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 – 마지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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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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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주택가 상점들 가운데 이른 아침 가장 먼저 문을 연 곳은 미용실이었다. 도시는 치장이 필요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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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가에서도 노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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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곳곳에서 여러 다른 모습의 홈리스들을 보았다. 잠시 제 자리를 비운 다른 노숙자의 짐을 터는 모습, 남녀 노숙인들이 서로 마주보며 스마트폰을 들고 전화놀이에 빠져 있는 모습, 신문 경제면을 샅샅히 훑고있는 모습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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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들의 문제는 비단 캘리포니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해 전, 우리 동네에서 만났던 힘깨나 쓰던 한인 노숙자 사내는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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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서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가늠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아주 넉넉하다싶게 떠난 공항행이었지만 길위에서 꼼짝을 못하고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이 비단 우리 일행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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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샌프란시스코는 여전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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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가 청과상에서 닭한마리 값으로 사먹은 Saturn Peach(도넛 복숭아) 는 새롭고 신기하면서도 익숙한 맛이었다. 무릇 여행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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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 초를 다투며 공항 렌트카 반환지에 도착한 우리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었다는 안도에 조금전 겪었던 일들을 추억거리로 새기며 웃을 수 있었다. 주행거리 겨우 만 마일 정도였던 렌트카가 공항으로 오는 하이웨이 진입로에 들어서자 엑셀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좀처럼 놀란 티를 내지 않고 여행 내내 느긋했던 하나아빠가 당황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말 베테랑이었다.

그렇게 시간에 쫓겨 탑승게이트에 도착한 우리들을 맞은 것은 비행기 연착 안내였다. 샌프란시코에서 1시간 40분 늦게 출발한 비행기 탓에 우리는 환승지 샤롯(노스 캐롤라니아)에서 4시간을 맥없이 앉아 있어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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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행 환승 비행기를 기다리던 노스 캐롤라이나 Charlotte 공항 대합실에서 나는 어느 노부부의 모습을 한동안 넋놓고 바라보았다. 노마나님은 연신 먹을거리를 남편에게 건네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무표정하게 그를 받고 있었는데, 마치 오래전 시골 버스 정거장 대합실에서 마주쳤던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하였다. 짐이라야 달랑 작은 백팩 두개 뿐인 것으로 보아, 떨어져 사는 자식들 얼굴 한번 보고 돌아가는 길이 아니였을까?

나는 노부부를 보면서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Toni Morrison이 쓴 소설 “고향”을 떠올렸다.

소설속 주인공 Frank Money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이다. Frank가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이유는 이  미국땅에서 흑인들이 겪어냈던 아픔 때문이었다. 남부 조지아주 로터스 출신의 흑인 Frank는 아주 어릴 적에 겪었던 일로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그의 경험이란 한 흑인 남자가 백인들에 의해 생매장 당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훗날, 그렇게 생매장당한 흑인은 백인들의 놀이도구로 죽게 된 사실을 알게된다.

백인들은 흑인 아버지와 아들을 싸우게 해놓고는 내기를 벌인다.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그때 흑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네가 나를 죽이라고.” 흑인 아버지는 결국 생매장을 당하고 만다.

작가 Toni Morrison는 1940년대에만 해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던 미국의 원시적이고 병적인 인종차별 현장을 고발하고 있다. 소설속 주인공 Frank Money는 이런 병적인 사회로부터 탈출하고자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평범한 삶의 현장에서 단지 피부색이라는 판단 기준에 따라 누군가에는 심심풀이 놀이가 되고, 또 다른 누구가는 목숨을 걸어야하는 노리개가 되어도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던 세상을 겪어왔을 대합실의 노부부를 보며, 그들이 헤쳐왔을 세월들에 잠시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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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고향의 길목이 되어버린 필라의 스카이라인은 반가움이었다.

그랬다. 여행 끝에서 만나는 일상은 반가움이어야만 했다.

후기 – 하나네와 우리 부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처 맛보지 못했던 중국인촌 만두를 아쉬어하며, 여행 후 두어 주 지나 필라델피아 중국인촌에서 만두로 배를 채웠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부부는 사랑하는 아들이 사랑하는 아이의 부모 Washington씨 부부와 저녁을 함께 하였다.

 

가을 – 일요일 아침

맨하탄에서 일어난 폭발사고 소식에 가슴이 철컹 내려앉는다. 우선 사고 지역과 딸아이 거주지역과의 거리를 따져보고, 아이에게 연락해 본다. 딸아이는 사고조차 모르고 있었다. 가슴을 쓸어 내리며 찬찬히 뉴스들을 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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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한 마음을 다스릴 겸 이른아침 동네 한바퀴를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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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체육공원 어귀 밤나무엔 밤들이 한가득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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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색으로 변해가는 풀밭에 핀 들꽃이 아침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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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공원 앞에 “Nip”이라고 불렸던 야구선수 James Henry Winters를 기리는 팻말이 서 있다. 오래전엔 야구도 흑인리그와 백인리그가 따로 있었단다. 흑인리그에서 명성을 떨치던 Nip은 은퇴후 결혼한 그의 아내  Sarah Smith 고향인 이 마을에서 정착해 평범한 일꾼이 되어 살다가 갔다고 한다.

사람사는 곳에 여전한 것은 흑백 갈등 뿐만이 아닐게다.

이 좋은 가을날 아침에 누군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것이고, 또 누군가는 아픔으로 가슴을 저미기도 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곳에서 평범한 일꾼으로 살며 계절을 한껏 느끼며 누리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기차여행 -17

금문(金門, Golden Gate)

금문교(金門橋, Golden Gate Bridge)로 향했다. 아무렴, 샌프란시스코인데 금문교 배경으로 얼굴 사진 하나 정도는 찍고 가야 마땅한 일이었다.

가는 길에서 만난 단독주택들은 작고 마당은 없지만 아주 예뻣다. 특히 집 색깔들이 동부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어서 자꾸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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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중에 주로 수다(?) 담당이었던 아내가 느닷없이 샌디에고에 있는 어느 목사에게 전화를 한다. 샌프란시스코와 샌디에고는 같은 캘리포니아라도 약 500마일(800km) 떨어진 곳이건만 아내는 San Diego와  San Francisco에서 San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나아빠처럼 1.5세 이민인 그이는 속한 교단에서 차세대 목회자로 손꼽혔던 사람이다. 내 나이 또래인데 벌써 준은퇴상태이며, 손주가 다섯이란다. 내외 모두 건강 문제로 꿈의 크기를 줄였나보다. 이즈음엔 책을 쓰고 있단다.

벌써 두 해가 지났다. 그가 모처럼 내가 사는 동네에 왔었다. 강변을 걸으며 그는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에’를 웅얼거렸었다. 난 그런 그이를 아내못지 않게 좋아했다.

안개속을 달리다보니 이미 금문교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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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본 금문교는 이런 멋진 모습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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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이렇게 안개 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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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으며 금문교에게 너무나 미안하게도 나는 제2한강교와 절두산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때 세계최고, 최초라는 여러 수식어가 붙었던 금문교에게 정말 미안하리만치 내겐 큰 감흥이 없었다. 셋 중 하나였으리라. 내가 이미 늙었거나, 넘쳐나는 세계 최초와 최고들로 인하여 둔해졌거나, 아니면 안개 때문이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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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대낮이었건만 안개는 거치지 않았고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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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아래로 내려가서야 감탄이 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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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 옆 Sausalito 마을을 들리지 않았다면 그나마 금문교에 대한 정취는 별로 남아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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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usalito는 우리를 매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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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는 우리들의 눈과 입맛과 배를 완전하게 정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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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중이던 하나는 제 아빠가 Sausalito에 있다는 문자를 보내자, ‘거기있다면 자전거를 빌려 타보라’고 했단다.  아이들은 아직 우리들의 나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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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전거 대신 해변에서 앉아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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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usalito에서 금문(金門,Golden Gate)을 지나 누리고 있는 내 이민의 여유를 보았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다섯번째 필라 세사모 소식지

여름 휴가차 모국 방문을 했던 필라 세사모 회원들이 유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와 전하는 소식 등을 실은 다섯번째 필라 세사모 소식지.

[gview file=”http://www.for1950s.com/wp-content/uploads/2016/09/philasewol-vol.5.pdf”]

세월호 참사로 딸 예은이를 잃은 유경근씨의 노모 이세자씨는 감리교단의 장로를 맡고 있는데 세월호참사 직전에 교단을 대표해서 한국여장로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된 바 있다. 이세자씨 부부는 모두 장로를 맡아 온 독실한 기독교인이지만, 세월호참사 이후 교인들과 소통에서 어려움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예은이 할머니 이세자씨가 교인들과 소통에서 겪는 어려움과 새롭게 열린 신앙의 눈을 이야기한 내용이다.

<유가족들 중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70~80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교회를 못 갑니다. 그 이유가 대개 목사님 때문이라고 합니다. 목사님들이 유가족들에게 “아이들이 천국에 갔으니 정신 차리고 제 자리에 돌아와야 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유가족들의 마음에는 비수가 꽂힙니다. 교인들은 또 “손주가 이제 천국 갔으니 좋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나도 아이들이 천국 가 있는 거 알아”라고 말은 합니다. 하지만 유가족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그들이 치유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교회를 더 못 갔습니다. 교회에 나가면 더 아파야 하니까요. 그래서 따로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렇게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냐고?”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죄도 아니고 소경의 죄도 아니라고 하시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쉽게 하는데, 그 말은 정말 잘 사용해야 합니다.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세월호 참사로 아이들이 죽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들은 손주 얘기도 듣고, 남편 얘기도 듣고, 지나가는 학생들 말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솔로몬도 백성의 소리를 듣고자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똑똑하게 말하는 게 지혜가 아닙니다. 나이 먹을수록 더 들어야 합니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생각을 한 다음, 말은 한참 있다가 해야 합니다.

저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알게 해 준 예은이에게 고맙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꼴통 같았던 이 할머니의 눈을 열어준 걸 생각하면 그 아이에게 고맙기만 합니다. 이 일이 아니었다면 저는 끝까지 제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추석- 세월에 대하여

송편 대신 만두를 조금 빚었다. 솔직히 ‘송편 대신’이라는 말은 애초 가당치 않은 수사이다. 아무리 미국사람 다되어 산다하지만 노인들이 계시고, 그래도 명색이 추석인데 덕담 한마디로 넘어가기엔 예가 아니다싶어 만두를 빚게되었다.

“어제 막내네가 필라에 장보러 간다고해서 따라갔는데 파는 송편도 없더구나. 다 팔린건지…. 찾는 사람이 없는건지…. 이젠 추석도 없나보다.” 만두를 들고 찾아간 내게 어머니가 건넨 말씀이다. 노모는 손수 만들지는 못할망정 사서라도 송편 몇 점 아들과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다.

또 한번의 추석이 그렇게 지나간다. 참 신기한 일이다. 해마다 이맘 때면 날씨만큼은 내 어릴적 추석날 같다. 창문을 여니 벌레소리가 벌써 가을이다.

무심코 손에 든 책이 아주 오래 전 것이다. <성서와 인간> –  1972년도이니 내가 대학을 들어가던 해에 나온 책이다. 그해 외할머니께서는 내게 손수 한복을 지어 주셨다. 나는 그 옷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책장을 넘기다 눈에 들어 온 대목이다.

“돌이켜 우리는 혼란을 거듭하는 조국의 처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 조국의 발전의 길은 지도층의 영웅화를 배제하고 대중이 참되게 계발되는 데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일석이조에 이와 같은 과업이 완수될 수는 없지만, 질서화를 위해 암중모색한 소크라테스의 인생관과 그의 논리성은 곧 우리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소위 아테네의 영웅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는 ‘궤변의 논리’를 앞세우는 특권층을 ‘성실의 논리’로 막아냈으나 유감스럽게도 우매한 대중에 의해 사형당한 아테네의 선량한 평민이었다.”

예전 숭실대 총장을 지내신 조요한(趙要翰)선생님의 글이다.  글제목이  < 혼란과 질서 – 궤변론자들과 소크라테스>이다.

변한 추석풍경과 다르게 여전한 ‘궤변의 논리’들이 무성한 한반도 뉴스들이 마구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성실의 논리’들은 더욱 거세게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는 생각으로 넉넉한 한가위 저녁을 물린다.

따져보니 그 무렵 한복 지으시던 외할머니가 이고 있던 세월의 짐을 내가 이고 있다.

기차여행 – 16

샌프란시스코와 동양인들

반이민정책을 내세워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는 도널트 프럼프가 세번 결혼했으며, 영화배우였던 두번째 부인 Marla Maples 를 빼고, 나머지 두 부인들이 이민 1세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첫번째 부인인 Ivana Marie는 스키선수 출신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온 이민자였고, 현재 부인이자 세번째인 Melania는 모델 출신으로 슬로베니아에서 온 이민자이다. 이즈음 Melania가 불법취업이민으로 미국에 정착했다는 뉴스가 터져나와 트럼프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트럼프측은  부인 Melania가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방법과 절차에 따라 이민을 왔다는 증거들을 찾아 내놓고 있으나, 그 증거들에 의문을 보내는 비판자들의 의견들이 지속적으로 뉴스를 타고있다.

미국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문제가 불거진 일이 비단 오늘에만 있는 일도 아니고, 트럼프만이 반이민정책을 내세웠던 것만이 아니다. 다만 트럼프 경우는 이민정책 뿐만 아니라 다른 구호성 정책이나 그의 삶의 방식 등에 일관성이 많이 결여된 것 같은 내 나름의 의견이 있을 뿐이다.

약 한세기 이전에도 이민자들은 미국이 안고 있던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수많은 이민자들이 신천지 미국으로 들어왔다. 대서양을 건너서 오는 유럽계 이민자들은 동부 뉴욕에 있는 Ellis Island에서 입국심사를 받고 미국 땅을 밟았다.

반면에 태평양을 건너서 오는 중국인들, 일본인들과 시베리아쪽에서 오는 러시아인들은 서쪽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Angel Island에서 입국심사를 받고 미국에 들어왔다. Angel Island 곧 천사의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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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지역적으로 동쪽과 서쪽이라는 차이 뿐인 것 같지만 그 입국절차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엘리스 아일랜드로 들어온 유럽계 이민자들은 비교적 빠르게 입국수속을 마치고 신천지 땅을 밟을 수 있었으나, 천사의 섬으로 들어온 아시안계 이민자들 특히 중국인들은 입국수속이라기 보다 감금이라고 표현해야 적합할 만한 수용소 생활을 거쳐야만 하였다. 그들은 짧게는 한달에서 길게는 거의 이년여에 이르기 까지 수용소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아시안계 인종차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 첫번 째 대상자들은 바로 중국인들이었다.  당시 중국 본토까지 알려졌던 서부의 골드러시 소식에 황금빛 꿈을 그리며 미국행을 결심한 중국인들이나 서부개척에 노동력이 절실했던 미국 입장에서 중국인들의 미국이민은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입국절차에서 황인들은 백인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미국 땅을 밟은 중국인들은 대륙횡단철도 건설노동현장의 주역이 되었다. 철도건설 이후인  1880년 무렵에 이르러 미국은 불경기를 맞는다. 이때 미국인들 사이에는  중국인들이 일자리를 빼앗아 갔기 때문에 경기가 나빠졌다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고 결국 1882년 의회는 중국인들의 이민을 금지하는 법(Chinese Exclusion Act)을 통과 시킨다. 2016년 트럼프와 그를 지지하는 백인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지점이다.

또 다른 아시안계 이민자들이 있다. 일본인들이다. 일본계들은 중국계와는 다르게 미국사회에 많이 동화되었고 뿌리도 깊다. 그러나 그들 역시 수년 동안 캘리포니아 등지의 사막지대 수용소에서 감금되어 살았던 아픈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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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 19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한다. 이 명령은 적성국민들을 강제적으로 거주지에서 내쫓아 수용소에 강제 수용시키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약 12만명에 달하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단지 일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재산을 몰수 당한 채 캘리포니아, 아리조나, 와이오밍, 콜로라도, 아이다호, 유타, 아칸소 등 사막지대나 외진 곳에 건설된 수용소로 강제 이주되었다.

얼핏 미국과 전쟁중인 적국의 국민들을 국가 안전상 강제 수용한 것처럼 정당화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대다수 당시 일본계 이민자들은 이민 2,3,4세대들로써 이민자라기 보다는 미국에 동화된 미국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명령은 당시 미국 헌법 및 국제법에 반하는 명백히 불법적이고 반인권적인 행위였다. 훗날 미국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명령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다.

이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은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미국에서 낳고 자란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3, 4년 동안 강제 수용을 당하고,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되찾지 못하는 역사적 경험을 하였다. 이 땅에서 살아갈 내 아이들을 생각하며 한반도 뉴스에 귀기울이곤하는 내 모습이 겹쳐지는 부분이다.

샌프란시스코 일본인촌과 중국인촌은 그렇게 미국땅에 뿌리 내리게된 일본계와 중국계 미국인들의 역사였다.

우리는 일본인촌 식당가에서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국 젊은이들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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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촌 금문제과점(Golden Gate Bakery) 앞에 길게 늘어선 대열에서 반시간 가까이 인내심을 발휘했던 하나아빠의 노고로 우리는 중국 호떡과 빵을 누리는 기쁨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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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케이블 카를 타보아야 한다고해서 그 맛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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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가에서 해물찜을 놓고 한잔하는 맛도 일품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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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악사에게 음악 감상료를 놓는 우리 일행의 모습이 비록 암표장사 같을지라도 그 밤 부두가 거리악사는 색스폰으로 우리를 매료시키며 여행의 맛을 진하게 하였다.

기차여행 – 15

길 – 두 개의 다른 시선

“이 세상에는 두 개의 시각이 있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두 개의 시각. 성장으로 보는가, 아니면 쇠퇴로 보는가! 시인의 눈으로 보면, 신의 눈으로 보듯이 삼라만상은 활기차고 아름다워 보이리라. 그러나 역사의 눈으로 본다면, 혹은 과거의 눈으로 본다면 모든 것은 활기없고 공격적으로만 보여지리라. 만약 자연을 중단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것은 즉시 죽고 부패 하겠지만, 진보라고 생각한다면 자연은 더없이 아름다워지리라.”

초기 미국의 정신이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남긴 말이다.

그는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항거하며 동부 메사추세스 콩코드 강변 월든 숲속에서 오두막 집을 짓고 살았다 . 그가 숲속에 작은 길들을 만들며 사색했던 그 무렵 서부에서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멕시코와의 전쟁에 승리한 후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차지한 지 얼마 안되어 신생국가 미국인들에게 꿈 같은 이야기들이 급속히 번지기 시작하였다. 일확천금의 꿈 이른바 골드러시(Gold rush)의 복음이 퍼진 것이다. 그 때의 상황을 앙드레 모로아는 그의 미국사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이 소식이 동부로 전해지면서 소위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다. 1849년 한 해에만 캘리포니아 인구는 6,000명에서 8만 5천명으로 늘어났다. 그전까지 한 어촌에 지나지 않던 샌프란시스코는 몇면간 인구 5만이 넘믐 도시가 되었고 얼마 후에는 20만의 대도시로 발전했다.하지만 교통은 여전히 불편했다. 어떤 사람은 해로로 남미의 케이프혼을 돌아서 들어왔고, 또 어떤 사람은 파나마 지협을 넘는 육로와 해로를 거쳐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오리건과 유타를 거치는 산길을 통해 찾아왔다. 도중에 수천 명이 피로와 기아, 험난한 산맥, 인디언에게 희생되었지만 무덤으로 뒤덮힌 길을 지나 끝내 목적에 도달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동부 콩코드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산책으로 숲속 길을 만들던 그 무렵 누군가는 황금을 얻으려  캘리포니아로 가는 육로를 만들고 있었다. 정신과 물질, 어느 것이 우선일까? 과연 선택해야만 하는 명제일까?

우리는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넘어 샌프란시시코로 가는 그 길을 기차 대신 버스를 이용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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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하운드 버스.

내가 고등학교 때 일이었다. 그 무렵 막 경부고속도로가 놓였고, 서울역 맞은 편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부산을 가보는 일은 그야말로 꿈이었다.

2016년 미국에서 그레이하운드를 타는 일이란 꿈이 아니라, 마지못해 선택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교통수단으로는 환영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행이란 경험을 즐기는 일일 수도 있거니와, 네바다 Reno에서 캘리포니아San Francisco 까지220마일(약 354km)을 일인당 단돈8달러에 탈 수 있었던 그레이하운드를 마다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잠시 착각을 하고 호텔에서 그레이하운드 정류장까지 채 반마일도 안되는 길을 택시를 이용해  15달러를 지불하고서야 버스를 탄 이야기 역시 경험을 즐겼다고 말하기는 아프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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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라네바다를 넘어선 후  캘리포니아  풍경은 이중적이었다. 이제껏 본적 없는 넓고 풍요로운 과수 농장과 함께 화재로 민둥산이 된 곳에 위치한 주택가들, 태평양 물을 받아 안은 멋진 해안을 배경으로 한 도시 풍경과 함께 시야에 들어 온 거리 노숙자들의 숙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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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이중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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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삶에 있어서 머무름, 기다림, 느긋함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철학자 한병철의 생각이 담긴 책이름이다.

‘사색적인 삶이 풍요롭다.’라는 명제는 멋있다. 그러나  ‘사색적인 삶’이 시간에 늘 쫓겨 살수 밖에 없는 평범한 속물인 내겐 애초 가당치 않는 전제이므로 ‘풍요’ 역시 내가 누릴 몫은 아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사색적인 삶’이란 진짜 가당치 않은 지적 사치일 뿐이다.

딸아이가 모처럼 주말을 함께 보내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일요일 오후, 기다리는 버스가 한시간 반여 늦게 도착하였다. 계획에 없이 딸아이와 함께 했던 한 시간 반 동안의 시간은 내게 자유를 일깨워 주었다. 아이의 직장생활과 향후 계획, 남자친구와의 이야기들을 묻고 들으며 버스가 늦어지는 시간에 감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딸아이와 아내는 때론 아주 같기도 하고 전혀 다르기도 하다. 둘 사이에 도대체 닮은 게 무엇이 있을가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거니와 너무 똑같아 깜짝 놀랄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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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구속되어 있지 않거나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주는 것은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그 무엇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롭다- frei, 평화- Friede, 친구- Freund와 같은 표현의 인도게르만어 어원인 ‘fri’는 ‘사랑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나 연인에게 속해 있는’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 >

한병철이 <시간의 향기>에서 하는 말이다.

내가 딸아이가 타고 갈 버스가 늦게 도착한 것을 감사하며 자유를 생각한 까닭이다.

기차여행 – 14

요세미티 숲길을 걸어…

요세미티는 엄청난 위용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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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택한 진입로인 Tioga Pass 도로는 11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는 길이 폐쇄된다고 한다. 눈 때문이란다. 엄청난 위용으로 앞을 가로 막고 서 있는 Tioga Peak의 높이는 고도 11,526ft(3513m)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는 차창 밖 풍경을 보면서, 운전대 옆으로는 시선이 가지 않았다. 오금 저리는 절벽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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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9945ft(3031m)지점에 이르러서야 공원 입장권을 구입하는 입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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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cupine Flat 지점에 이르러 우리는 숲길을 걷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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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언덕길 아니면 고작 펜실베니아 Pocono 산(2,133 ft ,650 m) 정도, 그것도 길어야  1마일 정도 걸어본 경험이 전무인 우리들에게 조금은 과감한 도전이었다. 기억컨데 설악산을 마지막으로 오른 이후 산행은 처음이니, 약 35년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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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왕복 8.8마일(약 14km) 거리를 걷기로 하고 떠났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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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평균고도 8000ft(2440m)라는 고지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나이와 평소 소홀했던 운동 탓이었다.

우리는 왕복 4.4마일(약 7km) 거리인 Indian Rock을 오가는 것으로 급히 계획을 수정하였다. 그 수정은 아주 적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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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걸으며 나는 그즈음 가슴 깊은 곳을 짓눌러 딱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주던 내 쓰잘데 없는 걱정거리들을 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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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쏟아진 폭우와 천둥번개는 하산길 도로 곳곳에 낙석을 깔아 놓았다.

비가 개인 후, 요세미티를 등진 하늘 끝에는 무지개가 파스텔화를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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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 – 13

요세미티 가는 길

네바다 Reno 시에서 요세미티 공원 입구인 캘리포니아 Mono Lake 까지의 거리는 약 140마일(225km), 예상소요시간 약 3시간 정도였다. 단 이것은 교과서 정보였을 뿐, 충청도 사나이 하나아빠에게는 딱 두시간이면 족한 거리였다.

눈 앞에 풍경만으로는 엄청 높은 산지를 달리고 있는 듯도 하였고, 그저 대평원을 달리는 느낌도 들었고, 때론 사막을 달리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경이로움의 연속이었다.dsc0224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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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바다 – 캘리포니아 경계선에는 검문소가 있었다. 매우 낯선 풍경이자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메인주에서 플로리다까지 동부 여러 개 지역을 다녀 보았으나 주 경계를 넘으며 검문소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캐나다 국경을 넘으며 만났던 검문소 만큼 철저하지는 않았고 그저 형식상 이루어진 검문이었지만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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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생각해보면 좁은 땅에 검문소가 어찌 그리 많았던지. 아주 먼 옛일이 되었지만, 검문소를 피해 멀리 우회해서 도망치듯 경계를 넘었던 일이 더러 있었다. 청춘이었던 시절에. 검문소를 보며 내 스물 무렵이 떠오른 일도 조금은 생소한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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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차가 검문소에 정차하자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고 경비원이 물었다. 하나 아빠가 충청인답게 잠시 뜸을 드리는 사이 서울내기인 내가 잽싸게 대꾸했다. “Reno!”  검문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10대 나이에 이민을 온 하나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거 참 뭐라할지 잠시 망설였네. 리노, 아니면 델라웨어, 아니면 한국…” 그랬다. 아직도 우린 한국에 닿은 사람들이었다.

캘리포니아 하면 산불이라더니 군데 군데 까맣게 타버린 풍경들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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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 공원에 들어서기 전에 있는 모노호수(Lake Mono)에 이르러서야 운전대를 잡은 하나아빠도 잠시 쉴 수 있었다. 이곳은 호수 밑에서 자란 tufa라는 암석이 유명하단다. 안내소에는 영상물 상영관과 전시관이 잘 꾸며져 있었다.

Mono lake rock formations Tufa Towers Mono's Magnificent Monuments, Mono County, California
Mono lake rock formations Tufa Towers Mono’s Magnificent Monuments, Mono County, California

전시관내 설명 가운데 눈에 뜨인 것은, 이곳에 터잡고 살던 인디언들의 거주시설과 후에 이 땅을 차지한 개척자들의 주거형태 모형에 대한 안내였다. 인디안들의 초라하고 허술한 주거형태가 개척자들에 의해 현대화(?) 되었다는 설명이었는데, 뭐 인정한다 하더라도 인디언들의 거주공간에 담겨 있던 이야기들이 사라진 연유가 함께 했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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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사진 몇 장 찍고 이제 요세미티를 오른다. 이 때만 해도 우리는 모노호수(Lake Mono)가 해발 6,383 ft (1,946 m) 고지에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