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날

DSC01911오늘은 3월 5일. 각급학교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관공서와 은행들도 문을 닫았답니다. 눈 때문이랍니다. 예정에 없던 휴일을 맞아 느긋한 아침을 누립니다.

아침뉴스를 훑어봅니다. 이곳 출신인 Joe Biden 부통령에게 다음 대통령선거에 나설 것을 주문하는 Matt Bai의 글이 눈에 들어옵니다. 민주당 차기 대선 주자인 Hillary Clinton의 독주가 예상되는 가운데 Joe Biden의 출마선언은 민주당 집권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Biden에게는 잃을 게 없다는 주장입니다. 글쎄 제 생각에는 나이들면 적당히 물러날 줄 아는 지혜가 먼저일 듯 싶은데 말입니다.

그 기사 아래에는 Mark Lippert 주한미국대사의 피습 소식이 이어집니다. 기사에는 이 시각 현재 156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오바마대통령과 힐러리의 입장을 묻는 글부터 도대체 경호원들은 없는 것이냐는 물음 등 다양한 의견들이 달려 있습니다. 다음 수순은 공화당에서 나올 한국폭격 주장이라는 비아냥도 있거니와, 한국에 가본 적 있는데 미친놈들이 차고 넘치더라는 악의에 찬 글도 있고, 자신이 남한 출신이라며 미안하다는 글도 있답니다. 그 가운데 어느 사회나 미친 놈들은 꼭 있게 마련이다라는 글이 눈에 띄였답니다.

한국내 뉴스 가운데는 김진홍목사가 폭행 당했다는 게 눈에 띄였습니다. 신앙은 없고 노욕만 남은 불쌍한 영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답니다. 196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신앙인 특히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그나마 김진홍 뒤에 목사라는 명칭에 위로가 될 듯합니다.

뒷뜰에는 쉬지않고 눈은 내리고…

모처럼 몇가지 미루어 두었던 일들을 정리할 수 있는 눈오는 날에 감사를.

춘삼월 – 그들의 순례

News about snow“With up to 10″ snow due, prepare to stay home Thursday” – 이 시각 현재 제가 사는 동네 신문 온라인판 헤드를 장식하고 있는 기사의 제목이랍니다. 오늘 밤부터 내일 온종일 10인치(약 25센티) 정도의 눈이 내리니 집안에 콕 박혀 있을 준비들 하라는 것이지요.

춘삼월이라는데 제가 사는 곳은 겨울이 극성이랍니다. 엊그제 월요일에는 얼음비가 내려 두시간 늦게 일터로 나갔고, 어제는 또 다시 얼음비에 두 시간 일찍 집으로 돌아왔었는데, 내일은 집에서 온종일 쉬여야 할 것 같답니다. 아내는 올겨울 마지막 휴일(?)이라며 폭설소식을 즐기는 듯 합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날씨에 상관없이 가게문은 늘 열었건만 나이 탓인지 운전하기 좀 불편하거나 불안하면 문을 닫거나 시간조정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답니다.

아무리 10인치 눈이 내려도 내일이면 경칩인데 쌓인 눈속에는 이미 봄이 함께 할 것입니다.

10일 째열흘전 팽목항을 출발하여 삼배일보를 하며 느린 걸음으로 서울 광화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 이호진씨와 그의 딸 아름씨는 아직도 진도에서 그 걸음을 이어가고 있다고 오마이뉴스가 전하고 있습니다.

10인치 내린다는 눈속에 이미 봄이 함께 하듯이, 이호진씨 부녀가 걷고있는 고난의 순례길속에 이미 그의 기도가 이루워진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기도랍니다.

“(우리부녀가)국민들을 향해 하는 절이자, 기도이니 국민 여러분이 저의 진심을 알아주시고, 희생자 304명을 품어줬으면 한다”

이호진씨는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무릇 종교의 여러가지 기능 가운데 중요한 기능 하나를 들자면 보상(報償, compensation)기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녀의 순례길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셔서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빌어 보는 것입니다.

삼보일배

성서 –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

예수 카페어떤 일이 시작되는 연유를 보면 아주 사소하거나 우연적인 계기에서 비롯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의 제가 딱 그 모습이랍니다.

지난해가 저물던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적(籍)을 둔 교회가 있어서 이따금 나가곤 있지만 성실한 교인은 아니랍니다. 교회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있으나 마나한 교인이지요. 저는 그게 좋답니다.

적을 둔 교회가 감리교회인데 교회에 속한 여러 모임 가운데 목장모임이라는 소그룹이 있답니다. 그전에는 속회라고 부르던 모임이랍니다. 장로교의 구역모임인 셈입니다. 예닐곱 가정들이 함께하는 작은 교회로 한달에 한번씩 각 가정을 돌아가며 모여서 성경공부도 하고 친교도 나누고 하는 모임이랍니다.

지난 십수년간 이 작은 모임에 함께한 적도 거의 없답니다. 제 집사람 혼자 가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굳어졌답니다. 그러다 두해 전 부터 이 소모임에 몇 번 참석을 하게되었답니다. 딱히 뭐 아내의 잔소리가 싫어서는 아니었고 어찌 하다보니 한달 걸러 한번, 아님 두달 걸러 한번 정도로 참석을 하였답니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모임에서 아주 엉뚱한 사건이 일어났답니다. 제가 속한 모임의 구성원들 평균 나이는 60세 전후랍니다. 교회이력으로 따지면 제법 연식이 오래된 분들이고요. 그런데 그날 성경공부를 하다가 누군가가 “좀 체계적으로 성경을 알고 싶은데 마땅한 그런 계기가 없어 어떤 땐 좀 답답하다. 우리 모임에서 함께 그런 계기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하는 의견을 내놓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가면서 그 가운데 제 블로그 글들을 읽고 계시는 한분이 “김아무개가 좀 그걸 맡아서 해주면 어떨까?”하셨답니다.

그 모임을 주관하는 장로님께서 저에 대한 신뢰(?)가 깊으셨던지 “그거 좋겠다. 그렇게 해보자”고 하실 때, 응당 제가 철이 들었다면 “아이고, 그게 무슨…”하며 손사래를 쳤어야 옳았을 일이건만 회갑나이를 그저 숫자로만 먹어 온 이 철부지가 그만 “그러지요, 뭐”라고 한 것이지요.

그래 올 일월부터 모임 때마다 성서공부를 한 시간여씩 맡아 하기로 했던 것인데,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퍼득 정신이 들면서 “에라이, 이놈아! 나이살 먹고 어찌 그리 철이 안 날수가…”하는 생각이 제 뒷통수를 딱 치던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속 넓으신 장로님께서 그리하라고 하여도 그저 덥썩 “예”하면, 교회도 잘 나오지 않는 놈이 교회모임에서 성서 이야기를 하고 가르친다고 듣는 욕이나 악평이야 그 방면으로 연륜이 쌓인 제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이고! 모임의 수장인 장로님을 비롯한 속한 모임원들이 받을 그 많은 말들이 어찌 제 몫일 수 있으랴하는 생각이 든 것이랍니다.

그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하고 모임원들께 넉넉하신 마음을 빌었지요. 그 대신 모두에게 누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 성서 이야기를 나눌 방법들을 생각해 보았답니다.

그러다 바로 어제 일이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과 비지니스 모임을 온라인에서 하게 되었답니다. 몇 해전 세탁인 교실을 이 방식으로 한 두해 해 본적이 있는데 그 때와는 환경이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답니다.

비지니스 온라인 미팅을 끝낸 후 든 생각이랍니다. 그래 이 방식으로 단 한사람과 만나더라도 성서 이야기를 함께 해보자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지요.

“삶은 독파하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것이다.” – 크리스토퍼 필립스(Christopher Phillips)라는 이가 쓴 책 <소크라테스 카페>라는 책 첫 장을 넘기면 만나게 되는 문장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책의 소제목들입니다.

 1.  질문이란 무엇인가?(What is the question?)

2.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Where I am?)

3.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가?(Whom do you need?)

4. 이게 다 무슨 소린가?(What’s it all about?)

5. 왜 ‘왜’를 묻는가?(Why ask why?)

소크라테스가 고대 아테네 사람들에게 불어 넣었던 철학적 영감과 질문하는 삶을 오늘 현대인들이 되살려 일깨우는 일에 온몸을 다 던져사는 철학자 크리스토퍼 필립스(Christopher Phillips)의 물음들이 예수쟁이들에게도 그대로 유효하다는 생각으로 큰 간판을 “예수 카페”라고 올려봅니다.

성서를 마주 대하는 첫번째 자세는 ‘믿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는 마음의 주체는 바로 ‘나’입니다. 그래 “내”가 가장 소중합니다. 성서 앞에서 ‘나’를 바로 볼 때 비로소 ‘너’가 보입니다. “네”가 “나”처럼 신 앞에서 똑같이 소중한 사람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나’와 ‘너’들이 모인 “우리”들이 보입니다. 그런 ‘우리’의 울타리의 크기 곧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키우는 일을 위해 성서를 읽는 것입니다.

그래 작은 간판을 “성서 –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로 새깁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얼마나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릅니다. 그저 시작할 뿐입니다. 거의 많은 시간을 저 혼자 이야기로 꾸며질 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마 그럴 개연이 높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제겐 참 뜻있는 순례의 길이 될 것입니다.

제 아무리 백세 시대라 하더라도 예순 해 걸어 온 믿음의 길을 정리해 보는 마음으로 다시 읽어보는 성서는 또 새로운 가능을 열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그런데 어떻게 묻느냐 하는 것이 그 대답을 유도한다. 우리는 성서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이미 대답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성서 대신 아집에 정좌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려면 계속 성서를 향해 물어야 한다.” – 바로 이 맘으로 시작하는 일입니다.

컴퓨터로 제 얼굴과 제가 보여드리는 자료들을 보며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고, 전화나 스마트 폰으로도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저녁 8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미국 동부시간) 한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 첫시간은 이번 목요일(3월 5일) 저녁 8시 30분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anymeeting.com/492-961-284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매일 업데이트되는 뉴스들 가운데 구글 서비스를 통해 제가 받아보는 특정 항목에 해당하는 뉴스들이 있습니다. 우선은 직업상 세탁업(dry cleaning business)에 대한 뉴스가 있고, 미국내 한인 이민자들의 주업종인 micro business에 대한 뉴스와 미국경제에 대한 뉴스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이 한반도관련 뉴스입니다.

이런 항목들에 대한 영문뉴스들은 매일 같은 시간에 제 이메일함에 들어옵니다.

세월호-이호진거기에 엊그제부터 하나 추가한 항목이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 3보1배”라는 한국어 검색을 추가한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아들 이승현군을 잃은 아버지 이호진씨와 그의 딸 이아름씨에 대한 기사를 받아보기 위함입니다. 바라기는 한국내 언론 가운데 이들과 함께 3보1배하며 이들의 고행에 대한 기사를 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랍니다.

좀 사사롭고 사치스럽기까지한 이야기지만 이호진씨의 나이가 제 아내와 같거니와 제가 제 아내의 본 이름대신 즐겨 부르던 이름이 이아름이었다는 사실이 뉴스를 쫓는 정말 하찮은 이유도 되었다는 말씀을 덧붙이면서, 그 나이에 30만번의 큰절을 해가면서 520km를 길을 걷는 부녀의 모습을 잊지 않기위해 부녀에 대한 뉴스를 쫓고자 하는 것이랍니다.

교회력으로 사순절기랍니다.

사순절(四旬節)이란 부활주일 이전에 주일(일요일)을 뺀 사십일 동안을 말합니다. 예수가 겪었던 고난을 되새김하면서 오늘 살아있는 자로서 그를 따르고자하는 신앙고백으로 보내는 40일이랍니다.

“예수를 믿는다” 또는 “예수를 따른다”는 말은 바로 내 자신이 예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나의 나됨” 곧 내 정체성과 “예수의 예수됨” 곧 예수의 정체성을 하나로 일치한다는 말이지요.

이천년 전 예수가 명령한 “나를 따르라”는 말에 따라 2015년 오늘을 사는 내가 그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가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의 상황속에서 했던 것처럼 오늘 내가 사는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물음과 결단으로 살라는 말일겝니다.

이천년 전 예수의 모습 가운데, 그 때의 상황과 예수의 삶을 표본처럼 축약해 주는 성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마가가 전하는 예수의 말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마가복음 2:27-28, 개역개정본)

예수시대에 안식일은 바로 법이었습니다. 하여 이 성서 본문은 이렇게 읽어도 무방합니다.

“법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법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사람이 법의 주인이니라.”

그 당시의 법 곧 안식일법에 대해 전해지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 가운데 이런 것들도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안식일이란 금요일 해질 무렵부터 그 다음날인 토요일 해질 무렵까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금요일 해질 무렵에 나귀가 끄는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막 집에 도착한 순간 해가 서산으로 꼴깍 넘어갔습니다. 이제 안식일이 시작됐으니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물건을 나르거나 옮기는 일은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 하루동안 나귀는 무거운 짐수레 굴레를 지고 지내야만 하는 것이지요. 안되었다 싶었던지 예외조항이라는 것이 하나 있었답니다. 한번만 딱 쳐서 나귀에게 매인 수레의 끈을 풀 수는 있다는 조항입니다. 딱 한번만 쳐서 말입니다.

당시 안식일법이란 아주 엄격한 법률이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 법은 있는 사람들만 지킬 수 있는 법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만 하루를 아무 일도 하지않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이란 이미 어느 정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먹고 살기위해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 몸이 성치 않거나 아파서 안식일에 회당에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은 그냥 바로 죄인이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사람 특히 없고, 누리지 못하고, 억눌려 사는 사람들에게 안식일법이란 곧 죄인이라는 족쇄를 채우는 도구였습니다.

본래 성서적 의미의 안식일이란 없는 자, 부려 지는 자, 노예, 비정규직 노동자, 품팔이 등등을 위해 하루 쉼을 주는 날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안식일에는 이것도 하지말라 저것도 하지말라는 금지조항들이 하나 하나 추가되면서 (있고 누리는) 사람들이 (없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법으로 바뀐 것입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안식일법 만능시대에 예수가 내렸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가히 혁명이었습니다. 이즘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는 가히 좌빨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를 따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제임스 콘(James Hal Cone)이라는 미국인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교회의 인종차별과 인종분리에 정면으로 “No”를 선언하며 백인들이 이야기하는 해방신학과는 완전히 다른 흑인해방신학을 주창한 신학자입니다.

그는 그가 쓴 책 <눌린 자의 하느님( God of the Oppressed)>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어서 죄와 악과 죽음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이겨냄으로써 인간에게 아픔의 실체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자유와 능력과 희망을 준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이다.”

제임스 콘은 “아픔의 실체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자유와 능력과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오늘날 살아있는 예수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자유와 능력과 희망을 안고 아픔의 실체에 대항하여 싸우고자” 3배 1보의 길을 걷고 있는 이호진씨 부녀에게서 제가 느끼는 성서적 예수의 모습입니다.

이들 부녀를 향해 “가만히 있어라”거나 “이젠 그만하라” 나아가 “종북 좌빨”을 뇌까리는 교회나 기독교인이 있다면, 적어도 제가 믿는 신앙의 잣대로 그들은 종교적 사기꾼들일 뿐입니다.

이즈음 기독교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 가운데 하나로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의 고난은 세상 도처에서 “여기 지금 나와 함께”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라는 노랫말을 “여기 지금 내가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곱씹는 일이야말로 이 사순절에 예수쟁이들이 해야만 하는 일일겝니다.

태(胎) – 3보 1배

<황사가 잔뜩 낀 23일 오전 10시, 세월호 참사로 숨진 고 이승현(단원고)군의 아버지 이호진씨와 누나 아름씨가 진도 팽목항 부둣가에 섰다. 참사 314일째 되는 이날, 부녀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을 위해 ‘진도 팽목항~서울 광화문 3보 1배’를 시작했다(유튜브에서 동영상 보기).- 중략 –

100 여일 동안의 약 500km 여정에 나선 부녀는 “참혹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실종자 가족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이호진씨는 “(참사) 1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뭐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며 “(우리 부녀가) 30만 번 절을 하는 동안 적어도 세월호를 다시 한 번 떠올려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사 전문보기)

오늘자 오마이뉴스가 전하는 기사 <팽목항→광화문 3보1배 “하늘 위 아들 위해 멈추지 않아”>의 도입부입니다.

일년 전 이호진씨와 그의 딸 아름씨는 승현군의 이름 앞에 “고(故)자가 붙고, 2015년 이 추운날 부녀가 함께 세걸음 걷고 큰절 한번하며 500km를 걷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일겝니다.

어느 인생이나 어느 가족에게나 아픔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세상 누구에게라도 말입니다. 소소한 일상적 삶속에서 누구라도 겪게되는 아픔, 슬픔, 기쁨, 즐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상상치 못했던 재난이 개인이나 가족에게 다가오는 일은 뉴스로는 흔한 일이지만 실제 그런 일들을 당하는 사람들은 뉴스가 될만큼 흔치않은 일입니다.

국가라는 공동체를 꾸리고 사는 까닭은 바로 그런 상상치 못한 재난이 국가 구성원인 개인이나 최소 공동체인 가족에게 닥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고, 재난이 닥쳤을 경우엔 국가의 모든 역량을 다해 그 재난으로부터 개인이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국가가 필요한 까닭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34조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1.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2.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3.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4. 국가는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를 진다.

5.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6.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이호진씨와 그의 딸 아름씨는 지금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포기”한 상태입니다. 500km의 길을 (누구엔가 드리는 것인지도) 모를 30만 번 정도 큰절을 하며 백여일 동안 걷는다는 일은 <인간다운 생활> 을 “포기”’하는 사건입니다.

태

이들 부녀의 행동을 얼핏 이렇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포기”한 행위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녀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인간다운 생활”을 스스로 포기하고 항거하고 투쟁하는 긴 여정에 오른 것입니다.

국가가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았고, 여전히 “노력하지 않고”있기 때문입니다.

오마이뉴스는 험하고 먼길을 떠나는 부녀와 나눈 대화를 이렇게 전합니다.

부녀는 “광화문에 도착했을 때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가”라는 질문에는 이구동성으로 비관적인 답을 내놨다.

이호진씨는 “실종자 9명 수습하고, 진상 밝히고, 책임자 처벌하고, 법질서 올바르게 확립되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우리가 3보 1배로) 광화문까지 간다고 해서 그렇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며 “개인적으로 쌓인 한을 조금이라도 길에 내려놓고 싶다”고 한탄했다.

이아름씨는 “정부에 바라는 게 있나”라고 묻자, “그냥 하던대로 하면 될 거 같다”고 싸늘하게 답했다. “별로 기대하는 게 없는 건가”라고 다시 물으니, 그는 “그렇다”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 기사를 일으며 오래전 대만 신학자 송천성(宋泉盛, Choan Seng Song)이 말한 “태(胎)의 신학”이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송천성은 ‘태(胎)’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창조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말한 태의 신학은 인간의 자궁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데서 오는 투신의 신학입니다. 이는 어머니가 자신의 몸속에 깃든 생명이 결실을 맺기까지 혼신을 다 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태의 신학은 궁극적으로 희망의 신학입니다. 생명의 궁극적 의미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이호준씨와 딸 이아름씨는 죽은 아들과 동생인 이승현군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고통속에 투신하는 여정에 나선 것입니다. 이호준씨 부녀의 투신은 죽은 고 이승현군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든 이들이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결실을 맺기 위해 혼신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투신이 “태(胎)”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희망으로 이어지려면 그들의 긴 여정에 함께하는 사람들의 연대는 필수조건인 동시에 충분조건이 될 것입니다.

교회력으로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의 삶은 수난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의 수난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신(神)이 스스로 몸소 겪었다는 고백 위에 있는 것입니다. 신과 사람이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선언 위에서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호진씨 부녀가 한 말처럼 그들이 걷는 고난의 삼보일배의 끝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들의 행위는 이미 희망을 품은 태(胎)입니다.

눈길 그리고 시편 23편

어제 오후, 눈발이 날리는가 싶었는데 이내 쌓이기 시작했답니다. 일기예보에는 분명 오후 6시 이후에 폭설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시간이 앞당겨진 듯 하였습니다. 그래 부랴부랴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향한 시간이 오후 2시였답니다.

평소에는 평지였던 길들이 눈이 오거나 얼음비가 내리면 모두 가파른 오르막, 내리막 언덕길로 바뀐답니다. 평소에 20분이 채 안되는 거리인데 집에 도착하니 3시 30분이 지나있었답니다. 1시간 30분여가 걸린 것이지요. 차가 엉금엉금 기어온 탓이랍니다. 비록 집앞 언덕길을 오르지 못하고 드라이브웨이 끝에 차를 박아놓고 들어왔지만 그나마 무사히 집에 도착한 것이 감사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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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드라이브웨이에 쌓인 밤새 내린 눈과 얼음비를 치우느랴고 또 한시간 반이 걸렸답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머리속에 떠올린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비단 교인이 아니더라도, 처음 이 시를 접하는 사람이라도 읽으면 그저 편안함이 밀려오는 시입니다.

성서에 다윗임금이 쓴 시라고 적시하고 있지만 언제 누가 이 시를 지었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답니다.

숱한 주해와 주석들은 물론이거니와 이 시편을 주제로 한 설교들은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겝니다.

우선 시편 23편을 읽거나 떠올릴 때에 처했던 나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어제 오후에 눈길에 이리저리 미끌어지는 차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미끌어지거나 쳐박히는 일없이 안전하게 집에 가야지’하는 마음으로 조심조심 집으로 향할 때는 “뭔 놈의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나?”, “행여 앞이나 옆이나 뒤에 있는 차가 미끌어져 나를 박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들이 이어졌었답니다. 그러다 집에 도착해 바라본 내리는 눈과 눈에 쌓인 동네 풍경이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었답니다.

위험한 눈길 운전 후에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 눈내리는 아늑한 풍경을 보며 떠올린 시편 23편은 그야말로 “신이 함께 하시는 편안함”일겝니다.

그런데 만일 어제 그 눈길에서 미끌어져 어딘가에 쳐박혔거나, 심하게는 내 차가 누군가를 들이박거나 누군가가 나를 들이받아 병원에 누워서 시편 23편을 떠올렸다면 느낌은 어떤 것일까요?

물론 “불행중 다행이다. 죽지않고 이만한 것도 다 신이 함께 하신 은총이다.”라는 고백이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만일 큰 사고가 나서 죽음에 이르게  되어 저는 떠나고 남아있는 이들이 읽게 될 시편 23편은 어떤 느낌일까요?

읽은 사람들의 처지와 형편 곧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듯이, 시편 23편을 쓴 사람(또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시편에 대한 숱한 주석 가운데 독일학자 Willy Schottroff의 이해는 아주 독특하답니다.

그는 시편 23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시가 쓰여졌던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견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는 표현에 실제로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해석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 즉 성전안에서의 거주와 대접, 보호에 대한 진술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이 시편을 실제로(예루살렘의) 거룩한 곳에서 피난처를 발견한 사람의 확신의 노래로 해석하는 시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Willy Schottroff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당시 사회에 있었던 “도피처로써의 거룩한 곳(예루살렘 성전을 위시한 각지에 있었던 피난도시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Willy Schottroff는 당시 이런 도피처를 찾아 평안함과 편안함을 누렸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회적 또는 경제적 이유에서 – 예를 들어 국가에 세금을 많이 내지 못하거나 혹은 개인적인 빚을 갚을 수 없어서 많은 빚을 걸머지고 노예로 팔려갈 위협에 처해 있는 경우- 도피처를 찾다가 성전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 굶주림으로 고통스럽게 연명하는 사람들. 임시고용인, 용병 등으로 고분고분 일만 해야했던 사람들. 채무자로부터 긴박하게 추격당하는 사람들. 도망한 노예들. 고향에서 박해를 받아 고향을 등진 정치적 망명자들. – 바로 이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인도와 보호, 보살핌”에 따르는 평안함과 편안함을 노래한 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당시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제대로 이해하면서 시편 23편 머리에 있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첫 선언을 다시 읽는다면 그 의미는 아주 명백해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목자됨은 더 이상 법적으로 정당한 사람들의 편에 있지 않다. : 즉 여호와는 피의 복수자나 채권자, 또는 노예주인의 편에서 그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거나 아니면 추상적인 법이 구현되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반대로 여호와의 목자됨은 추격당하는 도망자, 쫓김을 당하고 위험에 처해 있는 짐승을 보호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神)적인 목자의 보살핌은 이미 강한 자를 더욱 강하게 해주고 사회적인 지배자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들의 권리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도 걱정을 해야만 하는 약자, 박해받는 자들을 향하고 있다.>

눈속에서 떠올린 시편 23편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나의 평안함과 편암함 넘어선 곳에서 일하시는 목자로서의 신의 모습과 그 신께서 오늘 여기에서 돌보시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 인용문구들은 한국신학연구소에서 펴낸 <성서해석 – 무엇이 새로운가>에 실린 Willy Schottroff의 <시편 23편의 사회사적 성서주석>에 나오는 말들입니다.

어떤 설날 뉴스

Yahoo.com 메인화면 뉴스에 하루가 멀다않고 뜨는 뉴스 소재 가운데 하나는 한반도 소식입니다. 주로 북쪽 뉴스들이 주를 이룹니다. 김정은의 우스꽝스러운 머리모양에서부터 북쪽의 가십거리들이 많이 올라옵니다. 남쪽 이야기도 심심치않게 올라오곤 합니다.

어제는 남쪽에 가서 한국사람처럼 성형을 하고자하는 중국 여인들의 행태와 그 부작용에 대한 기사가 올라왔었답니다.

오늘은 북의 기사가 올라왔는데 평소와는 좀 다른 기사라 제목이 눈에 띄었답니다. “북한에 더 이상 굶주림은 없다( North Koreans are No Longer Starving)”라는 1분 짜리 동영상이었습니다.

“최신 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식량사정이 안정적이고, 북의 리더쉽이 나빠지는 게 아니라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 The latest reports show that North Korea’s food situation is stable, and the leadership probably thinks it is doing better, not worse”라는 멘트에 이르면 Yahoo가 이래서 한국에서 철수했나?가 아니라 철수당했나?라는 우스운 생각까지 들었답니다.

아무튼 남이든 북이든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산다는 소식은 반가운 일이랍니다. 더더우기나 설날 뉴스로는 말입니다.

잊지 않는 일

어제(18일)부터 이번 토요일(21일)까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 있는 힐튼 뉴올리언스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대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국제학 학회(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 주최로 열리는 56차 연례 학술대회(ISA’s 56th Annual Convention)에 대한 소식입니다.

이 학술대회에서 내일(20일) 우리들에게 아주 귀에 익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내일 오후 4시부터 열리는 이 행사에서 한국인 학자들 몇 분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과학적 연구결과를 발표한다고 합니다. 보도는 그들의 연구결과를 요약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발표자 네명은 모두 한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활동하는 분들로서 남태현(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과), 서재정(일본 국제 기독교대학 정치학과), 유종성(호주 국립대 정치사회변동학과), 이윤경(미국 빙햄튼뉴욕 주립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랍니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를 한국의 민주화, 국가론, 신자유주의 정책, 부패 등 각기 다른 측면에서 다각적으로 분석하여, 이 참사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한국 사회 및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임을 드러낼 것이라고 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결과물”<이윤경 (미국 빙햄튼 뉴욕 주립대 사회학과 교수)>, “참사는 부패가 불러온 당연한 결과”<유종성 (호주 국립대 정치사회변동학과 교수)>, 박근혜정부와 정치 엘리트들의 비민주성이 낳은 결과”<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과 교수)> 등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하는 연구들인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제 관심을 끌어들인 것은 서재정 (일본 국제 기독교 대학 정치학과 교수)의 주장입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신자유주의’라는 말과 ‘한국적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구별하는 듯합니다.

일반적으로 시장의 역할을 극대화하고 이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과정을 신자유주의라고 하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분단체제’가 파생시키는 국가안보의 필요성이 국가 권력을 강화하고 국가가 사회에 침투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한국적 신자유주의’란 모순구조라는 것입니다.

이 모순구조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라는 말 속에 숨어있던 국가의 폭력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화의 비용과 국가 폭력행사의 결과는 시민사회의 희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주장한답니다.

세월호와 조국분단을 한 평면에 올려놓고 분석하는 그의 이야기에 고개가 많이 끄덕여졌답니다.

이와같이 일어난 사건에 대한 지속적인 분석과 연구는 물론이거니와 실제적으로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과 재발방지를 위한 모든 노력들은 “한인”이라는 공동체에 묶인 모든 사람들의 몫일 것입니다.

지난 해 7월, 서울에서 열렸던 ‘2014 서울국제학술대회’에서 울리히 벡(Ulrich Beck) 독일 뮌헨대 교수가 했다는 말은 우리들의 몫을 다하기 위해 꼭 붙들고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고, 정치인들은 과거 관행을 답습할 것이다. 하지만 위험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정치제도의 정당성 약화가 거세지면서 정치제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시민들이 이러한 사태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잊지 않는 일” 말입니다.

여기 날짜로 치자면 오늘이 설날입니다.

ash wed어제는 기독교력으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이, 자신과 인류를 위해 대신 죽은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잊지 않기 위해 지키는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날이었습니다.

설날은 우리 민족의 전통을 잊지 말자는 날이요, 사순절은 구원에 대한 신앙을 잊지 말자는 기간입니다.

“잊지 않는 일”의 중요함을 알리는 날들이 연이었습니다.

1% 독점시대

오늘 제가 사는 동네 신문을 보다가 눈에 들어 온 기사입니다. 제목이 “Delaware’s top 1 percent claims all income growth”입니다. 델라웨어 주민들 가운데 상위 1%의 고소득층이 소득 증가분을 모두 독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제가 사는 동네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랍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중산층이 붕괴하는 현상입니다. 함께 읽어보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번역해 소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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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라웨어 상위 1%고소득층, 소득 증가분 전부 독점

불균형 경제 회복의 추가 증거를 제시한 ‘경제 정책 연구소 (Economic Policy Institute)’의 연구에 따르면, 델라웨어가 리세션에서 회복하면서, 소득 증가분 전부를 최고 부유층 주민들이 독점한 것으로 밝혀졌다.

2009년에서 2012년 사이에 델라웨어 상위 1% 소득자들은 소득이 15% 증가했다.

나머지 하위 99% 소득은 1.6% 감소했다. 이 연구는 (인플레이션을 반영) 조정된 총소득(adjusted gross income) IRS 데이타를 기초로 하였다.

“소득 증가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이 이들 소집단으로 가는 경향이 수년 간의 패턴이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지극히 극단적이다” 라고, Mark Price가 말했다. 그는 해리스버그 소재 ‘Keystone Research Center’에서 노동 경제학자로 일하고 있으며, 이 연구의 공동저자이다.

델라웨어의 상위소득 1%는 개인 납세자와 부부 합동 세금보고를 포함하여, 총 4,747건의 세금보고 숫자에 불과하다.

프라이스는 소득 증가분이 불균형적으로 최고소득자에게로 흘러가는 수십년간 계속된 추세를 반전시키는 방법을 찾은 주 정부는없다고 지적했다.

미국 전체로 보면, 상위 소득자 1%는 1979년에서 2012년 사이 소득 증가분 총합의 88.5%를 차지했다.

리세션에서 벗어나는 2009년에서 2012년 사이 동안, 상위소득층 1%의 소득은 36.8%가 증가한 반면, 하위소득자 99%는 소득이 0.4% 하락했다.

델라웨어 상위소득층 1%는 2012년에 평균소득이 $863,734이었다. 나머지 99%는 평균 소득이 $46,686이었다. 소득은 연례 세금보고의 가구 소득을 나타낸다.

잭 마켈 주지사 대변인 Jonathon Dworkin은 이 연구는 “과거 중산층 일자리가 여러 해에 걸쳐 새로운 테크놀로지로 대체되거나 혹은 다른 국가로 아웃소싱 되면서, 델라웨어와 우리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장기적인 문제를 명백히 보여준다”고, 이메일을 통해 말했다.

프라이스는 불균형 경제를 여러 다른 요인들 중에서 특히 급여가 높은 제조업 일자리의 감소, 노조 참여 감소, 물가인상을 따르지 못하는 최저 임금 등의 탓으로 지적했다.

“경제는 성장하고 있다. 경제는 많은 부와 많은 소득 증가를 창출하고 있다. 그것이 단지 균형있게 흐르지 않고 있을 뿐이다” 라고, 프라이스가 말했다.

윌밍톤지역을 대표하는 주 상원의원 Robert Marshall(민주)은 3월에 델라웨어 최저 임금을 2019년까지 $10.25로 인상하는 법안을 제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최저임금은 생활비 상승에 보조를 맞추어 자동적으로 인상될 것이다.

델라웨어주 AFL-CIO 의장 Sam Lathem은 그의 노조원수는 10년전 약 35,000명에서 오늘날 20,000명으로 감소했다고 말했다. 노조원수는 뉴포트와 뉴왁 인근에 위치했던 GM과 Chrysler 자동차 제조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급격하게 감소했다.

AFL-CIO는 또한 건설과 다른 노조를 대표하고 있으며, 이들 노조의 회원수도 재정위기(financial crisis)를 거치면서 감소했다. 주정부는 도로와 교량 보수에 투자하고, 건전한 보수의 중산층 일자리를 증진하기 위한 추가적인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Lathem이 말했다.

“일자리 증대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현재 일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인프라를 위해 열심히 투쟁할 것이다. 모두가 그것을 이야기 하지만, 아무도 일을 마무리 짓지 않는다”고, Lathem이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