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일

어제 제 이메일함에 들어온 편지 한통의 내용입니다.

“델라웨어 대학교 은퇴교수인 내가 이즈음 하고 있는 일 가운데 하나는 뉴왁시에 있는 헬렌 그라함 암센터에서 환자와 간병인들에게 글쓰기 교실을 여는 일이다. 물론 자원봉사이고 이 교실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공짜이다. 오늘 네가 보낸 이메일 편지 내용은 내가 오는 2월 13일에 열리는 글쓰기 교실의 주제와 딱 맞는 것이다. 그래서 네 편지를 그날 참석하는 사람들과 네 편지를 함께 나누려고 하는데 괜찮겠니? …….”라는 것이었습니다.

I’m a retired professor from the University of Delaware, and I offer a writing program for patients and caregivers at the Helen Graham Cancer Center in Newark. I do it as a volunteer, and it’s free of charge and open to all. The post you sent out today fits perfectly with the topic of our next writing workshop, on February 13. Would it be all right with you if I print out copies to give to the patients and caregivers who attend that session? We usually have 12-18 people present. Of course I’ll include the contact information so that they can sign up for your weekly posts if they wish.

Thank you very much for your weekly reflections, which I enjoy very much, and for considering this request.

Joan DelFattore

이 편지를 받은 저는 당연히 제 세탁소 손님인 Joan DelFattore님께 답을 드렸답니다.

“저로서는 그저 영광일 뿐”이라고요.

제가 보냈던 편지 내용이란 사실 별거 아니었답니다. 내 마음으로 다스릴 줄 아는 하루를 보냈으면 하는 마음을 전한 것이었지요. 그런 잠시의 제 생각 하나가 누군가에게 정말 순간일지라도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제게 참 좋은 일이지요.

제가 보냈던 편지 내용이랍니다.

1-22

며칠 전에 휴대전화 가게에 들릴 일이 있었답니다. 그날 대기 의자에 앉아  “참 세상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답니다. 십 수년 전만해도 지금과 같은 휴대전화 가게 같은 매장은 볼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런 비즈니스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십 수년 동안 새로 생겨 호황인 업종들과 잘 나가다가 없어지거나 쇠퇴한 업종들을 꼽아보게 되었답니다. 그 생각의 끝은 역시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이었답니다.

제 업인 세탁업도 마찬가지랍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참 많이 바뀌었답니다.

개인용 컴퓨터, 인터넷 및 정보 통신 기술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른바 제3차 산업혁명의 결과들일 것입니다. 어려운 것은 제가 잘 모르고요, 사람사는 모습들이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고들 한답니다. 솔직히 저는 그런 변화에 대해 잘 모른답니다. 다만 앞으로의 세상은 더욱 더 빠르게 바뀌어 갈 것이고, 사람들이 먹고 사는 직업의 유형들도 빠른 주기로 바뀌어 갈 것이라는 생각은 갖고 있답니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다보면 제 아이들 세대들은 우리 세대보다 더 어려운 세상을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가 들기도 한답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는데 제가 할 수 일은 아무 것도 없답니다.

다만 그날 휴대전화 가게에서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한가지를 생각해 낸 것이 있답니다.

조금은 느리게 살자는 것이랍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일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내 삶을 느리게 천천히 여유있게 사는 것이야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자! 새로 시작하는 한 주간 여유롭고 넉넉한 시간들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A few days ago, I had to go to a cell phone store. On that day, while I was sitting on the chair and waiting, I got it into my head that the world had really changed a lot. Just a decade or so ago, I did not see businesses such as cell phone stores. I don’t think that anybody would have thought about that kind of business. Following such a train of thoughts, I started to think about newly-born and booming businesses and those once booming, but now declining businesses during the past decade or so. Expectedly, the thoughts ended in the conclusion: the world has really changed a lot.

So has the dry-cleaning business, which I have been doing. It has changed a lot in many respects.

Those changes may be the outcome of the third industrial revolution which can be characterized by personal computers, the internet and information/communication technologies. Though I don’t have expert knowledge about it, I think what it tells us is that the way of our lives has been changing rapidly.

Then, it is said that now we are living in the era of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Frankly, I don’t have any idea about that. But, I think that in the future, the world will change at an even faster pace and the rise and fall of businesses will change at a shorter cycle.

Following the train of this kind of thoughts, I started to wonder whether our children’s generation might confront a world which might be even harder to cope with than the one that we do.

Though the world is changing rapidly, I cannot do anything about that.

However, at the cell phone store the other day, I got an idea of one thing which I could do in the rapidly changing world.

It was to live in a little bit slower way.

Though I cannot do anything about rapid changes in the world, I can have my own way to decide how to live. To live my life in a slower and more leisurely way is totally up to me.

Well! I wish that you’ll have an easy and comfortable week.

From your cleaners.

세월호 1000일 – 어떤 설법

이 나이들어 특별한 종교에 혹 할 까닭은 없다만, 종종 귀에 들어오는 설교나 설법을 들을 때면 그 종교의 경전을 찾아 읽곤 한다. 일테면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내 주위엔 다양한 종파의 기독교인들부터 몰몬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조계종에서 원불교까지, 천도교에서 무종교까지 다양한 지인들이 있다.

이따금 그 사람이 믿는 종교와 그 사람의 이미지가 일치할 때 느끼는 깊은 울림이 있다. 내가 그 종교를 믿고 안 믿고 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말이다.

딱 한 주 전의 일이다. 세월호 1,000일을 되새기고자 모인 필라 세사모 행사에서 말씀을 전한 원불교 강신오 교무님의 소리(이런 걸 ‘소리’라 해야 마땅할 터)를 들으며 누린 울림은 아주 컷다.

하여 그 울림을 함께 나눈다.

1000

반갑습니다. 원불교 강신오 교무입니다.

심해(深海)는 얼마나 추울까요.. 세월호 1000일인 오늘, 마치 아직 9명이 남아있는 깊은 바다와 같이 추운 것 같습니다.

매서운 추위 속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월호 참사 1000일 범종교 추모식’을 준비해주신 필라 세사모 여러분과,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그 아픔을 함께 느끼고 나눌줄 아시기에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분들과 혹 사정이 있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셨지만 마음으로 함께 하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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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아 원불교 경산 종법사님께서는 ‘성자가 되는 길’이라는 신년법문으로 세 가지 지침을 주셨습니다. 먼저 짧게 나누는 시간 갖겠습니다.

하나, 마음에 공을 들입시다.

모든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전쟁과 평화가 결국은 한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그 때 그 곳에 알맞게 마음을 낼 수 있도록, 마음 사용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둘, 일에 공을 들입시다.

우리의 삶은 소소한 일에서부터 국가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까지 끊임없는 일의 연속입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도덕적으로 조화롭게 성공시켜

내 마음과 내가 속한 곳에서부터 멀리까지 일이 잘 되도록 공을 들여 성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 만나는 사람마다 공을 들입시다.

우리는 무수한 인연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인연들이 인연을 따라 나를 부처로, 성인으로 만들어주고, 일을 성공시켜주고, 목적을 이루게 해주는 동지이며 협력자 입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은혜가 되고 발전이 되도록 공을 들여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과 세상의 모든 분들께서, 자기 마음을 알아 마음에 공을 들여 마음의 자유를 얻으시고,일마다 조화롭게 성공시켜 작은 일부터 큰 일까지 성공하시고,만나는 인연마다 서로 은혜가 되고 발전이 되어모두 함께 성인이 되시고 함께 평화하시기를 염원드립니다.

제가 출가를 하고 나서 얼마 안지났을 때, 그 때는 나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라고누가 물어도 그렇게 대답하던 아주 오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그 때, 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허리도 안되는 그 얕은 물에 머리부터 빠져서, 오직 살겠다고 허우적 거리며 난리를 치던 기억은,그동안의 오만함에 대한 수치감과 함께, 살아있는 생명이 준비없이 강제로 죽음을 맞이할 때, 숨쉬고 싶을 때 입과 콧속으로 물밖에 들어오지 않을 때, 그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를,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생명 그 자체로 참으로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뼛속 깊이 각인시켜주었습니다.

천 일 전에 세월호에 있던 아이들과 승객들은, 어땠을까요…

지금도 생각하면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그 두려움과 고통이 가슴에 밀려오는 듯 합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 자기 한 몸 만을 자기 인줄 알고 살다가 자연과 부모와 세상의 모든 생명들과 그 생명을 지켜주는 바른 법을 알고 함께 성장하는 것을 우리는 삶이라고 하고, 그러한 ‘존재 자체의 은혜’를 아는 삶, ‘그 삶을 사는 생명’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이 참으로 귀한 줄 알아서, 나 아닌 생명도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압니다. 자기가 육신과 마음의 고통을 알기에, 나 아닌 생명이 아파할 때 참으로 함께 아파해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을 보고, 우리는 자기가 주인이 되는 삶, 참된 삶을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고, 권력의 노예가 되고, 원망의 노예가 되고, 성의 노예가 되어, 도무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자기가 집착한 것에 아귀같이 달라붙어서 인간으로서의 양심마저 버리고,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삶을 사는 것은 마음으로는 참으로 불쌍하다고 여기되, 그 행위에 대한 것들은 분명 단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미운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을 가진, 나와 한 생명인 그 삶을 함께 ‘사람의 삶을 살자’고 인도하기 위한 것이며, 그리하여 함께 사는 세상을 어제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 달, 치료 차 한국에 갔었습니다.  처음 참가한 4차 집회에서 한 고등학생의 자유발언이 있었습니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함으로 인해 이승만으로 부터 시작하는 뿌리깊은 민간인 학살의 한을, 그 아이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지는 것이 아니라  옮겨 붙는다고,  횃불이 되고 들불이 되고, 산불이 된다는 웅변에 모두가 뜨거운 가슴으로 환호하고 박수하였습니다.

세상의 어느 나라가 이런 평화로운 집회를 하고,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루어내겠는가 하는 자부심과 긍지가 마음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것을 마치 시험이라도 하듯이, 친일 세력들은 가진 것을 놓지 않기 위해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폭력과 폭언으로 더러운 시위를 만들고자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10차가 넘고, 세월호 1000일 집회를 한 지금까지도 한 마음으로 그 평화로운 촛불혁명 이어가고 있습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배를 일부러 걸려 넘어뜨리기위해 바다에 내렸던 닻 마저 몰래 잘려 아직까지도 깊은 바다에 가라앉아있는 세월호는, 그러나 우리들을 하나로 이어 우리 안에 있던 참으로 아름다운 홍익인간의 정신과 양심을 끌어올렸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 정치인의 도덕성을 보지 않고 만들어낸, 마치 우리 안의 탐욕을 거울같이 보여주었던 이명박근혜를 만들었던 그 욕심과 이기심이 아니라,  지금 이 마음과 이 정신으로 다시 시작하도록 우리들을 하나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탄핵이 결정된 이후, 사람들은 ‘이제 시작이라는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온 국민과 국토가 만신창이가 된 오늘, 그들이 돈으로 던지는 미끼에 우리가 주인이 되는 기회를 또다시 잃을 수는 없습니다.

어둠은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빛이 있는 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가 함께 하고, 연대하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한, 생명과 민주주의를 향한 촛불은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져 결코 꺼지지 않는 빛으로 어둠을 밝힐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동포님들과 한국에서 촛불을 드시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인들께 진리의 크신 은혜와 호렴이 늘 함께 하시어,

모두 마음마다 일마다 만나는 인연마다 공을 들이셔서, 대한민국과 이땅에 진리와 양심과 정의가 촛불같이 빛나고, 그 불이 번져 들불이 되고 산불이 되어 온세상에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늘, 매 순간이 다시 시작입니다.

 

 

감사합니다.

 

오호, 이 즐거움이라니!

2016년은 벌써 지난해가 되었다. 그래, 지난해 일이다. 이제 두 내외가 사는 삶에 거추장스러운 물건들은 좀 정리하고 살자는 생각으로 집안 정리를 했었다.

그 물건들 가운데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상자에 넣어 창고방에 밀어넣어둔 것들이 있었다.카세트 테이프, 비디오 테이프, LP 레코드판 등이다.

오래 전 기억들을 담아 둔 물건들이지만, 그것들을 재생해 주는 기기들이 집안엔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쓸모가 없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버리자니 웬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탓이다.

그 중 LP 레코트판들은 오래 전 이민 짐 속에 있었던 물건들인데, 이민 이후 정작 전축이라고 부르던 물건을 사본 적이 없으니 그냥 잊혀진 것들이었다.  그것들 대부분은 60, 70년대 노래들 이거나  당시의 영화음악들인데, 곁에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해서 차마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며칠 전, Amazon에 들어가 어떤 물건을 찾다가 눈에 뜨인 것이 Nostalgic Entertainment Center라는 축음기였다.

오호, 이런 물건이 있다니! LP 레코드 플레이어는 물론이거니와 카세트 테이프 재생과 CD플레이어, FM, AM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아내와 상의도 없이 주문을 했고, 오늘 나는 30년 넘게 짐속에 물건이었을 뿐인 LP 레코트판을 돌려 노래를 듣는다.

오호! 이 즐거움이라니.

매화를 생각함

어제 내린 눈이 뜰을 하얗게 덮었다. 주일아침의 적막함은 내가 누리는 소소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다. 뒷뜰 눈밭에 소리없이 내려앉은  아침햇살은 적막함에 푸근함을 더한다.

시집 하나 손에 든다. “내 가슴에 매화 한그루 심어놓고”

얼핏 춥고 시리게만 보이는 세상을 향해 은은한 매화 향기 전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편지 한 장 쓴다.

1-8

새해가 되면 이따금 이런 질문을 던지는 손님들이 계시답니다. 올해 음력설은 언제냐?라는 물음입니다. 올해는 1월 28일이 Chinese New Year로 잘 알려진 음력설이랍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국을 비롯한 인근 동양국가들은 오래 전부터 음력 달력을 사용했답니다. 그런데 이 음력달력은 태양의 움직임에 깊게 영향을 받는 농사꾼들에게 불편한 점이 많았답니다. 그래서 사용한 것이 24절기라는 것입니다. 일년을 24절기로 나눈 것인데 이 절기는 우리들이 사용하는 태양력에 맞춘 것이랍니다.

24절기 가운데 태양력으로 제일 첫번 째 절기는 소한(小寒)입니다. 지난 1월 5일(목)이 소한이었답니다. 소한이라는 말은 ‘조금 추운 날’이라는 뜻이지만, 실제 한국에서는 일년 중 가장 추운 날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답니다. 실제 아주 춥기도 하고요.

일년 중 가장 추운 날이라는 소한 무렵에 피는 꽃이 있답니다. 매화입니다. 중국이나 한국에는 이 매화에 대한 시들이 넘쳐나게 많답니다. (이즈음 사람들에겐 잊혀진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말입니다. 이즈음엔 사계절이나 24절기와는 아무 상관없이 꽃들이 피고 지는 세상이 되었으니 옛사람들이 매화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는게 당연할 수도 있겠지요.)

옛 한국인들이 매화를 노래한 시만 모아서 펴낸 시집이 제게 있답니다. 시집의 제목은 “내 가슴에 매화 한그루 심어놓고”인데, 시집에 실린 시들을 읽다보면 왜 옛사람들이 매화를 좋아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답니다.

혹시라도 지금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처지에 있다면, 삭막하고 어둡고 추운 한겨울에 피는 매화를 보며 힘을 내고, 이제 곧 모든 세상이 활짝 필 봄을 준비하라는 뜻으로 매화를 바라본 것이랍니다.

2017년 1월의 두번 째 일요일 아침에 제가 읽은 매화 시 한편을 당신과 함께 나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온갖 꽃 중 매화만  눈 속에서 피어나서

그윽한 향기 마치 내 마음을 안다는 듯

달빛 아래 홀로 있어도 네(매화)가 있으니 행복하여라


 

capture-20170108-093440Around this time of year, some customers occasionally ask me a question. It is “when is the lunar New Year’s day this year?” This year, January 28 is the day, which is well known as Chinese New Year’s day.

As you know well, the lunar calendar has been used since a long time ago in China and other countries in the Orient. But, it gave many inconveniences to farmers who had to farm according to the motion of the sun. So, the twenty-four seasonal divisions (or solar terms) were devised. As the term indicates, they divided a year into twenty-four terms, reflecting the motion of the sun. In a sense, they were the way to adjust the lunar calendar to the solar calendar.

The first of the 24 divisions is ‘Sohan (소한, 小寒).’ January 5 (Thursday) was that day this year. Though the word ‘Sohan’ means ‘somewhat cold day,’ in reality, it is regarded ‘the coldest day of year’ in Korea. It is usually very cold on the day.

There is a flower which blooms around ‘Sohan,’ the coldest day of year. It is a Plum blossom. There are numerous poems about a Plum blossom in China and Korea. (Unfortunately, it has become just one of so many things that people in these days have forgotten. As flowers bloom and fall regardless of seasonal divisions, nowadays, it may be no wonder that people don’t know how much people in the old days loved a Plum blossom.)

I have a collection of poems which Koreans in the old days wrote about a Plum blossom. Its title is “After I plant a plum tree in my heart (내 가슴에 매화 한그루 심어놓고).” If you read the poems in the book, you will understand why people in the old days loved a Plum blossom.

They looked at a Plum blossom and heard the message: if you are in difficult and adverse circumstances, get strength by looking at Plum blossoms which bloom in desolate, dark, and cold winter, and prepare for the not-too-distant spring in which all the world will burst into bloom.

I would like to share with you a few lines of a poem on a Plum bloom this second Sunday morning of January 2017.

From your cleaners.

Only a Plum bloom of all flowers blossoms in the snow,

As if its sweet scent knew my mind,

I am happy, though I am alone under the moonlight, because you (a Plum bloom) are here.

2017년엔 대서소(代書所)로…

웬만하면 일을 줄일 일이지 늘일 나이가 결코 아니다. 허기사 내 주제가 그렇다는 것이지, 이즈음엔 칠순에도 새 일을 꾸미고 벌리는 사람들은 천지더라만.

지난 해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나는, 한 해의 하반기가 아닌 인생의 하반기를 준비해야 할 지점을 막 통과하고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반기를 준비할 시점’이라는 말을 되뇌며 첫번째로 든 생각은 욕심을 버리자는 것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은 이어가되, 어느 순간에 내 뜻과는 상관없이 그만 끝나고 말지라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나이에 이르렀다는 자각이었다.

딱히 신앙이 아니더라도 물리적인 나이가 종말론적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지경에 다다렀다는 내 생각이 결코 조급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러던 중, 자꾸 내게 새 일을 던진 이가 있었다. 한인 세탁인들을 위한 월간지를 만든다고 나선 황주상이라는 이였다. 몇 차례 사양 끝에 결국 글 하나 써 보냈다. 그건 단지 글이 아니라, 새해 2017년에 내가 행해야만 할 일이었다.

내 세탁업 경력은 차치 하고서라도 적어도 이 업계의 정보를 일별하여 업자들 수준에 맞게 정리하여 재단하여 제공하는 일과 언어를 통한 마케팅 문제 등을 대서소 주인처럼 해 줄 수 있는 일들은 아직 내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대서소라도 있었으면 하는 이들에겐 말이다.

kleaners

세탁소의 미래 – 길을 찾아서

“미스터 김도 내 나이 되보면 알거야. 움직이는게 귀찮아 진다구. 미스터 김은 아직 내 말을  이해 못하겠지만…”.  얼추 십여년 전에, 나보다 열살 정도 나이가 많은 동네 어른 한 분이 내게 건냈던 말이다. 당시에 그 말을 듣고 있던 솔직한 내 심정은 “에이, 설마… 그 나이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해, 나는  딱 십여 년 전 동네 어르신이 하시던 말씀을 그대로 전했다. 얼추 열살 정도 아래인 내 후배에게.

이제 Social Security의 full benefit을 받을 수 있는 나이도 코 앞에 이르렀거니와, 아이들도 다 제 갈 길 찾아 나섰고, 우리 내외 둘이서 나누는 저녁 밥상은 날로 단촐해지니 움직이는게 귀찮다기 보다는 할 수 있는 한 새로운 일을 만들지 않으려 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 하다.

아무튼 지난 해에 나는 많은 일들을 줄였다. 줄인 것은 비단 일 뿐만이 아니다. 집안 물건들도 많이 줄였다. 애초 그리 가진 것들이 많은 편이 아니였는데도 줄일 수 있는 것들이 그리 많을 줄은 몰랐다.  집안이 휑할만큼 줄였다. 그렇게 줄이고 나니 어쩌다 들르는 아이들은 집이 두배는 넓어진 것 같다고 한다.

일에 이르러 따지자면 한참 때에 비해 거의 은퇴 수준이라 할 만 하겠다.  서른 해가 다 되어가는 세탁소 일들 뿐만이 아니라, 십 수년 이어오던 한인 세탁인들과의 여러 연들도 줄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줄여서인지 딱히 급하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 거의 없는 일상이 되었다.

느긋함을 만끽할 나이에 들어섰다는 자각을 실천에 옮긴 것도 지난해 일이었다. 미대륙횡단 기차를 탔던 일이다. 그 여행 이후, 이제 나는 내 인생 후반기를 위한 준비가 필요한 때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그리고 몇 가지 계획들을 세웠다. 아내를 위하여, 아이들을 위하여, 고령의 부모님들을 위하여, 무엇보다 내 자신을 위하여 이제 이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이 무엇인지를 찾아 보았던 것이다.

허나 삶이 살아 볼만한 까닭은 모든 삶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는가 보다. 내가 새로운 삶을 계획하려고 하는 때에 장모가 먼저 저 세상으로 새 삶을 찾아 떠났다.

그 무렵에 내게 전화를 한 이가  Kleaners의 황주상사장이다. 그와는 일면식도 없거니와 통성명도 그날 전화로 처음 나눈 사이이다. 새로 시작하는 한인종합세탁전문지 월간 Kleaners에 컬럼을 부탁한다는 그에게, 이미 은퇴 수순에 들어선 나보다는 보다 활기찬 기운으로 업계에서 일할 수 있는 분들을 찾아보는 것이 나을 것이라며 찾아오겠다는 그를 만류했다.

황사장은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로인해 나는 Kleaners에 실릴 첫 컬럼을 이렇게 쓰고 있다.

아마 내 또래의 사람들이라면 누구의 기억속에라도 남아 있을 “대서소 (代書所)”라는 곳이 있었다. 혹시 그 이름이 낯선 이들도 있을까? 그건 참 좋은 일이다. 젊은 사람이 세탁업을 이어 받았으므로. 아무튼 “대서소”란  출생과 사망신고서, 혼인과 이혼신고서, 진정서, 탄원서, 고소장을 써 주는 곳, 그야말로 삶의 희로애락을 대신 써주는 곳의 이름이었다.

이 첫 컬럼을 쓰고 있는 내 솔직한 심정은 바로 “대서소”를 개업하는 마음이다. 그저 내 느긋함을 즐기며, 내 경험과 지금 내 일상의 하나인 정보를 보고 듣는 일을 나누는 그런 대서소가 된다면 그 또한 내 나이에 맞는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 말이다.

첫 컬럼에 뭔 글을 쓸까?라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하얀 얼굴의 여호와의 증인 한사람이 건넨 안내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How do you view the future?” 우리의 내일은? 나나  이 글을 읽는 당신 세탁소의 미래는?.

그 길을 찾는 것이  내가 이 컬럼을 이어가는 뜻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내가 참 좋아하는 시 한편으로 이 글을 맺는다.

관점

  • 쉘 실버스타인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주일만찬은 즐겁지 않다 /부활절축제도 재수 없을 뿐 /닭과 오리의 관점으로 / 그걸 바라 본다면.

한때 나는 참치 샐러드를 얼마나 좋아했었던지 /돼지고기 가재요리, 양갈비도 /잠시  생각을 멈추고 식탁의 관점에서 /식탁을 바라보기전까지는.

Point Of View

  • Shel Silverstein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 ‘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무릇 모든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그 다른 생각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의 결과가 아주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삶과 시간

새해 첫날을 맞기 전, 집안에 달력들을 바꾸어 건다. 이제 내일이면 2017년이란다.

신혼, 새살림에 바쁠 아들 내외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았단다. 그게 또 예쁘고 고마웠다는 노인들이 손주와 손주 며느리를 위해 준비한 것이 없다며 외식을 제안했단다. 우리 내외가 외식을 권하면 손사래를 치며 미동도 하지 않던 분들이었다. 이즈음엔 아버님 걸음걸이가 신통치 않아  집밖 출입은 아예 삼가던 노인들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아내와 나는 부랴부랴 식당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모처럼 삼대가 모여 앉아 한해를 보내는 저녁을 함께 했다.

필라에 사는 아들 내외에게 늦기 전에 부지런히 올라가라고 했는데, 가는 길에 홀로 계신 제 외할아버지에게 들려 시간을 보내고 갔단다. 나보다 나은 아이들이 고맙다.

이렇게 2016년 한 해가 저문다.

낮에는 필라에 올라가, 생각이 같아 만나면 반가운 이들과 잠시 시간을 함께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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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돌아보며 손에 든 책은 장자(莊子)다.

小知不及大知, 小年不及大年, 奚以知其然也? 朝菌不知晦朔, 蟪蛄不知春秋. 此小年也.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동안 사는 자는 오래 사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 어떻게 그 것을 알 수 있는가? 하루살이 버섯은 아침과 저녁을 알지 못한다. 한철만 사는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이것들은 짧은 동안 사는 것들이다.

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 上古有大椿者, 以八千歲爲春, 八千歲爲秋. 而彭祖乃今以久特聞. 衆人匹之, 不亦悲乎?

초나라의 남쪽에 명령(冥靈)이란 나무가 있는데, 5백년을 한 봄으로 삼고 5백년을 한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태고 적에 대춘(大椿)이란 나무가 있었는데, 8천년을 한 봄으로 삼고, 8천년을 한 가을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팽조는 지금까지도 오래 산 사람으로 특히 유명하다. 보통 사람들이 그에게 자기 목숨을 견주려한다면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삶과 앎과 기쁨과 행복이 어찌 시간의 길이에 달려 있으랴!

천년을 하루로 살기도 하고, 하루를 천년으로 살기도 하는 것이 사람사는 모습이거늘.

2016.12.31.

2016년 마지막 날엔…

오늘 제 이메일 함에 놓여있는 편지 한장의 내용입니다.

12-31-16“가령 말일세, 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세. 창문은 하나도 없고 절대로 부술수도 없는 거야. 안에는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이 많아. 오래잖아 숨이 막혀 죽고 말 거야. 그러나 혼수상태에서 그대로 죽음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빈사(瀕死)의 괴로움 따위는 느끼지 않아.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운다면, 이 불행한 몇 사람에게 결국 살아날 가망도 없이 임종의 괴로움만 주게 되지.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나 몇 사람이 깬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 못하지 않는가?”

위 대화는 루쉰이 글쓰기를 주저하자 계몽잡지 편집자인 그의 친구가 그를 설득하며 나눈 대화입니다. 20세기 초 식민지 열강의 혼란 속에서 루쉰은 이렇게 그의 글을 통해서 잠든채로 서서히 죽어가는 국민들을 깨우는데 자신의 몫을 다하였습니다.

제가 촛불을 드는 이유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304명의 아이가 죽었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 희생자 가족을 국가가 폭력적으로 억압해도 침묵하는 사회…저는 이런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기에 촛불을 듭니다.

제가 촛불을 든다고 루쉰 같은 영웅이 될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의 작은 촛불이 그 누군가에게 공동체를 생각하는 미세한 희망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새로운 촛불로 불타오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래서 공동체에 무관심한 이 단단한 쇠로 된 마음을 깨뜨릴 수만 있다면 저의 몫은 차고 넘치리라 생각합니다.

2016년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필라에서도 촛불은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인근 마을 필라델피아에서 벌써 다섯 번 째 촛불을 든다고 하는데,  저는 한번도 가보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이 되리라는 생각도, 누군가에게 새로운 촛불을 들게 할 부추김도, 누군가의 단단한 마음을 녹이거나 깨뜨리려는 의도도 없답니다. 그렇다하여도 이 편지를 보낸 누군가의 소망에는 함께 하고 싶습니다.

언제 어느 때나 항상 새롭게 말을 건네시는 성서 속의 하나님께서 2016년 12월 31일 단지 짧은 시간일지언정 필라델피아 챌튼햄 한아름 앞에서 그들과 함께 외치라는 명령으로 받는답니다.

끝내 철들지 못하는 제가 이따금 사랑스럽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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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옷(Wings of Clothes)

( 이 시를 지난 35년여 내 삶의 일부였던 사랑하는 장모에게 드립니다)
 
날개

이민 삼십년에 이골이 난 내 다림질
그 솜씨로 장모 수의를 다린다.

먼저 버선을 다린다

땅과 하늘 사이 때론
어제와 오늘 사이를 헤매이던 마지막 시간에
장모는 엄마를 부르곤 했다
“엄마가 엄마를 찾으니까 내가 아파”
아내는 엄마를 부르는 장모를 말하며 눈가를 훔쳤다
분단은 남북만 가른 것이 아니었다
북쪽 가족들과 갈라져 남쪽에 홀로남은 장모 나이 고작 열 두살
애초 홀로는 아니었다
고향으로 가겠다며 국군에 입대한 스무살 오빠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을 뿐
그날 이후 장모는 엄마를 찾지 않았단다
마지막 시간속을 헤매던 장모는 버선발로 다가오는 엄마를 보았을 터

치마를 다린다.

치마는 장모의 자존이었다
열두살 이후 홀로된 외로움을 감싸는 갑옷이었다
열 여덟에 하나되어 육십갑자 세월을 함께 한 장인은 외아들
거기에 호랑이 같은 홀시어머니와 시누이 셋
엄마를 찾지 않았던 장모는 어느새 엄마가 되어갔다
딸 하나 아들 둘
누구랄 것 없이 모두 한수에 더해 끼 넘치는 가족이었지만
문제 없었다
장모의 치마는 모든 것을 감쌀만큼 폭이 넉넉했으므로
허나, 못내 치마 속에 감쌀 수 없는 외로움은 가슴에 숨겼을 터

이제 저고리를 다린다

언젠간 꼭 만나고 말리라
옷고름 매주고 옷깃 여며주던 엄마
장모의 꿈은 끝내 이루지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장모는 꿈을 바꾸었다
내가 엄마가 되리라고
일흔 여덟해의 마지막 한 달
장모는 그저 엄마였다
장인과 두 아들과 며느리들 딸과 사위에게
엄마를 가슴에 아프게 품지 말라고
행여
살아있는 너희들은
외로움과 그리움
그 암덩어리 안고 살지 말라고
장모는 저고리 섶에 우리들의 몫을 그렇게 저미고 갔을 터

마지막 두루마기를 다린다

평안북도 정주 아낙 최용옥
아무렴 한반도 믿음의 성지 정주 땅인데
장모는 평생 믿음의 두루마기를 걸치고 살았다

믿음 아니면 그 외로움 어찌 삭혔으랴
기도 아니면 그 긴 기다림 어찌 이어 왔으랴
찬송 아니면 그 먼 길 어찌 걸어 왔으랴

이제 내가 꿈을 꾼다
꿈이 기도가 된다
무릇 모든 기도는 이미 이루어진 것들 뿐

내가 다린 옷들은 장모의 날개가 된다
날아 날아 날아 훨훨
기다리던 엄마의 손을 잡았다

아! 이제
모녀는 하늘문을 들어섰다

이민 삼십년 도 닦듯 익힌 내 다림질
용 한번 썼다

Casket of D's dad. My lapel flower.

(I dedicate this poem to my beloved Mother-in-law who was a part of my life for 35 years.)
 
Wings of Clothes

My press, a tired routine of daily life as an immigrant for thirty years,
With the skill, I’m pressing Mother-in-law’s shroud.

First, I press beoseon1.

Between earth and heaven, sometimes
At the last moment, wandering between yesterday and today,
Mother-in-law called for mom.
“As Mom’s looking for her mom, it breaks my heart,”
Wife says, as she wipes tears from her face.
Division did not cut just the country into the South and the North.
Only twelve years old was Mother-in-law, when she became alone in the South, separated from her family in the North.
She was not alone from the start.
It’s because her twenty-year-old brother never returned after joining the army with the hope to go to their hometown.
Mother-in-law had not looked for her mom since then.
I believe that while wandering at the last moment, she must have seen her mom running to her with stockings on her feet.

I press a skirt.

Skirts were Mother-in-law’s pride.
They were the armor to cover her loneliness since she became alone at twelve.
The only son in the family was Father-in-law, with whom she was with for the sexagenary cycle from the age of eighteen.
Her tigerish mother-in-law and three sisters-in-law added to her life.
Mother-in-law, who had not looked for her mom, became a mom herself:
One daughter and two sons.
Though all of them were full of talents and fun,
There was no problem,
Because Mother-in-law’s skirts were wide enough to envelop everything and everyone.
However, her loneliness, which could not be enfolded under them, was hidden in her heart.

Now, I press a jeogori2.

Mother-in-law felt that she would never fail to see her mom again someday,
Who had tied her jeogori string and adjusted her clothes.
Mother-in-law’s lifelong dream was never realized.
At the last moment, she changed her dream,
For herself to become a mother.
In the last month of her seventy-eighth year,
Mother-in-law was simply a mother.
For Father-in-law, two sons and daughters-in-law, a daughter and a son-in-law,
Not to hold her in their hearts painfully,
By any chance,
For all of you, who are alive,
Not to live with that cancer of
Tormenting loneliness and yearning,
Mother-in-law must have left us with taking our shares in the gusset of her jeogori.

Last, I press a durumagi3.

Yong-ok Choi, a village woman of Jeongju, North Pyeongan Province,
Jeongju, certainly a shrine of faith in the Korean peninsula,
Mother-in-law had lived in the durumagi3 of faith all her life.

How could she have appeased such loneliness without faith?
How could she have kept enduring such an agonizingly long wait without prayers?
How could she have walked such a long way without hymns?
Now I’m dreaming.
Dreams become prayers.
In general, all prayers are for what has already been realized.

Clothes I have pressed become Mother-in-law’s wings.
Fly, fly, and fly freely.
She holds the hands of her mother who has been waiting for her.

Ah! Now,
Mother and Daughter enter through the gate of heaven.

My pressing skill which I have practiced as if cultivating myself spiritually during the thirty years of my immigrant life

1. beoseon: Korean traditional socks 

    2. jeogori: The upper garment of Korean traditional clothes for women

   3. durumagi: a traditional Korean outer coat

2016년 성탄에

새 식구를 맞고, 또 다른 가족이 하늘나라로 떠나는 길을  배웅하노라 지난 두어 달 동안 몸과 마음이 조금 분주했었다. 눈과 귀는 열려있어 미국이나 한국의 숱한 뉴스들은 저절로 내게 들어와 생각의 분주함을 더했다.

지나간 내 삶이 그랬듯, 습관처럼 생각의 분주함을 떨치려 성서를 손에 들곤 하였다. 2016년을 보내는 이 시간속에서 성서는 내게 이렇게 응답했다. 우리는 신의 은혜와 은총을 소유하고 마냥 누리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신의 은총을 그냥 겸허히 받아 드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어떤 처지와 환경에 놓여 있든간에, 신 앞에서 사람(존재)이 존귀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 맘으로 가게 손님들에게 성탄편지를 띄웠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귀한 모습으로 2017년 새 희망을 맞자고…


2016년 마지막 일요일이자 성탄절입니다.

올 한해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저도 지나간 올 한 해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당신 덕분에 세탁소도 잘 운영되었으며, 제 개인적인 삶이나 가정 일들도 그럭저럭 잘 꾸려 온 것 같답니다. 그러나 곰곰히 다시 따져보면 아쉽고,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들이 너무나 많답니다.

그런 생각으로 선택해 읽은 책의 제목은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한국의 불교 스님인 혜민이 쓴 책인데, 이 사람의 이력이 재미있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친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종교학을 공부한 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종교학 석사, 프린스턴에서 종교학 박사를 마친 뒤, 매사추세츠 주의 Hampshire College에서 7년간 종교학 교수로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 스님이 되었답니다. 현재는 가족을 먼저 보낸 분들, 암 진단을 받으신 분들, 장애인 아이를 기르고 있는 부모들, 힘든 취업 준비생들, 유산의 아픔이 있으신 분들 등등을 위한 무료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합니다.

혜민 스님은 그의 책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에 이런 말들을 기록하고 있답니다.

<완벽하진 않아도 85퍼센트 정도 괜찮다 싶으면 넘기고 다음 일을 하세요. 완벽하게 한다고 한없이 붙잡고 있는 거, 좋은 거 아닙니다. 왜냐하면 완벽이라는 것은 내 생각 안에서만 완벽한 거니까요.>

<오랫동안 원하던 것을 성취하고 나면 두고두고 행복할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막상 성취하고 나면 잠시의 행복감 뒤에 허탈의 파도가 밀려오고, 성공 후 새로운 상황이 만들어낸 생각지도 못한 후폭풍이 몰려와요. 그러니 지금의 과정을 즐겨요. 삶에 완성이란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의 책을 읽는 이들에게 이런 당부를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행복해지시길, 건강해지시길, 편안해지시길. 어디를 가시든 항상 보호 받으시길. 자신의 존귀함을 잊지 않으시길.>

성탄절 아침에 불교 스님의 말로 인사 드리는 것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있지만, 비록 결코 완벽할 수는 없는 존재일지라도 우리 스스로의 존귀함을 일깨워 주는 점에서는 다 통한다는 마음으로 인사 드립니다.

Merry Christmas & Happy Holidays!

당신의 세탁소에서


 

It’s the last Sunday of 2016 and Christmas Day.

How has this year been to you? I’m also trying to look back on my life this year. Thanks to you, I think that I have been able to manage to run the cleaners as well as my personal life and my family well enough. However, brooding over things in this year more thoroughly, I feel that many things are lacking and that this year leaves me much to be desired.

With that thought, I chose and read a book whose title was “Love for Imperfect Things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It was written by a Korean Buddhist monk, Hyemin, who has a very interesting career. After graduating from a high school in Korea, he studied the science of religion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in Berkeley, received a master’s degree in the science of religion from Harvard, and a Ph.D. from Princeton. After that, he taught at Hampshire College in Massachusetts as a professor in the science of religion for seven years. Then, he returned to Korea and became a Buddhist monk. At present, he is running a free special healing program for unfortunate people, such as bereaved families, people with cancer, parents with handicapped children, jobseekers in difficult situations, women with the ordeal of miscarriage, and so on. He is also a best-selling author.

He said the followings in his book, “Love for Imperfect Things”:

<If you think that it is 85% fine, if not perfect, move to the next work and do it. To hold on to something forever to make it perfect is not good. That’s because to be perfect really means to be perfect only within your own perspective.>

<Though you may think that you would be happy for a long time if you accomplish what you have wanted for so long, that is nowhere near the truth. Once you have accomplished it, you would face a wave of letdown after a brief feeling of happiness. You would confront the unexpected backlash which a new situation after the success will cause. So enjoy the process at the present time. It seems to me that there is no completion in life.>

And, he made wishes for the readers of his book:

<I wish for all of those who are reading this book to be happy, healthy, and comfortable, and to be protected wherever you may go, and not to forget the nobility of yourself.>

It may look inappropriate to greet you with a Buddhist monk’s words on Christmas morning. But, I’m doing so with the thought that Christianity and Buddhism have something in common: they enlighten us that though we can never be perfect, we are still precious.

Merry Christmas & Happy Holidays!

From your cleaners.

 

아들이라는 이름에게

Daylight saving time 해제로 시간이 바뀐 뒤, 밤이 제법 길어졌다. 잠시 눈을 붙였다 떳더니 어느새 밤이다. 바깥 날씨가 쌀쌀한지 이따금 돌아가는 히터소리 외엔 조용하니 집안이 적막하다.

서울서 온 큰처남과 함께 장모를 모시고 병원에 간 아내에게선 아직 전화가 없다. 신혼여행 떠난 아들내외나 오라비 결혼식에 함께하고 제 일터로 다시 돌아간 딸이나 내게 전화 줄 일은 만무할 터, 적막함 속에서 기다리는 것은 장모의 입원소식이다.

어제 일이다. 결혼 피로연을 마치고 밤늦게 들어와 전화를 드렸을 때만 하여도 목소리만은 또랑하셨다. “많이 섭섭하고, 많이 미안하고… 내가 결혼식엘 못가리라곤 정말 생각 못했는데….”

아들녀석은 태어나 걸을 때까지 거의 장모 손에서 컸고, 큰 외삼촌의 사랑을 많이 받았었다. 어제 오늘, 큰 처남에게 큰 고마움을 느낀다. 암과 씨름하며 잘 버텨오시던 장모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요 며칠 사이의 일이다.

그리고 어제 결혼식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식장은 지은지 오래된 교회 건물이었다. 식장에 들어선 장인과 어머니, 아버지는 거의 동시에 화장실을 찾으셨었다. 정말 오래된 건물이었다. 화장실은 가파른 계단을 두번 꺽고 올라가야만 하는 이층에 놓여 있었다. 나는 순서대로 한분씩 부축하여 그 계단을 올랐다. 어머니, 장인, 아버지 순서였다. 그 순서대로 다시 부축하여 계단을 내려왔다.

지팡이에 의지하시는 장인과 아버지를 부축하여 오르내릴 때보다 어머니는 한결 수월하였다. 내 염려는 어머니가 가장 컸었는데 의외로 어머니는 아무 말씀없이 내 팔과 손을 잡고 꼿꼿하게 그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셨다.

어제 밤 모든 잔치를 끝내고 나는 아내에게 말했었다. “세 분을 부축하며 계단을 오르내리고 나니, 그래도 어머니가 아직 제일 나으신 것 같아.” 아내가 그런 내 생각이 틀렸다며 내게 해 준 말이다.

“아니, 내 생각은 달라. 어머님는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걱정을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난 아직 이만큼 건강하니까 나에 대한 염려랑은 조금도 하지 말아라. 그러셨던거야. 어머님이 화장실 다녀오셔서 내게 뭐라셨는지 알아? ‘아이고 얘야, 두 다리와 두 팔이 다  떨리는구나!’ 하셨다니까.”

그 아내의 말을 생각하며, 다시 큰 처남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아무렴 아들이 곁에 있는데…

또 다시 어제의 결혼식장 이야기 하나.

분명 엊그제 있었던 결혼식 예행연습 때는 없었던 순서였다. 결혼 예식 거의 마지막에 있었던 목사님의 기도 순서였다. 분명 예행연습 때는 목사님의 기도 순서 였을 뿐이였다.

그 순서에서 Manuel Ortiz목사님은 신랑 신부인 두 아이들을, 아이들이 켜놓은 촛불 제단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는, 예식에 함께했던 네 분 목사님들과 함께 손들을 두 아이들에게 얹어 기도를 시작하라고 하셨다.

나는 당연히 아이들에게 손을 얹은 목사님들께서 돌아가며 기도를 하시려니 생각했었지만 Ortiz목사님은 신랑 신부에게 기도를 하라고 명하셨다.  아들녀석과 이젠 내 며늘아이가 된 Rondaya가 드린 기도는 내 가슴을 촉촉히 적셨다.  그리고 이어진 배성호목사님의 기도 “아이들이 드린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예식이 끝난 후, 나는 아내와 내기를 하였다. ‘아이들의 기도는 우리가 몰랐을 뿐 짜여진 것이였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고, ‘Ortiz목사님의 생각으로 즉석에서 하나님께 드린 아이들의 기도였다’는 것이 아내의 주장이었다.

결과는 나의 완패였다.

무릇 아들은 허당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기도를 시킨 Ortiz목사님도, 아이들의 기도를 하늘과 이어 준 배성호 목사님도 모두 아들들인 것을…

나와 내 아들 역시.

무릇 아들이라는 이름은 어머니들을 위해 있는 것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