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 – 5

촌스러움

‘촌스럽다’는 말이 딱히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시대에 좀 뒤쳐진 모습을 표현할 때 흔히들 쓴다. 그런점에서 나는 충분히 촌스럽다고 할만하다. 실제 촌에서 산지도 삼십년이 되었다.

가까이 필라델피아를 나갔다가 돌아오면서도 내 촌스러움을 느끼곤하지만, 뉴욕이나 워싱톤을 다녀오는 날이면 그 느낌의 크기가 제법 커지는 것이다. 뉴욕이나 워싱톤보다 더 큰 느낌으로 내 촌스러움을 확인했던 때는 한국방문 후의 일이였다.

촌에 살아서 갖는 촌스러움에 위에 내 쓸데없는 고집이 그 촌티를 더하곤 한다. 일테면 아직도 cell phone 곧 손전화없이 산다는 것이랄까, 삼십 수년전 결혼 때 입었던 양복을 입고 다닌다거나, 아직도 아내에게 머리깍는 일을 맡긴다거나 하는 일들이 그렇다.

툭하면 아내가 내게 던지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촌스럽다”이다.

미국 기차에는 바로 그런 촌스러움이 함께 한다. 그러나 나의 촌스러움과는 다르다. 나는 한때 잘 나갔거나 최첨단 유행의 첨병이었던 때란 꿈에도 꾸어보지 못한 처지지만 미국의 기차는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기차는 한때, 그러니까 서부개척시대였던 19세기 초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100여년간 신흥제국 미국의 힘을 상징하는 대표주자였다.

그러다 1940대 이후 미국에 자동차들이 덮히기 시작하고, 1970대 이후에는 비행기가 미국 하늘에 사통팔달로 길을 내기 시작하면서 촌스러움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아마 한국에서 KTX를 타본 사람이 워싱톤 dc에서 보스톤까지 오가는 기차를 타본다면 아마 “아이고, 이게 무궁화호냐? 통일호냐?”냐고 할지도 모르며, 그 라인이 미국내 철도에서는 그나마 현대식이란 사실을 알면 아마 크게 놀랄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통일호, 무궁화호를 모르는 세대도 있겠지만)

화물은 그런대로 기차가 유용한 편이 많이 있겠지만 여객 운송에 있어 기차는 자동차와 비행기에 대부분 그 역할을 뺏긴지 오래되었고 이즈음에는 버스에게도 그 자리를 내주고 있는 형편이다.(일테면 내가 사는 곳에서 뉴욕 맨하턴 Penn station 까지 기차로는 편도 100달러 정도인데 이즈음 Greyhound(왕복 50달러 정도)와 경쟁하는 Megabus를 잘 골라타면 1달러에  편도 이용할 수도 있기에.)

통상 한나절이나 하루 길이면 자동차를 이용하는 편이고, 그 이상의 거리면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기차는 점점 교통수단으로 후순위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심지어 기차는 생활인들의 교통수단이라기 보다는 시간과 돈의 여유있는 사람들이 이따금 이용하는 교통수단 정도로 인식되기까지하는 현실이다.

그러니 당연히 열차여객사업이란 곧 적자사업이었다. 그것이 개별 회사에서 운영하던 전국의 열차운행 사업을 연방정부가 받아 Amtrek이라는 공기업으로 묶고 열차여객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게 된 연유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 기준치로 보면1억3000만 달러의 적자를 보았다고 한다.

capture-20160825-200417우리가 탓던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를 달리는 관광열차 California Zephyr 역시 바로 이런 적자를 면하려고 내놓은 상품 가운데 하나이다. 다행히 우리가 탓던 기차는 정시에 출발하였지만 Amtrek 웹사이트에 나타난 이 관광열차의 정시 운행율을 보면 여전히 촌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할만하다.

그렇다하여도 이번 기차여행은 내겐 거의 100% 만족한 것이였으며, 이점에는 아내나 하나엄마 아빠도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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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 1실 침대칸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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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를 펴서 침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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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침대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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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내 lounge 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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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내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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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카봉으로 처음 찍은 사진 – 이 촌스러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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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이…(노란 세월호 팔찌를 차고 다녔다)

기차여행 – 4

<시카고 – 편견 또는 선입견에 대해 – 2>

지난 7월1일자  Chicago Tribune은 “시카고 총격 피해자 수가 3년 연속 두자릿 수 이상 증가했다”며 1990년대 이후 볼 수 없었던 현상이라고 전했다. 또한 “인구 비례로 볼 때 살인율이 더 높은 도시들이 있지만, 총기 사고와 살인 사건 발생 규모로 치면 전국 최악 수준”이라며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두 도시 피해자를 합친 것보다 많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참고로 미국내 도시규모 1위는 뉴욕, 2위는 로스앤젤레서, 3위가 시카고)

올해 1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시카고에서 모두 1천930명이 총에 맞고, 315명이 살해됐다고 하는데 이는 하루 평균 10명 이상이 총에 맞고, 1.7명 이상이 살해당한 셈이라고 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총격은 50.5%, 살인 사건은 49% 늘어난 셈이라고 한다.

또한 학자이자 정치이론가로 유명한 벤자민 바버(Benjamin R. Barber)는 한국어로 <뜨는 도시 지는 국가>로 번역된 그의 책 “If Mayors Ruled the World”에서 시카고를 이렇게 그리고 있다.

“폭력은 거리를 활보하며, 시카고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 중 하나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이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보면 마치 멀리 떨어진 전혀 다른 세상같이 느껴진다.”

비단 알카포네 같은 옛날 인물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시카고는 웬지 어둡고 음습한 이미지로 그려졌던 까닭은 아마 이런 정보들이 내 머리속에 입력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카고 다운타운을 걸으며 내가 본 시카고는 정말 아름답고 멋진 도시였다. 과연 어느 것이 진짜 시카고의 모습일까?

나는 그 거리를 걷는 순간만큼은 내가 보는대로 느끼기로하였다. 시카고 강변을 따라 옛것과 새것들이 잘 어우러진 도시풍경들, 도시의 바쁜 직장인들이 누리는 점심시간의 모습들, 그리고 동부 도시들에서 느끼지 못했던 여유로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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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그 거리를 걷는 순간 부패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시카고에 대한 평판은 내 머리속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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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으며 보았던 곳은 시카고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평가되는 다운타운 극히 작은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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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칸이 하는 일식당에서 스시와 우동으로 배를 채운후 우리는 union station lounge 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Amtrak unveiled the new Metropolitan Lounge at Union Station. The lounge features double the space for customers ticketed in sleeping cars and business class. The lounge is located above and behind one of the grand staircases in the Great Hall. | Rich Hein/Sun-Times
Amtrak unveiled the new Metropolitan Lounge at Union Station. The lounge features double the space for customers ticketed in sleeping cars and business class. The lounge is located above and behind one of the grand staircases in the Great Hall. | Rich Hein/Sun-Times

lounge에는 기차를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 다과와 과일 그리고 각종 음료와 와인 등을 무료로 서비스했다. 기다리는 여행객들을 둘러보니 우리 일행이 제법 젊은축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거의 백인 일색이어서 나이를 가늠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후 2시,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2447마일(약 3938 km, 참고로 부산에서 신의주까지의 거리는 680km)을 2박 3일 약 50시간동안 달리는 열차 California Zephyr는 정확한 시간에 출발하였다.

많은 역사책에서 초기 미국이 거둔 위대한 성과라고 평하는 최초의 대륙횡단 철도를 달리는 기차를 탓던 것이다. 누군가는”도둑질 위에 건설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최초의 대륙횡단 철도”에는 인디언들과 멕시칸들과 중국인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백인들’의 땀과 피와 이야기들이 깔려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차여행 – 3

<시카고 – 편견 또는 선입견에 대하여 1>

“하나아빠가 여행일정을 진짜 완벽하게 짜서 아주 편한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내가 하는 말에 하나엄마는 예의 그 사람좋은 미소를 얼굴 가득히 담고 답했다. “글쎄요? 그게 다 계획대로 잘 될까요?”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와 심한 천둥 번개로 예정된 모든 비행기는 일기가 좋아질 때까지 지연될 것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다행히 천둥번개는 오래가지 않아서 시카고행 비행기는 약 40여분 늦게 출발하였다.

이번 여행에서 하나아빠가 세운 모든 계획은 거의 한틈 착오없이 일정대로 이루워졌지만, 단 한가지 비행기 스케쥴만은 예외였다. 떠날 때 조금 늦은 출발은 돌아올 때에 비하면 정말 소소한 일이었다.

그렇게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기차 California Zephyr를 타기 위해 필라델피아 공항을 이륙한 시간은  아침 6시 30분이였다. 시카고 Chicago O’Hare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한 시간은 시카고 시간으로 7시 40분이니 두어시간 비행거리였다.

곧 시카고에 도착한다는 기내안내 방송을 들으며 내려다본 미시건호수는 그냥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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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인 Chicago Union Station으로 가는 지하철 Chicago L은 공항청사와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크게 헤매지 않고 지하철 blue line에 오를수 있었다. 때마침 아침 출근시간이어서 러시아워의 시카고 지하철 풍경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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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풍경부터 시카고에 대한 내 오래된 선입견 또는 편견은 여지없이 무너졌는데, 동부의 뉴욕이나 필라델피아의 지하철 풍경에 견주어 너무나 산뜻했기 때문이다. 미국 넘버 3라는 대도시답지않게 다소 느긋해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들도 조금은 상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Chicago Union Station은 웅장한 Philadelphia 30가 기차역이나 복잡하고 뭔가 질서없는 뉴욕 맨하턴의 Pennsylvania Station에 비해 아주 고풍스럽게 다가왔다. 그러나 역 안의 구조는 세군데가 거의 같다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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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안에 있는 lounge에 짐을 맡기고 가벼운 차림과 느긋한 마음으로 시카고 도시 구경에 나섰다. 기차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고 우리들이 그때 가진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었으므로.

역사를 나와 우선 배를 채우기로 하였다. Corner Bakery Cafe에서의 아침은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이 한끼를 시작으로 우리는 여행 내내 여유롭고 풍성한 식탁을 즐겼다. 딱히 찾아서 간 곳들은 아니었지만 끼니 때마다 우리들은 맛과 양과 값에 있어 모두 충족했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서자 때마침 시내 관광버스가 우리 앞을 지나고 있었고, 버스티켓 매표소가 코앞에 있어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버스를 탈까 하다가 걷기로 하였다. 아직 우리는 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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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cago

우리가 걸었던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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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 우연치 않게 볼수 있었던 NBC 인기드라마 Chicago Fire 촬영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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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ckingham Fountain에서

기차여행 – 2

<하나와 한나>

새벽 3시 30분에 집을 나서 하나네로 향했다. 하나는 이번 여행을 함께할 친구 부부의 맏딸이다. 내 딸아이 이름은 한나인데, 같은 영어 이름을 서로 다르게 불러 그렇게 굳었다. 하나 아빠와는 한 이십년 가까이 한 사이이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하여도 우리 모두 아직은 청춘이었다. 동네에서 같은 업을 하는 사람들끼리 협회를 만들어 서로 도우며 커가자는 생각으로 처음 의기투합했던 우리들은, 당시만해도 몸과 마음 모두 청춘이었다. 그렇게 협회와 한인회 일을 함께하며 가까워졌고, 세상을 보는 눈높이가 많은 부분에서 엇비슷하여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이다. 물론 하나엄마와 한나엄마도 가깝다. 제법 긴 세월을 가까이 지낸 뒷면에는 조금은 뾰족하고 협량한 우리 부부를 언제나 가까이 받아주는 하나 엄마, 아빠의 넉넉함이 있었다.

손에 잡힐 듯한 저쪽 세월인데, 그 시절에 함께 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이미 세상을 뜬 사람들도 있거니와  은퇴하여 두분불출인 사람들도 많고, 더러는 노환으로 앓는 이도 있다. 그 중 많은 이들이 은퇴 일시를 저울질 하고 있는 가운데, 당시 젊은 축이었던 하나 아빠와 나는 아직 씩씩한 현역이다. 물론 하나 아빠도 업을 바꾸어 세탁업보다는 조금 규모가 큰 세차업을 하고 있기는 하다.

우리집에서 하나네까지는 약 20여분, 하나네에서 필라델피아 공항까지 역시 20여분 걸리는 거리이므로 그곳에서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하나네와 우리가 함께 이번 여행을 함께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내 딸아이 한나 덕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6월 중순에 아내와 함께 딸아이 얼굴을 보러 갔었다. 그동안 몇번의 시행착오 덕으로 이젠 맨하턴 지하철 노선이 낯설지가 않다. 그날 우리는 Ground zero를 갔었는데 그곳을 가는 길에 한나가 물었던 것이다. “올해 한국갈 계획이 없냐?”고. 15일 정도 쓸 수 있는 휴가일이 있는데 엄마, 아빠가 한국 나갈 계획이 있다면 함께 나갔다 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내 대답은 아내와 딸아이에겐 사뭇 뜬금없었겠지만 그 무렵 내 생각을 아주 솔직히 던진 것이었다.

“엄마는 내년에 한국 나갈 계획이 있고, 그 때 아빠도 함께 갈려고 했는데…. 이러면 어떨까? 한국은 내년에 엄마랑 한나랑 함께 갔다 오고, 올 여름엔 한나랑 아빠랑 기차타고 미국 횡단을 한번하면 어떨까?”

머뭇거리는 딸아이를 나는 밀어부쳤다. “어때? 좋지? 한나야! 내가 구글에서 좀 조사를 해보았는데 열차여행이 아주 멋있겠더라고. 네 휴가 기간에 맞추어 한번 계획을 짜보자구? 아빠가 열차정보 링크 알려줄 테니까, 한번 계획을 짜볼래?”, 그렇게 다구치는 나에게 딸아이는 웃음으로 대답했던 것이다. “엉”

딸아이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내게 던진 말이다. “아이고, 그렇게 자기 딸을 몰라요? 행여 한나가 아빠랑 여행을 가겠다?  꿈깨세요!”

늘 그렇듯 아내는 정확했다. 내가 사랑하는 딸 한나는 그날 이후 열차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7월초쯤에 특별한 일없이 우리부부는 하나네 집에 들려 차 한잔 나누게 되었는데, 그날 나는 이번 여름에도 그저 꿈으로 남게된 기차여행 이야기를 하였던 것이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난 하나아빠는 아주 간단히 대답하였다. “그럼 우리끼리 한번 갑시다!”

고향이 충청도인 하나아빠는 말이 어눌하고 느린 편이지만, 내가 운전해 가면 한 시간이 걸릴 거리를 반 시간이면 족히 갈만큼 행동은 빠른 편이어서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완벽한 여행계획을 짯던 것이다.

우리 부부가 새벽 3시 30분에 집을 나선 것 역시 하나아빠가 세운 계획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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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nd zero를 찾았던 날, 새로 조성된 World Trade Center Transportation Hub에 걸린 성조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십수년 전 했던 내 생각 하나가 떠올라 여기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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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ell W. Peterson은 올해 여든 네 살의 노인이다.

그는 지난 해, 백 쪽도 채 안 되는 작은 책자를 출간하며 제목을 애국자들이여, 궐기하라!(Patriots, Stand Up!)”라고 하였다. 러쎌 피터슨은 DuPont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였고 1970대초 공화당원으로 델라웨어 주지사를 역임한 바 있다. 그는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동시에 시민운동가이며 환경론자이다. 그는 1996년 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꾸었다.

책의 제목만큼이나 책의 내용이 직정(直情)적이다. 부시행정부에 대한 그의 비판과 독설, 그리고 애국민임을 자처하는 미국인들에 보내는 그의 충언을 읽으며 그가 팔순 노인은 커녕 스무 살 팔팔한 젊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하였다.

그는 9.11참사 이후 불어닥친 미국내의 애국주의가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뚤어진 애국심과 애국주의의 선동으로 미국은 지금 처음 국가를 건설하며 꿈꾸었던 참되고 큰 미국정신을 잃어 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선두에 부시행정부로 대변되는 극우 보수 공화당원들이 앞장서고 있다고 비난한다. 부시행정부가 이라크와의 전쟁을 시작하며 내걸었던 전쟁의 당위성 일곱 가지들 일테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알 카에다 조직과의 연계, 우라늄생산을 위한 시설 보유, 독가스로 수천 명의 인명 살상, 우라늄의 대량 유입, 생화학 무기 생산을 위한 연구 시설 보유, 미국의 안전 위협 등의 모든 전쟁 이유들은 단지 구실이었을 뿐 모두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참다운 애국주의의 개념을 바로 세워야 할 때이며, 생각있는 미국인들이 이 운동에 앞장 설 것을 주문한다. 그는 진정한 애국심과 애국주의는 미국의 첫 정신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주창한다.

“들어라! 선조들이 어렵게 지켜온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 곧 자유와 정의를 구가하는 생활 양식을 버리라고 주문하는 오늘날 극단주의 지도자들을 향해 이 미국이 울고 있는 통곡의 소리를!”

연이어 러쎌은 주창한다.

“애국자들이여, 궐기하라! 수 세대 동안 싸워 이룩한 이 위대한 국가의 명예를 위하여! 법 아래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정의를 구가하는 이 땅의 삶을 위하여! 전 세계 민중들의 꿈을 집중시켰던 식민주의, 노예제도, 파시즘,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통해 이룩해온 이 땅을 위해! U.N.헌장과 권리장전,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우리들의 기본적 권리들을 위해! 궐기하라!”

팔순 노인이 치켜든 열정적 반 부시의 깃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국민의 거의 반수는 부시행정부의 지지층들이다. 나는 지금 친부시, 반부시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양쪽 모두 의견이 다른 우리들, 바로 미국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논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함이다. 애국의 길은 생각에 따라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가는 길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단 한가지 함께 공유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인류 보편적인 가치 곧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아래 상식적인 보편의 가치의 기반 위에 서서 부르짖는 애국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기반을 상실한 채 애국을 호도하는 세력은 타도의 대상이며 실로 애국자들이 궐기해야만 하는 세상인 것이다.

미국뿐만 아니다. 어디에서건 보편 상식적인 가치를 따져 애국을 논해야만 한다. 그 가치를 호도하고 왜곡하는 세력은 타도해야만 할 대상이다. 그러나  미국이든 한국이든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는 시각은 늘 희망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한다.

역사란 인류의 보편적 자유확대사라는 헤겔의 말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2004. 3. 26)

<후기> – Russell W. Peterson은 지난 2011년 2월,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기차여행 – 1

<그 사이>

신촌역에서 연세대앞 철다리까지 철길부근은 어릴적 놀이터였다. 산딸기, 뱀딸기, 까마중, 도토리 등 먹을거리와 강아지풀, 채송화 등의 놀이기구,  계집아이들 손톱 물들이던 봉숭아 같은 화장품까지 아이들이 하루를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신촌역

철길 위에 대못을 올려놓고 침을 잘 발라놓은 뒤 기차를 기다리곤 하였다. 못은 기차가 지나간 뒤면 납짝하고 날렵한 모습으로 바뀌여 땅따먹기나 못치기 놀이 도구가 되었다. 연세대 앞 철다리는 사내아이들의 간크기를 재는 시합장이었다. 기차가 오기 직전에 누가 먼저 철다리를 건너냐는 시합에 나는 늘 그저 구경꾼이었다.

머리가 조금씩 굵어지면서 신촌역에서 수색이나 능곡역까지 몰래 기차를 훔쳐(쎄벼) 타서 오가는 것이 놀이가 되던 때도 있었다.

신촌역에서 기차표를 끊어 교외선을 타고 송추, 일영, 벽제 등지로 하루길 소풍을 오가던 때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의 일이다.

신촌역에서 이대쪽으로 들어선 막걸리 작부집들이 눈에 들어올 무렵엔 나는 이미 스물이 넘어있었다. 신촌역 앞에 인력시장이 서고, 그 곳에서 하루 몸팔이에 실패하고 빈속에 막걸리 기운으로 고함 한번 지르다가 막걸리 반공법에 걸려 잡혀온 사내와 함께 유치장에서 밤을 보낸 이후 신촌역과 철길은 내게서 멀어졌다.

기차를 타고 제법 먼 여행길에 나섰던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청량리에서 동해안 북평까지 열시간 넘게 걸렸던 중앙선 기차여행이었다. 그해 초가을 심한 폐렴으로 병원신세를 지게되었는데 그때 병실에서 듣던 기차소리는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나는 처음으로 홀로 집을 나서 경부선을 탓었다.

열 여덟을 넘기던 그해 여름부터 여름과 겨울이면 쌀과 모포 한장으로 꾸린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타곤하였다. 경부, 호남, 전라, 장항, 중앙선을 타고 산과 강과 바다를 쏘다녔다.

기차와 배를 타고 몇차례 제주행을 하고 열시간 넘게 배를 타고 울릉도를 다녀온 뒤로 나는 기차소리를 잊었다. 이미 서른이 넘어 일상에 매인 나이가 되었으므로

벌써 몇 해 전이 되었는지 – 먼 옛일들에 대한 기억들은 새록새록 떠오르건만 가까운 최근의 일들 일수록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나이 탓일 것이다.- 한국에서 경부선 KTX를 타 본 일이 있다. 그날 일은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한국도 아니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미국도 아닌 어느 외국에서의 경험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직 인터넷을 모르던 때에 뉴욕을 오가던 하루길 기차여행은 내 이민생활에 누리던 호사였다. 고작 맥주 두어 캔 즐기는 사이 도착하는 짧은 기차여행이지만 맨하턴 서점에서 만나는 한글 신간서적들을 만나고, 입에 맞는 설렁탕이나 해장국 한그릇의 호사를 즐기고 돌아오던 날이면 그냥 여기가 신촌이었던 것이다.

빠른 세상의 변화로 이런 소소한 즐거움조차 잊은지도 제법 되었다. 오가는 기차값과 한끼 식사 값이면 내 방에 앉아서도 책 대여섯 권은 족히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가는 길이 번거로운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행일랄까?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딸아이를 보러 간다는 핑계로 이따금 기차여행은 이어지고 있다.

이번 계약기간이 끝나면 서른 해가 되어가는 내 가게 뒤편으로는 미국 동북부를 잇는 Amtrek 철도가 있다. 하루에도 몇번씩 기차는 경적을 울리며 그 길을 오간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늘 막연한 꿈을 꾸었었다. “언젠간 기차를 타고 미국 대륙여행을 해 보아야지”하는 꿈이었다.

그리고 올 여름, 비록 절반이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 첫 걸음으로 나는 기차여행 길에 올랐던 것이다.

“더 늙기 전에…” 기차 안에서 아내가 한 말이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난 후 인사차 들린 내게 구순 어머니께서 던진 말씀이다.  “아무렴, 아직 젊을 때 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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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여름 기차여행 끝에,  나는 아직 “더 늙기 전에”와 “아직 젊을 때” 그 사이에 서있었던 것이다.

<멀리 산꼭대기에 하얀 천같은 것이 덮어 있는 모습을 처음 본 이후, 우리는 그것이 “눈이다! 아니다!”로 서로의 생각을 세웠었다.>

권선생을 위하여

“공감은 진정한 이타성(altruism)을 촉진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계층에 속하는 사람의 관점을 취하면, 그가 가상의 인물이라도, 그 계층에게 공감을 확대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다른 생명체들의 경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들의 고통이 덜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 현상이 부분적으로나마 인도주의 혁명에 기여했다는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이다.” – 스티븐 핑거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1002쪽에서-

내 기억력이 아직 믿을만한 것이라면 그를 두차례 만났었고, 그나마 수인사를 나눈 일은 딱 한번 뿐이다. 함께 차 한잔 나눈 적이 없으니 그가 나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 듯이 나 역시 그를 잘 모른다.

그가 나보다 나이가 어리며 아직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있고, 엔지니어(이것도 정확치 않지만)로 회사 생활을 하며 이따금 해외출장을 다니곤 한다는 것이 내가 아는 권선생의 전부이다. 내가 아는 한 그는 미국사회에서 전형적인 회사원으로 중산층에 속한 중년이다. 그저 ‘내가 아는 한’ 말이다.

그런 권선생과 나는 지난 일여년 동안 거의 매주 한차례씩 두어 시간 동안 자리를 함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주제는 단 한가지였는데 “세월호”였다. 그것은 온라인 화상 모임을 통해서였다. 그러므로 권선생과 나는 서로간에 아는 것은 거의 없지만, 단 한가지 “세월호에 얽힌 사람들”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는 서로를 꿰뚫고 있다고해도 크게 엇나간 말이 아니다.

권선생은 이번 여름휴가를 가족들과 함께 한국방문으로 보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한국방문을 하는 일이 매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아무렴,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민이든 해외파견이든 어떤 이유에서건 모국을 떠나 살면서 온가족이 함께 모국 방문을 하는 일이 결코 쉽거다나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리고 어제, 나는 권선생이 올 여름휴가를 보낸 한국방문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온라인 모임을 통해 함께 하는 친구들과 함께.

그는 작심한 사람처럼 한국방문 동안의 많은 시간을 “세월호”와 함께 하였던 듯하다. 광화문과 안산을 갔었고, 그 곳 풍경들과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모국방문 중 내내 스친 사람들과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는 아파했다.

“광화문 광장의 분수대는 찌는 더위를 식혀주는 시민들의 놀이터였어요. 이런저런 사람들의 놀이와 쉼의 공간인 것 같았어요. 제가 뉴스에서 보듯이 세월호 유가족들이 누리고 있는 공간은 초라하기까지 하였고 사람들의 관심도 별로였어요.”

“일부러라도 지하철을 많이 탔는데요. 제가 있는 동안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단 사람은 딱 한사람 보았을 뿐이예요.”

“안산에서는…. 그냥 휑한 커다란 주차장이랄까요, 달구어진 사막같이 열기만 있고 사람은 없는…. 제가 꽤 오래 그 곳에 있었는데 추모객은 고작 두 명 뿐이였어요.”

“제가 참 마음이 아팟어요. 걸린 현수막들이 참 오래 되었다는 느낌 때문이었지요. 저 오래된 현수막들을 처럼 사람들이 다 잊어버린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도 역시 엄마였어요. 물론 생활전선 최일선에 있는 아빠들은 벌어 먹고 사는게 우선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있어요. 저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들은 좀 지쳐 있었어요. 그런데 엄마들은 달랐어요. 그녀들은 목숨을 내놓은 것 같았다고 할까요.”

나는 권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참 착한 사내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이즈음 내가 읽고 있는 책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티븐 핑거가 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그것인데, 권선생은 바로 그 착한 본성을 내게 깨우쳐 주는 듯 하였기 때문이다.

스티븐 핑거는 “세상은 점점 폭력적이고 나쁜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라는 사람들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사람들은 폭력성과 꾸준히 싸워왔고, 점점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그렇게 세상이 바뀌어 가는 이유 중에 첫번 째로 ‘감정이입(empathy)’을 꼽는다.

다른 사람들, 특히 처지와 환경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서로 겪는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는 ‘감정이입(empathy)’이라는 인간의 본성이 세상을 선한 쪽으로, 좋은 쪽으로, 비폭력적인 쪽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얼굴 크기만큼이나 두꺼운 스티븐 핑커의 책속의 숱한 증거들보다 권선생에게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일하면서 권선생의 아픔을 조금 덜어낼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 것인데, 그것은 비단 권선생의 아픔이라는 보다는 ‘세월호’라는 말이 아직도 아픔으로 들리는 그 무수할 해외의 숱한 권선생들의 아픔을 덜어낼 방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광화문이나 안산에 있는 오래고 낡은 현수막 옆에 새 현수막을 다는 일이다.

새롭게 다시 세월호의 아픔을 되내기는 말을, 해외에사는 각자의 지금 고향의 이름으로 말이다.

우선 나부터 하나 시작하고 볼 일이다. 권선생을 위하여.

외로움에 대하여

좀체 더위가 가시지 않는다. 어제는 습도가 높지 않아 그런대로 견딜만 했는데 오늘은 그냥 찜통이다. 그래도 해뜨는 시각은 하루에 1분씩 늦어지고 있고, 해지는 시각은 1분씩 빨라진다고하니 찬바람 건듯 불어올 날이 머지 않았다.

오늘, 손님이 보잔다고하여 카운터 앞으로 나가기를 몇차례 하였다. 그들에게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들은 이야기들이다.

“시가 너무 좋았다.”, “외로움이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걸 새롭게 느꼈다.”, “내가 외로웠던 때를 생각하며, 네가 말한 그 손님에게 위로를 보내고 싶다”…

솔직히 부담스러운 인사들이었다. 나는 그저 편지 한장을 띄웠을 뿐이고, 시 하나 소개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외로움에 대하여.

8-14

세탁소에 오시는 손님들을 보면 서로 다른 모습들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로 남편 또는 아버지가 가족들의 옷을 가지고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내 또는 엄마가 그 역할을 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그렇게 혼자서 오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오실 때 마다 딸이나 아들과 함께 오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더러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손주 손녀를 앞세우고 들어 오시는 경우도 있고요.

그리 흔치는 않지만 늘 부부가 함께 제 가게를 찾으시는 분들도 있답니다. 그 중에는 아주 젊은 부부도 있고, 은퇴하신 노부부도 있습니다. 그렇게 늘 부부가 함께 오시다가 어느날부터인가 혼자 오시는 분이 계셔 “오늘은 왜 혼자냐?”라고 물으면 “혼자가 되었다”는 대답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면 그렇게 된 연유는 알수 없지만 참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그런 분이 계셨답니다. 솔직히 저는 그 분에 대해 아는바가 전혀 없답니다. 어떤 처지인지, 어떤 환경인지, 다만 그날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입니다. 그 손님이 옷을 맡기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제 머리 속에 떠오른 시가 하나 있답니다. 시 전체를 외우지는 못하고 제목만 생각났던 것이지요.

그날 저녁,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그 시를 찾아 읽었답니다. 그 시는 그 손님을 위한 시라기 보다는 제 자신을 위한 시처럼 여겨졌답니다. 저는 혼자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날의 느낌이 지워지지 않아 오늘은 그 시를 하나 소개드립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I see customers coming to the cleaners in various ways.

In some cases, usually husbands or fathers bring the family’s clothes. In some cases, on the contrary, mainly wives or mothers play the same role. Just like that, some customers come to the cleaners alone. Some others almost always come with their daughter or son. Sometimes, grandfathers or grandmothers come with their grandchildren.

Though it’s not so common, there are the cases that couples always come to the cleaners together. Among them, some are young and some are old and retired. While one of those couples had come to the cleaners always together, from one day only one of the couple began to come. As I noticed it and asked the person why she/he came alone, sometimes the response was that “I am left alone.” Then, even though I didn’t know what had happened to them, I felt so bad.

Last week, I saw one customer who was under this situation. Frankly, I don’t know much about her, in what situation she had been. I got to know only one fact, that she is alone now. While I was seeing her leaving the cleaners after she had dropped off her clothes, one poem came to my head. I did not memorize the whole poem, but did remember its title.

In the evening, when I came back home after work, I located and read the poem. I felt that the poem was for myself, instead of the customer, even though I’m not alone.

As I cannot erase the feelings of that day, I would like to introduce the poem to you.

From your cleaners.
 

We Are Human, as We Are Lonely
– Ho-seung Chung

Don’t cry.
As we are lonely, we are human.
To live a life is to endure loneliness.

Don’t wait in vain for a call which will not come.
Walk on the snowy path if it snows, and
Walk in the rain if it rains.

A black-chest snipe in the reeds is looking at you.
Sometimes even God sheds tears of loneliness.

It is because of loneliness why birds are sitting on the tree branch, and
It is because of loneliness why you are sitting on the waterside.

Even the shadow of a mountain comes down to a village once a day because it is lonely.
The sound of a bell spreads in the air because it is lonely.
 

권리와 의무

아직 TV토론은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 돌아오긴 한 모양입니다. 투표 장소와 투표 일정을 알리는 안내우편을 받고서 든 생각입니다. 시민으로서 누릴 권리를 행사하라는 안내입니다.

Polling Card

며칠 앞으로 다가온 Jury service 는 시민으로서의 의무입니다.

권리든 의무든 일상에 매어사는 시민들에게는 때론 거추장스러운 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저처럼 자영업자들에겐 그 거추장스러움이 더할 수도 있습니다.

Jury Service

이번이 세번 째인 배심원 의무는 그 통지를 받은 날부터 묵직한 스트레스가 함께 한답니다. 행여 배심원으로 선택되어 며칠 동안 시간이 뺏기는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지난 두 차례 배심원 소집에서는 모두 하루 시간이 동원되는 것으로 끝났는데 이번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투표에 이르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의무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고,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는 불이익 또는 벌칙을 감당해야 하지만, 권리란 나의 의지에 달린 일이므로 행사를 하지 않는다 하여도 당장 어떤 불이익을 당하거나 벌칙이 주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 때 국가공동체에게 의무를 다한 것은 병역의 의무였습니다. 만 31개월 며칠 동안의 군생활과 거의 10여년에 가까운 향토예비군 의무를 다한 것이지요.

한국에서 대통령선거를 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 때는 저처럼 보통 시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선택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무렵부터 한국을 떠날 때까지 대통령 선거는 이른바 체육관 선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여기와서는 의무는 의무대로 권리는 권리대로 시민으로서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들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종종 한국내 선거 풍토에 대한 절망감을 토로하는 글들이나 이야기들을 보거나 들을 때가 있습니다.

지나간 일(역사)들을 뒤돌어볼치면 여기나(미국) 거기나(한국) 매한가지 아닐까 합니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의 조선은 패망 직전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미국은 동(뉴욕)에서 서(샌프랜시스코)까지를 완전 통합하고 세계 판도의 새 주역으로 떠오를 때였습니다.

그 무렵의 미국의 모습을 앙드레 모로아는 그의 미국사에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실리주의적인 모사꾼들이 정치에서 주로 한 가지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은 어떻게하면  헌법, 의회, 주정부 그리고 시청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유혹은 크고 허술했기에 사업가가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정치인에게 이익의 일부를 제공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 중략 – 각 주의원들의 소행도 별로 나을 게 없었다. 연방의회마저 대사업가의 이익을 대표해 선출된 의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시대에 미합중국의 첫째가는 위험 요소는 파렴치였다.”

오늘이라고 뭐 크게 달라진 게 있겠습니까만, 앙드레 모로아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런 사족을 달았답니다.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는 실패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아메리카의 민주주의가 너무 빨리 성장하는 바람에 법률과 도덕이 뒤따르지 못했을 뿐이다.”

사람 – 곧 시민들의 깨우침을 요구한 것입니다.

19세기나 21세기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언제 어디에서건 여전히 유효한 권리와 의무에 대한 시민들의 깨우침입니다.

필라 세사모 소식지 – 4

연일 100도 가까이에 이르는 찜통더위가 이어진다.

이 무더운 날, 세월호를  기억하자며 필라델피아 인근 마켓에서 전단지를 돌리거나, 워싱톤 백악관 앞에 서 있거나 하는 벗들이 있다. 누군가는 모처럼 한국 나들이한 시간들을 광화문과 안산에서 보내고 왔다.

그들이 네번째 만든 ‘필라 세사모 소식지’이다.

[gview file=”http://www.for1950s.com/wp-content/uploads/2016/08/philasewol-vol.4.pdf”]

생업(生業)

길 건너에서 같은 업(業)을 하고 있는 6.25선생께서 손을 턴단다. 그가 힘들어 한다는 이야기는 이따금 들었지만, 막상 이렇게 가게 문을 닫아야 할 만큼 곤궁한 처지인지는 몰랐다.

그를 처음 본 지도 어느새 스무해 전 일이 되었다. 어느 한인들 모임에서였다. 한 사내가 남도 특유의 사투리로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그의 주변에는 내 또래 사내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내는 6.25 전쟁 때 자신과 가족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었는지 열변을 토하고 있었는데, 바로 어제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듯 하던 것이었다. 이런 첫 만남 때문에 한동안 나는 그를 적어도 1945년생 전후의 나이로 여기고 깍듯히 대하곤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시간이 지난 후, 그의 나이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그를 6.25선생이라고 불렀다. 그가 나보다 18개월 먼저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 나는 그의 얼굴만 보면 6.25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태어난 나는 부산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거니와, 아무리 용을 쓰고 어릴 적 기억을 되뇌어 본다한들 고작 1950년대 후반에 일어났던 일들 혹은 그 시절 풍경에 대한 것이 고작일 뿐이건만,  6.25 때 일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그는 가히 내가 쫓아갈 수 없는 비범함이 있었을 터이다.

아무튼 말이 좀 많은 편이기는 하나 그는  썩 괜찮은 사내이다. 인물이 착하기도 하거니와 동네 한인들 대소사에 손이 필요할 때면 앞뒤 가리지않고 흔쾌히 나서서 평판도 나쁘지는 않다. 그저 한 마을에 살고있는 한인 가운데 한사람 사이 정도이던 그와 내가 얼굴을 자주 부딪히게 된 것은 한 십 수여년 전 쯤부터이다. 그가 내 가게 길건너에 있는 세탁소를 인수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나는 그 이전 십 수년 해오던 세탁업에 지쳐 딴데 한눈을 팔고 있었거니와, 당시만 하여도 아직 세탁소 형편이 썩 나쁘지만은 않은 때여서 그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아니하였다.

내가 세탁업을 시작했던 때만 하여도 ‘세탁소 간판만 붙이면 밥은 넉넉히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떠돌 때이고, 적어도 2,000년도 전후만 하여도  그 말은 타당하지 않았는가 싶다. 처음 내가 세탁소를 시작할 때 가까운 주변 몇 마일 안에 세탁소 숫자라야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이었지만, 2,000년도 초반에는 이미 두손 열손가락으로는 모자라고 두발 열발가락을 다 동원해야 할만치 늘어나 있었다. 6.25선생께서 세탁업에 발을 들여놓던 때는 바로 그 무렵이었다.

6.25선생이 인수한 가게주인으로 그가 네번 째이다. 그 이전에 주인이었던 세사람 모두 내가 한자리에서 겪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난 십여년 동안 세탁업은 세상이 변한 만큼보다 더 큰 변화를 겪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두 손 두 발 모든 가락수를 꼽아야 할만큼 많던 내 주변 세탁소들 숫자가 손만 동원해도 충분히 세고도 손가락이 남을 만큼 변했다.

변하는 세상풍경이 끝내 6.25선생을 비껴가지 않은 모양이다.

늘어가는 내 나이 숫자보다 줄어드는 세탁소 숫자가 자꾸 밟히는 까닭은 나 역시 변하는 풍경 한가운데 서있기 때문일게다.

쉬는 날, 내 업(業)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