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 : 1181- 1226. 10. 3.)의 이름을 자신의 교황명으로 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방문중입니다.

그의 방미 일정이 워싱톤, 뉴욕, 필라델피아로 이어지는 까닭에 제가 사는 곳 델라웨어에도 교황에 대한 뉴스가 연일 이어지고 있답니다.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가 정말 인간적인 성인이었듯, 그 이름을 딴 프란치스코 교황도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들을 그가 내딛는 곳, 어디서나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이가 제가 사는 곳에서 인근에 있는 필라델피아에 오십니다. 이미 오래 전에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아주 적은 수의 필라델피아 인근에 사는 한인들이 그이의 필라 방문을 맞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답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된 관심인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함께 기억한다는 외침으로 그 이를 맞이하자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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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이 손을 내밀어 맞잡아 주었던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인 세월호 유가족, 실종자 가족들의 신음이 2015년 9월 현재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외쳐보자는 것이랍니다. 이들의 외침에는 다른 아무 까닭이 없답니다. 

단지 약 천년전 사람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가 썻다는 기도문을 이루고자하는 바램뿐이랍니다.

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하신 주님.

제가 위로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위로할 수 있도록

사랑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가족

Francis교황이 오늘 워싱톤 앤두류 공항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밟는 미국 땅에도 그가 꾸어온 평생의 꿈인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넘쳐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영상 뉴스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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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을 맞이하는 공항 모습에서 “왜 교황이 미국 땅을 밟았는가?”하는 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의전적 응대를 통해서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내외와 두 딸들, 바이든 부통령 내외와 가족들이 교황을 맞는 모습은 교황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세계가족대회(the World Meeting of Families)에 참석하는 뜻을 극대화 시킨performance였습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따듯한 교황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 해 여름, 한국에서 보였던 교황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아이들을 잃고 애통해하는 세월호 가족들을 위로하던 교황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잇달은 생각입니다.

세계가족대회(the World Meeting of Families)와 교황(Pope)이라는 말들에 들어있는 몇 개의 명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치는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입니다. 세계, 대회, 가족, 교황들 가운데 말입니다.

그런 생각 끝에 떠올린 천상병님의 시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감상

  • 천상병

청명한 연휴의 오후

가난한 아버지는

오래간만에 딸의 손목을 잡고

싱싱한 가로수 맡을 거닌다.

 

사람들은 모두 교외로 나가고

거리는 몹시도 한산한데

가끔 야외복차림의 가족을 태운

차가 질주한다.

 

갑자기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는 햇살이

눈이 부시다.

“너 아이스크림 사주련?”

“괜찮아,아버지”

조그마한 딸의 손이

아버지 손아귀에서 꼼지락거린다.

아, 행복이 있다면

행복을 손에 잡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꼭

이 뭉클한 작은 손과 같을 것이다.

장모(丈母)에게도 기회를…

제 고모부, 처고모부, 장모 – 이 세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답니다. 고향이 북쪽이고 한국전쟁 탓으로 남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 고모부님과 처고모부님은 모두 세상을 뜨셨답니다. 두 분 모두 북에서 가정을 꾸리시다가 남으로 내려와 새가정을 꾸려 사시다 가셨답니다. 한분은 그 언젠가 북의 가족들을 만날 세월을 낚노라고 낚시에 말씀을 묻고 사시다, 다른 한분은 도수에 상관없이 소주잔 한잔이면 나오는 웃음에 세월을 얹혀 날리시다 가셔, 이젠 뵐 수 없답니다.

그래도 두분에게는 함께 남으로 내려온 혈육이 있었거나, 이북 오도민(五道民) 향우회에서 만난 고향분들이 함께 했던 삶이었지요.

아직 팔순이 안된 제 장모는 그야말로 남으로 내려온 홀로랍니다. 이북 오도민 향우회에 홀로 얼굴 내밀기도 뻘줌한 나이랍니다.

십대 어린 나이에 오빠하고 단 둘이 내려왔던 남쪽살이였답니다. 전쟁통에 고향에 간다며 국군에 입대했던 오빠는 그 뒤로 소식을 들은 적 없이 이북에 있던 가족들과는 영영 이별한 채 살아오셨답니다.

사람살이 길은 늘 열려있다고, 장인 어른 만나 가정을 꾸며 열 아홉에 제 처를, 이어 두 아들을 낳고 키우며 오늘도 기도로 사신답니다. 행여 북에 살아있는 어릴 적 헤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래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 놓고 있답니다.

오는 10월로 예정된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는 남북 각기 100명씩 선정해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현재 남쪽 신청자들의 반수 이상의 나이가 90대라고 하니 아직 팔순도 안된 창창하게 어린(?) 제 장모에게 순번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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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삼년전 이맘 때, 장모에게 병이 찾아왔답니다. 담낭암이라는 이름의 손님이었지요. 그래 담낭을 떼어내고 전이된 간 일부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도 받으시고 난 후. 그 언젠가의 세월을 기다리시며 잘 버티고 계셨답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 소식이 들리던 이지음 장모에게서 떠났다고 생각했던 손님이 아직도 몸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다는 판정을 받았답니다.

그래 이 저녁, 모처럼 제 가족을 위해 기도해 본답니다.

“장모(丈母)에게도 기회를…”

노동절과 중산층

월요일이지만 아침을 느긋하게 맞습니다. 늦잠의 여유도 누려봅니다. 노동절(Labor Day)아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영업자 주제에 누리는 혜택이야 전혀 없지만, 월요일 아침을 여유롭게 맞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 감사랍니다.

커피 한잔과 함께 훑어본 뉴스에 눈에 띄는 기사가 하나 있답니다. 저희 동네 신문인 The News Journal에 실린 소상인 전문 리포터Scott Goss 의 “델라웨어주 노동조합원 숫자 줄다”라는 기사입니다.

지난해 델라웨어주 고용노동자 10명 가운데 1명 정도가 노동조합 가입자인데, 이 수치는 지난 25년 이래 최저치이고 10% 미만으로 떨어진 첫번째 사례랍니다. 전체 수치로보면 델라웨어주내에는 38,000명에 조금 못미치는 조합원 숫자인데 이 역시 1989년이래 최저수치랍니다.

오늘 오후에 윌밍턴 시내에서 벌어질 노동절기념 퍼레이드를 이끌 노동조합 리더인Samuel E. Lathem이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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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노동조합이 필요한) 블루칼라의 정의는 새롭게 내려져야한다. 주지사를 비롯한 정치행정관료들은 그들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말하지만, 그 일자리들의 대부분은 아마존이나 월마트 등의 저임금 서비스업에 치중되어있고, 그 일자리들은 불만족스럽고 블안정한 것들이다.”

Samuel E. Lathem의 말은 노동조합을 이끌었던 전통적 개념의 일자리들이 변화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문제들은 비단 델라웨어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국 전국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실제 미국 전체 노동조합 가입자 비율은 11.1%로 최고 정점을 찍었던 1950년대의 30%와 그리고 20%대를 유지했던 1980년대에 비하면 크게 위축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한때 건강한 미국의 중추 역할을 했던 중산층들은 바로 노동조합을 이끌었던 생산직 노동자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임금을 바탕으로  일일 8시간 노동, 주말휴무, 아동노동법, 최저임금제, 고용 의료보험 등 이루어내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지금의 변화는 노동조합이 할 일들이 축소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종사하는 일자리들에서 전통적인 노동조합이 할 일이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비록 현재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이즈음 젊은 세대들은 이전 세대들이 오늘날의 노동조건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쟁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젊은이들은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착취, 그들이 공정한 임금을 누리지 못하는 현상, 그들이 만드는 노동의 가치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푸념하지만 이즈음 젊은 세대들에게는 공염불일 뿐라는 점입니다.

실제 델라웨어주내 노동 일자리의 변화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90년 이래 지난 25년 사이에 자동차 생산라인과  Dupont회사의 나이론 제조업체 생산라인의 약 10만개가 넘는 일자리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델라웨어 주 전체 인구가 100만이 안된다는 점에 미루어 보면 이 수치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노동조합들이 침체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공무원노조, 교원노조 등 공공노조들의 조직력과 확장력은 더욱 커져가고 있답니다.

그 까닭을 설명하는 대학교수의 말이 재밌습니다. “자동차업 같은 노동집약적인 산업들은 보따리 싸서 타주나 다른 국가로 이동하면 되지만, 주정부나 학교 등은 이주 불가능하기 때문에….”

철밥통을 위한 결속력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랍니다.

이 기사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대목은New Castle County Executive(뉴캐슬 군청장) Tom Gordon의 말입니다.

“노동조합이 미국의 중산층을 형성했지만, 더 이상 미국의 중산층은 없다. The union built the middle class in the country, but that middle class doesn’t exist anymore.”

바로 이 지점에서 갖는 질문 하나랍니다.

모든 정치인들은 “중산층을 위하여!”라고 말한다는…

영화 “다이빙 벨”을 권하며

기독교 신학에 있어 미국의 위치는 그리 내세울 정도가 못됩니다. 물론 신학자들의 명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지요. 그런 가운데 몇몇 명함을 내놓을만한 분들 가운데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 1892. 6. 21.- 1971. 6. 1.)가 있습니다.

그는 그가 쓴 책  <인간의 본성과 운명,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에서 “교만(pride)”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답니다.

<사람의 교만(pride)에는 네가지 측면이 있는데 첫째는 권력의 교만, 둘째는 지적인 교만, 셋째는 도덕적 교만, 넷째는 종교적 교만>이라고 한 것이랍니다.

이즈음 제가 느끼는 사회적 현상은 바로 이런 교만들이 극에 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특히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드러내는 교만 가운데 하나이지요. 자신이 알고 있는 또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만 진리라고 생각하는 교만으로 하여 남의 의견이나 남의 생각은 듣지 않으려하는 태도야말로 니버가 말한 교만의 집합체가 아닐까 한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 교만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가지 사건을 이해하려고 할 때, 일테면 똑 같은 하나의 사건을 보도하는 조중동과 한겨레, 경향, 오마이 때로는 일베와 고발뉴스 등을두루 살핀 뒤에 제 생각을 가름한답니다.

이 땅의 뉴스도 마찬가지랍니다. Fox 와 Washington Post와 함께 NewYork Times와 CNN과 동네 뉴스를 보고 나서야  생각을 가름하곤 하는 것이지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아직도?”라고 묻는 분들을 위하여, 니버목사가 적시한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보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영상 하나 소개 드립니다.

보시기 전과 후의 생각에 차이가 없어도, 아니 본래 생각하셨던 “그래서 왜 아직도인데?” 하셔도, 저는 절대 그게 교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니버목사가 말한 교만의 가장 큰 문제이자 죄란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자신에게 갇힌 상태를 말한답니다. 그래 한번 보시라는 뜻으로 권해 드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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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를 다룬 <다이빙 벨>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다 보시고 난 후, “좌파들이 꾸며 만든 이야기”라고 하셔도 저는 당신의 생각을 존중할 것이랍니다.

8.15 단상(斷想) 3 – 장군(將軍)들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9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박노규(朴魯珪)장군1918년 3월 14일 ~ 1951년 3월 3일>은 한국전쟁 때 내가 복무했던 부대인 육군 제2사단 31연대장이었다.

그는  1946년 11월 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졸업과 동시에 육군 참위로 임관된 후,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입교하여 현대전술에 대한 연구를 하던 중 1950년 5월 1일 육군중령으로 진급하였고,  한국전쟁 때 춘천 및 홍천 전투, 강릉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며 1951년 3월 3일 일월산 전투에서 북한군 제10사단 패잔병을 섬멸하던 중 560고지에서 총에 맞아 전사했다.

사후 1951년 4월 27일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고 동시에 육군준장으로 추서되었으며 현재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47에 안장되어 있다.

전쟁중 진두지휘(陣頭指揮)를 하던 중 적탄(敵彈)을 맞고 33세를 일기(一期)로 이 세상을 떠난 박노규 연대장 … ‘6.25 전쟁’이라는 싸움터에서 대한민국의 국방을 위해 전장(戰場)의 이슬로 사라진 그의 명복을 빈다.

박노규 장군이 졸업한 <국방경비사관학교>와 관련이 있는 몇 가지 이야기 를 요약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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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경비사관학교의 정식명칭은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南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다.   영어로는 ‘South Korean Officer Training School’인 그 학교가 생기기 전엔 ‘군사영어학교 (軍事英語學校)’ 라는 것이 있었다.

군사(軍事)에 관한 영어와 미국식 군사훈련을 가르친 그 학교를   Military Language School이라고도 하는데, 미군정이 생긴 다음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 있는 감리교신학교 자리에서 개교(開校) 한 그 학교는 장차 한국군 창설을 목표로 만든 학교다.

그 학교의 교육 과정을 마친 사람들 대부분이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인데, 남조선국방경비대를 거쳐 대한민국 건군(建軍)을 이룬 주역(主役)들 대부분이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이다.  그런 사람들 중엔 일제시대 때, 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 하였다가 훗날 한국군의 별을 단 사람들도 있다.

앞에 적은 박노규 연대장이 전사할 당시, 육군 제2사단장이었던 함병선(咸炳善) 장군도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한편 태평양전쟁 당시, 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이 되었던  사람들 중, 육군종합학교(陸軍綜合學校) 출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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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때, 내가 있던 부대의 이기욱 대위도  일본군  출신이었 다.  계급은 오장(伍長)이었다. (오장은 한국군 하사와 같은 계급이다.)

육군종합학교는 필요한 장교를 빠른 시간 안에 양성하기 위하여 1950년에 설치한 단기군사학교로서, 두세 달 정도의 교육을 시킨 뒤 장교로 배츨하였다.  더 설명하자면, 육종(陸綜)’이라고도 하는 육군종합학교는 6.25 전쟁 때, 한시적(限時的)으로 있었던 <전시사관양성(戰時士官養成) 군사학교>다. 이를테면, 그것은 부족한 초급장교들을 속성으로 만들어내는 임시학교였다.

부산 구포초등학교에 있던 육군훈련소에서 전투병(戰鬪兵)이 되기 위한 단기(短期) 군사교육을 받고 전선(戰線)에 배치되었던 나처럼,  ‘육종’ 출신 장교들도 지휘관이 되기 위한  기초훈련만 받고 전선에 투입된 초급장교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급조(急造)된 장교들이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속성으로 된 많은 ‘육종’ 출신 장교들이 전투지휘를 하다 전사(戰死)하거나 전상자(戰傷者)가 되었다.

하여간,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사자가 되거나 전상자가 된  ‘6.25’라고 하는 그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은 한반도가 분단(分斷)된 다음에 생긴 것이고, ‘한반도의 분단’은 ‘태평양전쟁이 끝남에 따라 생긴 것이다.

1931년에 일어난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時期)를 일본에서는 ‘15년 전쟁’이라고 한다. 그들(일본)의 표현대로 ‘15년 전쟁’ 시기에 살았고, 그런 것에 더하여 ‘6.25’ 라고 하는 전쟁도 겪은 나의 지난날들을 회상(回想)하며 이 글을 쓰는 내 자화상(自畵像)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

각설하고, 군대 계급에는 소장, 중장 등도 있는데 보통 <장군(將軍)> 이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xx 소장>이나 <xx 중장>이 아니고, <xx 장군>이라는 말이다.

장군(將軍)이란 군대용어(軍隊用語)로서 준장,  소장,  중장,  대장 등 <별>을 단 계급 전부를 한데 묶어 일컫는 말이다.  한데, 장군(將軍)을 ‘장성(將星)’이라고도 한다.

  • ‘장수 장(將)’ + ‘별 성(星)’ = ‘將星’이다.

그러므로 준장(准將)은 一星將軍, 소장(少將)은 二星將軍, 중장(中將)은 三星將軍, 대장(大將)은 四星將軍이라고 지칭(指稱)한다.

한마디로 장성급(將星級)인 장군(將軍, General officer)은 군사(軍士)를 거느리는 우두머리다. 더 설명하자면 장군이란 군대를 지휘하고 통솔하는 우두머리로서, 큰 규모인 지휘관에게 주어지는 관직이나 칭호다.

앞에 적었듯이 미군정시대 때, 장차 한국군 창설을 목표로 만든 군사영어학교에서는 그 학교 학생들에게 미국식 군사훈련을 가르쳤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군의 군사용어 대부분도 미국의 군사용어를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면, 앞에 적은  ‘一星將軍, 二星將軍’ 등이 바로 그런 것이다.

Brigadier General (one-star General) = 准將, 별 하나. Major General (two-star General) = 少將, 별 둘.        Lieutenant General (three-star General) = 中將, 별 셋. General (four-star General) = 大將, 별 넷. General of the Army (five-star General) = 元帥, 별 다섯. 공군 원수는 General of the Air Force. 해군 원수는 Admiral of the Fleet  등이다.

어느 나라 군대든지 <장군> 또는 <원수>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군대생활에서 <별>을 단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별 따기다.’라고 한 말은 요즘 세상 이야기고,  6.25 전쟁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한국군의 실정(實情) …… 말하자면, 군대의 편제(編制) 등 필요한 인원(人員) 때문에 부득이 젊은 <장군>들이 생기게 되었다. 앞에 적었듯이 ‘군사영어학교’는 장차 한국군 창설을 목표로 하고 미군정이 만든 것이다.

한데, 대한민국 탄생과 함께 그 나라의 건군(建軍)을 이룬 주역(主役)들 대부분이 군사영어학교의 교육과정을 마친 일본군(만주군 포함)  출신들 이었다. 한국군 최초로 4성장군이 된 백선엽(白善燁) 장군도 만주군 출신이고 군사영어학교를 나온 사람인데, 그가 4성장군이 될 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서른 두 살에 <4성장군>이라 ……      글세올시다 ……

아무튼 야전복(野戰服)차림의 백 장군이 지프(jeep)를 타고 전선을 누비던 때와 오늘날 一星將軍이 될 수 있는 <나이가  50세전후>라는 것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엔 별의 희소가치(稀少價値)가 1950년대, 특히 6.25전쟁 때의 그것 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희박(稀薄)해졌다. 달리 말하자면, 장성(將星)들의 수(數)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아닐런지?

기록에 의하면,  6.25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한국군 장성의 수는 육군이 10명, 해군이 1명, 공군이 2명, 모두 13명인데, 당시 최고 계급은  소장 (少將)으로 4명(모두 육군)이었고, 나머지는 준장(准將)이었다.

그 전쟁이 일어났을 때, 기껏해야 30세 안팎이었을 사람들이 <별>을 달고  군대를 통솔(統率)했다.    아무튼 그 전쟁 때 백장군처럼 속성(速成)으로 된 장군들이 있었다.

그때는 정부 수립과 함께 출발한 군대의 조직편제(組織編制)에 미비(未備) 한 상태에서 전쟁을 겪게 된 때였다는 것을 참고하여 생각해보더라도, 군대에서 별을 단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한데, 목숨을 잃은 후에 장군이 된 사람도 있다.

사람이 죽은 뒤, 그의 생전의 공훈에 따라  계급을 올리거나 훈장을 주는 것을 추서(追敍)라고 하는데, 앞에 적은 박노규 연대장이 그런 사람이다. 박노규 장군은 생전(生前)에 별을 단 적은 없지만 사후(死後)에 장군이 된 사람이다.

해방 이후  전쟁을 치루며 서른 안팎 나이에 별을 달았던 많은 장군들 중엔 박노규 장군 처럼 국가에 공(功)을 세워 사훈(死後)에 장군이 된 사람도 있고, 이제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돌이켜 장군이 다 장군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어제 필라델피에 있는 작은 교회당 Ambler Mennonite Church에서는 서른여명의 한인들이 둥그렇게 둘러 앉아 약 세시간여에 걸쳐 도란도란 서로의 가슴에 쌓였던 말들을 풀어 내었답니다.

그들 가운데는 필라 인근에서 뿐만 아니라 멀리 뉴욕, 뉴저지에서 오신 분들도 있었답니다. 그렇게 둘러앉아 이어진 이야기들은 정해진 시간만 아니었다면 밤조차 새울만한 분위기였답니다.

그 가운데 한분께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이번 주초에 버지니아에서 있었던 TV 생방송중에 일어난 총기사건은 이 땅에 사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방송국이 커버하는 지역의 시청자들은 실시간으로 그 사건의 현장을 지켜보았으며, 모든 미국인들이 그 사건 현장의 영상을 볼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뉴스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실시간으로 300명이 넘는 사람의 생명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것도 여러날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비록 500일이 지났다고 하지만 그 충격적인 모습의 잔상은 제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엊저녁에 필라세사모가 주최한 모임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행사”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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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8월의 마지막  주일 아침입니다. 멀리 500일을 돌아볼 것도 없이 8월 한달 동안의 뉴스 타임라인들을 되돌려 훑어봅니다.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현장들에 대한 이야기는 세계 곳곳에서 하루 한시도 건너 뛰지 않고 어김없이 이어진 한달이었습니다.

더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인격과 존엄을 “나” 또는 “우리”라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짓밟고 망가트리고, 온갖 수모를 가하는 현장들은 오늘 이 시간에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내는 2015년 8월 한달 내내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이 있는 세상을 꿈꾸며 애를 끓이고 도전하며 기도하는 무엇보다 작은 것 하나라도 그 일을 위해 실천하며 살고자하는 정말 평범한 사람들은 넘쳐난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런 평범한 모든 이들에게 온몸으로 드리는 박수와 함께 드리는 글입니다.


 

8-30

팔월 마지막 주일 아침입니다. 하루 남은 팔월의 달력을 보면서 이름이 팔월(August)인 소년 이야기를 드립니다.

이미 읽어서 잘 알고 계신 분들도 많겠지만 R.J. Palacio가 쓴  동화소설  Wonder의 주인공 이름입니다. 이미 뉴욕 타임즈 선정 베스트셀러였고 2015년 마크 트웨인 상을 비롯한 여러 수상도 한 이 책은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답니다. 한국에서는 “아름다운 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10살짜리 August는 자기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 이름은August고요, 제 생김새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답니다. 제 생김새에 대해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시든 그보다 추한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선천적 안면기형으로 태어난  August는 열살이 되기까지 스물 일곱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누구나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면 악몽을 꿀만큼 기이한 얼굴을 지닌 소년이랍니다. 하지만  얼굴 생김새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지극히 평범한 10살짜리 아이랍니다.

이 소설은  열살짜리 August가 보통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처음으로 들어가서 일년 동안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단지 얼굴이 이상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August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편견과 학교아이들의 끈질긴 괴롭힘들을 불굴의 의지와 가족의 사랑, 친절을 베푸는 친구의 우정으로 극복하는 이야기랍니다.

이야기의 끝부분에 이르러 August는 이런 독백을 한답니다. “누구나 다 기립박수를 받을만 하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세상을 헤쳐나가며 극복하기 때문에…”

팔월을 보내면서 이 달에도 여전히 듣고 볼 수밖에 없었던 슬프고, 아프고, 안타까운 세상소식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고 아름답고 희망찬 9월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 보내는 기립박수를 보낼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It is the morning of the last Sunday in August. Looking at the calendar of August which has just one more day, I would like to share with you a story about a boy named August.

As many of you may know well, it is the name of the main character in the children’s novel, “Wonder,” written by R. J. Palacio. It was a number one book on the New York Times Best Seller List and it won several awards, including the 2015 Mark Twain Award. It was translated and published with a title, “아름다운 아이 (A Beautiful Child)” in Korea. It was loved by many people in Korea, too.

August, the main character and ten-year-old boy, introduces himself like this:

“My name is August. I won’t describe what I look like. Whatever you’re thinking, it’s probably worse.”

August was born with a rare medical facial deformity. Even after twenty-seven surgical operations, his face still looks strange enough to make those who see his face have a nightmare. However, except for his appearance, he is normal like any other ten-year-old kid in every respect.

This novel describes what August, who had been homeschooled until then, experienced during the first year at a prep school.

It is a story about how August overcomes the prejudice and distress due only to his facial deformity with his own unyielding will, love and support from his family, and warm friendship.

Almost at the end, August said to himself, “Everyone deserves a standing ovation because we all overcometh the world.”

I wish that all of us will give a standing ovation to ourselves as we enter September with a cheerful and bright mind, even though we could not avoid many sad, agonizing and deplorable incidents and news around us and in the world in August.

from Young Kim

아니, 아직도?

‘세살버릇 여든간다.’, ‘천성은 못고친다.’는 말들은 사람의 성품이나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음을 표현한 예들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어릴 때부터 지녔던 못된 습관들과 성품들이 몸에 베어서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허나 예외없는 법칙이 없듯, 나이들면서 변하고 바뀐 것들도 있다. 일테면 ‘옳고 그름을 다투는 일’보다는 ‘같고 다른 것을 구별하는 일’을 우선하는 버릇들은 나이들어 바뀐 아주 좋은 예이다.

젊어서는 사물이나 사건 또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에 두었다면(물론 그 판단대로 살지도 못했지만) 인생의 어느 지점을 지나면서부터인지 나도 모르게 그 판단기준을 ‘같고, 다름’에 두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옳다, 그르다’의 기준으로 세상사를 바라보면 삶의 긴장감에서 오는 맛을 느낄 수 있지만, 자칫 삶의 여유를 놓칠 수도 있다. 반면에 ‘같다, 다르다’의 기준으로 세상사를 바라보면 삶이 품을 수있는 여유를 한껏 넓힐 수는 있지만, 자칫 삶의 가치를 잃을 수도 있다.

어느덧 나이들어 ‘세상사 다 좋은 게 좋은거지라며 사니 참 편하더라’는 말이다. 이런 늘늘한 내 삶의 여유를 깨트린 것은 바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던 내 성품이었는데,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행사” 포스터를 보는 순간이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필라 인근에 사는 한인들중 이 포스터를 보는 순간 “아니, 아직도 세월호?”하시는 이들이 태반을 넘어 대다수를 차지하지 않을까싶다.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책임질 사람들 다 책임졌고… 보상금 다 주었고… 그만큼 국가가 애썻고… 더더군다나 놀러가다가 일어났던 사건인데… 그만큼 했으면…”이라는 말끝에 “이래저래 사는 일도 바쁜데… 아니, 아직도 세월호?” 라는 모습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헤드뉴스를 장식하는 기사들이 하루도 아닌 시간에 따라 바뀌는 세상에서 500일이나 지난 사건, 빨리 잊혀지기를 바라는 어둡고 아픈 사건을 구태여 자꾸 꺼집어내는 것은 분명 피곤한 일이므로 그 당연함에는 설득력도 더해진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만일, 만일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하나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국가가 배보상금을 한푼도 주지 않았고, 국가는 사고원인과 책임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사고의 원인은 물론 책임자를 가리는 일을 방해했고, 향후 유사한 사건사고를 대비하자는 목소리마저 외면했다면…” 그게 언제적 이야기냐고 반문해서는 안되는 바로 오늘의 문제가 될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나름 삶을 늘 성서에 묻고사는 예수쟁이라고 내세우며 살고 있는 처지이므로 바로 이 지점에서 던져지는 질문으로하여,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행사”에 한번 기웃거려 보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가족을 잃은 아픔을 안고 사는 이들의 삶은 원상회복되어야 마땅한 일임에도 그들의 신음소리가 외면받고, 그들의 삶이 소외받는 처지로 내몰리는 지경은 바로 성서가 말하는 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거나 같을 수도 있거니와 처지와 환경에 따라 옳고 그름의 기준은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소외되었다고 아픔을 호소하는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일은 옳고 그름이나 같고 다름을 떠나 사람이기에 당연히 흉내라도 내보아야 마땅한 일일 것이다. 나아가 소외되는 현장에 사람이 있는 한 “아니, 아직도?”라는 물음 보다는 “아니 어떻게?”라는 물음이 우선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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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단상(斷想) 3 – 은인(恩人)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해방 후엔 이런 것도 있었다.

basic각가지 영어학습 책도 시중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노점에서도 책을 팔았다.   그러한 것 중엔 다음과 같은 책도 있었다.

영어학습에 필요한 최소 어휘만으로 (850 단어만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책도 있었는데, 찰스 오그던 (Charles K. Ogden)의 Basic English가 바로 그런 책이다.

하여간, 8.15 해방 후, 미군들과 함께 그 땅에 들어온 것이 영어 뿐만 아니었다.  의약품의 경우 예를 들면, 페니실린(penicillin), 다이아찐(diazine),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 디디티(DDT) 등이 8.15 후에 한국으로  들어온 것들이다.  그러한 의약품과 함께 미군의관(美軍醫官)들도 남한 땅을 밟게 되었다.

지금 내가 적고 있는 이 글의 내용이 8.15 전반(全般)에 관한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8.15 단상(斷想)>이라는 제목처럼 단편적인 글이다. 사람마다 같을 수는 없겠지만, <8.15>라고 하면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 당시를 살아왔을 뿐만 아니고, 분단된 그 땅에서 동족상잔 (同族相殘)이라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난 6.25 전쟁 … 그리고 총과 칼을 들고 그 전장(戰場)으로 뛰어든 젊으이들 ,,,,,

총이면 총이지, 칼이라니?  그렇다.   대검(帶劍)이라고도 하는 칼을 총신(銃身) 끝에 꽂고 다녔다. 전투 상황에 따라 그 칼이 쓰여진다. 그러한 상황에서 적과 맞붙어 싸우다 전장(戰場)의 이슬이 되어버린 수 많은 전사자(戰死者)들 …

그리고, 적탄(敵彈)을 맞아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된 전상자(戰傷者) 들의 수는 얼마던가?  한국 젊은이들만이 아니었다. 국제연합(國際聯合, UN)회원국 군인으로서 그 전쟁에 참전하여 목숨을 잃거나 몸을 다친 군인들의 수는 얼마던가?

그러했던 전쟁 ……… 더 설명하자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북위 38도선에서 일제히 남한을 침공함으로 벌어지게 된 그 전쟁인데, 한국측에서는 그것을 6.25라고도 하고, 6.25전쟁이나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한국전쟁 또는 한국동란이라고도 한다.

“그 전쟁이 일어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하나의 공통된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있다.”라는 이야기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것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는데, 그 말의 뜻은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 그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통일을 하겠다.’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가 하면, 그 전쟁에 끼어든 중국은 抗美援朝戰爭이라고 하는데, <抗美>를 <抗米>로 쓰기도 한다. 미국이나 일본도 그들나름대로 쓰는 <6.25 전쟁> 이름이 있다.

그러한 전쟁 이름이야 어찌되었건, 내가 자유롭게 걸을 수 있고, 마음 대로 뛰어다닐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쟁 때  김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中共軍)과 교전(交戰)한 것을 끝으로 내 삶에서 떠나 버렸다.

휴전회담(休戰會談)이 시작되기 직전이고, 내 나이 스물다섯살 때 생긴 일이다.

이야기 장면(場面)을 앞에서 적은 <미군의관(美軍醫官)들도 남한 땅을 밟게 되었다.>로 돌려본다. 미군정 때 미군의관들이 여러 가지 새로운 의약품을 가지고 한국으로 왔었던 것처럼, 6.25 전쟁 때에도 그 땅에 미군의관들이 있었다.  미 공군대위, Dr. Feeny 라는 군의관도 그들 중 한사람이다.

내가 그를 알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나는 전투중 중공군의 수류탄 파편으로 졸지에 부상병이 되었는데, 야전병원(野戰病院)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다음 제일육군병원으로 후송 (後送)되었다.

한편 내가 그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휴전회담(休戰會談)이 시작되었 는데, 회담 중에도 그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입원한 지 며칠 후, 분대장 고광만 하사가 들것에 실려 그 병원에 들어 왔다.    그도 다리를 다쳤는데, 그는 나보다 더 심하게 다쳤다. 내가 있던 중대에서 전사자와 전상자가 많이 생겼다는 것을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왼쪽 다리뿐만 아니고, 왼쪽 팔목도 다친 나는 팔목에 석고(石膏)붕대 를 하고 지내다가 원호대(援護隊)로 옮겨졌고, 1951년 9월 14일에 나는 명예제대증을 받아 들고 군문(軍門)을 나오게 되었다.

제대한 다음, 그 당시 부산 해운대 근처에 있던 K-9이라고 하는 미군 비행장에 있는 17th Medical Group에 취직이 되어 그곳 입원실에서 가볍고 손쉬운 잡일을 했다.

20121203011957_2 당시 부산 수영(K-9) 비행장  모습

앞에 적은 Dr. Feeny라는 군의관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하지만, 내가 거기서 지내는 동안 처음부터 그 군의관을 알게 되었던 것은 아니고, 그 직장에서 얼마동안 지낸 다음에 그는 내가 한국군 부상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걸음걸이가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것에 관심을 가진 그는 다른 미군 의사들과 함께 내 상처를 고쳐주려고 무척 애를 썼다. 하지만, 고치질 못했다.

그들이 내 상처를 고쳐주진 못했지만, 그 고마움은 잊을 수 없다.

지금도 그때 다친 상처 때문에 몸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목숨을 잃은 사람 도 있고,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는 불행 중 다행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8.15 단상(斷想) 2 – 말(言語)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8.15 단상(斷想) 2 – 말(言語)

해방이 된 다음, 일본어가 그 땅에서 물러가고 대신 영어가 그 자리에 들어와서 미군정이 펼쳐지고 있는 동안 한국의 공용어(公用語)로 쓰였다.

말하자면, 일본이 강제로 한국에 퍼뜨려 놓은 일본어는 썰물처럼 그 땅에서 빠져나가고, 속된 말로 꼬부랑 말과 꼬부랑 글씨라고 하는 영어가 밀물처럼 밀려온 것인데, 코쟁이라고도 불리는 미군들이 말하는 것을 한두마디 알아듣고 그대로 비슷하게 흉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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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서울 동대문 – 어느 미군이 찍은 사진 1

지금은 신문이나 잡지에도, 뉴스 방송에도, 텔레비젼 연속방송극에도, 거리에 즐비한 상가(商街) 간판에도 영어가 쓰이고 있다.

<상가 간판에도 영어가 쓰이고 있다.>라고 한 것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 보려고 한다.

미군정 시대가 지나가고 대한민국이 탄생되어 회갑(回甲)을 지냈건만 아직도 그 땅엔 외래어(外來語)의 어문일치(語文一致) 또는 언문일치 (言文一致)에 관하여 정리할 것이 꽤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외래어(外來語)란 말하자면 외국어가 국어 속에 들어와서 국어처럼 쓰이는 것인데, 특히, 한자어(漢字語)를 제외한 여러 외국의 말이 국어화(國語化)한 것으로서 <들온말>이라고도 한다.

그러한 <들온말>에 관하여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디지털카메라시대인 요즘엔 볼 수 없지만, 필름카메라시대에는 유원지 나 관광지 등에 있는 매점들 중엔 필름을 파는 곳도 있었다.

영어로 film인 그것을 위에 적은 것차럼‘필름’이라고도 하고,‘필림’ 이라고도 하며, 또는‘휠름’이라고도 한다.

이런 것도 있다.   Center에 관한 이야기다. Center는 축구나 농구 등의 경기(競技)에서 center line, centering 등으로 흔하게 쓰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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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서울 동대문 – 어느 미군이 찍은 사진 2

한편, center는 무슨 상호(商號) 뒤에 흔히 붙이는 말이기도 한데 예를 들면 xx분식 센터, xx치킨 센터, xx스포츠 센터, xx심부름 센터 등이다.  그러한 center에서 온 말이 센타, 쎈타, 센터, 쎈터 등으로 쓰이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한데, 그러한 외래어도 한국에 토착되어 쓰이고 있다면, 그것도 일종의 국어다.

그러한만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을 위에 적은 센타, 쎈타, 센터, 쎈터 처럼 여러가지로 쓰이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하여간, 오늘날엔 그 예를 낱낱이 다 열거할 수 없을만큼 영어가 판을 치는 세상으로 변했지만, 해방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군정시대 때 영어통역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은 대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해외유학을 했거나, 아니면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라고 하면 될 것이다.

당시 그 정도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시절에 대지주 등 부유하게 살던 집안 출신으로서 해방 전엔 친일을 했고, 해방이 된 다음엔 친미 행위를 한 사람들이었다’라고 할 수 있다.

영어를 아는 한국인들이 모두 그러했다는 것은 아니고,“해방 당시나 또는 해방 후 얼마 동안은 오늘날처럼 영어를 아는 한국인들이 많지 않았다.”라는 이야기다.

어찌 되었건, 군정 당국은 점령지를 통치하는데 언어장벽(言語障壁) 이라는 걸림돌이 생겨서 영어를 아는 한국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고, <통역정치(通譯政治)>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다.

지금은 영어가 한국의 공용어는 아니지만, “그 땅에서 흔하게 쓰이고 있는 것이 영어다.”라고 할 수 있는데, 크게는 국가기관에서부터 작게는 일반 가정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생활 주변에 영어가 즐비하다.

물론 콩글리쉬(Konglish)를 포함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콩글리쉬(Konglish)라는 말이 나온 김에 ‘가라오케’이야기를 적는다.

1970년대 이후부터 쓰이고 있는 <가라오케>라는 말은 일본어와 영어의 합성어(合成語)이다.   <비어 있다>는 뜻의 일본어인 ‘가라 (空)’와 오케스트라(orchestra) 의 ‘오케 (orche)’를 합쳐서 만든 일종의 조어(造語)다.

말하자면, 사람이 연주하는 대신 기계가 합성하는 반주음에 맞춰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계나, 그 기계를 설치한 술집 등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러한 <가라오케>라는 말이 오늘날엔 영어사전에도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여간 태평양전쟁이 끝난 다음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전에 없었던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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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서울  – 어느 미군이 찍은 사진 3

지금 내가 이런 이야기를 적고 있는 것은 가라오케의 뜻이나 콩글리쉬 에 관한 긴 설명을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니고, 태평양전쟁 이후 조수 (潮水)처럼 한국에 밀려들어온 영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꺼내본 것이다.

한국어 대신 일본어를 국어라고 하던 땅에서 조선총독부 자리에 걸려 있던 일장기(日章旗)가 내려지고, 성조기(星條旗)가 올라갔다.

바꾸어 말하자면, 일본이 그 땅에 뿌려놓은 일본어 대신 영어가 들어 온 것인데, 그 당시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영어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내 자신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적는다. 앞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나는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지난 30년 세월을 미국에서 지내고 있다.

한데,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나에게 하나의 외국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나에게 하나의 외국이다.”라고 했는데, 가령  내가 한국 어느 국제공항에서 입국수속을 하려면, 나는 국적법(國籍法) 때문에 외국인 신분으로 한국에 입국하거나 출국하게 된다.  내가 태어났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의 병역의무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이 나에게 외국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그런 것 뿐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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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서울

지난 30년 동안 모국방문을 한 것이 모두 네 번인데(네 번째는 2004년) 다녀올 때마다 한 달을 넘긴 적이 없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지난 30년 동안에 내가 한국에서 먹고 자고 한 날 수를 합하면 100 일쯤 된다는 이야기다.

10년 전에 다녀온 것이 나의 마지막 모국방문이 될 지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지난 날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내 눈앞을 스쳐 지나 간다.

하여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요즘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속도가 전보다 더 빠르지 않은가?  그러하니, 2004년에 내가 직접 보았던 한국은 오늘날의 한국이 아니라 는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미합중국 시민이기 때문에 이렇게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고, 요즈음 고국(故國)에서 들려오는 각가지 소식들 중엔 나에게 너무나 생소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8.15 당시 이야기를 계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