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과 꿈 그리고…

아내는 북치며 춤을 추고 나는 상추를 씻고 고기를 굽는다. 오늘 저녁 내 집안 풍경인데, 이즈음 이따금 우리 부부가 저녁을 맞는 모습이다. 물론 북치고 춤추는 아내 모습은 한결 같지만, 나는 상추를 씻는 대신 된장찌개를 끓이거나, 고기를 굽는 대신 생선을 튀기기도 한다.

나이 육십대 중반으로 들어선 나는 아직도 꿈이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철부지다. 어찌하리, 환갑 나이 아내도 여전히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 것을.

아내는 더 늦기 전에 춤을 한번 추고 싶다며 춤을 배우겠다고 했다. 춤 배우러 한국에 갔다 오겠노라고도 했다.

올 봄 어느 날이던가, 아내는 동영상 두 개를 보여주며 어떤 춤을 추면 좋겠냐고 물었다. 태평무와 진도북춤이었는데 솔직히 나는 둘 다 마뜩치 않았다. 춤과는 거리가 아주 먼 내가 뭘 알아서가 아니었다.

태평무(太平舞)는 그냥 내 체질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무릇 춤이란 흥이여야 하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그저 만들어낸 동작 같아서 ‘아니다’ 하였다. 진도북춤은 춤으로써는 대만족이었으나 아내가 저걸 과연 흉내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를 떨칠 수 없어 차마 둘 중 어느 하나도 선뜻 집지 못하였다. 경쾌하고 빠른 춤사위가 이어지는 진도북춤을 아내가 흉내내다 자칫 자빠지거나 넘어질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내는 그렇게 진보북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까지는 아니고 주말이면 몇차례 왕복 하루길인 북부 뉴저지를 오가며 춤을 배우고 있다. 나는 운전 기사와 촬영 기사가 되어 그 길을 함께 한다. 녹화된 연습 동작들을 보며 아내는 저녁이면 춤 연습을 한다. 오늘 저녁도 그렇게 보냈다.

아내에게 춤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었다.

‘진도북춤은 한 잔 마시고 세상사 희로애락을 춤으로 풀어내는 그런 춤인 것 같아요.’

이제 곧 아내는 자기 흥으로 진도북춤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추게 될 것이다. 그게 춤으로써는 그저 흉내에 불과할지라도 아내의 몸짓과 맘짓은 온전히 꿈을 이루는 행위라고 나는 믿는다. 아내의 꿈과 삶에 얽힌 희로애락을 풀어내는 춤으로써.

그리고 나는 춤추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한잔 그 힘만으로도 삶의 희로애락을 느낄 터.

내 없으면 어때

오늘,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보다.

영화 말미에 유시민이 노대통령과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는 장면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내 없으면 어때’ – 노대통령이 했던 말이란다. 노무현이 꿈꾸던 세상이 왔을 때 비록 노무현 자신이 없더라도 오기만 한다면…

살아생전 그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한마디였을 터이다.

세상사 얼핏 둘러보면 죄다 자신들의 삶 속에서 누리는 자들만의 세상 같아도, ‘내 없으면 어때’하며 꿈으로 사는 이들이 만들어 나가는 게 사람살이 이야기 곧 역사 아닐까?

오늘도 살아 숨쉬며 ‘내 없으면 어때’ 그 꿈으로 살아있는 숱한 노무현들을 생각하며.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보고 온 날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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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뉴저지나 뉴욕시 쪽 나들이를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이 다리를 만나면 ‘집에 다 왔다’하는 생각이 든다. Delaware Memorial Bridge이다.

필요와 의미 둘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북쪽에서 델라웨어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반드시 필요한 다리였기에 세웠을 터인데 누군가를 기념한다는 뜻이 있단다.

이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쟁, 걸프 전쟁 그리고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이 바로 그 누군가들이다. 델라웨어주 쪽 다리 부근에 그들을 기리는 탑이 서있다.

내가 이 다리를 오고 가는 길에 오늘처럼 꽉 막힌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저 생각없이 빠르게 다리를 건너 뉴욕 쪽으로 페달을 밟거나, 내려오는 길엔 ‘옛날엔 75전이었는데 4불씩이나!!!’ 걷는 통행료에 혀차며 이내 잊고 마는 아주 짧은 시간에 건너는 다리이다.

오늘 그 다리 위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다리가 까닭없이 주차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벌써 20년? 그렇구나! 저쪽 전쟁 기념탑에서 주지사와 주 의원 몇몇, 한국전쟁 참전자들 그리고 십 수 명 한인들이 모여 한국전을 기렸던 일이 있었다. 그랬던 일이 있었다.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일이었다.

누굴 탓하랴. 돌아보면 아픈 구석이 어디 한둘일까?

Memorial!

3분이면 건넜을 다리에서 반시간을 보냈던 오늘. 내가 기억해야 마땅한 것들을 돌아보며.

물음과 답

내 가게 손님들에게서 한반도에 관련한 질문을 받을 때면 늘 곤혹스럽다. 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이따금 한반도 관련 뉴스들을 보여주며 질문을 던지는 이들도 있지만 수많은 손님들 중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뿐이다. 대부분 무관심이다.

그런데 지난 주간엔 전쟁과 한반도에 대해 묻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넘쳐나는 뉴스들 탓일게다. 이런 상황은 솔직히 좀 난감하다. 무엇보다 내 앎의 한계 탓일 터이지만, 물음을 던지는 상대의 의중을 모르니 더욱 그러하다.

하여 쉬는 날 아침,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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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 손님 몇 분들이 제게 이런 질문들을 하셨답니다. ‘북한은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너 북한에 가본 적이 있느냐?’, ‘이러다 북한과 전쟁하지는 않겠냐?’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뭘 안다고 이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제게 질문을 던지신 분들도 제게 무슨 정답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갈라져 서로 대결 구도를 이어온 지가 70년입니다. 그러니 남북이 한 나라였던 시절의 경험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은 나이 많은 이들 뿐이랍니다. 당연히 저 같은 남한 출신들은 북한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답니다. 다만 북한이나 남북한 관계에 대한 남한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일 테면 지난 주간 북한과 미국간의 첨예한 갈등 국면을 소개하면서 남한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듯한 행태를 소개한 LA Times 기사 같은 것입니다. 기사 제목이 “South Koreans are surprisingly blase about civil defense. Why?”입니다.

전쟁이 곧 일어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생활하는 남한사람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모습을 저는 이해할 수 있답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들 남한사람들과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남북이 갈라진 지 70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나면서부터 남한과 북한 사이에 곧 전쟁을 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답니다. 해마다 적어도 한 두차례 씩은 전쟁이 곧 날 것 같다는 뉴스를 보며 살아온 것이지요.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었습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면 ‘전쟁이 곧 날 것 같다’라는 말을 남한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태도에 대한 옳고 그름을 떠나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곧 전쟁이 일어 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지만 평생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본 적이 없다면 그 태도를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그런 상황이나 태도는 슬픈 것이지요. 더구나 전쟁이란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슬픈 일이겠고요.

바라기는 세탁기에서 나온 옷들이 먼지와 때를 벗고 깨끗해 지듯, 이 여름을 지나며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 또는 그 어느 나라이건 전쟁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Last week, some customers asked me questions like these: “Why is North Korea acting like this?”; “Have you been to North Korea?”; and “At this rate, won’t war with North Korea break out?” But, how can I answer these questions, as I don’t have any expert knowledge? Surely, they should not expect to get the right answers from me.

South and North Korea were divided and have kept a mode of confrontation for about seventy years. So, only old people have an experience of the time of one unified Korea. Most of the people from South Korea like me don’t know much about North Korea. However, I have my opinion about the South Korean people’s thoughts about North Korea and the relations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An example may be the LA Times article which introduced seemingly incomprehensible attitudes and behaviors of the South Koreans, while covering the acute tension between America and North Korea. Its title was “South Koreans are surprisingly blase about civil defense. Why?”.

It reported that people in South Korea are living and acting calmly as if everything is fine, under the situation in which a war may break out soon. I think that I can understand that. That’s because I myself have the same experience as those people in South Korea.

I told you that the division of Korea into South and North happened seventy years ago. Thus, most of the Korean people have been living with the story that a war may break out soon since they were born. They have heard this news at least twice every year. But, a war has never broken out since the Korean War. Put in simple terms, people in South Korea have come not to believe the story because of their experience. When they have heard that a war may break out soon, but it has never happened for their life time, isn’t it understandable, whether such an attitude is right or wrong?

However, I think that it is sad to have to think about such a situation and attitude. Moreover, a war is so sad and terrible enough I hate even just to think about.

Hopefully, I wish that the word “war” will not be used in this world, whether in South and North Korea, America, or any other countries during this summer and after, as the clothes from the cleaning machine will become clean without dust and dirt.

From your cleaners.

우리 사이에

주일 오후, 방 정리를 하다가 눈에 뜨인 오래 전에 쓰던 공책 하나. 내 나이 마흔 중반 어간의 기록들이다. 거의 스무 해 전에 끄적였던 낙서 가운데 하나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게 다가선다. 아마 뉴스 탓일게다.


우리 사이에

그가 ‘우리 사이에’라 했지만
안경 너머 번득이는 동자엔
사이 뿐
우리는 없다
 
사이
그 틈으로 이미 회오리 일고
그 틈으로 어느새 깊은 강물 흘러
닿을 수 없다
 
그는 거푸 ‘우리 사이에’라 했다
 
눈물 쏟아 차라리
그 사이에 흐르는 강물 넘쳐
넘쳐 흘러
우리 잠기면 그 날
우리 될까
우리 사이에

삶이란?

연일 95도를 웃돌고 습기가 높은 날씨에 지친 몸이 만사가 귀찮다고 풀어질 즈음 기온이 뚝 떨어졌다. 오늘 내일은 최고 기온이 70도 어간에 머무른단다. 그렇다하여도 지친 몸이 쉽게 탄력을 되찾지 못한다. 나이 탓이려니.

몸 생각만 하다가 맘 생각이 들어 노자(老子)를 펼쳐 든다.

<사람들은 모두 여유가 있는데 나만은 늘 가난하다. 내 마음은 바보의 마음, 그저 멍청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모두 똑똑하고 활발한데, 나만은 흐리멍덩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상세하고 분명한데, 나만은 우물쭈물 결단을 못 내린다. 바다처럼 흔들리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정처 없다. 사람들은 다 유능한데, 나만은 우둔하고 촌스럽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20장의 한 부분이다. ‘그랬구나, 노자 어르신도 그 맘 아셨구나’ 그 맘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찌 노자 뿐이랴!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 조차 없다.>
예수는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한 모습을 고백하기도 했거늘.

노자와 함께 생각이 뒹구는데 튕기는 아내의 소프라노 소리.

“와요!”
저녁밥 준비되었다는 소리에 엉덩이 드는 순간, 이어졌던 아내의 웃음소리.
“미안, 미안! 밥솥을 안 눌렀었네….”

하여, 삶이란 무릇 살만한 것이려니.

삶이란!

귀한 선물

엊그제 일을 마치고 돌아와 우체통을 여니 귀하고 고맙고 반가운 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출판사 여울목에서 펴낸 <홍목사의 잡기장>이라는 책인데, 멀리 호주에 계시는 홍길복 목사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매우 독특한 책입니다.

일테면 ‘목사의 이중성’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은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목사라는 직업은 남들에게 힘과 용기도 많이 주지만, 남들에게 상처도 많이 입히는 직업이다.” 이렇게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제목이 붙은 글들이 아주 많답니다.

‘관점’은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능력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항상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려 한다.”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면서 ‘독특하다’는 생각은 점점 제 나이에 마땅히 느껴야만 할 어떤 울림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일테면 이런 제법 긴 문장의 글들 때문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다. 모든 것은 그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다.>

<나에게는 당신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인격과 모순이 있다. 진실과 거짓, 사랑과 증오, 믿음과 불신, 희망과 좌절, 아름다움과 추함, 왜 나에게는 이런 조화될 수 없고, 조화되어서도 안 되는 상극된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것일까? 우선 나는 정직하게 인정한다. 나에게는 분명히 이런 이중 인격적 요소가 뒤섞여 있어 나를 매우 모호하고, 불분명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 다음 나는 이에 대하여 변명한다. 그래도 뒤죽박죽 내 인격은 끊임없이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지려고, 그 어느 한 방향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 속에 있는 모순은 내 속에 있는 선한 노력이다. 이는 내가 나와 싸우는 전투이며 그 전쟁을 숨기지 않고 표출시킨 나의 고뇌에 찬 눈물이다.

나는 단지 회의주의자나 허무주의자로 전락되지만 않는다면, 그렇다면 나에게는 가능성이 있다. 신앙이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 모든 할렐루야 승리의 합창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을 거친 후 허무와 회의 갈등을 통과한 다음에만 불러야 한다.>

책 표지 다음 면에 홍목사님께서 손수 저희 내외에게 써 주신 글에는 “가끔 한 두줄 읽고 커피 한 잔 드시고 또 가끔 다시 한 두줄 읽으시고 하늘 한번 쳐다 보시”라고 했지만, 280쪽 책장을 그예 다 넘기고 말았답니다.

이제, 제가 이따금 하늘 쳐다보며 꺼내 읽는 책들인 성서와 Walden 노장자 곁에 꽂아두고 한 두줄씩 새기며 호주와 제가 사는 여기의 거리를 좁히려 합니다.

시래기

한여름에 시래기를 삶았다. 삶은 때론 엉뚱하다. 다행히 집안 창문을 다 열어 놓아도 덥지 않아 좋았다. 시래기 삶기 좋은 여름날이었다 할까?

이른 아침 습관으로 일어나 커피 한잔 하면서 무언가를 찾노라고 골방을 찾은 게 일의 시작이었다. 올봄에 농사짓는 친구가 보내준 잘 말린 시래기 한 보따리가 눈에 뜨인 것이다. 우연찮은 충동으로 시작한 일은 만만치 않았다. 시래기 양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전 내내 창문을 다 열어 놓아도 에어컨이 돌지 않는 날씨에 감사하며 시래기를 삶고 우렸다.

이따금 엉뚱한 일을 벌리곤 하는 나를 바라보는 아내는 언제나처럼 담담하다. ‘많기도 하다. 누구랑 나눠 먹지?’

이따금 나가는 교회인데, 오늘은 교회 창립기념일 이라 예배시간이 좀 늦은 오후 시간이었다.

모처럼 만나 눙치며 반가운 사람들…. 무슨 말을 해도 ‘그러려니….” 웃을 수 있는 사람들… 따져보니 모두 일흔 이쪽 저쪽이다.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돌아와 집문을 여니 오호 집안에 밴 시래기 냄새!

냄새를 탓할 아이들도 없고, 아내는 시래기를 볶아 무치겠단다.

시퍼런 무우청이나 시래기나 다 뜻이 있지? 한여름이나 겨울이나, 아무렴!

복 그리고 꿈

이 나이에 누리는 복이 하나 있다. 생각이 엇비슷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사는 복이다. 몇 사람 되지도 않거니와 온라인 화상으로 만나는 일이니,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 “그걸 복이라고… 쯧쯧…” 혀차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일이겠다만 내겐 참 소중한 복이다.

이름하여 ‘필라세사모 온라인 모임’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와 아픈 사람들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모인 필라델피아 인근에 사는 이들의 모임이다.

만나서 뭐 그리 큰 일 하지도 못하거니와 대단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다. 한국에 새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하며 그들과 함께 원을 풀어 나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로 나누어 왔고, 최근 정권이 바뀐 이후엔 새 정권이 세월호의 진실을 밝혀내고, 한국 및 한인 사회가 보다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우리들이 나누는 이야기들 대부분은 우리들의 이야기로만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가는 고사하고 작은 지역 사회 아니 우리들 각자가 속한 아주 작은 공동체 하나 바꿀만한 특별한 여력들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겐 분명하고 소중한 복이다. 때론 한주간 겪는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이야기일지라도 우리들의 이야기 바탕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일 테면 이번 주 모임에서 한 젊은 학자가 던진 이야기로 인해 나는 사람살이에 대해 다시 생각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여 복이다.

대학에서 언론학을 연구하는 친구인데, 그가 최근 연구했던 주제에 대해 말한 아주 짧은 요약이다.

<사람들에게 하나의 사실을 얻는 정보 매체가 어떤 것인가? 를 묻고, 사람마다 사실을 인식하는 차이와 정보 매체와의 연관관계를 따져 보았다. 이즈음 판을 친다는 가짜 뉴스를 인식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연구도 해보았다.>는 것이다.

여러 이야기들 중에 짧게 언급했던 그의 말이기에 깊은 그의 연구 내용은 모르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런데 그날 그의 짧은 이야기를 들으며, 누군가가 자꾸 생각이 났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오늘에서야 그 이가 생각났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청암(靑巖) 송건호 선생님이다.

송선생님께서 남기신 말씀이다.

“일선 기자로서 오랜 체험을 가진 언론인이라면 결코 없는 사실을 허위 보도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입장을 달리하고 시각을 달리하는 취재와 보도를 통해서 독자들에게는 중대한 정치, 경제 사실들을 얼마든지 사실과 사건의 이미지를 참된 진실과는 상반되는 방향으로 독자들의 머리 속에 심어 넣을 수가 있다.>

내가 청암 선생님을 따랐던 때가 1970년대 말이니 거의 40여년이 지난 일이다. 이제 젊은 학자를 만나 진일보한 청암 선생님의 소리를 듣는 듯 하여 누리는 내 복이 크다.

필라세사모 이름으로 내가 누리는 복을 이야기하듯, 세월호 아이들과 유가족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이들이 안전한 사회에서 누리는 복을 이야기하는 세상이 어서 오기를 꿈꾸며….

벗과 멋 그리고 삶과 오늘

두어 주 전 일이다. 동네 벗에게 전화를 받았다. 나이 들어가며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나비 넥타이가 썩 잘 어울리는 친구다. 나이에 어울리게 외모나 내면으로 제 멋을 풍기는 친구들을 보면 참 좋다. 나 또한 흉내라도 내는 시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비 넥타이야 애초 나와는 무관한 액서사리이어서 온전히 그의 멋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그의 색스폰 연주에 이르면 부러움이 인다. 나이 들어 불기 시작한 모양인데 그 소리가 제법이다. 게으른 나는 차마 흉내조차 내지 못할 그만의 멋이다.

그런 그가 전화를 통해 내게 제안을 하나 했다. 친구와 내가 적을 두고 있는 교회 창립 예배 순서에 자신이 색스폰을 연주하는데 시 한 수 읊어 보라는 것이었다. 그의 제안은 여러모로 가당치 않은 것이어서 애초 나는 저어했다. 하여 그냥 웃고 넘기려 했었다.

그러다, 오늘 그의 섹스폰 연주에 맞추어 소리내어 시 한 수 읊어본다. 연습으로.

피조물, 죄인, 참 사람 이해를 위한 구원, 구원의 확장, 삶과 죽음, 감사 그리고 오늘 등등을 곱씹어 보면서….

자기 멋 맘껏 누리며 나이 들어가는 벗에게 고마움을.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빚어 만드신 사람을 그리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다.)

한 처음 하늘 문 열어
사람 하나 세우셨다.
이름 지어 아담 곧 사람
이내 사람을 부르는 소리
–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
사람은 떨며 대답했다.
–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날 이후
여호와께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으신 일
사람 사랑
가죽옷 입혀 놓은
사람을 향한 사랑

(에케 호모(Ecce homo)
–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가리켜 보이며 “보라! 이 사람이다”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강퍅하였다.
수천 년 부끄럽고 두려운 세월
여호와, 참다 참다 참다 참 사람 하나 내린다. 이 땅에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모가지 뻣뻣한 사람들이 그를 향해 쏘아 날리는
멸시와 퇴박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던 사람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던 사람
참 사람
예수

온 몸 온 맘
삶으로
죽음으로
마침내 다시 사심으로
여호와를 알게 한 사람
사람 사랑을 고백케 한 참 사람

삶과 앎
바로 사람
그 사람들이 모인 곳

1979년 여름 어느 날
이 사람을 보라!
그 소리에 끌려 모인 사람들
이름하여 델라웨어 한인 감리교회

여호와는 우리에게 이미 보여주셨다.
한 처음을
한 사람을
서른 여덟 해에 담긴 태초와 오늘까지의 세월을

2017년 이 곳은 새 하늘과 새 땅
사람들이 부르기 전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사람들이 말하기 전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는 세상

세우는 자
세움을 받는 자
마음 문 열어 박수 치는 자
모두 사람이 되어
참 사람이 되어

감사하므로 살아있는 오늘을 느끼는
나 너
우리
마침내
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