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

필라델피아에서 영화 <서울의 봄>이 상영된단다. 이 소식을 들은 필라민주동포 모임 벗들이 단체 관람을 하자고 이른바 번개모임을 제안했다. 그 소리 듣고 더듬어 보는 그 시절 옛 이야기다.

내 기억에는 박정희 죽음의 날인 1979년 10월 26일 보다, 이른바 국장이라고 불렀던 그의 장례식 이 있던 날 그해 11월 3일 신문로 사거리 모습이 깊게 각인되어 남아있다.

당시 나는 영세하다는 말조차 호사스러울 만한 아주 작은 출판사를 하면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다만, 나는 그저 백수였던 시절이라고 말하곤 한다. 박정희의 죽음이 알려진 후 나는 제적을 당해 쉬고 있었던 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 11월 3일, 지금 생각하면 할수록 웃기는 당시 모습이지만 그만큼 유신독재가 얼마나 허약한 지경에 이르렀었냐는 것을 알려주는 한 장면이 되지 않을까? 아직 이십 대 중반 나이였던 내게 툭하면 달라붙어 다니던 담당형사가 있었다. 나이 스물 대여섯인 내가 알면 뭘 알았겠으며 하면 또 무슨 일을 꾸몄겠나? 모두 독재의 허약함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날 이른 아침부터 집을 찾아 온 형사가 ‘오늘 하루는 집에 있어야만 한다’며 내 집 앞을 지키고 있었다. 장난기가 동한 나는 그를 설득했었다. ‘대통령이 떠나시는 역사적 날인데 함께 구경 한번 갑시다. 내가 뭐 형님 따돌리고 도망을 가겠소. 누굴 만나기나 하겠소. 그냥 조용히 함께 장례 구경이나 하고 옵시다. 같이 집에 있었다고 보고하면 끝 아니오? 언제 이런 구경 한번 하겠소.’

그렇게 나섰던 신문로 사거리 풍경에 나는 절망했었다. 내 마음 속은 축제의 날이었건만 거리를 가득 메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은 마치 제 부모를 잃은 양 통곡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야기로만 들었던 고종황제 국장을 보는 듯했다.

내게 서울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삼월, 복교가 된 학교로 돌아갔다. 당시 학교 영자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선생은 선생으로서 모두 제 자리에서 제 할 일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마지막 남은 일년 대학생활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돌아간 학교였다.

3월 하순부터 학교는 들끓고 있었다. 4월 사북 탄광 노동항쟁 소식으로 그 열기는 더해갔다. 5월 들어 이런저런 흉흉한 소식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5월 13일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5월 15일 서울역 광장 회군으로 알려진 그 날부터 나는 도망자가 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언론은 온통 사기질이었다.

돌이켜 볼수록 내가 한 일이라곤 부끄럽기 짝이 없을 정도로 거의 아무 것도 없었다. 성명서 몇 번 쓴 일, 후배들 앞에서 몇 차례 내 의견 표현을 한 일이 고작이었다. 무슨 투철한 이념으로 무장한 혁명투사 또는 새빨갛게 물든 빨갱이는 커녕 그저 좋은 세상,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꿈꾸며 사는 지극히 평범한 이십 대 청춘이었다. 나이 들어 이제 그 세상의 크기는 점점 작아져 이젠 ‘내가 만나는 사람들 만’이라도 하는 지경이 되었다만…..

그리고 6월 어느 날, 아주 건장한 몸집의 사내 예닐곱명이 내 작은 몸을 까만 세단차에 꾸겨 넣었다. 그렇게 끌려 간 곳이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백열등이 환한 밀폐된 조사실이었다. 건장한 사내 셋에게 완전히 발가 벗겨진 내게 한 사내가 권총으로 내 왼쪽 가슴을 툭툭 겨누며 말했다. ‘너 같은 놈 하나 죽여 파묻어도 아무도 묻지 않는 세상이야!’ 그렇게 치도곤이 시작됐었다.

내 기억 속 그해 서울의 봄이다.

아직도 나는 무지개가 뜨면 홀리곤 한다. 좋은 세상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생각으로.

전두환과 그 무리들 보다 못한 윤석열 패거리들이 발호하는 뉴스들을 보면서도 내가 희망을 놓지 않는 까닭이다. 비록 아직도 답답하긴 하다만, 1979년 11월 3일 그 신문로 사거리의 국민들이 자각한 민중 또는 깨어 있는 시민으로 놀랄만한 변화를 이룬 것을 보면 희망은 서서히 이루어져 왔고 또 그렇게 이루어 질 것이다.

다만 그 때 보다 더욱 추해지는 언론 환경은 가히 혁명적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만.

옛 생각하며 영화 ‘서울의 봄’을 보러 가야겠다. 그리고 옛날 처럼 조용히 윤석열 패거리들을 몰아내자는 피켓 하나 들어야겠다.

대나무

농사 짓는 친구 안병덕이 짧게 짧게 가르쳐 주는 식물과 사람살이 강의 재미가 쏠쏠한 이즈음이다. 산업공학과 전산 쪽을 공부하고 이른바 대기업에 입사해 그 계열사 중 한 곳에서 최고위직까지 지낸 그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게 족히 25년은 되지 않을까?

매사 성실했던 어릴 적 모습 그대로 그는 오늘도 농사 짓는 일에 충실하다. 이제 그는 식물과 사람살이 역사, 나아가 사람과 식물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가르친다.

어제 그에게서 배운 것 하나. 대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벼나 밀, 옥수수 등과 같은 벼과에 속하는 식물 곧 풀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 읽고 ‘아하! 그랬구나.’하며 몇 년 간 했던 내 고생을 떠올리며 웃었다.

나는 몇 그루의 소나무들과 전나무 그리고 대나무를 키웠었다. 개나리, 진달래와 함께 그들은 내가 마치 서울에 사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곤 했다. 문제를 일으킨 건 대나무였다. 대나무의 번식과 생장 속도는 생각보다 엄청 빨랐다. 급기야 이 놈들이 경계를 넘어 이웃 집을 침범하고 말았다. 그게 주법(州法)을 위반한 일이었음을 그제야 알았었다. 대나무는 땅 속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부랴부랴 대나무를 다 자르고 그 뿌리조차 없애는데 무려 4년이 걸렸다.

내 친구 안병덕이 대나무의 번식력과 생장속도 그리고 끈질긴 생명력을 다시 생각 하게 했다. “아하 그게 풀이였구나!”

농사 짓는 친구가 또 하나 있다. 경북 봉화에서 각종 농사를 다 짓고 있는 오시환이다. 대기업 홍보파트에서 잘 나간다고 알고 있었던 그를 뉴욕 한인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게 아마도 거의 이십 년 넘는 일일게다. 그 때 나는 ‘설마?’했었다. 그가 식당 주방을 들락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밤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헤어졌다.

그가 봉화에서 농사 짓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은 페북을 통해서였다. 그는 내가 아는 한 삶을 즐기는 참 농사꾼이다. 그는 작가이자 화가, 사진가이자 한글 운동가, 제법 도튼 불자이자 사회 운동가이다. 달 포 전 한국여행 중 봉화를 들리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쉽다.

그는 종종 풀과 놀고 풀과 싸우는 모습을 페북에 올리곤 한다. 문득 그가 풀 같은 생각이 든다. 마치 대나무 같은.

땅이 아니라 사람 마음 밭 갈아 좋은 세상 만들어 보자고 밭갈이 하는 친구가 하나 있다. 대전 대화동에서 목회하는 목사 김규복이다.

‘왜 그럴까? 왜 그 젊은 시절 지녔던 생각들 다 버리고 바뀌었을까?’ 그가 세태를 한탄하며 굵은 눈물 한 방울 뚝 떨구었다. 그는 그냥 앓고 있는 병 탓에 떨군 눈물일 뿐이라고 했다만, 가슴에 차마 터트리지 못한 눈물 보따리 하나 안고 사는 듯 했다.

허나 그는 결코 그 보따리 터트리지는 않을 듯. 그 보따리는 그 밭을 일구는 거름인 것을. 이쯤 그는 대나무 농사꾼.

아직은 아닌 듯 싶은데 밤운전으로 이웃 도시 필라델피아를 오가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 어제였다. 아마 빗길과 짙게 깔린 밤안개 때문일 뿐, 나이 탓이라고 생각하기엔 이르다.

살며 뜻 맞는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처럼 즐거운 일이 무에 있으랴! 민주, 평화, 통일 나아가 사람사랑 운동으로 반 백년 이민 생활을 일관하고 있는 김경지선생, 이민자들 권익과 다음세대 바르게 터 닦는 일에 전심하는 참 좋은 벗 이종국, 김성규를 비롯하여 세월호,이태원 참사의 아픔을 공유하며 정말 좋은 세상이 되는 우리들의 모국을 꿈꾸는 필라 민주동포 모임의 벗들과 함께 한 좋은 시간을 다시 새기며.

암만, 우리 모두 울타리 필요없이 뿌리 얽히고 설켜 빠르게 세를 키워 좋은 세상 영역을 넓히는 대나무인 것을.

늙막에

늙막에 한 뼘 땅 가꾸며 깨달은 사실 하나. 꽃이든 푸성귀든 밭이 되려면 그저 애지중지 그 땅 곁에서 내 손길 주어야 한다는 거,

쉽다고?젠장! 내겐 그게 그리 힘들더라고.

잠깐 한 눈 팔거나 내 급한 일에 한 순간 정신 쏟다보면 온통 밭은 밭이로되 잡초밭인 것을.

꽃밭, 텃밭 제대로 만드는 일. 그냥 내가 꽃이 되거나 푸성귀 되는 일.

그게 가장 쉬운 것을.

*** 늙막에 대한 느낌은 저마다 다를 터, 이르게 느끼게 해 주신 신께 감사드리며 사는 쪽.

이야기

가을비일까? 겨울비일까? 비에 젖어 처진 잎들이 아직 가지에 달려 있는 것을 보면 가을인데, 이웃집 앞뜰은 이미 성탄인 것을 보면 겨울인 듯도 싶고… 을씨년스런 11월 마지막 일요일도 저문다.

몇 주 전 서울에서 여성 성가 합창곡 악보책을 구한다고 교보문고를 찾았던 아내를 따라 나섰다가 손에 넣어 들고 온 책,  로버트 알터(Robert Alter)가 쓴 <성서의 이야기 기술 The Art of Biblical Narrative>에 빠져 하루를 보냈다.

흔히 구약이라 부르는 히브리성경을 문학비평적으로 해석한 책이라고 하는데, 그냥 나 같은 얼치기도 쉽게 빠져 술술 읽을 수 있는 독자 친화적(?)인 책이다.

번역자는 제목에만 ‘이야기’라고 했을 뿐 본문에서는 ‘내러티브(Narrative)’로 일관되게 사용하면서 친절하게 그렇게 번역한 까닭까지 옮긴이의 말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만 나는 그저 줄기차게 ‘성서이야기’로 읽었다.

저자  로버트 알터(Robert Alter)가 히브리성서의 문학비평적 해석이라는 학문적인 노력을 지속한 까닭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성서 이야기는 인간이 시간이라는 매개체 속에서 변화를 거듭해가며 하나님을 직면하면서 살아야 하고 다른 인간들과 끊임없이 그리고 복합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기본적 인식을 구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이란

<성서의 작가들이 그들의 기술을 통해서 알고자 한 것은 분열된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의 의미이다. 형제를 사랑하지만 미워할 때가 더 많은 존재, 아버지를 원망하고 업신여기기도 하지만 또한 자녀로서 깊은 존경심을 가지는 존재, 형편 없는 무지와 불완전한 앎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존재, 격렬하게 스스로의 독립을 주장하지만 신이 계획한 사건들 속에서 붙잡혀 사는 존재, 외적으로 확고한 성품이지만 내적으로는 탐욕, 야망, 질투, 욕망, 경건, 용기, 열정, 그리고 그 이상의 것들을 품은 불안정한 소용돌이 같은 존재가 인간이다.> 라고 말한다.

이런 인간들과 신과의 관계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히브리성서(구약)의 문학비평적 접근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이다.

<히브리 성서의 작가들은 살아 있는 듯한 인물과 행동을 기교 있게 그려내면서 분명히 즐거움을 느꼈고, 그 결과 수백 세대에 걸친 독자들에게 사라지지 않는 즐거움을 줄 자료를 만들었다. 그러나 상상력이 풍부한 이 놀이의 기쁨에는 한편 거대한 영적 절박함이 배어 있다. 성서의 작가들은 복잡하고 때로는 매혹적인, 종종 격렬하게 개성을 고집하는 인물들을 만들어냈다. 그 이유는 각각의 남녀가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무시하고, 하나님에게 응답하거나 저항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띠는 것이 고질적인 인간의 개성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종교적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대체로 성서를 즐기기보다 심각하게 대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인 진리는 성서의 이야기를 좀 더 온전히 이야기로서 즐기는 법을 배울 때 그들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위험할 정도로 중요한 역사의 영역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바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긴 이야기를 몇 개 문장으로 소개하는 일은 무지, 무엄한 일이 되겠다만 손에 들면 놓지 못할 만큼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구약 성서 속  많은 이야기들과 인물들을 나는 성서를 읽기 전 아주 어릴 적에 이야기로 전해 들었다. 유, 소년기에 들었던 그 이야기 속 인물들과 사건들은 머리 굵어진 후 성서를 읽거나, 나름 이런저런 학문적 또는 신앙적 해설서를 읽으며, 나아가 내 삶의 경험과 이웃들의  경험 속에 투영된 모습들을 통해 끊임없이 여러 모습으로 변하며 내게 다가왔다.

저자 알터(Alter)의  말마따나 수백세대를 이어져 온 이야기를 이제 저물어 가는 서녘에 서서 내 이야기로 되뇌어 본다.

마침 오늘 아침, 오랜 옛 벗이 우리들의 어릴 적 옛날 사진 몇 장을 이번 한국 방문을 계기로 만들어진 단톡방에 올려 놓아 내 되뇌임을 도와 주었다.

그렇게 다시 떠올려보는 몇 주 전 한국방문 때 들었던 홍길복목사의 설교 제목과 성서 본문이다.

그날의 설교 제목은 <목표 다시 가다듬기>였는데 영어로는 <Rebuilding our Final Goal>라고 되어 있었다. 이제와 곰곰 생각해보니 <목표 다시 가다듬기>와 <Rebuilding our Final Goal>는 하나로 연결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일테면 ‘마지막목표 바로 세우기’정도로.

그날의 성서 본문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립보서 1:20-21>

그렇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축복을 깨달을 나이가 되었다. 이제 내 이야기가 성서 이야기가 되어야 하고, 성서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비단 내게만 부여된 축복은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는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은총이다.

이쯤 을씨년스럽던 11월 마지막 일요일은 내게 감사다. 다가오는 성탄도. 다시 맞는 겨울도.

시간여행을 끝내며- 황금시대

부일이와 정일이 아버님 최창한장로님께서는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들에게 ‘Golden Age(황금시대)’라는 말을 즐겨 하셨다. 십대 나이야 말로 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멋진 시절이므로 알차게 보내야만 한다는 당신의 속 깊은 충고를 담아 내신 말씀이었다. 허긴 그 나이에 그 충고가 귀에 들어오기나 했었겠냐마는.

이제 노년의 초입에 이르러 대현교회 최장로님의 충언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어 본다. 바야흐로 내가 서 있는 오늘이야말로 나에겐 ‘Golden Age(황금시대)’가 아닐런지.

여느 해 추수감사절이면 나는 음식하기에 바빴었다. 허나 오늘은 어릴 적 추석 같은 명절이면 어머니가 차려 준 명절상 즐기며 놀 듯, 아이들이 차려 준 감사절 만찬을 즐겼다. 사라진 부모님 자리를 손주뻘 아이들이 채워주었고, 우리 세대는 이제 손 움직이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

허나 혼자 있어 좋은 시간들, 혼자 있어 즐기는 시간들, 혼자 있어 감사한 시간들을 누리는 오늘이야말로 진정 삶의  ‘Golden Age(황금시대)’가 아닐런지.

이 황금시대를 구가할 수 있는 힘의 첫째 원천은 아내다. 돌이켜보면 역사 이래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회수가 천 번을 넘는다고 한다만, 우리 내외가 이제껏 싸운 회수를 따진다면 족히 그 몇 곱을 될 터. 그 숱한 전투속에 쌓인 것은 미움이 아니라 적과 아군을 넘어선 굳건한 전우애, 바로 그 사랑.

그 사랑의 결실인 우리들의 가족들. 이번 여행 중 두 처남 내외가 베풀어준 가족 사랑에 대한 기쁨과 감사도 꼭 기억해야 할 추억이다.

아내와 연을 맺어 여기까지 오게 된 길목 길목들을 따라 쫓다 보면 그 끝에 서 있는 담장이 넝쿨 뒤덮인 곳, 바로 신촌 대현교회이다.

이젠 넉넉한 맏형이 되어 계신 송영길 형님, 교회의 기둥이 된 김석수, 박성규, 안희주, 김난애 장로님들, 늙막에 들어선 우리들에게 믿음이 함께 하는 새로운 길을 바라 보라고 새 길눈 열어 주신 홍길복 목사님, 그리고 차리기 결코 쉽지 않은 잔치자리 기꺼이 마련해 주신  대현교회 최영태 목사님과 당회원 여러분들께 머리 숙여 속 깊은 감사를.

언제나 꿈속에서 들어도 반가운 병덕, 종석, 종민, 용철, 응복, 성식, 경애, 경자, 영숙, 경희 그 아스라히 언제나 그리운 얼굴들, 멀리 남쪽 진주에서 올라와 긴 이야기 나누지도 못하고 헤어진 병훈이…. 그저 만나 고마움으로.

길환이, 영환이…

그리고 규복이. 그저 끝없는 고마움으로.

우리 모두의 황금시대를 위하여!

2023년 가을에.

시간여행 -5, 함께

옛 벗들과 함께 나섰던 강화 나들이는 우연히 따라 나서게 된 까닭도 있거니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기도 하여 많은 여정(旅情)을 쌓은 하룻길이었다.

그 하룻길 나들이 길잡이를 자처한 김환조목사와 강화 지킴이 송가감리교회 고재석목사님과 그의 부인이자 동역자인 우리들의 옛 친구 손명희사모 그리고 아직도 예전 십대 청춘을 구가하며 사는 듯한 차용철형님 그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어린 시절 교회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몇 십 년이 흐른 뒤,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마당에 우연치 않게 만나 하룻길 나들이를 함께 하는 경험을 나눈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일 터. 바로 그날 우리들이 누린 은총이었다.

강화에 들어서서 첫 번 째 치룬 행사는 <강화 기독교 역사 기념관> 방문이었는데, 기념관 안내와 전시장 해설을 맡아 주신 이의 지나친 친절로 인해 ‘아뿔사! 혹시 오늘 하루는…’하는 염려가 그득히 밀려 왔었다. 허나 고재석목사님으로 하여 내 염려는 다행히 기우에 그쳤다. 지나친 친절은 기념관에서 끝났음으로.

기념관에서 내가 담고 온 두가지 <신학지남 (神學指南)>과 , <죽산(竹山) 조봉암>이었다. 한국 초기 기독교 역사 속, 당시 일천했던 신학 토대의 발판을 자처했던 <신학지남 (神學指南)>의 정신을 오늘의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잇고 있을까?하는 물음을 담고 왔거니와, 조봉암선생이 성공회 신자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것, 그이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도 자의적 또는 작의적이었다는 안내자에 대한 아쉬움도 함께.

역사 기념관 빡센(?) 공부를 마치고 이어진 송가 감리교회 고재석 목사님과 오랜 시간을 한국여성의 전화와 함께 사람 평등 운동과 사모 사역을 함께 해 온 손연희사모의 그 날 그들이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느낌으로 담으며 즐긴 강화 여행이었다.   

멋진 카페와 진한 국물의 꽃게탕과 오래 전 추억들을 추려 꾸민 곳에서 이어진 끝 모를 지난 이야기와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들로 이어진 하루였다.

내게 아주 특별한 경험, 바로 김환조목사의 축도였다. 환조는 늘 밝고 활기 찬 후배인데,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야말로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음이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허나 그 웃음 뒷끝은 늘 쌉쌀하게 무언가 꼭 곱씹어야 마땅한 뒷끝이 남아 있곤 했다. 그가 목사가 되었고 오늘도 여전히 환조답게 목회를 이어가고 있다.  그날 송가 감리교회에서 엣 친구들과 송가 감리교회를 위해 드린 비나리는 내게 진한 감동이 되어 남아 있다. 김환조목사님을 위하여!

그리고 속히 유물이 되어야 할 망향대 또는 전망대 이야기.

그야말로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땅 북한과 멀리 남쪽 일산의 아파트 촌을 번갈아 바라보며 드려본 기도, 우연히 어느날 문득 여기서 저기까지 이어진 산들이 하나가 되기를… 아님, 내 믿음의 언어인 그의 섭리로.

이번 시간여행길에서 만난 산들은 그저 아름답고 부드러웠다. 한국의 산세이다. 거의 팔십년 가깝도록 아직도 꿈 같은 일이다만, 백두에서 한라까지 그 아름답고 부드러운 산들이 이어 달리는 세상을 아마…

내 어릴 적 대현교회 친구들 몇몇은 할머니 또는 아버지 따라 이북 사투리를 쓰곤 했다. 이즈음도 아내는 종종 “엄마 친척들 만나러 한 번 갈 수 있으려나?’하는 꿈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쯤 이제 노회한 노인이 된 나는 기도를 바꾼다.  “정말 산들이 이어지는 게 어려운 일이라면, 반도의 모든 산들에게 벙커와 교통호 없는고요한 평화를…”

그렇게 함께.

시간여행 – 4, 변화에

변화는 늘 놀라운 것이지만, 내가 적응하지 못할 때는 그저 불편함 뿐이다. 그런 불편함이 자꾸 쌓인다는 것은 내가 늙어간다는 표징일게다. 하여 애를 쓰는 편이다. 변화로 인한 불편함을 최소화 하려는 노력을 최대화 시키는 애씀인데, 그런 모습에 스스로 ‘쯔쯔쯔’ 혀 찰 때가 자꾸 늘어간다. 그럴 때면 스스로 위로하는 한마디, ‘내 노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변화가 너무 빨라서…’

서울은 내가 쉽게 적응하기엔 지나치게 많이 변했다. 십 삼 년 만에 나섰던 나들이였는데, 그 변화의 폭은 내 가늠 이상이어서 불편함 보다 먼저 다가선 것은 놀라움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다가선 놀라움은 사람들이 건네는 말소리들 크기와 억양이 매우 작고 부드러워진 변화에서 왔다. 지하철이나 버스, 식당이나 거리에서 사람들의 말소리는 분명 내 기억 속 서울사람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웃에 대한 배려에서 온 듯한 이런 변화는 실로 큰 놀라움이었다. 솔직히 뉴스 속에서 만났던 서울소식들은 매우 거칠게 소리 높은 소음처럼 다가오곤 했었는데, 실제 사람들의 말소리들은 부드럽고 온유했다. 그게 참 좋았다.

지하철 친절한 안내 방송도 좋았는데, ‘발빠짐 주의’나 ‘나빠짐 주의’, ‘하차입니다.’라는 경고 등은 외국어처럼 매우 낯설었다. (불편함, 놀라움이라는 말을 쓰다보니 생각난…)

그 보다 큰 놀라움을 느낀 것은 어디를 가나 잘 꾸며진 조경(造景)을 바라보면서 였다. 얼핏 쉽게 잔상으로 남게 되는 풍경들, 일테면 아파트 공화국이니 콘크리트 공화국이니 하는 말들을 잘 치장해 주는 놀라운 변화는 내겐 실로 경이롭게 다가왔다. 놀랍게 변한 종로통 뒷골목 직장인들의 점심시간 풍경과 그들의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잘 꾸민 조경 때문이었다. 돌아와 내 가게 손님들에게 자랑할 요량으로  조경과 자연 사진들을 제법 많이 찍었다.  

또 다른 놀라움은 딱 두 시간 오분이 걸린 서울과 속초 간의 거리였다. 아주 오래 전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북평해수욕장에서 놀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때 청량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워 거의 열시간 넘게 달려 닿던 곳이었다. 터널 예순 세 개로 이루워 졌다는 서울 속초간 도로를 달린 일은 내게 완벽한 시간여행 경험이었다. 아내와 단 둘이 맞았던 속도 앞바다 해돋이 풍경은 우리들의 내일로 품고.

그 동창들을 거의 오십 년 만에 만났다. 졸업사진을 떠올리며 옛 이야기를 나눈 몇 몇은 졸업 후 처음이었으니 만 오십 이년이다. 동창회를 이끄는 친구가 말하길, 졸업 동기들 중 1/4이 먼저 이 세상길 떳고, 1/4 정도는 연락 두절, 1/4 정도는 연락은 닿지만 모임에는 나오지 않고, 나머지 1/4이 이런저런 모임으로 연과 끈을 맺고 늦은 시간들을 함께 걷고 있단다.

실로 오십 년만의 변화인데, 또 다른 놀라움 하나는 바로 모두가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함께 한 동창들 중 몇몇은 그 옛날 북평 해수욕장에서 같이 놀았던 친구들이었는데, 그들은 물론 다른 친구들도 떠들고 즐기는 동안 변하지 않은 옛모습 그대로 둘러 앉았었다.

그랬다. 해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만, 분명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으련다. 바로 나다. 내 마음에 따라.

느긋하게 맞는 추수감사절 아침이다. 해마다 Thanksgiving, 이 맘 때면 읊조려보는 시 한 편이 있다. 언제부터 인지 잘 모르겠으나, 이젠 철들 때도 되지 않았나는 생각이 들었던 내 나이 환갑 전후일게다. Shel Silverstein이 읊은 관점(Point Of View)의 첫째 연이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2013년 추수감사절 아침, 돌아볼수록 그저 감사한 일 하나 꼽는다. 살아오며 보아 온 숱한 변화들 또는 기억조차 못하는 나의 변화들 나아가 옹고집으로 변치 않는 모습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관점의 잣대가 비록 어설프고 부끄러움 투성이지만 예수라는 잣대, 성서라는 잣대라는 믿음을 잊지 않았다는 감사이다.

큰고개(대현) 언덕 옛 친구들이 일깨워 준 감사이다.

<시간여행 – 3, 희망에>

겨울시간은 해가 너무 짧다. 오랜만에 늦잠을 즐기며 느긋하게 시작한 탓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하루 해가 너무 짧다. 여행 전, 미처 다 심지 못했던 히야신스, 무스카리, 알리움 등 구근들을 묻고,  뜰을 가득 덮은 낙엽들을 거두고 난 뒤, 아버지와 함께 잠시 시간을 보내고 온 것 뿐인데 벌써 어두워졌다. 그 짧은 하루, 봄을 기다리며 가꿀 수 있는 오늘에 감사하며.

신촌 대현교회 고등부 3학년 때 일이다. 따져보니 52년 전 일이다. 그 때 우리들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 가운데 박대위, 이열모 선생님이 계셨다. 두 분 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이열모 선생님은 우리 고3  남학생들을 위해 이런 기도를 하셨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이들이 장차 이 나라의 꿈입니다. 헌데 지금은 고3입니다. 열심히 공부할 때 입니다. 이 녀석들이 공부하다가 쓸데없이 바지 속으로 손 넣고 장난치는 유혹을 이기게 해주시고….”

박대위선생님은 제2한강교와 절두산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양옥에 살고 계셨는데, 당시 우리에게 지나치듯 이런 말씀을 던져 주셨었다. “집에 앉아 멋진 한강 풍경을 내려다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단다. 과연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런 사치를 누리며 사는 일이 옳은 것인가?하는 물음 때문이지!”

그 시절 참 좋은 선생님들 덕에 크게 엇나가지 않고 이 나이에 여기서 요만큼 이나마 살고 있는 것에 그저 감사다.

박대위 선생님은 내 대학시설 총장이셨던 박대선총장의 동생이셨다.

그리고 내 친구이자 동지인 김규복목사. 대학시절, 박대선총장 사퇴운동부터 박정희 유신 철폐, 전두환 타도 투쟁에 이르기까지 나보다 늘 한발 앞서서 나아갔던 벗, 김규복 목사를 독수리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이민 보따리를 꾸리고 있을 때 그는 대전 대화동에서 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교회를 세웠었다.

독수리다방은 이름만 이어져 올 뿐, 옛 모습이라곤 다방안 사진 속에만 남아 있었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불편한 걸음으로 다방 안으로 들어섰다. 만 36년 만에 만난 내 오랜 벗 김규복목사였다. 그는 오래전에 겪은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다.

우린 짧은 시간 손을 꼭 맞잡았고, 부둥켜 안았을 뿐 긴 말은 나누지 못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오늘도 옛 모습 그대로, 비록 많이 변한 세상일지라도 여전히 바닥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신과 함께 일 하고 있다.

살며 이런 벗 하나 사귀고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누린 은총은 족하다.

목사님 다음에 장로님 이야기.

어느 날 우리 내외는 ‘이것 한 번 먹고 가자!’라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 저녁에  박성규 장로내외가 초대해 준 저녁식사 자리는 바로 우리가 먹고 싶어했던 그 요리 전문점이었다. 아무렴! 장로님 기도발은 나 같은 얼치기 예수쟁이 보다 세긴 센 모양이었다.

교회 후배이자 대학 후배인 박장로- 일년 터울 후배라긴 보단 그저 친구일 뿐- 그와 함께 공유했던 사람들과 시간들을 되새기며 삶의 아쉬움과 감사함을 조근조근 나눈 참 좋은 시간이었다. 두 내외에게 감사를.

옛날 동쪽 끝인 워커힐 언덕에서  옛날 서쪽 끝 신촌까지 오가며 아직도 한결 같은 모습으로 교회를 지키고 있는 그의 모습에 경외를.

이번 여행에서 꼭 가 보고, 아니 꼭 가 보아야 할 곳이 있었다. 세 곳이었는데 모두 서울 시청 부근 이었다.

그렇게 시청앞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다 보게 된 시 한 편이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함께 삶의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이 서울 나들이를 하면 반드시 찾게 되는 세 곳이다. 바로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추모와 기억 공간 그리고 윤석열로 대변되는 사람을 계층화 시키는 세력 타도를 외치는 현장이었다.

그렇게 찾아 나선 시청앞 광장에서 나는 절망했었다. 옛 시청 건물인 서울도서관 옥상과 아내와의 추억이 쌓여 있는 정동 세실극장 옥상에서 바라본 토요일 오후 시청앞 광장 풍경은 대한민국 정치 뉴스처럼 절망적이었다.

광장 북쪽 광화문 방면을 점령한 내 또래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 남쪽 남대문을 향해 모인 무리들 모두 확성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소음은 내겐 너무 낯설었다.

확성기로는 절대 역사를 바꾸지 못한다. 웅웅거리는 거대한 침묵의 함성 소리, 바로 지축을 흔드는 민중의 함성이라야 새 세상 열리는 법이다.

멀리 갈 것 없다. 80년 서울역 광장, 87년 시청앞 광장, 2016년 청계광장. 내가 아는 한 모두 확성기가 아니었다. 아직 갈 길 먼 듯 하다만….

허나 나는 그저 희망적이다.

내 친구 김규복과 박성규 같은 굳건한 바닥 단단히 다져 하나하나 반듯하게 세워 이어가려는 이제 칠십 노인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하여 희망으로.

바라건대 더불어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희망으로.

이 희망! 내가 내 고향 대현교회에서 배운 믿음이다.

시간여행 – 2, 우연(偶然) 또는…

돌아볼수록 신기한 일이다. 치밀한 계획은 커녕 어설픈 밑그림 조차 없이 엄벙덤벙 여기까지 왔건만, 지금 내가 누리는 삶은 온통 감사해야 마땅하다. 오늘 가게 손님 한분이 내게 건넨 말이다. “당신 얼굴이 참 편해 보여요. 휴가를 통해 넉넉한 쉼을 즐기신 것 같아요.”

  1. 고모님을 뵙고 온 지 겨우 한 나절 정도 시간이 지났을 새벽이었다. 사촌동생이 ‘어머님께서 떠나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튿날 아침 고모님을 모신 빈소를 찾았다.

문상을 마친 우리 내외에게 동생이 말했다. “저쪽으로 가시죠”. 동생을 쫓아 따라간 곳은 이웃한 빈소였다. 그곳엔 동생의 부인 제수씨가 상복을 입고 서 있었다.

그랬다. 사촌 동생 내외는 몇 시간 사이로 함께 떠나신 ‘어머니와 장모’ 또는 ‘어머니와 시어머니’의 장례를 함께 치루고 있었다.

2.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 내외는 얼기설기 어설픈 계획을 세웠었다. 만나야 할 사람들, 가보고 싶은 곳들, 먹고 싶은 것들을 나열한 그저 낙서 비슷한 계획이었다. 어찌어찌 그 어설픈 계획대로 시간을 보냈다만, 전혀 이루지 못한 것들도 있거니와 반면에 전혀 계획치 않았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곤지암 제법 깊은 산골에서 지낸 하루 밤은 전혀 계획치 않았던 우연이었다, 허나 그 우연이 우리 내외에게 베푼 여유로운 쉼은 오래 기억될 듯하다.

아내가 친구를 만나러 곤지암을 간다고 했다.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곤지암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찾아보니 우리들이 묵었던 숙소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전철을 타고 늦은 시간에 아내 혼자 거기까지 오가는 것이 무리다 싶어 함께 가기로 했다. 그렇게 나섰던 길인데 하루 밤을 거기에 묵게 되었다.

잠자리에 매우 예민한 내가 숙박업소 이외에 누군가의 집에서 하루 밤 묵은 일은 거의 몇 십년 만의 일이었다. 그 밤의 편안함과 이튿날 아침 누렸던 그 상큼함은 오래 간직될 듯. 아내의 오랜 친구 내외에게 깊은 감사를. 우연하게 누린 곤지암의 하루 밤에.

3. 내겐 나이 터울이 크게 뜬 사촌동생이 있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는데 그 동생을 만났다. 처음 만난 동생의 남편 곧 내 매제는 내 여행길 피로를 싹 가시게 하는 참 좋은 인상이었다. 동생 내외와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조카들을 보며 나는 마냥 사람 좋은 웃음을 닫을 수 없었다. 동생 내외가 우리 내외 서울 구경을 시켜주다 내려준 곳이 명동입구였다. 아하! 그렇게 우연치 않게 옛 젊음의 거리 명동을 아내와 팔짱 끼고 걸었다.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몇 십년 만에.

4. 따지고보니 신촌 대현교회 홍목사님을 비롯한 옛 친구들을  만나게 된 일도 그저 우연이었다. 우리 내외가 계획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이 나이에  누린 큰 복이었다. 그야말로 우연하게.

돌아볼수록 신기한 일 투성이다. 어찌보면 삶은 우연의 연속이다.

돌아와 생각하니 이젠 그 우연들의 뜻을 새겨야 마땅할 나이가 되었다.

어쩜 이제야 믿음의 첫걸음 내딛고 있는 게 아닐런지.

우연 또는…

시간여행 – 1, 귀향

“어느 쪽이 귀향일까?” 16박 17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아내가 내게 던진 물음이었다. “글쎄…” 나는 그 물음에 엉거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서울 나들이는 분명 우리 내외에게 고향을 찾는 일이었지만, 다시 돌아와 수북히 낙엽 쌓인 내 뜰에서 다알리아 구근을 거두는 여기가 오늘의 내 고향일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연애 5년, 결혼 40년 – 그 긴 시간 동안 아내와 보름 넘는 시간을 함께 여행해 본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딱히 우리 내외의 삶이 팍팍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우리 세대 보통 사람들의 경우와 엇비슷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아내의 물음에 나는 “글쎄…”라고 응답하며 “어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귀향 아닐까?”하는 말장난 같은 헛소리를 덧붙이긴 했었다만, 내 솔직한 마음은 이번 여행이야말로 귀향 여행이자, 반 백 년 이쪽 저쪽을 오가는 멋진 시간 여행이었다.

삶이 늘 그렇듯이, 부모님이 채어주지 못한 허전한 구석을 늘 채워 주시던 하나 밖에 없는 내 고모님의 마지막 길, 생각할수록 웃음이 이어지는 후배의 너무 이른 마지막 길, 멋지게 늙어가는 후배 아버님 부고 까지 슬픔, 아픔, 아쉬움도 함께 한 인생 여행이었다. 왜 또 그리 아픈 이들이 많은지? 소식 들으며 그저 안타까울 뿐. 그저 우리들의 나이를 확인할 밖에. 아하! 성가(聖歌)하면 떠오르던 이름이었는데, 나이 탓이 아니라 병 탓에 더는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는 이야기엔 진한 아픔이.

이제 한 두 손가락 꼽을 정도 만큼 남은 나와 아내의 집안 어른들도 찾아 뵙고, 중고등 대학 동창들도 만나고, 만나 그저 반가운 옛 친구와 옛 길을 따라 걷고, 아내와 단 둘이 해돋이 맞는 짧은 여행도 즐기고, 딸과 사위 앞세워 걷고 즐기는 그야말로 꿈 같은 시간이었다.

우리 내외를 이제껏 지켜 준 고향의 정기 랄까, 아님 믿음의 뿌리라 할까? 신촌 대현교회 옛 친구들과의 만남은 이번 여행의 절정이었다.

여행 첫 날,  대현교회에서 만난 옛 친구들 그저 얼싸 안을 만큼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그날 설교를 했던 홍길복목사님 – 그 날 그의 차분하지만 변함없이 단정적인 어투의 설교를 들으며 사십 오륙 전 그가 전했던 설교 제목을 떠올렸었다. 솔직히 설교 내용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날의 설교 제목은 또렷히 기억하고 있다. 그 제목은 ‘사랑, 사랑, 사랑입니다.’였다.

아마도 성서의 정신, 예수의 정신을 강해한 설교가 아니었을까 한데… 어쩌면 성탄절 설교 였던 것도 같고…

아무튼 이번 우리 부부의 시간 여행길에서 얻어 곱씹는 말은 비록 진부하다 할지라도 바로 ‘사랑, 사랑, 사랑’이다.

신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 오늘의 내 삶에 대한 사랑.

이 쪽이면 어떻고 저 쪽이면 어떠랴! 무릇 모든 귀향은 사랑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