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책

칠순 나이에 산행을 즐기시는 이길영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었다. 히말라야 베이스캠프까지 다녀오신 분에게 사실 말도 안되는 부탁을 드린 것이다. 우리 부부에게 산행은 좀 버거운 듯하니 이즈음에 걷기 좋은 산책코스 한 곳을 추천해 주십사 하고 말이다. 가급적 왕복 하룻길이면 좋겠다고 덧붙였었다.

이선생님은 French Creek State Park에 한번 가보라고 즉답을 해주셨다. 지도를 검색 해보니 집에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여서 솔직히 좀 실망이었다. 늘 보던 동네 풍경을 벗어나지 못한 곳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집을 나선 후 약 10분쯤 지나자 네비게이션은 평소 전혀 다니지 않던 길로 접어 들라고 명령하였다. 그 길로 들어서면서부터 이 선생님에게 대한 감사가 시작되었다. 가을걷이에 들어선 옥수수밭들과 목장 풍경들이 우리 부부의 시선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가을 아침 한 시간여 드라이브 코스 눈요기만으로도 오늘 산책길 추천에 대한 감사는 모자랄 것이다.

French Creek State Park 호수를 끼고 돈 산책길과 덤으로 즐긴 사과 따기, 산속에서 만끽한 비빔밥, 돌아오는 길에 즐긴 샤핑까지, 오늘 하루에 대한 감사는 이 치부책에 남겨 갚을 날을 꼽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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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가만 생각해 보니 그의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든 생각이다. 그랬다. 일년에 몇 차례씩 전화 안부를 묻곤 한 게 벌써 십 수년이 지났건만 그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나보다 한 두 살 위인 그의 목소리는 늘 넉넉했고 여유로웠다.

내가 사는 곳과 그가 사는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사이의 간격이란 따지고 보면 서울과 뉴욕 사이의 그것과 별반 다름없다. 다만 그와 내가 같은 업을 하고 있다는 까닭으로 연을 맺고 지내온 사이이다. 늘 넉넉하고 여유로운 그의 목소리는 타고 난 것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그의 비즈니스나 가정사 더하여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그만한 여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일 터였다.

오늘 아침 수화기를 타고 전해오는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아무 다름없었다. “아이구, 김사장님 이즈음 어찌 지내십니까?”라는 인사에 이어 그가 내게 전한 말들이다.

산불이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바로 그가 사는 동네를 덮쳤단다. 그 불로 집이 완전히 다 타버렸단다. 며칠 동안 교회와 몇 시간 거리에 있는 따님 집 등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가 오늘 가게인 세탁소로 나왔단다. 다행히 세탁소는 큰 피해는 없지만, 세탁소 손님들 대다수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은 터라 가게를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단다. “어허, 이 나이에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그는 예의 그 넉넉하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기도를 부탁’한다고 하였다.

나는 위로라고 할 만한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했다. 온종일 마음 한구석을 딱히 무어라 할 수 없는 묵직한 것에 억눌려 지냈다.

때론 캘리포니아나 서울이나 모두 내 곁에 있다.

이웃의 생각

“알 수 없는 김정은, 더 알 수 없는 트럼프” – 가게 손님 한 분이 내게 던진 말이다. 연일 이어지는 한반도 뉴스들을 보다가 가게 손님들에게 평화를 기원한다는 뜻으로 편지를 보냈었다. 손님 하나가 제법 긴 답을 보내왔다. 내 나이 또래인데, 전력공급회사의 중견 간부로 있다가 최근에 은퇴한 이이다. 우리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 신중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생각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의 경험과 생각을 이 곳에 오는 이들과 함께 한다. capture-20171008-085658

너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내 생각엔 만일 북한 지도자가 진로를 바꾸지 않는다면, 향후 몇 년 내에 한반도에서 (아마 다른 곳에서도) 죽음과 파멸의 시기가 올 가능성이 점차 커지는 것 같다. 만일 그(김정은)가 사람들의 거주지역 내에 핵폭탄을 폭발 시킨다면, 내가 어렸을 때 지녔었던 공포를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게 될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의 핵폭탄 대비 훈련을 여전히 기억한다. 기본적으로 그 훈련은 경보가 울리거나 버섯구름이 보이면,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물론, 일단 모두가 얼굴을 감싼 채 책상 밑에 들어가 있으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혹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핵폭탄이 실제로 폭발하면,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여한 정부 과학자들과 그 프로젝트를 관장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영상물을 직접 본 군사지도자들만이 상황이 얼마나 참혹할지를 인식할 뿐이었다.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으로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의 희망에 한 마디 덧붙인다. — 나는 평양의 미치광이가 자신이 택하고 있는 진로가 자기 나라의 주요 하부구조 상당 부분과 자신의 국민 (자신의 강제노역자들) 다수를 불타버리게 만들 가능성이 아주 높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일본과 남한의 수많은 사람들 또한 고통과 손실을 겪게 되고, 생활양식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변하게 되거나, 혹은 잃게 될 것이다. 북반구의 사람들과 모든 생명체들이 식량공급 영향, 질병, 불필요한 고통 등의 측면에서 수십년 동안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북한의 미래를 책임지는 사람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세계에서 위대한 명예와 중요성을 이룩한 사람이기 보다는 자신의 나라를 파멸시킨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내 조상의 대다수는 네델란드에서 왔으며, 나머지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거의 반반이었는데, 우리의 마지막 이민 가족은 1884년에 도착했다. 미국 거주 나의 가족은 열 한 세대에 걸쳐 살았거나 살고 있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고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고, 또한 그들 국가들이 이후 379년에 걸쳐 상당히 변했기 때문에, 우리가 떠나기 전 고국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세세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알게 된 것은, 당신이나 나나 ‘어디에서 왔는지’는 정말로 중요하지 않으며, 거의 모든 인간들은 같은 것들을 – 음식, 평안, 안정, 선택한 분야에서의 성공, 우리 지역사회에서 승인, 그리고 자녀들이 번창할 수 있는 좋은 기회 – 원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겠지만, 세계 많은 나라에서는 그러한 모든 행복의 수단을 성취할 가능성이 이 나라에서 보다 훨씬 낮다. 3차 세계대전은 인류의 상당 부분뿐 아니라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들도 파멸시킬 수 있다. 대규모의 전쟁은 피해야 하겠지만, 그 못지 않게 두렵다. 세번째 전쟁에는 모두가 잃게 될 것이다.


 

I hope your wish comes true, but my sense is that it is becoming increasingly likely that there will be a period of death & destruction on the Korean peninsula (and possibly elsewhere) in the next few years if the leader of North Korea doesn’t change course.  If he detonates a nuclear device within range of human habitation, it will bring home the fears that I grew up within as a small child to very many people.  I still remember doing the atomic bomb preparation drills in elementary school, which essentially was crawling under our desks when the alarm sounded or a mushroom cloud was seen.  Of course, once we were all under our desks with our faces covered, nobody had an answer for what would happen next and how we would stay alive.  If a bomb actually went off, only government scientists in the Manhattan Project and military leaders who had overseen that program and viewed the films of Hiroshima and Nagasaki realized just how bad things might become.  Crawling under a desk wouldn’t have saved anybody.

So I would add another line to your hope — I hope that maniac in Pyongyang comes to realize that the path he is taking will most likely incinerate much of the critical infrastructure of his country and many of its people (his forced labor).  Many people in Japan and South Korea will also suffer pain and loss, changing or losing what they know of a way of life.  The people and all other living things in the northern hemisphere will be affected for decades in terms of food supply impacts, sickness, and unnecessary suffering.  IF that is of no importance to the person who is responsible for the future of North Korea, then he will be remembered as the man who destroyed his country rather than someone who achieved great honor and importance in the world.

A majority of my ancestors came from the Netherlands, and the rest are fairly evenly split between Ireland and Scotland, with the last our our immigrant family arriving in 1884.  Eleven generations have lived or are living here in my family of American residents, and we have lost any detailed knowledge of what our homelands were like before we left simply because we have never been back for extended visits and those countries have changed quite a bit in the subsequent 379 years.  But I have learned that it doesn’t really matter where you or I ‘come from’, nearly all of humanity want the same things:  a supply of food, comfort, stability, success at our chosen endeavors, acceptance in our community, and good opportunity for our children to thrive.  Koreans are no different than anyone else, but in many of the countries of the world the chance of achieving all those measures of happiness is much slimmer than in this country.  A third world war could ruin that for not only a large portion of humanity but also many other species on this planet.  That scale of war needs to be avoided, but I fear it may not be.  Everyone will lose in the third one.

델라웨어 한인축제

사람 사는 세상은 결국 하나님 나라로 가까이 가고 있음을 믿는다. 그게 내 믿음이다. 델라웨어, 이 곳에 산지도 제법 되었다. 잠깐인 듯 한데 그 세월 의 흐름 속에서 어느새 저물어가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이 동네 한인사회 종 노릇 흉내를 내던 때가 벌써 십 칠팔 년 전 일이다. 그 무렵만 하여도 “Korea”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거의 모든 모임들은 한인들 만의 잔치였다.

오늘, Delaware Art Museum에서 열린 추석맞이 제3회 연례 한인 문화 축제(The 3rd Annual Korean Cultural Festival)는 분명 변해가는 이 땅 한인 이민자들의 새로운 축제였다. 이젠  Korean Festival이 더는 한인들 만의 축제가 아니다. 이 땅을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이웃들과 더불어 한국을 알리는 축제의 장이다. 500명을 웃도는 참석자들 중 2/3는 한국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는 비한국계 였음이 그를 잘 그려준다.

이 행사를 잘 꾸려가는 이들을 통해 한인 이민자들의 새로운 모델을 본다. 교회도 아니고, 한인회도 아니고, 어떤 이익 단체도 아닌 새로운 모델이다.

이 행사를 잘 꾸며낸 이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Jin Twilley, Soojin Suh, Eunhwa Choi, Hyesun Kwak, Jinwoo Tak, Tim Kim, Youngmae Roca, Jinhee Yu – 참 고마운 이름들이다.

이 행사를 통해 뒤늦게 어설프지만 멋진 춤사위를 펼친 내 아내에게도 속 깊은 박수를 보낸다. 아내에게 춤을 가르쳐준 강은주 선생님과 한마디 부탁에 흔쾌히 장구채를 잡아주신 내 좋은 친구의 아내인 조성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이렇게 이 땅에서 먹고 살 수 있게 도와 주는 내 가게 손님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드린다. 우리에 대한 이해를 위해.

capture-20170930-185134남, 북이라는 수식어가 붙건 안 붙건 Korea라는 나라 이름이 미국인들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 왔습니다. 최근 몇 달 사이에 Korea에 대한 뉴스들이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과 나름의 지식이 맞다면, 잊어진 전쟁으로 알려진 한국전쟁(1950-1953) 이후 미국인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 이름이 이처럼 깊게 각인된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저는 미국인입니다.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한국에 대한 뉴스들을 보고 생각하는 제 자신에 대한 신분 규정입니다. 그러므로 똑 같은 한국에 대한 뉴스들을 보면서 남한에서 사는 사람들, 북한에서 사는 사람들과 제 생각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한국계 미국인이 아닌 대다수 미국인들과도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은 상황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 옳다 그르다고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과 느낌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국과 전쟁에 대한 지식입니다. 남북을 합친 한반도 전체 크기는 유타주와 엇비슷합니다. 그 작은 나라에서 역사 이래 기록에 남겨진 전쟁 회수가 천 번이 넘습니다. 한반도에 있었던 작은 나라들 끼리의 전쟁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큰 전쟁들은 이웃 중국, 일본, 몽고 등과의 싸움들이었습니다. 19세기 이후에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 미국과의 전쟁도 있었습니다. 모두 한반도 안에서 일어났던 싸움들입니다.

한국전쟁 때 그 한반도에서 싸우다 피 흘려 죽은 사람들의 국적은 정말 다양하답니다. 미국은 물론이거니와 중국, 캐나다, 콜럼비아,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남아공화국, 에티오피아,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베르그, 네덜란드, 터키 등입니다. 물론 그 전쟁에서 가장 많이 죽은 사람들은 남, 북 이라는 수식어 떼어낸 한국인들입니다.

이 주에 한국인들은 아주 큰 명절을 맞습니다. 추석이라고 부르는 한국인들의 추수감사절입니다. 북한, 남한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여러 나라에 이민자 또는 여행자로 사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아주 큰 명절입니다.

작게는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는 감사에서부터 과거의 조상들에 대한 감사, 현재를 사는 오늘의 모습에 대한 감사, 미래를 이어갈 다음 세대들에 대한 감사를 되새기는 큰 명절입니다. 모든 명절들에 사람들은 첫 뜻은 잊고 형식만 기억하고 살게 마련이지만, 올해 추석만은 너나없이 감사의 조건들을 꼽아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비단 한반도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전쟁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옛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도 감사가 넘쳐나는 시간들이 이어지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첨부 : 어제 Delaware Art Museum에서 한국의 명절 추석을 기리는 행사인 Delaware Korean Festival이 있었답니다. 주 상원의원인 Tom Carper를 비롯한 약 500명이 참석했답니다. 이 행사에서 제 아내인 Chong이 한국 전통 춤의 하나인 진도북춤을 추었답니다. 이 춤은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하루 하루의 기쁨과 감사를 그대로 들어내는 춤이랍니다. 아내가 춘 이 춤을 당신과 함께 합니다.

 

Whether with the prefix of South or North, the country name of Korea has drawn increasing attention by Americans. That’s because news about Korea has flooded the media for the last some months. If my memory and knowledge are correct, it may be the first time since the Korean War (1950-1953), aka the Forgotten War, when the name Korea was inscribed so deeply in Americans minds.

I am an American. Specifically, I am a Korean American. It is a definition of my nationality status, when I watch and think about the news about Korea. So, my thoughts about the news may not be the same as those of the people in South and North Korea. Of course, they may be different from the thoughts which most Americans may have regarding the news.

I’m not trying to judge which thoughts are right or wrong, but to say that people may have the same or different thoughts about the same situation.

It is what I know about Korea and the wars which Korea has experienced in history. The total area of the South and North Korea combined is similar to that of Utah. Though Korea is such a small country, it suffered more than a thousand wars which were recorded in history. There were many wars among the kingdoms within the Korean Peninsula. But most of the major wars were against neighboring countries, such as China, Japan, Mongolia, and so on. In the 19th century, there were wars with Russia, France, Germany and even America, before it fell to Japanese rule and became a colony. All of them happened with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Korean War, people from various countries lost their lives. They were soldiers from China, Canada, Columbia, Australia, New Zealand, the Philippines, Thailand, South Africa, Ethiopia, the United Kingdom, Belgium, France, Greece, Luxemburg, the Netherlands and Turkey, as well as America. Of course, a large majority of the war victims were Korean people of South and North.

I think that Korean people have suffered too much from far more than enough wars historically. I wish that war won’t break out in the Korean Peninsula ever again, no matter what. I wish that war will become an old story which we can hear or see only in museums, anywhere in the world.

Koreans will encounter one of the biggest folk holidays this week. It is Chuseok, which is equivalent to the Thanksgiving Day in America. Not just people in South and North Korea, but also most Koreans who are staying in other countries as immigrants or travelers will celebrate it.

On Chuseok, Koreans celebrate with gratitude for many things from the harvest of the year and their ancestors’ grace, to the present state of their lives and the next generation who will lead the future. So often, we’re likely to keep only the formality, without thinking about the original meaning of the traditional holidays. I hope that this year, every one of us will think about all the things for which we should be grateful.

I wish that you’ll have happy things to celebrate continuously this week and beyond.

From your cleaners.

PS: Yesterday, the Delaware Korean Festival, an event to celebrate Chuseok, was held at the Delaware Art Museum. About 500 people, including Senator Tom Carper, joined in the event. There, my wife Chong performed “Jindo Bukchum (drum dance),” one of the Korean traditional dances. This dance reflects gratitude and joys in everyday life. I would like to share the video with you.

구해 줘

한국 TV 연속 드라마를 첫 해부터 마지막회까지 빠짐없이 본 것은 참 오랜만 일이다. 드라마 ‘송곳’을 본 게 가장 최근의 일인데 그 역시 전편을 다 보지는 못했다. 이즈음 서울 처남이 이런 저런 영상 자료들을 보내 주어서 아내가 제법 즐긴다. 나 역시 이따금 기웃거리곤 하지만 크게 흥미를 일으켜 브라운관 앞에 앉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내가 빠져들어 전편을 다 본 드라마 바로 ‘구해 줘’이다.

오늘 모처럼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돌아온 오후, 드라마 ‘구해 줘’의 마지막 편을 보았다.

비단 사교(邪敎)만이 아니다. 모든 종교가 다 그렇다. 또한 종교 뿐 만이 아니다. 세상사를 지배하고 있는 모든 권력 또한 마찬가지다.

신이든 권력이든 브로커가 문제이다. 하나님, 하느님, 하늘님, 새 하늘님 그 무어라 부르든 신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 정의, 복지, 자유, 자주 등등 그 무어라 부르든 권력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신과 사람 사이, 권력과 사람 사이를 잇는 브로커가 바로 문제이다.

드라마 ‘구해 줘’를 본 후 모처럼 꺼내든 책,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의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이다.

<예수가, 아마도 처음이자 유일하게, 성전의 화려함에 맞서서 그 합법적 브로커 기능을 브로커 없는 하나님 나라(unbrokered kingdom of God)의 이름으로 상징적으로 파괴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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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누님댁에 들르다. 코스모스가 이웃집과 담장이 되어 춤춘다. 강원도 평창 사람 매형이 고향 생각으로 심었을 터이다. 나도 잠시 내 고향 신촌으로 돌아간다. 고향은 그리움으로 가꾸는 지금 여기에 있다.

옛 생각

이민 보따리를 꾸리며 처분했던 물건 가운데 주소와 전화번호들을 빼곡히 기록해 놓은 공책과 명함첩들이 있다. 벌써 서른 해를 넘어선 저쪽 일이다. 그것은 내 유소년 그리고 청년과의 결별이었다. 이 땅에 건너와 살면서 인근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회를 한 두어 번 기웃거린 적은 있다만 모두 이민 초기의 일일 뿐, 이제껏 무관하게 살았다.

인터넷 세상이 열린 후 간간히 이름깨나 팔리게 된 옛 벗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Social Media가 판치는 스마트한 세상이 되자 늙지 않으려는, 아니 젊게 살려는 옛 동무들의 모습들과 느닷없이 마주치곤 한다. 이럴 때면 이따금 오래 전에 버린 주소록과 명함첩들이 생각나곤 한다. 비록 이미 다 변해 버렸을 주소와 전화번호일 터이지만.

이달 초 마광수 형의 부음으로 하여 나는 오래 전 신촌 시절을 더듬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며칠 후 후배 페북에 올려진 옛 동무 딸아이 결혼식 사진은 나를 며칠 동안이나 1970년대 신촌 거리로 내몰았다.

딸아이 혼례를 치른 옛 동무는 함께 마셔 댄 신촌 시장 주막집 막걸리 동이가 제법 되는 진짜 어깨 동무 개 동무였다. 그와 마지막 술 잔을 나누었던 곳은 그의 단칸 신혼방 이었는데 동네는 어디였는지 가물 가물하다.

문득 그 시절 동무들이 그립다.

마광수 형은 그 때도 그랬다. 음담패설을 이용한 우스개는 단연 뛰어났다. 나는 그의 학문이나 문학에 대해 논할 만한 지식이 전무하다. 다만 70년대 청년 마광수에 대한 인상은 아직도 또렷하다. 신촌 목로주점 아니면 북한산을 오르던 길이었을게다. 그는 말했었다. ‘우스운 일이야! 참 우스운 일이라고!’ 그가 고등학교 때 대학교 백일장에 응모해 시 부분에서 장원을 했던 일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던 끝에 뱉은 말이었다.

‘그 시가 말이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남의 것들 베껴서 조합해 놓았단 말이야. 그게 장원이었다니까! 우스운 일이야! 참 우스운 일이라고!’

나는 당시 광수 형이 기성 체제에 대해 항거하거나 비틀어 조롱했다고 단언하지는 못하지만, 그는 당시 이미 자유인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유인 청년 마광수로 삶을 접었다. 그리 살며 느껴야만 했던 외로움 역시 오롯이 그의 몫으로 품고 갔다.

구글링을 통해 광수형의 길을 쫓다가 낯익은 이름들도 만났다. 대학에서 광수형과 척진 곳에 서있었다는 이들이다. 이미 다들 은퇴 이후이다.

모두 1970년대 신촌거리에서 아주 멀리 왔다.

먼저 떠난 이에게는 안식을, 아직 산 자들에게는 강녕을.

주일 아침, 시 한 편

매 주일 아침에 가게 손님들에게 이 편지를 띄운 지도 제법 오래 되었습니다. 한 주간 세탁소 일을 마치고 하루 쉬는 일요일 아침에 제가 느끼는 짧은 생각들을 손님들께 보내왔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고르는 것이 편지 말미에 첨부하는 시입니다.

제가 워낙 시를 좋아하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제가 쓰는 편지 보다는 누군가의 시 한편으로 이 편지를 읽는 분들께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편안함과 삶에 대한 감사를 나누자는 생각으로 시를 고르곤 한답니다.

편지를 쓰고 시를 고를 때마다 제가 소원하는 마음이 있답니다. ‘단 한 사람만 이라도’ 제 편지와 제가 고른 시를 읽고 그 순간만이라도 평온한 마음으로 서로의 삶을 감사하는 마음을 나누었으면 하는 바램이랍니다.

오늘도 그 마음으로 시 한편을 소개 드립니다. 해마다 이 맘 때 가을의 문턱에 이르면 제가 즐겨 읽는 시인의 시랍니다. 한국어로 쓰여진 이 시의 참 맛을 그대로 전해 드릴 수가 없어 안타깝지만 시의 느낌만이라도 전해 드리고 싶답니다.

가을로 들어서는 문턱에서 꼭 일요일이 아니더라도 짧은 쉼을 누리는 시간들에 감사할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이 늘 이어지기를 빌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일요일의 미학(日曜日의 美學)

–       김현승

노동은 휴식을 위하여
싸움은 자유를 위하여 있었듯이,
그렇게 일요일은 우리에게 온다.
아침 빵은 따뜻한 국을 위하여
구워졌듯이.

어머니는 아들을 위하여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즐겁듯이,
일요일은 그렇게 우리들의 집에 온다.
오월은 푸른 수풀 속에
빨간 들장미를 떨어뜨리고 갔듯이.

나는 넥타이를 조금 왼쪽으로 비스듬히 매면서,
나는 음부(音符)에다 불협화음을 간혹 섞으면서,
나는 오늘 아침 상사에게도 미안치 않은
늦잠을 조을면서,
나는 사는 것에 조금씩 너그러워진다.
나는 바쁜 일손을 멈추고
이레 만에 편히 쉬던 神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나의 남이던 내가,
채찍을 들고 명령하고
날카로운 호르라기를 불고
까다로운 일직선을 긋는 남이던 내가,
오늘은 아침부터 내가 되어 나를 갖는다.

내가 남이 될 수도 있고
또 내가 될 수도 있는
일요일을 가진 내 나라 — 이 나라에
태어났음을 나는 언제나 아름다와 한다.


I’ve been sending this letter to my customers every Sunday for quite a long while. In the letters, I have told you my small thoughts which came to my mind in Sunday morning, resting after a long week of work at the cleaners. In fact, I usually spend more time on selecting the poem attached at the end of the letter than writing the letter itself.

It’s not just because I like poetry so much, but because I wish that the poem, more than the letter, will give the readers comfort and gratitude for life, however short or long it may last. With this wish in my mind, I try to select a poem each week.

While I’m writing this letter and selecting a poem, I also have in mind a wish that the readers share gratitude for life with someone else in a feeling of peace and serenity, whether just one person, and whether just for a moment.

Today, I would like to share a poem with you with my wishful mind. It is one written by the poet whose poems I like to read around this time of year, at the threshold of autumn, every year. I know that I cannot help you really appreciate the poem in translation, as it was written in Korean. But, still I want to impart its feeling to you.

I wish that at the beginning of fall, we can feel gratitude for a time of rest, whether it is Sunday or just some moments, and that it will always continue.

From your cleaners.

Aesthetics of Sunday

–       Hyun-seung Kim

As work for rest, and
Fights were for freedom,
Like that, Sundays come to us.
As morning bread was baked
For a hot soup.

As mother for son,
Husband is happy for wife,
Like that, Sundays come to our house.
As May left,
Dropping off red wild roses in the green woods.

While I’m wearing a necktie somewhat tilting leftward,
While I’m occasionally mixing discordant notes in the music,
While I’m oversleeping this morning
Without feeling sorry to superiors at work,
I become lenient in living a life gradually.
The God’s will, who stopped His busy work and rested on the seventh day,
Now I think I know.

I, who used to be my other,
Give commands with a lash in hand,
Blow the shrill whistle,
I, who used to be others drawing a fastidious straight line,
Have become myself and have myself since the morning today.

On which I can become others,
Or become myself
Sundays has my country – born in this country
I always cherish it as beautiful.

처음처럼 – 그 배신에 대하여

따지고 보면 연휴를 맞은 느긋함 탓이었다. 크거나 작거나 장(場)을 볼라치면 사야할 물건 목록표를 들고 다녀야 마땅할 일이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모처럼 대도시 나들이에 예정에 없던 장보기였으므로.

빵집 순례에서 넉넉히 장바구니를 채운 아내는 한국장을 보면서 내게 큰 선심을 썼다.

“여기 소주도 있고 막걸리도 있네, 골라보셔!”

그 소리에 내 머리 속은 빠르게 움직였다. 막걸리로 40년을 되돌려 볼까, 아무렴 오늘 한 잔은 쐬주 아닐까 하는 생각은 돈 계산보다 빠르지 못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막걸리는 구경도 못하거니와 소주는 2홉들이 한 병에 거금 10불은 주어야 하므로 큰 맘 먹지 않고서는 입에 대지 못하는데, 소주병에 붙여진 가격표에 우선 반할 수 밖에 없었다. 2홉들이 6병 한 박스에 24불 – 이건 거의 공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주병에 그려진 빨간 딱지라니! 이게 도대체 몇 십년 만이냐! 아내는 그 순간에 내가 느낀 감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게다. 오호 빨간 딱지라니!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온 세 시간 드라이브 길에 아내는 물었었다. ‘쉬지 않고 그냥 가?

‘쉬긴 뭘…’하던 내 응답에는 예의 그 빨간 딱지의 유혹이 숨어있었다.

집에 돌아와 마주 앉은 늦은 저녁 상, 반주를 핑계로 뚜껑을 따, ‘크 한 잔’ 빨간 딱지의 소주를 입에 털어놓은 내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 “이런…..ㅉㅉㅉ “

30도 짜리 혀끝에서 목구멍까지 훅 쏘던 그 맛, 빨간 딱지 쐬주는 어디가고 복숭아 주스 맛 14도 가짜 와인 맛이라니! 오, 이 ‘처음처럼’의 사기 맛이란…

소주가 변한 것일까? 내가 변한 것일까? ‘처음’과 ‘지금’ 사이에.

아니면 ‘처럼’의 사기질일까?

아니다. 그 순간 내가 돋보기를 쓰지 않았던 탓이다.

노동과 쉼

‘노동’과 ‘근로’ – 말 하나 어찌 쓸까로 여전히 다투고 있다. 새삼스럽지 않은 오랜 다툼이다.

그런 다툼을 일찌감치 세계 노동자의 날인 May Day를 버리고 9월 첫 월요일을 Labor Day로 정리한 미국은 영악스럽다 할까?

아무려나 부지런히 일한다는 근로 보다야 먹고 살기 위해 들여야만하는 정신적 육체적 노력으로써의 노동이 썩 적합하지 않겠나? 그래야만 ‘쉼’의 뜻이 깊어지는 법. 그게 성서가 쓰여진 까닭이기도 할 터이고.

어찌 부르고, 어떤 날을 기념하던 앞서 고민했던 이들 덕에 연휴를 즐겼다.0903171913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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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친구들과 밤바람 맞으며 맛난 것으로 배를 채우고, 그저 일상의 이야기로 편안함을 나누며 쉼을 만끽했다. 때로 쉼에 있어 아내의 흥은 필요충분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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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아들 내외는 홀로이신 제 외할버지와 잠시 시간을 함께 했노라 했고, 예비사위는 딸아이를 위해 깜작쇼를 펼치며 즐겁게 했노라는 소식을 전해 왔다.

연휴 쉼을 정리하는 시간, 알량한 찹쌀떡과 아이들의 대견한 소식으로 노부모와 장인에게 건강하심에 감사를 드리며…. 아직은 노동이 필요한 내일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