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신궁과 가미가제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6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일본인들의 토속신앙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사람들의 정신을 송두리째 없애고, 조선을 착취(搾取)하기 위하여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라는 뜻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를 만들어, 그런 것을 조선사람들에게 강요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행위는 그런 것 뿐만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다음, 조선인들에게 일본어 교육을 점차 실시해 나갔고, 조선의 민족적인 모든 문화활동을 못하도록 막음으로써,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말살해버리려고 했다.

그러한 목적으로 일본은 <내선일체>라는 것을 내세워 조선사람도 일본  사람처럼 <신사참배(神社參拜)>라는 것을 하도록 강요한 적이 있었다.

이쯤에서 그러한 ‘신사’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엔 그들의 고유한 토속신앙(土俗信仰)인 신도(神道)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한 신앙(信仰)의 대상이 되는 신(神, 가미)의 위패(位牌)가 있는 곳을 <신사(神社)>라고 한다. 그러한 <신사>란 일본 황실의 조상, 또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신(神)으로 받드는 사당(祠堂)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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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 모습>

그 중엔 다른 신사보다 격(格)이 높은 신궁(神宮)이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때.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朝鮮神宮)’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조선신궁의 주제신(主祭神)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明治)천황이다. 일본 신화의 여신인 天照大神은 일본 황실(皇室)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明治天皇은 일본이 조선을 빼앗을 당시의 일본 왕이다.

한데, 조선총독부 시절 특히 일제 말기 때, 그들은 조선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강요에 굴복하였다.

하지만, 그런 것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목숨을 잃은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주기철 목사에 관한 기록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에 실려 있으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각설하고, 신사(神社)엔 도리이 (鳥居)라는 일본 특유의 <기둥문>이 있는데, 그것은 불경(不敬)한 곳과 신성(神聖)한 곳을 구분 짓는 경계라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일반적인 세상과 성스러운 곳인 신사가 있는 곳은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곳을 드나드는 경계에 도리이라는 문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도리이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고 몇가지 설(說)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이론은 <닭이 머무르는 자리>를 뜻하는 한자인 <鷄居>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神道>에서는 닭이 <神의 전령(傳令)>이라고 여기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건, 도리이의 기본적인 구조는 두 개의 기둥이 서 있고, 기둥 꼭대기를 횡목(橫木)으로 서로 연결해 놓는 형태이다.

도리이의 기본적인 구조와 거의 비슷한 모양으로 된 구조물(構造物)이 한국에도 있다.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는‘홍살문’이 바로 그런 것인데, 홍살문은 능(陵), 묘(廟), 궁전(宮殿) 등에 세우던 일종(一種)의 문이다.

홍살문의 구조는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홍살문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에도 있는데, 홍릉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高宗, 재위 1863 – 1907)과 비(妃)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 – 1895)를 합장한 무덤이다.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연대순(年代順)으로 또는 시간 수서대로 하나씩  수직(垂直)으로 늘어놓는 것이 보통이다.

한데, 태평양전쟁 이야기를 적다 말고, 느닷없이 일본 온천 이야기와 그들의 토속신앙에 관한 것을 적으면서 도리이 (鳥居)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도리이 와 비슷한 모양으로 된 구조물이 한국에도 있다.” 라는 설명을 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가 묻혀 있는 무덤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명성황후가 목숨을 잃게 된 이야기를 하자면,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후 생긴 신정부(新政府)의 군인이 된 미우라 고로는 주한일본공사(駐韓日本公使)로 조선에 부임하여, 조선의 친로 (親露)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세우고자,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그는 일본 자객(刺客)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시해(弑害) 하고, 그 시신을 불태운 국제적 범죄를 저지른 자다.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등 조선에 있는 러시아 세력을 없애고, 일본의 세력을 그 땅에 넓히기 위하여 미우라 고로 등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담긴 텔레비전 연속극도 있고, 명성황후에 관한 이야기 는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므로 줄이고, 태평양전쟁 이야기를 계속한다.

가노야 비행장

나는“오사카(大阪)에서 지낼 때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유치장 생활을 하다가 후쿠오카 탄광으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그 탕광에서 또 탈출하여 다루미즈(垂水)라는 곳에서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라는 이야기까지 적었다.

나는 전쟁이 끝난 다음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더 지내게 되었다.

시모노세키 (下關)나 하카타 (博多)항 부두엔 한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배를 타기가 쉽지 않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귀국을 서둘지 않고, 다루미즈 근처에 있는 가노야 (鹿屋)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엔 가노야 비행장이 있다.   마침 그 비행장에 들어와 있는 미군부대에서 현지인을 고용인으로 채용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가노야 시청 앞에서 그런 광고문이 있는 것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귀국할 때까지 임시로 그 비행장에 취직했다. 내가 맡은 일은 자동차 타이어를 수리하는 미군들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조수(助手)다.

그 비행장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神風)의 기지(基地)였다. 특히, 그 전쟁이 끝나게 될 무렵엔 전체 가미가제 수의 약 반(半)이 그 비행장에서 출격(出擊)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나는 70년 전에 있었던 것들을 더듬어 생각해보면서 이 글을 엮고 있는데, 내 기억을 더 생생(生生)하게 하려고 인터넷 검색도 해본다. 하지만‘오늘날의 일본은 내가 그곳에서 지내던 때의 일본이 아니다.’ 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세상이다.’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지명(地名)도 그런 것 중 하나다.

내가 한국을 떠나던 해인 1984년엔 없었던 지명이 지금은 한국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일본도 그렇다.’라는 것이다.

몇 해 전에 일본 큐슈(九州)지방에 미나미큐슈시(南九州市)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지람특공평화회관(知覽特攻平和會館)이 라는 것이 그곳에 있다. 지람(知覽, 일본발음 지란)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 육군 특공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그 회관은 태평양전쟁 당시 폭탄을 실은 비행기 전체가 육탄(肉彈)이 되어 적함(미국 군함)에 몸으로 타격(打擊)한 특별공격대원의 유영(遺影), 유품(遺品), 기록 등 자료를 수집, 보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태평양전쟁 때 가미가제 특공대의 기지였던 가노야와 지란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그 전쟁이 절정에 달하자 일본은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 특공대까지 내세워 그 전쟁을 버텨보려고 했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知覽特攻平和會館 앞뜰엔, 다음과 같은   비문(碑文)이 있다.

‘아리랑 노래 소리로 / 멀리 어머니의 나라를 그리워하며 …..’ (원문은 일본어다.)

가미가제 특공대 …… 그들 중엔 조선 젊은이들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비문이다.

***지람특공평화회관(知覽特攻平和會館)에는 조선인 대원도 11명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1945년 3월 29일 당시 17세였던 박동훈은 유서에 큼직하게 ‘결사(決死)’라는 단어와 함께 “몸을 던져 적함과 함께 옥쇄해 영원히 황국을 지키겠다”고 썼다. 하지만 그는 ‘육군이 가족을 책임져 준다고 해 어쩔 수 없었다. 동생은 절대 군대에 보내지 말라’며 아버지를 안고 울었다고 가족은 증언했다. 그는 오카와 마사아키(大河正明)라는 일본 이름으로 올라 있다.

24세 탁경현은 출정 전날 밤 식당 아주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조국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그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아리랑’을 불렀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는 교토 약학대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차출돼 왔다.

혼란스런 아침

주일 아침 뉴스를 훑습니다.

우리 동네 군수(New Castle County Executive) 양반인 Tom Gordon이ISIS의 테러 위협에 대비하는 새로운 감시망을 설치했다고 발표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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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郡,county)내에 자그마치 수십만개에 달하는 카메라를 설치해서는 최신 프로그램을 통해 한 곳에서 손바닥 들여다보듯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것인데, 현재 이 시스템은Washington, D.C와 Atlanta주를 비롯한 아주 소수의 경찰청만이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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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곳에 살아서 마음 놓이는 주일 아침이면 좋겠는데 클릭 몇번하니 이어지는 기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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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우리 군내(New Castle County)이자 델라웨어주 행정수도인 Dover에서 11명의 갱단을 체포했답는 소식입니다. 모두 20대 남녀로 구성된 갱단이라는데요. 그들을 체포할 당시 압수한 물품들을 보니 겁이 덜컹합니다. 각종 마약류는 그렇다치더라도 그들이 들고 있었던 무기들을 보니 ISIS보다 더 무서운 무기들이 널린 사회를 안전하다고만 해야할는지…

AP 통신이 서울발로 전하는 뉴스 “죽은 남한의 국가정보원 민간인 감시 없었다는 유서 남겨…”(Dead S. Korean agent left note denying spying on civilians) 기사에 짧은 시간에 많은 댓글들이 달려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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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추천을 많이 받았거나 제 눈에 뜨인 것들 몇 개 소개합니다.

“어떤 국가나 정부이건 단 두가지 뿐 – 바로 돈과 권력”

 “미국을 포함한(모든 곳에서) 누구나 누군가를 감시하며 사는 세상”

 “자살? 그걸 믿으라고?”

 “한국인은 일본인과 같어. 자기 조직을 살리기 위해 사무라이 방법을 택한거야. 한국인은 좀 이상한 민족이야. 일본을 미워한다고 말하면서 일본인들처럼 행동할라고 하거든. 둘은 동족 아닐까?”

참 혼란스런 주일 아침입니다.

박래군을 생각함

오늘 한 사내가 오늘까지 살아온 삶과 그가 오늘 겪고 있는 모습을 읽으며 제 가슴 속에 커다란 돌멩이가 하나 달렸습니다.

사내의 이름 박래군입니다.  그는 지난 4월에 있었던 세월호 추모집회에서 불법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한국시간으로 어제 구속 수감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기사들을 훑어본 바에 따르면 이번이 열 두번 째 겪는 일인 듯합니다.

제가 세월호참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뉴스들을 찾아 읽고는 했지만 박래군이라는 이름이 낯설었던 까닭은 이른바 ‘운동’이나 ‘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월호 국민대책회의 공동위원장이자 4.16 연대 상임 운영위원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구속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현 대한민국 정권이 그들의 예정대로 세월호참사 마무리 작업 수순에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박래군이 누굴까?’하는 궁금증이 일었답니다. 그래 그와 관련된 뉴스들을 검색해 보았답니다.

우선 눈에 먼저 뜨인 것은 그가 지난 달 어느 야외집회에서 박근혜대통령을 향해 막말을 늘어놓았다는 기사였습니다.

지난 6월 22일자 TV 조선의 “뉴스특급 730”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세월호 대책위 “박근혜 마약?” 발언 파문>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세월호대책회의 박래군 공동운영위원장이 “청와대를 압수수색해 마약 했는지 안 했는지, 한 번 확인해봤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세월호 당일 ‘피부미용, 성형수술 등을 하느라고 보톡스 맞고 있던 것 아니냐. 보톡스 맞으면 당장 움직이지 못하니까 7시간 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하는 의혹도 있다”,  “청와대 곳곳을 다 뒤져서 마약이 있는지 없는지, 보톡스 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등등의 말을 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설혹 그런 의심과 밝히고 싶은  굴뚝 같은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그래도 대통령인데 좀 과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구속 사유에는  “괘씸죄”도 한 몫 했겠다는 생각이 더해졌답니다.

그냥 그쯤해서 “자기 과시형 운동권 사내”쯤으로 치부하고 그에 대한 관심을 끄려고 했었답니다. 그런데 그의 이력이 그에 대한 검색을 더하게 만들었답니다.

참으로 몹쓸 학연이나 지연이 그에 대한 관심의 끈을 잇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이력을 보니 저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가 적혀 있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졸업하던 그 해에 그는 입학을 했다고 합니다. 저에게 딱 10년 후배인 셈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민 보따리를 꾸리던 그 때 그는 본격적으로 운동을 업(?)으로 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제 관심은 급격히 높아졌답니다. 그래 낮일을 제끼고서 그에 대한 본격적인 검색에 들어갔답니다.

그리고 하루해를 접는 이 시간, 박래군 생각에 가슴에 돌덩어리 하나 메고 있습니다. 그 묵직한 아픔은 그가 살아온 지난 30년 세월 때문이 아니라 그가 어제 영어(囹圄)의 몸이 되면서 남긴 말에 그의 30년이 오롯이 녹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구속되더라도 416연대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 목표를 향해 변함없이 국민과 함께 행동 할 것”이라는 그의 말속에는 그가 30년 인권운동에 몸바쳐왔던 생각과 꿈과 희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박래군다음은 지난 2012년 11월에 한림 국제대학원 정치경영연구소에서 그와 대담한 내용들 가운데 발췌해 소개드리는 박래군의 생각들입니다. 당시 대담 제목은 “별 11개 단 이 사람, 인생 제2막에서 던진 돌직구”입니다.

그의 생각들을 곱씹으며 동시대를 가슴으로 안고 살아온 한 사내에게 빚진 마음으로 무거운 밤입니다.

“운동권 진영에서 가장 큰 문제가 정파적인 문제다. 이런 것들이 자꾸 운동을 왜곡시키고 대중들의 참여를 막고 그들의 자발성이 분출되는 것을 막는 것 같다. 정파가 종파화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식으로 가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역량을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라며 대중과 유리된 채 정파 이익 중심의 운동을 전개하는 운동권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나는 지금 인생의 제2막을 살고 있다. 소설가가 되려는 꿈을 갖고 대학에 들어가서 소설을 썼던 것까지가 제1막이다. 그다음은 원치 않는 운동권이 되어 운동을 사는 게 제2막이다. 2막을 60살까지 살려고 한다. 제3막의 삶은 1막에서 못 이룬 소설가의 꿈을 이루는 것이다.”

“운동을 하다 보면 내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거지 운동의 주체는 당사자들이 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의 성과도 그 사람들이 가져가는 게 맞고 패배도 그들의 질 수 있어야 한다.”

“인권운동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느 정파에 속해있기도 했는데 그게 참 별 볼일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 유가협에서 장례를 치르는데 NL열사면 내가 NL이 아니라고 해서 안 갈 것인가? 그렇지 않은 거다. 그 죽음 앞에서 내 입장에서 다르다고 하더라도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파적인 것을 내려놓자고 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보적 인권운동론을 주창하는 사람이다. 인권을 가지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청춘은 그런 중에서도 되게 더럽다.(웃음)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1학년 때는 학생운동 이런 것은 일절 무시하고 소설 쓰고 술만 마셨다.(웃음) 그때가 참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악마의 손길에 의해(웃음) 운동권이 되었고 그 뒤로는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 한 1년 동안 학생운동을 하다가 이제는 재밌게 운동하나 보다 하다가 강제징집을 당했고, 일주일 동안 서대문경찰서에서 두들겨 맞고 그날로 강원도 양구에 있는 훈련소 가서 또 두들겨 맞았다. 맷집이 약했으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웃음)”

“프랑스 철학자 자끄 랑시에르가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 소수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 진짜 정치지 주류가 하는 것은 지배’라고 얘기를 했는데 참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진짜 정치란 누군가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갈등들을 조절하고 자기 권리를 못 찾고 있는 사람들로 주체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하는 인권운동은 아주 훌륭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런 훌륭한 정치를 30년 이상 해온 것이니까 정치에 미련이 있겠는가.(웃음)”

“1998년 ‘양지마을 사건’이라고 큰 이슈가 되었던 일이 있었다. 충남 연기군에 한 부랑인 수용시설이 있었는데 진짜 감옥보다 더한 비참한 곳이었다. 거기에서 탈출했던 어떤 한 사람의 얘기를 듣고 일주일 동안 조사를 해서 당시 국민회의 이성재 의원과 몇몇 단체와 함께 그곳에 쳐들어가 거기에 갇혀 있었던 300여 명이 되는 사람들을 전부 해방시켰다. 그 사건이 터지고 언론에는 ‘노예의 섬’이라고 해서 기사화되었고 우리는 거기서 나온 사람들을 위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대행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상당수가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사회복지시설은 죽어도 가기 싫다고 해서 더 이상 손 쓸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나중에 수소문 해보면 이들 대부분은 노숙인이 되어버리거나 죽어 있었다. 이 일을 겪으면서 ‘과연 무엇이 잘못됐나’ 고민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대행해서 언론에 폭로도 하고 소송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옆에서 돕고 그들이 스스로 이 문제를 풀도록 했으면 그 사람들이 이후 노숙자가 되고 알콜중독자가 되어 거리에서 죽어가는 일이 없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을 했다. 인권센터를 통해 대리하는 운동이 아니라, 피해자가 스스로 주체로 서게 하는 인권운동과 사람들이 차분히 인권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자기의 권리를 찾아가는 길을 밟아갈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의 모델을 만들어 가고 싶다.”

“독재 정권 때는 억울하다는 생각조차도 못 했었고, 조금 상황이 나아졌을 때는 억울하지만 어떻게 해볼 수 없으니까 그냥 지나쳤던 것이 지금은 사람들의 의식이 좀 높아져서 자신이 인권을 침해당한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소송까지 가는 경우들이 꽤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굉장히 이기적으로 수용되어 있다.

‘이기적으로 수용되어 있다’는 말은…

‘내 인권피해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인권침해를 당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그것을 굳이 뛰어들어서 휘말려? 송사에 휘말릴 수도 있는데?’ 하면서 문제제기를 안 한다는 거다. 이렇듯 인권문제가 철저하게 개인화 되어 있고 이기적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운동진영에도 존재한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매일 욕하는 것이 ‘평소에는 남의 인권에 대해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너네 해고당하면 인권운동 찾느냐?’라는 것이다. 인권운동이라는 것은 일종의 ‘품앗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소에 정말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공감하고 같이 싸울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특히 IMF 이후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던 연대의 가치들이 철저하게 깨져 나갔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진보운동이 엄청난 패배를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1위고 범죄율도 엄청나게 높아지고 있지 않나. 사람들이 옆에서 죽어나가는 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있다. 내 일이 아니기도 하고, 이런 일들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웃음)”

박래군  – 그의 말처럼 이제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 목표를 향해 변함없”는 길을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박래군을 생각하며…

묻는 이들에게 길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게 마련이다. (Those who do 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 미국의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가 한 말입니다.

또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씀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나아가 선생은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라는 교훈으로 늘 역사에게 오늘을 묻고 내일을 설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E. H. Carr(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가 과거의 어떠한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선택할 때 존재할 수 있다.”라고 명징한 대답을 내민 바 있습니다.

저는 이즈음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과 역사공부를 함께 하려고 시간을 좀 내고 있습니다. 조금 뜬금없는 일이기도 합니다만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다.

4-16a세월호참사 일주기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결성된  4.16연대가 ‘이젠 인권을 이야기 할 때’라며 제안한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뉴스에서 이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바로 “뜬금없이 이게 뭐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사람 살아가는 모든 모습들을 다 담아낼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그릇에 “세월호”를 주어담는다는 게 적절한 것인가?라는 스스로의 물음 때문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호”라는 말조차 피로감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즈음에 이런 접근이 과연 옳은 것일까?라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이런 물음을 들고 성서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성서가 제가 준 응답은 에스겔(에제키엘) 34장에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목자들에게 그들을 쳐서 이르는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망하리라.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 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구워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입은 것은 싸매 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 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만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 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 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내가 맹세한다. 나의 양떼는 마구 잡혀 갔고, 나의 양떼는 목자가 없어서 들짐승에게 찢겼다. 그런데도 내가 세운 목자들은 나의 양떼를 찾아 다니지 않았다. 제 배만 불리고 양떼는 먹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주 야훼가 말한다. 목자라는 것들은 나의 눈밖에 났다. 나는 목자라는 것들을 해고시키고 내 양떼를 그 손에서 찾아 내리라. 그들이 다시는 목자로서 내 양떼를 기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떼를 그들의 입에서 빼내어 잡아 먹히지 않게 하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 보고 내가 돌보리라.’> – 에스겔 34 : 1 – 11, 공동번역

바로 “존엄과 안전 지대에서 내 팽개쳐져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위로이자, 그렇게 “사람들을 내 팽개친 권력자들”에 대한 응징의 소리였습니다. 나아가 신의 직접통치를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본 응답이었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 살아온 모습 곧 역사에 묻기로 한 것입니다.

혼자 역사 앞에 서서 묻기보다는 여럿이 함께하는 일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평소 뜻이 엇비슷한 이들과 함께 나선 일입니다.

어디까지가서 어떤 응답을 얻을런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행여 헛수고가 되도라도 뜻을 새길 수는 잇겠다는 생각입니다.

‘인권’이라는 큰 그릇 속에서 지금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세월호에 얽힌 피맺히고 한맺힌 소리들이지만 언젠가 그 그릇을 꽉 채워 세상을 향한 큰 울림이 되는 날을 그리며 역사에 묻고자하는 것입니다.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함이요, 미래를 열기 위함이요, 세월호를 역사적 사실로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가고시마(鹿兒島)로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5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가고시마(鹿兒島)로

경찰서에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탄광으로 돌아간 나는 또 갱 안에 들어가 전과 같이 막장에서 석탄 가루를 마시며 석탄덩이를 운반차에 싣는 일를 했다. 그런 생활을 얼마동안 또 하게 되었는데, 더 견딜 수가 없었다.

탈출할 궁리를 하면서 얼마쯤 지내다가 또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오사카에서 일본 경찰에게 불심검문(不審檢問)을 받았던 경험도 있고 하여, 신변안전에 경계를 하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다. 그러던 중, 내가 찾아간 곳은 구마모도(熊本)지방에서 토목공사업을 하고 있는 하시모도(橋本)라는 조선사람의 집이었다.

당시 그는 조선인 노무자를 데리고 군용비행장 확장공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노무자들과 함께 그 집에서 숙식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앞에 오사카 이야기에도 적었듯이, 당시 일본에서도 식량과 옷 등 일상생활용품의 거래가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군수품(軍需品)을 다루거나 군사용(軍事用) 시설을 만드는 곳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편이었다.

내가 머물고 있던 집 주인은 가끔 노무자들에게 막걸리잔치도 베풀었는 데, 그럴 때 누군가 아리랑이나 타향살이 등 향수에 젖은 노래를 선창 하면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도 함께 불렀다.

그곳엔 나처럼 막연한 기대를 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도 있었고, 고향에 부모처자를 두고 징용으로 갔다가 그곳으로 옮긴 사람 등, 일본으로 가게 된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지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얼마쯤 지내다 가고시마(鹿兒島)로 갔다.

내가 보통학교(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장 겸 담임선생이었던 일본사람인 사토나카 죠기찌(里中長吉) 선생의 고향이 가고시마(鹿兒島)라고 했다. 사토나카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나는 가끔 가고시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왕에 일본까지 온 것이니, 구경이나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그곳까지 가게 되었다.

가고시마(鹿兒島)에는 화산(火山)이 있다. 내가 간 곳은 사꾸라지마 화산(櫻島火山) 남쪽 해안에 있는 다루미즈 (垂水)라는 곳이다. 사꾸라지마 화산은 오늘날에도 화산활동(火山活動)이 진행 중이다. 그 화산은 하루에도 몇번씩 분화(噴火)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활화산 (活火山)이다.   그리고, 가고시마의 상징(象徵)으로 되어 있다.

<2015년 5월 26일에 있었던 사쿠라지마(櫻島) 화산 폭발 영상>

따라서 많은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한데, 내가 다루미즈에서 지내던 때엔 사정이 달랐다. 나는 그러한 화산 근처에서 한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내가 구마모도(熊本)지방에서 지내다가 그곳을 떠나 가고시마(鹿兒島) 현에 있는 다루미즈(垂水)에 갔을 때, 그곳엔 하다데구미(旗手組)라는 토목건설회사에서 일본군의 군용시설인 땅굴을 만드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기서 버틸 수 있었다.  그 공사장에서 일하는 일본인 부녀자(婦女子)들도 꽤 있었다.

하여간, 그 전쟁 때문이 수많은 사람들이 시달림을 받았고, 결국은  일본의 패전(敗戰)으로 그 전쟁이 끝나게 되었는데, 그 부분에 관한 것은 앞에 이미 적었기 때문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온천의 나라 일본  

이번에는 일본 온천에 관한 이야기 몇 가지를 적어보려고 한다.  일본으로 가기전부터 그곳에 온천이 많다라는 것을 알고 있긴 해지만, 그곳에 가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지내보니 과연 <일본은 온천의 나라다.>”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데 온천이 많은 것뿐만 아니고, 일본 사람들은 혼욕(混浴)이라는 기괴망측(奇怪罔測)한 풍속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일본인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하여간 일본 땅에 그러한 괴상한 풍속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오사카에서 지낼 때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규슈(九州)지방 에는 그런 풍속이 있었다.

우선, 일본엔 왜 온천이 많은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지구과학사전에‘환태평양 지진대(環太平洋地震帶, Circum-Pacific Seismic Zone)’이라는 지리학 용어(地理學用語)가 있다.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태평양을 들러싼, 세계에서 지진 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진대로서 화산대(火山帶)와 지진대가 겹쳐 있고, 습곡산맥 (褶曲山脈, 참조 보기 1.)이 발달하고 호상열도(弧狀列島, 참조 보기2.) 가 분포되어 있는 지대다.

보기 1 : 지각(地殼)에 작용하는 횡압력(橫壓力)으로 인하여 지층이 물결모양으로 주름지어 이루어진 산맥.

보기 2 : 활등처럼 굽은 모양으로 죽 늘어서 있는 섬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화산 지대에 속해 있는 일본열도(日本列島)는 화산이 많고, 따라서 온천도 많다.

일본열도는 北海道, 本州, 四國, 九州 등의 큰 섬과 3,500여개의 작은 섬으로 되어 있는데, 규슈(九州) 남부지방인 가고시마(鹿兒島)에도 화산과 온천이 있다. 그곳엔 활화산(活火山)인 사쿠라지마(櫻島)화산과 기리시마(霧島) 화산이 있다.

일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온천에 관한 이야기를 적기 위해 화산 이야기를 늘어 놓았는데, 일본 온천 이야기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미 앞에 적은대로 그곳엔‘혼욕(混浴)’이라는 별스러운 풍속(風俗)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混浴’이라는 글자가 말해주듯이 섞여서 목욕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남녀가 같은 욕탕에서 목욕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그것도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옷을 훌렁 벗은채 나체로  함께 같은 탕에 들어가다니?

하지만, 그 땅에 그런 별난 풍습(風習)이 있게 된 데에는 그곳의 풍토 (風土)와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민속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들의 풍속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랴?

한데,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 곳에서 자란 사람이 <남녀가 같은 욕탕(浴湯)에 몸을 담그는> 그러한 풍속이 있는 나라에 가서 <혼욕>이라는 것을 처음 대했을 때, 그것은 기절초풍  할 정도로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에서 자란 사람인 내가 어찌하다가 그런 망측스러운 행동을 스스럼 없이 하는 사람들 속에 섞인 적이 있었다.

요즘에도 그런 풍속이 그 땅에 남아있는지?

하여간, 일본은 온천이 많은 나라다.

세월호 – 다시 성서에게 묻는다

예수는 그의 짧았던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야기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그가 말한 이야기만 남겼던 것이 아니라 일(행위)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모습을 실천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그가 행했던 여러 기적들과 치유 행위들 그리고 용서의 행위들이 바로 그런 일들입니다.

예수는 눈먼 자의 눈을 뜨게하고, 귀먼 자의 귀를 열어주었습니다. 누워 자리보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곧 죽어가는 이를 일으켜 세웠고, 죄(간음)로 인해 사람들의 돌팔매에 맞아죽울 지경에 처한 여인을 용서하며 살리기도 했습니다.

성서는 이러한 예수의 일하심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끝내 침묵하고 우리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성서가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침묵한 것들입니다.

눈과 귀가 멀고, 병으로 고통받거나 심지어  자신의 행위로 인해 죽음 앞에 놓인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용서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 아픔과 고통들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는 거기에 담긴 신의 뜻이 무엇인지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설명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러한 아픔과 고통과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 대해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어떤 평가에 대해서도 일체 묵언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병고침이나 기적 또는 용서의 행위를 내렸던 사람들은 모두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 죄인들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격리, 소외되어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좀 더 거센 표현을 하자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는 마치 짐승이나 물건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 이쯤에서 이야기를 멈추고 한가지 정리를 합니다.

4-16예수 이야기와 얽혔던 사람들 모두 지금은 없습니다. 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때” 다 죽었습니다. 긴 역사의 눈으로 보면 병을 고쳐서 좀 더 살았든, 돌팔매에 맞아 죽는 일을 피해 좀 더 살았든, 아니면 그 당시에 배 두드리며 떵떵 거리며 살았든 모두 찰라를 살다 죽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기적과 용서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사람이 겪는 아픔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아픔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아픔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또는 소수의 사람들이) 사람들(또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왕따돌림을 당해 소외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수의 일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삶이란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회”를 기적으로 치유로 용서로 “사람이 사람답게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라고 성서는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천년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제 고작 일년이 갓 지난 세월호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이 <인권>을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명해야만 할 성서적 물음입니다.

4.16 연대 바로가기

돌아가라! – 엘리야 이야기

성서 우리들의 이야기 -13

남북으로 왕국이 갈리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임금이 된 여로보암의 죄는 성소에 야훼 제단을 쌓고 거기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일에서 시작됩니다. 여로보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남왕국 유대와 달라야 한다는 신생국가로써 내세워야 할 국가적 모델이 필요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똑같은 야훼를 섬기지만 남왕국 예루살렘과 다른 형태의 제사 방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죄를 쌓게 된 배경입니다.

여로보암 이후의 왕들인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때까지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런 모습에서 크게 엇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아합왕 때에 이르러 야훼는 철저히 버려지고  이세벨의 신인 바알이 나라의 신으로 섬겨지게 됩니다.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 사당이 들어선 것입니다. 또한 아세라신의 목상도 만들어 세워 섬겼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가 갑자기 등장하게 된 것이고, 갈멜산에서 일 대 850 싸움까지 겪게되고 바알신을 섬기던 예언자들을 모두 죽이는 일대 숙청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 뒷심은 바로 야훼만이 하나님이라는 백성들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 이후 목숨줄 연명하고자 도망친 쪽은 아합왕이 아니고 엘리야였습니다.

왜? 승자가 도망을 가야했을까요?

초복(初伏)과 감사

내일이 초복이랍니다. 여름 한철 복더위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제가 사는 델라웨어 날씨는 얼추 서울과 비슷하답니다.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덥고 봄, 가을은 짧고, 바다가 가까워서 여름철 습도도 높은 편이랍니다.

이즈음은 찌는 날씨의 연속이랍니다.

cats그래도 복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가을이 이미 오기 시작했다는 전주이기도 합니다. 초복은 하지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미 낮은 밤에게 쫓기기 시작했다는 말이고요, 말복이 지나면 입추이니 여름의 기승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해마다 이맘 때쯤이면 몸보신용 음식들을 챙기는 오랜 관습들이 있지요. 삼계탕에서 시작해서 보신탕에 이르기까지 사람에 따라 기호에 맞는 여름 보양식들을 찾기 마련인 때입니다.

제가 사는 곳에도 사람들이 이맘때면 즐겨찾는 음식이 있답니다. 바로Maryland Crabs 또는Blue Crabs이라고 부르는 게찜요리랍니다.

요리방법이라야 별게 없답니다. 살아 꿈틀거리는 게들을 찜판에 올리고 그 위에old bay seasoning이라는 양념을 듬북 뿌려 찜통에 쪄낸 것입니다.

마침 모처럼 아들 딸과 함께 식사를 나눌 시간이 있어(이젠 아이들이 큰 맘 먹고 동시에 이렇게 시간을 내어 주는 일은 매우 드물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게찜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답니다.

또 한해의 복날들을 건강하게 보내시는 아버님과 어머니께서 저희 부부와 아이들에게 주신 말씀이랍니다.

“그저 감사하며 살아라.”

일본 탄광으로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4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현해탄을 건너서 광부가 되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어느 봄날, 부산항 부두.

한 무리의 조선 청년들이 부둣가 한쪽에 몰려 있다.   그들은 일본 시모노세키로 가는 연락선에 오르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나도 그 일행에 섞여 인솔자들(일본인)과 함께 배에 올랐다.  부산을 떠난 배는 다음 날 아침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일본 땅에 배가 닿자 그 동안 싹싹하고 부드럽던 인솔자들의 말투가 갑자기 거칠어지고, 그들의 태도가 위압적으로 돌변했다.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그대로 탄광까지 따라 갔다.   일행이 닿은 곳은 후쿠오까(福岡) 지방에 있는 한 탄광촌이었다. 그곳까지 간 조선사람들은 숙소 겸 식당인 <함바(飯場)>라는 허름한 목조건물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광산측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나는 작업에 필요한 교육을 받은 다음 탄광 광부가 되어 막장에서 석탄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광부생활이 나로서는 아주 힘겨운 일이었다.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갱(坑) 안에 있는 동안 석탄가루가 섞인 탁한 공기 속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하고, 감시원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방법과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를 궁리하면서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그렇게 지내던 중, 어느날 밤에 어둠이 짙은 야음을 틈타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있게 되었다.

japan

오사카

탄광에서 빠져나온 나는 오사카(大阪)로 갔다.
그 당시 일본은 군대의 인원보충뿐만 아니라, 전쟁하는데 드는 군수 물자 생산과 군사기지건설에 필요한 노동력 공급을 위해 조선사람들을 많이 데려갔다.

한데, 같은 일본 땅 안에서도 내가 지내던 그 탄광처럼 특정한 지역 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노무자들을 감시하는 곳도 있었고, 그런 제한을 받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곳도 있었다.

오사카가 그런 곳이었다.  당시 오사카에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나는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오사카까지 갔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큐슈(九州)와 혼슈(本州)를 연결하는 해저(海底)터널을 통과해야 되고, 당시 일본 해군의 거점인 구레(吳) 요새지(要塞地)를 지나가야 되기 때문이었다.  기차가 구레(吳)를 지나갈 때는 승객(乘客)들이 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모든 차창(車窓)을 가리고 지나갔다.

하여간 나는 오사카에 도달했다. 앞에 설명했듯이 오사카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숙소와 일자리를 쉽게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오사카에서 지내는 동안, 시우쇠를 불려 강철을 만드는 제강소에서 일했다. 용광로에서 나온 쇠 찌꺼기가 식은 다음, 그것을 떼어 밖으로 운반해 내는 그런 일이었다. 힘드는 일이긴 했지만 탄광보다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내고 있던 중 어느날 나는 혼자서 길을 걷고 있었는데, 한 경찰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린 것이다. 피할 길이 없었다.  경찰서로 끌려간 나는 그들의 심문을 받았다.

이유는 내가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서 경찰서 유치장 생활을 했는데, 본적지 확인과 일본으로 가게 된 경위 등에 관한 조사를 받으면서 한 주일가량을 그렇게 갇혀 지냈다.

내가 갇혀 있던 방엔 일본인도 몇 사람 있었는데, 그들은 대개 식량을 암거래하다 붙잡힌 사람들이었다. 당시 일본은 전쟁 때문에 노동력만 부족했던 것이 아니고, 식량과 옷 등 일상생활용품의 거래가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조선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경찰서 유치장 생활도 해보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중, 나는 조사실로 불려갔다. 탄광에서 사람이 와있었다.

탄광에 있을 때, 내가 지내던 함바(飯場)집 주인이 나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나는 그 사람에게 넘겨졌고, 그와 함께 후쿠오카 탄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델라웨어 사람들을 위한 에모지(이모티콘)

제가 사는 델라웨어 지방 소식지인 News Journal에 재미있는 기사가 있어 소개드립니다.
B9317996251Z.1_20150709151305_000_GM0BA7K6M.1-0휴대전화 문자메시지(SMS)나 이메일에 ‘이모티콘(emoticon)’ 대신 얼굴 표정이나 사물을 단순화한 아이콘인 ‘에모지'(emoji)라는 것이 있지요.

델라웨어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에모지를 만든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하는 물음과 함께 글쓴이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것들을 소개하는 기사랍니다.

델라웨어라는 지역 특성 및 지역 사람들의 특질을 잘 나타내는 상징을 꼽아보자는 것이지요.

글쓴이가 델라웨어 사람들에게 필요한 에모지로 꼽은 내용들이랍니다.

  1. old bayOld Bay – 빨강 파랑 노랑색을 주조로 한 양념통에 담긴 양념 이름입니다. Delmarva(델라웨어, 매릴랜드, 버지니아) 지역 사람들이 즐겨 먹는 것이지요. 주로 해산물(게, 새우 등등) 요리에 사용한답니다. 제 여름 보양식인 게찜에 많이 들어가는 양념입니다.

biden2. Joe Biden – 델라웨어가 낳은 인물이지요. 현 미국 부통령입니다.

 

lifeguard3. Lifeguard – 바다가 감싸고 있는 지역 특성과 여름철을 감안해 꼽은 듯. 물놀이에 필수적인 안전요원과 안전을 강조한 것이지요.

shopping bag4. Sopping bag – 델라웨어주는 판매세가 없는 곳이랍니다. 그래 tax-free shopping을 강조한 것이지요.

seagal5. Seagull – 역시 바다로 쌓인 특성상 흔히 볼 수 있는 꼽은 갈매기입니다. 제 가게가 있는 쇼핑센터도 종종 갈매기 떼들이 몰려와 주차지역을 덮곤 한답니다.

scrapple-header-ll6. Scrapple – 델라웨어 사람들의 흔한 아침메뉴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크래플은 잘게 썬 돼지고기, 야채, 옥수수 가루로 만든 튀김 요리랍니다. 냉동 식품으로 판답니다. 물론 저는 안 먹지요. 차라리 콩나물 넣은 라면을 먹지요.

imagesC7SXMPX87. Marijuana leaf – 델라웨어가 마리화나 애용자들에게는 천국이 될 듯합니다. 약용으로  쓰는 것은 물론이고, 오는 12월부터는 개인당 1온스의 마리화나를 소지하거나 사용하는 게 합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귀 솔깃 하신 분 있으려나?

bluehen8. Blue Hen – 델라웨어주의 상징 동물이자  University of Delaware 스포츠 팀들의 상징이랍니다.  Go! Blue Hen! 아주 흔한 스티커랍니다

capture-20150709-1739209. States – 워낙 주의 크기가 작다보니 조금만 달리면 이웃한 펜실바니아, 뉴저지, 메릴랜드가 된답니다.  때론 미국인들도 모르는 주이기도 하답니다 델라웨어를 크게해서 알리는 에모지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horsecrabs10. Horseshoe crabs – 이거 되게 징그러운데 델라웨어 해변가에 널려있답니다. 자그마치  기원이450 million years ago(4억 5천만 년 전)으로 올라가는 바다생물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