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자들에게는 천국이 없다?

제가 사는 곳에서 남쪽으로 약 90마일 떨어진 곳에  Rehoboth Beach라는 델라웨어주에서는 유명한 해변 도시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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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 All Saints Episcopal Church라는 성공회 교회당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일어난 일이 오늘 뉴스화 되었답니다.

사건인즉은 예배에 참석한 이들이 세워둔 차량들에 혐오 광고물들이 꽂혀 있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예배 참석자들의 차량에 꽂아놓은 세쪽 짜리 광고물은 이런 제목으로 시작되었답니다. “동성애자들을 위한 천국은 없다.( No heaven for homos)”라고 말입니다.

이 사건 수사에 나선 경찰의 공식적인 입장은 혐오범죄는 아니고 불법 부착 광고물 유포 혐의로 벌금형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당 교회 입장은 이것과 판이합니다.

이 교회 교구목사인 Max J. Wolf목사는 “비록 경찰이 그렇게 이야기할지라도, 이러한 행위는 우리 교인들을 향한 명백한 혐오 범죄이고 매우 심각한 일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된 까닭은 이 성공회당은 레스비안,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 모두에게 신은 평등하다며 교회문을 활짝열었기 때문이랍니다.

솔직히 제 개인적인 느낌으로 레스비안,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라고 하면 불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따금 제 가게 손님들 가운데 노골적으로 그런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분들도 있고, 그렇게 보이는 분들도 더러 있답니다.

그네들을 바라보는 제 시각은 “참 다르다.”, “왜 저렇게 되었을까?”하는 것일 뿐 그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더더우기나 성서적인 신이 그들을 차별한다는 발상은 제도화된 교회의 자기방어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

제가 아직은 무교회주의자가 아니라 교회를 존중하는 예수쟁이로 남아있는 까닭은 All Saints Episcopal Church같은 교회가 곳곳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 그 씁쓸함

세월호의 아픔을 잊지 않고, 여전히 아파하는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며, 오늘 여기에서 세월호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빌어 보자는 마음으로 함께 모여 꾸준히 의견을 나누는 작은 모임이 있습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인근에 사는 뜻맞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는 그 모임의 이름을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약칭, 필라 세사모)이라고 부른답니다.

그 중 몇 사람들이 매주 한차례 온라인에서 만나 “인권”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기 시작한 지 한달이 지났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인권문제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까닭을 찾아보고자 시작한 토론모임입니다.

매주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대한 발제가 있은 후 자유토론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한시간 남짓으로 시작한 모임이  이젠 2시간 30분 동안 이어지는 모임으로 뜨거워졌답니다.

지난 시간 동안 ‘인권이란 무엇인가?’, ‘왜 인권을 말하는가?’, ‘유럽 인권사’, ‘동양 인권사’, ‘미국 인권사’ 등을 두루 훑어 보았고 이제 ‘한국 인권사’로 넘어가고 있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발제자들이 열성적으로 준비하고 있어서 새로 배우고 느끼는 것들이 참 많답니다.

지난 주에는 미국인권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상당 시간을 미국내 인권보호 증진에 크게 기여한 미 연방대법원의 중요한 인권판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그리고 이민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재미 한인동포들의 인권문제에 대한 이야기들도 제법 심도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미연방대법원이 때론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의 의도와 어긋나는 판결도 하고 (아이젠하위 대통령과 워렌 대법원장), 국민감정에 반대되는 판결도 소신 있게 내놓기(아히만 판결-성조기보호법 위헌 판결) 도 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소수자 보호라는 큰 논리가 있었고, 그 논리를 지탱해 주는 기반에는 시민들의  지지가 있었다는 사실도 이야기했답니다.

최근에 있었던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은 바로 이런  소수자 보호라는 논리에 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판결을 내린 미 연방대법원 법관 가운데 한 사람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82)대법관이  이 주 초에 한국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녀의 방한 일정 중에는 한국내 1호 동성 부부인 김조광수(영화감독)·김승환(영화사 대표) 부부와 트렌스젠더 연예인 하리수씨 그리고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등 국내 대표적인 성 소수자들과 만찬 간담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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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성소수자들과 미국 연방대법관의 만남 방한중인 미국 연방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운데)가 4일 저녁 서울 용산미군기지에서 성소수자인 김조광수-김승환 부부와 하리수,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을 만나 만찬을 했다. 만찬을 마친 김조광수 감독과 임태훈 소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진과 만찬 내용을 공개했다. – 출처 오마이뉴스

이런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82)대법관의  방한 행보에 발끈한 곳은 한국 기독교계였다고 합니다.

<38개 교단 협의체인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양병희 목사)은 지난  5일 <미국 긴즈버그 대법관의 방한 행보에 우려한다>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고, “그가 한국에 와서까지 동성결혼 합법화를 주장하며 소송 중인 김조광수-김승환씨를 만나고 트랜스젠더를 초청해 격려하는 등의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은 한국의 법질서와 윤리가치에 혼란을 줄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이므로 삼가야 한다”고 비판했다.>고 오마이뉴스는 전하고 있었답니다.

또한 이 기사에 따르면

<한국교회언론회(대표 유만석 목사) 역시 이날 <미국은 한국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방종과 타락의 성문화를 강요하는가?>라는 논평을 통해, ‘긴즈버그 미 대법관은 동성애 전도사인가?’라며 “노골적인 성소수자 지지활동과 법조인들에 대한 소수자 보호 인권운동 강연은 법관들의 성윤리 의식마저 왜곡시키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교회언론회는 “미국이 우리의 우방국가요, 혈맹이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가치와 문화가 있고, 공유할 수 없는 문화와 가치도 있다”며, “긴즈버그 대법관에게 충고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이유로도 동성애 조장 확산과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한 강연을 중지해주기 바란다. 미국의 타락한 가치를 대한민국에 강요하지 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고도 합니다.

요약하자면 이들의 주장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한국의 성소수자를 만난 것은 “한국의 법질서와 윤리가치에 혼란을 줄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이요 “방종과 타락의 성문화를 강요”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딱히 그들의 언사가 조목조목 따질 가치는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오늘날 한(인)국사회의 ‘ 법질서와 윤리’는 무엇인지?”, “’방종과 타락의 성문화’가 만연한 곳은 과연 어디인지?”를 따져 묻는 일과, 한국교회가 과연 그러한 질문을 던질만한 수준에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법이 있기 전에 삶이 있었고, 그 삶에는 하나님의 뜻이 먼저 있었다”는 성서적 가르침과는 너무나 먼 곳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구약성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저 유명한 예수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 2: 27)”라는 선언은 바로 사람살이의 삶을 보호하는 가치가 최우선이라는외침입니다.

이때 보호할 가치가 있는 삶이란 약한 자, 가난한 자, 소수자의 몫이라고 성서는 단언하고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런 자명한 성서의 선언에 얼마나 부합된 모습으로 신앞에 서 있는지 먼저 물어야 할 것입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방한 행보에 발끈했다는 한국 기독교계의 대응을 보면서 한국교회의 비성서적 모습을 또 다시 확인한 듯하여  씁쓸하답니다.

사탄(마귀)에 대하여

한국 뉴스들은 한 일주일만 보지 않으면 그 일주일 사이 전혀 딴 이야기들로 바뀌여집니다. 일주일 전 즈음에 세상 뒤바뀔 것 같은 뉴스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채 늘 새로운 놀랄거리들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

국정원의 해킹, 박근령의 망언, 김무성이 미국에 와서 떤 주접들만 하여도 이게 일주일 사이에 감추어 질만한 뉴스거리들이 아니건만 어느새 숨어 버린 느낌입니다.

박근령 부부의 또라이 짓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접기로 하더라도,  국정원의 해킹 사건과 김무성의 주접질은 한국내 한인들 및 재외 한인 동포들의 미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정원 해킹 사건을 들여다 보노라면 ”devilangel1004”라는 국정원 요원의 아이디가 눈에 뜨입니다.

국정원의 해명에 따르면 이 아이디는 죽은 임아무개 국정원 직원의 것이라고 하지만, 이 시각 현재까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추적하는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국정원내 해킹관련 업무 종사자 다수가 사용했던 아이디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국정원이라는 집단 아이디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 이름이 아주 독특합니다. “마귀(devil)천사(angel)천사(1004)”라는 이름에 대한 느낌 말입니다. 마귀면 마귀고 천사이지 마귀천사는 뭐며, 천사를 두번 강조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제가 의과적 상식이 전무해서 모를 일이지만 일종의 정신분열적 증상을 엿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기 정체성의 상실이지요. “내가 하는 짓은 마귀 짓일지라도, 나의 진짜 정체는 천사”라는 말도 안되는 자기 정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마귀(devil)니 천사(angel)니 하는 이름들이 자주 나오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성서입니다.

성서의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장면은  아주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4장 1-10절에 있는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The Holy Spirit led Jesus into the desert, so that the devil could test him.)>

예수가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데 그 일은 성령(The Holy Spirit)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마가복음 8장 33절에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제 곧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임을 미리 고지하자 “죽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항변하는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또한 요한복음 6장 70절에는 예수가 그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 곧 가롯유다가 자기를 로마에 팔아넘길 것이라는 예고를 하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위에서 든 세가지 예를 다시 살펴보면 마귀와 사탄은 어떤 제삼의 실체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바로 사람이 마귀이고 사탄입니다.

예수를 마귀에게 끌고 갔던 성령이 움직었던 곳은 바로 예수의 마음 속이었습니다. 예수가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명명한 까닭은 바로 베드로의 생각이었습니다. 가롯유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라는 실체가 바로 마귀였습니다.

적어도 예수 이야기에 나오는 사탄과 마귀의 실체는 사람의 마음이요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성서 이야기를 보면 마귀의 우두머리가 사탄입니다. 사탄의 그리스 어원은 동사인 ‘반대한다’, ‘분열시키다’의 명사형이라고 합니다.

바로 사람과 사람사이, 신과 사람사이를 이간질하고, 분열 시키는 마음, 생각, 또는 사람들의 행태가 사탄이라는 말입니다.

해킹(hacking)이란 남의 것을 몰래 들여다보는 행위요, 도둑질입니다. 이 일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은 불신이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일입니다. 바로 사탄 마귀의 일입니다. 그래 devil이라는 이름은 적절한 것인데 뒤에 천사, 천사를 갖다 붙인 것으로 보아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회의는 있었던 듯한 측은함도 묻어납니다.

x9788991799684그런데 김무성에 이르면 악질입니다. 악질 마귀입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진보 좌파의 준동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 “새누리당이 진보 좌파가 준동 못 하도록 노력하겠다”

제 욕심 하나 차리겠다고 사람들을 이간질하여 나라를 절단내고, 국민들을 가르는 말들을 서슴치 않는 것입니다. 그런 김무성이 다음 대통령 선호도 1위라는 기사를 보고 있노라면 사탄 전성시대라는 암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답니다.

그러나 사탄이니 마귀니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직 끝나지 않은 성서 이야기는 ‘사탄 전성시대 같은 갈릴리”로 예수가 먼저 가 있겠다는 약속으로 희망을 준답니다.

8.15 단상(斷想) 1 – 애국자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8.15 단상(斷想) 1 – 애국자

일제 강점기 때, 특히 태평양전쟁 당시엔 일제의 억압을 당할대로 당했고 굶주릴대로 굶주리면서 살아온 조선사람들이 8,15와 함께 그러한 굴욕(屈辱)의 멍에를 벗어나게 되었다. 어떤 형태로던지 일본에 협력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웠고, 쇠사슬에 묶겨있던 것과 같은 상태였었는데,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들이 된 것이다.

한데, 그 ‘자유’라는 말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눈앞에 닥쳐온 천지개벽(天地開闢)과도 같은 큰 변화의 앞뒤를 살펴볼만한 겨를도 없이 사회는 무질서하고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한 혼란과 무질서는 전쟁 때문에 억압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한국 사람들의 의식(衣食)생활에 바로 나타나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 전쟁이 끝난 다음 그 땅 곳곳에는 새로운 풍조(風潮)가 생긴 것인데, <우선 닥치는 대로 먹고 마시자는 사람들이 많았다.>  라는 사실이다.

일본이 그 전쟁에서 패전국이 되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생활 필수품은 배급제로 되어 있었다. 식생활에 관한 것만 아니고, 몸에 걸치는 옷도 마음대로 사서 입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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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자유, 생각하는 자유, 눈으로 보는 자유도 제한되었고, 심한 구속을 당하면서 지냈다. 그러한 생활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방심(放心) 상태에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8.15 해방이 된 다음, 그렇게도 보기 힘들고 귀하던 물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쏟아져 나왔는지 고무신, 양은그릇, 광목, 쌀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많은 물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하여간 굶주렸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혼란과 무질서 중에 쏟어져 나온 물자는 어느새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되었다. 그러할 때에 한동안 식량을 배급한 적도 있었다.

한편, 해방이 된 다음 그 땅엔 애국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어떤 형태로던지 일본에 협력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어려웠던 때에 그렇게 많은 애국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일제가 시키는대로 일본을 위해 살아온 것을 <애국한 것이다.>라는 뜻으로 한 말인지는 모르나, 하여간 애국자 홍수(洪水)가 났다. 일본에 아첨하고 그들에게 빌붙어 살며, 별로 배곱프지 않게 지냈던  사람들도 “내가 바로 애국자였노라.”라고 하면서 거들먹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는 반대로,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일제에 대항 하여 항일운동(抗日運動)을 하면서 목숨을 잃는 등, 몸 바쳐 애쓰며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 당시의 국내외(國內外)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갈래의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가지만 적는다. 그러한 애국지사(愛國志士)들 중엔 ‘광복군(光復軍)’도 있었다.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고, 공식 명칭은 한국광복군이다.

1940년에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광복군의 초대 총사령관은 지청천(池靑天, 1888-1957)이고, 참모장은 이범석(李範奭, 1900-1972)이다.

다음에 적는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실린 광복군에 관한 것을 설명한 내용 중에서 한 부분을 뽑은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 를 설치하고 광복군 창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 지역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는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다니는 상황에서 여의치 않았다. 비로소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 정착하면 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여 “광복군은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광복군 창설을 천명하였다.

태평양전쟁 때엔 위에 적은 것과 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도 있었다.

광복군엔 일본군 학도병(學徒兵)으로 중국에 파병되었다가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이 된 사람도 있었는데, 장준하(張俊河)도 그러한 사람 이다.

그렇지만, 8.15와 함께 광복군이 환국(還國)하여 그 땅에 있던 일본군을 몰아서 밖으로 쫓아버린 것이 아니고,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의 힘에 의해 <8.15 광복>이 이뤄진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삼팔선 이남 땅에 미군들이 들어왔고 세상이 바뀌었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을 비롯해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에게 생소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러한 것 중에서 몇가지를 골라 요약해보기로 한다. – 다음 이야기로 계속

경찰들– 몸부착 카메라 장착

올들어 Ferguson, Missouri, Baltimore 등지에서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전국 각지의 경찰관들이 곤욕을 치루고 있지요. 비무장인 사람들을 향해 경찰관들이 과잉대응을 했다는 비난이 수그러들지 않는 가운데 제가 사는 델라웨어주 New Castle County (군,郡) 경찰들이 몸에 부착하는 카메라를 장착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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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Castle County Police Chief (뉴캐슬 군 경찰청장)인  Elmer M. Setting은 지난 주부터 시험적으로 8명의 경찰관들이 이런 몸에 부착하는 카메라를 달고 임무 수행을 했다고 발표했답니다.

또한 Gordon군청장은 “이 카메라들은 경찰관들이 임무수행하는데 있어 그 임무수행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투명성을 더해 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향후 대당 $1,000이  소요되는 이런 카메라는 전군(郡)은 물론 주(州)내 모든 시(市)와 주(州) 전체 경찰관들에게 확대하여 지급될 것이라고 합니다.

경찰관들에 대한 자기검열성 짙은 이런 카메라 부착 시행에 관한 뉴스에 달린 댓글들은 긍정과 부정적 시각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어쨋거나 위임받은 권력 행사는 늘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진일보가 아닐까합니다.

세월

“벌써 일년이 지났나?”

오늘 오후 John네 집으로 향하며 아내에게 던진 말이랍니다. 해마다 이 맘때 즈음에 열리는 John네 가든파티에 갔던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일년 전 일이 되고 말았답니다.

거의 스무 해 가까이에 이르는 연례행사인데 해마다 그 모습은 힘이 빠져 간답니다. John 부부도 어느새 칠순을 넘겼고, 참석자들 대부분이 그 또래 연령대이다보니 해마다 숫자도 줄어든답니다.

0726151504햄과 소시지를 굽고 potluck 음식(손님들이 한 접시씩 해온 음식)들과 맥주를 나누며 이야기를 즐기는 파티인데  참석자들의 평균연령이 높아지다보니 웬지 모르게 해마다 분위기가 쳐져가는 느낌이 드는 것인데, 오늘은 조락한 종가집 잔치처럼 그 느낌이 더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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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호스트 노릇을 하느랴고 분주한 John 내외의 모습을 바라보며 파티가 몇 년은 더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았답니다.

그나마 제게 큰 웃음을 안겨준 할아버지(?) 한 분과의 대화는 큰 기쁨(?)이었답니다.

할아버지 : “어디서 왔니?”

나 : Hockessin  Delaware(제가 사는 동네 이름인데 델라웨어주이고, John네 집은 메릴랜드주에 있기에)

할아버지 : 아니, 니 모국?

나 : 한국

할아버지 : 여기(미국에) 언제 왔는데?

나 : 한 삼십년 됐나?

할아버지 : 그럼 한 열살 때?

나 : 나 지금 예순 넘었거든….

할아버지 : Are you kidding me?!

크크거리며 좋아하는 내게 아내가 던진 말이랍니다.

“그 할아버지 사람보는 눈이 진짜 할아버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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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에 대하여

대왕 알렉산더(Alexaner)가 붙잡혀온 해적에게 “너는 어찌하여 바다를 어지럽혔느냐?”고 물었답니다.

대왕의 물음에 해적은 이렇게 답했답니다. “대왕이시여! 어찌하여 당신은 세상을 어지럽혔습니까? 나는 작은 배로써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도적놈’이라고 비난받지만, 당신은 막강한 군대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정복자’라는 칭함을 얻은 것일 뿐입니다.”라고요.

신국론성 어거스틴이 쓴  “신의 도성(신국론), The City of God”에 나오는 이야기랍니다.

작은 좀도둑이나 국가나 자기만을 위한 생각에 빠져 있는한, 똑같이 도둑놈에 불과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작게는 개인에서부터 크고 작은 집단 나아가 국가에 이르기까지 이기주의에 빠져서 자기 개인이나 집단만의 이익을 우선시하다보면 결국 도둑놈이 될 뿐이라는 교훈입니다.

해적이나 도적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것이나, 국가나 집단(물론 교회도 포함)이 주어진 권력을 신성시하여 개인에게 충성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나, 똑같이 도적질이라는데는 다름이 없다는 이 이야기의 핵심에는 “소유”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비단 물질적 소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욕망들 일테면 식욕, 성욕, 지식욕, 권력욕에 이르는 것들에 대한 소유입니다. 남보다 내가 더 가지려는 욕망, 끝내 내가 모두 차지해야만하는 욕망에 이르기까지 개인이나 국가 또는 교회, 각종 집단들이 지닌 욕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욕망 곧 소유에 대한 개념을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사용(use)과 향유(enjoy)라는 개념들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떤 것을 ‘향유’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의 목적 또는 이익을 위해 그것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쓰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가 원한다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전제로 말이다.”

어거스틴은 이 두 개념이 전도되는 상황을 악이요, 죄라고 말합니다. 향유(enjoy)할 것을 사용(use)하거나, 사용해야 하는 것들을 향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욕망의 향유(enjoy)와 사용(use)을 구분하는 잣대로 “필요(necessary)”라는 도구를 사용합니다. 그가 말하는 “필요”란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과 의복입니다. 마찬가지로 집단이나 단체, 국가에게 있어서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을 “필요”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 이상의 것들은 “여분(superfluous)”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이 “여분”의 것들은 이웃과 나누는 것이요,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며, 개인나 단체 또는 국가가 소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이 “여분”의 것들을 “필요”라고 말하면서 자기 것 또는 권력의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야말로 바로 도적질이요, 사기질이라고 강조합니다.

어거스틴(성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Sanctus Aurelius Augustinus)이 보았던 도둑질과 사기질은 그가 죽은지 1600여년이 지난 오늘도 도처에서 여전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는 그럼에도 사람사는 일은 여전히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다. 현실이 지금 모습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으로 바꾸려는 용기.”라는 어거스틴의 말처럼 오늘도 “현실에 대한 분노와 용기”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 뉴스를 보며 자꾸 혀차는 습관이 늘어나는 나에게 희망을 주며…

삼팔선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8.15 해방이 된 다음, 나는 신문이나 라디오를 통해서 달라지고 있는 고국 소식을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귀국하여 그 땅을 둘러보니 여기 저기 낯설고 생소한 것들이 있었다.

앞에 나온 이야기인‘귀국선’에도 적었듯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부둣가에는 태극기와 각가지 내용의 글자들이 담긴 깃발들이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태극기를 비롯해, 解放(해방), 自由(자유), 獨立(독립) 등 그런 글자가 적혀 있는 현수막이나 벽보들이 낯설기만 했다.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8.15 해방이 되니, 이런저런 이유로 타국에서 지내던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너나할것 없이 그렇게 조국 땅으로 모여들었다.

나처럼 일본에서 이리 저리 떠돌다가 귀국하는 사람이나 또는 다른 곳에서 지대다가‘조국 해방’이라는 물결을 타고 귀환하는 사람들, 그들을 환영하러 나온 인파, 그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일본인 등으로 부두는 번잡스러웠다.

세화회1나는 환전소에 들려서 일본 돈을 조선은행권으로 바꿔 가지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서울역에서 내린 나는 거기서도 처음 대하는 것들을 보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서울역 맞은편 어느 건물에 걸린 ‘日本人世話會’(일본인세화회)라는 간판이었다. (사진은 부산 일본인세화회 모습)

그것은 일본인들을 보살피는 모임이라 뜻이 있는 간판이다.

삼팔선

삼팔선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요약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8.15 광복 이후 한국에서 자주 쓰이게 된 말 중에서 한가지를 고른다면, 그것은 삼팔선(三八線)이라고 할 수 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게 됨에 따라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으로 나누어 점령한 군사분계선이 바로 그 ‘삼팔선’이다.

그렇게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한반도를 둘로 나누어 각기 점령한 것을 예를 들어 말하자면, “그것은 두 어린이가 과자 한 개를 반으로 쪼개어 사이좋게(?) 나누어 먹은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의 경계선은 6.25전쟁 휴전선이고 구불구분한 것인데 비하여, 38선은 위에 적은 것처럼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 분할 경계선이고 일직선이다. 38선이든 휴전선이든 그것은 한반도를 둘로 갈라놓은 분단선(分斷線) 이다.

어찌 되엇건 그 땅에 ‘38선’이라는 것이 생긴 후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통일의 길은 보이지 않고 요원(遙遠)하기만 하다.

3838선이 생긴 다음, 그 선(線)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런 사람들 중엔 남쪽에 의지할 곳이 없이 막연하게 월남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 중엔 자신을 ‘삼팔 따라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홀로 월남하여 졸지에 의지할 곳이 없게 된 자신을 스스로 비웃는 자조 심리(自嘲心理)에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나는 노름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따라지’라는 말이 나온 김에 한가지 적는다.

‘따라지’라는 말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노름판에서 ‘한 끗’을 뜻하는 말이고, 둘째는 보잘것없거나 하찮은 사람이나 물건을 이르는 말이다.

지금은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은 시대는 아니지만, ‘삼팔선’이라는 말이 한국 곳곳에서 쓰여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강원도 양양군에 ‘삼팔선휴게소’라는 휴게소가 있는데, 강원도 인제군 에도, 경기도 포천시에도 그런 이름의 휴게소가 있다.  휴게소 뿐만 아니고, ‘삼팔선주유소’라는 주유소도 있다.   모두 38선 또는 그 부근에 있는 휴게소나 주유소 상호다.

‘38선’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게 되면서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어 그들 두 나라가 나누어 각각 점령한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 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다는 그의 조서(詔書)가 발표된 다음,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이 북위 38도선을 막았고, 그들보다 나중에 서울에 입성한 미국군이 38선 이남 에 주둔하여 3년 동안 그 땅에 미군정(美軍政)이 펼쳐졌다.

더 설명하자면, 38선은 8.15 해방 직후부터 6.25 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남한과 북한과의 경계선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한국 민족에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러 가지 비극과 고통을 안겨 주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 들에게 한(恨)많은 경계선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무렵 유행하던 노래 중에는 ‘가거라 삼팔선’, ‘삼팔선의 봄’ 등이 있었다. 삼팔선은 당시 해방된 조국의 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휴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오고 있지만 ‘가거라 삼팔선’, ‘삼팔선의 봄’ 등의 노랫말에 담긴 절실함은 사라진 듯하여 안타깝기만 하다.

적성어(敵性語)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7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적성어(敵性語)

오늘날은 ‘영어 전성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점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를 것이 없다.  태평양전쟁 당시와 종전(終戰) 후에 있었던 영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 말이다.

먼저 약 50여년 전인 1966년 4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던 영어에 관한 한 기사(칼럼/논단)의 일부를 이 글에 옮겨 적는다.

글의 제목은 영어훈장(英語訓長)이다.


日帝末 太平洋戰爭(일제하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무렵 英文科(영문과)학생들은 콧대를 세우지 못하고 기를 펼 겨를이 없었다.

英語(영어)는 敵性語(적성어)라는 刻印(각인)이 찍혀 이것을 공부하는 학생들까지도  半要視察人的(반요시찰인적)인 대우를 甘受(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英語(영어)를 배워 무엇을 하겠느냐는 핀잔을 받기가 일쑤였고 무엇을 專攻(전공)하느냐는 질문이 떨어질 때마다 얼굴을 붉히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 중간 생략 –

해방을 맞이하여 事態(사태)는 일변하였다. 英語萬能時代(영어만능시대)가 당도한 것이다.

男女幼少(남녀유소)를 막론하고 英語(영어)를 한두마디 지껄이지 못하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학생들도 많은 시간과 精力(정력)을 英語(영어)공부에 소비하게 되어 英語先生(영어선생)도 제법 어깨를 으쓱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커다란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 이렇게 威力(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英語(영어)를 공부하는데 바치는 勞力(노력)의 代價(대가)를 우리들은 정당히 받고 있는 것인지?

혹자는 말하기를 解放前(해방전) 학생들에 비해 요즘 젊은 학생들의 英語(영어)실력 은 훨씬 나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단지 英語(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수가 많아졌기 때문에 出衆(출중)한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띄는 度數(도수)가 늘어 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語學(어학)공부는 일종의 훈련이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은 가만히 앉아있어서 는 안되는 것이고 반면에 선생들이 할일도 대단히 많아서 훌륭한 訓長(훈장)이 되려면 여간 애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

– 이하 생략 –

*그 당시 신문은 대개 한자(漢字)를 섞어서 썼다.


앞에 적었듯이 ‘太平洋戰爭이 한창일’ 때 ‘英語는 敵性語’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것 뿐만 아니고, 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까지도 半要視察人的인 대우를 甘受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했던 때가 있었는데, 전쟁이 끝난 다음부터 영어가 판치는 세상 으로 변했다.

내가 가노야 비행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던 것도 영어를 알기 때문이 었다. 그 당시 내가 영어를 알 수 있게 되었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english

나는 오사카 에서 지낼 때 그곳에서 오카모토 카나메 (岡本 要)라는     조선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도 내가 있던 집에서 숙식(宿食)을 했고 같은 직장에서 일를 했다. 한데, 그는 전쟁이 끝나면 영어가 필요하게 될 것이니, 영어를 배우라 고 나에게 권했다.

<영어는 적국(敵國) 말이다.>, 또는 <영어를 배워 무엇을 하겠느냐?> 는 말이 있을 정도였던 때에, 나는 그의 권유에 따라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영어 자습(自習)에 필요한 책도 마련해 주었고, 영어 학습에 관한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독학할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지냈는데, 내가 불시(不時)에 일본 경찰에 잡히게 되는 바람에 인사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오카모토 카나메 (岡本 要)라는 그 이름은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 전후였고 늘 안경을 쓰고 지냈는데, 그도 나처럼 일본식으로 된 성명(姓名)을 쓰고 있었다. 따라서 다시 만나볼 수 없게 된 그에 관한 의문도 있다.

첫째는 그러한 학식이 있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왜? 무엇 때문에 막노동자들 속에 섞여 그런 곳에서 지내고 있었느냐?라는 것이다. 아마 목적하고 있는 무슨 때를 기다리며 지내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뿐이다.

어찌 되었건,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변했다. 영어도 그렇다.

전날까지‘英語는 敵性語’라고 하던 곳에‘영어 바람’이 불기 시작 하더니, 지금은‘英語萬能時代’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만한 세상 으로 변했다.  불과 70년 사이인데,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영어와는 상관 없는 것이지만, 오카모토 선생 이야기가 나온김에 이야기 한 가지를 덧붙인다.  그와 함께 나라(奈良)에 다녀온 이야기다.

그 당시, 오사카 에서 나라(奈良)까지는 전철로 한 시간쯤 걸린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이야기를 적어 보려고 꺼낸 이야기다.

동대사한 가지는 어슬렁거리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수많은 꽃사슴들과 그런 것을 구경하는 관광객들이 뒤섞여 있는 사슴공원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지역에 있는 도다이지 (東大寺)라는 절이다.

한데, 절터가 워낙 넓어서 정당(正堂)과 부속 건물들이 흩어져 있고, 그 절의 대불전(大佛殿) 안에는 청동불상(靑銅佛像)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이라고 하는 그 불당(佛堂) 건물의 규모도 대단하지만, 불당 안에 있는 청동불상도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이라고 한다. 그 불상의 크기에 대한 예를 든다면, 불상 손바닥 위에 보통 어른들 열댓명이 설 수 있다고 한다.

위에 적은 것과 같은 특이(特異)한 점이 있는 나라(奈良)가 먼 옛날엔 일본의 수도였었는데, 그곳엔 지금도 백제(百濟) 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귀국선

나는 귀국선(歸國船)을 타려고 가노야 (鹿屋)를 떠나 하카타 (博多)로 갔다. 한데, 하카타 부둣가엘 가서 주위를 둘러보니 그때까지도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곳에서 며칠을 지낸 다음 어렵게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일본으로 갈 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첫째로 갈 때는 생활환경 때문에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미지(未知)의 땅을 동경(憧憬)하며 밤 시간에 현해탄을 건넜는데, 귀국할 때는 밝은 낮 시간에 귀국하는 기쁨을 가지고 검푸른 바닷물결 등 바다 풍경을 보면서 그리던 고국 땅에 닿았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부둣가에는 태극기와 각가지 내용의 글자들  이 담긴 깃발들이 있었다.

한 마디로, 감개무량(感慨無量)이었다. 8.15 해방이 되니, 이런저런 이유로 타국에서 지내던 수많은 조선 사람 들이 너나할것 없이 그렇게 조국 땅으로 모여들었다. 돌이켜 보니, 1945년은 한국 민족에겐 잊을 수 없는 해였다는 것을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시대가 끝난 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행했던 짓들을 길게 늘어놓지 아니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미국의 원폭투하(原爆投下)라는 엄청난 충격파(衝擊波)를 받은 다음에 야 일본이 연합국에 무릎을 꿇었고, 한국에서 물러나게도 되었다. 나라 없는 설음을 안고 각가지 모욕(侮辱)을 당하며 전쟁 틈에서 살아 남은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일본땅을 떠나 그리워하던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했을 때에, 그 땅엔 귀국선(歸國船)이라는 해방가요(解放歌謠)가 생겼다.

1.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은 크다

2.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 몇번을 울었던가 타국 살이에/ 몇번을 불렀던가 고향 노래를/ 칠성별아 빛나라 달빛도 흘러라/ 귀국선 고동 소리 건설은 크다

3. 돌아오네 돌아오네 백의동포 찾고서/ 얼마나 싸웠던가 우리 해방을/ 얼마나 찾았던가 우리 독립을 / 흰구름아 날려라 바람은 불어라/ 귀국선 파도 위에 새 날은 크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 돌아오네 돌아오네 백의동포 찾고서 ……

그렇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또는 멀리 남방(南方) 어디에선가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귀국동포들의 감격이 담긴 이런 노래가 많이 불리던 때가 있었다.

핫도그(Hot Dog)와 복(伏)날

사흘 동안 더위경보(heat warning)속에서 지냈습니다. 체감온도가 화씨 105도(섭씨 약 40도)에서 화씨 115도(섭씨 46도)사이에 이르는 날씨면  내려지는 경보랍니다. 게다가 높은 습도가 함께하는 여름 날씨는 오래 살아도 적응되지 않는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똑 같은 조건이지만 직업상 우리 부부에게 더해지는 찜통이 하나 더 있답니다. 바로 보일러입니다.

습도 높은 더위 경보속에서 뜨거운 보일러 스팀이 더해지는 세탁소 풍경 한번 상상해 보시겠습니까?  사반세기 넘는 여름을 그렇게 지내고 있답니다.

그래 불만이냐고요?

지난 밤 한 줄기 소나기 지나간 후 맞은 오늘 아침,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보내준 시원한 바람 한 점에 대한 감사를 안다면 감히 불만이라는 말은 불경(不敬)에 이른답니다.

산다는 것은 무릇 감사랍니다. 더위조차 감사랍니다.

hotdog주춤한 더위에 감사하며 훑어보는 신문기사에 내일이 National Hot Dog Day라는 게 있어 달력을 보니 중복(中伏)이랍니다.

Hot Dog과 중복(中伏)과는 전혀 무관한 듯 하면서도 연관이 있습니다. 바로 개입니다.

Hot Dog의 유래를 찾아보니 소시지 모양이 독일산 개와 닮아서 그렇게 이름지어졌다고 합니다. 복날에 보신탕 곧 개장국을 먹는 우리 풍습은 익히 마는 일이고요. 핫도그나 개장국에 대한 호불호는 개인 취향에 달린 일이니 제가 논할 바는 아니지요.

다만 저는 핫도그는 맘만 먹으면 배가 터지게 먹을 수 있는 환경과 여건속에 살지만 제가 좋아하지 않으므로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답니다.

개장국 곧 보신탕은  한때 제가 탐했던 음식 가운데 하나랍니다. 토종 서울내기인 제가 보신탕을 입에 댄 것은 다 그 놈의 술 탓입니다. 워낙 “남의 살”로 일컫는 육류(肉類)에는 그리 관심도 없는 제가 개고기만큼은 제법 탐(貪)했던 편입니다.

우선 육질이 기름지지 않아 좋고 속설(俗說)때문인지 술이 좀 과하더라도 개고기 안주라면 이튿날 숙취(宿醉)에 거의 시달리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저의 집안에 술은 물론이거니와 개고기까지 탐(貪)하는 것은 제가 유일하여 “가문(家門)의 영광”이 아니라 “가문의 골칫거리”가 된 지 오래이지만은 그것도 옛날 일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은 도대체 이 땅에서는 개고기 맛을 볼래야 볼 수 없는 딱한 현실 탓입니다.

개고기는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널려 있는 것은 손에 잡기 싫고, 결코 손에 쥘 수 없는 것에 대한 탐욕은 끝이 없고, 이 여름 저는 천상 사람인 것이지요. 비단 이 여름 뿐이겠습니까마는…

천상 사람으로 살더라도 개만큼은 살아야 할 터인데 “개도 지키며 산다는 윤리”에 이르면 그게 또 그리 쉽지만은 아닌 일인 듯 싶습니다.

바로 견오륜(犬五倫)입니다. 개들도 지키며 사는 다섯가지 윤리 도덕이랍니다. 이건 제가 만듣 이야기가 아니라 강원도 양양지방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라고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실려있는 이야기랍니다.

견오륜(犬五倫). 이른바 개라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덕입니다.

첫째,   지주불폐(知主不吠)하니, 군신유의(君臣有義)라. – 개는 주인을 알아서 주인을 보고 짖지 않는다.

광견(狂犬)- 곧 미치지 않고서야 제 주인을 보고 어찌 짖겠는가? 개가 지켜야 할 첫째 도리라는 말입니다. 하물며 개도 이럴진데 사람이 제게 은혜를 준 이를 향해 짖는다면 참 개 만도 못한 인생입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오륜(五倫)으로 군신유의(君臣有義)에 해당하는 말 쯤 아니 되겠습니까?

둘째, 모색상사(毛色相似)하니,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 – 개의 털은 어미를 닮을지니 자식은 부모를 알아야 한다.

광견(狂犬) -곧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제 부모를 깨물어 상처 내겠는가? 개가 지켜야 할 두 번째 도리라는 말입니다. 하물며 개도 이럴진데 저를 낳아 주신 부모를 깨문다면 참 개 만도 못한 인생입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오륜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에 해당하는 말 쯤 아니 되겠습니까?

셋째, 잉후원부(孕後遠夫)하니,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 – 뱃속에 새끼를 배었을 땐 부부관계를 삼간다.

광견(狂犬)- 곧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제 새끼를 배고도 오직 제 배부름만 생각 하겠습니까? 하물며 개도 이럴진데 사람이 제 새끼를 배고도 그걸 생명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참 개만도 못한 인생입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오륜으로 부부유별(夫婦有別)에 해당하는 말 쯤 아니 되겠습니까?

넷째, 소부적대(小不敵大)하니, 장유유서(長幼有序)라. – 작은 것이 큰 개를 해치지 않는다.

광견(狂犬) -곧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저 보다 나은 상대를 물겠습니까? 개가 지켜야 할 네 번째 도리라는 말입니다. 하물며 개도 이럴진데 사람이 저 보다 한 발 앞 서 가는 이를 시기 질투한다면 참 개만도 못한 인생입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오륜으로 장유유서(長幼有序)에 해당하는 말 쯤 아니 되겠습니까?

다섯째, 일폐중폐(一吠衆吠)하니,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 – 한 개가 짖으면 다른 모든 개들도 호응해서 짖는다.

요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때때로 적합하기도 하고 한 개가 짖는다고 다 짖을 까닭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개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광견(狂犬)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에 이르면 다 짖는데 안 짖는 하나가 역사를 이끌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쨋거나 사람이 지켜야 할 오륜으로 붕우유신(朋友有信)이 이쯤 해당 되지 않겠습니까?

 핫도그와 복날,  문득 개에 대한 생각과 이즈음 뉴스로 접하는 세상사들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