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에

일요일 아침, 사진에 글을 얹어  가게손님인 이웃들에게 편지를 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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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 며칠 동안은. 봄이 어느새 가고 벌써 여름이 온 듯이 날이 더웠습니다. 엄마와 함께  prom dress를 고치려고 가게를 찾는 10대들을 보면 아직은 봄이지만, 졸업 가운을 다려 달라고 찾아오는 20대들을 보면 어느덧 여름 같았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사계절을 나누어 말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봄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5월 6일 오후 9시에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된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봄의 첫날이니 여름의 첫날이라는 말들을 쓰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딱 그 날짜에 정확한 선을 그어 계절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봄인지 알았는데 어느새 여름이네, 여름인지 알았는데 어느새 가을이 되었네 하는 말들을 쓰는 것이지요.

봄과 여름 사이에 어떤 시간들이, 어떤 느낌들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 것은 지난 목요일 더운 날 오후였답니다.

보일러 스팀을 사용하는 세탁소 사정상 여름 더위는 제 직업이 주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랍니다. 해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그해 첫번째 오는 더위는 몸을 몹시 피곤하게 한답니다. 아직 몸이 적응되기 전에 찾아온 더위 때문이지요. 그런 날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꼼짝하기가 싫답니다.

그날도 지쳐 집으로 돌아왔는데 뜰에 핀 꽃들이 제 피로를 덜어주었답니다. 만개한 봄꽃과 이제 막 꽃잎을 피우는 여름 꽃을 보며 제 머리 속에 떠오른 말이 ‘봄과 여름 사이’였답니다. 특별히 ‘사이’라는 말이 오랫동안 제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답니다. 그날 제가 사진으로 찍은 ‘봄과 여름 사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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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뿐만 아니라 많은 일들, 특히 사람 사이의 관계 등은 딱 금으로 그어 나눌 수 없는 어떤 ‘사이’들이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 것이랍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떤 하모니가 이루어진다면 봄이나 여름처럼 홀로 이름 불리우는 시간보다 더욱 아름답고 귀한 순간들이 될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덤으로 올들어 처음으로 더웠던 그날에 대한 감사를 느낄 수도 있었답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입니다. 자연과 이웃들 사이에 하모니가 잘 이루어져 아름답고 귀한 시간들을 만끽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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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few days in the last week were hot as if spring had passed already and summer has come. When I saw teenagers come to alter their prom dresses with their mothers, I thought that it was spring. But, when I was asked to press graduation gowns by youngsters in their twenties, I asked myself whether it was already summer.

Though we identify four seasons, spring, summer, fall and winter, we don’t say that spring is exactly from such day to such day. For example, nobody would say that spring ends and summer begins at 9:00 pm, May 6.

Sure, we use the words like the first day of spring or the first day of summer, but it is not like people feel the season at those dates. That’s why we say that it is already summer, though I’ve thought that it is spring, or that autumn is already in the air, I’ve thought that it is summer.

It was hot in the afternoon last Thursday when I thought that a certain time and feeling might be there between spring and summer.

Summer heat is one of the difficulties to cleaners like me, as I have to use steam from a boiler. While I feel it every year, the first heat wave of the year always makes me utterly exhausted. That’s because the heat has come before my body gets adjusted to hot weather. On such days, I don’t want to move an inch after I return home after work.

Last Thursday, I felt exhausted when I came back home. But, flowers in the yard relieved my fatigue. While I was watching full-blown spring flowers and buds of summer flowers, the words, “a gap between spring and summer,” came to my mind. Especially, the word, “a gap between,” stayed long in my mind. These are the pictures that I took at that time, “a gap between spring and summer.”

I’ve wondered whether there might be gaps not just between seasons, but also between many things and incidents, and human relations.

And, I wondered that if there is nice harmony in the gaps, a gap of time between spring and summer might become even more beautiful and precious than spring or summer itself. In that way of thinking, I could feel gratitude on that day when it was hot for the first time this year.

It is May, the queen of seasons, now. I wish that all of you will enjoy a beautiful and precious time as there is nice harmony with nature and neighbors.

From your cleaners.

옛 생각 하나

동네 사람들 누군가가 나를 또라이로 더러는 빨갱이 또는 전라도(이 세 마디가 서로 등치 되는 세상이 정말 웃긴다만)라고들 수근거린다는 소리가 내 귀에 꽂혔을 때 나는 그저 웃었었다. 나는 부산 태생 서울 사람이고, 빨갱이가 될 수 없는 예수쟁이이며 정신상태가 지극히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동포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내가 발행하는 신문은 남쪽으로는 워싱톤 DC, 볼티모어, 북으로는 필라델피아와 뉴욕 지역 한인 동포들에게 배포되었다. 그 무렵은 북한의 제 일차 핵실험이 있었고, 기대했던 6자 회담이 유명무실해 지던 때였다.

나는 한국계 미국시민으로 동포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했다. 특히 동포 신문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있었다. 생각의 끝은 간단했다. 바로 만남과 대화였다. 서로를 이해하는 길을 찾아보자는 생각이었다. 결론에 이르자 나는 조금은 무모해 보이는 일에 도전했었다.

무모해 보인다 하였지만 따져보면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미국 상하원 의원들 가운데 이른바 지한파 의원 몇몇과 미국에 나와있는 남북한 정부 대표들과 동포사회가 한자리에 모여 한반도의 평화를 주제로 이야기해보는 일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아 보였다.

다행히 내 거주지 출신 Joe Biden이 당시 상원 외교위원장 이었는데 그와 안면도 있었거니와 그의 보좌관들 중에는 북한에 정통한 이들이 있어 그들의 도움을 받고, 우리 동네 부지사를 지낸 중국계 우씨가 워싱톤 정가의 마당발이어서 그의 도움도 받을 수도 있었다.

워싱톤 주재 한국 대사관에는 몇 갈래의 연이 있었고, 안 풀리면 한국정부에 직접 연을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문제는 북쪽이었다. 나는 미국내 통일운동가들과 북쪽과 가까운 인사들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나는 워싱턴과 뉴욕을 분주히 돌아 다녔다. 멀리 서부 LA쪽 인사들과의 연도 동원했었다.

내 제안에 대해 미 상하의원 몇 명이 동조해 주었고, 워싱톤 주재 대사관 쪽도 북쪽이 나선다면 주미대사가 나설 수 있다는 응답을 받았다.

분주히 유엔 주재 북한대사관의 문을 두드린 결과 나는 북쪽 대사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그에게 나의 계획과 제안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미 의회 쪽 인사들과 남쪽 대사관 입장을 전했다.

그는 일주일 정도의 말미를 달라는 요구과 함께 이런 말을 내게 남겼었다. “김선생, 우리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의 전화를 받았다. 몇차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그가 말했다. “김선생, 우리 사회주의 국가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내 무모한 꿈은 헛되게 끝났었다.

다만 주미 한국 대사와 몇 차례 북한을 방문했던 Biden의 보좌관과 동포들과의 만남으로 그 헛된 꿈을 조금 달랠 수 있었지만.

2018년 남북정상회담 소식과 함께 숱한 뉴스들과 해설들을 보고 들으며 하루 해를 보내다가 문득 떠오른 십 수년 전 내 경험이다.

그렇다. 문제는 정상(頂上)들과의 만남과 회담, 서약과 선언이 아니다. 민(民)과 민(民) 서로간의 이해가 문제이며 먼저이다.

인민 또는 시민, 민중 또는 씨알이 먼저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의식)이 우선이다.

내 귀에 더는 또라이, 빨갱이, 전라도라는 동네 사람들의 말이 들리지는 않는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잊힌 사람이 된 탓이겠지만 내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기도

주일 아침 기도처럼 이 땅에 함께 사는 이웃들에게 편지를 띄우다.


어제는 제 어머니의 92회 생신이었습니다. 93세로 나이가 제일 많으신 제 아버지부터 지난해 태어난 어머니의 증손녀까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보행기 없이는 걷기 힘드신 아버지는 한국전 참전용사입니다. 그 전쟁에서 수류탄 파편이 다리에 박힌 채 평생을 살아오셨습니다. 이제는 홀로 사시는 장인 역시 한국전 참전용사입니다. 장인은 전쟁 당시 KATUSA라고 미군에 배속된 한국군이었습니다. 이젠 은퇴한 노인이 된 매형은 월남전 참전용사입니다.(모두 한국군으로 전쟁에 참여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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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함께 모여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족의 중심축인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한 것이지요. 많은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던 중 지난 주에 있었던 남한의 대통령 문재인과 북한의 리더인 김정은 두 정상의 회담이 화제에 올랐답니다.

저는 문재인 대통령과 학교는 다르지만 같은 해 대학에 입학을 했었고, 당시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로 인해 학교에서 제적 당하고, 구속되었다가 군대에 강제 징집되는 같은 경험을 했답니다. 물론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랍니다. 당시엔 그런 젊은이들이 많았답니다.

미공군에 다녀온 제 아들과 북의 김정은은 같은 나이 또래 랍니다.

북한이 고향이었던 장모는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평생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두 해 전에 돌아가셔 Kirkwood highway 선상에 있는 묘지에 누워 계시답니다.

남북의 정상들은 이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전쟁을 끝내고 평화로운 시대로 나가자고 선언을 했습니다만 그 일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많은 난관들을 풀어 나가야 합니다. 그 중 하나이자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곧 다가올 북의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남입니다.

어머님의 생신에 함께 모인 가족들이 바라본 남북정상의 회담에 대한 생각들은 서로 같지는 않았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는 모두가 같은 의견이었답니다. 바로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는 같았습니다.

비단 한반도 뿐만 아니라 사람사는 세상 어디나 평화가 넘치는 세상이면 좋겠다는 바램이었답니다.

참 좋은 4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입니다. 평화로운 하루, 평화로운 한 주간, 한 달, 한 해 온 삶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마지막 순서로 평화를 소원하는 영상쇼 상영이 있었답니다. 그 영상쇼를 당신과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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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terday was my mother’s 92nd birthday. From my father, who is 93 years old, the oldest, to a great-granddaughter, who was born last year, all the family members gathered together and celebrated my mother’s birthday.

My father, who has difficulty in walking without a walker, is a Korean War veteran. He has been living with shrapnel lodged in his leg from a grenade during the war. My father-in-law, who is widowed, is also a Korean War veteran. During the war, he was a member of KATUSA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 which consisted of Korean soldiers who augmented US forces. My brother-in-law, who is retired now, is a Vietnam War veteran. (All of them served in the wars as Korean soldiers.)

All of them gathered together to celebrate my mother’s birthday. She is still the central axis in the family. While we talked about many things, the South-North Korean summit between South Korean President Moon Jae-In and North Korean leader Kim Jong Un, which was held last week, came up in conversation.

Although the universities were different, I entered the university the same year in which President Moon did. While I was in college, I participated in student demonstrations against the late President Park’s dictatorship. For that reason, I was expelled from the university, was placed under arrest, and was conscripted into the army. Though President Moon had a similar experience, I don’t know him personally. In fact, quite a few young people in those days had a similar experience.

North Korean leader Kim is the same age as my son, who served in the US Air Force.

My mother-in-law, whose hometown was in North Korea, passed away two years ago and was placed in the cemetery on Kirkwood Highway without attaining her life-long dream of visiting her hometown once.

Though the leaders of South and North Korea announced their agreement, which commits the two countries to the complet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and continuing talks to bring a formal peace treaty ending the Korean War, there may be many hurdles to overcome, I think. One of them, and the most important event, may be the meeting between President Trump and North Korean leader Kim which will be held in the near future.

All the family members at my mother’s birthday party didn’t have the same views and thoughts about the South-North Korean summit. However, all of them agreed on one thing which was the hope of peace in the Korean Peninsula.

It was the hope of peace, not just in the Korean Peninsula, but also everywhere in the world.

It is a really pleasant morning on the last Sunday in April. I wish that you will have a peaceful day, a peaceful week, month, year, and life.

From your cleaners.

*** The last segment of this South-North Korean summit was the performance to express the wish for peace. I’d like to share it with you.

만남

주말 오후, 친구 부부와 우리 내외가 함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펜실베니아  Swarthmore 마을의 소극장에서 락오페라 Jesus Christ Superstar를 보았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이젠 틈나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며 살아보자는 배포가 맞는 친구의 생각이었다.

Swarthmore는 인구 6천을 조금 웃도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 있는 소극장 Players Club of Swarthmore는 107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비교적 한적한 주택가 마을에 위치한 소극장은 마치 초등학교 강당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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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입구 제법 너른 로비에는 107년의 역사를 말해주는 게시물들이 벽을 채우고 있었는데, 음료수와 간식들을 파는 매대는 아이들 소꿉놀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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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입구에서 표를 받고 안내하는 이들을 보니 나는 아직 시퍼런 청춘이었는데, 내 나이는 300여석의 공연장을 거의 매운 관객들의 평균 연령 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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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에 각종 안내를 하는 사내도 내 또래였는데, 그가 소극장 클럽 멤버들을 위한 안내를 한다면서 멤버들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니 객석의 약 1/3정도가 손을 들던 것이었다. 소극장을 위해 연회비를 내거나 기부하는 멤버들의 연령 역시 대부분 내 나이 또래 중늙은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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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시작되고, 오페라에 무지한 내 눈과 귀의 수준으로 보면 배우들의 연기와 음악성은 놀랄만큼 대단했다.

내 무지함 탓이 우선이지만 이따금 내가 공연에 매몰되지 못했던 까닭은 바로 내 앞자리에 앉아있는 아이 때문이었다. 옆자리 제 엄마와 함께 공연을 보고 있던 아이는 덩치가 제법 큰 십대 나이 즈음의 정신 신체 장애아였다.

무거운 음악이 흐르거나 노래가 고음으로 불려지거나 조명이 갑자기 어두어지거나 하면 아이는 몸을 뒤틀며 제 앞자리나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찌르거나 머리를 만지거나 하곤 했는데, 그럴 때 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꼭 끼어 안고는 했었다. 그런 모자의 모습이 무대를 향한 내 시선을 뺏곤 하였다.

사실 내가 그보다 더 놀라운 시선을 보낸 관객들은 따로 있었다. 중간 휴식 시간이었는데 스물 언저리 처자를 양쪽에서 붙들고 걷는 중년 부부, 아마 가족일 듯한 일행이 그들이었다. 처자는 앞을 못보는 소경이었다.

아이들 소꿉장난 같던 로비의 매대는 중간 휴식이 되자 제법 붐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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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hrist Superstar의 극 내용은 익히 아는 것이었고, 내 젊은 시절 70년대의 파격적인 예수나 유다의 해석이 오늘날에야 전혀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나는 어제 그 자리에서 새롭게 예수를 만났었다.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을 향한 이어지는 박수 소리도 끝나고 객석의 관중들이 일어난 후의 일이었다. 내 앞자리에 앉아있던 지체아에게 시달림(?)을 받았던 주변의 사람들은 너나할 것도 없이 아이와 엄마에게 인사를 건네던 것이었다. “연극 잘 보았니?”, “재밌었니?”하며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 엄마에겐 따듯한 눈길을 보내며 한두 마디 씩 인사를 건넸는데 그게 결코 건성이 아니었다.

어쩜 예수를 재해석하고 만나 얼싸 안는 일이란 무대 위에서가  아니라 객석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나는 모처럼 문화인 흉내를 내보았다.

세월

봄이라고 벌써 반바지에 반팔 차림으로 가게를 드나드는 젊은이들도 있다만 어느새 노년 할인을 받게 된 나는 아직도 겨울 점퍼를 걸치고 있다.

해는 이미 길어져 일 끝내고 돌아와도 한낮이다.

“얘야, 아직도 추운가 보다. 바람 소리가 맵구나!” 전화 속 목소리만은 아직도 정정하신 아흔 둘 내 어머니가 들으신 그 매운 바람에 뒷뜰 개나리, 이웃집 자목련 꽃잎들이 떨어져 날린다.

앞뜰 나이 오래 된 나무가 내민 꽃망울이 내게 말을 건넨다. “이 사람아, 봄은 이제 시작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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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는 한반도 종전(終戰) 운운하는 소식을 전하는데… 그것도 종잡을 수 없는 바람같은 Trump가 “They do have my blessing to discuss the end of the war”라고…

고목에 피는 꽃은 봄기운 때문이 아니라, 세월을 이겨낸 나무 스스로의 오랜 염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일상(日常)이 아닌 일에 대하여

이따금 엉뚱한 실수를 저지른 뒤 내 나이 탓을 하곤 하지만, 따져보면 그게 딱히 내 나이 탓만이 아니다.

어젯 일만해도 그렇다. 차 열쇠 두개를 모두 차안에 두곤 그만 문을 잠그고 말았었다. 이건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었다. 평소엔 차에서 내린 뒤 차 열쇠에 달린 자동 버튼으로 차문을 닫곤 하는데, 보조 열쇠까지 모두 차안에 두고는 차문에 달린 잠금 버튼을 누르고 차문을 닫아 버렸던 것이다.

세월호 사주기를 맞아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행사에 참여하려고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랬다. 이건 내 나이 탓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단지 일상적이지 않은 일을 만나면 덤벙대는 오랜 내 습성 때문이었다.

세월호 행사 – 솔직히 내겐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세월호만 하여도 그렇다. 나는 물론 이거니와 내 일가 친척 모두를 따져보아도 그 일과 연관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더더군다나 나는 그 땅을 떠나 산 지도 한 세대의 세월이 지났다. 내 일상 속으로 스며들 그 어떤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일상적이지 않은 일에 할 수만 있으면 함께 하려고 애쓰곤 한다. 그러다보면 허둥거리기 일쑤이다. 어제 주차장에서 벌어졌던 실수는 어쩜 당연히 일어 날 수 있는 일이었던 셈이다.

덕분에 나는 행사에 거의 함께 하지 못했다. 서비스 맨을 부르고 기다리느냐고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내 차문을 열었을 때 행사는 이미 끝 무렵이었다.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행사에 참여했던 유일한 벽안(碧眼)의 사내가 한 말이란다. “세월호 사건은 한국인들만이 기억하고 되새길 사건이 아니다. 안전한 사회를 갈망하는 우리 미국인들 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이 기려야 할 사건이다.”라고.

나는 믿는다. 역사의 발전 또는 문화의 발전이란 내 가족, 내 친족과 친구, 내 편을 벗어나 더 넓은 범위이 이웃들,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 나아가 내 편이 아닌 저 편의 누군가일지라도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공감대를 확장 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되새기며, 원인을 규명하고 한을 풀어 주는 일은 문명으로 나가는 길이며, 역사의 발전을 이루는 일인 동시에 내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로 다가가는 일이다. 또한 내 개인적으로는 야만을 벗는 일이다.

비록 내겐 일상적이지도 않고, 차 열쇠를 안에 두고 문을 잠그는 우를 범할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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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오후

뜰에 봄이 가득한 토요일 오후, 지붕을 범하려는 꽃나무 가지를 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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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줄 노트.

<그저 바라만 보아라. 이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저 보이는 게 찍힐 뿐이다. 카메라는 그저 파인더 안에 보이는 사물의 표면에 반사된 빛을 기록할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   필립 퍼키스 (Philip Perkis)의 사진 강의 노트(Teaching Photography)에서

 

 

다시 부활에

유난히 더디 오는 봄입니다. 올핸 봄꽃 보다 먼저 부활절을 맞습니다. 부활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입니다. 예수와 부활과 봄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함께 생각해 보는 말들입니다.

하여 성서를 펴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 마가복음 1장 14-15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 마가복음 16장 6 – 7

예수 이야기가 시작된 첫 장소가 갈릴리였고, 이야기를 맺는 장소 역시 갈릴리라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물위를 걷고, 거친 풍랑을 잠재우고,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숱한 가적과 치유의 역사를 만들어 냈던 곳이 바로 갈릴리였다고 기록자 마가는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못박혀 죽고, 무덤에 머물다 부활한 예수는 다시 갈릴리로 갔다고 기록한 것도 마가입니다.

갈릴리 – 그 땅에서 예수는 나병환자를 고치고,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고, 귀신들린 자의 정신을 바르게 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유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예수는 병 고침을 받은 이들을 향해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명령했다고 마가는 이야기합니다.

이런 예수의 명령을 <가족(사회)에게로 돌아가라는 귀환명령>이라고 규정한 사람은 일본 신학자 아라이 사사구(荒井献, 그의 책 ‘예수의 행태’에서) 입니다.

예수 당시 병든 자들은 죄인이요,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죄가 있어 죄인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외로운 처지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죄 없는 죄인이요, 원치 않은 소외였기에 한맺힌 이들이었습니다. 예수의 귀환명령은 바로 한 맺힌 이들에게 한을 풀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예수의 명령에 따라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성서는 귀환 이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전해지는 당시의 관습이나 체제로 미루어 귀환 이후 그들의 삶은 여전히 곤고 하였을 것입니다. 가족과 이웃들은 여전히 그들을 비정상적이었던 사람으로 취급 하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을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이 나옵니다. 예수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고 가족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여인이 돌아간 곳에는 여전히 손에 돌멩이를 들고 아무 때나 그들이 맘만 먹으면 던질 수 있는 이들이 넘쳐 났을 것입니다.

바로 부활한 예수가 먼저 가 있는 곳, 갈릴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2018년 오늘, 예수가 먼저 와 있는 곳 내가 발 딛고 사는 여기의 모습입니다.

소외된 이들, 한 맺힌 이들이 사람 본래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현장에서 오늘도 함께한다는 예수의 선언 – 바로 부활입니다.

이 봄에 필라델피아  Schuylkill 강변을 함께 걷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예수가 먼저 와 걷고 있던 갈릴리를 떠올려 보는 까닭 역시 바로 그 부활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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