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적

하늘이 내린 이틀 연휴였습니다. 비록 눈치우노라고 다섯시간 가까이 운동 아닌 노동을 하였지만 넉넉한 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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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덮힌 동네 한바퀴를 돌고나서 입센(Henrik Ibsen)의 희곡 “민중의 적( An Enemy of the People)”을 읽었습니다.

예상되는 눈폭풍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강설량을 비롯한 하늘의 변화를 거의 분단위로 미리 알아 맞추어 사람들에게 대비케하는 21세기에, 19세기말 작가의 작품이 가당키나 한 것이냐는 생각도 없지 않았답니다.

읽고난 후의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사람 사는 일 또는 사람이란 참 변하지 않는 구석과 변하더라도 더디게 정말 더디게, 수천 수만년을 겪어야 변하는 것들이 있구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19세기말 노르웨이에서 그 당시 세계, 곧 유럽이 중심이었던 세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불었던  예술 운동의 하나였던 리얼리즘(realism)을 내세운 입센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민중의 적’은 바로 변하지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리얼리즘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현실주의(現實主義) 또는 사실주의(寫實主義)라고 번역되어지지만 그저 사람사는 일들을 사진 찍듯 표현한 사실(寫實)적인 희곡입니다.

정말 간단히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주인공인 스토크먼은 자기가 사는 동네 발전에 유익하다고 선전하며 강행되고 있는 사업인  온천개발 사업이 사실상 오염된 온천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건 아니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돈에 눈이 먼 지역 이기주의들<권력(시장을 비롯한 행정, 정치권력), 언론권력, 일반인들(민중들)>에 의해 ‘민중의 적’으로 낙인찍히는 과정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민중을 위해 나선 주인공이 민중의 적이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지요.

작품속에선 민중을 향한 두개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이렇게 전합니다.

스토크만: 내겐 진실이 있고 민중이 함께합니다. 온천은 오염됐으며 정치도 썩었다고 외치겠습니다.

시장(mayor): “이 나라는 지금 파산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모두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정의를 외쳐대는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까? 행정 당국이 파괴되면 남는 게 뭡니까? 혁명과 혼란을 원하십니까?”…. “난 5년 안에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을 세계 최고의 부자 시민으로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대로 온천의 작은 문제를 확대하고 과장하여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민주적 권리’를 주장해도 되겠습니까?….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선은 분명하게 그어져야 하고, 누군가 그 선을 넘을 때는 우리 민중은 그자의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안 돼!’라고 단호하게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스토크만: “‘다수’가 깨닫기 전에 먼저 한 사람의 ‘소수’가 알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 진리는 언제나 같습니다. ‘소수의 권리’는 ‘다수’에게 공격을 받더라도 신성한 것입니다. (시장이 ‘저자의 입을 막으라’고 소리친다) 모두 알아두셔야 합니다. 온천물은 오염되었습니다.

주민들(민중): “오염이란 말 한마디만 더 하면 가만 안 둔다!” “이 동네에서 살기 싫으면 짐 싸가지고 조용히 떠나라!” “저놈을 체포하라!” “저놈은 간첩이다!” “적이다, 적! 적이다, 적! 강물 속에 쳐 넣어라!” “적이다!배반자! 반역이다!”

그리고 이제 민중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적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제가 “민중”이라는 말을 배운 것은 서남동, 안병무 목사님들에게서 입니다.

특별히 안병무선생님께서는 “민중이란 예수”라고 말씀하셨던 분입니다. 그는 예수란 어떤 개인적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인격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신 어른입니다. 민중과 예수는 더불어 함께라고 하셨습니다. 민중이 곧 예수라고 말한 이였습니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건’들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쯤 흥미로운 것은 예수는 바로 입센의 ‘민중의 적’에 나오는 ‘민중’들의 외침 곧 “저놈을 체포하라!” “저놈은 간첩이다!” “적이다, 적! 적이다, 적! 강물 속에 쳐 넣어라!” “적이다!배반자! 반역이다!”라는 소리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事實)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寫實)적으로 믿는 것은 신앙입니다.

내가 눈이 내리는 이곳에 사는한 겨울이면 눈은 내릴 것이고, 눈을 치울 힘이 있는한 눈을 치우며 살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있는한 누구나 때론 민중이 되기도 하고 민중의 적이 되기도 하며 살 것입니다.

그리고…

무릇 신앙이란 결단이어야 합니다. 민중이라는 말 없이도.

올해도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2016년 초하루도 저무는 시간입니다.

노부모님들께 얼굴 내밀어 짧은 새해 인사를 드린 후 집에서 쉬며 하루해를 보냅니다.

늦은 저녁에 Henry David Thoreau를 찾아 손에 들었습니다.

civil-disobedience-2150여년 전에 마흔 다섯 짧은 삶을 누리다 간 사내가 숲속이나 감옥에서 남긴 말들이 2016년 초하루 제 맘속에서 살아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오늘 도시속에서 제가 바라보는 세상이나 150여년전 매사추세츠 월든 호수가에서 쏘로우가 바라보았던 세상이나 별반 다름이 없기 때문일겝니다.

짧은 미국 역사속에서 손꼽을만한 미국의 정신(精神) 가운데 한사람인Henry David Thoreau의 말이 여전히 유효한 2016년을 시작하면서, 그가 이미 파악했던 내가 살아가야하는 환경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방향을 곱씹어 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매일 반나절을 사랑하는 마음에 가득 차서 숲속을 산책한다면, 게으름뱅이로 낙인찍힐 것이다. 그러나 만일 숲을 밀어내어 평평한 땅으로 만드는 투기꾼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그는 부지런하고 진취적인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If a man walks in the woods for love of them half of each day, he is in danger of being regarded as a loafer. But if he spends his days as a speculator, shearing off those woods and making the earth bald before her time, he is deemed an industrious and enterprising citizen.) – Walden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단체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모인 단체는 양심을 가진 단체이다. 법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 조차도 매일매일 불의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 I think that we should be men first, and subjects afterward. It is not desirable to cultivate a respect for the law, so much as for the right. The only obligation which I have a right to assume is to do at any time what I think right. It is truly enough said that a corporation has no conscience; but a corporation of conscientious men is a corporation with a conscience. Law never made men a whit more just; and, by means of their respect for it, even the well-disposed are daily made the agents of injustice.) – 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

***40년 전에 제게 Henry David Thoreau의 “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을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은 이즈음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시민이 되지 말고 국민이 되어야 한다”며 노망을 부리지시만…

세월 – 그래도 감사함에

어제 손님 가운데 올해 일흔 네살인 유태계 Rose할머니와 나눈 이야기랍니다. 은퇴 의사인 남편과 늘 함께 오시곤하는데 어제는 혼자였답니다. 성탄 인사로 이어진 그녀의 이야기였지요.

“나이따라 세월의 속도가 달라진다더니, 60 넘고서부터는 시간이 거의 100마일로 달려가는 것 같아. 그 속도 보다는 좀 느리지만 자꾸 몸도 줄어들고 말이야. 삼년전에 왼쪽 다리 수술하고는 한쪽이 짧아졌는데… 우스운 소리같지만, 오른쪽 다리로 서서 보는 세상과 왼쪽 다리로 서서 보는 세상이 그게 몇인치 차이뿐이지만 달라보여. 그래도 확실한 것은 하나 있지. 내가 지금 걸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야.”

몇 해전 까지만 하여도 하누카 인사를 내세운 고집스런 할머니와 성탄인사를 나누며 든 생각은 바로 세월이랍니다.

2015년을 뒤돌아보는 성탄 아침입니다.

이맘 때면 늘 그렇듯 아쉬움들이 먼저 다가옵니다. 올해 마무리 짓지 못하고 해를 넘기는 일들, 끝내 포기하고 만 일들을 따라 떠오르는 아쉬움들입니다.

그 아쉬움들을 감사함으로 덮을 수 있는 생각은 누가 무어라해도 신앙에서 오는 것입니다.

때론 아슬아슬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네 분 노인들이 모두 올 한해를 무탈하게 지내신 것이 큰 감사입니다.

90대로 진입하신 두분(제 부모님), 90대를 코 앞에 두신 장인, 80대를 손에 잡으려는 장모 – 이렇게 네 분이랍니다.

Tom's beer1-12-24-15제일 막내격인 장모가 이즈음 재발한 암과 씨름 중이신데, 아주 밝게 잘 견디어 내시는 모습에 감사하답니다. Chemoembolization(색전술) 치료중이신데 함께하는 아내나 장모나 늘 밝은 모습이어서 감사의 크기가 큽니다.

모처럼 집에서 함께하는 아이들과 맛난 것 사먹으라고 쌈지돈 내미시는 제 부모님들에게 느끼는 감사의 크기 역시 그 못지 않답니다.

5주 동안 숙성시켜 어제 아침에 받아낸 맥주에 그야말로 한정판 레이블을 붙여서 성탄선물을 건네 준  Kennedy씨의 맥주는 오늘 저녁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할 만찬에서 나눌 요량이랍니다.

저 역시 100마일의 속도를 느끼는 세월이지만 오직 감사함으로.

2015년 성탄 아침에.

삶은…

뭐 고령 사회이니 아직 애 취급 받을 때도 종종 있지만 제 나이도 만만찮답니다. 이따금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해야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쓸데없다고 말할 나이가 아니랍니다. 평균 연령이 높다고 그게 제 껏은 아니니까요.

그렇게 2015년이 저물어가고, 오늘은 성탄전야입니다.

아기예수가 2000번 넘게 태어나 기리는 날입니다. 제가 말과 글을 배울 때 2000년이던 세월이 제 나이 예순 몇에도 이천년입니다.

예수는 여전히 태어나고, 살고, 죽고, 다시…

오늘의 뜻일겝니다.

돌아볼수록 올 한해가 그저 감사입니다.

감사 이전에, 늘 부글거리는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화가 제 맘속에 가득했었답니다.

개인적으로는 연초에 계획했던 일들, 세상사로는 제 뜻과 어긋난 일들을 생각하면 그저 분이 차오를 뿐이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뿐이랍니다.

허구한날 태어나 죽임을 당한 사람 같은 신, 신 같은 사람.

짧게 흥으로 살다간 끝내 신이 된 예수의 생일 전야이기 때문입니다.

90대, 80대에 이른 부모 앞에서 재롱 피어야하는 60대이어도 흥입니다.

무릇 삶이란…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에 흥을 잃으면 뜻이 없기에.

그리고 역사란  그 뜻있는 사람들이 이어가는 것임으로.

이 밤은 그저 흥으로.

2015년 성탄에 …

‘정치적’이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아시안-아메리칸들의 표를 결집시켜 권리신장을 도모하기 위해, 아시안-아메리칸 정치참여단체인 <80-20>가 참여를 독려하는 메시지입니다. 번역하여 소개드립니다.

  1. 정치적인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2.  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지,  3.  선거와 투표가 왜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글입니다.

비단 미국에 사는 소수계 이민집단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디에 살건 “시민”으로 살아가는 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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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고만 한다면, 하기 매우 쉽다.

        아시안계가 기회 균등을 획득하는 3가지 쉬운 방법

(1) 미국에서 “정치적”이란 무엇인지 이해하기

미국에서는, 당파적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정치적’ 인 것이다. 비영리 단체는 거기에 관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관여하면, 비영리 자격을 박탈당한다. 입법과정에 로비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으로 고려될 수 있지만,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

그에 반해서, 정부 혹은 정부 관리와 연관된 이슈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은 전혀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민과 미국 정부간의 대화에 불과할 뿐이다. 심지어 우리가 정부나 정부 관리를 부당하게 비판했을 때라도, 고의로 그리고 악의로 그릇된 정보를 밀어부치지 않는 한, 제 1차 헌법개정인 언론의 자유 규정에 의해 보호받는다.

미국에서 ‘정치적’ 이란 것의 정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시안계 박사, 교수, 중국인 교장과 교사, 전문가 조직 단체장, 기타 비영리 단체들이 매우 많다. 그들은 잘못 알고 있어서, 법무부가 시행한 중국계 미국인에 대한 명백한 프로화일링에 대한 자신의 견해 표명을 자제하였다.

그들은 틀렸다!!!!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우리 커뮤니티를 위한 강력한 지식인의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무지때문에 그들은 침묵했다. 그것이 바로 “’정치적’의 의미를 아는 것”이 우리 자신을 강력하게 만드는 3가지 쉬운 방법의 첫번째인 이유이다.

(2) 너무 소심하지 마라.

우리의 일시적이고 사소한 득실 대신에 우리 자녀들의 미래에 대해 보다 더 생각하라.

(3) 우리에게 선거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이용하라.

표를 구하는 후보자들이 공약을 내세울 것을 미국 정당은 권장한다. 종국적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는 것이 선거를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이다. 그래서, 모든 선거, 특히 대통령 선거는 아시안계 미국인들에게는 현재 우리의 불평등한 위치를 조금씩 개선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어떻게 약속을 얻어내는가? 정치인이 선거에 승리한 후에 우리에게 한 약속을 이행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가? 아주 복잡하다. 운좋게 우리의 정당한 이해를 위해 헌신하는 전문가 단체가 있다면, 그들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다.

요컨대, 부동 집단 투표(swing bloc vote)가 공약을 얻어내는 최고의 유인책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후보자를 가장 진하게 보상하거나 가장 심하게 벌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80-20가 양대 정당이 우리의 이해를 놓고 경쟁하게 유인하기 위하여 언제나 부동 집단 투표를 지지하는 이유이다.

어떤 질문을 할 지 누가 알겠는가? 누가 “부동 집단 투표(swing bloc vote)”를 전달해줄 수 있는가? 곰곰 생각해보라. 80-20 말고, 그 누가 능력과 경험을 갖추고 있는가?


So easy to do, if only you’ll do it.

        3 easy ways for AsAms to win equal opportunity

(1) Understanding what is “political” in the U.S.

   In the U.S., taking a part  in partisan elections is political.  Non-profit organizations are not permitted to engaged in it.  Otherwise their non-profit status will be taken away.  Lobbying in the legislative process could be considered as political but not always.

   In contrast, taking a position on an issue which involves government or government officials is NOT AT ALL political.  It is just conversations between citizens and the US government.  Even when we have criticized the government or officials wrongly, we are protected by the 1st amendment, freedom of speech, unless we knowingly and maliciously push the wrong information.

   There are so many AsAms Ph.Ds, professors, Chinese school principals and teachers, heads of professional organizations, and other nonprofit orgs. who don’t understand the U.S definition of political.  They refrained themselves from expressing their view on the apparent profiling of Chinese Ams by the Dept. of Justice, because of their mis-understanding.

    THEY ARE SO WRONG!!!!

    Instead of being a powerful educated voice for our community to fight for our rights, they silenced themselves because of their ignorance.  That is why “knowing the meaning of political” is the 1st of the 3 EASY WAYS to strengthen ourselves.

(2)  Be less timid.

Think more for our children’s future instead of our temporary & small gains and losses.

(3) Understand the importance of elections to us, and make use of them.

     Candidates seeking votes are encouraged by US political parties to make promises.  After all, finding out what people want is one important reason of holding elections.  Hence, every election, especially the presidential elections, is AsAms’ golden opportunity to chip away at our current UN-equal status.

     How to get the promises?  How to get the politicians to fulfill the promises to us after they are elected?  Very complicated.  Best leave it to the professionals, IF we are lucky enough to have such a group who are dedicated to our rightful interests.

   In essence, A swing bloc vote is the best inducement to get the promises, because it rewards the candidates most richly or punishes them the most severely.   That is who 80-20 has always advocated a swing bloc vote in order to induce both major political parties to complete to serve our interests.

    Who knows what questions to ask?  Who can deliver a “swing bloc vote”?   Search your mind.  Who else but 80-20 has the ability & experience?

대행만능시대 (代行萬能時代)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9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대행만능시대 (代行萬能時代)

대행(代行)은 누구를 대신하여 무엇을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는 <대행>이라는 말의 뜻은 앞에 적은 <진짜와 가짜> 이야기 끝 부분에 나온 것처럼, 제물로 쓸 물건을 사다달라고 부탁받은 사람이 그 부탁을 한 사람의 심부름을 해준 것과 같은 정도의 뜻이 아니다.   어째서 그렇다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이렇다.   예를 들면,  광고대행사,  분양대행사,  마케팅대행사 등등 – 그냥 <심부름> 정도가 아니고, 하나의 기업(企業)을 이루고 있는 업체(業體)들도 수두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생략하고, 다른 것에 관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위에 적은 것 말고, 다른 종류의 대행업(代行業)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 몇 가지를 적는다.

법화경(法華經)이라고 하는 불교의 경전(經典)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 (1) 태어나고, (2) 늙고, (3) 병들고, (4) 죽는 것을   生老病死라고도 하는데, <죽음>과 같은 뜻의 말인 사(死), 사거(死去), 사망(死亡) 등에 쓰이는 <죽을 사(死)>자 이야기를 엮어 보기로 한다.

그런 이야기를 엮으려면, 적어도 한자(漢字)에 관한 것을 폭넓게 설명 해야 되겠지만, 이 글(책)을 엮는 목적이 그러한 것에 관한 긴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로 지금 적고 있는 生老病死에 나온 글자인 <死>에 관한 것만를 간략하게 적는다.

<死>를 파자(破字)해보면, 즉 분해(分解)해보면 세 가지 요소(要素)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一 + 夕 + 匕 = 死

一(일)은 지평선(地平線, 또는 어떤 기준[基準])이다.

예를 들면, 위를 뜻하는 글자인 上   (ㅏ + ㅡ = 上)

아래를 뜻하는 글자인 下   (ㅡ + ㅏ = 下)

夕(석)은 저녁이다.   낮 시간의 활동이 끝나는 때다.

匕(비)는 숟가락의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象形文字)로, ’숟가락’을 뜻한다.

저녁(夕) 숟가락(匕)을 땅(一)에 묻어버려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니, 즉, 一 + 夕 + 匕 = 死(죽을 사)다.

엉터리 해석인가?

사람들 중엔 천수(天壽)를 다 누리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사람의 한평생을 말할 때, <生老病死>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건, 그러한 것을 부정(否定)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멀쩡하던 사람이 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 예기치 못했던 화재 때문에 불에 타 죽는 사람도 있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있고, 그 밖에도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이유가 여러가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목숨을 잃는 것에는 각양 각색 모습들이 있고, 아무도 그런 것을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死>에 대한 설명에 나온 말처럼 사람이 <밥숟가락을 놓으면> 그 순간부터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괜히 적었나?

각설하고, 박정희 장군이 5.16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원수(國家元首)가 된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은 호칭으로 불린 적이 있다.

대통령권한대행 국가재건 최고회의의장 육군대장 박정희 (大統領權限代行 國家再建 最高會議議長 陸軍大將 朴正熙)

어마어마한 그 직함(職銜)엔 <代行>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대행>이라는 이야기를 적으면서 해보는 말이다.

오늘날 <대행>과 관련된 한국의 실정(實情)은 어떠한가?

이미 앞에 적은 광고대행사나 분양대행사 등을 포함하여, 그 가지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종류가 많다.

capture-20151210-174435한데, 언제부터인가 제사 지내는 것도 대행하는 업체가 있다. 아무리 대행만능시대(代行萬能時代)로 변하고 있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자기 조상 제사도 남이 대행해주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 제사상(祭祀床)을 받는 고인(故人)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러한 대행제사(代行祭祀)보다, 고인이 살아있을 때 마음 편하게 해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어느 텔레비전 연속방송극에 나온 대화(對話) 한 토막이 생각난다.

“있을 때 잘해, 살아있을 때 잘 하라는 말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

진짜와 가짜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진짜와 가짜

8.15 광복 이후, 우리네 생활 주변에서 흔하게 쓰이고 있는 말 중에는  <진짜>와 <가짜>라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 <진(眞)짜>는 글짜 그대로 <참>이다. <거짓이 아닌 것>, 또는 <옳고 바름>이다.
  • <진(眞)짜>는 사실(事實)이나 진리(眞理)에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
  • <가(假)짜>는 <진(眞)짜>의 반대(反對)말이다.
  • <가(假)짜>는 진짜처럼 꾸민 것 또는 진짜가 아닌 것이다.

사이비(似而非)라는 말도 있는데, <사이비>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듯하지만, 근본적(根本的)으로는 아주 다른 것이다.

어찌 되었건,  <사이비종교>라는 말도 있고 <사이비과학>이라 는 말도 쓰이고 있다.

진짜와 가짜라는 이야기를 엮어보려고 끄집어낸 말이다.

찰리 채플린 (Charlie Chaplin, 1889 ~ 1977 영국인, 희극배우, 영화감독, 제작자)은 1914년에 첫 영화를 발표한 이래 무성영화 (無聲映畵, silent film)와 유성영화(有聲映畵)를 넘나들면서  ‘가짜 목사 (The False Priest)’ 등 여러 가지 작품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채플린그런 것뿐만 아니고 그는 콧수염, 실크모자, 모닝코트, 지팡이 등으로 분장(扮裝) 또는 위장(僞裝)한 그의 인상(印象)을 사람들에게 심어줌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사람이며, 1975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 부터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작위(爵位)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관한 이야기 한 가지 적는다.

어느 날 찰리 채플린이 한 시골 마을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그곳에서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채플린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 대회를 구경했다.

경연자(競演者)들은 모두 외모부터 진짜 채플린처럼 분장을 하고 나와서 채플린 특유의 몸짓과 말투를 흉내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채플린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그 대회에 출전하여 자신이 평소에 하던 그대로 연기를 했는데, 채플린은 3등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대회 출연자들 중엔, <진짜 채플린>보다 더 실감나게 연기를 한 <가짜 채플린>이 두 사람이나 더 있었던 것이다.

한데, 사실은 채플린 특유의 몸짓과 말투와 그의 처진 눈썹과 짧은  콧수염 등은 채플린의 원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본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콧수염 등으로 변장(變裝)한 얼굴과 특이(特異)한 그의 행동 등만 본 사람들에게는, 변장한 채플린의 얼굴과 말투와 행동 등이 그의 진짜 모습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꾸민 것이 아닌 그의 본얼굴은 그 당시의 꽃미남이라고 해도 될만큼 잘 생긴 민낯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다.

찰리 채플린은 앞에 적은 것처럼 콧수염, 실크모자, 모닝코트, 지팡이 등으로 그의 인상(印象)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에, 그러한  그의 독특(獨特)한 것들, 말하자면 꾸민 것들이 그를 상징(象徵)하는 특징(特徵)처럼 되어 있다.

그렇게 꾸민 채플린을 흉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은 본 모습이 아닌 사람(채플린)을 흉내내는 사람들(가짜 채플린)도 있었다라는 이야기다.

이쯤에서 말머리를 돌려보기로 한다.

<5.16 쿠데타>에 관한 이야기를 적으면서, 맨 끝 부분에 나와 동갑인  몇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한데, 희극배우 배삼룡(裵三龍)도 나와 동갑이다.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배삼룡의 본명은 배창순이다. 춘천에서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에서 유학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삼룡광복 후 귀국하여 1946 유랑악극단 ‘민협’의 단원으로 지내게 된 그는 어정쩡한 그의 모습을 빗대어 극단 선배들이 <삼룡>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배삼룡>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969년 텔레비젼 MBC방송국이 개국되면서 그는 <웃으면 복이 와요>  등에 출연하여 우스운 짓이나 말로 남을 잘 웃기는 모습을 선보이며 그의 전성기(全盛期)를 달렸다. 그러한 배삼룡은 말을 더듬거나 바보스럽고 비실대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비실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무대생활만 한 것이 아니고, <형님먼저 아우먼저>, <출세작전>, <요절복통 007>, <아리송해>, <형사 배삼룡>, 등 희극영화에도 출연 하여 흥행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에 등장한 신군부(新軍部)의 “희극은 수준이 낮은 것이다” 라는 말을 듣게 되어 배삼룡은 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그 후 음료사업을 시작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고, 미국으로 가서 얼마 동안 살다가 귀국했다.

1960 ~ 1970년대 서민들의 <삶의 애환(哀歡)>을 웃음으로 달래주었고, 그의 얼굴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오게 했던 배삼룡을 가르켜 말할 때,  <비실이 배삼룡>이라고 하거나 <바보 배삼룡>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한 배삼룡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했던 배삼룡은 여러 해 동안 병석에서 투병생활(鬪病生活)을 하다 가 2010년 2월 23일 서울아산병원에서 항년 84세를 일기(一期)로 이 세상을 떠났다.  한편, 서민들에게 큰 웃음을 남기고 간 희극배우 배삼룡은 2003년 제10회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 문화훈장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짜와 가짜>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가짜 콧수염>을 달고 <가짜 행동> 등으로 사람들을 웃긴 찰리 채플린과 <비실이>와 <바보>가 대명사(代名詞)처럼 되어버린 배삼룡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채플린이 콧수염 등으로 가장(假裝)을 했던 것처럼, 배삼룡의 바보짓도 그가 진짜 바보였기 때문에 그러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 <박사와 장군>이라는 이야기를 적으면서 “지금은 가짜 박사도 있는 세상이다.”라는 말을 적었는데, 오늘날엔 <가짜>가 <진짜>를 뺨칠 정도로 세상이 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8.15 광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진짜>라는 말과 <가짜>라는 말도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 중에 하나다.”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적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슨 가짜가 있다는 말인가?

살펴보기로 한다.

6.25전쟁 때, 전선(戰線)을 누비며 적군(敵軍)과 싸우다 전장(戰場)의 이슬로 사라져 목숨을 잃게 된 젊은이들도 있고, 나처럼 사지(四肢)가 멀쩡하던 사람이 적탄(敵彈)을 맞고 정상적(正常的)인 몸을 가질 수 없게 된 사람들도 생겼다. 달리 말하자면, <전사자(戰死者)>들도 많았고, <상이군인(傷痍軍人)> 이라고 불리게 된 사람들도 생겼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전상자>들을 <상이군인>이라고도 하는데, <가짜 상이군인> 이라는 말도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가짜 상이군인 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다음과 같은 말도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가짜 목사,  가짜 박사,  가짜 의사,  가짜 형사, 가짜 기자,  가짜 학력.  가짜 문서,  가짜 화폐,  가짜 이력서,   가짜 자동차 번호판, 가짜 양주(洋酒),   가짜 한우(韓牛), 가짜 고추가루,   가짜 콩나물,  가짜 참기름, 등등 …

서울 남대문시장에 있는 어느 참기름가게 앞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적힌 간판이 붙어 있다고 한다.   “정말 순 진짜 참 기름만 팝니다.”

<깨>는 <참깨>도 있고 <들깨>도 있다.   그러므로 참깨로 짠 기름은 참기름이고, 들깨로 짠 기름은 들기름이다.

한데 어찌 된 것인지, <참기름>이라는 말 자체(自體)에 <참>이 들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이 부족하여 수식어(修飾語)를 더 붙인 것일까?   같은 내용의 수식어를 세(3)개씩이나 덧붙인 것이다.  얼마나 <가짜>가 많으면, 그런 간판도 생겼을까?  ‘가짜가 많은 세상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말이다.

<거의 같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비슷하다>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면, XXX와 비슷한 사람, 또는 이것과 저것은 모양이 비슷하다. 하지만, 엄밀(嚴密)하게 따져보면, <거의 같다>는 것이나 <비슷하다> 라는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이 같은 것이다>라는 뜻은 아니다.

<거의 같다>라는 것은 <조금도 틀림이 없이 같은 것>과는 그 말의 뜻이  다르기 때문이다.

구한말(舊韓末)의 정치가이며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님의 일화(逸話) 하나를 이 글에 옮겨 적는다.  그는 어느 강연장에서 청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상재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자기 아버지 제삿날이 다가와서 제사에 쓸 제물을 사러 장엘 가려고 하는데, 마침 그의 친구 한 사람이 자기도 장엘 간다 고 하기에, 그 친구에게 제물로 쓸 물건을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그 친구는 무엇을 사오면 되겠느냐고 부탁한 사람에게 물었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고기 같은 것 한 근과 사과 같은 것과 배 같은 것 몇 개씩 하고, 북어 같은 것도 좀 사고 ……… ” 그런데 그 때 묵묵히 강연을 듣고 있던 청중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며 크게 웃었다.

바로 그때, 이상재님은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청중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무엇이 그렇게 우습단 말입니까?   사과면 사과, 배면 배지 거기에 웬 <같은>이라는 말이 붙느냐?  정말 우스운 사람도 다 보겠군.  그래서 웃어댄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절대로 웃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 다같이 한 번 생각해봅시다.   각자 나는 지금까지 과연 안팍이 모두 진실된 사람이었나, 아니면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았나 한 번 살펴 보자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결코 사람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답게 살도록 모두 노력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들 고개를 숙였고, 그 강연장의 분위 기는 어느새 조용하고 숙연해졌다고 한다.

월남 이상재님이 청중들에게 던진 그 말씀은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주는 경구(警句)라는 생각을 해본다.

엊저녁에 딸아이가 밥상에서 저의 부부에게 물어본 말이랍니다. “한국식 반찬을 어떻게하면 빠르고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지?” 아내와 저는 순간적으로 나름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주었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응답이 아이에게는 닿지 않는 분위기였답니다.

아무렴 쉽게 살자면야 뉴욕인데, 한국마켓에 가서 사먹으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겠지만 그래도 아이가 제 먹거리를 스스로 만들어 먹는 일로 생각하고 묻는게 고마웠답니다.

그래 오늘 아침부터 부산을 좀 떨었답니다. 아이가 먹을 밑반찬을 만들어 보내노라고 말입니다. 콩자반, 장조림, 오징어젓갈을 만들어 조금씩 싸서 넣어주었답니다.

내친김에 농사짓는 친구가 보내준 무우로 석박이와 물김치도 좀 담구었구요.

아마 엊저녁에 제가 “징검다리”를 떠올려 생각한 것은 모두 제 딸아이 덕이랍니다. 그 맘으로 오늘 제 가게 손님들에게 보낸 편지랍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우리 부부의 밥상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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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조촐한 밥상을 함께 나누려 애쓰는 이들을 생각하며…>

예전에는 아주 흔히 볼 수 있었던 것들인데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 있지요. 그런데  비록 볼 수는 없더라도 그 이름만은 남아서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흔히 사용하는 말들이 있지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는 일도 재미있지 않나요?

제가 어릴 적에만 해도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한국에서없어진 것들 중에  징검다리라는 것이 있답니다. 징검다리라는 것은 거의 없어졌지만 한국사람들은 이 말을 아직도 사용한답니다.

예전 한국의 전형적인 마을 구조를 보면 작은 산 밑에 집들이 몇채 있어 마을을 이루고 마을 앞에 농사를 짓는 논과 밭이 있고, 그 논과 밭 끝에는 작은 개울이 있답니다. 그 개울을 건너면 또 다른 마을이 시작되는 것이고요.

그 개울에는 다리가 놓여져 있었답니다. 지금 “다리”라는 말에 당신이 상상하고 있는 그런 모습의 다리가 아니랍니다.

바로 이 사진과 같은 모습의 다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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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 위에 큰돌들을 사람들의 보폭만큼의 간격으로 이어놓은 다리랍니다. 이런 징검다리를 거의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어느 동네에서건 아주 흔히 볼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비록 징검다리의 모습은 볼 수없지만 “징검다리”라는 말은 아직도 아주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랍니다.

‘징검다리’라는 말은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것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거니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라는 뜻으로도 쓰인답니다.

자! 11월 마지막 일요일이고 이틀 후면 12월입니다.

12월은 2015년의 마지막 달이자 2016년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입니다.

올 한해동안 함께했던 기쁨과 즐거움을 내년에도 이어주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힘과 희망을 심어주는 징검다리 같은 올 한해 남은 시간들이 되시길 빕니다.


 

 

There are many things that could commonly be seen in the old days, but that have almost disappeared nowadays. But, even though they cannot be found easily, their names still remain to be used so often. Don’t you think that it is interesting to think about those things?

Among those things that could commonly be seen when I was young, but that have almost completely disappeared in Korea, one thing came to my mind. It is “Jing-Gum Dah-ri.” “Dah-ri” means “a bridge.” Though it is very difficult to find any of these now, people in Korea are still using the words.

In the old days in Korea, a typical village in the countryside was located at the foot of a small mountain, and had rice paddies and farming fields in front. And at the end of the farming area was a small creek. If you crossed the creek, you would step in a different village. In a word, the creek made a border between two villages.

A bridge traversed the creek. Even though I said a “bridge,” it was not the kind of bridge you might have imagined.

It was a kind of bridge as shown in this picture.

It was a bridge which was made by putting big rocks at the intervals of a person’s stride in the creek. Nowadays, this kind of “Jing-Gum Dah-ri” is very difficult to find, but in the old days, it could be seen in any village.

Even though they have almost disappeared completely, the word, “Jing-Gum Dah-ri,” is still one of the frequently used words.

As its function indicates, it is being used to mean what connects this and that, and also what plays a role to help someone.

There, There! It is the last Sunday of November and December will start in just two days.

December is the last month of 2015 and a “Jing-Gum Dah-ri” to connect 2015 to 2016.

I wish that all of you will have the remaining days of 2015 like a “Jing-Gum Dah-ri” which connects and extends all the joys and happiness in this year to next year and which inspires someone with hope and strength.

이론과 실천을 함께 고민하며 살아온 벗의 이야기 – 1

Thanksgiving day 아침입니다.

모처럼 아이들도 집으로 오고, 온가족이 모이는 날입니다. 아내와 함께 아침 일찍부터 수선을 피웁니다. 칠면조구이는 이제 완전히 제 몫이 된 일입니다. 올해는조금 색다른 레서피를 사용해 봅니다. 야채를 잘 안먹는 아들녀석을 위해 어제밤에vegetable stock을 끓여 푹 담구어 놓았지요.

음식준비를 하면서 올 한해 감사함들을 꼽아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필라세사모 식구들을 만나게 된 일입니다. 필라세사모는 “세월호를 잊지 않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약칭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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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만난 이들을 통해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느껴본 한해랍니다.

무릇 신앙의 궁극적 목표라면 구원이 될 것입니다. 한두해 전부터 제가 적을 두고 있는 교회의 같은 소그룹에 속해있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죽은 후 구원 문제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돕기위해 한동안 열심히 성서 이야기를 썻던 기억이 납니다. 그 그룹에 속한 멤버들이 대충 저보다 연상들이었으므로 죽음의 문제가 결코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오늘 현재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죽음 이후에 문제로 국한지어 생각하는 것은 좀 따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던 차에 필라세사모 식구들을 만난 것이지요. 구원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은 매우 중요하고 함께 가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런 뜻에서 이들과의 만남은 올 한해 제게 가장 큰 감사가 되어야할 것 같답니다.

그 모임에서 엊그제 대전에서 목회하는 김규복목사를 온라인으로 초빙해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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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쌍전(文武雙全) 또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이라고 하는 말이 있지요. 문(文)과 무(武)를 다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김목사를 향해 ‘이론’과 ‘실천’을 쌍전(雙全)했다거나 겸전(兼全)했다고 칭송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구원에 있어 궁극의 목표라고 할만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 곧 “인간성의 총체적인 회복”을 위해 평생을 ‘이론’과 ‘실천’을 함께해 온 사람라고는 말씀 드리고 싶답니다.

그날 밤 김목사의 이야기를 들었던 우리 필라세사모 식구들 뿐만 아니라, 단 한사람만이라도 더 이야기를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몇차례에 걸쳐 그의 이야기를 올리려 합니다.

아내의 원성 소리가 들리기 전에 부엌으로 가야할 시간입니다. 오늘은 짧게 첫번 째 이야기입니다.

조찬기도회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7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조찬기도회

교회용어사전 (Glossary of Christianity, 서울,생명의말씀사,2013)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예배 및 예식’이라는 제목이 있고, 그 제목 안에 국가조찬기도회 <國家朝餐祈禱會, National prayer breakfast>라는 항목이 있다.

우선 조찬(朝餐)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본다. ‘조찬(朝餐)’, ‘조반(朝飯)’, ‘아침 밥’  또는 그냥‘아침’이라고 하는 이런 말들은 모두 같은 내용의 말이다.

한데, 내 경험이나 생각으로는 ‘조찬(朝餐)’보다 ‘조반(朝飯)’이 낫고, ‘조반(朝飯)’보다 ‘아침 밥’이나 그냥 ‘아침’이라고 하는 말이 훨씬 실감 (實感)나는 말이라고 여겨진다.

아침, 점심, 저녁 …… 이렇게 끼니 때마다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환경(環境)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해보는 말인데, 나도 그러한 사람들 중에 하나 였던 때가 있었다. 배고픔을 참으면서 지낸 것이 무슨 자랑거리일 수도 없고, 굶주림을 겪은 것이 내놓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가 겪었던 사실이니 적어보는 말이다.

일제 때, 특히 태평양전쟁 당시에 있었던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고, 6.25 전쟁 때에도 먹는 것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다.

지금도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른 채 남북을 막고 있는 철조망은 6.25 전쟁 때문에 생긴 것인데, 그 전쟁 때 반찬 없는 주먹밥을 먹으며 전쟁터를 누비던 때가 있었다. 그러한 전장(戰場)에서 목숨을 잃었거나 전상자(戰傷者)가 된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혹자(或者)는 말하기를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라고 하든가, 아니면 “지금 당장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면 되는 것이지, 다 지나갔고 케케묵은 6.25 때 이야기를 궁상(窮狀)맞게 꺼집어내어 들먹일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간에, <國家朝餐祈禱會, National prayer breakfast>에 나온 ‘breakfast’라는 말은 break와 fast의 합성어(合成語)다.

  • Break(깨뜨리다) + fast(음식을 먹지 않음) = breakfast

곧 “밤 사이에 먹지 않은 것을(단식한 것을) 깨고, 음식을 먹는다.”라는 뜻이다.

  • 24시간을 3등분한 여덟(8)시간 마다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저녁밥을 먹은 시간과 아침밥을 먹는 시간과의 간격(間隔, 시간적인 동안)이 아침에서 점심까지,  또는 점심에서 저녁까지보다 더 길기 때문에 위에 적은 것과 같은 설명이 있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국가조찬기도회’에 관한 것을 적으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국가(國家)가 무엇인가?

국가는 일정(一定)한 영토(領土)를 가지며, 거기에 거주(居住)하는   다수인(多數人)으로써 구성(構成)되어 하나의 통치조직을 갖는 단체, 즉 나라다.

따라서 ‘국가는 통치권(統治權), 영토(領土), 국민(國民)의 3 요소로써 성립된다.’라는 것이 국어사전의 해설이다.

이쯤에서 ‘국가조찬기도회’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를 골라서 간략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cats‘국가조찬기도회’는 1966년 3월 8일 옛 조선호텔에서 열린 ‘제1회 대통령조찬기도회’가 모태(母胎)이며, 1976년 제8회 때부터 국가조찬기도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2003년부터 사단법인으로 되었는데, 그 이름부터가 아주 거창(巨創)하다.

“(사)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KOREA NATIONAL PLAYER BREAKFAST”

그 기도회는 국민화합(國民和合)과 경제활성화(經濟活性化) 또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하기 위하여 기독교단체에서 해마다 주최 하는 아침기도회다. 그 기도회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계의 요인(要人)들과 한국 개신교의 저명한 성직자(聖職者)들이 함께 기도도 하고 아침밥도 먹는 행사다.

위에 적은 것만으로는 그 모임에 관한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신정권(維新政權) 이후 본격적으로 정교유착(政敎癒着)을 하게 된 것이 바로 1966년부터 시작된 국가조찬기도회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그러한 정교유착(政敎癒着)은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유신정권을 지원하는 형태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은 5.16 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 정권(政權)을 찬양(讚揚)하는 내용이고, 그러한 정권에 힘을 실어주는 형태였다.>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정치계와 경제계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고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되는 정경유착(政經癒着)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정치인과 종교인들 중 에도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정교유착(政敎癒着’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정교유착을 하는 인사(人士)들은 기독교 성직자로서의 본분(本分)을 망각(忘却)했거나 아니면 저버린 사람들이다.>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기독교(개신교)의 경우, 성직자(聖職者)란 ‘종교교단(宗敎敎團) 내에서의 예배<제례(祭禮)의 집행>, 신도(信徒)의 교육, 교단의 운영 등을 지도 또는 담당하는 직업의 사람이다.’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그렇다 면, 위 해석에서 말하고 있는 <종교교단>이란 무엇인가?

  • 종교(宗敎)란 무한절대(無限絶對)의 초인간적(超人間的)인 신(神)을 숭배(崇拜)하고, 신성(神聖)하게 여겨 선악(善惡)을 권계(勸戒)하고 행복(幸福)을 얻고자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 교단(敎團)은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은 종교상(宗敎上)의 신앙(信仰)과 제례의식(祭禮儀式)을 같이하는 동질적(同質的)인 사회집단(社會集團)이다.

한데 오늘날엔 개신교 성직자들 중, 자신의 본분을 저버리고 사는 사람 들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세상이 되고 있다.    내면적(內面的)인 것뿐만 아니고, 외형(外形)에도 그런 면(面)이 있다.

돌이켜보건대, <지난 60 ~ 70년대의 물량주의(物量主義)와 권력지향풍조 (權力指向風潮)로 사회적 규범이 깨어지고, 가치관의 붕괴로 인한 혼돈 상태도 드러나고 있다.>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초대형교회>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아주 큰 교회> 라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출석하는 사람의 수가 1만명 이상 되는 교회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국가조찬기도회에 관한 이야기를 적다 보니, 초대형교회라는 말이 나왔다.

대통령조찬기도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기도회가 오늘날엔 사단법인 대한민국조찬기도회 (KOREA NATIONAL PLAYER BREAKFAST)로 되어 있고, 그 조직규모가 거창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1장 제20조 제2항에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는 조문(條文)이 있는데, 그것이 논란의 대상으로 되고 있다.     정교유착(政敎癒着)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서 이번 이야기를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