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에 만나는 자리에 당신을…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온지도 벌써 여러날 되었습니다. 이렇게 올 한해도 서서히 저물어 갑니다. 이번 주간엔 한해에 대한 감사(thanks)를 드리는(giving) 날인 Thanksgiving Day를 맞습니다. 한해의 감사를 드려야만 할 대상들을 꼽아보는 일도 제법 뜻이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아침입니다.

제 자신과 가족들이 드려야할 감사의 내용들과 드려야할 대상들을 헤아려봅니다. 꼽자하니 꼬리를 잇습니다.

그러다 올 한해 제 마음이 자꾸 흐트러질 때마다 붙잡아 주었던 옛 선생님의 말씀 하나 떠올려봅니다.

올 한해 동안 제 마음이 자꾸 흐트러져 일상을 벗어났던 까닭은 “내가 이제껏 잘못 생각하고 살아온 것이 아닐까?”하는 물음 때문이었습니다. 일테면 그것은 제 신앙적 물음이었습니다.

이즈음에 이르러 오만하거나 무지한 자들에 의해 거의 “빨갱이들의 언어”로 규정지어지는 듯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민중”입니다. 이 “민중”이란 말은 어찌보면 제가 살아오면서 (비록 가까이 하지도 못했고, 스스로 그 범주에서 자꾸 벗어나려고 애써왔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겠지만) 꼭 붙잡고 싶었던 화두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제가 이해하고 믿는 성서의 가르침 탓인데, 올 한해 그 이해와 믿음이 자꾸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를 추스리고 깨우쳐주신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바로 “민중과 함께 했던 예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안병무목사님은(1922-1996) “민중이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할것없이 ‘어떤 체제로부터 버림받고 밀려난 소외계층’이다.”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그 민중이란 오늘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그때 그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객관화시켜 절대화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라고 가르쳐 주셨답니다.

바로 2015년 오늘, 소외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민중들이고, 그 소외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이들이 민중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2015년의 제 삶이 민중적인 것이 아니고, 민중과 함께하는 삶도 아니였지만, 그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흉내라도 낸 까닭은 바로 안목사님의 가르침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감사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이해와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성서를 손에 들고 질문하게 했던 신앙에 대한 감사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 나그네나 이방인으로 이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 모두 2015년 감사절에 위하여 기도해야만 할 민중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30년 넘는 세월동안 흔들림없이 민중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외길 걸어온 벗을 소개 드립니다. 저도 30여년만에 이 친구를 처음 만납니다. 헤어져 만난지 30년이 넘었지만, 그가 서 있는 곳에서 한결같이 첫 마음 그대로 “어떤 체제로부터 버림받고 밀려난 소외계층”과 함께 하고 있는 김규복목사입니다. 그는 오늘도 함께하는 이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산다는 것은 오늘 이 자리에서 내일을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을 초대합니다. 뜻깊은 2015년Thanksgiving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김규복목사 초청 온라인

제목 : 한국내 이민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

일시  : 2015 11 24() 오후 9오후11(미국 동부시간 기준)

장소 : 온라인 모임방https://zoom.us/j/6998016922  ) – 당일(11/24) 오후 8시 50분부터 입장 가능합니다. 녹색 글씨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필라 세사모에서 당신을 온라인 강의에 초대합니다.

Join from PC, Mac, Linux, iOS or Android: https://zoom.us/j/6998016922

Or join by phone:

+1 646 558 8656 (US Toll) or +1 408 638 0968 (US Toll)

Meeting ID: 699 801 6922

참조 : http://conta.cc/1Lrc3ug

김규복목사 약력보기 (http://www.seomna.or.kr/page/m1s2.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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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이주민과 함께하는 모임> 사진첩에서

 

Happy Thanksgiving!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제 가게 손님들을 비롯하여 저처럼 구멍가게를 하는 이들의 손님들에게 짧은 편지를 띄우는 일을 계속한지도 제법 되었습니다. 2007년 7월부터 시작해서 이제껏 단 한주도 쉬어본적 없이 이어져 온 일이랍니다.

매번 편지를 쓸때마다 제 맘속에 품는 생각이 하나 있답니다. “단 한사람만에게라도”라는 생각이랍니다. “단 한사람만에게라도” 제 생각이 이어져 단지 편지를 읽는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삶에 대한 푸근함과 감사를 느낄 수 있다면, 제가 하는 일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는 맘으로 이어온 일이랍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띄울 편지를 이 밤에 마무리지었답니다.

이 편지를 제 블로그에 올리는 까닭은 비단 제 손님들 뿐만 아니라 제가 기억하는 모든 이들, 아니 누군가 제가 모르게 저를 기억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드리는 이 계절의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제 인사를 맘속으로 받는 단 한사람 있다면, 그 분에게 드리는 뜻으로….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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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Social Network Service)는 사람들의 생활을 아주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특히 스마트폰 이용자들의 증가와 무선 인터넷 서비스의 확장은 삶의 양식을 빠르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진짜인지 우스개 소리인지 모르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 문자를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는 말도 듣습니다.

이런 삶의 변화는 물론 긍적적인 측면의 것들이 많지만 종종 부정적인 측면도 나타나곤 합니다.

일테면 페이스북 등에 자신의 이야기들을 공유하면서 일반적으로 좋은 것들만 올리다보니, 나이 어린 친구들 가운데 “남들은 저렇게 즐겁게 잘만 사는데…. 나는 뭐지?”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을 비하한다는 뉴스들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런 뉴스들을 보게될 때면 안타까움이 앞선답니다. 사실 남과 자신을 비교하여 스스로 주눅들어하는 일은 SNS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종종 보게되는 일들입니다.

자! 추수감사절 주간입니다. 약 오천만 명이 가족들과 함께 하려 길을 떠나고, 그만한 숫자의 칠면조들이 가족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는Thanksgiving Day가 있는 주간입니다.

얼핏 이 한주간을 모든 사람들이 즐겁고 기쁘게만 보내는 것 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갖고 이웃들을 돌아보면 누구나 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함께 모이는 가족들 한사람 한사람들도 마찬가지일것입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그저 즐겁고 기쁘기만한 “오늘”을 누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입니다.

그 누구라도, 어떤 상황이나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즐길 수 있음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어떤 계획, 어떤 모습 누구와 함께 보내시더라도 즐겁고 풍성한 추수감사절이 되시길 빕니다.

SNS (Social Network Services) has changed people’s everyday lives so much. Especially, the explosion of smartphone users and the rapid expansion of wireless internet service have changed their life styles drastically and quickly.

Whether it is a joke or a fact, I’ve heard that people talk to others through texts on smartphones instead of looking at each other, even if they sit side by side.

While this kind of change in our lives brings about many positive aspects, it also gives rise to negative phenomena.

According to news reports, when people post their stories to share with others on SNS such as Facebook, generally they select only good and happy stories to post. So when youngsters see those posts, they think that “other people enjoy such a happy life… Why isn’t my life like that?” and put themselves down.

I feel sorry when I come across such news. As a matter of fact, social phenomena to compare oneself with others and to put oneself down are not limited to the SNS world, but are happening in the real world all the time. But still, that’s very unfortunate and sad.

Well! It is Thanksgiving Day week. About fifty million people will travel to join their families, and roughly the same number of turkeys will make dinner tables become delicious feast.

On a moment’s thought, we may assume that everybody will enjoy this week happily and delightfully. But, looking around with a little bit more caring mind, we will easily know that is not true.

Even all the family members gathered may not be in the same happy and delightful situation. All of them may not be enjoying only happiness “today.”

However, it is still Thanksgiving Day.

Whoever and in whatever situation you may be, it is a day which you can enjoy and celebrate with thankful and happy feelings.

I wish that all of you will have a happy and abundant Thanksgiving Day, whatever plan you may have, whomever you may be with, and whatever circumstances you may be under.

아름다움에 대하여

어제밤 이후 제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제가 그 생각을 무어라 불러야는지 딱히 이름지어 부를 수가 없었답니다. 제 머리속과 가슴을 꽉채운 어떤 생각이 있기는 한데 “그건 바로 이거다”라고 이름지어 말할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월요일 일터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 ‘어떤 생각’이 그냥 느낌으로만 뱅뱅 돌 뿐이지, 생각이 영글어 표현에 이르는 지경에는 닿지 못했답니다.

그러다 하루가 지난 이 밤, 옛 선생님의 가르침 하나 문득 떠올리면서 그 생각을 무어라 이름 지어야 하는지를 찾아내었답니다. 바로 “아름다움”이랍니다.

저는 어제밤 <접속 – 세월호가족과 재외동포 온라인 만남>이라는 온라인 화상 모임에 함께 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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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임에는 한국에 계신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비롯하여 미국, 캐나다, 독일 등지의 19개 도시에서 참가하신 약 백여명에 가까운 동포들이 함께 했답니다.

비록 컴퓨터나 휴대폰 화상을 통해 얼굴을 맞댄 것이지만, 마치 실제 한 공간에서 만나고 느끼는 것 같은 시간을 함께 했답니다.

어제밤, 거의 두시간을 넘긴 만남속에서 함께했던 이들은 마치 서로서로 손을 맞잡고 이어진 모습으로 하나가 되었었답니다.

그 순간들의 느낌들을 하나로 엮는 생각이란  바로 “아름다움”이었답니다.

사실 어제밤 함께했던 이들이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은 아픔이었답니다.

그리고 어제밤 모임은 그 아픔이 ‘너’만의 것이 아닌 ‘나’와 ‘우리’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였던 동시에 그 아픔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는 “저들을” 향하여  “끝내 너희들도 우리가 되리라”고 함께 외쳐보자고 만든 자리였답니다.

그렇게 아파하는 자들의 모임이었지만 모임에 참석했던 우리 모두는 웃음을 잃을 수 없답니다.

바로 어제밤, 아파하는 우리들이 함께했던 그 웃음에 대한 생각을 “아름다움이다”라고 말씀하신 이는 함석헌선생님이시랍니다.

<그러나 정말 아름다움은 어디 있는지 아느냐? 도리어 강한 대조에 있지 않느냐? 푸른 잎에 붉은 꽃, 시커먼 구름에 반짝이는 샛별 모양으로. 감격을 하지. 비극이 무엇이냐? 극단의 대조 아니냐?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것을 맞대놓음으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 비극이다.우리 마음은 하나됨을 얻는 때에 가장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하나될 수 없는 것을 맞대놓고 거기서 하나됨을 찾으려 하는 때에 아름다움을 느낀다.>

바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세월호에 맺힌 한이 이미 아름다움으로 이어지는 한 “잊혀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아름다운 일들을 이어가는 새로운 걸음들을 이어갈 것입니다.

5.16 쿠데타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6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5.16 쿠데타

한국 현대사에서‘<4.19혁명>은 이승만 박사를 연상(聯想)할 수 있는 말이고, <5.16 쿠데타>의 주인공은 박정희 장군이다.’라는 것이   초등학교 학생용으로 만든 국어사전에도 실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이번 이야기의 제목으로 정한 내용을 엮어 나가기 위해, 우선 그런 설명부터 이 글에 옮겨 적고, 5.16 쿠데타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펼쳐보기로 한다.

<사일구(4.19) 혁명(四一九革命)>

1960년 4월, 12년 동안에 걸친 이승만 정권의 독재 정치와 3.15 정.부통령 선거의 부정에 항거하여 학생과 시민이 들고일어난 일.

<오일륙(5.16) 군사정변(五一六軍事政變)>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소장을 비롯한 청년 장교들이 장면 내각을 뒤업고 정권을 장악한 일.

                  (초등학생 학습 국어사전 (주) 교학사, 1999. 7. 10)

위에 적은 것처럼 <5.16 군사정변>이라고도 하고, <5.16 군사혁명 (軍事革命)>이라고도 하는 <5.16 쿠데타>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朴正熙) 소장을 중심으로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4.19의거 이후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인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일으킨 군사혁명 이다.

이로써 민주당의 장면(張勉)정권이 무너지고 군사혁명정부가 생겼는데,    2년 동안 그들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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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설명하자면, <장면 내각(張勉內閣)> 또는 <장면(張勉)정권>이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다음부터 박정희의 군정이 생길 때까지  그 중간에 있었던 정권이다.

이야기를 잇기 전에 World Book, Inc에서 펴낸The World Book Encyclopedia의 1988 판에 실린 박정희에 대한 기록을 소개한다.

Park Chung Hee (1917-1979) served as president of South Korea from 1963 to 1979.

He had taken power as head of the nation in 1961 after leading a military revolt against the civilian government.

In 1979, Park was assassinated by the head of the country’s Central Intelligence Agency.

Park, controversial leader, helped establish many new industries in South Korea and the country’s economy grew rapidly under his rule.

On the other hand, Park’s government greatly restricted individual rights.

For example, the government made illegal to criticize the president or the constitution, which gave the president almost unlimited power.

Park had many people imprisoned for criticizing his policies.

He declared that harsh rule was needed to guard against attack by North Korea.

Park was born in Sonsan-gun, a country in North Kyongsang Province.

In the early 1940’s he attended military academies and served in the Japanese Army.   (중간 생략)

Park became a Korean Army captain in 1946 and a general in 1953.

After leading the 1961 military revolt, he headed the military government for two years.

In 1963, Park resigned from the army and was elected president by the voters to head a new civilian government.

He was reelected by the voters in 1967 and 1971.

In 1972 and 1978, Park was reelected college made up of persons loyal to him.

위와 같이, 백과사전에 실린 박정희 대통렁이 남긴 행적(行蹟) 중엔 다음과 같은 설명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Park’s government greatly restricted individual rights.

For example, the government made illegal to criticize the    president or the constitution, which gave the president almost unlimited power.

Park had many people imprisoned for criticizing his policies.

위에 옮겨적은 설명만으로도, <5.16 쿠데타>의 주인공인 박정희 장군의 인간성(人間性)이 어떠하다라는 것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출세(出世)에 대한 욕망(欲望)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보기드문 변신(變身)의 달인(達人)이라는 것이 세간(世間)에 알려져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혁명공약(革命公約)>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한데, 그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변질(變質)되어 버렸다.

예를 들면 공약 3번 중, <이 나라 사회(社會)의 모든 부패(腐敗)와 구악(舊惡)을 일소(一掃)하고>라는 말이 있는데, 구악(舊惡) 대신 <신악(新惡)>이 생겼고, 그 신악의 위세(威勢)는 구악을 뺨칠 정도였다.

그런 것 뿐만 아니었다.

공약 6번은 어떠했나?

<……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 >이라는 공약(公約)을 약속대로 실행(實行)했던가?

박정희 소장과 육군사관학교 8기생인 김종필(金鍾泌) 중령 등이 주도 (主導)한 쿠데타 세력은 그들과 합세한 일단(一團)의 병력과 함께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5.16 쿠데타의 주역(主役)인 박정희 장군 …… 이미 앞에 적었듯이 그는 <출세(出世)에 대한 욕망(欲望)이 남달랐고, 변신(變身)의  달인(達人)이라는 것이 세간(世間)에 알려진 사람이다.

  •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때,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였던 박정희는 교사직을 사임하고, 일본의 허수아비 국가인 만주국(滿洲國) 신경군관학교 (新京軍官學校)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다.
  • 일본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것을 맹세했고, 창씨개명할 때 100 퍼센트 일본식으로 성과 이름을 바꾸기까지 했던 박정희 —   그는8.15 해방을 맞아 광복군(光復軍)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귀국한다.

그는 귀국한 다음, 대한민국을 위해 남긴 그의 업적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는 자신의 욕망(欲望)을 위해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고, 결국은 한 나라의 독재자가 되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주도(主導)하는 제4공화국 헌법을 <유신헌법(維新憲法)>이 라고도 한다.   한데, 그 법에는 긴급조치(緊急措置)라는 것이 있다.

긴급조치(緊急措置)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과 같은 것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하듯이, 둘러대기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긴급조치>라는 것은 그 당시 박정희가 장기집권(長期執權)의 꿈을 꾸면서, 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만들어낸 수단과 방법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신의 인생말로(人生末路)를 재촉하는 법이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말도 있고,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도 있는데, 박정희 —–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World Book, Inc에서 펴낸 1988 Edition The World Book Encyclopedia 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설명을 생각해본다.

In 1979, Park was assassinated by the head of the country’s Central Intelligence Agency.

이 설명문에 나온 ‘the head of the country’s Central Intelligence Agency.’의‘the head’라는 표현은 당시 중앙정보부 김재규(金載圭) 부장을 가리킨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엮으면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등, 저명(著名)한 인사 (人士)들의 이름도 적었다.   한데 그들 중 이승만 박사만 빼고, 그 밖에는 모두 이름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지금 이 글에 적고 있는 <김재규(金載圭)>라는 그 이름은 내 마음 속에 늘 있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박정희가 <혁명공약>을 어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번이나 집권기한(執權期限)을 연장(延長)했고, 유신헌법이라는 것으로 집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한데, 박정희 대통령이 휘두르는 그 엄청난 권력을 김재규가 막아낸 것이다.

김재규 …… 그가 어떠한 의도(意圖)로 (예를 들면, 정권 탈취 등) 박정희를 죽였든 간에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사건이 생긴 다음, 박정희 독재가 무너졌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역사(歷史)에 가정(假定)은 있을 수 없다.   이미 이루어진 것은 되돌릴 수 없거나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글을 엮기 위해 한 가지 적는다. 박정희도 갔고, 김재규도 갔다.   한데,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安家) 술판에서 벌어진 그 사건이 없었다면, 이런 글을 쓰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쏜 김재규 장군도 1926년생이다.  5.16 주체(主體)의 한 사람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도 1926년생인데, 그의 구순(九旬,90세)에 관한 글이 인터넷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참고 : 위에 적은 <90세>란 한국의 전통적인 계산법에 따른 것임)

1926년생인 그들은 모두 내 나이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나서 적어보는 것이다.

초대합니다.

우리들이 필라세사모의 이름으로 모이기 시작하던 무렵, 어느 분인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동안 저는 내 모국(母國)이 자랑스러웠답니다. 정말 짧은 시간에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게다가 민주주의를 그렇게 빨리 정착시킨 나라도 없다는 그런 자부심을 준 모국이었답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과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뭐랄까요, 부끄러움이랄까요, 안타까움이랄까요, 그냥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 그래 모국을 위해 뭔가라도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모국이란 말이 너무 크다면 그 말은 접어 두더라도,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을 위해 아주 작은 일이라도 무언가를 해야하지 않을까 물음으로 함께 생각을 나누어 왔습니다. 그렇게 한해가 지나가고 2016이라는 숫자가 코앞에 놓였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손내미면 잡힐듯한 세월이 지났을 뿐인데 많은 이들에겐 고려적보다 먼 옛날 일이 되었고, 아픔을 호소하는 가족들의 소리는 변함없건만 들으려는 귀 있는 자들도 점점 더 줄어만 갑니다. 오히려 “아직도냐?”, “이젠 그만하라”는 목소리가 정상인듯한, 정말 비정상적인 현실입니다.

BN-CL246_skferr_E_20140419002744자! 이쯤 지금으로부터 155년 전인 1860년 5월에 한양 땅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소개해 드립니다. 일년 조금 지난 일을 고려적 이야기로 생각하는 세상이니,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조선조 철종임금 11년차에 일어난 일이지만 한 공간에서 일어난 일로 여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소개드립니다.

포도대장을 지낸 신명순의 집에 낯선 중년의 여인이 스며듭니다. 여인의 이름은 주례, 당시 나이 쉰 네살이었습니다. 여인은 그 때 열 세살이었던 아들을 데리고 신명순의 집을 침입합니다. 가슴에는 단도(短刀)를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신명순은 큰 사랑방에서 아우와 함께 담소중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신명순의 나이는 예순 둘. 주례라는 여인이 단도를 꺼내들고 신명순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신명순 형제의 힘에 맥없이 저지당했습니다. 열 세살 어린 아이도 그냥 얼어버렸고요.

아우성 소리에 신명순의 하인들이 달려들어 여인과 아이를 포박하고 포도청으로 끌고 갔답니다.

그리고 포도청에서 공초한 내용은 이렇답니다.

“지난해 오월에 제(주례) 맏아들이 병들어 죽고 작은 아들 회종이 지난해 팔월에 무슨 일인지 우포도청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열흘도 못되어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몇 달 동안 마음이 저리고 뼈가 삭아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귀하거나 천한거나 다 같은 것입니다.

이 달은 제 맏아들이 죽은 달이요, 둘째 아들의 생일이 낀 달입니다. 도대체 제 작은 아들이 왜 죽었는지를 알고 싶은 생각에 정신이 나가 포도대장 집을 들이닥치게 되었습니다.”

여인 주례는 이 일로 하여 목을 잘리는 형벌로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열 세살 막내는 귀양길에 올랐고요.

그리고 155년이 흘렀습니다. 그 세월동안 아낙 주례같은 삶을 살다가 간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오는 일요일은 11월 15일(한국 시간 11월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580일이 되는 날입니다.

“도대체 우리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 진실을 규명해달라고 외치는 300이 넘는 아낙 주례들의 소리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55년전 아낙 주례의  한맺힌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2015년 오늘 우리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한맺힌 소리들을 들을 귀는 있답니다.  바로 우리들이 말입니다. 더하여 가족들의 한맺힌 소리를 더 크게 전파하는 울림통이 될 수도 있답니다.

바로 그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접속 – 세월호가족과 재외동포 온라인 만남>

일시 : 2015년 11월 15일(일) 오후 9시 (미국 동부시간 기준)

함께 하시렵니까? [email protected] 으로 문의해 주십시요.

초대 – 강도맞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환갑 진갑 다 지났어도 웬만한 모임에 나가면 말석차지랍니다. 하여 자리 펴고 자리 접는 뒷일과 막일들이 제 몫이거니하며 개의치 않는답니다. 물론 말석차지가 좋은 점도 있답니다. 그런 자리에선 이 나이가 아직 청춘이라는 생각도 할수 있거니와 조금 헝클어진다 하여도 눈감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나이로 따져 저보다 어린사람들이 많은 모임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자리에선 아무래도 더욱 신중해지고 가급적 뒷자리에서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려고 애쓰는 편이랍니다. 허나 타고난 성격 때문에 불쑥불쑥 튀는 통에 모임이 끝나고나면 ‘아차!’하는 때가 종종 있답니다.

그렇게 종종 ‘아차!’하면서도 이즈음 제가 즐겨하는 모임이 있답니다. 모임의 이름도 있답니다. 바로 “필라 세사모”입니다. 정식 명칭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이랍니다.

명확히 말하자면 제 거주지가 필라델피아는 아니지만 제가 사는 델라웨어주도 범 필라델피아 지역 변방에 위치함으로 끼워 주신 것이랍니다. 가급적 박수나 치며 앞서가는 이들을 쫓아나 가자고 얼굴 내민 일인데, 종종 버리지 못한 못된 습관으로 ‘아차!’하면서도 모임을 즐기고 있답니다. 무엇보다 모임에 대해 열성적이며 나이살에 비해 ‘아차!’하는 빈도수가 높은 저를 잘 이해해주는 이 모임의 구성원들이 넉넉한 까닭입니다.

이 모임에서 아주 뜻깊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이 온라인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랍니다. 이 행사를 위해 어제 저녁에 약 한 시간에 걸쳐 시험적으로, 온라인에서 여러 다른 지역에 있는 이들이 같은 시간에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연습을 해보았답니다.

한국의 세월호 유가족들 몇 분들을 비롯하여 호주, 영국, 캐나다, 그리고 미국 동부의 뉴욕과 뉴저지 그리고 필라델피아, 중부의 시카고와 테네시, 서부의 켈리포니아 등 여러 곳에 계신 분들이 함께 했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는 일요일(11월 15일) 저녁에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이 온라인에서 만나는 첫번째 행사를 갖는답니다.

자, 이쯤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려합니다. 제가 바라보고 느끼는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의 모습입니다.

제가 잠시나마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님들 가운데 서남동목사님이 계시답니다. 목사님께서 세상 뜨신지 벌써 서른 해가 넘었답니다.  그 어르신께서 즐겨 인용하시던 예수의 비유가 있답니다. 잘 아시거나 한번쯤은 들어보셨음직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0: 29-37

성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 말씀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예수믿는 이들이 해야할 일이라는 해석은 익히 아는 교회의 전통적 이해입니다. 그런데 서남동목사님은 이 비유를 놓고 이렇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의 역할은?” 이라고 말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서목사님은 “강도만나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2015년 현재, 제가 이해하고 느끼고 만나는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모습이랍니다. 바로 이들이 제가 섬겨야하는 예수라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길을 가다 강도만났던 일에 대해 적절한 보상과 배상을 받았고, 이미 다 치유되고도 남을 대접을 받았다고 여긴답니다. 더하여 그렇게 강도 맞는 일은 살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인데 유달리 특별나게 군다고 혀를 차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의 시작은 “영생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 바로 영생을 꿈꾸는 이들에게 대한 답변입니다.

서남동선생님은 그 성서적 물음과 답변을 제게 이렇게 해석해 주신답니다. 오늘 네가 보고 있는 ‘강도만나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인 줄로 알라고 말입니다. 바로 제가 만나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하는 일은 이런 제 생각을 넉넉히 이해해주는 필라세사모의 구성원들이랍니다.

혹시라도 오는 11월 15일 저녁에 있을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의 온라인 만남” 행사에 참여 하시기를 원하시는 페친이 계시다면(단, 재외동포 페친들만) 제게 연락 주시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답니다. 이메일([email protected] 으로)을 주시면 함께 하실 수 있는 안내를 보내 드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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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일로 정말 잔인하고 몹쓸 세상도 경험했지만, 사회를 지탱해 주는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됐어요. – 중략- 아, 소수라도 이렇게 힘써 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덜 억울하구나, 내가 덜 바보구나, 내가 덜 외롭구나 싶어요. – 중략- 그런걸 보면 외면만 받는 세상속에 있는건 아니네요.” – 세월호희생자 길채원학생의 어머니 허영무씨

“진실이라는 목표 하나 보고 달려가다보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 중략-  어쨌든 내가 할수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간다. 그거예요. 이길 가다보면 또 다른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 가고난 뒤에 다른사람들이 언젠가는 밝혀줄거다. 그건 확신해요. 우리가 앞서서 얼마만큼 가줬으니까 다음사람들이 거기에서 출발하면 되니까….” – 세월호희생자 이창현학생의 어머니 최순화씨

누군가의 외로움을 덜어줄 소수가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이 사회를 지탱해 나갈 좋은사람이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누군가 앞서가다 지친 이들의 곁에서 잠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않으시렵니까? 그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송곳

페친 한분이 웹툰(미국에서는 Webtoon보다는  Webcomic 이라 합니다만) ‘송곳’ 이야기를 꾸준히 올리실 때만 하여도 제 눈길은 거기 가닿지 않았답니다. 그러다 드라마 ‘송곳’ 이야기가 연이어지면서 티저 영상을 올리셨고, 제가 그걸 보게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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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로 드라마 ‘송곳’을 찾아 보기 시작했고, 5회까지 보았답니다. 매회 드라마가 시작될 때 똑 같은 자막이 되풀이 됩니다. “이 드라마는 2003년 6월 어느날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라는 자막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서 제 머리속엔 2003이 아니라 1970년대와 2015년 오늘의 모습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답니다.

조지송, 조화순, 김경락(이 양반은 1980년대 미국와서 만났지만)목사님들의 모습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인천과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끌었던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이들을 이어 70년대 후반부터 80년내 중반(제가 이민온 이후는 모른답니다)까지 이른바 노동운동에 삶을 바친 이들의 얼굴들을 떠올려 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분, 어제 송곳 5회를 보다가  “같은 색인지 알았는데 아니였다.”라는 대사에서 떠오른 이가 있답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 기억속에 있는 1970년대에 비하면 2015년 지금의 대한민국은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비단 대한민국 뿐만 아닙니다. 이곳 미국내 동포사회의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먹고, 입고, 자는 환경의 변화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제가 이민온 1980대 중반만 하더라도 개밥통조림 사다먹은 이야기가 그냥 우스개소리만은 아닌 때였습니다.

아무리 못입고, 못먹고, 열악한 잠자리라 하더라도 그 때에 비하면 오늘날은 가히 천국에 가깝다고도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1970년대나, 2003년이나, 2015년 오늘에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줄세워 평가하고, 가르고, 나누어 차별하는 일입니다. 어찌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차별이 더욱 더 심화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쯤, “같은 색인지 알았는데 아니였다.”라는 대사에서 떠오른 분 이야기입니다. 조지송, 조화순목사 이상으로 유명세를 탓던 이입니다. 이즈음에도 종종 뉴스에 이름이 오르락하기도 합니다. 저희 부부 결혼식 때 축복기도를 해주신 분이기도 하십니다.

올초에 그 이에 대한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답니다. 그와 가까이 지내는 분에게서 전해들은 것이지요. 꽤 비싼 차를 타고 다니는 그 이에게 물었답니다. “(목사로서) 이거 좀 과하지 않은가?”라고 말이지요.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었답니다. “우리 고생할만큼 했잖은가? 이젠 이 정도는 우리도 누릴만 하지!”라고요.

저는 목사가 최고 고가의 차를 타고 다닌다고 문제가 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그 차를 어떤 생각으로 타고 다니고, 그 차를 이용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는 따져 보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무엇보다 “우리 고생할만큼 했잖은가? 이젠 이 정도는 우리도 누릴만 하지!”라는 말은 2015년 한국인들 특히 60대 이후 세대들의 굳어진 생각을 대변해 주는 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우리 고생할만큼 했잖은가? 이젠 이 정도는 우리도 누릴만 하지!”라는 말을 고민없이(내가 느끼기에) 뱉어내셨을 이 어른이 두 분 조목사님들과 어깨 나란히 노동현장을 누비고 다니셨던 1970년대에는 분명 성서에 뜻을 두고 예언자적 사명을 다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성서 예언자들은 그들이 예언자적 소명을 다할 때만 기록으로 남겨졌고, 그 소명을 다했을 땐 소리없이 사라졌답니다.

그리고 2015년 오늘은 여전히 ‘송곳’같은 예언자들이 요구되는 시대랍니다. 어쩌면 1970년대나 2003년 보다 더욱 절실하게 말이지요.

4월 혁명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5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4월 혁명

<미완(未完)의 혁명(革命)>이라고도 불리는 4월 혁명은  4.19 학생운동, 4.19 민주혁명, 4.19 의거, 4월 의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보는 사람들의 시각(視角)이나 관점(觀點)에 따라 각각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4월 혁명’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를 요약해서 적는다.

한국근현대사사전엔 4월 혁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이 실려 있다.

  • 1960년 4월 19일을 전후하여 일어난 정치혁명,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제2공화국를 출범시키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의거로 규정되었으나 혁명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며, 4월 19일이 절정을 이루었다 하여 <4.19혁명>이라 불리기도 한다.

4월 혁명의 원인은 대략 이런 것이다.

원인의 근본은 원조경제(援助經濟) 위기서 싹튼 것이라고도 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접어 두고, 4월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승만 1인 독재와 자유당의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었다. 특히,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패색이 짙어진 자유당은 관권을 총동원하여 대규모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그렇게 조작되어 처리된 3월 15일의 선거 결과, 결국은 이승만 후보와 이기붕 후보가 각각 정,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러한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았고, 마산을 비롯해 전국 각처에서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규탄시위가 이어졌다. 이 글의 제목인 <4월 혁명>이란 위에 설명한 <3.15 부정선거>를 저지른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과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장군의 군사정권 사이에 끼어 있던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한데,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의 집권기간(期間)은 다른 어느 대통령들의 재임기간보다도 훨씬 길었다.

제1대 이후 지금까지 11명이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대한민국 70년사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5,16 군정 포함) 두 사람이 집권한 기간은 30년이다.

이승만의 자유당이 12년이고, 박정희의 군정과 공화당이 18년이다.

참고로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의 재임기간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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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야기 제목인 <4월 혁명>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이승만과 박정희 이름이 나오게 되었는데, 내친 김에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성명과 재임기간도 적었다.  그리고 그들 중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적었다.

그러한 <창씨개명>이란 한국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없애려고, 1940년에 일제(日帝)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걸고 강제(强制)로 한국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바꾸어 짓도록 한 것이다.

♦  내선일체(內鮮一體)란 1937년에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그들이 만들어낸 말인데, 내(內)는 그들이 일본 본토를 가리키는 말인‘내지(內地)의 첫 글자를 뜻하는 것이고, 선(鮮)은 조선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말하자면, 內鮮一體란 조선과 일본은 <한 몸>이다라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위에 설명한 ‘內鮮一體’뿐만 아니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뿌리는 같은 것이며, 같은 조상(祖上)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동근동조(同根同祖))라는 말도 만들어냈다. 그러한 당찮은 말을 만들어 내놓은 일본은 조선 사람들에게 터무니  없는 짓을 했던 것인데, 그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강요(强要)한 창씨 개명도 그런 맥락(脈絡)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데 앞에 적은 것처럼 박정희, 최규하,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도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창씨개명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 중, 8.15 광복 후에 태어난 사람은 노무현과 박근혜 두 사람 뿐이고, 그 외는 모두 그 전에 출생한 사람들이다. 그 아홉 대통령 중에서 이승만, 윤보선, 전두환, 노태우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다른 다섯 사람은 창씨 개명을 한 사람들이다.

박정희(朴正熙)는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최규하(崔圭夏)는 우메하라 게이이치(梅原圭一) ,  김영삼(金泳三)은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  김대중(金大中)은 도요타 다이쥬(豊田大中), 이명박(李明博)은 츠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

朴正熙의 正,  崔圭夏의 圭,  金泳三의 金,  金大中의 大中,  李明博의 明博 등, 그들은 모두 제각기 한 글자나 두 글자를 살려서 창씨개명한 흔적(痕迹)이 있다.

창씨개명을 한 조선사람들의 대부분이 위에 적은 것처럼 원래의 성명 중에서 한 두 글자를 살렸는데, 박정희는 달랐다.

박정희는 <창씨개명>을 두 번이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첫번째 것인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에는 ‘朴正熙의 正’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시 지었는데, 오까모토 미노루(岡本實) 로 고쳤다고 한다. 박정희의 그러한 창씨개명은 100 퍼센트 일본인화(日本人化)된 성과 이름이다.

오까모토 미노루(岡本實)에 관한 것은 인터넷 등으로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더 긴 이야기는 적지 않는다.

각설하고, 앞에서도 적었듯이 <4월 혁명>을 화제로 삼아 글을 쓰다보니 창씨개명에 관한 것도 나왔고, 창씨개명에 관한 이야기를 적다보니 이승만과 박정희 두 대통령 이름도 나왔다.

이화장태평양전쟁이 끝난 다음, 이승만 박사가 그의 부인(프란체스카 도너 리)과 함께 미국에서 귀국하여, 서울 돈암동 부근에 있는 돈암장(敦岩莊)이라는 곳에서 얼마동안 살다가 종로 이화동에 있는 이화장(梨花莊)으로 이사했다.  그곳으로 이사한 이 박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때까지 이화장에서 살았는데, 그 무렵에 나는 이화장을 개축(改築)하는 공사현장에서 얼마 동안 일한 적이 있었다.

♦  내가 거기서 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당시 그 공사를 맡은 제일토건사 (사장 : 金相根, 당시 서울  을지로 사거리 근처 소재)의 김예수(金禮洙) 부사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Charlie Kim이라고도 불렸던 김예수 부사장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당시 서울 용산 한남동에 있던 13th Engineer Batallion 이라는 미군부대에 취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부대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미육군 제7보병사단과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USAMGIK)에 관한 이야기까지 적어야 될 것이다.

USAMGIK, 즉,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에 항복한 뒤, 미군 제24군단 (XXIV Corps)이 1945 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을 다스리던 군사적 통치기관이다.  이 글의 목적이 그러한 미군정(美軍政)에 관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이화장을 개축(改築)하는 공사현장에서 일하게 되었던 설명을 하기 위해 꺼내본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관한 이야기는 더 적지 않는다.

하여간, 나는 13th Engineer Batallion이라는 미군부대 부대장인 윌헬름  중령(Lt. Col. William E. Wilhelm) 관저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김 부사장을 알게 된 것과 이화장 공사현장에서 내가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러한 사유(事由)가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앞에 적었듯이 나는 이승만 박사 내외가 살고있던 이화장 개축공사현장에서 얼마동안 일한 적이 있었다.

한데, 백발이 성성한 그 분을 가까이에서 살펴본 첫인상은 평범해보이 는 노인이었다. 그는 가끔 공사현장에 나타나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 보기도 하면서 현장을 둘러보았는데, 그때 그 모습이 생각난다. 아주 자상하고 찬찬해 보이던 그런 분이 어찌하여 인생말년(人生末年)   에 이르러서는 부끄럽고 명예스럽지 못한 길로 가게 되었을까?

말하자면, 그 노인의 그러한 삶은 지나친 노욕(老慾)과 분수에 넘치는 과욕(過慾)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어원은 중국 공산당 창건자인 모택동(毛澤東)의 어록 (語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다른 사람이나 사물(事物)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한 뜻으로 볼때, 한국현대사에서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반면교사>의 본을 보여주고 간 사람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 자리에 있을 당시, 서울 남산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한데, 4.19 후에 그 동상이 철거되었다.  그리고, 반세기 (半世紀)가 지나갔다.

51년만에 남산 언저리에 다시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그런 것이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이화장 개축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이승만 박사를 가까이에서 살펴본 생각이 나서, 그 당시에 있었던 이야기를 이 글에 적어 보는 것이다.

이번 글의 제목인 <4월 혁명>이 말해주고 있듯이 그 당시에 벌어졌던 선거와 관련된 것 한가지만을 가지고 이승만 박사를 평(評)한다면, 그의 과오(過誤)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당연히 그가 비난(非難)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 90년>이라는 그의 한평생을 두루 살펴보면, 거대(巨大) 한 삶과 꿈이 담긴 그의 생애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까닭

일주일에 한번씩 온라인 화상으로 만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가족들이 앓고 있는 아픔이 이어지는 한, 우리라도 그들을 잊지말고 그 아픔의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으면 나누어 보자고 만나는 친구들입니다.

모일 때마다 작은 주제를 정해놓고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곤 합니다. 지난 주에는  “미국에 사는 우리들은 왜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왜 이민와 살면서 떠나온 모국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이도 다르고 미국에 온 햇수도 다르고 이제껏 살아온 경험들도 서로 다르거니와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도 있고, 자영업을 하는 친구들도 있고, 가정주부로 자녀교육에 열심인 친구도 있으니 저마다 다른 생각들이 있었답니다.

그날 모임은 일테면 그렇게 서로 다른 우리들이 왜 모여 함께 이야기하고 우리들이 나눈 이야기들을 전파할 수 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하는 자리였습니다.

늘 그렇듯 모임이 끝나면 저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또 새롭게 눈뜨는 것들로해서 이 나이에 과한 즐거움을 얻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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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난 주말과 주초에 제가 경험한 일 때문에 이 글을 써보는 것입니다.

이른바 SNS라는 신종 대화 도구들이 있습니다.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카톡, 텔레그램 등등이 그것들이지요. 저는 제 또래 남못지않게  이런 신종 도구들을 먼저 사용해보는 왈 얼리어답터에 속하는 편입니다. 모든지 처음 나왔다하면 찝적거려보기는 하는 편이랍니다. 그런데 즐기는 쪽으로 접어들면 완전히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쪽이랍니다.

일테면 저는 제 소유의 셀폰(핸드폰, 스마트폰 무어라고 부르던간에)이 없습니다. 그저 PC와tablet을 가지고 놀 뿐입니다. 전혀 불편함을 모르고 삽니다. 폰을 손이나 핸드백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사는 아내를 보면 이따금  “왜 저럴까?”하는 생각을 하곤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저더러 “촌스럼의 극치로 산다”고 말한답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랍니다. 트위터에서 누군가를 팔로잉한다든가 페북에서 친구맺기를 신청한다든가, 댓글을 단다든가 하는 일에는 거의 쑥맥에 가까운 촌스러움이 있답니다. 그저 수줍게 제 이야기를 올리고 그것으로 족한 편이지요. 당연히 팔로윙이니 팔로워니, 친구숫자니 하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는 편이랍니다.

그러니 말이 사회관계망서비스 이용을 할 뿐이지 골방에서 제 이야기를 혼자 떠드는 수준에 불과한 진짜 촌스러움의 극치랍니다.

그런 제게 지난 주말과 주초에 댓글로 충고들을 남긴 이들이 있답니다. 한 친구는 지금이라도 만나면 “야~ 쨔샤!”하며 반길 중고등학교 동창이고, 또 다른 이는 전혀 모르는 어찌 하다보니 페북에서 만난 분입니다.

제 어릴 적 친구는 현재 한국에 살고, 페북에서 만난 분은 미국에 사시는 이입니다.

먼저 헤어져 만나지 거의 40년이 넘는 제 어릴적 친구의 충고는 “떠났으면 지금 사는 곳의 삶에 충실하길 바란다. 여긴 사는 우리들이 꾸려나갈 것이므로…”하는 것이였는데, 그 충고를 남긴 시간과 그 친구가 누리고 있었던 형편으로 미루어 오랜 옛 벗인 저를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와 그리 멀리 않은 곳에서 사는 페북에서 알게된 이의 충고는 “차라리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게 좋겠다”는 것이었는데 사뭇 성난 투의 말이었답니다.

두 사람 다 제가 페북에 올린 한국관련 이야기들에 대한 반응들이었지요.

그래 저를 다시 돌아보는 것이랍니다.

먼저 최근에 제가 받은 이메일 몇 개를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제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You’re welcome.  I’m glad you are here, and doing what you do, too. Very interesting article — research which reinforced my observations / perceptions in a few of the listed occupations. >

<Mr. Kim,

Thanks for your note. It reminded me of the African-American slaves, when the children and spouses were sold and they knew, chances were, they would not see each other again.  My Dad told me of stories where slaves who were able to escape to the north, who spent the rest of their days trying to find out where their kin lived and to reconnect.  Some stories ended right and others ended very sad.  To this day I cannot trace my family back to the slavery days.  However, my wife Mae can trace her descendants back to Nova Scotia, Canada and the slave ship that brought the family to Halifax from Jamestown, VA.

I always enjoy your notes: they make us think!>

<Mr. Kim,

I really like your note. I hope you are right about the move to the “HANGRY” Generation .  I see the “me first” in our national politics. Maybe that will change as the younger generation influences.>

<Dear Young Kim,

Thank you for another delightful letter from My Cleaners.  I agree the world is full of very diverse people with lots of differing attitudes and beliefs.  Your reminder to be open to others comes at a perfect time.  Well, any day would be the perfect time, wouldn’t it?

What transpires at your counter, everyday, is a wonderful example of openness and willingness to come into relationship.  One of my teachers would say that we move through a progression in knowing people.  We start as Strangers, move to Acquaintances, then to Rapport and finally into Relationship.

Strangers — we know nothing about each other

Acquaintances — we know some facts (name, address, phone number) about each other.

Rapport — we share similar feelings, are harmonious, we can get along

Relationship — we share and understand what to expect from each other, we share mutual expectations.

In my business (dental practice) we used to say, “Never treat a stranger.”

Of course, always started out as Strangers.  We easily became Acquaintances with a written intake form which shared the needed data.

Coming into Rapport was more time consuming, requiring some questions and answers, sharing of information, thoughts, feelings, opinions, experiences.

Relationship required a more complete discussion of what we each expected from each other.

Although not everyone wants to be in Relationship with every other person, or even with their healthcare providers, (or cleaners).  We all can easily move toward Rapport, starting with just a SMILE.  A welcoming, open attitude begins there and moves ahead with words and gestures.

Your “Letter From Your Cleaner” constantly reminds us what we can expect from you.  This is an open door for relationship building.  What you can expect from me, is to be paid for your service.  I also may provide a pleasant attitude, timely retrieval of my clothes, a sincere referral of a friend to your business.  Thus, we move into Relationship as we each fulfill our mutual expectations.  This is the basis of a trusting, respectful Relationship.

My wardrobe is improved by your cleaning service, and my life is improved by your letter and my spirit is lifted by our relationship.

Yours for a better world,>

제가 이 이민의 땅에서 이곳 사람들에게 받은 이런 종류의 메일은 책으로 엮는다면 족히 몇권 분량은 된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제가 이 미국에서 이민자로 사는 삶의 모습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비춰진 일면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저는 “괜찮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알려지고 싶은 욕망도 있거니와 저로 인해 한국과 한국인들의 좋은 점들이 드러나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민의 삶을 이제껏 가꾸어 나왔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런데 제게 늘 자랑스러워야 할  대한민국이 손가락질 받고 우스개 노릇으로 전락하는 모습은 정말 아니랍니다. 그래 한국과 한반도에 대해 제가 관심을 끊지 못하거니와 적극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런 제가 종북이니 반국가적(반정부라는  말은 그래도 들을만 하답니다.)이니 하는 말을 듣게되면 솔직히 분노가 치민답니다.

사르트르는 <유대인>이라는 책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반유대주의란 유대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유대인”을 “혐오집단”으로 지목해 그들에 대한 증오없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반유대주의자들의 문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이어갑니다 <만약 유럽의 부르조아들은 그런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유대인이라는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사르트르가 이런 말을 남겼던 때로부터 70년이 흘렀습니다.

중동에서는 유대인들이 옛날 유럽인 행세를 하고 있듯이, 같은 한인들끼리 한반도 안에서 그리고 이곳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혐오집단”과 “증오의 대상”을 찾는 못된 관습은 사라져야 마땅한 일입니다.

제가 이 땅에서 더욱더 미국인으로 살기 위해서라도 한국과 한반도에 대한 관심과 이야기를 끊을 수 없는 까닭이랍니다.

가을 주일아침

Daylight savings time  해제로 간밤에 시간이 바뀌자 아침시간이 사뭇 길어졌습니다. 주일아침 습관으로 일어나 성서 한쪽 읽고, 뉴스 검색 좀 하다가 집안을 서성거려도 아내를 깨우기는 아직 이른 시간입니다. 밖은 이미 훤하지만 행여 모처럼 되찾은 한시간을 잠속에서 즐기려는 아내가 깰까봐 조심스레 집을 나섭니다. 평소처럼 왼쪽으로 꺽어 동네 한바퀴를 돌까하다가 오른쪽으로 꺽어 동네 밖으로 나서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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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앞에 작은 개천이 있습니다. White Clay Creek입니다. 봄이면 동네 낚시꾼들이 꼬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민물 송어를 낚기위해서지요. 봄 낚시철이면 주정부에서 낚시꾼들을 위해 송어를 방사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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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엔 실개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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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Halloween day였음을 알려주는 장식을 한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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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한 집과 이웃집 뒤뜰을 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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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전후에 이 동네에 새로운 마을들이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옛 집입니다. 지붕에는 파란 이끼가 가득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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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집 앞마당에 놓인 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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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앞에 선 고목에 경고문이 붙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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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개인소유이므로 여기서 사냥, 낚시, 덫 놓는 일 , 무단침입을 금한다는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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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길입니다. 동네 관광용 기차가 다닙니다. 이 동네에서 근 이십년 살면서 실제 기차를 본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아내는 아이들과 몇번 기차를 타본 적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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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시가지를 관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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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 너머 하얀 건물들은 버섯공장입니다. 녹색팻말은 동네 야구장 안내판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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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ckessin 시의 구시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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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교회당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 이 동네에서 제일 작은 교회당일겝니다. 동네에 있는 한인교회와 중국인교회에 비한다하여도 규모가 1/10, 1/20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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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ppey 교회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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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연혁입니다. African – American 교회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흑인교회지요. 미국내African – American 교회형성 과정과 Chippey 교회당의 연혁이 새겨져 있습니다. 현재 이 교회당 건물은 1972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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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당 옆에 쇠락한 건물이 몇 년째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때 동네 마을회관(community center)으로 쓰였던 곳입니다. 한인회에서 몇차례 노인잔치할 때 빌려 쓰기도 했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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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개천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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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독립기념일이면 불꽃놀이 축포를 쏘아 올리는 옛 체육공원입니다. 야구장과 football(미식축구)장이 있는 곳입니다. 보이는 축구꼴대 뒤로 크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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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새로생긴 축구(soccer)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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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규격 축구장 네곳이 붙어있습니다. 최근 미국 기호 스포츠로 급부상한 축구열기를 느낄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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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외길 다리입니다. 이쪽 차 한대 가면 저쪽 차 한대가 지나갈 수 있는 외길 다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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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길다리 아래 개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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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 핀 빨간 열매를 보며 옛날 앵두나 까마중 생각을 해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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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라도 있는 집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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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땐 입술 까맣게 까마중  따먹던 어린애였는데 어느새 손주 생각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주일아침이라고 부르던 시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