고 부르는 수백년 이래 철밥통 세력이던, 돈과 권력에 환장한 군(軍) 또는 민(民)의 세력이던) 들의 불의로 인해 진보의 과정에 가속이 붙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제 오월을 맞아야겠습니다. 

일상적인 일로 돌아가면서 이제 제가 서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 작은 일들을 해 보려고 합니다. 그  하나로 남, 북 조선 곧 북의 김씨 조선과 남의 박씨 조선이라는 전제군주국의 모습들을 찾아 보는 일도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이제 오월입니다.

모를 일- 세월호 그리고 슬픔

칼 맑스 또는 카르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라고 불리는 옛날 사람이 생각나는 밤입니다.

IE001702167_PHT오늘 낮에 제 가게 손님 한 분께서 하신 말씀때문이랍니다. 

폴란드계 미국인 여성으로 종신교수(Tenured Professor)로 아직 대학에 남아있지만 썩 나이 드신 할머님이시랍니다. 이 양반이 오늘 제게 물었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거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오? 지금 몇 시간이나 지났소? 더 많은 이들이 살아 나왔다는 소식은 들었소?” 

한국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였답니다. 

자동차 사고는 어디에서건 매일 일어나는 일이고, 하늘에서 비행기가 떨어지고, 물에 배가 가라앉고… 있어서는 안되고, 있지 말아야 되는 일들이지만 사람사는 세상인고로 일어날 수는 있는 일들이겠지요. 

이런 일들을 미리 방지하노라고 여러 안전 대책들과 사전 점검들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사고나 사건에 대해서는 준비된 대비책에 따라 신속 정확하게  대응해야 마땅한 것이겠지요. 

사고나 재난이 개인의 영역을 떠나 국가적 차원의 것이라면 당연히 국가는 준비된 매뉴얼에 따라 모든 국가적 역량을 동원하여 자국민의 안전과 구출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정상적인 국가일 터이지요. 

그런데 지난 이틀동안 세월호에 연관된 기사들을 보면서 저는 칼 맑스를 떠올리게 되었답니다. 정말 한물 갔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예견한 국가를 본 듯했기 때문이랍니다. 

“국가는 부르주아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행위원회이고 지배계급의 지배도구에 불과하다.” 

칼 맑스의 이야기인데, 왜 나는 자꾸 그의 말이 어제 오늘 대한민국과 겹쳐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이 순간에도 가슴 쥐어뜯을 가족들을 위로하며.

바보들 세상 – 말씀 8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2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 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읍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 누가복음 15 : 4 – 7 

 “너희의 생각은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 마태복음 18 : 12 -14 

아주 잘 알려진 예수의 비유 말씀 가운데 하나인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 기록된 이 비유의 마지막 서로 다른 구절들 곧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마태)”와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누가)”는 기록자들인 마태와 누가의 첨언이었을 가능이 높다는 것이 성서 연구자들 사이에 정설입니다. 

나머지 남은 예수의 비유 원형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마태)”,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누가)”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나서는 주인 또는 목자의 행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생각을 해 봅시다. 

양 백마리라는 한무리의 집단이 있습니다. 그 집단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에게는 백마리들 하나 하나가 모두 소중한 가치를 지닌 재산입니다. 주인이나 목자의 입장에서 보면 말입니다. 백마리로 구성된 양의 무리는 들판 또는 산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전한 우리(울타리나 가옥)에 있었던 상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lost sheep만일 양들이 안전한 어떤 우리안에 있었던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린 조건이었다면,  당연히 예수의 비유는 합당한 이야기가 됩니다. 상식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충분히 되찾은 후에 일어난 잔치자리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잃어버렸던 양 한마리의 가치 중 십분의 일 정도 한도내(?) 또는 양 한마리 값 통째를 다 써서 맘껏 먹고 마셔도 손해 볼 일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잃어버린 양의 가치만큼 즐긴 것으로 치부하면 될 일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비유는 이런 전제조건이 깔린 상황이 아니였습니다. 

들판이나 산에서 방목 상태에 있는 양떼에게는 그들을 지켜 줄 목자나 하다못해 양들을 지켜 줄 개들이 필요했습니다. 만일목자나 지킴이 동물조차 없이 양떼들을 방목상태로 방치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재산권을 포기하거나 양들의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양떼들을 공격하여 먹이로 삼으려는 들짐승이나 남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훔치는 일을 일삼던 당시 횡행했던 도적들에게는 내 놓은 밥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 비유에서 양떼들을 지킬 목자나 어떤 장치도 없이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들이나 산에 그대로 방치한 채로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 나선 주인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해서 우리 스스로에게 한번 묻기로 하지요. 

만일 똑같은 상황이라면 저나 당신은 어떤 행동을 보일까요?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일테면 “믿음으로”라는 수식없이 솔직하게 우리들이 보일 수 있는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런 비유가 더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뉴욕 맨하턴 타임 스퀘어 광장이나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좌판 행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도록 하지요. 개당 백불 또는 십만원씩 하는 물건 백개를 놓고 팔려고 하는데 그 중 하나를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확 가로채 도망가고 있는 상황을 그려 보실까요. 

그 좌판에 있는 아흔 아홉개 곧 구천 구백불  또는 구백 구십만원을 버려둔 채, 잡을 수 있는지도 모를 그 백불 또는 십만원을 낚아채 도망간 이를 찾아 나설까요? 

한번 이런 상황을 머리 속에 그려 보면서 한번 솔직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생각해 보시자는 말입니다. 

아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나 읽고 있는 당신이나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오늘 재수 더럽다”며 좌판에 있는 구천 구백불의 물건을 지키는 쪽으로 선택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지 않으신가요? 

이건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지요, 그리고 합리적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글쎄 만일 이러한 제 물음에 당신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거나 예수 반열에 올랐거나…. 

예수가 말한 이 잃어버린 양 한마리의 비유는 바로 그런 우리들의 선택 지점에 대한 물음입니다.

상식에 대한 역설(逆說,paradox)을 넘어 상식에 대한 반역(反逆)이었습니다. 

혹시 역설, 반역. 이런 말들이 거슬리시나요? 그러면 그런 말들을 순하게 써보지요. 바로 바보랍니다.

바보들이 사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씀이랍니다. 

다가오는 주일이 기독교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사람들이 “바보들의 세상”에 열광하던 시간을 기리는 주일이지요. 그러나 똑똑한 인간들은 바보 한 사람 곧 예수를 죽이고 말지요. 십자가에 매달아 말입니다. 

자! 예수의 비유 몇 가지 더 이야기 하렵니다.

그의 선언 – 말씀7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1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 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돈을 받아 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 마태복음 20 : 1- 16 

인용성서 구절이 좀 길었습니다만, 이럴 때 성서 한번 다시 읽어보자는 뜻으로 길게 인용을 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 가운데 꽤 널리 알려진 대목입니다. 

예수가 한 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아니면 이  비유에 대해  이제껏 당신이들어 본 설교나 성서공부를 돌이켜 보면서 다시 곱씹는다면 어떤 해석과 신앙고백을 하실 수 있으신지요? 

자! 제 생각을 말씀드리기 전에 최근에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 하나 먼저 소개를 드립니다. 

제 또래의 한 사내가 지난해에 한국을 다녀왔답니다. 큰 맘 먹고 나선 십수년 만에 고국방문이었답니다.  이 사내는 이민 오기 전에 한국에서 제법 유수한 회사의 직원으로 있다가 해외파견 근무 형식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답니다. 그러다 여기 눌러 앉게 되었고, 작지만 제법잘 나가던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그만 통째 말아먹고 빚더미를 안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십 수년 만에 자녀들도 다 시집 장가를 들이고, 부부가 그저 하루 밥 먹고 살며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을만큼 살게 되었답니다. 그렇다고 치부를 해서 쌓인 재산이 있거나 한 형편은 아니었답니다. 

십 수년을 그렇게 고생을 하며 다시 일군 삶을 돌아보며 큰 맘 먹고 고국에를 다녀왔다는 것이지요. 짧은 모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그 사내가 하던 말이었답니다. “이젠 다시는 그 곳에 가지 않을겝니다. 너무 많이 변했어요. 모든 판단의 기준이 그저 돈이더라고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바로 돈이더라니까요.” 

이어지는 그의 말입니다. “만나는 친구들과 지인들은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답니다. 그들의 관심은 제가 얼마짜리 집을 소유하고 있는지, 얼마짜리 차를 타고 다니는지?  뭐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더라는 말입니다.” 

글쎄, 그 사내의 말을 100%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즈음 한국뉴스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치판단의 기준이 ‘돈’ 인 것은 틀림없는 듯 합니다. 어떤 특정 분야뿐만이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 규칙은 어디에서나 통용되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 예수의 비유로 돌아갑니다. 

저 위에서 인용한 마태복음 20장의 기록에서 아주 유명한 16절의 말씀,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라는 것은 예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의 이야기 곧 그가 첨가한 부분이다라는 것이 학자들 사이의 주된 의견이랍니다. 

16절을 빼 놓고 본다면 이 비유의 촛점은바로  15절에 있습니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라는 말입니다. 

vineyard-workers“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주인이 “네가 뭔데?”라며 꾸짖는 상대는 바로 아침 일찍부터 온종일 일하고도 한 시간 남짓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임금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오늘날 이런 임금지불 방식을 고수하는 고용주가 있다면 각종 송사로 재산을 날리는 일은 고사하고 아마 사법 판단의 대상이 될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의 비유는 상식을 뒤엎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상식을 뒤엎는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했을까요? 

귀가 열린 척, 눈이 뜨인 척이라도 해 가면서 비유를 곱씹어 보아야하지 않을까요? 

십수년만에 모국방문을 하고 돌아온 사내가 본 오늘날의 한국사회나 지금 저와 그 사내가 살고 있는 이 미국 땅이나 이천년전 예수가 숨쉬고 있었던 팔레스타인 유대사회나 전혀 다르지 않은 사실이 한가지 있답니다. 

법이나 율법, 아니 나아가 상식이 우선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나 율법 나아가 상식까지도 지킬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존재한다는 것이고, 법이나 율법 나아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제 배불리는 사람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여기나 저기나 늘 있어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 “그건 아니다!”라는 반기를 든 것입니다. 사람 곧 인간은 신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 시대의 사람에 대한 평가가 율법의 잣대에 올려져 있었고, 제 또래의 한 사내가 본 오늘날 한국사회(한국말을 사용하는 사회)의 사람에 대한 평가가 돈에 올려져 있다는 것은 모두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에 대한 평가는 누구나 다 평등한 자리에 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말씀5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0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 누가복음 17장 20 – 21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일찌기,’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리라.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 마태복음 13장 : 10- 17 

예수가 주로 한 일은 기적행위와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그 말씀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이른바 “비유”라는 형태의 이야기들입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들은 많은 경우 이 비유라는 형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오늘부터 몇차례 예수가 했던 비유말씀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비유란 예수 당시 사람들과 그 이전 구약시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 방식의 한 형태입니다. 비유라는 말의 히브리어( ‘마샬’lvm, mashal)은 잠언, 속담, 풍자(satire), 비웃음(taunt), 조롱(derision), 수수께끼(riddle), 풍유 또는 비유(allegory) 등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런데 예수는 스스로 왜 이런 비유를 사용해서 말씀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마태복음 13 : 10- 17, 마가  4: 10-12,  누가 8: 9-10) 

바로<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 보고 알아 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 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되새기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예수가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예수가 떠나고 난 뒤 한 세대 후쯤부터 글자화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비유로 이야기하는 까닭을 설명하는 말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 구약의 이사야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사야가 야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로 나서기 전에 야훼 하나님께 들은 음성입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말아라(못하리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말아라(못하리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 이사야 6: 9- 10 

이사야에 나오는 말과 예수의 말을 곱씹어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비유로 이야기하는 까닭은 바로 “모르게 하기 위해서”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닌지요? 조금 우스꽝스럽지 않으신지요?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까닭은 제 생각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키고, 읽는 이들로 하여금 제 생각을 잘 드러내어 알게 하기 위해서 인데요, 읽는 사람들이 읽을수록 모르게 쓰는 글이라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런데 비유란 역설 곧 패러독스(paradox)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의 이런 비유에 대한 설명은 바로 역설이지요. 

바로 믿음을 전제하고 들어야만 들리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가짜 믿음”이 끼여들 여지가 너무나 많거니와, 실제 지난 이천년 동안 숱한 가짜들이 판을 쳐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 채 전혀 엉뚱한 예수만 바라보다가 간 사람들이 넘쳐나지요,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마찬가지고요. 

here and now“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여기있다, 저기있다”, “내가 보았다, 갔었다.” 등등 숱한 유혹들이 넘쳐났거니와 지금 오늘도 마찬가지랍니다. 

예수의 비유는 자칫 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 곧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이해하기 쉬습니다. 

이제 예수의 비유에 대해 이야기하렵니다. 저도 바르게 쓰고 읽는 이들도 바르게 이해하려면 바른 믿음의 잣대가 전제되어야 한답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말씀에서 “바로 너희가운데 있다”라는 말에 원뜻은 “바로 너희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다.”라는 의미라는데는 성서학자들의 의견이 일치된답니다. 

예수의 비유, 예수의 말씀은 바로 저나 당신의 손길이 닿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김수영과 만세

지난 주일 오후에 정말 잠시 한순간,  그야말로 채 30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 얼핏 보았던 책의 표지와 목차들이 내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답니다. 

필라에서 아는 이들끼리 저녁을 나누는 모임이 있었답니다.(이 모임은 제법  뜻이 있다는 생각이라 언젠가는 따로 소개드리려 한답니다.) 

아무튼 그 모임이 끝나고 서로 헤어지는 인사를 하다가 문득 제 눈길을 끈 책이었답니다. 모임의 멤버 가운데 인쇄업을 하는 벗이 만든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쓴 이는 필라 지역 사람들이라면 한두번 쯤은 그가 쓴 글을 읽어본 적이 있을 만큼 제법 지역사회에서는 알려진 이름이었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순간 하품을 할만큼 딱하게 생각했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그 책이 “김수영 문학상”에 출품하기 위해 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랍니다. 

김수영그  책을 쓴 이의 평소 글로 보아 도대체 김수영시인하고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테면 공화당 티파티(Tea Party)에 속한 이가 오바마가 제정한 상에 응모하는 격이랄까, 아니면 만년 새누리당 지지자가 진보당 이정희가 제정한 상에 응모하는 그런 참 맞지 않는 그림같은 느낌을 받았답니다. 

그 이가 과연 김수영이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쓴 사람인 줄은 알고 있는지,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라는 말을 한 것이 김수영시인이었다는 것은 알고나 있는 것인지 그런게 두루 궁금하더란 말이지요. 

세월따라 세상은 바뀌게 마련이지만, 1960년대와 전혀 변하지 않은, 아니 어쩌면 훨씬 뒷걸음친 모습으로 변한 한국사회(한국어를 사용하는 사회)와 갈수록 점점 뻔뻔스럽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모습을 바로 비추어 보자는 생각으로 김수영시인의 글을 소개합니다. 

첫번째는1960년 9월 20일에 쓴 그의 일기이고, 두번 째는 그의 유고시 “김일성 만세”입니다. 

1.

<언론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헌법조항에 규정이 적혀있다고 해서 그것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해서는 큰 잘못이다. 

이 두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위선 자유로운 환경이 필요하고 우리와 같이 그야말로 이북이 막혀 있어 사상이나 언론의 자유가 제물로 위축되기 쉬운 나라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 두 개의 자유의 창달을 위하여 어디까지나 그것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하지 방관주의를 취한다 해도 그것은 실질상으로 정부가 이 두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 

학자나 예술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가를 초월한 존재이며 불가침의 존재이다. 일본은 문인들이 중공이나 소련같은 곳으로 초빙을 받아 가서 여러가지로 유익한 점을 배우기도 하고 비판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언론의 창달과 학문의 자유는 이러한 자유로운 비판의 기회가 국가적으로 보장된 나라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검열이란 정부 기관이나 영진위, 기윤실, 유림 따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검열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며, 자기 검열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검열이다. 

글쓰는 사람이 조건반사처럼 글을 쓰면서, 심지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조차 스스로의 글과 생각을 제한해야 한다면, 거기엔 실질적인 검열이 없더라도 언론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불평은 있지만 검열 때문에 불평을 말할 수 없는 오웰의 ‘1984’보다 불평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더 끔찍한 세계다.> 

2.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